제2장;에너지의 위기와 대안목 차ⅰ.서론ⅱ.본론1>인류문명사의 에너지2>에너지의 위기3>에너지의 위기에 대한 방안ⅲ.결론ⅰ서론인류의 문명사회에서 지난 수 백년간의 물질적, 기술적 발전의 결과 총체적인 국면의 전환을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업화 및 도시화가 가져다준 많은 결실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류는 환경문제, 빈부의 격차문제 및 국가 간 불평등의 문제 등으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불균형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현대사회의 많은 문제 중에서도 에너지에 관련한 환경문제, 경제적 부담, 비민주적 기술독점주의 등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에너지는 에너지 자체의 수요공급의 기능적 문제를 넘어 어떤 성격의 에너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및 문화적 속성을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아직까지 원주민들은 전기조차도 통하지 않는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불이 주 에너지이다. 반면, 선진국들은 전기 세대를 넘어 화석연료, 원자력 등을 이용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전체적으로 큰 차이를 불러 올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에너지 사용에 따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하지만, 한계성이 있는 석유, 석탄 등의 화석연료와 원자력을 위주로 하여 에너지원을 계속 사용하려고 한다면 에너지 부족으로 인해 더 많은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다.ⅱ.본론1>인류문명사의 에너지-불(제1의 에너지)프로메테우스, 인류가 가진 최초의 에너지만 들어도 불이라는 단어가 쉽게 연상된다. 불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 수 있는 단위라고도 할 수 있다.불의 연소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궁금증을 가졌는데 첫 번째로 주장한 사람은 슈탈이라는 인물이다. 연소의 직접적 원인을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라고 주장하며 이 물질만 찾으면 새로운 물질로 복원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반박하여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은 연소 과정 중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에 타는 물체가 공기를 흡수하고 또 공기를 필요로 한다는 가설을 발표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이에 계속되는 연구로 인해 물의 전기분해까지 밝힐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에너지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불은 에너지다란 표현을 과학적인 용어로 풀이하기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에너지의 기준은 질량, 길이, 시간이었는데 여기서 온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 온도 역시 에너지를 하나의 기본적 기준으로 인정하여 자리를 잡게 되었다.-전기(제2의 에너지)제2의 에너지라고는 하지만, 전기는 우리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잡았다. 전기에 관심이 많았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천둥이 전기적인것임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피뢰침을 발명하였다. 또한, 그는 소나기구름의 전하를 라이덴병에 모아서 전기가 기전기에서 생긴 전기와 동일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발명하였다.이 뒤를 이어 갈바니는 우연한 계기로 동물의 몸 자체에 전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동물 전기라 칭하였다. 하지만, 이 주장은 알레산드로 볼타에 의해 반박당하였는데, 동물 전기 현상은 실제로 전기 때문이 아닌 서로 다른 금속의 접촉으로 인해 발생한 전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적인 연구로 볼타는 전지의 원리도 알아냈으며 접촉 전기도 만들어냈다. 볼타전지는 여러 이점들이 있었지만, 전기의 적은 양이 문제였다.이를 보완하기 위해 에른스트 베르너 지멘스는 이러한 전기의 양적 한계를 넘어서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자기 방식의 발전기를 개발하여 전차도 발명해 낼 수 있었다.그 후 20C에 들어와 획기적인 현상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초전도 현상으로써, 물리학자 헤이커 카메를링 오너스가 이를 발견해냈다. 초전도 현상이 발생하면 저항이 없기 때문에 전열기로는 사용할 수 없지만, 전류를 흘려보낼 때 에너지 손실이 없어 효과적이였다.-원자력(제3의 에너지)전기 이후에 석탄과 석유 같은 화학원료도 에너지원으로 쓰였지만, 인류문명사에 더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원자력이라고 할 수 있다.원자력은 사실 에너지원이라고 생각되기 이 전에 전쟁무기 또는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 등이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다. 실제로 원자력의 사용은 전쟁 수행을 위한 것이었고, 원자력의 개발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전쟁 때문이었다.원자력은 뢴트겐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그 후 자연 방사능이 발견되었고, 라듐이 차례대로 발견되었다. 라듐은 퀴리 부인에 의해 발견하게 되었는데 암 치료와 물리?화학의 실험용, 공업용으로 쓰이게 되었다.원자력은 매우 적지만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현대의 에너지이다. 인류는 항상 불과 에너지에 관해서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매일의 에너지 자원에 대한 고갈의 두려움도 같이 가지고 있다.원자력의 이용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의 원자 폭탄은 인류에게 공포심과 불안을 안겨주기도 했다.현재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소는 총 20기이며, 앞으로 더 생겨날 예정이다.2>에너지의 위기현대 인류는 현재 에너지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산업화혁명이 일어났을 때, 주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뀐 것처럼 또 다른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화석연료는 아직 고갈의 문제가 눈앞에 당장 닥친 일은 아니지만 언제 고갈될지 모르며, 화석연료 사용에 의해 발생되는 기후변화 등 지구환경문제가 항상 문제가 되고 있다.하나의 예로 들자면, 현재 4월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가 더워졌다가 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심지어 눈도 내리기도 했다.대기관련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최근 공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이산화탄소로 가장 큰 문제는 지구의 평균온도를 상승시키는 것인데, 이로 인해 가뭄, 장마, 폭설, 한발 등의 이상기후를 가져왔다.