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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c 중국사회 3장
    『19세기 중국사회』 3장 요약 및 비평목차Ⅰ. 머리말Ⅱ. 본론1. 제1,2차 아편전쟁 기간의 정치상황2. 양무운동의 전개와 수고와 개혁3. 변법운동의 전개와 각 정치세력의 각축4. 신해혁명 전야의 수구, 개혁, 혁명Ⅲ. 결론Ⅳ. 비평Ⅰ. 머리말본 장의 내용은 19세기 중국의 시대상황을 주도한 정치적 인간집단 즉, 수구, 개혁, 혁명의 정치세력들의 상호관계와 그들과 외세와의 관계를 분석하여 19세기에 일어난 변화의 정치적, 국제적 배경을 해명하는 것이다.중국의 근대적 변화는 서양의 충격이 가해진 아편전쟁 이후 두드러진다. 중국의 폐쇄성을 허물고 중국 자체 안에서는 불가능 했던 근대적 변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 중국 자체 내에서도 지속되어 온 내부적 변화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서구 충격 이후의 역사적 전개를 서구 충격에 대한 대응의 결과로 해석하는 경향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송 대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요소의 발흥에 주목하거나 청조 전성기인 18세기의 변화에 관심을 쏟는 것은 서구 중심적 시각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아편전쟁 이후 서양문명의 충격은 중국의 의미 있는 변화를 강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변화는 중국 사회 자체 내의 변화와 서양에 의해 제공된 외래적 변화요인의 결합의 산물이었다. 다음 본론에서 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Ⅱ. 본론1. 제1,2차 아편전쟁 기간의 정치상황1) 제1차 아편전쟁 전후의 정치상황한 시대의 정치세력을 수구와 개혁, 혁명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심각한 인식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분류는 절대적이고 일관된 것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편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청초부터 청 말까지의 정치권력의 향배를 거시적으로 일괄한다면 청초부터 1730년대에 끝나는 제 1단계에서는 제국의 왕자들과 만주족의 제도가 중심적인 시대였다. 이후 1820년대까지의 2단계에서는 한림원이 관료경력의 중심채널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군기처가 정책결정기관으로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도 체제의 개혁을 요구하지는 않았다.아편전쟁 전야 청조는 아편문제에 대해 이금론과 엄금론의 대결로 분화되었다. 이금론은 아편을 허용하되 세금부과하고 아편재배를 주장한 것이고 엄금론은 아편흡연자 사형을 주장하는 것이다. 강경한 아편금지론은 황제의 지지를 얻음으로 대세를 장악해 간다. 강경론과 유화론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는 아편밀무역과 행정부패에 대한 개혁적 입장과 현상유지 입장의 차이라 할 수 있다.아편전쟁의 패배로 권위는 손상되었다. 중국보다 우월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중국의 기성체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한 청조의 절대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태평천국의 반란을 야기한 원인이 아편전쟁이 준 충격을 하섭은 지적하였다.아편전쟁이 중국의 변화를 야기하는 충격을 가한 사건이지만 직접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아편전쟁 이후 10년간은 아무일도 없었던 10년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편전쟁은 계기로서 중요한 것이었다. 앞으로 100여 년간 중국의 자주적 역사전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불평등조약 체계가 족쇄처럼 채워졌다.2) 태평천국 농민운동과 제2차 아편전쟁, 그리고 신유정변태평천국의 반란은 서구 충격에 대한 대응의 산물이다. 태평천국의 반란은 만성화된 민중반란의 한 정점이었다. 태평천국의 성립은 청조체제 하에서의 또 다른 아래로부터의 정권의 탄생을 의미했다. 태평천국은 아편, 도박, 음주, 전족금지 및 사유제의 부정과 공유제 원칙, 여성에 대한 지위강화정책 등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전제권력을 흉내 내면서 심하게 변질되었다.태평천국의 의의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된 중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체제의 무능을 폭로함으로써 초래한 사회적 충격에 있다. 청조의 권위는 동지군에 의해서도 훼손되었다. 청조 정규군의 무능은 진압임무의 상당부분을 한족지주 - 신사그룹에 넘겨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어쩔수 없이 용인할 수밖에 없는 청조의 딜레마였다. 민간의 군사화를 주도한 한화적 전략은 수구보수파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이들의 갈등은 개혁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둘러싸고도 전개되었다. 과거출신 관료를 대상으로 수학을 교수하려 하자 이들은 대립하였다. 이 논쟁은 서양문화에 대한 비판은 표면적 이유이고 커져가는 공친왕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서태후의 의지가 도사린 권력투쟁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논쟁은 양무 개혁세력의 성장, 이에 대한 서태후의 견제와 보수적 관료들의 반발, 서양문화 수용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 이에 따른 양무-개혁운동의 한계를 명백히 보여 주었다. 이 뿐만 아니라 철로건설, 전선부설의 수구파의 견제도 하나의 사례가 된다.개혁이 이처럼 지지부진하였던 배경으로 수구파의 반대만이 아니라 1870년대의 묘한 시대분위기가 거론될 필요가 있다. 주요반란 진압과 양무운동의 성과는 내외적 위기로 위축되었던 중국인의 우월감을 다시 고취시켰는데 이러한 의식은 개혁 지향적이라기보다 복고적 경향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위기의 심화를 근거로 양무를 확대해야 한다는 이홍장 등의 요구를 견제하고 전통적인 체제재건의 요구를 강화하는 경향을 조장하였다. 