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그 문을 연 Augustinus중세철학은 중세, 즉 4~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서부터 15, 16세기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시기까지를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중세의 약 천년을 두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은 라틴 교부 철학의 아우구스티누스이며 후반은 스콜라 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둘 중에 아우구스티누스를 택한 이유는 그가 모든 고대철학을 받아들여 해소시키고 새로운 중세철학을 탄생시켜준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아직 미숙하여 수업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해 더 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기원 후 354년에 오늘날의 알제리의 아나바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였으며 임종 때 겨우 세례를 받았으며 성질이 급했고 바람도 종종 피웠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 모니카가 아우구스티누스를 교육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세례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서도 여자애들이나 힐끗힐끗 쳐다보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의 학교 선생이란 회초리나 휘두르는 인물쯤으로 여겼으며 이후에 인근 도시 마다우라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습니다.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하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370년 집안의 사정이 나아지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인 재능을 보이자 아버지는 16살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사학을 배우게 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냅니다. 카르타고에서 그는 지금은 유실된 키케로의 글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크게 감동받고 철학에 심취하게 됩니다.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학창 시절이 대단히 서글픈 경험이었다고 회상하였다고 합니다. 모순되게도 당시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당하던 체벌은 체벌 본래의 목적과는 정반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즉 체벌쯤은 받아봤자 별건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는 학생들에게는 록 더욱 반사회적인 아이로 변해 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들에게 존경이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도 그의 말에 동감합니다. 중, 고등학교 때의 체벌은 단기적으로는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말썽을 피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학교와 선생, 학우들 사이의 불신만 높아질 뿐이었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19살에 권위보다 이성에 호소하는 마니교에 빠졌으며 꼬박 9년간 마니교도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많은 친구들을 마니교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천한 집안출신의 여자와 교제하여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을 몹시 아꼈습니다. 그러나 20대에 접어들면서 곧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회의를 느껴 잠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니교도 동료의 추천으로 타가스레,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 등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밀라노에서 처음으로 자기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기독교 지성인이자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를 만납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편견을 흔들어놓았습니다. 그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를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한동안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끝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386년 여름, 부활주일 날에 아들과 친구와 함께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세례를 받은 후 그는 신이나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첫째, 질서 정연한 세계는 지고의 신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본성은 창조주의 의도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최고신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간과 역사 내에서 활동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지식과 생명, 힘, 그리고 이 모든 선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물인 겸손을 주신다. 저는 첫째와 셋째의 의견엔 수긍이 갑니다만 둘째에 이견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우리가 창조주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의도에 부합하기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 바울로의 『로마서』를 읽게 된 사건이 회개의 계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13장 마지막 부분을 읽게 되었고, 거기서 성적인 방종함을 버리고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라는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Tolle, lege!(=집어 읽으라!)”라는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었노라고 쓰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문학적이고 수사학적인 표현인지는 논쟁거리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저도 제가 좋아하는 책들을 읽다가보면 누군가가 저에게 ‘신이 당신에게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셨다.’라는 말이 들리기도 합니다.