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학의 이해희극과 비극-희극과 비극의 차이, 그리고 현대의 희극과 비극-영어영문학과 20090155 황혜림Ⅰ.서론희극과 비극의 정의희극이란 경쾌하고 흥미 있는 줄거리와 인물을 등장시켜, 인간성의 경직함과 부조화 또는 사회의 불합리를 웃음으로 온화하게 향수하고 즐기는 극이다. 따라서 도덕적 의미에서는 인간을 교정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미학적 인식에서 보면 인간의 심성을 고양시켜서, 웃음 가운데서 더 한층 건강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희극의 특징을 잘 담고 있는 작품으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이 있다. 반면 비극은 또 다른 연극의 대표적 양식으로써, 희극과 대조된다. 비극은 인간의 마음속에 생기는, 자신의 동료나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의 갈등의 결과로 생기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을 취급하는 극이다. 이에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있다. 이 두 작품을 통해 희극과 비극의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Ⅱ.본론희극과 비극의 차이등장인물의 차이희극과 비극을 구분하는 희극과 비극의 차이점은 많은 부분이 있겠지만 우선 등장인물의 차이를 꼽을 수 있다. 희극과 비극에서의 주인공은 그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따라서 그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 등은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희극에는 평균보다 저급한 보통 이하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저급한 인물이란 인간적인 결함이나 어리석음, 약점 등을 지닌 인물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적 주인공의 이러한 성격적 결함을 하마르테마라는 용어로 규정했다. 비극적 주인공의 하마르티아가 보다 근원적이고 내면적인 성질을 갖는 것이라면 희극적 주인공의 하마르테마는 보다 결과적이고 외적인 성질을 갖는다. 흔히 하마르티아는 악덕이나 비행에 의한 결과가 아닌 어떤 판단상의 실수 로 정의되고, 하마르테마는 타인에게 고통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실수 혹은 결함으로 정의 된다. 하마르티아가 올바른 결정이 취해져야 할 경우에 필요한 지식의 결여라면, 하마르테마는 올바른 지식의 습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의 각각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름’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오늘날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도마에 올라 무참한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라 말장난으로 빚을 안 갚는 방법이나 가르치는 사이비 선생에 불과하게 묘사되며, 또한 스프레프시아데스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아들 때문에 진 빚을 떼어 먹을 방법을 찾던 스프레프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언어 기술에 혹해 아들을 소크라테스의 학원에 들여 말장난을 배우게 한다. 이 등장인물 역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평균보다 저급한 보통 이하의 인물로 평가된다. 결국 희극이란 보통 이하의 악인이 지닌 일종의 과오나 결점을 모방하는 형식이다. 희극적인 행동은 바로 어떤 인물이나 상황이나 사고방식이 정상에서 벗어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즉, 평균적인 것에 비추어 비정상적인 것, 저급한 것이 지니는 불균형이나 부조화에서 희극적 행위가 생겨나는 것이다. 희극적 불일치라는 용어는 이러한 희극의 성격을 적적하게 지적해준다.반면 비극의 등장인물들은 ‘비극적 결함(Tragic Flaw)’을 가지고 있다. 비극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상대와 맞서 싸우는 투쟁의 기록이라고 할 때 그 상대가 바로 자신의 성격적 결함 혹은 가치관의 잘못, 판단의 착오등인 것이고 그 싸움을 통해 주인공은 고통을 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즉, 비극적 결함은 주인공을 파멸로 이끌어 결국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에는 이 ‘비극적 결함’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작품 ‘오이디푸스’는 예언자가 라이오스왕을 살해한 사람에 대해 입을 다물려고 한 것에 대해 오이디푸스의 충동적이고 조급해하며 끈질기게 그 대답을 들으려고 한다. 자신 스스로 이 대답을 얻어냄으로써 비극, 즉 자신이 파멸하는 결과를 만것, 입을 다물려고 한 예언자가 입을 열게 한 것 등 이 모든 행동들은 모두 주인공인 오이디푸스 그 자신의 성격적 결함으로 인해 결국 파멸로 이르게 되는 과정들이다. 그의 결함 중 하나인 성격적 결함을 보자.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지적능력으로 왕이 되게 한 것은 그에게 자부심을 안겨다 주었고 자신감에 너무 투철하여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을 호언하게 한다. 테이레시아스와의 언쟁에서도 테이레시아스조차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는데 “그 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와서 그저 내 기지로 괴물을 눌러버렸소.” 라고 말하는데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비극 작품인 ‘오이디푸스’의 등장인물은 비극적 결함을 가진다는 점에서 희극의 등장인물과는 차이를 보인다.결말의 차이우리가 이 둘을 가장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다른 요소는 바로 결말부분이다. 희극은 주로 해피엔딩으로 막이 내리지만 비극은 죽음과 같은 파멸로 종결된다. 희극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경쾌하며 웃음이 위주가 된다는 점이다. 희극의 웃음은 인간성의 불합리나 사회의 모순을 꼬집어 내는 데에서 빚어지는 웃음이다. 그러므로 희극에는 기지와 풍자와 해학 등의 요소가 작용하며, 동시에 비판 정신이 강조된다. 