개혁의 성과가 오히려 개혁을 방해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수구-보수파의 견제에 개혁세력은 이론적 기초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주장한 것이 서학이 중학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수용해도 좋다는 이른바 서학중원설의 논리적 조작을 하기도 한다. 서양문물 도입하기 위한 논리로서 중국적 전통과 가치를 체로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서양 문명을 용으로서 수용해야 한다는 중체서용론이 있다. 이제 양무는 확대되어 갔고 양무의 내용을 어디까지 확대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2) 양무파의 분지와 청류파의 등장양무파 내에서도 정치적 세력관계와 양무추진에 따른 이해관계에 따라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입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대만사건의 해방논쟁이다. 이는 육지방위를 우선할 것인가 해상방위를 우선할 것인가 하는 방위전략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는 이홍장의 양무의 확대와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며 환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등 이치가 더욱 문란해지게 되었다. 이후 청류세력 거세로 정치입장이 강화된 이홍장과 서태후의 협조관계가 강화되고 공친왕 대신 순친왕이 여기에 가담하여 정국을 좌우하게 되었다. 종래의 양무개혁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였고 이후 1880년대 후반 변법개혁론이 활발해지게 된다.4) 초기 변법파의 출현과 제도개혁론(1)초기 변법파의 제도개혁론청불전쟁의 패배는 충격적이었고 양무운동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강유위의 상서는 그 충격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는 성법을 개혁하는 이른바 변법을 주장하는 개혁론이 활발해졌다. 근본적인 제도개혁을 추구하였다. 초기 변법개혁론자들은 정치역량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제도개혁론을 주장함으로써 본격적인 변법론 단계를 예비하여 양무와 변법을 연결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서양의회론은 서양 입헌정체의 기초인 민권보장이나 헌법제정, 선거 등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의회라는 서양의 부분적 제도를 중국의 기존 정치제도와 결합시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거들의 희회론은 군주전제정체 자체를 개혁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술변법파의 의회론과 구별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2)초기 변법파의 외교론이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왕도는 국제정세를 춘추전국 시대에 비유하면서 통상을 위한 영국보다 영토적 야심이 강한 러시아 방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이홍장의 외교전략과는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외교정책은 해외 공사관이 개설되면서 전기를 맞았다. 이러한 변화는 주권의식이 심화되어 열강에 빼앗긴 이권과 불평등조약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들 초기 변법파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국제관계에 대한 태도에서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강화되어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3. 변법운동의 전개와 각 정치세력의 각축1) 청류파와 무술변법파의 연합과 개혁의 추진30년간의 양무운동은 청일 전쟁의 패배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대만과 여표적 인물인 이홍장은 강유위와 양계초에 동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를 고려하여 이홍장이 변법개혁론자와 대립되어 있을지라도 변법 그 자체에는 동조하였으며 따라서 변법론은 양무파 사상의 극복이 아니라 연장선에서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기도 한다.또 다른 양무파 인물인 장지동은 처음에는 강유위를 지지 하였지만 후에 급진한 개혁에 탄압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유곤일의 경우도 변법개혁의 급진성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양무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개혁방안에 대해서는 동의하였다. 이처럼 양무파는 민권평등론에 기초한 입헌의회제 수립을 제외하면 강유위의 그것과 대동소이하였다.3) 무술개혁 시기의 외교정책당시 친러파와 반러파의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돌려받자 러시아관은 달라졌는데 영국과 러시아 중 택하여 군사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중아동맹조약을 맺게 된다. 하지만 이후 독일 러시아등이 영토침략을 하고 조차지를 요구하고 영국과 일본은 타국에 조차지 할양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기에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가 반전되었고 일본, 영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에 대항하는 연영일론이 꾸준이 전개하였다. 연영일론은 무술정변 직전에 급진적 형태로 전개되어 단순한 외교적 연맹이 아니라 연방적인 것으로서의 합방론과 인재를 빌리는 차재론이 주장되었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중국과 연맹을 맺고자 하였고 영국의 경우는 보호국으로 하는 방안이 모색되기도 하였지만 연맹까지 체결하여 깊은 관계를 맺을 의사는 없었기에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4. 신해혁명 전야의 수구, 개혁, 혁명1) 의화단사건 전후의 수구파와 양무파변법운동이 서태후가 발동한 정변으로 좌절되고 개혁세력은 된서리를 맞았다. 개혁운동의 좌절 이후 조정은 수구대신이 권력을 장학하고 개혁조치를 원상으로 회복하는 등 수구적, 반동적 분위기가 지배하였다. 전제왕조 아래에서 그것을 전복하는 엄청난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한 거의 최초의 인물은 손문이었다. .
