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영화 읽기- 시간, 장소, 기억 그리고 일상의 사건들 -프롤로그오늘 새벽 2시30분쯤 갑자기 눈을 뜬다. 이번 주는 자꾸만 새벽 3시나 3시30분에 눈을뜬다. 잠을 자는 것은 내 의지가 앞서 일지 몰라도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내 무의식적인 작용이 더 크게 작용한다. 나도 모르게 잠을 깨면서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다. 단지 몇 시간 자지 않은 것 같은데 왜 피곤하지 않을까. 그 반대로 왜 상쾌하지. 기분이 싫지 않다. 어쩌면 더 잘 수 있다는 여유 때문일까. 다시 잠이 들어 내가 일어난 시각은 5시. 아까와는 다르게 피곤하다 많이. 이상하게 몸에 힘이 다 없어진 것 같고 머리가 띵하니 어지럽다. 정말 이 기분 더럽게 짜증난다. 회사에 출근하려고 아침에 집을 나선다. 그 전에 영어 학원을 간다. 영어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데 왠지 모르게 날씨가 우중충하니 우울하다. 마음도 우울해 진다. 사람은 확연히 자연적이다. 이렇게 날씨에 따라 내 기분도 달라지니 말이다. 걸으면서 잠시 동안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시간과 감정시간. 시간을 우리는 알 수 있을까? 알지 못하면 그럼 느낄 수는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은 시간을 기억과 연관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말대로 시간은 기억일까? 정말...? 아니면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이 시간의 흔적일까? 만약 시간이 기억과 연관되어서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정작 시간이 아니었던가?오늘 난 새벽 2시30분에 잠이 깨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왜 잠자는 동안은 기억이 없을까? 그것 또한 시간이라면 시간이 아니었던가. 왜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은 영어학원에서 보낸 시간이 10년 전의 과거의 기억처럼 느껴질까. 시간은 기억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지난 간 과거의 추억들이 정말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면 인간이 살아온 시간들은 불과 몇 개로 우리의 뇌에 남은 기억의 사건을 품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허무하다. 살아 온 내 29년 동안의 삶이 허무하게 다가온다. 지난 삶을 열심히 살아 왔지만 그 시간을 살아온 내가 지금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불과 행복했던 몇 개의 기억. 불행했던 그래서 너무 힘들었던 몇 개의 기억. 그리고 이제는 추억으로 남은 몇 개의 기억뿐이란 말인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보냈던 기억. 의지와 상관없이 싫은 사람과 보내야만 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 시간 동안에는 적어도 내 느낌과 시간이 얽혀 시간이 상대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단 1시간을 보내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면 그 1시간이 1분보다도 더 짧게 느끼고 싫은 시간과 보내면 단 1시간이 10시간 보다 더 길게 느끼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란 해가 지고 뜨는 주기적으로 변화는 절대적인 시간에 가깝지만 어쩌면 시간은 미시적인 개개인의 시각으로 볼 때 지극히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어쩌면 더 극한적으로 말해서 시간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는 무엇인가만 존재할 뿐 그 흐름을 우리는 시간이라 는 그물에 가두어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난 가끔 잠에서 깨면 어제 태어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노인이 되어서 아니 죽기 전에도 난 그런 기분이 들 것만 같다. 시간은 없다고 누가 그러던데 누군지는 지금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그가 말하길 과거의 시간은 지나가서 없고 미래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아서 없고 현재의 시간은 너무 짧아 붙잡을 수 없어서 없다고 말했다. 그럼 지금 이 흐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뭐란 말인가?말한다면 그냥 점 같은 하나의 극히 짧은 시점 같은 것인가? 아닐 것이다. 내심 난 아니길 바란다. 그럼 세상이 너무 슬프고 허무할 것 같다.시간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시간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그것이 행복하던 슬프던 아니면 기쁘던 지루했던 짧던 길던. 그것은 우리가 느낀 감정이 아니었던가? 만약 지나간 시간이 추억적인 과거의 기억이라면 추억적인 과거의 기억은 정작 감정적인 우리의 느낌이 아니던가?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하고 강하면 우리의 뇌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이고 반대로 느슨하고 강렬하지 못했던 느낌은 아주 짧게 우리의 뇌에 남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다.