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방진 : 마방진은 정사각형 격자 안에 숫자를 배열해서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같아지도록 한 것이다. 이 합의 결과를 마법 상수라고 한다. 가장 작은 마방진(1로만 이루어진 정사각형은 제외)은 한 변이 세 개의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이 마방진의 마법 상수는 15이다.2. 홀수칸 마방진 코딩하기1) 자연어 표현⓪ A에 1을 입력한다.① 첫 행 가운데에 A를 기입한다.② 오른쪽에 칸이 있는지 확인한다. (있으면 ③번, 없으면 ④번을 실행한다.)③ 오른쪽으로 한 칸 이동한다. → ⑤번으로 간다.④ 같은 행의 첫 번째 열로 이동한다.⑤ 위쪽에 칸이 있는지 확인한다. (있으면 ⑥번, 없으면 ⑦번을 실행한다.)⑥ 위쪽으로 이동한다. → ⑧번으로 간다.⑦ 제일 아래 칸으로 이동한다.⑧ 이동한 자리에 숫자가 적혀 있는지 확인한다. (있으면 ⑨번, 없으면 ⑩번을 실행한다.)⑨ A 아래로 한 칸 이동한다.⑩ A에 A+1을 입력한다.⑪ 현재 위치에 A를 기입한다.⑫ 빈 칸이 있는지 확인한다.⑬ 빈 칸이 있으면 ②번부터 계속 실행한다. 빈 칸이 없으면 종료한다.
제12장 교육과정 연구의 영역과 과제1. 교육과정 연구의 관점‘교육과정’은 어원적 의미에서의 교수요목으로부터 수업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교육내용을 가르치는 전체적 과정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한편, 교육과정이 그와 같이 교육의 과정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는 것은 그 논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과 포함되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하게 되고 관심의 초점이 불분명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에 반드시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서양 학자 중에는 ‘교육과정’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그 어원적 의미인 ‘교수요목’으로 국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구심적 관심’으로 부를 수 있고 핵심부인 교육내용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과정 전체를 문제 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원심적 관심’으로 부를 수 있다면 교육과정 연구는 이 두 가지 관심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교육고정과 그 어원적 의미 사이의 관련은 위와 같은 관점 말고 이론과 실제 사이의 관련에 관한 의문으로도 대두된다. 이론의 편에서 보면, 교육과정에 관한 이론적 탐구를 실제적 지침에 직접 연결될 정도로 상세하게 수행한다는 것은 원칙상 불가능하다. 또한, 실제의 편에서 보더라도, 실제적 작업이 반드시 이론적 연구의 결과를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이론적 연구 결과보다 훨씬 직접적인, 그러면서도 실제적으로 타당한 지침이 된다.슈와브는 이론에 대해 평가절하했는데 그것은 교육과정의 이론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교육과정에서의 이론의 위치나 성격에 관한 편파적인 관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 그가 주장한 바와 같이 ‘교육과정 이론’은 교유고가정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데에 실제적인 지침으로서 부족하다고 보아야할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과정 이론은 오로지 실제를 위한 지침으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육과정 실제에는 이론적 이해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많이 습관적으로 ‘이론’은 실제를 위한 기초로, 그리고 ‘실제’는 이론이 적용될 대상으로서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원래 엄밀한 의미로 이해하자면 ‘이론’이라는 것은 일단 실제와 무관하게 또는 실제에 적용되기 이전에, 현상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개념적 도구 또는 그 도구를 활용하는 일을 지칭하며, ‘실제’라는 것은 사태를 변경시키기 위하여 모종의 조치나 행위를 가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의 이론과 실제는 그 관심의 종류에 의하여 구분된다. 이론의 관심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으며, 실제의 관심은 사태를 특정한 방향으로 변경시키는 데에 있다.하나의 연구 분야로서의 교육과정에는 실제적 관심과 이론적 관심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관심이 공존한다. 실제적 관심은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을 처방하는 것과 관련된 관심이며, 이론적 관심은 교육과정 실제가 나타내는 현상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관심이다.(실제적 관심은 ‘이론의 실제적 적용’, 이론적 관심은 ‘실제의 이론적 이해’) 이런 뜻에서 이론적 관심과 실제적 관심 사이에는 구심적 관심과 원심적 관심 사이에 유지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미묘한 균형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과정 연구에서 이 두 균형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살려내는가에 장차 이 분야의 발전이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2. 교육과정 연구의 영역보비트의 『교육과정』의 출판 전에도 동서양에서 ‘교육과정’이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학문 연구 분야로서의 교육과정은 1920년대를 전후한 미국에서 발전되었다. 보비트에 의하여 대표되는 교육과정 동향은 ‘과학적 교육과정 구성’ 또는 ‘사회적 효율성을 위한 교육’이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여기서 사용된 ‘과학적’이라는 용어는 ‘수단-목적 관계의 합리성’을 뜻한다. 보비트 당시에 교육과정 분야의 지배적인 관심은 ‘교육과정의 구성’에 있었다. 여기서 ‘구성’이라는 용어는 ‘실제적 관심’을 나타낸다. 당시에 부여받았던 이 성격은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리잡았다. 이러한 실제적 관심 속에서 이론적 이해가 뒷전으로 밀려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보비트 당시에 막연한 짐작이나 주먹구구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으로 보였던 기존의 교육과정에는 ‘수단-목적 관계의 합리성’이라는 상식적인 틀로는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인간의 삶에 관한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보비트에 의하여 시작된 실제적 관심은 그 후 타일러에 의하여 교육과정의 개발과 운영 절차를 교육목적, 학습경험의 선정, 학습경험의 조직, 평가라는 네 개의 요소 사이의 순환과정으로 하나의 교육과정 모형으로 체계화되었다. 