    인문/어학| 2010.06.08| 9페이지| 1,000원| 조회(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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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c 중국사회 2장
    『19세기 중국사회』 2장 요약 및 비평목차Ⅰ. 서론Ⅱ. 본론1) 국제 질서의 형성2) 조공질서의 붕괴와 청조3) 근대 산업사회의 건설4) 입헌군주제도5) 공화제도6) 새로운 사회관계Ⅲ. 결론Ⅳ. 서평Ⅰ. 서론청 말의 국제질서는 여전히 중화적 세계 질서의 틀 속에 조공체제였다.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어 간다하더라도 이 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과정에서 청과 구미국가의 국제관에는 차이가 있었고 끊임없는 갈등이 발생했다. 하지만 1874년 대만과 유구의 일본귀속은 조공국가의 위상변화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월남과 조선이 차례로 중국의 조공국가에서 식민지화 되었다.청조는 19세기 중엽에 전통적인 산업체제를 부국강병에 맞게 개편하기 위하여 산업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정치체제 역시 입헌군주제가 시도 되었고 이에 앞서 공화정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이와 같이 이글에서 새로운 사회관계에서 전통적인 사회관계가 19세기 중반 이후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측면에서 검토해 보도록 하자.Ⅱ. 본론1) 국제질서의 형성전통적으로 남경조약 이전의 중국의 대외관계는 중화적 세계질서로서 중국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중국의 세계질서는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었고 이 힘의 관계는 질서를 구성하는 중요요소이다. 다른 한편 조공질서는 무역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를 조공무역이라 한다. 그러나 남경조약은 중국 중심의 조공질서와 만국공법적인 무역질서의 충돌이었다. 청조에게는 치욕적인 내용이었지만 천자가 외국인에게 고루 은혜를 베푼다는 전통적 이념으로 이해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서구국가들에게 조약개정을 요구하는 빌미를 제공하였고 청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다시 전쟁을 일으켜 북경을 함락시키고 새로운 조약을 요구하였다. 조약 내용 중 영국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공사의 북경주재였다. 이는 외교에서 중앙정부를 직접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1860년 체결한 북경조약은 중 만국공법이 작동하는 국제질서에 본격적인 편입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외면적 관찰일 뿐이고 여전히 중국적 세계질서는 존재하고 있다.2) 조공질서의 붕괴와 청조184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청조는 유럽이 강요하는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가면서 위기의식이 심화되었다. 이는 조공국에 대한 정책의 변화로 나타났다. 조공국을 조공관계에서 열강의 대식민지 정책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조공국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국제관계에서 보여준 청의 행동은 조공국의 희생을 발판삼아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고 하였다. 유구는 일본과 분도 균점으로 해결하려 하였고 월남 역시 분계 안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여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 하였다. 이에 임오군란을 기회로 삼아 청군을 주둔시키는데 이는 반 식민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청상민무역장정을 체결하고 경제적으로 침략하였고 내정에도 간섭하였다. 이러한 것들 모두 청이 구미열강의 조약체제를 수용하면서 조공국가에게는 자국의 이익까지 얹어서 강요한 또다른 식민지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3) 근대 산업사회의 건설① 서구식 공업화의 시작과 확대아편전쟁 패배의 원인을 체제의 모순에서 찾기보다 영국보다 못한 무기체제에서 찾으려 하였다. 이것이 중국공업화를 특징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는데 군사공업이 주가 되었다. 군수공업은 우선 j1860년대 해양으로부터 외국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후 계속적으로 개항장에서 내륙도시에도 설립되어 군수공업의 지역적 기반이 확대된다. 하지만 생산된 제품의 질이 생산 목적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했다.위와 같이 군사공업이 시작된 청정부의 산업화를 1단계 산업화라 한다면 2단계는 정부가 주도하는 본격적인 산업사회가 건설 된다. 이는 연료와 재료의 자급이 필수적이었기에 광산을 개발한다. 광산 운영방식에 관에서 감독하고 상인들이 운영하는 관독상판식으로 운용되었다. 하지만 수송체계, 제련기술, 다른 공장과의 연계가 부족하였다는 문제가 있다.관독상판 방설되었다. 하지만 병사 한명이 압사당한 것을 계기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에서 파괴하게 된다. 철로 건설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압사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파괴, 조상의 분묘훼손, 적을 유인, 농작물 해친다는데에 있었다. 철도가 외국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라는 청조관료들의 인식도 한 몫 하였다. 하지만 이후 이홍장, 설복성 등 상무와 운수, 군대동원의 이점을 들어 철로 건설에 호의적인 관료들의 주장으로 몇몇 철로가 건설되었다.우편산업도 새로운 체제로 바뀌었다. 우편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면서 우편체계를 전 세계로 확대하였다. 대도시간은 대청우정이 내지 사이는 민신국이 담당하였다. 전신과 전화도 도입되어 1876년 천진과 대고사이에 전신이 처음 놓여졌다. 대만사건뒤 전보총국이 개설되어 전국적인 전신망을 건설하게 된다. 전화도 조계지에서 시작되었고 외국에 전화의 이익을 외국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북경과 천진에 전화총국을 개설하였다. 