어쨌든 이후에 로마에서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지내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악과 자유 의지의 기원에 관해서’『자유의지론』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자유 의지론 가운데 두 번째 부분은 신의 존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신의 문제를 인식론의 중심 문제로 다루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신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은 시간과 공간 내에서 궁극적인 행복이나 완전함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신의 존재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치면서 영원불변한 진리로서 보편자의 존재를 말하는 플라톤적인 논증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표는 다름 아니라 영원불변하고 필연적인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저도 분명 감각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힘들 때 기도를 한다거나 극한 상황에 도달할 때면 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감지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388년 늦가을, 어머니 모니카가 오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난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고향 타가스테에 정착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알피우스와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은거 생활 공동체를 만듭니다. 여기서 그는 영혼에 대한 물음과 일체에 대한 확실성에 대한 의심 등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391년 초, 북아프리카의 못 이겨 서제로 서품을 받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금욕적이고 영적인 이상향에 따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현실 교회를 정화하고자 했습니다.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에 헌신했던 그는 자신의 삶이 아프리카 교회 전체에 확산되기를 바라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니교에 대한 비판으로 도덕적 타당성의 문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윤리적 행위의 가치는 그러한 행동이 이루어진 동기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자면 부부간의 아름다운 성행위는 선하고 정당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안산 초등학생 성폭행 같은 악질 범죄는 잘못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우 예외적이고 드문 상황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자인 아들을 어머니가 숨겨주는 행위 같은 경우입니다.한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제 서품을 주었던 히포의 나이 든 주교는 다른 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데려다가 주교로 삼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는 누미디아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서둘러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히포의 보좌 주교로 앉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성가신 문제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려들어 의심받고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주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첫 해를 보내면서 대표작인 『고백록』을 집필했습니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은 왜 피조물을 창조했으며, 더 일찍 창조하지 않았으며, 창조하기로 결정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그는 시간과 창조는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수업시간에도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입니다. 그럼 도대체 신은 언제 창조되었나요? 다른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설교를 통해 기도란 신에게 무언가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그분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감언이설로 속이는 것도 아니라고 경고했습니다. 기도는 단지 우리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와 화해시키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의 의지와 목적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만 ~~하게 해주시면 꼭 ~ 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경고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도나투스파와 가톨릭 교회가 85년 동안 지속된 적대감과 불신에 지친 나머지 체념 상태에 들어가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그는 설득고하고 종교회의를 열어 공동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록』을 완성할 무렵 삼위일체의 교리와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이면서도 셋’이라는 개념은 어색한 표현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세 가지의 존재 양식이 있으며, 그 중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 위격 사이에는 상호 의존의 관계가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가 나뉘지 않는 완전한 단일성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일체는 낳는 자, 출생된 자, 나온 자라는 세 가지의 상이한 관점에서 볼 때에는 각각 위격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영원한 도시 로마가 410년 8월 24일 함락되었을 즈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열렬한 대작’『신국론』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문에 절대 반대하였습니다. 당시 고문은 형사 문제를 다룰 때에는 다반사로 일어났으며, 특히 반역죄에는 어김없이 자행되었습니다. 고문을 받게 되면 무고한 사람도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이들은 불구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도 군사정부 시절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직도 요직에 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적대감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간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필요한 때가 있다 하더라도, 전쟁은 인간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치러져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전쟁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성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다.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 시간과 공간의 문제인 시간지연, 길이수축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로렌츠 변환을 유도하여보고 마지막으로 민코프스키의 4차원 시공간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시간지연 (time dilation)]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현상을 다른 두 기준계에 빛시계를 이용해 알아보겠습니다. 예컨대 속도 v로 달리는 기차에서 간격이 d만큼 떨어진 거울 사이를 빛이 왕복운동하는 시간을 잽니다. 