이 모형은 타일러의 후계자인 블룸 등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면서 전 세계에 걸쳐 교육과정의 유일한 ‘공식적 모형’으로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은 이 면에서 타일러로부터 직접 수학한 정범모 교수로 인해 대표적인 사례를 나타낸다.교육과정 연구에서도 실제적인 방안이 제안되는 경우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연구라는 것은 성격상 실제적 처방이 아닌 이론적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김호권 교수에 의하여 소개된 블룸의 ‘완전학습’의 아이디어는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교육과정 연구의 가능성을 훨씬 넓혀 주었다. ‘완전학습’의 아이디어가 소개되고 난 후에 한때 교육과정 연구는 거의 전적으로 이런 종류의 ‘경험적 연구’의 경향을 띠었으며, 이 경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완전학습의 아이디어는 그 아이디어에 따른 학습자료의 개발에도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초창기 사업의 큰 비중을 차지하였던 초등학교 ? 중학교 학습자료 개발은 거의 전적으로 완전학습의 수업모형에 의거하였다.지난 1960년대와 70년대 사이에 김종서 교수가 김영찬 교수와 공동으로 소개한 ‘수업형태 분석법’은 교육과정 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이 소개한 수업형태 분석법은 주로 정의적 면에서의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을 파악하기 위한 플랜더즈의 분석법이다. 수업의 기술연 연구는 기술이라는 것이 비록한 이론적 이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김종서 교수는 ‘잠재적 교육과정’의 연구를 통해서도 한국의 교육과정 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잠재적 교육과정은 ‘교과에서 의도한 바와 관련된 경험’, 즉 ‘표면적 교육과정’과의 대비에 의하여 성립한다. 의도되지 않은 경험도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가가 의문이 된다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교육과정’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잠재적 교육과정’의 개념과 그 개념에 입각한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영위하는 생활은 학교 바깥의 사회적 장면에서 어른들이 영위하는 생활과 그 종류에 있어서나 복잡성에 있어서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이다.타일러의 교육과정 모형이나 수업의 기술적 연구, 심지어 잠재적 교육과정에서도 교육의 내용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었을 뿐, 특별히 연구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원심적 관심) 그러나 1970년에 대두된 이른바 ‘교육과정 사회학’에서는 교과의 의미 그 자체를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의 연구는 교육과정의 관심을 교육의 과정 전체로부터 그 핵심인 교육의 내용으로 옮겨 놓았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정에는 실제적 처방 이외에 또는 실제적 처방 이전에 이론적 이해가 중요하다는 주의를 환기시켰다. 피터즈와 허스트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교육 철학자들도 지식이 교과로서 성립한다고 볼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였다.교육사는 그 대부분이 교육과정사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사는 교육과정에 관한 이해의 범위를 거의 무제한으로 확장시켜 준다. 교육과정 이론의 역사는 인간이 삶에 관한 성찰을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학문 분야로서의 교육과정이 1920년대의 보비트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관점은 터무니없이 부적절하다.3. 연구과제교육이 있는 한, 교육과정 개발은 없을 수가 없다. 교육과정에 관한 이해가 다양한 관점에서 발전될 것이다.역사적으로 볼 때 교과의 의미에 관한 견해로서 가장 널리, 명시적으만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태어난 형식도야이론에 대한 비판은 궁극적으로 그것에 가정된 마음의 개념을 겨냥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기성의 형태로 주어진 것으로 보건 교육을 통하여 획득되는 것으로 보건 간에, 교과의 의미를 마음과 관련하여 설명하면서 그 마음을 개인이 그 내부 어디인가에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이론은 어떤 형태로든지 형식도야이론을 받아들인다고 보아야 한다.‘잡으면 있고 놓으면 없는 것, 시도 때도 없이 들락날락하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라는 공자의 말에서 표현된 마음의 신비에 생각이 미친다면 우리는 마음에는 경험적 마음을 ‘초월하는’, 각 개인의 경험적 마음의 분유하는 ‘형이상학적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교과는 ‘형이상학적 마음’이 ‘경험적 마음’으로 분유되는 유일한 통로이다.경험적 마음에서와는 달리, 형이상학적 마음에서는 교과의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의 두 측면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 방면에서 불교의 『대승기신론』이 좋은 길잡이가 된다. 진여는 실재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구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 또는 빈 것이지만, 또한 거기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뜻에서 그것은 가장 충만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품을 수 있는 모든 대상은 모두 진여에서 나온 것이고 불교의 수행은 현상계를 바탕으로 하여 그것과 떨어져 있지 않은, 그것의 이면인 ‘진여로 돌아가도록’, 즉 마음의 진여를 향하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서양에서는 오우크쇼트의 『경험과 그 양상』에서 동일한 견해를 찾을 수 있다.동양의 교육과정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로 유학, 더 구체적으로는 송대에 주희에 의하여 체계화된 성리학의 교육과정 이론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포괄적으로 또 명시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문헌은 『중용』이다. 『중용』은 이른바 ‘심법’의 이론서 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심법은 마음의 개념과 형성과정, 그리고 그 정치적 사회적 의의를
