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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Allan Spielberg) 스티븐 스필버그목차Ⅰ.들어가며Ⅱ.스필버그의 생애Ⅲ.스필버그의 사상1.쇼비니즘2.가족주의3.피터팬신드롬4.유대주의Ⅳ.스필버그의 작품(시대별)1.1970년대- 죠스, 미지와의 조우2.1980년대- 이티, 컬러퍼플3.1990년대- 후크, 쥬라기 공원, 라이언 일병구하기4.2000년대 - 뮌헨, 에이아이Ⅴ.시대가 스필버그에게 준 영향Ⅵ.스필버그가 시대(문화와 영화계)에 미친 영향Ⅶ.나오며Ⅷ.참고문헌Ⅰ.들어가며현대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명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의 영화를 단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혹여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간접적으로 그의 명성은 한 번쯤 체험했을 것이다. 세계 10대 흥행 영화 중 4편이 스필버그의 영화 일 정도로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흥행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의 영화 속에는 단순히 상업적인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우리는 스필버그의 작품들을 통해 드러난 그의 사상과 함께 시대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이고 그가 시대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Ⅱ.스필버그의 생애스티븐 스필버그는 1946년 12월 18일 오하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놀드 스필버그는 컴퓨터 설계 및 전기를 다루는 기술자였으며, 그의 어머니 리아 스필버그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다. 아버지로부터는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어머니로부터는 독창적이면서 자유로운 예술가적기질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직장을 자주 옮겨 다녔기 때문에 스필버그 가족은 이곳 저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유태인인 그의 가족은 유태인 거주지역이 아닌, 기독교도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스필버그는 더욱 소외감을 느꼈다. 그가 16세 때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새러토거로 이사했다. 그는 학교에서 유일한 유태인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그는 온갖 놀림과 핍박러워하고 아내가 자기 아들을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아들이 자라는 것이 보람이고, 잘 커주었으면 하는 보통 사람이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꿈을 바탕으로 하며, 보통 사람들의 소망을 그대로 투영한다는 점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재미있으며, 때로는 감동적이며, 때로는 순수 자체로 다가온다. 상상력 때문이라기보다 보통 사람의 소원과 희망, 꿈, 소망을 잘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3.피터팬 신드롬성년이 되어도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어른아이’ 같은 남성들이 나타내는 심리적인 증후군. 피터팬신드롬이라고도 한다. 동화에 나오는 피터팬은 어른사회로부터 ‘공상의 섬’으로 떠나, 이 꿈나라에서 모험하는 영원한 소년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는 어른들의 사회에 끼어들지 못하는 ‘어른아이’의 남성이 대량으로 발생하기 시작하여, 이들 남성들이 보여주는 마음의 증후군을 임상심리학자인 D.카일리 박사가 피터팬 증후군이라 한 것이다. 스필버그는 1985년에 “나는 늘 피터팬 처럼 느꼈다. 나는 아직도 피터팬이라고 느낀다. 나로서는 성장한다는 것이 아주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피터팬 증후군 환자다”라고 스필버그는 인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런 스필버그의 모습은 가족환경으로 여겨진다. 무뚝뚝한 하고 내정적인 아버지와는 달리 스필버그의 어머니는 활발하고 어린애 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필버그의 가족 모두 미성숙한 분위기였고 집 규칙 또한 어른이 되지 말라 였다고 한다. 스필버그의 이런 성향은 그의 영화에서도 나타나는데 대결이후 모든 스필버그 주인공은 어느 정도는 다 애인으로서나 아버지로서 어떤 본질적 남성의 역할에 실패하고 있다는 걱정을 안고 있다. 그리고 후크에서 이런 두려움이 남자주인공에게서 나타나는데, 그는 분명 부족한 아버지이며 이보다는 덜 두드러지지만 성 문제로부터 물러서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런 피터팬 중후군은 스필버그에게 긍정적인 측면을 안겨주기도 했다. 풍부한 상상력과 마음의 젊음을 유지하려는 갈망. 이 같은 특성들이 스필버그의 영화사 않는다. 한편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라콤 박사의 지도 하에 외계인과 통신할 수 있는 음악 코드를 개발하고 그들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 위치는 와이오밍에 있는 '데블스 타워'였고, 정부는 극비로 하기 위해 고의로 열차 사고에 의한 독가스 유출을 이유로 그 지역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킨다. 뉴스를 통해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데빌스 타워'를 발견한 로니는 지금껏 자신을 끌어당겼던 것이 바로 데빌스 타워였음을 깨닫고 아들을 섬광물체에 빼앗긴 질리안과 함께 군인들에 의해 봉쇄된 도로를 뚫고 데빌스 타워로 향한다. 드디어 외계의 우주선이 장엄한 불빛 속에 도착하게 된다.영화해설:스티븐 스필버그의 사이언스 픽션으로 UFO를 다룬 그의 초기 걸작. 그는 이미 1963년 아마추어 영화 작가 시절인 16세 때 140분짜리 이라는 미확인 비행물체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그의 두 번째 SF인 UFO 영화가 되며, 82년 만든 와 함께 스필버그의 UFO를 다룬 3부작의 중간 작품이 해당된다. 