외국 전화도 조계 밖으로 확장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근대적 통신망의 개시는 외국의 침략과 더불어 진전된 것이었다.③ 무역의 확대와 중상주의적 국가기구자본주의 발달로 대외무역이 확대되었다. 청조의 수출은 농산물 중심이었고 수입은 아편과 면제품으로서 청조가 공업제품 생산에서 외국에 뒤지고 있었다. 교역확대로 외국기업이 청국에 진출 기회가 늘어났다. 근대적 산업체제와 교통 통신상의 건설, 국내외의 교역확대와 외국기업 진출 등은 청 정부나 일부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상전론적 개혁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신상층이란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상인층의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심화 되었다. 이들에 의해 상부나 상회가 설립되었고 이들은 기존에 동업자간의 영역구역지정, 판매 경쟁의 제한, 가격통제, 제품의 규격과 품질의 획일화등 기존의 행회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민족주의 요소들이 첨가되어 서구의 침략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이는 정치 사회적인 힘을 갖는 새로운 상공업자 단체의 출발을 의미하였다.4) 입헌심으로 입헌제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둘 다 입헌군주제 실현목표는 온건한 방법을 통해 국가 위기를 극복하여야 한다는데 두어졌다.③ 입헌군주국가 추진과정러일 전쟁에서 일본 승리 뒤 정부가 본격적으로 검토하게 된다. 다섯 대신을 헌정고찰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파견되어 헌정의 예를 살피게 하였다. 특히 일본에 큰관심을 두었는데 이는 군주가 대권을 장악하고 있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청정부가 내놓은 헌법대강도 일본 경험 토대로 작성되었다. 헌정고찰 통해 대신들은 우선 입헌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그에 따른 준비기간과 지방자치의 문제, 관제 개혁 등을 건의하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군위의 안전과 더불어 대외주권을 옹호하는 것이 젠제 되었다. 이것은 의회제를 통한 중앙집권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칙령 발표전 황제의 권리를 17개로 작성하여 군주의 절대 통치를 헌법으로 보장하려 하였다.이후 1906년 9월 1일 예비입헌 상유를 공포하였다. 주요내용은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헌정실시하기 위한 제도를 갖추어야 하고 둘째, 관제 개혁에 착수 할 것 셋째, 헌정을 실시할 기간은 진보의 지속을 보아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앙집권적 관제개혁이 단행되어 11개의 행정부가 탄생되었고 총독과 순무제는 폐지되었다. 여기서 삼권분립이 강조되었으나 황제 중심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입헌제와 관련된 문제를 다룰 고찰정치관을 두었는데 이들은 입헌정체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법률정비 따위를 담당했는데 입헌정체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준비기간을 9년으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3년으로 줄어들었다.대강과 준비기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입헌군주국가의 형태의 국가라고 하지만 그것은 군주의 권한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④ 국회개설 운동과 자의국, 자정원지방자치 필요에 따라 지방의회 격인 자의국이 개설되었고 의원도 선출하게 된다. 의원자격은 교육받은 식자층, 일정한 재산을 가진 자로 제한되었다. 이드 의원은 정식국회가 빨리 열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지만분정하려고 시도하였다. 여기서 민의, 민권은 제대로 고려 될 수 없었다.그럼에도 입헌운동과정에서 대중 호응 이끌어 냈기 때문에 신해혁명의 보조차원이나 청 정부가 정권을 유지하려는 기만용이었다고 평가하기보다 중화민국 기본들을 만든 제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5) 공화제도① 공화제의 발상과 계기청일전쟁과 의화단 전쟁의 패배는 전제정치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새로운 지식인들은 청조타도로 몰아넣은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황제체제는 청나라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무제를 해결하기에는 큰 난점이 있었다. 첫째 지배력의 한계이다. 청조는 인구가 증대되어 국가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 증가하고 있었다. 둘째는 자원과 인구의 불균형을 해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제체제로는 이를 해결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일본에 유학간 청나라 학생들 사이에 청조타도 분위기가 고조되었다.② 공화제 국가의 이상손문은 전제체제의 대안으로서 합중정부를 주장하였다. 헌법국가 건설에는 세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첫째 단계는 국법이 통치하는 시기로 청 왕조 아래의 폐단을 일소하는 시기이다. 두 번째 단계는 첫 번째 단계를 3년간 시행 후 효과가 있으면 약법의 단계로 군정부와 인민상호간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가 끝나면 마지막 단계는 헌법의 시기이다. 이후 국민이 대총통과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헌법에 따라 정치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이었다. 이는 위로부터 진행되는 민주정체이다.공과제국가가 건설되었을 때 사회 경제 체제는 손문이 주장했던 민생주의(평균지권-오르는 땅값은 국가가 가짐)를 주장했고 호한민은 토지국유론과 지주제 폐지를 주집신은 지주제 폐지를 주장, 유사배는 토지몰수와 토지혁명을 주장하였다. 당시 중국의 문제가 과도한 인구와 토지를 비롯한 자원의 고갈이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토지정책은 큰 의미가 있다.③ 공화제 운동의 전개흥중회, 의화단 사건, 광복회와 같은 중국의 혁명적 분위기는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의 당시 운동의 목표가 만주족 지배의 종결과 .