재는 방법은 기차의 벽에 거울을 붙이고 빛을 보내서 반사하여 되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다음 쪽의 그림 1에서 보듯이 빛이 빠르기 c로 거리 l만큼 갔다가 다시 돌아오니까요. 이것은 기차에 탄 사람이 잰 것인데 똑같은 상황을 지면에서 보면 기차가 움직이고 있으니까 빛이 그림 1처럼 갔다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림 2처럼 비스듬히 왔다 갔다 한 것이고, 따라서 빛이 갔다 온 거리가 2d보다 더 깁니다. 빛의 빠르기는 변하지 않으니까 결국 빛이 갔다 온 시간이 더 길어져야 할 것입니다.이것을 식을 이용하여 계산해보겠습니다. 그림1은 기차 안에서 A가 빛시계를 관찰한 것입니다. 그림2는 기차 밖에서 B가 빛시계를 관찰한 것입니다. 먼저 A의 관점에서 보면 빛시계의 주기는 2d/c입니다. 한편 B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옆의 그림에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하면 그림 2의 주기가 나올 것입니다. 그림 2의 주기를 tB로 놓겠습니다. 그러면 그림에서 PT사이의 거리는 ctB/2이고 PQ사이의 거리는vtB/2, TQ사이의 거리는 l입니다.여기에 피타고라스 정리를 하면가 됩니다.그리고 2d/c는 tA이므로 이 식은 게 됩니다. 그리고 감마인자는 정지한 기준계에 대해서는 1이고 움직이는 기준계에 대해서는 항상 1보다 큽니다. 그래서 tB>tA이므로 즉 움직이는 시계의 주기가 정지한 시계의 주기보다 더 길므로 움직이는 시계는 느리게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 늦춰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기차에 탄 사람한테는 1분이였던 시간이 밖에 있는 사람한테는 2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경험하는 속도는 광속에 비하여 매우 작으므로 그러면 τ=1이기 때문에 tB=tA가 되는 것입니다.길이수축길이수축도 시간지연과 비슷한 식이 성립합니다. 이번에도 시간지연과 마찬가지로 빛시계를 이용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두 기준계 A와 B의 바닥에 동일한 자가 평행한 방향으로 놓여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두 기준계는 서로 상대 속도 v로 자가 놓여있는 방향을 따라 움직입니다. 이럴 때 각 기준계 A와 B의 관찰자는 모두 상대방 즉, B와 A의 자가 다 지나가는데 정확히 각각 자신의 빛시계가 한번 똑딱하는 것을 관찰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시계의 주기 즉 고유 시간이 T0라고 할 깨 상대방의 자의 길이는 vT0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의 길이 L0를 측정해보겠습니다. 이것을 측정하기 위해 그림에 보인 것과 같이 움직이는 시계가 자의 한쪽 끝에서 출발한 시간과 다른 쪽 끝에 도착한 시간을 이용해야만합니다. 그런데 A의 기준계에 놓인 자를 B의 시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나가는데 B의 시계가 정확히 한번 똑딱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A가 보기에 B의 시계는 느리게 가므로 A가 관찰한 B의 시계가 한번 똑딱하는데 걸린 시간은 T= τT0입니다.따라서 B의 시계로 A가 측정한 A 기준계에 놓인 자의 길이는 L0는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막대의 길이는 고유 길이보다 1/τ배로 수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로렌츠 변화유도로렌츠 변화을 유도하기 위해 특수 상대론의 새로운 개념들에 대한 결과를 이용할 것입니다. 시간이 t=t'=0 일 때 A와 B 두 기준계의 원점이 일치하고 B 기준계는 A 기준계의 +x방향으로 A 기준계에 대해 속도 v로 등속도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A 기준계에서 시간이 t일 때 x좌표가 x에서 플래시가 번쩍였다고 하겠습니다. 플래시가 번쩍인 위치의 B 기준계 좌표를 A 기준계의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그림에서 플래시가 번쩍 일 때 B 기준계의 원점과 플래시가 번쩍인 위치 사이의 거리는 A 기준계에서 x-vt인데, 이 거리는 B 기분계가 A 기준계에 대해 운동하고 있으므로 길이 τ배만큼 수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B 기준계의 위치 x'는 A 기준계에서 본 거리 x-vt를 τ배 한 것과 같으므로 (1) x'=τ(x-vt)입니다.이번에는 이것을 B 기준계의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플래시가 B 기준계의 시간 t‘ 일 때 x축 좌표가 x'인 위치에서 플래시가 번쩍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순간에 A 기준계의 원점의 위치는 B 기준계의 좌표로 x'=-vt이고, 그러므로 플래시가 번쩍일 때 A 기준계의 원점과 플래시가 번쩍인 위치 사이의 거리는 x'+vt'입니다. 그런데 기준계 A는 기준계 B에 대해 운동하고 있으므로 이 거리는 길이가 τ배 만큼 수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A 기준계에서 본 위치 x는 B 기준계에서 본 거리 x'+vt'를 τ배 한 것과 같아서(2) x=τ(x'+vt')입니다.위의 두식 (1),(2)는 각각 x'를 x와 t로 표현하고 x를 x'와 t'로 표현한 로렌츠 변환식입니다. 이 두 식으로부터 t를 x'와 t'으로, 그리고 t'를 x와 t로 표현한 로렌츠 변환 식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위치 좌표인 x, y, z와 시간 좌표인 t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하여 t는 항상 ct로 표현하겠습니다. 그러면 네 좌표가 모두 동일한 단위로 기술됩니다.그러면 (1)과 (2)식을 각각 (3) x'= τ[x-β(ct)], (4) x= τ[x'+β(ct')]라고 쓸 수 있습니다. 여기서 β는 속도 v와 광속 c 사이의 비이고 τ는 감마인자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t'를 x와 t로 표현한 로렌츠 변환 식을 유도하기 위해, 먼저 (4)식에서 ct'를 구하면입니다.이 식의 x'에 (3)에 대입하면입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t를 x'와 t'로 표현한 로렌츠 변환식을 구하면 ct= τ[βx'+(ct')]입니다. 물론 두 기준계가 x축에 평행하게 운동하면 y좌표와 z좌표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으므로, y'=y, z'=z가 됩니다. 위의 결과를 종합하여 로렌츠 변환 유도식을 행렬로 표현하면이것과 같습니다.민코프스키 4차원시공간갈릴레이 변환에서 보듯이 종래에는 시간은 공간과 관계없이 절대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공간에서 위치를 나타낼 때 필요한 좌표가 직선은 x 하나이므로 1차원, 평면은 (x,y)이니까 2차원이고, 이른바 3차원 공간에서는 (x,y,z)입니다. 이에 따라 원점으로부터 거리의 제곱 s2은 1차원에서는 X2이지만, 2차원에서는 x2+y2, 그리고 3차원에서는 x2+y2+z2으로 주어집니다. 이처럼 공간의 성분은 서로 얽혀있지만 시간은 따로 놀았습니다.그런데, 로렌츠 변환, 곧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대칭적으로 얽혀있습니다. 공간을 나타내는 (x,y,z)와 시간 t가 따로 있지 않고 서로 어울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을 기술할 때 위치와 시간을 함께 지정해서 (x,y,z,t)로 표시해야 타당하고, 네 개의 좌표가 필요하니까 4차원이라고 부릅니다. 공간에 시간이 더해지니까 시공간(space-time)이라고 부르고, 물체의 운동은 이러한 4차원의 시공간에서 기술하게 됩니다. 3차원 공간에서 위치처럼 세 성분을 지닌 벡터로 나타내지는데 이러한 네 성분을 가진 물리량을 일반적으로 4차원 벡터라 부릅니다. 3차원 공간에서 벡터는 세 성분을 지니고 있는데 4차원 시공간에서 위치 (x,y,z,t)같이 네 성분을 가진 물리량을 일반적으로 4차원 벡터라 부릅니다.이러한 우주, 곧 4차원 시공간에서는 어느 지점, 곧 사건의 원점으로부터의 거리는 x2+y2+z2 에 더해서 t2같은 것이 더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x,y,z는 모두 공간을 나타내므로 단위를 맞추려면 t대신에 ct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거리의 제곱 표현에서 (ct)2의 부호는 놀랍게도 (-)입니다. 따라서 거리의 제곱은 s2 = x2+y2+z2 - c2t2으로 주어집니다.시간과 공간이 대칭적으로 어울려서 시공간을 이룬다는데 우리는 왜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느낄까요? 공간과 달리 시간의 방향성, 곧 미래와 과거의 차별성은 직접적으로는 정보의 처리와 우리의 인식에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열역학 둘째법칙에 관련되어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상세계에서의 비대칭성, 곧 안되짚기와 관계없이 작은 미시세계에서도 시간은 공간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시간 성분이 공간 성분과 부호가 반대라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지요. 일상에서 말하는 보통 공간은 유클리드공간(Euclidean space)입니다. 거리의 제곱이 각 좌표 성분의 제곱의 합으로 주어지지요. 만일 시간 성분이 공간 성분과 부호가 같다면 시공간은 4차원 유클리드공간이 되겠지요. 그러나 시간 성분의 부호 차이로 시공간은 유클리드공간이 아니라 이른바 민코프스키공간(Minkowski space)을 이룹니다.