제11장 교과교육학한 학생이 학교교육 또는 교과교육에 대해서 갖게 되는 태도는 그가 어떤 교과교육을 받았는가, 그를 가르치는 교사나 그 주변 사람들이 교과교육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이 교과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가에 의해서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 이 점에 있어서는 교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1. 교과교육과 교과교육학교과교육학의 성격에 관한 종래의 연구는 교과교육 실제와 교과교육 이론의 관련을 잘못 파악함으로써 교과가 교사와 교과교육학자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교과교육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교과교육학의 성격을 그야말로 ‘일반적인 수준’에서 ‘추상적으로’ 논의하거나, 교육학 또는 교육과정이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일반적인 절차 모형을 교과교육에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처방’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교과교육학의 성격은 교과교육의 최종단계에 관한 ‘기술’ 또는 ‘정당화’를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그것을 억지로 출발단계의 교과교육을 위한 ‘처방’으로 번역하려고 드는 식의, ‘기술’과 ‘처방’ 사이의 구분을 뭉개어 버리는 것으로는 해명될 수 없다. 교육실제는 얼른 보기와는 달리 몇 가지 이론이나 모형에 의해서는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총체적인 것이다.전국의 각 교육대학의 교육과정은, 교육부에서 제시한 교육과정 편성 지침 또는 준칙을 반영한 탓이기는 하겠지만, 교육과정의 조직 또는 편제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교과교육학은 전공과정에 통합되어 있는데 이 전공과정은 크게 교육학과 교과교육학으로 구분되어 있다. 교과교육학 과목의 조직체계는 교육과정의 전체적인 조지고가 운영상의 편의를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교과교육에서 가르치는 교과의 ‘내용’과 그것을 가르치는 ‘방법’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해 왔는가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교과교육학 분야에서는 교육의 ‘내용’과 ‘방법’사이의 관계를 이른바 ‘가법적’ 사아동들에게 가르쳐야 할 교과의 ‘내용’을 학습하는 시간과 그것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공부하는 시간은 각각 별도로 마련될 수 있으며, 유능한 교사가 되려면 각각 별개로 개설된 두 개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하고, 실지로 아동들에게 교과를 지도할 때가 되면 교사가 교재연구 시간에 공부한 교과의 ‘내용’과 교수법 시간에 배운 ‘방법’을 실지의 수업 사태에서 적절히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법적 사고의 흔적은 교육과정의 편제만이 아니라 교육대학의 교과교육학 관련 강의 교재의 내용 조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교과교육학 과목의 강의 교재들을 전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각각의 과목은 공통적으로 각 교과교육의 개념이나 목표, 또는 각 교과교육의 발달 과정에 관한 개략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교과교육학의 교재연구 부분은 각 교과마다 서로 약간씩 차원이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교과별 교수법이나 학습지도방법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각 교과 간에 별다른 차이 없이 상당히 일관된 모습-교육과정 이론에서 발전된 수업의 일반적인 절차 모형과 관련된 요소 또는 개념들을 설명하고, 그것을 각각의 교과교육에 적용하는 과정을 예시하는 방식으로 서술-을 보여주고 있다.기존의 교과교육학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정에 의하면, 결국 실지의 수업 사태는 교재연구 시간에 배운 교과의 내용과, 교수법 시간에 배운 수업의 일반적인 절차모형이나 교과별 수업모형 또는 기타 교구나 자료를 활용하는 방법 등을 적절히 결합하여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세밀하게 살펴보아도 교과교육은 교과의 내용과 교육방법의 ‘가법적’ 결합과 같은 방식으로 단순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과교육은 교사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교과의 내용을, 아직 그 의미를 모르고 있는 학생들에게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는 일련의 구체적인 활동과정이다. 그 과정에서는 교사와 학생의 표정과 눈짓, 그리고 교사와 학생의 질문과 대내용과 그것을 가르치거나 다루는 방법은 ‘승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 경우 양자가 승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교과교육을 통해서 가르쳐야 할 내용과 그것을 가르치는 방법은 ‘사실상’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교과교육에서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이 가법적인 관계가 아닌 승법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관점은 기존의 교육대학 교육과정의 편제와 운영을 새로운 시각에서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이 관점은 앞으로의 교과교육의 연구방향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승법적 관점에서 보면 교육대학의 교육과정상에 나타난 ‘교과교육 Ⅰ,Ⅱ’는 더 이상 교재연구와 교수법으로 분리하여 운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교과교육학의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 단순히 교과교육학의 내용만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이미 교과를 가르치거나 다루는 방식을 동시에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는 그 자신이 스스로 교과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루는 방식을 몸으로 보여주고 시범해야한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교과의 개념이나 아이디어들이 교수의 몸을 거치는 