    인문/어학| 2010.06.08| 8페이지| 1,000원| 조회(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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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과 패왕별희를 보고
    ‘인생’과 ‘패왕별희’에 나타난 중국 근현대사Ⅰ. 들어가는 말Ⅱ.‘인생’의 줄거리와 그 의미Ⅲ.‘패왕별희’의 줄거리와 그 의미Ⅳ. 마치면서 -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Ⅰ. 들어가는 말인생과 패왕별희는 격변의 시대인 중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중국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영화이다. 시대배경을 모르고 이 영화들을 본다면 그냥 재미있는 영화 흥미있는 영화 평점높은 영화로 기억에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영화가 되었다. 군벌시대, 장개석집권시대, 일본 제국주의시대, 공산주의 시대, 대약진, 문화대혁명 등 혼란기의 중국 대륙을 알고 난 후의 영화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그런 영화로 다가왔다.Ⅱ. ‘인생’의 줄거리와 그 의미인생의 줄거리부터 살펴보자. 인생은 주인공 부귀의 일생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중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살아가는 한 남자의 40여 년에 걸친 인생역정을 그렸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부귀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다. 집문서가 넘어가던 날, 아버지는 충격으로 숨을 거두고 아내는 집을 나가 버린다. 그러나 곧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오면서 그는 밥벌이를 위해 그림자극을 시작한다.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내전이 시작되자 부귀는 국민당 군대에 끌려가 군인들을 위해 그림자극을 연기한다. 어느 날 추위에 떨며 일어나 보니 눈으로 뒤덮인 들판 위에는 국민당 군인들의 시체가 가득하고 눈이 녹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공산군이 들판을 차지한다. 공산군에게 그림자극을 보여주며 목숨을 유지하던 부귀는 전쟁이 끝나자 가족들에게 돌아간다.얼마 후 중국에는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전개된다. 잠결에 학교에 불려간 아들은 담장에 기대 졸다가 후진하는 트럭에 부딪쳐 무너진 담벼락에 깔려 죽고 만다. 다시 세월이 흘러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맞이한다. 의사들이 반동분자로 몰려 쫓겨나고 새파란 학생들이 병원을 차지한 상황에서 홍위병과 결혼한 후쿠이의 딸 봉하는 아이를 낳다가 과다출혈로 숨을 거둔다.인생은 부귀의 인생 역정을 통해 문화 대혁명이 중국 인민들에게 강요한 가난과 시련을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조명, 비판했다. 부귀가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새 생활로 그림자극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가 전쟁포로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다시 가족의 품으로 되돌려 준 것은 그림자극이다. 또 한 번은 자신이 도박으로 탕진한 그 집으로 인하여 용이가 사형에 처하게 되는데 부귀는 거기서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그만큼 공산국가로 전환되는 과정이 중국인들을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인지 보여준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긴장감. 그 긴장감이 부귀의 가정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것이다.대약진운동시기에 부귀는 아들 유경을 잃게 된다. 잠결에 유경은 학교에 불려간다. 학교로 불려 갈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사정. 병아리가 커서 나중에 소가 되고 소 다음에는 공산주의가 된다고 말하는 부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의 입장이 표현되어 있다. 그날 유경이는 담장에 누워자다가 후진하는 트럭에 의해 담벼락에 깔려 죽는다. 이 트럭을 몬 사람은 부귀와 함께 그림자극을 하던 사람이고 이제 높은 관리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그들 가족은 한 생명을 담보로 잡은 셈이기도 하다. 유경이 잠을 못자서 졸다가 차에 치여 죽는 비참한 현실은 우연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 상황이 부른 필연적인 비극이었다.196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자파로 몰리게 되고 의사들도 반동 학술 권위자인 주자파로 몰린다. 그 결과 아이를 낳으려던 딸 봉하가 죽고 만다. 부하의 남편이 왕빈교수를 데리고 오지만 굶주렸던 왕교수는 부귀가 사준 만두7개를 먹고 급체하고 만다. 아이를 무사히 낳을 것 같던 봉하는 어린 간호사들의 미숙으로 하혈을 하고 왕교수를 부르지만 왕교수는 이미 급체하여 도울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실패를 나타내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한번 살펴보고 넘어가자.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으며 그 힘을 빌어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펼쳐 국민경제가 자초되는 실패를 가져왔고 민생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채용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새로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휩쓸어 중국은 일시에 경직된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되거나 숙청되었고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급속히 소멸되었다.장이모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지난 수 십년 역경의 중국 역사 속에서 희생자는 바로 중국인민이었음을 보여주고 나아가 그러한 운명조차 받아들이는 인민이 있기에 사회는 진화하고 국가는 발전한다는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다.Ⅲ. ‘패왕별희’의 줄거리와 그 의미패왕별희의 줄거리부터 잠시 살펴보자. 1925년 군벌시대 중국을 배경으로 유명한 북경 경극학교에 맡겨진 두 소년 두지와 시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육손을 가진 홍등가 여인의 아들로 태어난 두지는 어머니에게 손가락이 잘리고 버림받아 극단에 맡겨진다. 