또한 적도지역의 대규모 사막화 현상이나, 곤충 번식기의 혼란 및 철새들의 서식지 감소 등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이 뿐만 아니라, 남극의 빙하가 대량으로 녹아 발생하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연안 국가들은 생존의 위기를 현재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이러한 문제들이 결국 인류 생존의 직결적 문제까지 가져온 것이다.원자력이 제3의 에너지라고는 하지만, 현재 세계적인 추세로는 석유가 에너지체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통, 산업 등 모든 국가에서 석유가 없었다면 이처럼 많은 발전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사용한다면 현재의 위기에 뒤이어 인류문명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극단적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화석연료의 고갈이든 환경재앙이든 두 가지 문제 중 하나가 언제 닥쳐올지 모른다.현재 전세계 에너지의 대부분을 공급했던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의 매장량은 지금과 같은 추세로 소비한다면 100년 안에는 전부 다 사용할 것이다.물론 전세계적으로 석유나 석탄의 양은 많이 존재하고 있겠지만, 석유의 채굴비용이 매우 높아 비경제적인 이들 에너지원을 개발할 수 있다고 전망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고갈과 기후의 문제, 이 큰 두 가지 문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3>에너지의 위기에 대한 방안-에너지 효율 개선과 에너지 절약에너지 효율 개선과 에너지 절약을 위해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경제적으로나 환경 또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생 가능한 에너를 현실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대규모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산업은 현재까지 사용해 온 산업설비들을 폐기한다거나 가동 중지하지는 않더라도 점차 타업종으로 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앞으로는 저에너지 및 고효율의 산업 또는 에너지 사용량이 낮은 산업으로 바꾸어 가는 국가적 경제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이러한 방안들은 산업만이 아니라, 가정과 상업에서 먼저 지켜야 될 사항이라고 본다.최근 인간의 조건에서 화석연료로 이용해서 가는 자동차가 아닌 전기차와 수소차가 잠깐 나왔었다. 이러한 자동차를 개발하여 대규모로 보급한다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제5장;토머스 쿤의 과학혁명 구조목 차ⅰ.서론ⅱ.본론1>토머스 쿤의 일생2>쿤의 과학혁명 구조ⅲ.결론ⅰ.서론과학혁명의 구조의 저자 토머스 쿤은 과학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냈으며,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을 과거의 과학과 새로운 과학 사이에 합리적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공약불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토머스 쿤뿐만이 아니라 현재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기까지 많은 희생과 경험이 필요했다.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철학과 과학을 구분 짓는 잣대는 그 가름이 분명치 않았다. 근대 이전의 철학자는 곧 과학자였으며, 과학자는 곧 철학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는 만물이 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일식과 전기를 예언하고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만물은 수다라는 말을 남긴 피타고라스는 자신만의 학파를 형성할 만큼 수학에 대한 많은 지식체계를 쌓아올리고 윤회와 사후사상을 받아들이는 신비주의적인 철학자였다. 이 밖에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엠페도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의 위인이 있었다.근대로 들어오게 되면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주축이 되어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에 대한 철학적 이해는 자연과학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적 사실과 현상에 관한 철학적 명제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으로 베이컨은 자연과학의 방법으로서 귀납과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고안하고 정신의 존재와 신이 창조한 자연 세계의 존재를 각각 독립시켜 인식하였다.현대로 들어서면서 과학의 철학적 관심사의 주된 대상은 물리학에 있었다.가장 영향력이 컸었던 칼 포퍼도 있었지만, 토머스 쿤에 대해서 자세한 탐구를 해보려 한다.ⅱ.본론1>토머스 쿤의 일생쿤은 1922년 미국에서 태어나 그가 6살 때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겨, 쿤의 부모님은 아들을 학생의 독립심을 키우는 데 주력하던 혁신학교에 입학시켰다.이 후에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고, 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1940년부터 하버드 대학교는 2차 세계대전을 위한 전시동원 체계에 편입되었고, 과학자들이 대대적으로 전쟁연구에 투입되었다. 쿤은 학위를 받자마자 하버드의 라디오 연구소에서 레이더 방해전파연구에 투입되었는데 그에게 주어진 일은 레이더의 표준 공식들을 보완하는 이론적인 작업이었다. 또한, 영국으로 파견되어 폭격기의 효율을 연구하는 그룹에서 일을 했으며, 독일의 레이더 설비를 파악하기 위해 프랑스에 파견되기도 했다. 전쟁 종료 직전에 쿤은 미국으로 돌아와서 하버드의 물리학과 대학원에서 다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이 후에 코넌트라는 인물은 쿤을 자신의 조교로 고용해서 과학사 중심의 교재를 편집하려 했고, 특히 물리학을 쿤이 맡아주길 원했다. 쿤은 뉴턴의 역학이 과학을 모르는 대학생들이 다루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판단한 뒤에 갈릴레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갈릴레오와 그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의 차이를 분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읽기 시작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갈릴레오 연구를 읽어냈다.과학혁명의 구조 서문에는 바로 이 시기에 쿤이 한 가지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계시와도 같은 통찰력을 얻은 경험이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또한 쿤은 러셀, 필립 프랭크, 브리지먼 등의 저술을 읽으면서 과학 방법론 일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그는 점차 과학의 역사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인식에 기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1948년부터 1962년까지는 쿤이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서서히 굳히면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입장을 정리하던 시기였다. 