동안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그 의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게 되는가를 느끼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부지불식간에 교수의 ‘교육방법’ 또는 ‘스타일’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과교육학을 담당하는 교수가 해야 할 또 한 가지는 그 스스로가 자신의 수업행위를 기술하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교육행위를 스스로 설명하고 이론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그에게 배우는 학생들에게 그 자신의 교수활동 또는 수업방법의 포인트를 드러내 줌으로써 그 의미를 확인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이 경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교과교육학을 담당하는 교수나 실지로 교과를 가르치는 초등하굑 교사가 자신의 교과교육을 기술하거나 정당화하고자 할 때 그것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개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육학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2. 교과교육학과 교육학우리나라에서 발전한 교과교육학의 전체적인 구조는 행동과학적 입장에서 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을 밝힌 정범모 교수의 「교과와 교육학」에 제시된 견해를 토대로 체계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범모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각과 교육 이론이 갖추어야 할 이론 영역은 일반 교육 이론과 같아야 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교육학의 이론은 결국 교과교육을 위시한 교육활동에 실제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며 교과교육학은 교육학에서 발견된 이론을 교과교육에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탐색하고 설명하는 학문이 된다. 이 관점에 의하면 교과교육학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의 내용과 범위를 분석하는 부분과 주어진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분석된 교육내용을 선정 조직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일련의 교육의 과정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교육학 이론은 후자와 관련되어 있다. 결국 교과교육학은 교육학에서 발전된 교육에 관한 일반적 원리나 실제적 지침을 각 교과교육의 특수 사태에 적용하는 방법을 탐색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런 관점으로 교육학과 교과교육학을 파악할 경우 교육학 이론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과교육에 실제적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 한에서 또는 그와 같은 실제적 지침을 많이 제공하면 할수록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관점에서의 교과교육학과 교육학의 관계는 이른바 이론에서 실제로 나아가는 방향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교육학과 교과교육학의 관계는 이론에서 실제로 나아가는 방향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에서도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후자로 파악할 때 교육학 뿐 아니라 교과교육학이 지니고 있는 이론 또는 학문으로서의 성격이 잘 드러나며 교육학이나 교과교육학이 교사교육뿐만 아니라 교육학 이론의 발전과 교과교육학 이론가의 삶에 주는 의미가 새롭게 부각될 수 있다. 교과교육학이교과교육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 원리가 교육학 이론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교과교육학 내부에서 생산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실이 교사 양성 교육에서 교육학 교육을 약화시키거나 축소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육학 이론의 가치는 단순히 교육실제나 교과교육에 필요한 실제적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학 이론은 교육 활동을 교사 자신이 이론적인 안목으로 이해하고 교육과 교사 자신의 삶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교육학 이론이 교육활동을 총체적으로 또는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교과교육학 또는 교과교육 이론 또한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그 성격이 파악될 수 있다. 바로 교사의 교과교육 활동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일에 관심을 둔다는 점이다. 교육대학에서 교과교육학 강의가 교과교육 이론가로서의 교수가 가르치고자 하는 그 내용과 함께 교수 스스로 그것을 공부하고 그 의미를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과정 또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학생들의 그것을 배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학생들의 교과교육학 강의를 성공적으로 이수하였을 경우 교사가 되었을 때 교과교육을 보다 충실히 수행할 수 있고 자기가 몰두한 교과교육 활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교육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교육 이론가들이 자신의 교과교육을 교육의 시각에서 기술하고 설명하는 개념이나 안목은 교과교육에 관한 논의 속에서 저절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활동을 기술하거나 설명하는 일 또한 교과교육을 포함한 교육사태 전반을 교육학적인 시각에서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론적 활동으로서의 교육학 또는 교육 이론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과교육학과의 관련에서 볼 때 교육학은 바로 교과교육 이론가나 교과교육에 헌신하고 있는 교사들의 그 자신의 활동을 기술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과 안목을 제공하는 원천이 된다. 교과교육 이론가나 교사들은 교육학 된다.