이 작품에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감독, 누베바그의 기수 프랑스와 트뤼포가 프랑스의 과학자로서 특별 출연하고 있다. 특수촬영에 의한 UFO의 장면이 뛰어나고 존 윌리엄스의 음악도 좋다.기존의 외계인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이 외계인을 지구의 침략자로 설정, 지구인과의 투쟁을 다루고 있는데 비하여 스필버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외계인은 고도의 지능과 과학기술을 지닌 문명권의 이방인으로서 지구인에 매우 우호적이다. 따라서 지구인은 그들을 외경스럽게 바라보며 친구로 된다. 그리고 UFO는 항상 신비하게 구체성 보다는 신비한 빛으로 묘사되고 있다. 영화를 빛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빛의 외경스러움을 다루는 것이야 말로 가장 영화적 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태초서부터 빛에 대하여 공포심과 함께 외경스러움을 지녀왔고 그 빛을 통하여 그 빛을 수반하고 온 외계인, 즉 구원의 신을 통하여 인류에게 평화의 심성을 심어주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일 수 있다.이 영화의 제목의 의미는, '제3종 근접 접촉'이라는 뜻이 아래인 여동생 네티와 서로 의지하며 다정하게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의붓아버지는 이제 어린 네티마저 건드리려 하고, 그러는 중에 40대 초반의 미스터라는 남자가 네티를 자기 아내로 줄 것을 요청하나 의붓아버지는 네티는 너무 어리다며 대신 셀리를 데려가라고 한다. 이에 미스터는 어린 셀리를 아내로 맞아 데려간다.그러나 셀리의 삶은 미스터의 전처소생 아이들 등살과 미스터의 난폭한 성격 때문에 노예보다 더 참혹한 생활을 하지만 착한 성품으로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준다. 그러던 어느 날 네티는 의붓아버지의 손을 피해 셀리네 집에 와서 살며 학교도 다니고 배운 걸 셀리에게도 가르쳐 주며 행복하게 살아가나 네티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미스터에게 겁탈 당할 뻔했다가 위기를 모면하지만 화가 난 미스터에게 쫓겨나고 그 후 미스터는 네티한테서 온 셀리의 모든 편지를 다 압수해 버린다.미스터는 어릴 때부터 서로 연모하던 목사의 딸이자 떠돌이 가수 셕이 공연을 왔다가 병으로 쓰러지자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간호해 주며 함께 잠자리도 같이하나 셀리는 오히려 그러한 셕을 사랑으로 따뜻이 보살펴 준다. 이에 감동한 셕은 셀리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눈을 뜨게 만들어 주고 미스터가 없는 틈을 타 집안을 뒤져 네티한테서 온 편지를 찾아낸다. 그 편지에서 셀리는 자기 아이들이 다 살아 있고 네티와 함께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자라고 있으며 곧 미국으로 오겠다는 내용을 읽고 그 모든 소식을 수십 년간이나 차단한 미스터에 대한 증오는 분노로 바뀌어 순하던 성품이 적극적으로 바뀌어 셕 부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다.셀리가 집을 나가고 오랜 세월 혼자 사는 데 지친 미스터는 차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셕은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미워했던 목사인 아버지께 돌아가 눈물겨운 화해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미스터의 주선으로 아프리카에 가 있던 네티와 셀리의 아들 아담 그리고 딸 올리비아는 미국으로 와 수십 년 만에 눈물겨운 가족 상봉을 한다.영화 해설:한 흑인 여인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랐음을 고백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스필버그는 티-렉스의 매력적인 이미지가 영화의 메인을 장식하기에 적절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일 뿐이라고) 한편, 과학자들은 호박에 갇혀 있던 모기로부터 과거 공룡의 DNA를 추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DNA의 불안정성도 그렇고, 호박이라는 광물은 DNA를 보관할만한 좋은 용기가 아니라고 한다.라이언 일병구하기 (Saving Private Ryan)2차대전의 유럽 지역을 배경으로, 이 전쟁에서 무려 세 형제가 나란히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마지막 남은 막내 라이언의 구출 임무를 띤 한 부대원들의 갈등과 활약상을 그린 전쟁 드라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헐리웃 톱스타 톰 행크스가 함께 한 최초 작품으로, 스필버그 감독은 '지옥과 같은 전쟁으로부터 어떻게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주제에 매료되었다고 작품 선택의 동기를 밝혔다. 기본적인 스토리는 닐랜드(Niland) 형제의 실화에 근거했으며, 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했던 많은 퇴역 군인들이 영화의 사실성에 대하여 스필버그에게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였으며, 스필버그 감독에게 에 이어 두번째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에서 전쟁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 스필버그는 지금까지 그 어떤 전쟁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섬찟할 정도로 충격적인 리얼한 전투 장면을 연출해 냈다. 실체감을 살리기 위하여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촬영하였는데, 촬영전에 스토리보드 과정도 거치지 않았고 대부분의 촬영을 핸드 헬드 카메라(hand-held camera)를 사용하였다. 상륙 작전을 펼쳐지는 도입부의 25분과 끝부분의 치열한 전투씬이 그것이다. 를 촬영하였던 쟈누스 카민스키 감독에게 촬영을 맡겼는데, 그는 카메라 렌즈에서 보호막을 벗겨내어 40년대의 카메라 렌즈와 비슷하게 만들어 촬영하기도 했다. 또 오늘날의 표준형인 180도 셔터와 달리 90도 혹은 45도 셔터를 전쟁 장면에 사용, 배우들의 움직임을 조금 툭..
    인문/어학| 2008.12.30| 19페이지| 3,000원| 조회(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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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반외세운동 - 위정척사운동 평가A+최고예요