당시 쿤의 연구는 주로 철학이 아닌 역사에 집중되었지만, 그 이유는 그가 역사를 충분히 알고 난 다음에 철학적인 주장을 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쿤은 코넌트의 추천에 의해서 펠로 협회의 주니어 펠로로 임명되었으며, 여기서 받는 펠로십 덕분에 다른 직장에 연연하지 않고 3년간 독서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이 후에 쿤은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해서 바슐라를, 매시 해시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는 일년 동안 세 편의 물리학, 수학 논문을 출판했으며, 내쉬와 코넌트의 강의를 물려받아서 교양과학을 가르쳤고, 이 후 아르스토텔레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역학의 발전이라는 과목을 만들어서 강의하기도 했다.쿤의 첫 과학사 연구는 영국의 화학자 로버트 보일에 대한 것이었다. 보일은 기체의 압력과 부피에 대한 보일의 법칙과 근대적 원소의 개념을 최초로 제시했으며 회의적 화학자와 같은 저술을 출판한 17C 근대 화학자였다. 그렇지만 보일은 마치 연금술사처럼 모든 물질이 서로 변환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보일은 금을 만들려고 노력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자신이 금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쿤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을 계승한 보일과 같은 입자론자들은 입자들의 이합집산이 원소들을 만들기 때문에 물질이 서로 변환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설명했다.또한 이 무렵 쿤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교재를 집필 중이었다. 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예가 과학의 비누적적인 발전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1956년 쿤은 버클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하버드에 있을 때 집필하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완성해서 1957년에 출판했다. 이 책은 여러모로 과학혁명의 구조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쿤이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 쓴 코페르니쿠스를 혁명적이자 동시에 전통적인 인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쿤에 의하면 코페르니쿠스는 1300년가량 지속되면서 문제점을 누적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체계를 공부하고 그 천문학에서 가르친 대로 천문학의 문제를 풀던 천문학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누적된 구체제의 문제점을 최초로 명확하게 인식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체계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 비해서 더 정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더 간단하지도 않았음을 강조했다.과학 이론의 선택은 이렇게 비합리적인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쿤의 핵심이었으며 이는 후에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기제를 예시하는 것이었다.하버드 대학교와 마찬가지로 버클리 대학교도 학생들에게 과학의 방법론, 특히 과학적 발견의 방법론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쿤은 버클리의 대학원생들에게 물리학의 역사에 나타난 원전들을 읽는 세미나 수업을 진행하면서 오랫동안 구상하던 과학혁명의 구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버클리와 스탠포드의 세미나에서 영감을 얻어 정상과학의 본질이 퍼즐 풀이라는 인식을 얻었고, 자신의 과학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찾아내는 대에도 성공했다. 이후 쿤의 집필은 빨라졌고, 과학혁명의 구조는 1962년에 시카고대학교 출판부에서 독립적으로 출판되었다.2>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 발전의 구조에 대한 책이다. 쿤에 의하면 과학은 패러다임이 정립된 정상과학과 이것이 바뀌는 과학혁명을 반복한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한 과학 분야가 그 분야의 토대가 되는 이론이나 연구를 가능케 하는 방법론, 그리고 의미 있는 문제의 총체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면 이 과학 분야가 정상과학 단계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정상과학 아래에서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퍼즐 풀이에 몰두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과학의 패러다임 내에서 풀리지 않는 변칙이 등장하고, 이 경우에 정상과학은 위기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위기가 지속되면서 기존의 패러다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과학혁명이 시작된다.패러다임은 과학자 사회에 풍부한 자원을 제공한다. 먼저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에게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는 방법을 주며, 어떤 문제가 중요한 문제인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또 패러다임은 표준적 방법에 의해 중요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확신을 주며 실험과 측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관찰과 기존의 이론이 일치하도록 실험과 이론의 정확성을 증진시키고,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도록 패러다임의 범위를 확장하며 패러다임을 명료하게 하는 수량적 법칙을 수립한다.이렇게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하고 측정값을 정교하게 하는 행위가 곧 쿤이 정상과학이라 지칭한 활동이다.쿤의 책이 출판되었을 무렵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역사학 방법론에 대한 논쟁이 한참이던 시기였다. 특히 과학철학자 헴플은 쿤보다 조금 전에 역사학이 포괄법칙과 같은 법칙을 발견하면서 발전된 과학의 단계로 상승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고, 이러한 주장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었다. 쿤의 과학혁명 구조가 출판된 이후 어떤 역사학자는 수사에 의존하는 지금의 역사학의 상태가 쿤이 얘기한 패러다임 이전 시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1970년에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 제2판을 내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던 패러다임을 보다 분명하게 정의했다. 