홍상수 감독의 영화 읽기홍상수의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진행 중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영화를 말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한 비평일지는 몰라도 그 동안 홍상수 감독이 보여준 영화의 큰 흐름과 맥을 집어보면 그의 영화에서는 시간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철학자 들뢰즈가 말했듯 영화는 운동과 시간으로 구성된 이미지다. 홍상수는 지극히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영화에서 살아 숨쉬는 사건으로 다룬다. 일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그 자체에서 벌어지는 삶이다. 그 삶이 홍상수 영화에서는 한편의 사건으로써 영화화된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구분되어진다.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면이 영화화되면서 공감하기 때문이고 화려한 CG나 신경을 자극하는 장면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뭐 이런 재미없는 영화가 있나하고 싫어한다. 하지만 전달해주는 영화의 메시지는 적어도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화려하고 신경을 자극하는 삶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재미없고 지루하고 느슨하고 틀에 박힌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요 일상이다.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여성적인 시선에서 바라 본 것이 아니라 남성적인 시선에서 본 것이다. 그래서 패미니즘적인 시각을 갖은 사람이 영화를 본다면 상당히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는 항상 빠짐없이 술과 술자리, 여자와 섹스가 존재한다. 적어도 이 존재들은 남자들에게는 쾌락을 줄 수 있는 가장 큰 요소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은 이기적인 쾌락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의 시선은 남성적이며 그 남성이 무의식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본성은 이기적인 마초적 시각이다. 그 남성적인 마초적 시선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전개의 모티브다.
현상학적 건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건축은 곤드레 만드레 취한 침묵의 예술이다 ”- Steven Holl -1. 지각감각철학자 메를로-퐁티가 말한 원초적인 인간 생활의 적나라한 현상은 시각(인간과 세계의) 첫 만남이다. 적어도 지각감각은 세계라는 지평을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각감각하는 느낌들은 육화된 몸을 바탕으로 세계의 장속에서 행하는 체험에서 발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각감각은 이성에 가깝기보다는 원초적이고 욕망적인 몸에 더 가깝다. 예컨대, 우리는 아름다운 현상을 볼 때면 이성보다는 감성이 먼저 더 자극받게 되고, 몸에 상처를 입었을 때 누구가가 그 상처를 건드리면 몸이 먼저 그 상황을 빨리 대처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지각감각의 느낌을 받는 것은 어떠한 세계 지평의 장에서 발생된 현상의 접촉적인 관계의 체험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내포하고 건축에서 발생되는 현상들에 대해서 말해보겠다.건축에서 발생되는 현상들은 Juhani - Pallasmaa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7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피부, 골격, 근육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그 감각기관의 강도적인 차이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느끼는 지각감각의 차이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건축을 체험하면서 건축 안에 내재된 무수한 현상들을 관찰자는 무의식적으로 지향하면서 받아들일 것이다. 이 때 발생되는 관찰자의 지각감각은 뇌를 포함한 몸 전체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관찰자가 건축물을 체험하면서 느낀 지각감각들은 우리의 신경이 다발로 퍼진 몸을 통해 최종 종착지인 뇌로 귀로한다. 뇌는 복잡하고 빠른 처리작용을 거치면서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에서 그 정보들을 수용할 것이다. 그러면 변연계는 다양한 뉴런간의 상호작용과 무수한 시냅스의 작용들을 통해 각 종 호르몬과 다양한 신경전달물질을 발생시킬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관찰자는 감정에 변화가 생기고 더불어 지각감각의 강도적인 차이가 발생될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현상을 같이 체험하고도 각 관찰자의 감정이 제 각각 교묘하고 미스터리 한 것은 아마도 이렇게 무수하고 복잡하게 엉켜서 작용하고 있는 우리의 뇌 때문이며 뇌 속에 그 감정의 실마리가 숨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글의 요지에 다소 벗어난 다고 생각해서 뇌와 감정에 대한 연관관계는 생략하겠다. (필자는 뇌와 감정에 대한 연관에 대해서 따로 글을 지필해서 올려놓았다)2. 현상학적 건축(그림 1) 스티븐 홀의 Sarphatistraat Offices 현상적인 의의를 내포한 건축물들을 보면 대부분 표면과 공간에서 체험된다. 