희극은 행복하고 즐겁게 결말을 맺는다. 주동인물이 처음에는 패배하고 고전하지만, 결국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행복에 이른 것이 희극이다. 희극의 인물은 서민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비극의 인물이 고귀한 신분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점과 서로 다르다. 이 부분을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구름’에서 찾아보자면 이러하다. ‘구름’의 경우 스프레프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의 궤변론을 배워 자기가 진 빛을 말소하려고 학교로 가서 수업을 듣는 것부터 해학적이다. 이후에는 스프레프시아데스가 그의 아들을 자기대신 학교에 보내서 아들의 웅변솜씨가 확고히 증가하여 나중에는 아들과 싸우지만 그 마저도 심각성을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만화 ‘톰과 제리’와 같은 모습을 연출한고 결말부분에 가서 해학은 절정을 이룬다. 스프레프시아데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뺨을 맞고 화가 난 것을 소크라테스의 사숙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 가장 큰 웃음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자칫 심각한 상황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지은 것은 아리스토파네스만의 해학적인 결말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반면 비극은 불행이나 고통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며, 결말은 언제나 불행한 내용이다. 비극은 희극의 결말과는 반대의 결말을 낳음으로써 슬픔을 자아낸다 할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은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자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빠져든다. 그러므로 비극의 결말은 주동적 인물의 불행과 파멸로 특징져진다. 이는 대표적인 비극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에서 확연히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왕은 악인이 아니다. 오히려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였으나 운명에 따라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인물로 전락해버린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극적 결함을 가진 인물인지라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더불어 비극적 결함이 그를 망쳐놓게 되었다. 피하려고 했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이끌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며, 알고 싶지 않았던 그 사실을 자신의 행동 때문에 알게 되고 괴로워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방랑자가 되어버린다. 한때 최고의 높은 자리에 있었던, 존귀하고 명예로운 자리에 있던 오이디푸스가 한순간에 방랑자로 추락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비극의 과정을 보면서 관객들은 주인공의 운명에 대해 연민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런 고통과 운명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대단원의 막이 내리면 연민과 공포의 감정 속에서 고조되었던 긴장이 해소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Ⅲ.결론현대에 비극이 가능한가?우리는 비극이 고대라는 특수한 문화적인 상황에서 등장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문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비극이 가능할까라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왜 현대에 비극이와 같다. 고대의 시기는 어떤 이론가에 따르면 인간이 선험적 고향을 가졌던 시기라고 한다. 즉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고, 공동체 속에서 인간이 존재했던 시대를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인간은 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신과 하나가 되었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는 관객들이 무대의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그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으며, 공감과 반응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던 바로 그 시기였기 때문에 비극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많은 면에서 고대와 다르다. 앞에서 언급했던 선험적 고향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바로 현대이다. 인간은 공동체적 유대감을 상실하였으며, 인간에게 작용하는 운명의 중요성은 약화되었다.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아무도 모르며,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이 더 크게 작용하는 시대이다. 즉, 고대의 비극을 바라보는 눈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무대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등장인물의 행동과 모습에 공감하고 반응하기는 더 이상 힘들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등장인물과 공감할 수 없다. 또한 유대감을 나눌 수 없다. 관객은 주인공의 운명에 대해 전혀 연민을 느낄 수 없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이 부분을 살펴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왕의 계급이다. 