길고도 고생스러운 교육과정을 마친 후 섬세한 미소년 두지에게는 당연히 여자 배우 역할이 주어지고 시투는 군인 역을 맡게 된다. '패왕별희'는 바로 그들 두 사람이 줄곧 연습해온 경극이다. 1937년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던 때 데이와 샬로는 가장 유명한 경극 배우가 되어 있었고 샬로는 홍등가의 유명한 창녀 주샨과 로맨틱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약혼자 사이인 그들을 시기와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이. 악의의 복수심에서 그는 한 부유한 후원자 유안에게 의탁하게 된다. 데이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결혼하는 TIF루와 주샨, 그 두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낀 데이는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1945년 일본군이 물러가고, 데이는 일본군을 위해 노래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다. 그러나 한 유력한 국민당군 고급장교가 데이의 연기를 보기 위해 북경을 방문함으로써 그는 풀려난다. 그의 범죄가 공연을 수락해 저질러진 것이고 또 그로부터의 면죄 역시 공연을 받아들여 이루어졌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1949년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해방시키고 경극 역시 혁명 이데올로기를 채택함으로써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열렬한 공산주의 찬양자인 양자 샤오 시의 냉철한 비난과 힐난을 받고 데이는 경극배우 생활을 청산한다. 세월은 흘러 문화혁명의 불길이 치솟는 1966년, 샤오 시가 이끄는 홍위병들에게 샬로는 심문당하게 디고 공개 자아 비판 때문에 이성을 잃은 샬로는 데이의 동성애 범죄를 폭로하고 이에 맞서 데이는 주샨의 과거 창녀였음을 고발함으로써 독기에 찬 공격을 가한다. 자기통제력을 잃은 샬로는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증언함으로써 주샨을 자살로 이끈다. 텅빈 경극장을 함께 걸어가는 데이와 샬로 1977년. 그들은 '패왕별희'의 마지막 공연 데이는 샬로가 차고 있던 보검을 꺼내 자살하고 만다.영화는 장개석 집권 시대, 일본 제국주의 시대, 문화 대혁명 등 파란만장한 시대를 걸어온 중국인들의 한(恨)을 표현하고자 했고, 그 시대 속에서 상처 받아야 했던 중국인들을 이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하고자 한 것 같다.영화는 1977년 다시 무대에 선 데이와 샬로를 보여주고 곧바로 회상으로 들어 가 1924년 군벌 시대의 베이징으로 장면을 전환한다. 그리고 1937년 일본군의 베이징 점령, 1945년 국민당 정권의 성립, 1949년 중국 공산당 해방, 1966년 문화대혁명을 거친 후 다시 1977년의 무대로 돌아온다. 이와 관련하여 감독이 하고많은 경극 작품 중에서 굳이 '패왕별희'를 선택한 까닭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패왕별희'는 초패왕 항우가 한고조 유방과의 싸움에서 궁지에 몰려 그의 애인인 우희와 비극적 이별을 맞이하는 장면을 극화한 것이다. 우리는 '역발산기개세'의 호걸인 항우가 하급관리에 불과했던 인물인 유방에게 패하는 역사적 사실에서 역 사의 무상함, 권력의 유동성, 영웅의 비참한 종말 등 주로 역사의 역동적인 변모 과정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여기 에 더하여 패왕과 우희 사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냉엄한 역사적 현실 속에 온기를 불어넣는 이야기로서 인간적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패왕별희'는 중국의 복잡한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메타포로서 의도적으로 선택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데이와 샬로, 그리고 쥬산의 삶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과 동시에 경극이라는 예술의 구조와도 연관 지어져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문/어학| 2010.06.08| 4페이지| 1,000원| 조회(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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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오리엔트 발표문
    머 릿 말서양은 오랫동안 그들자신의 기준으로 세계를 재단해왔고, 그러한 사고양식을 전파하고 주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러한 사실은 굳이 이 발표의 핵심으로 논하고자 하는 Andre Gunter Frank의 『리오리엔탈리즘』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역사적(歷史的)사고와 비판의 관점을 견지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법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성향에 따라서는 “다소 식상하지 않은가?” 라는 지적이 나올 법도 한데, Frank는 역사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제기들을 훌륭하게 해결하면서, 자기 나름의 논리들을 명쾌하게 묶어내었다. 물론 Frank가 펼친 담론세계 및 주장에 대해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많은 논의들이 오가면서 한계점을 드러낸다든가, 많은 비판들이 대두되고 있기도 하지만, Frank의 이 저작은 그러한 비판이 가지는 무게만큼 독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Andre Gunter Frank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그것이 말하고자 바는 궁극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짚어보도록 하자.1서장에서부터 강조해온 이 책의 테제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좀더 ‘인류중심적’인 관점과 시각을 정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근세 세계경제사에서 찾아내 제시하고자 한다 근대의 역사는 유럽인에 의해 만들어졌고 유럽적인 역사가의 지식이었다. 이 책은 유럽중심적 역사서술에 도전하는 것이며, 1400년과 1800년 사이의 세계경제에 대해서 글로벌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목표이다. 1800년 이전에 세계경제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한 지역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시아였다. 중국의 청.명조, 인도의 무굴제국,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터키의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아니 유럽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정치적, 군사적 비중이 더 컸다. 동아시아가 여러 요인으로 인해서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2세기 전의 일이다.‘서양’은 자신을 제외커니즘을 검토한다. 여러 항목의 성장률을 아시아와 유럽을 대비하면서 정리해 봄으로써, 아시아 여러 지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비중을 알게 될 것이다. 5장은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현상의 배후에는 왜 공통의 원인, 일맥상통하는 원인이 있는지를 탐구한다. 