어떤 행위가 가장 바람직할까? - 남편의 불륜관계를 통해 알아본…이와 관련된 저의 사례를 제시하기 전에 저는 학교수업이 끝나고 유흥업소에 음료수를 납품하는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게 되는데요, 제 사례는 이 아르바이트하는 중에 겪는 일이며 제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이야기로 들은 내용도 있기에 약간의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습니다.‘주로 30~40대의 아저씨들께서 접대를 위해 룸살롱에서 비싼 양주를 마십니다. 그분들 옆엔 20대 중반의 아가씨, 심지어 고등학생까지도 파트너로 있습니다. 술도 마시고 함께 노래도 부르고 여기까진 좋습니다. 그런데 술을 다 마신 후 파트너와 함께 근처 모텔을 가거나 또는 능력 있으신 분은 해운대의 좋은 호텔까지도 갑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집에 돌아와서는 회사 회식이나 야근 때문에 늦었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여기에 속아주는 아내와 그것도 모르는 자식들이나 부모님들에겐 크나큰 상처이고 실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내는 속아 넘어줘야 할까요, 아니면 한바탕 싸우고 이혼을 해야 할까요’이것이 저의 이번 과제의 사례입니다. 앞으로 공리주의에 대해 알아보되, 이 사례에 공리주의의 두 가지 형태를 적용해보고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과 옹호, 마지막으로 그에 따른 저의 결론을 도출해보겠습니다.최근 들어 지식?정보화시대를 맞아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욕구들의 속출로 윤리적 판단과 의사결정 및 수행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현실적 문제와 부딪히게 되는데 이때 공리주의적 원칙이 유용하게 쓰입니다. 공리주의는 제러미 벤담의 사회적 행복주의가 발단이 되어 존 스튜어트 밀에서 비롯된 윤리학입니다. 특히 이러한 공리주의는 어떤 딜레마에 봉착했을 때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에 대한 행동적이고 실천적 물음에 있어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할 때 그 가치를 발휘합니다. 즉, 행위자가 행위하고 난 그 결과에 의해서 윤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판별합니다. 고전적 공리주의는 세 가지을 마시는 것은 진정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파트너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술을 마시는 행위는 도구적 가치이고 하룻밤을 보내는 행위는 본래적 가치입니다. 파트너와 하룻밤을 보내는 그런 행위가 도덕적으로는 옳지 않을 수 있지만 본래적 가치로서 좋다면 그 행위는 본래적으로 옳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본래적 가치의 표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여기에 대해서 공리주의자는 모든 사람의 쾌락, 행복 또는 본래적 선이 표준이라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표준이 어떤 행위의 가치에 대해 적용될 때는 반드시 공평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공리주의는 다음과 같은 의사결정 절차를 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한 행동방향에 대한 모든 대안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둘째, 각 대안을 선택할 때 뒤따를 가능한 결과를 계산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대안의 결과를 서로 비교하여 어느 대안이 더 많은 쾌락과 더 적은 고통을 산출하는가를 찾아냅니다.공리주의를 어떻게 해석하는 가에 따라 행위 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로 나눠집니다. 행위공리주의에 따르면,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을 필요충분조건은 그 행위 자체의 유용성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자가 행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행위보다 더 많은, 또는 적어도 같은 만큼의 유용성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규칙공리주의에 의하면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을 필요충분조건은 그 행위에 전제된 규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자가 행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행위보다 그 규칙이 더 많은, 또는 다른 규칙보다 적어도 같은 만큼의 유용성을 산출하는 것입니다.위의 사례에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을 적용하면 어떤 결론을 가져올까요? 행위공리주의를 따른다면 아내는 남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줘야 합니다. 아내는 아마도 남편의 거짓말 때문에 약간의 수치심을 느끼는 것 말고는 그렇게 큰 부정적 결과를 겪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편 입장에서는 아내와는 좀 다른 사업이나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아내 외의 다른 여자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만약 아내가 거짓말에 대해 반항한다면 이 행위가 근거한 규칙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습니다. ⓑ 남편들은 사업이나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아내 외의 다른 여자와 하룻밤을 보낼 수 없다. 규칙 공리주의자는 두 가지 구체적 행위들의 유용성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가지 교칙의 유용성을 비교합니다. 만일 ⓐ의 경우에 따른 규칙이 사회 전반적으로 적용된다면 결혼이라는 성스러운 의례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혼란을 야기하며 이혼율은 급등할 것이며 낙태나 미혼모도 증가할 것입니다. 부부간의 신뢰는 퇴색되며 수많은 가정이 붕괴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 경우를 따른다면 화목한 가정을 통해 재능 있는 자녀들이 키워질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같은 황당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이러한 비교가 제시하는 것처럼 규칙 공리주의는 행위 공리주의와 다르며 보다 그럴 듯한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또한 규칙 공리주의는 도덕이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우리들의 신념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행위 공리주의보다 규칙 공리주의를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용성에 관한 문제에서 행위 공리주의는 규칙 공리주의의 중요한 보조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규칙입니다.