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치?외교 Report - 13]"TSR & TKR" and "Chechen war"- 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정치경제학② 체첸분쟁의 영속화 요인에 대한 고찰과 목러시아 정치?외교담당교수교수님학 과학 번이 름Ⅰ. 들어가기 전에Ⅱ. 시베리아 횡단철도1. TSR(시베리아횡단 철도)의 개념2. TSR의 경제적 이점들 (한반도 철도와 TSR의 연결시)3. TSR이 가지는 의미Ⅲ. 체첸분쟁의 영속화 요인1. 대외적 요인2. 대내적 요인3. 앞으로의 체첸분쟁은?Ⅰ. 들어가기 전에이 글에서는 크게 두가지를 나눠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첫 번째는 제2의 실크로드라고 비견될만큼 무궁무진한 경제적 잠재성을 지닌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가지는 경제적 이점을 한국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두 번째 주제로써 러시아 변방에서 지속되고 있는 체첸분쟁의 영속화 요인을 대내적, 대외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Ⅱ. 시베리아 횡단철도1. TSR(시베리아횡단 철도)의 개념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유럽의 모스크바와 아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총 길이 9,466km로서 우리나라 경부선의 20배가 넘으며, 지구 둘레의 4분의1에 가까운 거리이며, 거쳐가는 중요한 역만 하더라도 59개나 있으며, 시간대는 7번이나 바뀌는 말 그대로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이다. 철도의 완공은 1916년 하바로프스크의 아무르강 철교 완공과 함께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 제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내전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파괴하였고, 1924년에서야 운행을 재개하여 철도로서의 기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런 시베리아횡단철도는 극동에서부터 중동지역을 지나 유럽을 해상/육상, 해상/육상/해상 의 형태로 연결 할 수 있는 복합운송체계이며, 현재 러시아 역내 화물운송을 담당하고 있다. 전구간이 복선화 되어있으며, 전 노선의 약 96% 가 전철화구간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의 동북아-유럽간 운송거리는 해상운송의 약 50%수준으로 연간 1억톤의 화물과 20만TEU의 통과 컨테이너를 극동아시아와 유럽간을 수송 할 수 있다.분을 부산항과 광양항으로 빼올 수 있게 될 것이고, 대련항 물량의 10%, 천진항 물량의 5%가 경의선을 이용할 것이다. 한편 경의선은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철도의 낡은 인프라, 소령붕괴 이후의 복잡해진 통관절차, 인상된 철도운임, 높은 운송사고율, 그리고 유럽항로 선사들이 경쟁적으로 해상운임을 인하함으로써, 1990년대에 들어서는 물동량이 계속해서 줄었고, 현재는 철도용량의 절반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의선을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시킨다면, 이 철도의 활용도를 높여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는 남북한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주변국들에게도 이점을 가져다 주게 될 것이다. 현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는 한국과 일본화물은 자국 항구에서 러시아 보스토치느이항까지 해상 수송된 후, 다시 이곳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한다. 하지만 경원선이 복원된다면, 이 화물을 철도로 최단거리로 시베리아 횡단철도까지 연결할 수가 있다. 물론 경의선에서 가더라도 큰 차이는 없다. 평산역에서 청년이천선으로 나가거나, 평양에서 평라선으로 꺾어들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할 수가 있다. 2005년의 한국-유럽간 컨테이너 물량은 약 75만TEU, 일본-유럽간 물동량은 약 160만TEU로 전망된다. 교통개발연구원 안병민 박사는 경의선이 복원되면, 한국-유럽간 물동량의 20%, 일본-유럽 물동량의 5%를 경의선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실어 나를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른 남북한의 연간 운임수입은 2005년에 한국 4036억원, 북한 7200억원 정도에 이를 것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는 물류 전초기지가 될 뿐만 아니라, 동북아 물류중심지로 환동해 또는 환서해 경제권을 형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등 동북 3성과 극동러시아 및 시베리아 지역의 천연자원을 원활하게 수송할 수 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자본·기술력과 북한, 중국, 러시아의 노 내 권력공백의 틈을 이용하여 노정(路程)되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대통령으로 선출된 두다예프가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선언하면서부터 비롯되어졌다. 1991년 소연방의 붕괴이후 러시아의 정치, 경제적 불안정과 이에 따른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 약화 및 소수민족주의의 세계적 경향은 수세기 동안 러시아의 복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던 체첸인들에게는 분리독립의 호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독립운동이 자칫 러시아연방의 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로서는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1994년 12월 11일 마침내 ‘체첸내 불법 무장조직의 해체와 헌정질서의 회복’이라는 명분 하에 군사작전을 감행함으로써 본격화되었던 것이다.2) 대내적 요인① 정치적 요인체첸사태의 발전과정을 볼 때 체첸공화국 내부의 정치적 원인은 전통적으로 부족단위의 생활을 영위해온 부족들이 사병집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간의 경제적 이권다툼과 반목들이 내재해 있는 가운데 일반대중을 정치적 기반으로 장악한 두다예프 정권이 정치적 주도권 장악과 권위주의적 독재체제의 경향을 보이자 이를 저지하려는 반두다예프 세력이 러시아 연방의 지원을 힘입고 권력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이 조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체첸국민들의 전통적 반러 감정을 자극하여 러시아와의 대결구도를 만듦으로써 내부적 불안을 외부로 분출시키고, 나아가 두다예프 정권의 권력 강화와 체첸정부의 자주권을 확대하는 한편 종국에는 독립을 쟁취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체첸의 독립운동 파장은 인근 이슬람 소수민족 지역에 쉽게 전파될 수밖에 없고 이는 러시아 연방 체제운영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즉 러시아 연방정부가 만일 체첸의 분리 독립을 허용한다면 여타 소수민족들의 분리독립과 자주권 확대를 요구하는 도미노 상황이 발생할 것이며 이는 러시아 연방의 해체위기로까지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산업인 원유 생산의 중앙정부 통제와 중앙정부의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 투자비율로 인해 대다수의 체첸인들은 경제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중앙정부의 통제경제 정책의 실패와 이에 따른 실업률증가, 생필품 부족 등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자 그 원인이 공화국의 경제적 자치권을 무시한 무리한 중앙통제정책의 잘못에서 초래된 것이라고 비난해 왔으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을 해야한다는 인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체첸인들은 도시 및 저지에서 주로 석유 및 원유관련 공업에 종사하는 러시아인들보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제적 불만은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경제적 민족주의의 감정으로 발전하였으며 체첸인들의 독립의지를 더욱 높이는 상승작용을 하였다. 