    目次19세기반외세운동 위정척사운동Ⅰ.머리말Ⅱ.위정척사사상Ⅲ.위정척사운동의 전개Ⅳ.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1.위정척사운동의 영향2.위정척사운동의 의의Ⅴ.맺는말참고문헌이택희.문소정 , “한국사 38-개화와 수구의 갈등”, 국사편찬위원회, 1999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2000변태섭, “한국사 통론”, 삼영사, 2000문소정, “위정척사운동에 관한 지식사회학적 연구(下)-소의(疏) 내용분석을 중심으 로 ”,일지사 ,1984이재곤, “開化政策의 추진과 衛正斥邪 운동의 전개”, 고시연구사(월보)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21435Ⅰ.머리말문호개방 이후 개화사상이 고조되고 정부의 개화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외세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위정척사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주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는데, 이들은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면서 정부의 개화정책을 반대하였다.) 재야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성장한 이 위정척사사상은 서양 및 일본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개화사상과는 대립되는 위치에 서 있었다.)보고서에서는 19세기 반외세운동인 위정척사운동에 대해서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인 위정척사사상에 대해 알아보고 위정척사운동의 전개와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에 대해 언급하도록 하겠다.Ⅱ.위정척사사상위정척사사상이란 바른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물리치고자 하는 하나의 체계화된 이론과 이념적 정향을 가리킨다. 이러한 위정척사사상은 조선 5백년을 관통하는 주자학적 성리학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주자학적 정치사상은 신분과 계급을 돌보지 않는 충절이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의무가 니라 가장 순결한 내심의 발동이며, 이것이 곧 천리라고 역설하기 때문에 성리학의 理氣 논리가 외적의 침입을 당하게 되면, 현실적으로는 민족적 저항을 고취시키는 이념적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었다.주자학적 정치사상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 때는 단순한 도덕적 가치체계나 학문체계를 넘어 새로 성립된 정치체제를 정당화하고 통치구조의 원리를 제공하는 국가이성의 근간이 되었다.조선왕조의 주자학적 정치사상의 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19세기 후반의 위정척사론이 등장하게 된다.처음에는 서양의 이질문화가 도전해 오는 위기상황에서 이단에 대해 正學을 지킨다는 교학적 차원에서 하나의 사상운동으로 발흥된 것이었다.주자학적 정치사상은 이후 퇴계와 율곡, 그리고 우암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점차 형식화.전통화 함으로써 성리학으로서의 본질을 잃어 갔다. 그리하여 실사구시의 실학이 등장하였으나 그 근본정신은 유교적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비판이나 배척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그러나 서학이라 일컬어지던 천주교가 영.정조 시기에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예교질서를 파괴하는 교리 및 행동을 수반하여 주자학적 사상으로 규율되어 오던 전통사회를 위협하는 위험사상으로 간주하게 되어 배척하는 동시에 주자학적 정치윤리사상을 정학으로 지키고자 하는 위정척사론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따라서 조선후기 천주교라는 이질적인 물화가 도전해 오는 위기의식의 상황에서 주자학적 유교사상을 수호하기위한 하나의 사상운동으로서 위정척사상이 대두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전통적 유교사상을 지키려는 정통의식의 반발작용 수준에 머물렀지만 조선왕조 말기에 이르러 점차 서구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노골화되고 그것이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전반적인 변화와 파괴를 강요하는 물리적인 힘으로 다가오자, 강력한 민족적 자존의식을 바탕으로 한 구국의 지도이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Ⅲ.위정척사운동의 전개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자본주의적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열강과 일본의 세력들은 제국주의 국가로 무장하여 시장과 원료를 찾아서 조선으로 진출해 왔다.1866년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1876년 병자수호조약체결, 1882년 구미제국과의 통상의 확대, 1895년의 을미사변,1905년의 을사조역체결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치르면서 조선은 이들의 반식민지나 식민지로 전락하여 민족과 국가의 상실을 경험할 급박한 위기에 처했다.조선은 대내적.대외적으로 근대적인 자주독립국으로 재탄생해야하는 시대적과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열강의 팽창세력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하여야 했고 대내적으로는 이미 해체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던 조선 사회제도를 정비해 나가야 했다.병인척사 (1860년대) - 통상반대론, 척화주전론서양과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반대운동이 전개되었고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항하여 척사주전론으로 나타나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뒷받침하였다.특히 이항로는 저서인 화서아언에서 통상폐해, 생산 자원고갈, 인망자는 싸워야한다는 주전론을 강조하였다.