또한 이 작품은 왕족들의 삶을 다룬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이 쓰인 당시에는 계급문화가 있던 시대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는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이 더욱 잘 받아들여지며, 공감과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그렇지 않다. 현대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식으로 계급적 위치가 존재한다고 해도 고대 시대의 계급과는 다른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현대에서 오이디푸스처럼 한 계층에서의 갈등이 쉽게 공감되고 환영받기는 쉽지 않다. 주인공과 독자들의 신분조차 다르기 때문에 공감을 얻어내기에는 더욱 힘들 것이다. 게다가 운명요소가 덧붙여지기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더욱 몰입이 어려울 가능성도 존재한다. 다시다.
..PAGE:1the TRUMEN show..PAGE:2줄거리 소개..PAGE:3CONTENTSCONTENTSCONTENTSCONTENTS보험회사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샐러리맨인 트루먼 버뱅크.그의 모든 생활이 감시되는 가 방영된지 10,909일!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이 감시되고 방영되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PAGE:4CONTENTSCONTENTSCONTENTSCONTENTS출근을 하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조명을 목격하고 놀라는 트루먼.이 외에도 갑자기 광고를 하는 듯이 이야기하는 지인들의 모습에 당황한다.점점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트루먼은 의심을 갖기 시작!..PAGE:5CONTENTSCONTENTSCONTENTSCONTENTS어느 날 익사한 것으로 알던 아버지가 낯선 사람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목격!그 결과, 그는 자신의 생활이 뭔가 평범치 못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주변인물은 모두 배우, 사는 곳은 스튜디오임을 실비아를 만나서 알게 된다...PAGE:6CONTENTSCONTENTSCONTENTSCONTENTS실비아가 피지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는데…모든 배우들과 상황은 그가 피지로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하지만 트루먼은 감시를 피해 도망에 성공하고 방송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PAGE:7CONTENTSCONTENTSCONTENTSCONTENTS실비아를 찾아가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 배를 타고 도망가는 트루먼!트루먼이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방송 관계자들은 날씨 시스템을 이용한다!겨우 도망에 성공했다고 생각했으나 트루먼은 바다도 세트장임을 알게 된다...PAGE:8CONTENTSCONTENTSCONTENTSCONTENTS세트장의 끝에 다다른 트루먼은 마지막 시험이 빠진다.트루먼쇼 기획자는 그를 설득하려고 하지만 트루먼은 탈출을 선택합니다.애청자들은 그의 결정에 환호하고 는 방송이 중단된다...PAGE:9영화 속 클래식..PAGE:10CONTENTSCONTENTSCONTENTSCONTENTS트루먼의 출근길 1778년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제 11번의 3악장터키 군악대 메레테르하네의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음악
에밀리 브론테 장편소설『폭풍의 언덕』분석1. 들어가며에밀리 브론테의 장편소설 『폭풍의 언덕』은 자아의 세계와의 갈등 구조를 띠고 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가 대부분 성공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자아의 승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히스클리프가 가정부 넬리에게 자신이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통스러운 내면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보복 행위를 변명하는 모습으로 인해 결국 자아가 좌절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캐서린이 죽고 난 뒤의 복수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되찾을 수 없다는 상실감을 상기시켜 줄 따름이므로 히스클리프는 마침내 복수의 무의미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폭풍의 언덕』이 단순히 한 남자와 여자의 로맨스 과정에서 복수극까지 이어지는, 단순히 세계와 자아와의 싸움에서 자아가 패배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본고에서는 『폭풍의 언덕』 속에 등장하는 공간과 두 명의 서술자,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가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결말 부분을 통해 폭풍과 마주선 자아를 고찰해보고자 한다.2. 작품 분석2-1. 작품 속 공간의 의미이 소설은 워더링 하이츠와 스러쉬크로스 그레인지라는 독특하고도 구체적인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공간이 작중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을 형성하는 실체가 되고 오탁번·이남호, 『서사문학의 이해』,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1, p.95., 인물들의 성격과 관계에 관한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히스클리프와 언쇼가는 워더링 하이츠를 대표하는 집안이고, 린튼가는 스러쉬크로스 그레인지를 대표하는 집안이다. 주인공들이 처한 이러한 공간의 차이는 곧 작품의 주제와도 연결되며, 현대의 소설 속의 공간은 행위나 사건 그리고 작품의 의미를 강하게 규정한다. 위의 책, pp.97~99.워더링 하이츠와 스러쉬크로스 그레인지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양대 축을 형성하면서 긴장감을 유발하는 공간적 배경이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에 자리 잡은 워더링 하이츠는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는 원초적인 장소이다. 