즉, 러시아 연방의 계속된 경제정책의 실패에 따른 체첸인들의 경제적 곤란과 함께 러시아인들에 대한 경제적 차별과 박탈감이 민족주의와 연계하여 분리독립을 더욱 촉진시켰으며, 러시아로서도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카스피해로부터의 원유 파이프라인의 안전한 수송로 확보는 분쟁발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③ 사회, 문화적 요인산악유목 민족이었던 체첸인들은 대가족 중심의 경제 구조를 이루고 있던 관계로 가족은 생산단위이자 교육의 주체였으며, 전투단위 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은 어릴 때부터 말 타고 총 쏘는 법과 사냥하는 법을 배우게 되며, 체첸인들의 용맹성과 저항의식은 이러한 경제생활 및 전투집단으로서의 가족 단위 생활 속에서 습성화되어진다. 그리고 대가족 생활 속에서 체득하는 민족의 관습과 역사에 대한 교육 및 종교의식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적인 가족단위 생활은 강력한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었으며 외부세계의 도전에 격렬하게 저항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체첸민족이 비록 러시아 인구의 1/50에 불과한 적은 인구의 약소민족임에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장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체첸군은 그로즈니 방어 진지를 구축해 연방군 전진대열을 게릴라 전법으로 저지하고 나섰고, 12월 20일에는 민간인들까지도 수도외곽 지역에 ‘인간띠’를 형성하며 결사적으로 저항함으로써, 연방군의 작전은 1년을 넘기고도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씨족단위의 철저한 단결과 위계질서 속에서 그들 특유의 의리 의식과 함께 어릴 적부터 칼과 총과 함께 성장함으로써 생성된 전통적으로 호전적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지기트’의식의 발로라 볼 수 있다. 또한 여러 차례 멸족위기를 맞이한 적이 있는 체첸인들은 다산의 풍습과 이슬람 사상으로 이 지역에 해마다 엄청난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이러한 인구증가는 다수 남성 실업자를 배출하게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불안정성을 증대시키고 수많은 이민과 함께 전투원을 낳았다. 또한 체첸을 비롯한 이슬람권의 인구증가는 러시아 연방내에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빈곤하며 교육수준이 낮은 이들이 러시아의 도시지역으로 유입되면서 우범화 되는 경향이 많이 때문이다. 즉, 씨족 중심의 공동체 생활과 급격한 인구팽창은 정치, 사회적 불안정성을 증대시켰으며, 아울러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축적되어온 체첸인들의 반러 감정은 분리독립 추구의 강력한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체첸인들에 대한 멸시와 혐오감은 체첸의 반러 감정과 쉽게 극화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④ 종교적 요인카프카스 지역에서의 이슬람교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제민족들이 서로 다른 민족성과 종족, 언어적 다양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악민족 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것은 이슬람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특성, 즉 종교가 생활전체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되며 이는 한편으로 러시아인을 비롯한 연방내의 기타민족과 결정적인 민족벽을 갖게 한 정되었다.
[러시아 정치?외교 Report - 12]"The political system of Russia-2"- 러시아의 선거제도, 역대 대통령 및 의회 총선, 정당 현황, 정당제도의 특징에 대해과 목러시아 정치?외교담당교수교수님학 과학 번이 름Ⅰ. 들어가며Ⅱ. 러시아의 정치체제1. 러시아의 선거제도① 국가두마 선거 : 법적 근거 및 구성② 대통령 선거③ 지방자치선거 및 국민투표2. '역대 대통령 및 의회' 총선 분석① 1993년, 1995년 국가두마 선거와 정당② 1999년 국가두마 선거와 정당3. 러시아 정당제도의 특징Ⅲ. 나오며Ⅰ. 들어가며러시아, 중국 등 마르크스 이념을 추구하던 나라들은 1990년 이후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한 때 세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러시아는 미국과의 과도한 군비경쟁으로 인한 경제체제의 악화와 그로인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민주주의 시장 경제체제로의 변화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급속한 정책노선의 변화와 시장경제체제의 도입, 민주적 정치 경험의 결여 그리고 강대국 이었던 과거에 대한 미련 등으로 인하여 현재의 러시아는 민주사회로의 변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Ⅱ. 러시아의 정치체제1. 러시아의 선거제도국가두마 선거를 비롯해 현재 러시아에서 실시되고 있는 선거제도는 1993년 9월 의회 해산 이후 국민투표 과정을 통해 1993년 12월에 채택된 러시아 헌법에 기초하고 있다. 먼저 헌법 제3조에는 러시아국민의 권리와 관련하여 '국민은 직접적으로 또한 국가권력기관과 지방자치기관들을 통하여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며(2항), '직접적인 최상의 권리행사는 국민투표와 자유선거'임(3항)을 명기하여 선거의 헌법적 기반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헌법 제32조는 러시아 국민들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규정하고 있고, 대통령의 선거절차는 연방법에 의하여 규정되며(제81조 4항), 연방회의 구성절차와 국가두마 의원 선거절차 역시 연방법으로 정한다(제94조 2항)고 되어 있다.① 국가두마 선거 : 법적 근거 및 구성러시아는 이미 러시두마위원은 21세 이상인 러시아연방 시민이어야 한다.그간 러시아는 러시아시민의 선거권보장에 관한 연방법(94.12) 등 선거관련 법규들을 계속 수정 보완해 나왔으며, 국가두마 선거법 역시 매번 선거를 앞두고 개정 작업을 통해 내용과 체계를 보완시켜 나가고 있다. 이를테면, 1995년 선거법(총 14장 72조)의 경우 1993년 선거법(총 8장 44조)에 비해 내용 면에 있어서 크게 보완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선거법의 지위를 명확히 해 '연방법'임을 명기(제2조)함과 동시에 선거인, 선거연합, 선거블럭에 의원후보자 선발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둘째, 선거에 참여하고자 하는 정당 또는 선거블럭들의 공식 등록 요건을 즉 유권자 서명수를 100,000명에서 200,000명으로 확대(제6장 39조), 강화시키고 있다. 셋째, 1993년에는 헌법 부칙에 의거 임기를 2년으로 한정하였으나, 1995년에는 4년으로 확정하여 임기의 안정성을 보장하였으며, 넷째, 이전에는 선거비용 제한이 모호하였으나,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각 정당과 후보자가 사용할 수 있는 선거 비용 내역을 명기하였다. 