그러나 상당히 많은 반론들이 공리주의 원리 자체에 대해 제기되어 왔습니다. 첫째, 행위 공리주의의 반유용성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행위의 옳음은 전적으로 그것의 공리에 의거해서만 판단될 수 없습니다. 위의 사례에서 만약 이런 남편과 살기 싫어서 아내는 이혼을 하고 싶지만 자녀들과 재정문제 등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면 옳을까요? 잘못은 남편이 했는데 아무 죄 없는 아내와 가족들에게 손해가 미쳐서는 안 됩니다. 이혼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가 초래할 행복과 불행마저도 고려해야 할까요? 비판자들은 오로지 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가 잘못되었 될 수 있을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셋째로 공리주의가 필요 이상의 과다한 요구를 한다고 비판합니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누구든지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갖는 행위를 해야 하며 그 이외의 행위가 적지 않은 선을 갖을지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예외 없이 그른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남편이 파트너에게 “오늘 미스 김, 파마를 했으면 더 예뻤을 텐데”라든가, “아까 Bar에서 한 잔 더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말을 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런 말은 최선의 행위만이 옳기 때문에 공리주의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에 못 미치는 일을 하는 경우 결국은 그른 행위를 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만약에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이고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일이였다면 그것은 남편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 미치는 행위들은 부당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과연 의무와 의무 이상의 행위 사이에 만들어진 일상의 구별을 무시하는 공리주의가 옳을까요?넷째로 공리주의는 보편적 도덕 원리이지 이타주의적 원리는 아니라고 합니다. 공리주의같이 어느 곳에서든 선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라면 위의 사례에서 남편같이 양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상 북한같이 세계 곳곳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고 이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양주와 향락은 사치이며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공리주의가 이타주의가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은 거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고 비판합니다.다섯째로 공리주의에 따르면 개체로서의 사람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서 남의 가정을 파멸로 이끄는 아가씨들의 이런 행위가 옳을까요? 만약 이러한 사람들이 없어지면 많은 가정이 화목해지고 세상이 한결 좋아지지 않을까요? 이들을 고통 없이 죽일 수 있고 죽여야 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들이 사라지면 많은 반론들이 공리주의 이론에 대해 제시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공리주의가 진보적이고 상식적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변호할 만한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이론은 정의나 개인의 권리와 같은 기본적인 도덕적 개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있어서 이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공리주의는 개인적 인간관계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론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상가들이 어떤 형태로든 공리주의가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3가지의 근거를 통해 옹호하고 있습니다.첫 번째, 비현실적인 예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공리주의는 우선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한 다음 그와 같은 경우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행위가 취해져야만 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후 그러한 행위는 옳지 않기 때문에 공정성에 대한 공리주의의 개념은 옳지 않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예를 들면 아저씨들이 접대를 하면서 술을 마신다는 사례를 제시한 후 여기에 술을 다 마신 후 파트너와 함께 어딘가로 갈 것이라는 행위가 취해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공리주의는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 반공리주의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술만 마시고 남편은 집에 그냥 가는 사람들도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논리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입장입니다.두 번째, 공리의 원칙이란 개별적인 행위를 선택하는 지침이 아니라 규칙을 선택하는 지침입니다. 즉 고전적 공리주의인 행위공리주의를 새롭게 개정하여 규칙공리주의를 제시함으로써 공리주의에 대해 옹호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행위를 평가하지 말고 그 대신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어떤 일련의 규칙들이 최고로 적합한지 따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규칙 공리주의를 따름으로써 공리주의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의 규칙공리주의 설명할 때 예를 들었습니다.마지막으로 공리주의자들은 일상적인 도덕적 상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반 공리주의자들습니다.
칸트에게 거짓말과 사형제도란? - 강도?살인 사건과 이에 대한 판결을 통해 …요즘 안양 어린이 살해사건을 비롯한 무시무시한 일들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 주위에도 1달 동안 2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고요 때문에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몇 분 중에 한분으로 모 나이트클럽 회장님에게도 13년 정도 전에 아마 94~95년도에 강도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저는 어머니한테 들은 내용입니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회장님은 사업차 다른 지역에 계셔서 집에 자주 안계셨고 사모님께서는 매일 아침 10시 30분이 되면 운동하러 가십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사모님은 운동하러 나가시고 집에는 가정부 아주머니와 5살 된 따님이 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도 2명은 사모님이 운동하러 가시는 것을 보고 집에 침입했습니다. 