제10장 학교 교육과정현행 국가 수준의 학교 교육과정은 ‘수여자중심 교육과정’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것은 그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올바로 파악될 수 없다.1. 교육과정의 변천학교 교육과정은 일곱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하지만 양적 확대에 비례하여 질적 성장도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것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교육과정의 질적 성장 여부를 파악하는 데 관건이 되는 것은 교과관이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1954년 이전에도 교육과정은 있었지만 교수요목의, 과도기적 조치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1954년에 공포된 1차 교육과정부터를 교육과정이라고 한다. 1차 교육과정에서는 직접적으로 학교의 교과목이 곧 교육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1차의 주된 관심은 교과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기존의 교과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 수준에서 교육과정 체제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차는 ‘교과중심 교육과정’ 이지만 언어주의 교육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과 내용을 단원 중심으로 조직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생활중심 교육과정 또는 경험중심 교육과정에서 채택한 방식이다.그러나 2차 교육과정에 오면 공식적으로 교과의 성격을 ‘생활중심 교육과정’의 개념에 의하여 규정하게 된다. 교과를 학생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하는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과 경험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하고 ‘경험’의 내용을 ‘생활’에서 찾았다. 이런 생활중심 교육과정의 주장은 7자유학과로 대표되는 전통적 의미의 교과관을 부정하는 것이다.3차 교육과정은 학문중심 교유과정을 채택함으로써 지식 ? 기술 교육을 쇄신하려 했다. 학문중심 교육과정은 각 교과는 그 교과 고유의 학문 또는 지식의 구조를 핵심적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1차 교육과정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1차가 전통적인 방식에 따른 지식체계 중심의 교과내용 조직을 시도했다면, 3차는 2차에 의하여 부각된 학생 경험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면서 지식체계 중심 관점을 취하고 있다. 4차의 주된 관심이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에 관한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었기에 교육내용으로서의 지식의 위상을 정립하기는 힘들었다.4차에서 취한 종합적 관점은 그 이후 계속된 교육과정 개정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5차 이후에서도 교과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규정하는 일보다는 교과의 유용성과 교육과정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일련의 실제적 방안들을 새로 제안하는 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교육과정 편제는 그 기본 골격에 관한 한 1차에서 7차까지 큰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다. 그래도 교과와 특별활동이라는 기본 골격은 유지하면서 교과와 특별활동 각각은 나름대로 가시적, 비가시적 변화를 겪었다. 교과와 특별활동이 양자 사이의 관련에 대한 별다른 고려 없이 변천되어 온 것으로 보아 둘은 학교교육에서 대등한 위치와 독립적인 역할을 가지는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학교교육의 주된 역할은 어디까지나 교과를 가르치는 일이며 특별활동은 교과에 의존하여 교육활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육과정이 개정됨에 따라 특별활동이 확대와 교과 영역에 가해진 새로운 조치들에 의해서 교과는 위축되었다.5차에서 교육과정 편성 ? 운영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교육과정 개정의 중점으로 삼았지만 교육과정 지역화를 예외로 하면, 별도의 새로운 조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6차는 그 자체를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중앙집권형 교육과정을 지방분권형 교육과정으로 전환한 것이 그것이다. 6차에서는 학교교육이 교과서 중심이 아닌 교육과정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교육과정 중심교육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각각 별개의 실체를 가지는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학교교육에서 교과의 위치를 더욱 옹색하게 만들었다.‘교과서 중심 교육’에서 ‘교육과정 중심 교육’으로의 전환이라는 슬로건은 7차에서 더욱 강주되었다.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의 방안인가? 이것에 대한 의문들은 물론 충분히 검토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러한 문제 제기가 거듭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육실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해결하고자 하는 교육의 특정한 측면 또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구안된 것이며, 따라서 그 방안은 그것이 간과하고 있는 교육의 또 다른 측면 또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언제든지 비판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7차는 그 출현과 동시에 8차를 잉태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필수를 축소하고 선택을 확대한다는 교욱과정 개정 지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럴 경우 개정의 초점은 필수교과의 수를 줄이고 선택교과의 수를 늘리는 데에 맞추어질 수 밖에 없다.공통 교육과정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거나, 선택 교육과정이나 수준별 교육과정을 부각시키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국민공통기본 교육과정’은 거기에 속하는 10개의 교과들을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으로 차이, 공통점, 관계 모두를 중시해야 한다.