건축의 현상은 관찰자의 육화된 체험을 바탕으로 분명하면서도 불분명한 어느 시각적인 위치와 거리, 시간을 배경으로 한 사건성에서 그 내막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건축의 현상이 마치 잠재되었던 유령의 섬뜩함을 체험하듯 관찰자에게 강한 지각감각을 줄 수는 없다. 현상학적 건축에서 의의를 내포한 현상은 혼성-중첩되어 쓰인 재료의 물질성-재질감 그리고 색, 빛, 그림자, 물, 공간 등이 주는 감각적인 효과를 통해 발생된다. 발생되는 현상들은 분명히 강도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며, 그 강도에 따라서 예술적인 가치의 차이가 나타날 것이다.(그림 2) 헤르조그 & 드 뮤론의 Eberswalde Technical School Library 건축의 강한 현상들을 탄생시키는 한 방법으로는 기존의 재료가 갖는 현상을 낯설게 하는 방법으로서 복합, 중첩, 혼성의 방식이 주로 사용된다. 또 대지와 장소, 환경, 프로그램이 주는 건축적인 배경 효과도 지각감각적인 강한 현상들을 탄생시킬 수 있는 요소이다. 밤과 낮의 시간적인 변화에서 달라지는 건축적인 현상과 분위기, 덥고 추운 지방의 환경과 기후 대지의 형상과 지역의 문화 등이 주는 각양각색의 건축적 배경 요소들은 강한 현상들을 탄생시킬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며 건축적으로도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가의 예리한 눈과 깊고 섬세한 감각일 것이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 존재와 존재자존재. 과연 존재란 무엇일까?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이 존재인가? 그것은 존재자가 아니던가? 철학자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는 존재자와 구별되는 의미로써 그 어떤 현상이 섬뜩하게 발생되는 그 무엇이라고 지칭합니다. 필자는 ‘섬뜩한 유령’이라고 때로는 말하곤 합니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나무들이 너무 빽빽하고 울창해서 어두워 진 숲길을 걷다보면 우리가 때로는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불안과 공포가 자연히 밀려오는데 그때마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한 줄기의 희망 같은 빛이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이 빛을 가리켜 존재라고 칭했습니다. 그 상황을 우리도 상상해 봅시다. 그러나 절대로 그 의미에만 국한되어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섣불리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맙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존재의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이데거가 말했던 그 방대한 존재의 개념에서 필자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어느 한 순간 나타나는 섬뜩함에 국한되어서 이 글을 전개시킬 나갈 것입니다.2. 고흐의 「구두」(그림 ) 고흐의 구두하이데거는 고흐의 ‘구두’를 보고 반 고흐의 존재를 떠 올립니다. 미술 사학자 샤피로는 고흐의 구두 그림을 보고 고흐 자신의 구두가 아니라서 고흐의 존재를 떠올리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철학자 데리다는 고흐의 구두는 그 어떤 의미도 없는 단순한 사물의 구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흐가 그린 구두는 사물적인 구두 이상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구두는 농촌에 사는 농부의 흙 묻은 구두일 수 있으며 고흐 자신의 구두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 어떤 이의 구두라면 또 어떻습니까? 작품의 가치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정말로 중요할까요? 구두는 단순한 사물의 물질적인 존재자를 넘어 존재적인 그 무엇의 아우라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작품의 가치적인 의미는 아닐까요? 필자가 본 고흐의 구두 그림은 하이데거가 느낀 것처럼 왠지 모르게 분위기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품에서 분위기 즉, 기분을 관찰자가 느낀 다는 것은 작가의 섬세한 감각이 밑바탕으로 내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작품은 아우라적인 분위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고흐 작품에서 말하는 구두는 고흐가 관찰자에게 구두라는 물질적인 사물의 존재자를 단순히 재현하거나 모방한 것에 그쳐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 즉,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이미 내포되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각. 다시 말해 작품은 감각적인 기분 자체를 표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고흐는 최고의 감각을 지닌 화가이지요. 사실 관찰자가 구두의 그림을 응시하면서 아우라적인 분위기를 의식하면서 느끼려 하면 오히려 그러한 느낌은 그 순간에 확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몸 자체의 욕망적인 것에 더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고흐가 그린 구두의 그림은 구두라는 사물의 존재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두라는 사물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그 구두의 주인도 작품의 의미에 국한되어 말하자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두의 그림에서 사물은 구두가 아닌 책이던 의자이던 침대이던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존재. 