그곳의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기질은 히스클리프라는 인물의 성격을 통해 생생하게 구현된다. 캐서린 역시 그곳에 불어 닥치는 폭풍과도 같이 강하고 격정적이다. 반면 조용한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잘 다듬어진 정원으로 둘러싸인 스러쉬크로스 그레인지는 문명사회의 인습, 예의범절, 규범 등으로 규제된 현실 공간을 의미한다. 자연에 노출되어 있는 하이츠에서 사는 사람들의 성격은 거칠고 강하며, 인위적으로 정돈된 정원에 둘러싸여 있는 그레인지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은 온화하고 나약하다. 워더링 하이츠의 거친 이미지는 소설 첫 페이지에서부터 나타난다. 첫 장부터 꾸밈이나 장식이 전혀 없는 하이츠의 거실 풍경이 자세히 묘사되는 가운데, 특히 집안의 타오르는 난롯불이 강렬하게 포착된다. 이는 스러쉬크로스 그레인지에서와는 다른 격렬한 삶의 불길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안에는 커다란 난로에 불이 타오르고 잇었는데 큰 방을 비추는 불빛이라고는 그 난롯불뿐이었어. 방바닥은 고루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어릴 적엔 번쩍번쩍해서 늘 내 눈길을 사로잡던 백랍 접시도 녹이 슬고 먼지가 앉아 거무칙칙했어. 하녀를 불러 침실로 안내를 받아도 좋겠느냐고 나는 물어보았어. 그런데 언쇼 씨가 대답하지 않는 거야. 그는 내가 잇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듯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어. 정신이 나간 듯했고, 거동 전체가 사람을 싫어하는 눈치여서 다시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어.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민음사, 2005, p.227.이사벨라가 히스클리프와 도망친 후, 넬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그레인지에서 편안하게 자라온 이사벨라의 눈에 그려진 워더링 하이츠 사람들의 모습이나 태도로 이사벨라가 그곳에서 극심한 문화의 차이를 경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사벨라가 보기에 식당이나 침실 그리고 하녀조차 없는 워더링 하이츠는 살만한 곳이 아니다.워더링 하이츠의 공간적 특징은 록우드와 캐서린의 꿈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도시에서 휴가 차 방문한 한 신사인 록우드가 남의 침대에서 꾸는 꿈으로 인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이야기가 처음 제시되는데, 이 꿈에서 록우드는 방 안에 들여보내달라던 캐서린의 유령과 대면한다. 그런데 이 꿈을 꾼 장소가 바로 히스클리프에게 감금당한 캐시가 린튼의 방조로 인해 그레인저로 도망갈 수 있었던 곳이고, 훗날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하나가 되어 죽는 곳이다. 또한 캐서린의 꿈 이야기를 통해 캐서린이 그레인지에서의 편안한 삶 보다는 워더링 하이츠에서 히스클리프와 마음대로 뛰놀던 자유로운 생활을 오히려 더 천국에 가깝게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캐서린의 꿈은 캐서린에게 어울리는 공간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며, 시적인 압축성을 띠어 앞으로 전개될 소설내용을 암시한다.2-2. 서술자 - 록우드와 넬리『폭풍의 언덕』에는 두 명의 서술자가 등장한다. 그레인지에 세를 든 런던 신사 록우드와 가정부 넬리이다. 소설 첫 장부터 등장하는 록우드의 서술 부분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록우드는 워더링 하이츠를 관찰한 내용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일정한 제약이 따른다. 오탁번·이남호, 앞의 책, p.187.넬리는 관습적인 판단을 하는 평범한 인물로서, 록우드에게 워더링 하이츠의 언쇼가와 스러쉬크로스 그레인지의 린튼가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는 내부 서술자이다. 워더링 하이츠와 그레인지 두 곳에서 하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요 등장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인임에도 풍부한 독서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정연하게 이끌어나가며, 서술자로서 뿐 아니라 하나의 인물로서 사건 전개에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령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말다툼이 조용히 마무리될 수 있었는데도 넬리가 끼어들어 캐서린의 남편 에드가에게 알림으로써, 히스클리프, 캐서린, 에드가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나고 그 결과 캐서린은 정신착란 상태에 이르게 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록우드는 자칭 염세가인 런던 신사로 세련되고 예의바르다. 히스클리프의 직설적인 거친 어투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점잖고 격식을 차린 화법을 구사한다. 외부 서술자로서의 록우드는 내부 서술자인 넬리와도 대조되는데, 넬리가 구어체 문장을 주로 사용하는 반면, 록우드는 문어체를 구사한다. 따라서 넬리의 서술로 이루어지는 부분은 간단하고 쉬운 문장이 주를 이루는 반면, 록우드의 서술 부분에서는 장황하고 어려운 문장이 많다.그런데 록우드와 넬리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작중인물보다 사건에 대한 지식이 적은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이다. 앞의 책, p.191.두 집안에서 일을 했던 넬리보다는 록우드 쪽이 더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이 바로 저 인자하신 아가씨의 남편이었군요.” 나는 내 옆의 친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이 도리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그 청년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치고 덤비기라도 할 기세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그는 곧 진정하여 나에 대해 지독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는 것으로 그 격분을 참았지만 나는 애써 모르는 척 했다. “추측이 틀리셨소! 우리 두 사람 어느 쪽도 당신이 말하는 착한 아씨의 주인이 아니오. 그 주인은 죽고 없소. 내가 내 며느리라고 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요. 저 아이가 내 아들과 결혼한 것은 사실이지만.” 에밀리 브론테, 앞의 책, p.25.위에서와 같이 워더링 하이츠에 찾아간 록우드는 캐시와 헤어튼, 히스클리프의 관계를 잘못 판단한다. 따라서 독자는 록우드가 관찰한 내용만을 믿지 그의 판단을 믿지 않게 된다.