강도들은 아주머니께서 애만은 살려달라고 하면서 반항을 하자 이불로 뒤집어씌우고는 끔찍하게 야구방망이로 때려서 결국은 죽였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귀여운 따님한테는 강도도 사람인지 그냥 나두고 금품이랑 돈 될 만한 것들을 가지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 일을 알게 된 회장님은 주위 사람들 다 풀어서 두 명을 당장 잡으라고 시켰습니다. 3달 만에 술집에서 놀고 있는 두 명을 잡아서 회장님은 이런 짓을 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강도들은 치밀한 계획을 짜고 범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고는 싶어서 동정심을 얻고자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회장님은 그런 사람들이 술 마시고 놀고 있냐면서 밑에 사람들을 시켜서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모님 집안이 판, 검사집안인데다가 죄형이 악질이라 쉽게 사형 당했다고 들었습니다.여기서 (A) 먹고 살기 힘들어서 강도짓을 했다는 거짓말을 한 강도들에 대해 칸트의 정언명령을 이용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B)강도들은 적어도 사형이라는 최고 형벌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일명 ‘빽’을 이용한 회장님의 일종의 보복행동에 대해서 칸트의 형벌제도의 규범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도번째 명제는 동기주의에 관한 것입니다. 의지의 옳고 그름은 실제적 결과에 달려있지 않으며 전적으로 의무에 대한 동기에서 나오는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의도를 실행하여 노력하고 또 우리의 동기가 옳다면, 그 의지는 그것의 결과가 어떠하든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의지를 갖는 것은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동시에 충분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의무에서 나오는(from) 행위와 의무에 부합하는(in accodance with) 행위는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위의 예에서 애를 살리는 것이 아주머니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의무에 관해 생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그렇게 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선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겁니다. 만약 아주머니께서 애를 살리는 것이 선하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그의 도덕에 관한 두 번째 명제는 선의지의 원칙, 즉 도덕적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칸트는 동기의 옮음의 기준, 즉 가치의 기반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 칸트는 선의지가 무조건적인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그 가치는 어떠한 목적이나 용도의 달성에 의존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선의지는 단지 그러한 목적의 수단으로 판단될 것이고 그리고 선의지의 가치는 목적의 가치뿐만 아니라 목적달성에 의존하는 조건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그의 도덕에 관한 세 번째 명제는 한 사람이 선의지에 의해 동기유발 될 때 그의 내적 태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선의지를 가진 사람이 왜 그렇게 행위하는가 물으면, 그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렇게 행위한다고 설명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순수의지는 자신의 성향과는 무관하게 한 행동을 원리의 문제로서 수행하려는 동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법칙을 준수하려는 깊은 의무감이자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선의지만으로 옳음의 충분한 기준이 될 수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장애인들도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법칙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며 전체 인류차원에서 채택될 수 있는 행위 규칙입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고 또 앞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가언명법이란 - 문장이 “……하려면 ……하라”의 형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강도들이 아주머니에게 살고 싶으면 돈 될 만한 것들 다 내놔!’ 라든지 ‘회장님이 강도들에게 죽기 싫으면 좋은 말할 때 사실대로 말해!’ 같은 형식을 취하는 문장입니다. 이러한 조건적 규칙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는 우리가 원하는 바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렇지만 칸트가 추구한 것은 어떤 조건도 붙지 않은 “이러이러하게 ……을 행위하라”는 형식의 정언명법입니다. 칸트는 이것을 “나는 또한 나의 격률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위 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표현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칸트는 정언명령에 대해 정의내리기를 하나의 규칙이 도덕규칙이 되려면 반드시 정언적으로 규정되어야 하며 가언적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언적 규정은 단지 만약 우리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할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규정적인 힘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규칙은 규정적인 힘을 갖기 위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에 결코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목적과는 독립적으로 즉 정언적으로 우리에게 규정해야합니다.칸트는 행위규칙이 도덕규칙이 되려면 만족시켜야 할 조건들을 몇 가지 제시하였습니다. 학자에 따라 조건들의 개수는 다르지만 저는 3가지를 들겠습니다. 첫째 보편적 법칙의 형식, 어떤 규칙이 도덕규칙이 되려면 그것은 일관성 있게 보편화 가능해야합니다. 도덕적 의무의 근거는 결코 경험적인조건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의존근거로서 충분합니다.둘째 목적 자체의 형식, 어떤 규칙이 도덕규칙이 되기 위해서는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따른다면 그들은 서로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 자체로서 대하게 될 규칙이어야 합니다. 모든 이성적 존재는 자신이 목적으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단지 수단으로 사용되는 즉 어떤 목적에 의존하는 상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적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규정된 어떠한 행위규칙도 타인을 단지 수단으로서 대하는 행동을 규정할 수 없으며 타인을 인격적 존재로서 대해야 합니다.셋째 자연법칙의 형식, 어떤 규칙이 도덕규칙이 되려면 각자가 그 규칙을 보편적으로 입법화할 때 각자의 의지에 의해 자신에게 부과될 수 있는 규칙이어야 합니다. 스스로 규칙에 따라 행위 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 것은 그 규칙이 자기에게 타당하게 구속력을 가진 것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 규칙을 따라야 할 의무의 원천이 바로 자신의 의지라고 봄으로써 그 규칙은 이성적 존재로서 자신에게 구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그 규칙은 모든 다른 사람도 이성적인 존재로서 구속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그 규칙에 복종할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자신에게 부여하는 의무와 똑같은 의무를 부여합니다.