여기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패러다임을 넓은 의미의 전문분야 행렬과 좁은 의미의 범례로 나눈 것이다. 전문분야 행렬은 기호적 일반화, 형이상학적 모형, 가치들, 그리고 범례 등으로 구성되어있고, 좁은 의미로는 과학자들이 해결하는 문제의 유형을 제공하는 범례가 바로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다비드 홀링거는 역사학자가 쿤의 과학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다. 그 중 첫 번째는 역사학자들이 다루는 집단에서 쿤이 분석한 과학자집단과 흡사한 특성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데에서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역사학자들이 쿤으로부터 배울 첫 번째 교훈은 다른 집단이나 공동체에 대해서 비슷하게 엄밀하고 분석적이고 구체적인 역사 연구를 수행해서 과학자 사회 말고 다른 집단도 과학혁명과 흡사한 발전 구조를 가지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문명과 현대사회]목 차Ⅰ.서론Ⅱ.본론ⅰ.생명연장의 시초ⅱ.미생물에 의한 생명연장ⅲ.과학기술에 의한 생명연장Ⅲ.결론생명연장에 대한 윤리적 문제들 및 대안Ⅰ.서론우리는 불로장생에 대한 꿈이 항상 있으며, 이것은 먼 과거부터 인간들이 바라던 것이기도 하다. 중국의 진시황은 막강한 권력을 영원히 누리고 싶어 불로장생 약초를 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의 명을 받은 사람들이 불로초를 찾아 한반도까지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결국 49세의 한창 나이에 죽긴 했지만, 그가 꿈꿨던 불로장생은 사실 시대와 장소를 초원해 보통 사람들도 바라는 꿈이기도 하다.몇 해 전부터 ‘100세 시대 프로젝트’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100세 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끝이 없다. 통계청 자료를 참고해서 보면, 우리나라는 2000년에는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으며, 앞으로 5년 뒤인 2018년에는 고령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다.의학계에서는 ‘100세 장수시대’가 그리 멀지 않았다고 예측할 정도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전 때문인데 즉, 우리가 나이가 먹어도 의료기술 때문에 수명이 연장되는 이유도 있다.과학기술과 철학의 만남이라는 책 속에는 생명연장을 위하여 사람들은 어떠한 노력을 해왔으며, 이에 따른 문제점이 무엇인가도 분명 살펴볼 이유가 있다.Ⅱ.본론ⅰ. 생명연장의 시초생명은 목숨도 의미하며 생체유기물질의 생산 혹은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특징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생리작용을 나열하고 이러한 생리작용을 지닌 대상 등으로 정의 내려질 수 있다.이처럼 생명이라는 개념은 여러 분야에서 혹은 다양한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지만,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완벽한 답은 없다. 그렇지만, 정의가 내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생명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다.먼 옛날에는 생명연장에 대해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이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신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무당을 통해 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후에 시간이 지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생명연장에 시초가 된 인물은 고대 서양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이다. 인체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4체액설을 주장하였으며, 네 가지 체액이 기능을 잘 이끌면 건강한 상태인 에우크라지에라 하였고, 반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면 디스크라지에라고 명명하였다.또한,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은 원래 스스로 병을 고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질병은 우리의 몸이 균형이 깨져있는 상태라 말하였다.히포크라테스 이후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은 서양의 실험생리학을 확립한 갈레노스이다. 갈레노스는 중세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오랜 시간동안 영향을 끼친 한 인물이다.갈레노스는 황제 아우렐리우스의 전속 의사로서, 프네우마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프네우마란, 피에 의해 운반된다고 생각한 미묘한 물질로 생명의 원리로서의 공기, 호흡, 정령을 뜻하는 말이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의 영향도 받아 4체액설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많은 의학서적과 철학서적을 저술하였다.해부학으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르네상스의 아버지라고 인정할 만큼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사체에 손을 대는 것이 금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정교함을 뽐낸다.중세유럽 시대에는 생명연장에 대한 발달이 상대적으로 느렸지만, 근대에 오며 의술 분야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이발사이자 외과의사인 앙브루아즈 파레는 근대 외과의학의 아버지라 불리 우는 인물이다. 그 때 당시에는 전쟁들이 많아 총상환자가 많았는데, 주로 소작법으로 치료를 하였다. 이 소작법은 불로 치료를 하는 것인데, 환자들이 환부가 항상 부어오르는 증세를 보이며 통증도 심했으며 위험한 치료법이라 생명이 위독해 지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파레는 지혈 방법인 결찰법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결찰법을 사용한 환자들은 많은 통증도 상처도 부어오르지 않았다. 또한, 파레는 인조 팔다리와 인조 코를 만들어냈으며 이 후에 왕실 외과장이 되었다.근대 역시 인체 해부는 엄격히 금지되어 왔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사형수의 시체 등을 몰래 훔쳐 해부한 베살리우스 또한 생명연장에 도움을 준 인물이다. 그래서 시체 도둑이란 별명도 생기게 되었다.근대 이후 의학발달에 크게 공헌한 인물은 근대생리학의 아버지인 윌리엄 하비로 그는 혈액순환의 원리를 밝혀냈다. 윌리엄 하비는 간단하면서 효과적인 방법으로 원리를 알아내어 현재까지도 그의 업적을 높이 사고 있다.ⅱ. 미생물에 의한 생명연장산업혁명의 결과로 공업이 발달하면서 동시에 의료기구 등 의학기술 또한 진보하게 되었다. 