오브제극과 연극의 결합, 연극 Lady Macbeth-연극 ‘레이디 맥베스’ 감상문-셰익스피어들어가면서대학교에 입학해서 4학년이 되었다. 그동안 교수님의 많은 영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다양한 연극을 함께 접해왔다. ‘고도를 기다리며’, ‘루시드 드림’……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거장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루는 이번 강의를 통해서 만나게 될 연극이 궁금했다. 선택된 연극은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레이디 맥베스’였다. 맥베스는 작품도 읽어봤고 수업시간에 짧게나마 배운 적도 있으며, 또한 많이 접해봤던 문학이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의 제목은 맥베스가 아닌 레이디 맥베스였다. 제목에 의문을 품으며 동시에 레이디 맥베스를 통해서 연출자들은 어떠한 내용을 관객들에게 전해줄지 기대가 되었다. 연극 감상문을 쓰기 전에 핑계를 대자면 사실 시험기간에 공연 날짜가 겹쳐져있어서 사전조사를 하지 못하고 연극을 관람하게 가게 된 것이 잘못이었다. 연극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도구들인 물, 밀가루, 찰흙… 그리고 연극인들이 펼치는 전위예술과도 같은 난해한 움직임, 신비감과 흐릿한 공포감을 가져다주는 이상한 소리들이 70분 동안 계속되었다. 보면 볼수록 심오한 내용에 처음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아마 나와 같은 일반인들은 연출자와의 별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없었더라면 이 연극 ‘레이디 맥베스’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연극을 같이 보러 간 친구들과 함께 이 연극이 시사하는 점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해보면서 연극을 다시 파악하게 되었다.오브제극과의 결합, 연극 ‘레이디 맥베스’연극 ‘레이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손꼽히는 ‘맥베스’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한 극이다. 이 극에서 눈에 띄는 점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연극의 주인공이 맥베스의 부인인 레이디 맥베스라는 점이다. 이 연극은 원작과는 다르게 맥베스의 시각이 아닌, 맥베스 부인의 시각에서 극이 그려지고 진행된다. 원작에서 나타나는 맥베스 부인의 모습은 연극의 그녀와는 차이가 있는 듯이 보인다. 원작의 레이디 맥베스는 잔인하고 냉혈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남편 맥베스를 선동해서 왕위를 찬탈하게 만들고, 무서운 잔인성으로 차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남편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에 혈안 되어 남편이 살인을 저지르도록 부추긴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 보이는 그녀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자신의 남편, 맥베스에게 왕위를 찬탈할 것을 부추기는 모습은 보였다. 하지만 70분의 연극 내내,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무언가에 의해 고통 받고 심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심적인 죄책감에 의해 고통 받는 모습은 모든 관객들로부터 비난이 아닌 동정심을 불러올 정도로 가련해보였다. 결국 그녀의 소망대로, 맥베스는 왕을 살해하여 왕위를 찬탈해냈으며 그녀는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다. 그녀를 연기해내는 연극인 서주희씨는 마치 레이디 맥베스 바로 그 자체였다. 그녀는 살인 행위 대한 죄책감을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레이디 맥베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무대 여기저기를 휘저으며 돌아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몽유병 증세를 가진 나약한 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연극의 러닝타임 내내 죄책감으로 고통 받고 죗값을 치루고 있었다.둘째는 이 연극이 오브제극과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이 연극에는 많은 도구들이 등장하는데,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밀가루, 물, 찰흙의 사용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이 오브제들은 연극 안에서 모두 배우와 다름없는 역할을 해낸다. 단순한 소품과 효과를 넘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배우처럼 작품에 개입하게 되며, 동시에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해내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 소품들 하나하나가 의미를 지니며 변화한다. 물은 정화, 밀가루는 순수, 진흙은 죄의 의미를 지니며 극에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 오브제들의 활용은 극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극의 초반부에 레이디 맥베스가 그녀의 시종들과 밀가루와 밀가루 반죽을 가지고 놀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통해 그녀의 순수하고 정화되었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맥베스의 살인 전후로 점점 빈번하게 등장하는 진흙을 통해 그녀의 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극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물을 통하여 그녀가 죄의식을 씻고 물을 통한 정화를 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오브제의 활용을 통해서 맥베스 부인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리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변화되어가는 그녀의 심리적인 상황, 특히 살인에 의한 죄책감을 시각적으로 더 잘 나타내는 것이다. 