그림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존재 자체를 표현한 분위기입니다. 결론적으로 고흐의 구두는 구두를 그리고자 함이 목적이 아니라, 분위기. 분위기라는 존재 자체가 목적입니다. 고흐는 최고의 화가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도 힘든 그 무(無)의 존재를 고흐는 대담하게도 무(無)의 존재를 자신의 그림에 표현했습니다. 구두라는 사물의 존재자를 등에 업고 말입니다. 고흐의 구두 그림에서는 그것이 그렇게도 하이데거가 힘주어 말했던 존재라 생각되며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마치 영혼적인 것으로써 존재는 일종의 분위기적인 기분일 수 있습니다. 그 기분은 우리가 어느 순간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기에 그 발생은 우연적인 ‘잠재된 섬뜩함’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감각은 세상에 이미 내포되어 잠재해 있습니다. 그런 감각이 강하게 내포된 사람이 예술가가 된다면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확률이 그 만큼 높아지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잘 안 되는 사람은 훌륭한 예술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확률이 적어지겠지요. 또 그 감각이 부족한 사람은 훌륭한 작품을 보고 있어도 제대로 느끼고 감각하지 못하겠지요. 감각은 만들어 지는 경향도 있지만 보통은 타고 나는 경향이 클 것입니다.
화가 세잔의 시각- 세잔의 「사과」연작을 중심으로 -1. 세잔의 삶미술사에서 가장 불운했던 한 명의 화가 세잔은 근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미술사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천재 중의 천재화가 세잔. 타고난 자신의 시각과 촉각의 감각을 바탕으로 작품에서 보여 지는 육중하고 섬세한 감각적인 터치는 마치 실제 세계를 충실히 재현한 듯이 보인다. 색채의 마술사 세잔. 하지만 그의 삶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다. 세잔은 삶은 항상 고뇌와 고독에 젖어 있었고 심한 신경강박증의 증세마저 보인다. 삶은 자신과의 괴로운 싸움의 연속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누구보다 미술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미술관에 대해서는 어떠한 장애에 부딪혀도 굽힘이 없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무엇보다 자기 작품에 대해서는 정열적인 열정을 퍼붓는 노력파 화가였다.2.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미술계세잔이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것은 세잔은 미술사 전체의 시각적인 판도를 뒤바꾼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잔이 살았던 19세기말 유럽은 사진기가 대중적(?)으로 보급화 된 시기였다. (사실 사진기는 이미 17세기에 발명되었고 그 시발점은 16세기에 있었다.) 당시 19세기 말의 유럽의 프랑스 화가(아마 그림을 그리는 전체 화가들)들의 판단으로는 기계적인 사진기의 사물에 대한 표현 능력을 화가인 인간은 도저히 따라잡지 못한다고 본다. 사실 사진기가 발명되기 이전에 대다수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현실의 모방 즉, 현실의 재현에 있었다. 미술사적인 시각으로도 그림의 역할은 주로 현실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초상화이던, 정물화이던, 풍경화이던 그 무엇으로 표현된 그림이면 말이다.(그림 ) 모네의 수련그러나 사진기가 보급화 되면서 그림의 역할인 현실 세계의 재현을 사진기가 대용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똑같이 적나라하게 똑같이 말이다. (흑백사진이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에서 화가들은 사진기가 할 수 없는 표현을 해야 그나마 먹고 을 응시해야 정확히 세계 현상의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파악할 수 있다.)3. 세잔과 인상파대부분의 미술평론가들이 세잔과 고흐를 후기 인상파 화가에 배치한다. (그러나 고흐는 차치하더라도 세잔은 분명히 색채화가다. 고흐도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후기 인상파에 놓여지지만 적어도 고흐, 마티스, 세잔은 색채화가다. 그래서 굳이 배치하자면 색채파가 더 적당한 위치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어째든 세잔은 시기적으로 볼 때 인상파에게 영향을 받았고 인상파 이후의 화가이다. 한때 젊은 시절에 세잔은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 할 정도로 인상파풍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아마도 세잔은 인상파의 그림이 종말을 고한 미술계에 한 줄기의 씨앗 같은 희망의 빛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잔은 깊은 고뇌에 빠져 매일 자신의 그림에 대해 고민한다. 왜 인상파 그림은 현실을 모방한다지만 정작 그림은 왜 현실과 다른 표현일까? 왜 인상파들은 자신들이 그린 그림이 재현된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인간의 눈으로 본 현실 세계가 이럴까? 