미생물을 확인할 수 있는 현미경이 등장하면서 세균과 질병 등에 대해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안토니 반 레벤후크가 바로 현미경을 만든 주인공이며 그는 렌즈의 배율을 200배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생명연장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해준 고마운 인물이다.또한, 전염병에 대한 연구도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른 예방 및 치료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현재에도 파스퇴르라고 하면 유산균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날 정도로 업적이 컸던 루이 파스퇴르는 저온살균법으로 유명하다. 그 당시 프랑스는 너무 빨리 쉬어버리는 포도주로 인해 손실을 많이 입고 있던 와중에 루이 파스퇴르는 발효액에 있는 박테리아가 그 원인임을 밝혀냈다. 일정 온도로 가열하면 포도주의 상태는 그대로이고, 박테리아의 독성만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는데 이것이 저온살균법이다. 저온살균법으로 인해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살지 않는 우유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루이 파스퇴르는 소 탄저병과 닭 콜레라의 원인을 밝히면서 동시에 면역의 원리도 알아냈다. 이 때문에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드는 데에 큰 업적을 세웠다.당시 독일의 세균학자인 로베르트 코흐도 탄저병을 일으키는 세균의 정체를 밝혀냈으며, 결핵의 병원균도 발견함으로 인해 전염병의 병원체는 세균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이 밖에도 콜레라균을 발견하였으며 투베르쿨린도 만들어 내어 그의 업적을 인정한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게 된다.마법의 탄환인 살바르산 606을 만들어 낸 파울 에를리히는 화학요법을 만들어낸 최초의 인물이다. 파울 에를리히 또한 메치니코프와 함께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했다.실수로 인해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 역시 생명연장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바이러스에 관한 연구를 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해 냈으며 페니실린으로 인해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하였다. 페니실린은 항생제로서 인간에게 치명적인 감염에서 벗어나게 해준 약품이다.19세기를 지나면서 외과수술 분야에서 큰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에테르와 클로로포름를 사용한 마취제의 개발로 인해 환자들의 통증을 없애주었기 때문이다. 무균처리법을 비롯하여 소독과 멸균기술이 발전함으로서 상처 부위의 염증 문제도 동시에 해결될 수 있었다.ⅲ. 과학기술에 의한 생명연장과학혁명과 기술혁명이 이끌어가게 된 시기인19세기 말에는 온갖 종루의 기술이 연속적이고 종합적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소비, 교육, 정치 그 밖의 사회 모든 영역을 전면적으로 변혁시킨 시대라 볼 수 있다. 이 시대 역시 생명연장에 대한 열망들이 많았는데, 급속한 과학기술의 영향으로 더 강한 힘을 가져올 수 있었다.이로 인한 결과로 뢴트겐은 인간의 뼛속을 관찰할 수 있는 Xㅡ선을 발명하게 되었다.무엇보다 심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이다.프로이트는 사람들의 무의식을 추적하고 탐구, 인간의 정신세계를 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나누는 등의 업적을 남겼고, 인간의 꿈을 무의식 세계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현대사목 차Ⅰ. 서론1. 이회영 선택 동기2. 우당 이회영3.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아나키스트Ⅱ. 본론1. 이회영의 출생과 성장2. 1900년대의 활동 - 헤이그 밀사 파견을 주도3. 1910년대의 활동 - 고종 황제의 망명 계획과 임시정부 수립의 반대4. 1920년대의 활동 - 아나키스트로서의 삶5. 서거까지의 그의 인생Ⅲ. 결론1. 현재의 이회영2. 이회영을 알고 난 후 느낀 점Ⅳ. 참고문헌Ⅰ. 서론1. 이회영 선택 동기중학생 때 한국근현대사를 배우다가 교재에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선생님께서 이회영이란 인물에 대해 말씀해 주셨던 기억이 있었다. 부유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조건을 뿌리치고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바쳐서 나라에 헌신한 인물이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그의 후손들에겐 대우는 커녕 대부분 가난하고 넉넉지 못한 삶을 살아가신다고 했다. 그 말씀이 내 기억 속에 계속 있었다. 이 내용이 이회영이라는 독립운동가에 대해 내가 알던 전부였고 이 과제를 통해 그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2. 우당 이회영이회영의 집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가 경주 이씨 백사공파 집안으로 선조인 이항복 이래 8대에 걸쳐서 연이어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조선조 최고의 명문이었다.이회영의 여섯 형제인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시영, 이호영은 일제의 조선침략을 막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1910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지자 나라의 녹을 먹었던 사람들로서, 조국의 몰락을 방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6형제 모두가 만주망명길에 오른다.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급히 팔아 마련한 돈이 현재의 돈으로 600억 원 가량이었다고 한다.만주로 떠난 이회영 일가는 가지고 간 재산으로 신흥무관학교라는 독립군 양성기관을 세워 수 천 명의 독립 운동가를 양성하였고, 자신들도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바치게 된다.국내에서 엄청난 재산과 부러울 것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던 형제들은, 중국의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0대조인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종성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 등 조선조에서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대표적인 사대부 집안이었다. 부친 이유승 역시 고종 대에 이조판서와 의정부 참찬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었다. 이러한 가계도를 간략히 훑어보아도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왕조 왕가와 긴밀했을 뿐 아니라 중앙 관직을 두루 거친 명문대가였다. 이회영은 6형제 중 넷째 아들로서, 위로는 세 형인 건영, 석영, 철영이 있었고, 아래로는 두 동생 시영과 호영을 두었다. 명문가의 자제로서 부귀와 명예가 있었으므로 당연히 관계로 나아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기득권층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이 6형제는 항상 같이 할 정도로 우애가 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제자는“선생의 집안은 6형제로 번성한 가족이었다. 