이제 (A) 먹고 살기 힘들어서 강도짓을 했다는 거짓말을 한 강도들에 대해 칸트의 행위법칙의 보편화 가능성이라는 관점으로 논의를 하겠습니다. ‘앞으로 닥칠 상황이 두려울 경우에는 언제라도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준칙이 보편화된다면,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여 남의 약속을 약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한 약속이건 거짓 약속이건 약속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고, 사람간의 신뢰는 찾아보지 못 할 것 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은 쉽사리 추리될 것입니다.이렇게 상식적이라면 칸트는 연구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거짓말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일임을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칸트는 세 가지 이유를 가지고 거짓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첫째,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의 위반으로서의 거짓말입니다. 거짓 약속은 목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는 타인을 수단시하는 것이 되며, 타인의 인격과 인권을, 따라서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강도들은 유흥비를 벌기위해 범행을 했으면서 게다가 몇 주 전부터 장소를 선정하고 계획까지 치밀하게 짜놓고서는 회장님에게 뻔뻔히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런 행위는 회장님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잘못된 정보에 의거해서 동정심을 유발하려 한 것이 되며, 이는 그 사람의 이성을 즉, 그 사람의 자유를 방해한 것이 됩니다. 게다가 위의 거짓말은 회장님의 자율적 이성을 무시한 행동으로써 인간으로서의 타인의 존엄성을 무시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타인의 존엄성을 중시해야 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이기에, 거짓말은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의무의 위반으로서의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진실성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 되며, 진실성에 대한 의무를 위반한다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자기 양심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이므로 거짓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강도들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런 짓을 해놓고는 단지 순간적인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진실성의 의무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게 된 것입니다.셋째, 인류일반의 권리에 대한 위반으로서의 거짓말입니다. 칸트에 의하면, 만약 우리가 진실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떤 질문을 했을 때 질문을 받은 사람은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진실성의 의무에는 시민사회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류의 권리가 상응합니다. 진실성이 없다면, 입니다.
윤리는 상대적인가? -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를 통해 바라본…영화 ‘Crash'를 본 후 다행히 한국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인종차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살아가는 미국은 그들이 갖고 있는 인종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끔찍한 나라라고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사고를 하고 있진 않는지 반문해 보았습니다. 뉴요커, 런더너, 파리지엔느 등을 동경하는 모습에서 나 또한 그렇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조금 더 확장시켜 서양과 동양의 가치, 오리엔탈리즘의 사례 중에 하나를 들어 상대주의에 대해 논의해보겠습니다.우선 오리엔탈리즘이란 ‘우월한 서양’과 ‘열등한 동양(비서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분법적 구분에 기초합니다. 이처럼 ‘동양=여성=독재=비이성(광기)=야만=비위생’ 등으로 날조된 동양에 대한 이미지이고 이와는 반대로 ‘서양=남성=민주=이성=문명=위생’이라는 서양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고 동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기여한 것입니다.오리엔탈리즘 중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영국은 인도의 지배를, 인도인의 여성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정당화합니다. “벵골인의 신체조직은 여성과 같다고 할 정도로 유약하다…. 여러 시대 동안 그는 용감하고 대담한 남자들에게 짓밟혀왔다. 용기, 독립, 정직과 같은 특질들은 그의 체격과 상황에는 한결같이 적합하지 않다.” 이러한 논리로 인해 영국인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식민화하는 것은 당연하다가 성립되는 것입니다.또한 영국의 식민정부는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인도인들의 무지몽매함과 야만성을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을 이용해서 부각시키기까지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살아 있는 아내를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하는 사티 풍습, 여자로 태어난 영아의 살해, 여자아이의 결혼과 성적 이용, 과부를 학대하고 재가를 금지하는 것 등이 있었습니다.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여성을 핍박하는 수많은 악습을 가진 인도는 야만적인 문명의 전형이라는 것이 영국 식민 정부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인도 여성의 낮고 비참한 위상과 차별받지 않는 영국 여성의 고상한 삶을 비교하였고, 이를 통해서 자신들이 지닌 기사도적인 나성다움과 영국인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였습니다.제가 볼 때 이러한 식민정부가 겉으로는 인도의 ‘야만적인 관습’을 규탄하고 그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사실상 그 내면은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억압을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이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인도에서 이러한 잔인무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과연 서양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바로 마녀를 사냥해서 불에 태워 죽이는 황당한 중세의 악행이 잔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남자의 질서에 도전하는 여성인 ‘잘난 여자’였다고 합니다. “여성과 개, 도토리는 때릴수록 좋다”라는 속담이 나온 곳이 다름 아닌 영국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영국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주인과 하인의 관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영국은 자신들이 야만적이라고 규탄한 인도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비이성적인 사회였던 것입니다.