끝으로 선거지역에 대한 사전 설명과 선거인 명부, 선거위원회의 구성, 지위, 활동에 대해 보다 구체화시켰으며, 선거 정보 기술에 관한 조항을 새로이 추가시켜 보다 체계화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선거과정에 있어서 대내외적인 공정성 확보를 위하여 1993년은 물론 1995년, 1999년 모두 외국의 선거참관단이 참여하도록 배려하였다는 점도 선거법의 점진적 개정과 함께 선거제도의 정착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특기할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한편, 1999년 총선을 앞두고 6월 24일 최종 확정된 국가두마 선거법은 총 13장 94조로 1993년 선거법과 비교해 구성 면에 있어서 거의 동일하나, 세부 내용 면에서는 72조에서 94조로 늘어났듯이 이전에 비해 보다 풍부해졌다. 즉 1995년 선거법에서 국가두마의원 비례배분 방법을 규정한 13장 부문이 수 2명이 최종 결선투표를 치르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러시아연방 출범 이후 지금까지 모두 2차례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1996년의 경우 옐친의 개혁 지속이냐, 아니면 공산세력의 집권이냐를 가름짓는 민주세력 대 공산세력간의 권력쟁취를 위한 경쟁의 성격을 띠었다. 결과적으로 옐친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선거 초반기 옐친의 지지도가 매우 낮았고, 상대적으로 공산당은 1995년 의회선거에서 제1당으로 부상하는 등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옐친, 쥬가노프, 레베드 등 모두 7명의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6월 6일의 제1차 투표에서는 과반득표자가 없어 당선자를 내지 못한 가운데 7월 3일 치러진 제 2차 투표에서 옐친이 53.8%를 얻어 40.3%를 얻은 쥬가노프를 이기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당시 선거는 신생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통령선거이면서 옐친 개혁정책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띤 것으로 민주제도 정착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되었다.한편 2000년 3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옐친의 조기 사임(1999.12.31)으로 당시 총리였던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에 오른 뒤 치러졌다. 이번 선거는 이전과는 달리 강력한 러시아 재건을 내세우고 체첸전의 수행 전과로 전폭적인 국민적 지지를 받은 푸틴의 독주 속에 전개되었으며, 소연방 붕괴 이후 첫 번째의 권력이양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대선 결과는 총투표율이 68.7%인 가운데 예상대로 푸틴이 과반수를 넘는 52.9%를 얻어 1차 투표에서 당선되었으며, 1996년 대선에 나왔던 쥬가노프는 29.2%로 2위에 머물렀다. 전체적으로 무엇보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첫 번째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1996년 선거에 이어 예정대로 치러짐으로써 선거의 규칙성과 정례성을 확보해 법적 제도적 측면에서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한 단계 진일보시켜 나가게 되었다.③ 지방자치선거 및 국민투표러시아에서는 전국적 중앙단위에서의 선거 이외에도 각 지방수준에서의 선거가 치러지고 있는데, 연방 구성체의 각 공 계속 치러지고 있는 셈이다.(2000년, 2001년도 각 월별 구체적인 선거내용은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 www.fci.ru 참고)한편, 지방행정기관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는 1995년부터 옐친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단계를 벗어나 점진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즉 1995년 1월부터 1998년 7월까지 모두 86곳에서 공화국, 주지사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1995년의 경우 14곳, 1996년 51곳, 1997년 12곳, 1998년 10개 지역에서(니제고로드스카야 오블라스치는 1995년, 1997년 2차례 실시) 실시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선거지역 수치는 보궐선거를 제외한 것으로 실제 선거가 실시된 횟수는 이보다 조금 더 많다. 나머지 카라체보-체르케스카야 공화국을 포함해 3곳에서는 여전히 행정대표자가 임명되었는데, 지금은 다게스탄 공화국과 우드무르스카야 공화국 2곳으로 줄어들었다.1999년도에는 프리모르스키 크라이를 비롯한 11개 지역에서 공화국 대통령, 주지사 선거가 실시되었고, 2000년에 들어와서도 3월 26일 대선시까지 알타이스키 크라이를 비롯한 10곳에서 선거가 치러지는 등 모두 44개 지역에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치러졌다.이러한 지방자치선거가 잇달아 실시되게 됨으로써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면서 지역 행정기관 수장의 독자성이 강화되고 영향력이 커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으며, 나아가 자율적인 지방선거 실시 기반을 다지는 등 향후 지방자치의 구체적인 실현을 보다 체계적으로 도모할 수 있는 계기 또한 마련하였다. 다만 최근 푸틴정부 출범 이후 상원구성법, 지방행정 및 입법기관 구성법(2000.8) 등 권력수직화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권력의 중앙 집중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어 향후 중앙과 지방간의 권력 재조정 문제는 물론 러시아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해 그 향배가 주목되고 있는 상황이다.한편 국민투표(referendum)는 1991년 3월 고르바초프의 제안으로 구소련의 존속 여부를 놓고 실시된 바 있으며, 19 조직 구조면에 있어서도 취약성을 나타냈다. 이러한 경향들은 각 정당들의 주요 정당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 정당정치 경험 부족과 운영부족 등과 더불어 정당정치 발전의 제약요인으로 상존하고 있었다. 한편 1995년 선거는 1993년과는 달리 헌법적 테두리 내에서 특정 정치세력이 배제되지 않은 채 헌법적 테두리 내에서 모두 43개의 정당과 선거블럭이 참여하였고, 정해진 시점에 치러지는 등 국가두마 선거에 있어서 일정한 법적, 제도적 절차를 공고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총 투표율은 1993년 보다 높은 64.4%를 기록하였으며, 선거결과는 공산당이 총 157석을 차지하는 등 공산세력의 득세와 민주세력 및 중도세력의 저조, 민족주의세력의 현상유지로 나타나 여소야대 구도를 띠었다. 또한 체르노미르딘의 우리집-러시아가 과거 러시아선택을 대체해 유사여당 내지 권력 당으로 등장하였으며, 정당득표율 5% 하한선을 넘은 정당은 공산당, 자유민주당, 우리집-러시아, 야블로코 4개 정당 그쳤다. 이 선거를 통해 각 정당들은 이전에 비해 어느 정도 선거 전략을 갖춘 선거정당의 모습을 띠었으며, 정강정책면에서 더욱 세련되고 진전된 양상을 보였으며, 지지기반에 있어서도 사회적 기반을 토대로 한 대중정당으로의 전환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1995년 선거결과는 어느 정도 러시아의 정당구도가 정립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공산당 등은 보수 세력들은 정당 조직과 구조, 인적구성 면에서 체계화를 이루고 있는 반면 권력당은 정치지도자의 권력유착관계 변화에 따라 부침하는 등 정당존재기반의 취약성과 러시아적 정당정치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었다.② 1999년 국가두마 선거와 정당1999년 12월에 치러진 국가두마 선거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전초전의 성격을 띠었으며, 모두 28개의 선거연합 블록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크게 보아 親옐친계 개혁세력, 反옐친 중도세력, 공산세력, 非옐친 개혁세력, 극우 민족세력 등 5개 진영으로 구분된다. 선거결과 '러시아연방공산당있다.