공통 교육과정이 결과적으로 전통적 교과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고 하여 그것이 보수적 측면을 가진다고 보는 것은 7차에 공통 교육과정을 도입한 사람들의 의도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필수축소, 선택확대’라는 사명을 띠고 등장한 것이니만큼 보수적 측면과는 전혀 방향이 달라진다. 7차에는 이처럼 개혁적 관심과 보수적 관심이 미묘하면서도 위태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균형 상태가 더 이상의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심을 분명하게 구분해 내어야 한다. 교과들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곧 교육과정의 개념 그 자체를 묻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개혁적 관심과 보수적 관심은 교육과정의 개념에 관한 근본적 대립을 나타내고 있다.굥통 교육과정의 근거에 해당하는 공통적, 기본적 필요라는 것이 그 가짓수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것들이 순전히 등한 위치에 있으며 공통 교육과정은 그것들의 산술적 합으로 간주된다는 것인데, 어떤 교과들로 구성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공통 교육과정의 운명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7차의 문제 해결을 위해 동원된 접근방식 또한 가법적이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접근이긴 해도 유일 타당한 것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접근이 교육문제 해결에 유영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교육개혁 주창자들에 의하여 암암리에 조장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교과에 관한 전통적 개념은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오늘날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 교과 공부를 실생활의 문제해결보다는 심성함양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만약 공통 교육과정이 심성함양에 필수적인 교과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 하나하나의 교과는 외면적으로 따로따로 심성함양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적으로는 심성함양이라는 한 가지 초점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파악되는 교과 상호간의 관계는 곱하기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승법적)7차는 사실 가법적과 승법적의 어중간한 절충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균형이 깨진다면 필수 교과는 더욱 축소되고 선택교과는 더욱더 확대될 것이며 우리의 의식 속에 필수교과라는 개념조차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통적 교과들이 하나의 버팀목이 되어 뒷받침해 온 ‘올바른 삶’ 또한 아무도 문제삼지 않을 정도로 보이지 않게 서서히 퇴색되고 무너지게 될 것이다.수준별 교육과정은 7차의 개혁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교육개혁이 표방하고 있는 학생중심 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실제적 방안으로 채택된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 예상된다. 그 혼란을 수준별 교육과정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교육이 어떤 교육인지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수준’은 ‘교과의 내용수준’과 ‘학생의 학습수준’을 동에서 간접적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과 또는 교육내용을 명시적인 것에 한정함으로써 교육내용의 보다 중요한 차원인 묵시적 차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묵시적 차원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운영에 있어서 평가에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데에서 비롯된 당연한 귀결이다.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과의 내용수준과 학생의 학습수준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전적으로 평가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평가는 편성의 단계에서도 문제가 된다. 평가위주의 사고방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교과 또는 교육내용과 내용항목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교과의 내용수준과 학생의 학습수준의 일치라는 것이 평가결과에 의존하는 한 학생의 개인차를 제대로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표준화된 수업사태가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교육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일 수밖에 없다. 교육내용은 성격상 ‘사람’의 전인격적 변화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런 만큼 교육내용은 몇 가지 유형으로 표준화하거나 명시적인 형태로 언어화할 수 없다. 이점을 고려한다면 수업사태는 유형화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오히려 전통적 수업에서는 교육내용의 묵시적 차원의 핵심적인 한 축을 이루는 교사에 의하여 학생들의 다양한 개인차가 존중되고 수업에 직접적으로 활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내용의 묵시적 차원을 올바로 존중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교육내용의 묵시적 차원을 올바로 존중하는 것과 교사를 교육의 주체로 존중하는 것은 결코 다른 일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의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육개혁 방안 중의 하나로 제시될 당시의 기세와는 달리 상당한 정도로 완화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그것이 하교 현장에 적용된다 하더라도 교사의 역할이 현재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3. 수업과 평가수업시간에 이루어지는 평가는 교육내용을 매개로 한 교사와 학생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배제하고는 설명될 수 없다. 특별히 다.