형제 모두가 화합하고 즐거워하여 그 형제간의 우애가 마치 악기를 서로 맞춰 연주하듯 즐거웠고, 산앵두나무의 만개한 꽃과 같이 화사하였으니, 온 집안이 즐거운 기운이 가득 찼고 형제간의 우애의 소문이 온 서울시내에서 으뜸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회영은 부모와 형제간의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온 것 같다. 또한 이회영은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주변 사람들과도 좋았는데 1885년부터 이상설, 여준과 신흥사에서 합숙하며 수학·한문·영어·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독립협회가 펴낸 독립신문의 사설을 일고 독립운동에 힘쓰기로 뜻을 두었다.2. 1900년대의 활동 - 헤이그 밀사 파견을 주도우리나라는 1900년대에 들어서기 전에 일제에게 모진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병인양요를 시작으로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명성왕후의 시해 등 우리나라의 비참한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 이회영은“이러한 때에 우리 2천만 동포는 크게 깨닫고 일어나 국민의 지혜를 밝게 하고 정치는 쇄신해야 한다. 그래서 문화가 발전되고 풍기가 선명해져서 독립과 자유를 완전하게 하고했던 것이다. 하지만 헤이그 밀사사건은 구체적 성과를 이뤄내지 못했고,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회영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고 1908년에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이회영과 이상설은 재회하여 결정적 기회를 봐서 봉기하자는 계획을 세웠고, 네 가지의 운동방침도 정했다. 첫째, 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 교육을 장려할 것. 두 번째는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할 것. 세 번째, 비밀 결사체를 조직할 것.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운동자금을 준비할 것.) 이라고 세우고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기울이기로 결심하였다.3. 1910년대의 활동 - 고종 황제의 망명 계획과 임시정부 수립의 반대이회영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에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합방이 이루어져 이회영은 6형제를 포함한 가족모두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했다. 이에 가산과 전답을 다 처분하여 당시 화폐로 40만냥을 마련하여 60여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집단 망명하였다.“팔도에 있는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례차례 보냈다.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 우리 동지들은 서울서 오전 여덟 시에 떠나서 오후 아홉시에 신의주에 도착, 그 집에 몇 시간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가 철통같이 엄숙했지만, 새벽 세 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얼어붙은 강에서 사람을 태워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했다. 그러면 이동녕 씨의 매부인 이선구 씨가 마중 나와 처소로 간다.”)라고 그의 부인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다.또한 이회영의 인품이 보여 지는 부분으로, 망명한 사람 중에는 노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회영은 노비들도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망명 전부터 노비신분에서 해방시켜주었던 상태였다고 한다.이회영 일가는 서간도 유하현의 삼원보에 정착해 경학사를 설립하고 내무를 담당했다. 동삼성 총독을 만나 토지 매회영만은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이회영은 지난 6년 동안 국내에 잠입해 다양한 인사들과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국내의 인심, 특히 청년들의 정신에 뚜렷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보았고 이것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 이 말은, 고종 황제가 붕어한 이 시점에서 어느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모이고 단결을 꾀한다는 것이 이제 불가능하며 무의미한 것이라는 것을 느꼈는데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누구를 중심으로 뭉칠 것인가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회영과 제일 가깝다고 생각 되는 동생인 이시영, 친구인 이동녕마저도 어떤 사람을 중심으로 단체를 만들 것 인가를 고민하고 있어서 이회영은 탄식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만 해도 이회영은 아나키즘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 벌써 정부 형태보다는 각 조직이 협동 협력할 수 있는 독립운동본부 조직을 주장한 것은 그에게 선척적인 아나키스트 기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그들과 논쟁 끝에 다른 길을 걷기로 하였고, 결국 이회영은 동생과 이별한 채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4. 1920년대의 활동 -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이회영은 베이징 자금성 근처인 후고루원 소경창호동의 가옥 한 채를 빌려 살았는데 어느새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되었다.“국내나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신다는 분들은 쉴 사이 없이 집에 와 머물렀다. 그뿐인가.매일같이 10명, 20명, 혹은 30, 40명 정도 되는 분들이 점심과 석식을 하게 되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요 장구한 세월을 접대하게 되니 인력과 경비는 얼마나 들었을 것인가. 짐작만 하여도 어마어마하였다. ……모친을 위시하여 형수와 송동집 아중마가 있었는데 그 노력을 어찌 일일이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그 표현을 그의 아들인 이규창이 당시 상황을 말해주었다.그 와중에 이회영은 김창숙과 신채호와 친해지게 되었고, 이회영은 성품이 온후하여 늘 고집부리는 두 사람의 이견을 조율하는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지기를 못 만나 한이더니, 이제는 참다운 동지를 만났다 하시며 기뻐하시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홀연히 깨니 남가일몽이라. 곰곰 몽중에 하시던 말씀을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이 오려나 하였더니, 그날 오정쯤 해서 이을규 씨 형제분과 백정기 씨, 정화암 씨 네 분이 오셨다.”)라고 전해주고 있다.