이렇듯 윤리적 신념과 관습이 국가와 종족에 따라 다르고 더 확대하여 한 사회 내에서도, 하위문화들 사이에서 또는 서로 다른 계급 사이에서도 차이가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행위를 각각 옳고 그른 것으로 믿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기준을 설정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모든 도덕규범은 문화권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 윤리적 상대주의의 입장입니다. 위의 예에 대해서 3가지의 윤리적 상대주의(기술적 상대주의, 규범윤리적 상대주의. 분석윤리적 상대주의)를 적용하여 차례대로 고찰해 보겠습니다.첫째, 기술적 상대주의 혹은, 문화적 상대주의란 여러 다른 사회는 서로 다른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또 개인의 가치는 그가 속하는 사회의 가치에 의존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각 사회는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자체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견해는 여러 사회의 도덕률간의 차이점 때문에 각 사회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권에 공통되는 규범은 없으므로 모든 인류를 하나의 도덕공동체 속에 묶을 수 있는 어떠한 규범이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합니다.그리고 이 이론을 뒷받침 하는 근거를 위의 예에 적용하여 보면 인도가 사티 풍습과 영아 살해 하는 것과 영국의 마녀사냥의 악행이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시대와 사회구조,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점이 발견되고 문화적 다양성이 존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과 함께 우리의 모든 도덕적 태도와 판단은 사회 환경으로부터 습득했다는 점도 근거가 됩니다. 인도인들의 과부 학대와 재가금지라는 관습 등 어떠한 도덕적 가치 혹은 신념도 생득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유교문화권의 영향으로 재가하는 것이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나 학교, 언론 등이 우리에게 내면적으로 투사된 견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사회의 생활방식에 안정을 가져다주고 꾸준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면 그 사회의 관습이 제일 좋은 관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기민족 중심적(집단 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영국인들이 인도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야만적인 관습을 규탄한다고 하였지만 영국인들 입장에선 야만적일지 몰라도 인도인들이나 다른 사회에선 야만적이지 않을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도덕률이 유일하고 진실하다고 믿음으로써 다른 사회의 도덕률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지나친 배타성과 과도한 폐쇄성 때문에 흔히 불관용과 독단주의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도의 편협한 윤리관을 갖게 하고 도덕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심도 용납하기를 두려워하도록 만들도록 합니다. 또한 허황된 현실인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다음은 규범윤리적 상대주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모든 문화는 서로 다른 도덕적 판단과 규범을 가지고 있고, 또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신념은 그들 각각의 문화권 내에서 도덕률 체계에 의해 습득되기 때문에 보편적인 도덕규범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회에서 옳은 것이 다른 사회에서 그를 수 있다’는 것이고 도덕적 판단과 규범은 이것을 도덕률로 채택한 사회의 구성원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단지 서로 다른 사회가 서로 다른 규범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규범에 보편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즉, 도덕적 규범은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며, 다른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대로 한다면 영국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규범을 적용하여 인도의 관습이 야만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마지막으로 살펴볼 분석윤리적 상대주의는 개념적 상대주의와 방법론적 상대주의로 구분됩니다. 개념적 상대주의란, 각 사회나 문화마다 받아들이는 도덕적 개념이 다르므로 ‘A’라는 사회의 도덕판단이 ‘B’라는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의미가 없거나 또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마녀사냥의 희생자들은 남자의 질서에 도전하는 여성인 ‘잘난 여자’라고 하였는데 이 도덕판단이 인도에서는 영국과는 또 다른 의미로 전달되었을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의 질서에 도전하기보단 자식들을 잘 돌보고 교육을 잘하는 도덕판단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난 여자’에 대한 올바른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문화에 따라 상대화되기 때문에 의미가 없고 불필요 하다는 주장입니다.분석윤리적 상대주의의 두 번째 유형인 방법론적 상대주의는 각 문화권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에 따라서 서로 다른 추론방법을 가지고 도덕판단을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과부의 재가(再嫁) 같은 경우에도 인도에선 금기시 되었지만 자유분방한 미국 같은 경우엔 보편적인 사회현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도덕판단이 문화권에 따라서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안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방법론적 상대주의가 함축하는 것 중에서 심각한 것은 윤리적 회의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윤리적 회의주의란 윤리적 판단은 단지 감정이나 태도에 불과하고 어떤 윤리적 원리가 옳은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만약 이것이 하나의 사실이라면)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윤리적 원리들이 옳다는 결론을 즉각 도출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덕 판단의 성질에 관한 이러한 해석-도덕 판단은 감정이나 개인의 기호를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은 직관과 신의 명령에 대한 호소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인도의 관습인 여자로 태어난 영아를 살해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강한 불쾌감을 줍니다. 이때 우리는 단지 영아 살해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할 뿐이라는 것이 윤리적 회의주의자의 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