[러시아 정치?외교 Report - 11]"The political system of Russia-1"- 러시아의 정치체제, 권력구조 및 의회의 구성과 권한에 대해과 목러시아 정치?외교담당교수교수님학 과학 번이 름Ⅰ. 들어가며Ⅱ. 러시아의 정치체제1. 러시아 대통령제의 특성2. 의회의 구성과 권한, 특징3. 러시아의 권력구조Ⅲ. 나오며Ⅰ. 들어가며러시아, 중국 등 마르크스 이념을 추구하던 나라들은 1990년 이후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한 때 세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러시아는 미국과의 과도한 군비경쟁으로 인한 경제체제의 악화와 그로인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민주주의 시장 경제체제로의 변화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급속한 정책노선의 변화와 시장경제체제의 도입, 민주적 정치 경험의 결여 그리고 강대국 이었던 과거에 대한 미련 등으로 인하여 현재의 러시아는 민주사회로의 변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Ⅱ. 러시아의 정치체제1. 러시아 대통령제의 특성러시아의 대통령은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해 4년 임기로 선출된다. 대통령은 내각 임면권, 하원 해산권, 국민투표 실시 결정권, 법률안 서명권 및 공포권, 군 통수권, 전시 상태 및 비상사태 선포권 등의 권한을 가진다.러시아 대통령제의 특성으로는 다음 4가지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첫째, 3권 분립의 원칙 하에 행정, 입법, 사법권에 대한 권력 배분을 전제하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둘째, 러시아의 대통령제는 순수한 대통령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된 혼합적 성격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즉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할 수 있음은 물론 의회 또한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도록 하는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또한 총리를 내각의 수반으로 해 대통령이 행정집행 결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간접적으로 피해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셋째, 특정 정당에 적을 두지 않고 ‘러시아선택’, ‘우리집-러시아’, ‘단결당임기 연장문제를 포함해 향후 어떤 형태로든 헌법개정 논의가 촉발될 개연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2. 의회의 구성과 권한, 특징옐친, 푸틴, 메드베데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대통령들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에,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입법부는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들 중 먼저 정당정치의 미발달로 의회에 대한 정당들의 지원이 미약하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러시아 하원 의석수의 절반은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나머지는 정당명부제를 통해 선출된다. 정당명부제는 후보들이 지역 유권자의 눈치를 상대적으로 덜 보면서 정당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기에 정당정치 발달에 바람직한 제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정강을 갖추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정당은 공산당과 자유민주당 뿐이기에 제대로 된 정당정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정당들은 인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며, 정치인 개개인의 이익들을 놓고 형성된 네트워크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때문에 의원들은 정당에 소속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총선에서는 대개 무소속 의원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소련의 정치전통으로 인해 시민사회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현행 1993년 헌법이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 결과 도출된 것이므로 체제 자체가 의회의 권한을 제한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세부적으로는 첫째, 의회는 행정부가 제시한 예산안을 검토하되 그 통과 여부만 결정할 수 있다. 개별 사안을 심의하여 수정할 권한은 의회에게 부여되어 있지 않다. 둘째, 의회는 내각 불신임권이 있으나 개별 장관의 해임안은 건의할 수 없고, 오직 수상 해임을 통해 내각 전체에 대한 불신임을 선언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셋째, 상/하원은 행정부, 대통령, 최고재판소 등과 함께 법안 발의권을 가지고 있으나 정치적인 권력이 매우 미약하다. 러시아의 정치는 대통령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대부분의 정치권력은 대통령 직속 산하기관에 부여되어 있고, 이들은 행정부와 함께 의회의 정치적 권력을 . 두마 위원회는 법안 상정 여부와 순서를 결정하며 법안 처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서로 다른 정파의 장들로 구성되었음에도, 이 단체에서는 각 구성원들이 자기 정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경우가 적기에 의회 시스템의 작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고, 그를 통해 큰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두마 위원회의 권위와 기능이 의회 전체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적 기반이 된다. 더불어, 의회와 행정부 간에 조율과 타협의 메커니즘이 형성된 것이 의회의 안정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93년까지는 카스불라토프 의장과 옐친 대통령이 격렬하게 대립했으나 옐친이 승리를 거둔 이후 의회와 행정부 사이의 극단적 상호 불신이 사라졌다. 옐친은 스스로 국민을 동원하여 의회와 대결하려 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제도권 안에서 타협하려는 경향을 보였다.'준 대통령제'라는 러시아 정치체제의 특성 역시 의회 기능 유지에 일조하고 있다. 준 대통령제는 의회와 행정부 간의 관계가 불분명한 측면이 있는데, 양자는 대통령제처럼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고 의원내각제의 경우처럼 의회가 내각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정국 변화에서 유연성이 확보되는 측면이 있고, 경우에 따라 대통령제처럼 운영되기도 하고 다른 경우는 의원내각제처럼 운영되기도 한다. 때문에 의회와 행정부의 관계가 일방적인 채로 유지되지는 않고 있다. 이는 1998년의 프리마코프 내각에서 실제로 찾아볼 수 있는데, 키리옌코 수상이 물러난 후 옐친 대통령이 수상 후보로 지명하려 했던 체르노미르딘이 의회의 반대에 부딪치자, 옐친은 결국 의회가 추천한 프리마코프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1996년 총선에서 야당이 압승을 거두었기에 의회는 반 옐친 세력이 주도하고 있었고 프리마코프 역시 그러한데, 때문에 프리마코프는 옐친의 가장 분명한 반대파였던 공산당 인사들을 내각에 포함시키는 '동거내각'을 구성하였다. 다른 경우에도 행정부가 여당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어서, 항상 하원의 의원 비율이 내각 구성에 반영되었다. 이는 옐친지방정부 수반과 지방의회 의장의 지명으로 구성되는 상원 역시 하원의 안정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 전통적으로 지방정부는 대통령의 편에 서 왔으며, 때문에 상원은 대통령과 하원이 갈등을 빚을 때 대통령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하원과 상원, 혹은 하원과 지방정부의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며, 상원은 대개 정치적 중재의 기능을 수행한다. 