세잔은 적어도 자신의 눈으로 본 현실 세계는 인상파 그림처럼 가볍고 흐린 표현으로 재현된 세계가 아니라, 훨씬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현존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다.사실 인상파의 그림은 위에서도 필자가 말했듯이 적나라한 세계의 현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눈을 한번 거친 화가의 눈에 의해 소화된 그림이다. 세잔은 믿는다. 화가가 현실 세계를 그대로 표현하려면 화가의 눈은 일종의 반사되는 거울로써의 역할만 하는 것이지 현실 세계를 소화시키는 시각의 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세잔은 현실 세계의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살아 숨쉬는 생생한 그림으로 느끼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각의 눈이 아니라 지각의 눈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잔 그림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세잔 그림의 개념을 잘 알기 위해서는 지각과 감각의 개념을 정확히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세잔을 최고의 화을 넘어 우리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근원적인 덩어리의 개념에 더 가깝다. 예컨대, 우리가 몸에 상처를 입으면 따끔거리고 아픈데 아픈 상처를 누군가가 몰래 건드리면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즉, 생각보다 먼저 몸이 먼저 느끼는 상황으로 이성적으로 이해되기 전의 사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감각이 세상과 나에게 이미 주어져 존재하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느끼고 감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인식(Cognition)은 이러한 몸의 감각을 모조리 제외시킨 단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경우에 지칭되는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지각과 감각을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적어도 상황에 따라서는 지각감각으로 붙여서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감과 감각은 육화된 몸을 바탕으로 해서 느끼는 개념으로써 뭉뚱그려 하나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5. 세잔의 사과세잔의 그림은 한 마디로 지각감각이다. 세잔은 현실 세계의 현상들을 바라 본 우리의 지각감각을 그대로 그림으로 재현한 사람이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의 「사과」 연작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자. 먼저 그림2에 그려진 테이블의 선을 보자. 테이블의 선이 일정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뒤틀려져 그려있다. 세잔 이전의 화가들은 현실 세계의 사물을 오직 이성의 눈으로만 보고 인식해서 아마도 테이블의 선을 일정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현상들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눈과 지각을 기만하는 것이며 거짓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세잔은 그림에서 보여지 듯 너무나 맞지 않게 테이블을 어긋나게 그렸다. 왜 그랬을까? 세잔의 지각적인 눈이 맞는 것인가 이전의 화가들의 시각적인 눈이 맞는 것인가? 그림의 정답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직접 상황을 만들어 실험해 보자. 그럼 누가 거짓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그림 ) 세잔의 사과지금 당장 테이블 선 중간에 물건을 놓고 테이블의 선을 바라보자. 그럼 테이블이 선이 일정하게보고 인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 동안 뿌리깊이 내려진 세상을 바라보는 서양의 시각적인 진리였고 선입견이었고 고정관념적인 개념이었고 믿음이었습니다. 그 시각을 무너뜨린 사람이 미술계에서는 세잔입니다. 그래서 세잔을 미술사가들이 근대 미술의 아버지라 호칭해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르고 성숙하지 못한 당시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러한 지각적인 시각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세잔의 훌륭한 그림들을 쓰레기라 치부하고 세잔의 그림 전시회에서는 야유와 비유 섞인 말들이 남발되어 오가고 신견이 짧은 비평가들은 세잔의 그림을 호되게 평가하면서 비판의 글을 퍼붓습니다. 세잔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지각을 정확하게 믿었기에 혼자 외롭게 쓸쓸히 자신과 힘든 싸움을 하며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당시 그 어떤 누구도 세잔의 그림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각적인 병폐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바보라서가 아니라, 이미 뼈 속까지 너무 깊이 박힌 서양의 시각적인 개념이 사람들에게 완전하고 강하게 각인되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지금도 시대 문화적인 이데올로기적 시각에 한번 사로잡히면 그 순간 사람들은 그 시각을 쉽게 버리지 못하며 그 시각에서 더 넘어 보려하지 않고 혹시나 더 넓고 깊이 사태를 보면 그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일종의 미치광이로 취급되어집니다. 