그리고 6장은 서양의 승리가 일시적인 것인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유럽이 산업혁명을 통해 궁극적으로 세계경제를 재패했다고 하지만, 유럽의 내적요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이 과정을 글로벌한 세계경제의 논리로 해석해야 한다.앞으로의 논의는 세계경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사건과 과정을 범지구적 차원에서 평가하고 연결시키는, 조지프 플레처가 말한 ‘횡으로 통합된 거시사’를 모색하는 데 남다른 관심과 열의를 다할 것이다. 전체론적인 글로벌한 관점을 갖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시야가 좁아질 뿐 아니라 지역별, 부문별, 시대별로 확인된 사실마저도 이런 거시적 구도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 책이 주장하고 입증하려는 내용이다. 그 입증의 근거들이 다음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쭉 제시될 것이다. 다음장을 살펴보자.2세계경제의 세계화가 요즘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기승을 떨치지만 1500년이후 지금까지 세계 규모의 단일의 글로벌한 세계경제가 존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세계시장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화폐의 순환은 지역적 분업이 가능하게 만들고 경쟁을 조성했으며 그것은 지구전체로 확산되었다. 이 화폐의 순환에 대한 설명은 3장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경제에서 아시아가 적어도 13세기부터 1750년까지 유럽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유럽은 주변적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16세기의 ‘서양의 발흥’ 이전에 ‘동양의 쇠락’이 있었으며 그것들을 인과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라는 사실은 이후로도 이 글을 관통하는 주요 논점이 될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한 구체적인 세계적는 말은 할수 없지 않겠는가? 여하튼 이들은 중계무역 및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유럽에 앞서 세계의 부를 거머쥐었다. 일본도 13세기에 경제발전의 토대를 이루고 15~16세기를 거치면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일본도 주요한 은과 구리의 대중국 수출처였음은 분명하다.동양 무역의 중심지였던 중국은 명-청대에는 생산, 소비, 인구가 모두 큰 폭으로 증가하는 시기였다. 중국은 당시 3세기동안 인구가 3배나 증가했는데 그 원인은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와 일본에서 유입된 은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16c에는 동남부해안을 따라서 대외무역이 활성화 되었으며 환금작물인 차와 설탕의 생산이 많아졌다. 중국의 영남지방에서는 비단과 도자기의 수출로 얻은 은이 이 지역에 유입되었다. 중국은 경제의 상업화를 통해 더 많은 은을 끌어 들였다. 중국은 지금도 물론 세계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이때의 중국은 세계경제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국이 그 중심지에 있었던 두 가지 요인을 들어보면 먼저 생산과 수출 양면에서 중국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보였다. 특히 도자기나 비단의 생산은 따라올 곳이 없었다. 그리고 중국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은의 최종적인 ‘배수구’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외에 발트 연안국들이나 캬라반 대상들도 번성했으며, 부와 재화의 유통을 분업하여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지면상 그들의 교역품에 대한 상세한 예를 들지는 못했지만, 2장을 읽으면 세계적 차원의 무역체제와 분업체계가 실로 존재했다는 점과 이러한 세계무역체계에서 양적으로나 비율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것은 아시아 경제 그중에서도 중국경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남아시아-서아시아는 약간의 금화나 은화생산은 물론 세계적 수요가 있는 다른 상품도 생산할 수 있었다. 세계경제의 양대 중심지역은 중국과 인도였다. 제조업의 생산력이 풍부한 이 두 지역은 인도는 면직물과 견직물로 세계시장을 지배하였으며 중국경제의 견인차는 비단, 도자기, 차를 내보내어 세계의, 유럽은 아메리카에서 수입한 은의 양을 감당하지 못해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반면, 수치상으로 거의 세계은의 1/2에서 1/3가량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대륙에서는 그러한 인플레이션 현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만큼 유럽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비해서 인구규모나 경제규모가 비할바 없이 작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마 중국과 같은 양의 은이 유럽에 흘러 들었다면 유럽은 더욱더 끔찍한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43장에서 화폐의 유통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글로벌리즘’의 가능성을 제시한 프랑크는 4장으로 접어들면서 ‘글로벌리즘’에 대한 구조적 해석을 시도하고, 거기에 천착하고자 하며, 다시한번 1400-1800년사이의 시기에 아시아가 우위에 있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프랑크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측면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고 있다.첫째는 양적문제, 즉 인구?생산?생산성?소득?무역등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기 전의 이른바 ‘유럽의 팽창기’로 일컬어지는 1400~1800년의 시기에 세계경제는 실은 여전히 아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아시아는 1750년 내지 1800년까지는 인구와 생산 측면에서뿐 아니라 생산성?경쟁력?무역, 한마디로 자본 형성 규모에서도 세계경제체제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인구와 생산, 소득면을 살피자면 세계인구가 1600년 이 후 상승세였지만 아시아 인구가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명?청대의 인구는 먼옛날부터 진작되어온 꾸준한 강남개발의 결실이 활짝 꽂을 핀 시기로, 인구가 폭증한 시기이다. 