병자척사 (1870년대) - 개항반대론, 왜양일체론1870년대 문호개방을 전후해서 왜양일체론 개항 불가론을 들어 개항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강화도 조약체결 시 5불가소를 올린 최익현이 대표적 인물이다.신사척사 (1880년대) - 개화반대론·영남만인소정부의 개화정책 추진과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하여 이만속의 영남만인소와 강원도 홍재학의 척사소)로 대표되는 개화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1890년대 척사운동 - 의병운동으로 계승이 뒤부터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운동 으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위정척사운동은 외세가 침투하는 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1866년 병인양요 당시 이항로는 척화주전론을 내세우며 양이의 침범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조성한다고 주장하면서 양물을 배척하고 통상을 반대하였다. 그는 존체양, 개언로, 선무비, 용덕인을 내세워 국가의 내면적 단결을 강조하였다.기정진도 같은 내용의 척사론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대원군의 쇄국, 척양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결국 개화?통상의 추세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자 최익현은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개항반대 5불가소를 올렸고 이어서 경기?강원 유생의 절화소 등이 잇달아 올려졌다.그러나 국왕과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개항은 이루어졌고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의 양상도 달라지게 되었다.1880년(고종 17)에 김굉집이『조선책략』)을 가져온 후 고종이 개화의 필요성을 고취시키고자 관리?유생에게 읽도록 지시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1881년에는 격렬한 위정척사운동이 전개되었다.경상도 유생 이만손을 소두로「영남만인소」가『조선책략』을 비난하고 김굉집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전국 유생들이 위와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강원도 유생 홍재학이 올린「만언척사소」)는 그 내용이 매우 격렬하여 국왕에 대한 저항에까지 이르렀다.이러한 1881년의 위정척사운동은 외세침입을 경계 하는 것에서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으로 확대되었다. 즉, 척사의 방향이 국내정계에 개화와 보수의 양 세력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Ⅳ.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1.위정척사운동의 영향위정척사운동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운동과 그 이후의 국내와 항일독립운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어난 이러한 항일의병의 선봉이었고, 이론적 지주가 된 사람들은 바로 대부분 위정척사론자들이었다.의병운동 그 자체는 주자학적 척사론을 사상적 동기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또한 위정척사론자들이 그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수행된 것이다.위정척사사상과 그 운동은 1906년 6월 최익현 의병부대의 좌절이후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하여 갔으나, 해외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면서 계속 끈질긴 항일 독립운동으로 발전, 심화되어 갔다.위정척사운동은 국권회복의 계기적 국면의 변화에 따라 적응하면서 발전되어 마침내는 해외 항일독립운동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조선후기 화서 이항로와 노사 기정진에서 비롯되어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 및 면암 최익현을 거쳐 의암 유인석에 이른 위정척사사상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을 보전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 있어 그 원동력으로 계속 영향을 미쳐 갔다.2.위정척사운동의 의의첫째, 조선 말기 서구열강과 일본세력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조선왕조 정치체제와 민족주체성의 보위를 위해 가장 강하게 저항한 대표적인 사상과 운동이었다는 점이다.둘째, 민족자주와 주체성을 지향하는 전통적인 강력한 민족주의적 애국애족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셋째, 외세와의 단절된 상태를 전제로 하여 폐쇄적 척화만을 고집한 수구적 운동이 아니라 우선 국력을 배양하여 외세의 도전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자강아사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결국, 위정척사운동은 내수를 통한 자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으며 무조건적인 수구적 폐쇄성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의 현실을 인정하고 변동에 적절히 적응, 독립된 주권국가로서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수구적이고 보수적인 고루한 운동이 아닌 조선왕조 말기의 변천하는 역사적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심화, 발전시키면서 주체성의 위기를 자율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민족자존과 자주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8.12.30| 5페이지| 1,500원| 조회(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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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열왕의 가계 복원과 무열왕이 왕에 즉위하는 과정