더불어 그녀의 심리를 나타내는 청각효과도 이 극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각가지 악기들과, 연극인들의 목소리로 내는 음악적 효과는 맥베스 부인의 내면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곳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청각적 이미지는 오브제와 마찬가지로 맥베스 부인의 심리에 작용하며, 그 심리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마치면서이 연극은 주인공 설정에 대한 측면과, 오브제의 활용을 통한 새로운 시도를 함으로써 관객에게 난해함을 야기한다. 사실, 관객이었던 나에게 이 연극이 펼치는 새로운 시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연극에 대한 사전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로 연극을 관람했기 때문이다. 이 연극을 관람하던 당시의 나는, 연극에서 활용되는 오브제들이 그 안에서 어떠한 중요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극의 대략적인 줄거리 정도만 겨우 이해했었다. 하지만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내 마음에 남는 것이 많았다. 아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불편한 감정이 많았던 것 같다. 감상문을 쓰기 위해 레이디 맥베스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접하면서, 오브제의 활용이 이 연극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부분이었으며 더불어 각 오브제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게 되면서 연극의 전반적인 부분이 다시 이해가게 되었다. 오브제의 활용뿐만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사실적인 연기 또한 기억에 남는다. 특히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한 연극인 서주희씨의 연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레이디 맥베스 그 자체였다. 레이디 맥베스의 내면에 있는 죄의식을 서주희씨는 그녀의 몸짓과 표정으로 나타내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모든 관객이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몸짓은 얼마나 그녀가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 받는지를 철저하게 드러내주었다. 또한, 완벽한 1인 2역을 연기한 정동환씨의 연기도 감탄할 만하다. 두 역을 넘나들면서 레이디 맥베스 안의 죄의식을 불러내는 그의 연기는 훌륭했다. 다른 조연들의 연기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 중에 내가 눈여겨본 연기자들은 바로 음악 시종들이었다. 이 연극은 청각적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에, 나는 연극을 보는 내내 음악에 귀 기울였었다. 근데 한쪽 구석에서 두 명의 음악시종들이 계속 입을 벌리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청각적 효과가 음악적 기계나 장치를 통해서 나오는 음악이 아닌, 두 시종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였다는 점에서 감탄하고 놀랐다. 전반적으로 모든 연기인들이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냈기 때문에 나는 이 연극이 연극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를 할 때, 그때서야 연극이었음을 깨달을 정도였다. 또한 무대와 관객석이 딱히 구분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몰입이 강했던 듯하다. 연극을 통해, 한 여성이 가졌던 왕위에 대한 탐욕과 더불어 그로 인한 내면에 잠재해있던 강한 죄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레이디 맥베스의 내면적 고통을 강렬하게 연극한 덕분인지, 그녀에게 날카로운 비난보다는 동정심이 들었다.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연극을 볼 수 있어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연극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이번 연극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의 내면과 활용한 도구들이 암시하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서 문학적으로 성장한 기분이 든다.
Critical View on Sigmund Freud’s Psychoanalytic Reading of Shakespeare’s Hamlet-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대한 비평-20090155 영어영문학과 황혜림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은 지금까지 꾸준히 읽혀지는 작품이다. 그만큼 ‘햄릿’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과 분석이 있는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주인공 햄릿의 행동이다. 다른 극들의 주인공들과 다르게 햄릿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 즉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바로 이행하지 않는다. 햄릿의 망설임에 대한 이유는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고 가장 널리 퍼진 견해들 중의 하나는 바로 괴테의 것이다. 햄릿의 과다한 생각으로 인해 자신의 임무 이행에 차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드는 이와 다른 정신분석학적 관점을 시사한다.