곧 대중들은 그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권력에 점점 무의식적으로 훈육되어지는 것입니다.서양 철학과 기독교는 플라톤 이후의 그리스 철학에서 파생된 이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시발점이 시작된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중세, 르네상스, 로코코, 바로코, 낭만주의의 2000년의 시대적인 상황을 거치면서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진 어리석은 진리의 시각으로써 이미 사람들에게 깊숙이 각인되어 버리기 힘든 익숙함에 그 시각의 늪에서 대중들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혹시나 이렇게 오래 동안 진리라 믿어 온 이성의 시각이 틀리면 그 동안숭고함을 위협하는 웃음을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금기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방자하게 웃으면 안 되었고 또한 방탕한 생활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힘을 유지하기 위한 음모로써 사람들은 그 만큼 자유가 제약되었습니다. 물론 시각적으로도 제한된 부분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사회적인 배경을 내포하면서 시간은 점점 근대로 흘러옵니다. 이성적인 시각은 미술뿐만 아니라 건축과 음악 등의 모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시각의 맥으로 자리 잡혀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 삶 전체의 과점에 이미 무의식적으로 파생된 보편적 이데올로기로써 이성과 가장 가까운 눈이 최고의 감각 기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참고로 그 감각의 우위 자체를 뒤바꾸어 버린 사람이 미술사에서는 폴 세잔이고, 철학사에서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질 들뢰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는 아직도 그 뿌리가 너무 깊이 박혀 다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지요. 근대적인 교훈과 훈육에 길들여진 개처럼 그렇게 우리도 훈육되어 교육받아 왔으며, 그렇게 또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이 진실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 주소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미술평론가들이 말할 때 세잔은 근대 미술사의 아버지라고 위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세잔은 근대를 넘어 현대인의 시각보다 더 정확하고 넓은 시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적어도 현대 미술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합니다. 적어도 1960년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시기에서만 보더라도 이러한 시각은 대중적으로 보편화 되어있지 않았으며 적어도 아방가르드적인 시각을 갖춘 예술가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별로 찾아 볼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즉, 당시 수많은 대중들은 여전히 이성의 사고가 우세한 시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말입니다.(그림 ) 세잔의 사과세잔이 그린 그림3을 보면 마찬가지로 세잔은 자신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이 반응해 사태의 적나라함을 여지없이 니다.)
인간의 행복한 감정에 대한 뇌-신경학적 분석1. 인간의 쾌락인간은 쾌락에 충실한 동물이요, 쾌락적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존재이다. 여타의 동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인간은 감정과 기분에 아주 충실한 존재이며 극단의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자신의 생명이 죽음의 늪에 빠지는 것을 잘 알면서도 쾌락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어리석은 존재이니 말이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감정이 공존한다고 했다. 프로이트가 말한 타나토스는 죽음 충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살면서 때로는 무기력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 무기력한 감정이 죽음 충동의 한 표현이라고 했다.프로이트의 말대로 무기력함이 죽음 충동의 한 표현이라면 사람이 쾌락의 절정을 맛본 이후에 밀려오는 몸의 나른함과 무기력함은 적어도 가장 큰 인간의 죽음 충동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쾌락과 죽음은 서로 엉켜있어서 너무나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사뭇 먼 존재인지도 모른다. 쾌락은 불행한 감정 보다는 행복한 감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와 로맨틱한 사랑을 하던, 몸 전체가 성기가 된 것 마냥 격렬한 섹스를 하던, 극단의 약물들을 복용해 환각에 빠지던, 스피드를 즐기거나 위험한 행동들을 하는 광적인 행동을 하던, 이러한 행동들을 하는 인간들의 공통적인 내면의 심리는 쾌락 추구에 있다.