상원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거부권(veto권)인데, 하원에서 대통령이 반대할 것이 분명한 법안을 통과시킬 경우 상원에서 해당 법안을 거부하여 하원으로 돌려보낸다. 이와 같은 기능을 통해 상원은 대통령과 하원의 직접적인 충돌을 막는 완충 작용을 하고 있다.또한, 여러 정당들 가운데 세 정당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핵심 적당으로서 의회 제도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 때문에 이 세 정당간의 협력을 통해 의회가 마치 하나의 단위인 것처럼 행정부와 타협, 교섭할 수 있다는 점이 언급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행정부 시간'이라는 제도를 통해 행정 각 부의 장관들에 대한 질의 시간이 정례화 됨으로써 의회와 행정부 사이의 중요한 의사소통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 의회의 안정을 가져온 요인으로 거론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로서, 러시아 의회가 일반적인 통념에 비해 더 권위 있고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또한 대통령, 행정부, 의회간의 권력 균형이 대통령에게 치우쳐져 있으나 준 대통령제의 특성에 의해 그 균형이 변할 수 있음이 규명되었다. 현재의 메드베데프-푸틴 구도가 그 실례이다. 러시아 연방 발전의 고정적인 방해요소로서, 대통령이 의회에 승리하며 제정된 1993년 헌법은 대통령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는 점, 그리고 시민사회가 발달하지 못하여 시민사회의 이해관계가 정치에 반영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정당정치의 발달이 저해되고 있다는 점 역시 러시아 의회제의 특징으로서 거론할 만하다. 그러나 이 요인들은 신생국가에게 요구할 사항은 아니며, 개선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의 면면들은 러시아가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일당독재체제에서 민주체제로 변모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시대적 요구로 정당화되기도 하였으나 행위의 반복성과 정도의 지나침은 이행기의 불가피성으로만 보기 어렵게 되었다. 러시아에선 초대통령중심제가 정권유지 및 정국안정을 위한 정략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국가의 역할이 기능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하고 대통령과 그의 측근 엘리트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정책결정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궁극적으로 러시아형 대통령중심제는 정책결정자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정권 자체와 분리하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잇다. 즉, 이는 제도에 대한 신뢰를 해치고 권위의 잠식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본 러시아가 오랜 기간동안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가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 사람에게 정치권력과 상징적인 권위가 집중되는 초대통령중심제는 러시아 민주주의의 장래, 그리고 체제안정을 위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러시아는 푸틴 전 대통령이 총리가 되고 푸틴 밑에 있었던 메드베데프 전 총리가 대통령이 된 흥미로운 나라다. 물론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심복이다. 메드베데프를 총리로 기용한 것도,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도 푸틴에 의해서다.푸틴은 3선 연임 금지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에게 한 번 대통령자릴 맡겨뒀다가 다시 대통령을 하기 위한 포석인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가 전 같지 않은 모양이다. 총리인 푸틴의 독주에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으로서 제동을 거는 파열음이 잦아 점점 심상치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처음 이들의 관계에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6월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 만이다. 조각도 푸틴 총리가 마음대로 해 대통령에게 명단만 제출했을 뿐, 현안 보고 없이 1개월여를 지냈다. 푸틴이 어쩌다 메드베데프를 찾아 국정에 대해 말해도 보고가 아닌 통고나 기껏해야 협의 수준이었다. 이에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측근인 발루예프스키 총참모장을 임기 중에 해임함으로써졌다.
[러시아 정치?외교 Report - 10]"Putin's Policy : Overcoming the Empire Syndrome"- 푸틴의 대내외정책을 정치?외교적 관점에서과 목러시아 정치?외교담당교수교수님학 과과학 번이 름Ⅰ. 머리말Ⅱ. 푸틴의 정책1. 對內的 정책① 재벌들의 정경유착 척결과 유코스 해체, 언론탄압② 체첸 공화국 독립문제③ 피테르 마피아와 푸틴의 후계자④ 정부 살빼기와 상생·실용주의 정치⑤ 경제 분야 정책⑥ 정치 분야 정책⑦ 군사 분야2. 對外的 정책① 실용주의적인 대외정책② 국내 정세의 안정에 기초한 대외정책③ 푸틴집권시기 對韓정책 추이와 그 특징Ⅲ. 맺음말Ⅰ. 머리말21세기 벽두를 장식했던 러시아 대선은 세기의 선택이었다. 푸틴은 무명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핸디캡을 체첸전쟁과 대슬라브 민족주의를 적절히 구사해 간단히 극복하였고, 임시거처에서 상주지로서 끄레믈린의 권좌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푸틴의 대권 쟁취과정은 러시아에서 민족주의 슬로건을 차용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는 선거방정식을 확인해주는 전형이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국가적 위기가 직면할 대마다 민족주의로 회귀하는 정치적 전통을 반복해 왔다. 말하자면 러시아 민족주의는 국난 극복 마지막 정치적 보루이자 고단위 항생제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전쟁의 제정러시아시대는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가 휩쓸던 소비에트 시절에도, 스탈린이 나치 독일군의 침공에 맞서 마지막으로 호소한 것도 바로 민족적 애국심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러시아 대선에서의 푸틴의 압승은 서방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러시아 애국민족주의의 집단적 히스테리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이렇듯, 러시아에서 최고지도자의 교체, 특히 대슬라브주의에 편승한 푸틴 정권의 출범은 러시아 국가가 지향하는 대내외적 정책결정에 있어 나침반의 변화를 의미한다.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이하 푸틴)은 빈곤 퇴치 등과 같은 경제 발전이 없이는 강력한 국가 건설은 물론 국제 사회에서의 강대국 지위 회복 및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매우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유코스 회장이 앞서 언급한 중요한 합의를 심각히 위반하는 행위를 하였다. 그는 2003년 총선에서 자유주의 정당에 정치자금을 지원할 것을 공약하면서 올리가르히는 반 푸틴 행보를 걸었다. 