제 8 장 간접전달간접전달을 교과교육을 그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대두된 교육방법이다. 언어주의 교육과 실물교육은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을 객관화함으로써 교육내용과 교사를 분리시키고 교사와 학생의 교육적 유대를 약화시키고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 문제의식올바른 의미에서의 교과교육의 원형은 희랍 아테나이의 구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희랍이 멸망하고 희랍교육이 알렉산드리아와 유태 그리고 로마로 전파되면서부터 아테나이의 교육적 전통은 서로 다른 옷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희랍교육의 상이한 전개과정은 모두가 교육내용과 교사의 존재의 분리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며, 또한 그와 같은 분리는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분리를 가속화하였다.문자화된 교육내용의 가치는 그 자체 속에 붙박혀 있는 의미에 비추어 정당화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지니고 있는 모종의 수단적 가치에 의해서 정당화될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전달하는 교육방법 또한 그 내용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논리적으로 요청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육내용의 논리나 성격과는 무관하게 모든 내용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절차나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은 사태에서 이루어지는 문자나 언어주의 교육은 문자를 통해 전달하려는 교육내용 의미의 ‘이해’ 자체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이해와 관련된 아동의 자발성을 존중할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 실물교육은 이 점을 문제로 인식하고 교육의 과정에서 아동의 이해과정이 보다 강조되고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고 이 점은 교육에 관한 올바른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물교육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넘어서서 교육내용으로서의 언어나 문자를 실물이나 사물로 대치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사실상 언어나 문자로 표현된 교육내용은 단순히 수단적 정보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모종의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나 문자식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교육방법의 성격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오우크쇼트는 학생들이 입문되어야 할 정신세계를 ‘마음의 표현’ 또는 ‘사고의 다양한 표현들’로 규정하면서 교수-학습 과정은 학습자로 하여금 ‘세계의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은 많은 것을 접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육내용을 마음과 그것의 세부적 표현, 표면과 이면, 일반적인 원리와 세부사항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오우크쇼트에 의하면 교사가 그의 학생을 입문시켜야 하는 문화유산은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다양한 종류와 수준의 ‘능력’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 능력은 ‘정보’와 ‘판단’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보는 여러 가지 사실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단순한 식별과 규정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기술이나 능력과 관련된 규칙이나 명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정보에 들어 있는 규칙이나 명제는, 반드시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명시적으로 진술되고 의식적으로 준수된다는 것 등을 지적한다. 그리고 판단 또한 여러 가지 상이한 수준이 있다. 이 판단의 요소는 기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조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능력 또는 지식에 그 구성요소로 반드시 들어 있다. 그 능력이 순전히 신체적인 감각이나 근육을 사용하는 기술에서 점점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거기에서 판단이라는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진다.이상 요약한 오우크쇼트의 논의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오우크쇼트가 지식을 정보와 판단으로 구분하고 그 종류와 수준을 동시에 논의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우크쇼트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정보와 판단의 구분이 교수-학습 과정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교육내용의 성격을 정보와 판단으로 구분하여 논의하는 일의 이유나 목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결국 그것은 ‘학습과 교수의 내, 양자는 결코 별개로 논의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정보와 판단 사이의 비분리인데 왜 그는 정보와 판단의 구분 또는 비분리의 문제를 교수-학습 사태와 관련하여 새로운 맥락에서 언급하였을까? 그는 정보와 판단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주는 두 번째 시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보와 판단의 구분과 교수-학습 활동의 성격에 대한 이해 사이에 성립하는 논리적 함의관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한다. 정보와 판단의 구분이 오히려 구체적인 교수-학습 활동의 성격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달방식으로서의 교수 행위에 관한 오우크쇼트의 논의를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오우크쇼트에 의하면 사고의 능력으로서의 판단은 특정한 사고의 양식을 따르는 ‘특정한 내용에 관한’ 사고의 능력을 뜻한다. 이 경우 사고의 능력으로서의 판단은 선천적 본성으로서 학생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은 정보를 획득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학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판단은 정보를 전달하거나 학습하는 과정과 별도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과 동시에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이상 검토한 바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우크쇼트의 우려와 문제의식이다. 