    무열왕의 가계 복원과 무열왕이 왕에 즉위하는 과정1.무열왕의 가계 복원(540~576) 24.진흥왕 사도부인동륜 김씨 민호부인 25. 진지왕 지도부인(576~579)용춘 천명 부인26.진평왕 김씨 마야부인 국반 박씨 월명부인(579~632) 29. 태종 무열왕 문명부인27.선덕왕 28.진덕왕 (654~661)(632~647) (647~654) 30.문무왕(661~681))무열왕은 신라 29대(654-661)왕으로 본명이 김춘추이고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26대 진평왕의 딸이자 27대 선덕여왕의 동생인 천명부인이다.왕비는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이고 28대 진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서 당 나라와 연합 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무열왕의 맏아들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왕이며 둘째 아들 김인문은 당 나라와의 큰 공을 세운 뛰어난 외교관 이였으며 둘째딸 요석공주는 원효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고 셋째 딸은 김유신과 결혼한 지소부인이다.2.왕에 즉위하는 과정왕은 풍채가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 진덕왕을 섬겨 관위는 이찬을 지냈고, 당 황제가 특진의 품계를 주었다.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섭정을 청했으나, 알천은 굳게 사양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오늘날 덕망이 높고 두터운 것이 춘추공만한 이가 없느니, 실로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제할 영웅 호걸이라고 할 만하다” 하고 하였다. 마침내 춘추공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춘추는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부득이해 왕위에 나아갔다.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으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 왕실(中代 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1) 김유신과 밀착그의 즉위에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하여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으며,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내에서 새로운 신 귀족 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 귀족 집단의 반발을 받았으며, 선덕왕대 중반기까지는 적어도 신 귀족과 구 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듯하다.그러나 642년에 신라의 서방요충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 부처의 죽음은 김춘추계에 충격을 주었다.이 사건은 김춘추로 하여금 대외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그러나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한 이 외교는 진흥왕 때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 반환 문제로 말미암아 결렬되고, 오히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다.그러나 이와 같은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이러한 결합을 바탕으로 김춘추는 647년에 일어난 구 귀족 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이 사건은 구 귀족 집단의 대표자인 비담이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있는 신귀족 집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것인데, 오히려 김춘추·김유신계의 신귀족 세력에 의해서 30여명이 숙청당함으로써 분쇄되고 말았다.이 정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자 신귀족은 구귀족과 일시적으로 제휴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구귀족 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의 옹립 과정에서 김춘추·김유신계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덕여왕 대에는 김춘추에 의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외교활동과 내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2) 대당외교와 왕권안정노력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 위하여 648년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계속 사용하여 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한편 김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는데,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그것이다.김춘추에 의하여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이것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치 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하여 신장된 신 귀족 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하여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고,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하였던 구 귀족 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었던 만큼 화백회의에 의하여 추대 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구 귀족으로부터 신 귀족으로의 권력이양과 왕위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8.12.30| 3페이지| 1,000원| 조회(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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