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더 큰 죽음의 욕망을 부르면서 계속해서 미끄러진다.(그림1) 인간 뇌의 R복합체, 변연계, 신피질을 나타낸그림 (매클린의 자료 참조)출저: 칼 세이건,『에덴의 용』, 임지원 역,사이언스 북스, 2006년보통 인간들의 학습적인 요소들을 차치하더라도 유전적으로 볼 때, 인간들은 고통과 공포, 불안, 두려움 등의 불쾌한 감정에서는 빨리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아마도 진화적으로 볼 때, 인간은 불쾌한 감정보다는 행복한 감정을 보다 더 많이 취하려는 쾌락적인 동물인 것 같다. 그리고 인간 몸 전체에 뻗어있는 다인드』, 양영철 ? 이양희 역, 말글빛냄, 2007년(그림 ) 프란츠 갈의 골상학 그림, 19세기 초반출저: 리타 카터, 『뇌 맵핑마인드』,양영철 ? 이양희 역, 말글빛냄, 2007년오래전부터 인간은 감정과 행동을 연관해 인간 머릿속에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해 두개골을 뚫고 정신병이나 수많은 행동을 치료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 같은 의학자들은 일찍부터 뇌가 마음의 자리라 생각했으며, 철학자 데카르트 또한 뇌가 감정의 형성에 중요한 기능적인 요소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19세기 초반에는 프란츠 갈의 골상학이 유행했을 만큼 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프로이트도 뇌에 대해 분석하고 연구하려고 했으나 기술적인 요인의 한계를 깨달고 분석의 방향을 바꾸었다. 최근에는 발달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의 뇌는 너무 복잡하고 넓어서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지금도 과정중이고 앞으로도 뇌의 연구는 더 활발해질 것이지만 그 한계점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 생각된다.3. 변연계와 신피질인간의 감정을 주관하고 지배하는 곳은 뇌이다. 그 중 변연계의 비중이 아주 크다. 변연계에서 감정적인 느낌이 발산되어 인간은 남을 사랑하고 때로는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변연계를 덮고 있는 신피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신피질은 우리가 이성적인 작용이 큰 말하기와 계산, 추리와 판단 등의 요소들을 가능하게 하는 부위이다. 사람들은 변연계와 신피질를 통합해 대뇌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표현하는 감정은 변연계와 신피질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인간은 세상을 볼 때, 의식적이거나 이성적인 사고의 정신보다는 육화된 몸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지각이 세상에 먼저 존재한다고 말했다. 뇌-신경학적으로 볼 때 그 말은 타당한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각하기도 전에 지각감각하는 것이 훨씬 빠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다. 또 카멜레온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몸이 변화며, 새는 자신의 날개에서 모든 활동을 전개시킨다. 이렇듯 인간과 동물은 이성보다는 몸으로써 먼저 세상을 지각감각하는 존재들이다.몸에 뻗어있는 무궁무진한 신경적인(그림 ) 인간 뇌의 사상분석출저: James W. Kalat, 『제8판 생물심리학』, 김문수 ? 문양호 ? 박소현 ? 박순권 역, 시그마프래스, 2006년존재들은 진화적으로 잠재된 지혜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의 뇌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보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절반 정도만 맞는 말 같습니다. 왜냐하면 상상은 우리 몸 전체에 잠재된 지각감각으로 하는 것이지 단지 시각적인 면에 국한되어 발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청각을 잃은 베토벤이나 시각을 잃어버린 헬렌 켈러 같은 위인들은 훌륭하고 많은 상상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 분들은 분명 감각 기관을 잃어버리기 전에 형성된 기억에 많이 의존했지만, 분명한 것은 시각에만 의존하여 상상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굳이 표현하자면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은 절대 상상할 수 없다’라고 해야 좀 더 타당한 말 같습니다.감정적으로 절제가 잘 안되는 사람들은 욕망과 쾌락이 강하게 작용하는 사람으로서 변연계가 신피질의 에너지보다 더 활발하고 강하게 작용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감정의 절제를 잘하는 사람은 변연계보다는 신피질의 에너지가 더 강하고 활발하게 작용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 깊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희생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변연계보다는 신피질이 매우 발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주나 섹스 그리고 마약과 같은 일시적인 자극의 감정적 쾌락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은 변연계의 작용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감정이 너무 복잡하고 미묘한 것은 아마도 변연계와 신피질 사이에서 벌어한다는 추측의 주장도 있습니다. 