프로이드가 주장한 정신분석학적 관점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석의 출발점부터 살펴보아야한다. 프로이드는 햄릿의 망설임의 원인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찾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리스 신화 ‘오이디푸스’에서 빌려온 말로서, 남자 아이가 반대의 성인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이드의 이론에 따르면 햄릿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구와 아버지에 대한 증오, 제거 욕망을 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햄릿에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차지하기 위해 제거되어야할 대상이다. 하지만 프로이드는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정신분석적 트라우마에 의해 억제된다고 주장한다. 오이디푸스기의 아동은 근친상간과 부모 살해에 대한 소망을 가지지만 이로 인한 보복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특히 소년은 거세 될 것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한다.극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행위를 실제로 행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클로디우스이다. 클로디우스는 햄릿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햄릿의 성적 욕구 대상인 어머니를 아내로 취하였다. 이는 햄릿이 어린 시절 가지고 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직접 실현시킨 것이다. 프로이드의 주장에 따르면 클로디우스는 햄릿의 욕망을 실현시킨 대리인이다. 따라서 자신의 소망을 이뤄낸 인물을 살해하는 것은 햄릿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며 결국 햄릿의 임무 수행은 지체된다는 것이다.프로이드의 관점에서 바라본 분석은 분명히 타당하고 일리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 사람을 동경하게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갖는 심리이다. 게다가 자신은 그러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억제되어 있는 상황일 때, 성취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설정 하에서 햄릿의 임무 지체는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설정이 있어야 가능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1막 2장은 햄릿의 독백과 어머니와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유명한 문구인 Frailty, thy name is woman!―의 부분은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이는 햄릿의 여성혐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문구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연결된다. 더불어 아버지의 혼으로 추측 가능한 유령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햄릿의 모습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감이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다.또한 햄릿에게 맡겨진 임무 자체의 어려움이 햄릿의 복수 지체를 이끌어낸 이유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임무 자체에 내재된 외적 어려움이 너무나 거대해서, 아무리 결연한 사람이라도 주저할 수 있다. 비록 자신의 숙부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해도 현재 숙부의 직위는 왕이다. 대중의 앞에서 한 나라의 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자신이 숙부를 죽이는 증거와 방안을 마련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성급한 살해는 위험하다. 한 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일으킬 수 있고 더불어 햄릿 또한 단순한 살인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프로이드는 그의 관점에서 햄릿뿐만이 아니라 저자인 셰익스피어까지 자신의 주장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는 글의 해석이 오직 창조적 작가의 깊은 내면에 있는 충동성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이는 억제된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즉, 프로이드는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쓴 시기가 바로 그의 아버지 사망 직후였다는 점에서 셰익스피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결 짓고 있다. 셰익스피어 또한 어린 시절의 감정(‘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받아 햄릿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는 것이다.이는 프로이드의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프로이드의 주장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설정을 가정한 상태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햄릿’의 많은 부분을 그 틀에 맞춰서 분석한 느낌이 들었다. 프로이드 또한 자신이 신경학자, 정신의학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에서는 과대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지나친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이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확신이 약함을 직접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