이후에 이을규, 이정규 형제와 백정기 등과 함께 숙식하며 조직문제를 논의하고 정화암과 류자명과 만나 1924년 4월 20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이어 기관지 를 발간하였는데, 중앙집권적 공산주의와 독립운동 진영 내의 파벌 싸움을 모두 비판하고 독립운동의 이론을 제공하는 선전지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자금난으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휴간할 수밖에 없었다.1923년에는 김달하 암살 사건에 관여하였다가 아들이 규학이 상하이로 도피하였고 딸 규숙이 베이징 공안국에 잡혀있었으며 아들 규오와 두 손녀가 죽고 말았다. 이렇게 큰 위난을 겪고 있는 와중에 김창숙과 신채호에게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이회영의 부인이 찾아가 결백을 주장했고 그 두 사람은 오해를 풀고 사과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회영의 베이징에서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고 부인을 국내로 보내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쌀이 없어 종일 밥을 못 짓고 밤이 다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께서는 시장하실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셨는지 처량하게 퉁소를 부셨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저절로 난다며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시어머님도 안 계시는데 아버님 진지를 종일 못해드리니 얼마나 죄송한가 생각했다”)라며 이규창이 형수의 입을 빌려 그 때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회영은 김창숙과 내몽고 포두지방의 황무지를 개척해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을 세웠고, 영정문 안 관음사호동으로 이사를 갔다. 겨울쯤에 다물단에서 박용만을 암살하자, 또 다시 위난을 겪게 되었고, 톈진 프랑스 조계지인다.
한국개항전후사목 차Ⅰ. 서론1. 김개남 선택 동기2. 김개남 장군3. 동학농민운동Ⅱ. 본론1. 김개남의 출생과 주요한 업적2.창의문 선포와 고부점령3.백산 집결과 작전기지 확대4.전주화약체결5.집강소 통치6.제2차 농민전쟁의 전개와 우금치전투Ⅲ. 결론1. 현재의 김개남2. 김개남을 알고 난 후 느낀 점Ⅳ. 참고문헌Ⅰ. 서론1. 김개남 선택 동기학교도서관에서 근대화에 힘써온 인물을 찾다가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책을 발견하였다. 서른 명의 인물들 중에서 읽다가 보니 김개남이라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고,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검색을 해봤다. 하지만 김개남에 대한 책은 한 권도 찾을 수가 없었고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은 짧은 장수를 차지하는 인물 소개뿐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져 김개남이란 인물을 선택하게 되었다. 현재는 전봉준의 오른팔이라고도 알려졌지만, 이는 김개남에 대해 모르는 많은 분들의 얘기 일뿐이고, 전봉준의 그늘에 가려진 그의 업적과 평생 살아왔던 삶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선택하게 되었다. 또한 흔히 말할 때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말하는데, 동학농민전쟁이 맞는지 아니면 동학농민운동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2. 김개남 장군개남이란 이름은 동학입교 후에 호칭된 별호인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김개남은1853년 9월 15일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현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그가 태어났던 곳은 한때 전봉준이 살았던 곳으로 김개남의 출생지이며, 이웃 고을에는 최경선, 김덕명과 김개남의 종형인 김삼묵, 김문환 부자 등 동학의 중진 인물들이 주변에 있었던 곳이다.김개남은 강경파로 남원에서 금산, 무주, 진안, 용담, 장수를 비롯하여 전라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영남의 서남부지방까지 그 세를 떨쳤다. 그는 청주를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김개남은 태인 너듸마을의 매부인 서영기 집에 잠거해 있었는데 이웃 종송리 임병찬이 김종섭을 시켜 송두용 집으로 유인했다. 그것은 종송리는 회문산의 지맥으로 너듸마을 보구해 왔다. 난처하게 된 조선정부에서는 경위를 해명하고 그에 대한 처분을 할 것이니 불러들여 조사하는 것만은 재고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간신히 이를 모면했다는 얘기가 있다.3.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의 주체세력인 남접 5대 지도자로 일컬어지는 전봉준ㆍ김개남ㆍ손화중ㆍ최경선ㆍ김덕명은 사회신분으로는 향반으로 향촌에서 행세하려는 신분이었으며, 경제수준으로는 유랑지식인 또는 소작농민인 전봉준과, 신분으로 현직을 가졌던 조부모를 두고 중간지주의 범위를 벗어난 최경선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 중소지주 출신이었다.)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각지에서 여러 세력들이 참여하였다. 넓은 눈으로 봤을 때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두가 이 전쟁을 이끌었던 주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이전의 민란과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운동의 중심에서 민중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탁월한 전술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또한 이 다섯 명의 지도자들은 누구보다 봉건사회에 대한 변혁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봉건사회에 대하여 줄기차게 저항했던 1894년 농민전쟁의 중심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위에서도 말했듯이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말을 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인물은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명실상부한 농민군의 최고지도로서 기억되고 있으며, 그는 역사적 인물의 차원을 넘어 영웅으로서 칭송되고 있다. 또한, 현재까지도 우리들에게 그리고 현재 역사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육되고 있는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이미지는 온통 전봉준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도 될 듯싶다.그렇지만,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보다 풍부하게 그 당시의 역사를 머릿속에 심어주게 하기 위해서는 전봉준만이 아닌 다른 지도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1894년 농민전쟁의 3대 지도자로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꼽는다.) 이 가운데 손화중의 노선은 가장 온건하면서도 전봉준의 노선으로이나 낙안 군수로 지내고 있는 임병찬 등을 손꼽을 수 있었다.이것으로 추측해보면 그의 출신배경이 미천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앞으로 발생하게 될 도강 김씨들이 집단으로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지니고 있는 동원력과 리더십을 예측할 수 있다. 