어째든 공포적인 감정과 행복한 감정은 분명히 서로 유대 관계로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타인에 대해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면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발생되는데, 이 호르몬은 상대에 대한 신뢰감을 쌓이도록 하면서 친밀감을 형성하는 사랑의 묘약으로써 상대에 대한 공포와 위협적인 스트레스를 줄이는 작용을 합니다. 반대로 공포와 위협적인 사람을 맞대하면 옥시토신 호르몬은 발생되지 않게 되고, 공포감과 위협감은 크게 발동될 것입니다.우리가 공포 영화를 보거나 번지점프나 놀이 기구를 탈 때, 공포적인 감정이 생기는데 그 이후로는 이상하게 저 밑으로 쾌락적인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는데 이것은 편도체의 작용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상하부와 뇌간에서 신경전달물질이 본능적으로 발생되어 우리를 편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추측해 보건대 편도체는 공포보다는 행복한 감정에 더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해 듯이 인간은 유전적으로 분명 공포적인 상황은 빨리 탈출하려 하고, 행복한 감정은 오래도록 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편도체는 감각을 담당하는 대뇌피질과도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섹시한 여성을 보는 것은 후두엽에 있는 시각중추이지만 에로틱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편도체입니다. 가령 편도체가 심한 손상을 입게 되거나 잘못해 제거되면 아름답고 섹시한 사람을 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안 생기고, 공포적인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아무런 표현적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예컨대, 편도체를 잘라낸 실험쥐는 덩치가 큰 고양이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격투 선수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은 경기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아주 큰 적일 것입니다. 만약 격투 선수가 공포와 두려움을 없애려고 극단적으로 자신의 편도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격투 선수는 경기에 임하는 자세와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공포가 깨끗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인간적인 감정의 느낌들은 영영 느껴 보지 못 그래서 과거에 함께 살던 가족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고, 자신의 집도 찾아오지 못해 이리저리 전전긍긍하는 방황하는 것입니다.기억은 보통 해마와 전두엽, 측두엽, 두정엽에서 관장한다고 말합니다. 그 중 해마는 기억형성에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데, 그 중 단기기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해마가 손상되면 영화 ‘메멘토’와 ‘가지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단기기억에 큰 문제가 발생될 것입니다. 주인공들은 이전의 상황들을 몸에 문신처럼 적어놓는데 해마가 손상되어 기억할 수 없기에 제 아무리 몸에 표현해 놓아도 처음 보듯 이전의 상황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해마에 손상을 입으면 분명 이전에 형성된 기억들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새롭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기억들은 더 이상 저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장기기억도 자연히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장기기억은 신피질에 저장됩니다. 그 중 전두엽은 인간의 활동 중에서 이성적이고 지적인 활동에 영향을 미칩니다.인간이 동물과 비교에 머리가 좋은 것은 이 전두엽이 발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전두엽은 인간의 뇌 중 30%를 차지할 정도로 아주 비중이 높습니다. 예전에 인간은 살면서 1%의 뇌밖에 사용하는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적어도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뇌의 30%이상은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필자는 인간이 살면서 자신의 뇌 전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장기기억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형성된 단기 기억이 오랜 시간을 두고 반복적으로 익혀져서 만들어진 기억입니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 해마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 몇 년 동안 단기기억을 저장하여 서서히 대뇌피질로 보내 장기기억을 생성합니다. 잠을 자는 동안 해마와 대뇌피질은 이렇게 상호 작용하는데 아마도 렘 수면시 발생되는 꿈은 이 상황적인 수많은 접촉면에서 발생된 일종의 이미지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대뇌피질에 저장된 장기 기억들은 상당 부분 인간의 일상적인 의식의 참여와 행동과 관련되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