특히 경제의 중심부의 인구성장률은 90%에 육박했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생산량의 뒷받침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조업과 무역에서 절대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던 아시아에 유럽인은 ‘국가무역’에 끼여들어 수입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역할조차 유럽중심주의자들의 말과는 반대로 미미하였다. 유럽이 아시아를 상대로 이뤄지는 무역보다도 아시아 내에서 이뤄지는 무역량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큰로 뻗어 있었다. 유럽인은 아시아에서 돈만 빌린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였던 금융기관을 통해 돈을 빌렸고 그 금융제도를 도입했다. 인도와 중국에 이미 구축된 생산?상업?금융제도의 운영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인도와 중국이 뻗어나간 지역 역시 유사한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근시안적인 유럽중심주의는 아직도 사람들의 의식에 잠재한다. 하지만 여러 학자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통해 기존의 모든 ‘고견’은 신화에 기초한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 실제의 역사나 사회과학에 기초한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5화폐의 유통을 비롯해 글로벌리즘, 즉 세계체제에 있어서 아시아의 본질적 우위를 논하면서, 이제 5장에서 프랑크는 앞서 말한바 있는 ‘횡적?통합적 거시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서 3,4장을 통해 충분히 접한바 있지만, 사실 프랑크의 논지는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논지아래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장에서는 거시사적 측면에서 그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프랑크는 차우두리나 월러스틴등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성과들을 수없이 인용하면서, 1400-1800년의 중요한 시기에 그 어떤 국가 내지 지역도 독립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모두가 횡으로 통합되어 영향을 주고 받는 ‘세계체제’안에 있었다는 말인데, 그 대표적인 예로 17C 중국대륙에 있어서의 은의 위기를 들고 있다. 그를 살펴보고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17세기가 들어오면서 중국은 은의 수입 급감으로 명 말기의 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그리고 황제나 관료가 장악 할 수 없는 부정적인 변수, 해외에서의 생산되는 은의 들쭉날쭉한 양, 서양의 보호주의 성향 등이 중국을 더욱더 어렵게 했다. 은이 부족하여 관료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였고 조정의 곳간은 사실상 텅 비어있었다. 일본 같은 경우는 반대로 은의 수출량을 줄이고 생산의 상당부분은 국내 공급으로 돌려 통화체제가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은의 부족과 화폐위기는 세계시장의 은의 가치를 하락시킨 아메리카 은광이 발견것이다.
    인문/어학| 2010.10.10| 9페이지| 2,000원| 조회(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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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앙 변법의 정치적 함의
    상앙 변법의 정치적 함의이 논문은 전국시대 중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각국에서 부국강병책으로 이루어졌던 일련의 개혁과정 중에서 진의 개혁을 이끌었던 상앙의 변법에서 그 정치적인 의미를 도출 하려하고 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상앙의 법치주의는 패정, 국가지상주의 무단적인 전제군주론으로 평가절하 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논문은 상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함께 무엇을 의도했기에 법치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는가를 추론하고 있다. 전국시대 군주들은 나라를 찬탈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정치영역에서 자신의 위치를 국가권력의 정점에 위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했다. 그렇기에 각국은 법치주의자들을 재상으로 내세우고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변법을 실행했었다.상앙이 실행한 변법을 살펴보면 상앙의 세계관에 따라 변법을 실행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첫째, 보수주의자들이 과거를 유지하려 한다면 상앙은 시대 변화를 긍정하고 현 상황에 가치를 부여하였다. 둘째, 인간을 이기적으로 보고 그에 대한 이해이다. 상앙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리고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합리성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형벌을 앞세운 법제에 의한 통치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상앙은 법제에 의한 통치는 신상필벌의 엄격성과 평등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국가의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원동력이 되고 이러한 기반은 군주의 권력으로 파생한다는 점을 알고 군주의 출현을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면에는 군주-신민간의 관계를 법제로 구속함으로 군주로부터 파생된 신민의 관계성으로부터 의무의 인지와 이행을 유도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즉, 군주제하에서 군주 자신의 의무준수가 신민의 복종과 순응을 가져오며 그로부터 내부적 질서와 안정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상앙의 법치 주장은 법이라는 객관적 기준에 따라서 군주-신민 양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정성을 확보함으로서 군주의 지배와 신민의 복종이 쌍무적인 관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관계로부터 내부적인 권력의 강화와 보상-처벌의 체계에 따라서 신민의 합리적인 행동과 사적 이익을 확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앙의 변법은 바로 의무에 대한 인지와 이행을 강제적으로 유도해서 규범화하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다.
    인문/어학| 2010.10.10| 1페이지| 1,000원| 조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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