이에 푸틴은 안정적인 국정장악을 위해서 표적 사정 시비 또는 언론 길들이기라는 서방과 국내 자유주의자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부정부패 및 정경 유착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옐친 정부 시절부터 특혜를 누려온 올리가르히 등 기득권 세력을 과감하게 공격하였다. 러시아 내 최대 재벌에 대한 당국의 이 같은 강경 조치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점점 확대하고 있는 올리가르히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계획적인 압박 작전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법무부는 호도르코프스키에게 소환장을 보내기도 했으며, 출장 중 중간 급유를 위해 공항에 잠시 착륙했다가 FSB 요원들에 긴급 체포되기도 하였다. 현지 언론은 호도르코프스키와 유코스에 대한 수사는 단순 탈세 사건이 아닌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세력)와의 전쟁 선언으로 보고 있으며 호도르코프스키에게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푸틴의 분명한 경고라고 말했다.푸틴은 의회선거에서의 안정적인 의석 확보를 통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올리가르히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푸틴이 재벌들을 몰아붙이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되고 있다. 먼저 푸틴 정권의 재벌 길들이기 내지는 정권 차원에서의 완벽한 정국 장악의 시도로 보는 시각이다. 이미 대선 전에 푸틴은 더 이상 권력이 재벌과 유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는데 즉, 과거 옐친 때처럼 재벌들이 정치에 관여하고 나아가 정국을 입맛대로 요리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절대로 이들 재벌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고 이들을 확실하게 자신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다. 두 번째 시각은 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즉 과거의 파행적이었던 재벌과 정부, 구체적으로는 재계 지도자들과 관료간의 관계가 이제야 비로소 정상화되고 있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해석이다. 결과적으로 푸틴은 올리가르히와 손을 잡 위하여 옐친 정부 시절부터 특혜를 누려온 올리가르히 등 기득권 세력을 과감하게 공격하였다. 올리가르히가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면서 한동안 지속되던 불안한 평화가 깨지고 있다. 러시아 내 최대 재벌에 대한 당국의 이 같은 강경 조치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점점 확대하고 있는 올리가르히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계획적인 압박 작전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② 체첸 공화국 독립문제푸틴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체첸침공이다. 과거 옐친 시절 독립을 약속했었는데 푸틴에 의해 다시 러시아의 품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체첸 과격파들의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구민들에게는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한 위인으로 푸틴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게다가 체첸의 지정학적 위치는 우리의 독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땅이다. 그렇게 체첸침공을 매개로 권력을 장악한 푸틴은 정보기관 출신답게 구내의 모든 매스컴을 차례로 자신의 영향력아래 복속시키고, 그것을 이용하여 의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체첸사태로부터 연유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테러리즘의 위협은 미국에 대한 이슬람 테러조직의 위협보다 그 강도가 약해 보인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러시아는 미국보다 테러리즘으로 인한 안보적, 경제적 부담을 적게 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경제 성장의 고개를 들고 있는 러시아에게 미국이 지고 있는 정도의 안보적, 경제적 부담이 지워진다면 경제파탄 뿐만 아니라 정치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가능성마저 있다. 러시아에게 NATO의 동진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무기력증을 느끼게 하는 일이라면, 체첸으로부터의 테러 위협은 정권을 직접 위협하는 일이다. 푸틴 대통령이 체첸사태에 대한 해결능력을 보이면서 집권 하는 데 성공한 점을 보아도 러시아 국민들이 이 문제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짐작되는 것이다.③ 피테르 마피아와 푸틴의 후계자‘피테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시(市) 출신을 일컫는다. 지난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52) 대통령이 집권한 뒤 5년 만에 러시아 권력은 피테르파에 의해로의 의회이전과 천도 문제가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을 정도다.④ 정부 살빼기와 상생·실용주의 정치푸틴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국가 공권력 권위를 회복시켜야 한다.”며 방만했던 연방정부 조직을 수술대에 올렸다. 30개 부처를 18개로 축소하고, 공무원 수를 30% 이상 줄였다. 또 소련 국가(國歌)를 부활시켜 공산당의 손을 들어주고, 자신의 정적(政敵)인 지리노프스키 자유민주당수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등 상생과 통합의 정치를 펴고 있다.푸틴 대통령은 장관들의 현안 보고 때 일대일로 토론하기를 즐긴다. 그가 장관들을 꾸짖는 카리스마는 국익을 위한 철저한 실용주의와 실천 정신이다. 얼마 전 TV 뉴스를 통해 방영된 사건. 연금 증액문제와 관련, 한 장관이 “이 문제에 대해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푸틴 대통령이 얼굴을 찌푸렸다. 중간에 말을 끊은 푸틴 대통령은 “장관은 생각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소관 업무를 확실히 파악,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겠다는 식으로 하라”고 질책했다.⑤ 경제 분야 정책푸틴은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임명된 작년 12. 31 이후 출간된 각종 문건, 즉 '천년의 전환기에 선 러시아'(1999. 12. 31), 新 '국가안보 개념'(1. 10), '선거 공약'(2. 24) 등에서 '빈곤 퇴치'가 가장 우선적인 정책 과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빈곤 퇴치'를 위한 경제재건 없이는 강력한 러시아의 건설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지속적인 경제발전의 달성 및 사회복지 지향적 경제 제도의 정착'을 위한 국내외 정책을 강력히 실행해 나가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푸틴은 新정부의 경제정책은 ①15~20년 이상을 내다보는 장기 발전 전략이어야 하며, ②경제, 사회 영역에 대한 국가 조정 기능이 강화되어야 하고, ③러시아의 여건에 가장 적합한 개혁 전략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따라서 푸틴 정부는 ①내외국인 투자 환경 조성의 조성, ②과학, 기술 혁신을 주도하는 기간산업의 우선적 육성, ③여러 기업 경영 형태의 최적 비율을 확보하기 위한 합리적인 기업 구조 조천명하지만 대통령의 통치권 강화, 중앙집권적 연방제 확립, 양당제 또는 3~4당제를 확립하기 위한 헌법 개정 등 필요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였다. 