오우크쇼트는 판단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판단은 정보를 가르치거나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만 전달될 수 있을 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교육내용으로서의 정보와 그것을 다루고 가르치는 교사의 존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보가 교사가 일련의 시간 계열 속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과의 세부사항들을 뜻한다면 판단은 그 정보들을 다루고 가르치는 능력 또는 그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교사의 스타일을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보면 정보와 판단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결국 교사의 판단이 개입된 교육내용으로서의 정보의 중요성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을 수업사태에서 시범르는 인간 존재의 인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위대한 사상가이지만 그의 저작을 보면 그의 삶 전체가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끌려는 강렬한 교육적 열정으로 충만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키에르케고르는 ‘전달’이라는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교육 방법을 조명하고 분석하여 이른바 ‘간접전달’이라는 방법적 원리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기독교인의 형성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제안된 전달방법이지만 이를 교과교육과 관련하여 논의할 경우 교육을 통해 가르치는 교육내용으로서의 교과와 교사의 지위 뿐 아니라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과 교섭방식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가 말하는 간접전달을 교과교육과 관련하여 해석하면, 교과는 삶의 유용성 추구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교사는 물론이요 학생의 존재 또는 자아의 질적 변화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교사와 학생 사이는 특이한 실존적 유대관계와 교섭방식을 가지는데 그것은 교사 자신이 진리로서의 교육내용과 학생의 실존적 관계로 그대로 복제되는 방식을 가리킨다.키에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교육방법에 기독교인의 형성을 위한 방법상의 원리가 시사되어 있다고 보고, 기독교인의 형성이라는 그의 목적에 맞게 소크라테스의 교육방법을 정련시킴으로써 그 원리를 자신의 교육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이것은 그가 독창적으로 개발해낸 교육방법이라기보다 그가 이해한 예수의 교육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양자의 교육방법의 전체적인 특징에서 추출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곧 교사의 자세, 전달의 방법,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학생의 심리상태이다. 소크라테스의 교육방법에서 그것은 각각 아이로니, 회상이론, 그리고 에로스로 개념화되며, 키에르케고르의 교육방법에서 그것은 각각 파라독스, 간접전달, 그리고 상심의 가능성이다. 이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들은 각각의 교육방법의 전체적인 특징에서 추출된 것인 만큼, 그것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그 중 어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무한한 절대적 부정’을 나타낸다고 본 것이다.소크라테스의 아이로니는 ‘무’ 도는 ‘부정’의 형식으로 주어진 ‘절대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개인이 취하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아이로니는 학생과의 관계 속에서의 교사의 자세로 파악할 때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학생의 입장에서 볼 때,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그 이면에 진리를 감추고 있는 가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학생에게 ‘흡인력’과 ‘반발력’이라는 상반된 힘을 작용시키면서 학생을 ‘당장 눈 앞에서 벌어지는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만들었다.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아이로니는 학생의 삶의 현실을 부정하기만 할 뿐,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소크라테스가 삶의 현실을 부정한 것은 결국 학생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일체의 다른 것으로부터 떼어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로니가 진정한 자아의 출현, 진정한 삶의 시작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보았다.그리고 교사로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자신을 조력자로, 그 자신이 하는 일을 ‘산파’의 역할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는 긍정적 의미에도 주목해야 한다.(2) 회상이론아이로니와 산파술은 ‘회상이론’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학습은 곧 회상’이라는 소크라테스의 견해는 진리가 학생의 내면에 잠재적인 형태로 이미 들어 있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교사가 ‘산파’의 위치에 머물러야 하는 근거가 된다. 결국, 회상이론은 산파술의 이론적 기초요, 산파술은 회상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적 계기라고 말할 수 있다.회상이론이 교육방법에 주는 시사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회상이론을 지식의 전달과정 또는 지식의 내면화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회상은 지식의 내면화와 별개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바로 그 과정을 반대방향에서 규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때 회상이론은 학생이 지식을 철저하게 이해하도록 이끌면서 교사 자신의 역할은 감추는, 고도로 정련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