또한, 김개남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현실사회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김개남은 자연스럽게 동학에 입도하게 되었다. 그는 적어도 전봉준보다 먼저 동학에 들었고 도강 김씨의 자제들을 여기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김개남은 남접이 북접의 보은집회에 맞서 강경노선을 표방하고 벌였던 1893년 3월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원평 집회에 참여했다. 1894년 초 고부봉기 때까지만 해도 김개남은 주요지도자의 대열에 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무장에서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본격적인 농민전쟁이 벌어지고,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점령하며, 백산에 호남창의대장소가 정식 조직되는 과정에서 김개남은 농민군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이후에, 김개남은 동학의 태인 대접주로서 농민군의 총관령에 임명되어 제2인자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농민군이 손에 죽창을 들고 전면적인 봉기에 나섰을 때 이러한 농민군의 정서와 의지를 가장 원초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김개남이었다. 그는 언제나 타협과 후퇴를 모르는 강경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직선적이고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말 할 수 있다.)김개남은 1894년 전봉준이 고부민란을 일으키자 백산에 동학운동본부로 호남창의소를 설치했으며,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관령의 직책을 맡았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어서 전주화약 뒤 남원·나주·운봉 등에서 집강소 설치에 응하지 않자 3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단시일에 점령, 전라좌도를 관할하면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이러한 1차 봉기 시기까지 김개남은 전봉준, 손화중 등과 폐정척결, 보국안민이라는 목표를 위해 무장 항쟁이라는 일치된 활동을 벌였지만,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 보이자 전봉준은 남원으로 내려와 아직은 봉기하지 말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면서 집강소체제를 지속해갈 것을 김개남에게 요구하였지만, 김개남은 대중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전봉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렇지만, 이러한 노선차이는 일본의 조선내정간섭 강화로 인해서 재봉기의 방향으로 해소되었고, 한 달 동안 재봉기를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시키며 준비를 한 뒤 10월 12일부터 북상을 시작해 나아갔다.그런데 10월 북상 시 전봉준 부대는 공주로 진격했으나 김개남 부대는 청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김개남은 1만 병력을 동원하여 서울로 출정하는 도중 새로 부임하는 남원부사 이용헌과 고부군수 양필환을 체포해서 참수하였다. 계속하여 진잠현을 점령하고 신탄진을 거쳐 청주를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1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다시 김개남은 태인으로 돌아왔지만 체포되어 전주장대에서 참수당하고, 수급은 서울로 이송되어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져 효시되었다.)2.창의문 선포와 고부점령만석보 문제에 대한 고부 농민들의 평화적인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서 죽음을 당하자 김개남은 손화중을 찾아가 봉기를 논하기로 했다. 그리고 김개남은 전봉준에게 가서 제의하였지만, 전봉준이 거절하자 김개남은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재차 전봉준을 찾아가 4차 회동을 갖고 봉기를 하자고 했고, 전봉준도 봉기를 결심하게 되었다. 김개남은 전주, 고부, 정읍, 태인 등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여론을 규찰하였고, 이들은 김개남, 전봉준, 손화중 명의의 창의문을 전국에 반포하고 고부읍성을 함락시켰으며 조병갑은 고부읍내로 도주하였다.이때 동학교도가 약 7,000여 명에 일반 농민이 약 2,000여 명이었다 하니 실제 숫자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예측되어 진다. 이들은 조병갑이 백성들로부터 약탈한 백미 4,000여 석을 쌓아 놓은 백산으로 이동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농민군의 정렬을 가다듬었다.)3.백산 집결과 작전기지 확00여명을 장꾼으로 가장시켜 시내로 잠입하였다. 농민군은 포성을 신호로 성내와 서문과 남문에서 일제히 함성과 북, 꽹과리를 치면서 진격하여 일시에 전주감영을 대혼란 상황에 빠뜨렸다. 이미 그 전날에 관찰사 김문현과 판관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 상태였기에, 농민군은 경군이 빠져나간 전주성을 들이쳐 손쉽게 점령하고 전주성에 농민군의 깃발을 꽂았다. 김개남의 지략으로 전주성이 무혈 함락된 것이다.)열흘 동안 양군의 접전이 시작되면서 농민군은 어느덧 술렁이기 시작했고, 도망하는 자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전봉준은 전주성을 굳게 닫고 내부 단속을 하였으나 뾰족한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결국 홍계훈과 전봉준은 몇 차례를 통해 화약의 뜻을 적은 글을 서로 전해 받고, ‘귀화하는 자는 각 읍ㆍ각 면ㆍ각 리에 명령하여 해치지 않도록 할 것이다.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고 새 삶을 누리도록 하라’는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5.집강소 통치전주화약을 체결한 후에, 농민군 지도층 사이에서는 의견대립이 있었다. 전봉준, 최경선 등이 유전화약 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김개남, 김덕명 등은 휴전을 반대하고 계속 북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에는 뜻이 맞지 않자, 전봉준과 김개남은 각기의 역할을 맡게 된다.김개남은 장수ㆍ임실 일대를 순회한 반면 전봉준은 최경선을 수행원으로 하여 금구ㆍ김제ㆍ태안을 거쳐 장성ㆍ담양ㆍ순창ㆍ옥과ㆍ남원ㆍ창평ㆍ순천ㆍ운봉을 순회하였다. 다시 말해서 김개남은 일부 지역중심으로 순회하였으나 전봉준은 호남 전 지역을 순회한 것이다.집강소를 통한 권력투쟁의 양상을 띤 상태에서 3천 대군을 거느린 김개남은 남원성에 입성하여 탐관오리들을 징계하고 성을 증축하여 남원외각을 튼튼히 하며, 구례화엄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재차 농민운동을 위한 기병에 대비하였다.김개남은 남원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인근 금산, 무주, 장수, 용담, 임실을 총괄하는 대접주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김개남의 남원정치에 대한 기록은 상세히 남아 있지 않지만 남원을 기점으로 주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