특히 푸틴은 옐친 대통령이 어느 정당에도 관여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단합당]을 중심으로 군소 정당을 통합하여 집권 여당을 출범시킴은 물론 우호적인 對의회 관계를 구축, 원활하고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⑦ 군사 분야푸틴은 '강대국 지위 회복'을 위해 군사력 강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준비해 온 군사 개혁을 적극적으로 단행하면서 핵 무장력의 강화 및 재래식 무기의 현대화를 추진시키기 위한 국방비 및 군산복합체에 대한 지원을 계속 확대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화 획득 및 해당 국가들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 수출을 더욱 확대해 나갈 것이며 특히 미국과 非우호적 관계에 있는 국가들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시켜 나갈 것이라는 여론도 있다. 푸틴은 서방 세계의 비난과 체첸 사태의 조기 해결을 위해 정치적 해결도 모색하였다. 푸틴 정부는 핵물질, 핵기술 등 대량살상무기 및 제조 용품의 확산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적극 협력하는 정책을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2. 對外的 정책① 실용주의적인 대외정책푸틴 대통령은 실용주의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강대국으로서의 국가위신을 반드시 회복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소련시대처럼 무리한 군비증강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1985년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더 나은 사회주의 실천을 목표로 시작했던 개혁(페레스트로이카)정책은 1990년대 초 단행된 급진적 사유화와 가격자유화 조치로 경제적 대혼란을 야기했다. 10여 년간의 전환기를 어렵게 넘긴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국가의 틀이 새로 잡혀 나가기 시작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주어진 과제는 국가의 체모에 걸맞은 외교를 하는 것이다. 미국, 중국, 일본, 유럽 국가연합 등 국제무대의 주요 행위자들과의 협력 관계 강화를 추구한다. 소련시절의 적대관계나 소원한다.
[러시아 정치?외교 Report - 9]"Russian President Yeltsin,a democratist!"- 옐친과 신생러시아의 대내외정책을 정치?외교적 관점에서과 목러시아 정치?외교담당교수000 교수님학 과00 과학 번0000000이 름000Ⅰ. 머리말Ⅱ. 신생러시아 외교정책의 세 가지 방향 :대서양주의, 슬라브주의, 유라시아 주의Ⅲ. 옐친의 정책1. 對內的 정책2. 對外的 정책Ⅳ. 결론Ⅰ. 머리말러시아 최초의 민선대통령 옐친은 1931년 공업도시 스베르들롭스크 주(州) 탈리차 군(郡) 부트카촌(村)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레즈니키의 푸시킨 고등학교를 졸업했고,1955년에는 페름 주의 우랄 기술 대학교를 졸업했다. 건축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 공산당에 입당, 1976년 스베르들롭스크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거쳐 198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고르바초프와 친분을 맺기 시작하였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국원을 역임했다. 1990년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되었고, 그 해 7월 12일 소련 공산당에서 탈당했다.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옐친은 그에 의하여 모스크바시 당 제1서기와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발탁, 일약 중앙정계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987년 당 중앙위원회에서 당의 개혁의지 부족을 비판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다 당내 보수세력에 의하여 정치국으로 밀려났다. 그 후 더욱 급진적 개혁논리를 주창, 수구적 자세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개혁에 필요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획득하였으며, 1989년 새로 구성된 소련인민대표대회의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의회 내에서 공산당 권력독점의 폐기를 주장하는 야당세력을 이끌어 오다가, 1990년 5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체제내 야당'에서 권력의 핵심부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선 후 그는 “나는 소련의 주권과 15개 공화국의 평등 및 독립을 지지합(CIS)을 결성하고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공화국과의 CIS 주도권 싸움과 경제개혁의 실패, 군부의 반발 등으로 그의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1992년 3월 러시아연방의 자치공화국들과 신연방조약을 맺고, 4월 경제개혁을 주도해 온 가이다르와 함께 내각 총사퇴를 표명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또한 보수파가 주도하는 인민대표대회와의 날카로운 대립을 12월 타협으로 이끌고 1993년 4월 25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결국 자신의 개혁의지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996년에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무려 8년 동안이나 대통령직을 맡고 있다가 건강상의 문제와 후진양성을 이유로1999년 12월 31일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었다. 2007년 4월 23일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Ⅱ. 러시아 외교정책의 세가지 방향구소련의 붕괴는 세계사의 흐름에 굵은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고, 이로 인해 새로이 탄생한 러시아는 완전히 생소한 국제 정치적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구소련의 해체로 인하여 축소되었으며, 서부 지역의 공화국들의 독립함으로써 유럽과는 지정학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변함없이 강대국임을 자처하고 구소련의 법적인 계승자로서 독립 국가연합에서의 지도자적인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국내 정치적으로 러시아는 구체제를 청산하고 신체제를 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경제는 상당한 변혁을 겪고 있다.이렇게 급격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그 동안 국제주의와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외교정책이 결코 불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러시아 외교정책의 방향은 탈냉전이라는 국제 정치적 조건과 체제 변혁이라는 국내 정치적 조건에 의해 동시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1992년에 러시아의 외교정책은 정치 및 경제 개혁과 마찬가지로 국내 정치적 권력 대결의 대상이 되었고, 여러 정치 세력 간에 외교정책의 방향을 시장 개혁이 실시된 1992년 1월에 코지레프 외무장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신생 러시아가 전 세계적으로 외교적인 승인을 맡음으로써 명실상부하게 국제 문명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러시아는 미국과의 기존 관계를 일신하게 되었고, 서방 국가와 러시아는 비록 상호간에 동맹조약을 맺지는 않았지만 국제사회의 공동 구성원으로서 ‘자연스런 동맹국’이 되었다고 코지레프는 말하였다.다음 달인 2월에 옐친 대통령은 외교 사절단을 위해 마련한 모임에서 러시아는 결코 제국주의를 지향하지 않으며, 러시아 국민이 바라는 이익을 추구할 것이며, 이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부강하고 민주적인 러시아’라고 밝힘으로써 러시아의 외교정책은 국내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갈 것임을 천명하였다.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러시아 개혁 정부가 초기에 추구한 외교정책의 첫 번째 목표는 경제 개혁을 성공적으로 실현하는 데 유리한 국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며, 두 번째 목표는 인접 국가와의 우호를 증대함으로써 접경지역에 ‘선린 지대’를 형성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대서양 주의에 입각한 외교정책은 러시아가 추구해야 할 국익이 경제 이익이라고 보고, 러시아는 서방 국가의 신뢰를 획득하고, 세계 정치와 국제기구 내의 활동에서 구소련의 계승자임을 인정받고, 시장 개혁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을 확보함으로써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경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2. 슬라브주의슬라브주의는 전통적으로 서구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서 이미 고르바초프의 개혁 및 개방 정책 하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더욱 뚜렷하게 표면화되어 러시아 외교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슬라브주의에 입각한 외교 노선은 슬라브 국가 간의 유대와 협력을 강조하고 슬라브 정신을 국제적인 상호 이해의 바탕으로 삼는다. 슬라브주의는 로마-게르만 전통이 언젠가는 몰락할 것이라는 문화사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서구가 쥐고 있는 주의자가 있기는 하지만, 슬라브주의와 러시아 주의는 반 서구적이라는 공통점에서 동일하게 이해된다. 대서양 주의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에서 있는 슬라브주의는 반 서구적이라는 특징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다. 슬라브주의에 의하면 러시아가 외교정책을 통하여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국익은 ‘상대국 지위’이며3) 이것을 특히 독립 국가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근외 국가와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실현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슬라브주의자는 국경 너머에 살고 있는 2500만 러시아인의 신변과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역을 러시아의 패권 하에 통합할 것을 요구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슬라브주의는 지로프스키가 대표하는 극우 민족주의와 민족 볼셰비즘을 지지하는 공산주의 세력까지 포함한다.3. 유라시아 주의위의 두 가지 외교 정책적 방향의 중간에 위치하는 유라시아 주의는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 노선은 러시아의 민족성과 문화의 본질에 있어서 아시아적인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기에 유라시아 주의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서구 중심주의에 반대하고 러시아가 서구화되는 것을 지양한다.유라시아 주의자들은 고르바초프가 주창한 ‘공동의 유럽집’ 구상에 대하여 ‘유라시아집‘ 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반대하였다. 유라시아 주의는 구소련의 해체로 말미암아 러시아가 지정학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더욱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호주 주재 러시아 총영사인 쿨라긴(Kulagin)은 러시아가 서구와의 사이에 완충 국가를 가지게 된 반면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는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과 직접적으로 부딪힌다는 점에서 이 지역이 러시아로서는 과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안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유라시아 주의적인 사고에 의하면 러시아는 단순히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민족적, 문화적 대륙으로 간주된다. 유럽식의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러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국경밖에 거주하는 수많은 러시아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균형이며, 이를 위해 러시아는 대륙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여야 한다.Ⅲ. 옐친의 정책구소련이 해체되고 새로이 탄생한 신생 러시아에서 외교정책의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대서양 주의, 유라시아 주의, 슬라브주의라는 세 가지 노선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1992년에 국제무대에 나서게 된 러시아 개혁정부는 대서양주의에 입각한 서구지향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말부터 러시아는 차츰 동아시아에 대해 커다란 외교적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기 시작하였다.1993년 4월에 옐친 대통령이 서명한 ‘러시아 외교정책 개념’은 그때까지 러시아에서 진행되어 온 외교 노선에 관한 논쟁을 일단락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개념에 의하면 러시아는 여전히 강대국으로서 세계사의 흐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있으며, 또한 중국은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라는 것이다. 서방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면서, 러시아의 외교정책이 초기의 대서양 주의에서 유라시아 주의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1. 對內的ㄱ. 쿠데타1991년 8월 19일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즉각 반(反)쿠데타세력의 선봉에 서서 소련 국민에게 저항할 것을 호소하며 총파업을 촉구, 60시간 만에 쿠데타를 실패로 끝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쿠데타를 제압한 옐친은 소련공산당을 불법화하고 전 재산을 몰수했으며 적극 가담한 KGB를 폐쇄하고 거대한 사회주의체제인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해 버렸다. 그 후 고르바초프의 권력은 급속히 약해지고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미온적인 개혁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그 해 12월 21일 발트 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을 참여시켜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고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공화국과의 CIS 주도권 싸움과 경제개혁의 실패, 군부의 반발 등으로 그의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ㄴ. 자유시장 경제, 사유화 그리고 경제개혁1985년 이후 소련해체시기까지 소련국민들은 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