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5.16. 5.16 군사 쿠데타 발발, 군사혁명위원회 설치1961.5.18. 장면 총리 하야1961.5.20.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1961.06.10 중앙정보부 설치1961.08.12 국가재건최고회의 정권 민정이양계획 발표1962.3.16 정치활동정화법공포1962.12.27. 국민투표에 의해 대통령중심제로 헌법 개정1963.02.26 민주공화당 창당1963.10.15 제5대 대통령 선거(박정희 당선)1963.11월26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1963.12월17 제 5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제3공화국 출범)1964.09월 베트남 파병 시작1964.06.03일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6.3사태)1965.06.22 한일협정 정식 조인1965.08.13 국회, 야당 불참 속 한일협정 비준안과 전투사단인 맹호부대 파월안1967.02.07 신민당 정식 발족,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 당수에 유진오 선출1967.05.03 제6대 대통령 선거(박정희 당선)1967.06.08 제7대 국회의원 선거1967.06월 총선거 부정 규탄시위1967.07.08 동백림1967.11.29 신민당 의원들이 등원해 175일만에 국회 정상화1969.09.14 3선 개헌안 통과1969.10.17 국민투표1970. 08.15일 박정희 대통령, 남북 통일에 관한 8.15선언 발표1971.04.27 제7대 대통령 선거(박정희 당선)1971.05.25 제8대 국회의원 선거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배경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 ·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6 ·25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습니다.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습니다.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 비상조치법이라는 임시헌법을 적용했으며,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고.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행하였습니다. 1963년 말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하였습니다.정치활동정화법정치활동정화법은 제2공화국에서 일정한 정치적 지위에 있었던 정치인과 5·16군사정변의 이른바 혁명과업수행을 방해했다고 인정되는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던 법률입니다. 이 조치는 또한 정화대상자를 심사해 적격 여부를 판정하는 일부터 그 판정을 해제하는 것까지 일체를 군부세력이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더구나 게다가 위헌여부에 상관없이 효력이 지속되도록 했으며 판정에 대해 행정소송 등 일체의 불복 신청을 하지 못하게끔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치활동 정화’ 대상이 된 주요인사 4,000여명이 정치 행위를 전혀 하지 못한 6년 여 동안 공화당은 각각 두 번의 안정적으로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둬 통치체제를 확고히 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성 정치인은 정치활동정화법이라는 사슬로 발을 묶어두고 그들은 공화당이라는 새 정당을 사전 조직, 모든 수단과 방2공화국의 순수 의원내각제가 장점을 발휘하기보다는 비효율적인 파쟁을 유발해 정국의 불안과 사회질서의 문란을 야기했고, 확고한 리더십 보장을 위해 대통령제가 우리나라 현실에 더 맞는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국민투표로 이루어진 개헌이지만 민주주의 측면에서 한계를 갖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다수가 자유롭게 참여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당시 군정의 비상조치법이 헌법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었고, 정당과 국회가 해산되었으며, 정치정화법에 의해 기존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고 있던 상황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고 폭넓은 정치적 토론과 논의가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1963 10.15 제 5대 대통령 선거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군에 복귀하겠다라는 약속을 어기고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습니다.처음에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가 출마하였고, 야당에서는 윤보선, 허정, 송요찬, 변영태 등 후보가 난립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정과 송요찬의 사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정당의 윤보선의 양자대결이 되었습니다.5대 대통령선거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국민의 신임을 받아 재집권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군정종식을 내건 구정치인이 집권해 인정한 의미의 민정이양을 이루느냐’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박정희 후보측은 민정당을 부패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구악, 구정치인으로 규정하며, 이번 선거는 구악에 젖은 구정치인과 개척정신에 불타는 신진세력과의 대결이며 구악집단과 민중세력의 대결이라고 하며, 조국의 근대화는 낡고 가식된 민주주의의 탈을 쓴 구정치인에게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정당은 공화당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공포정치와 비밀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군정 기간 중 공화당 창당 자금 마련을 위해 저지른 증권파동, 워커힐, 새나라자동차, 빠찡코 도입 사건 등 소위 4대 의혹 사건의 진상을 공개하라고 공격했습니다.또 사상논쟁도 이어졌는데요, 윤보선측은 박정희가 여순반란사건의 관의 현상도 나타났는데, 도시보다는 농촌에 전국에 걸쳐 각급 행정기관의 선거에 대한 폭넓은 개입과 지지의 동원이 이루어졌으며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이 살포되었기 때문입이다. 도시지역의 유권자들이 상대적으로 행정기관의 개입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당인 공화당을 외면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야당에게 보다 많은 지지를 보낸 데 비하여 농촌 지역에서는 행정기관의 개입과 동원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이른바 준봉투표가 보다 광범위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1963 11.26 제 6대 국회의원 선거제 6대 국회의원 선거결과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제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쟁점 중 하나는 미국이 한국에게 요구한 경제안정화 프로그램이었는데 야당은 이것을 박정희 정부의 무능과 외교 실패의 증거라고 공격했습니다. 박정희는 미국에게 원조를 조속히 제공하여 이 소문을 불식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는데, 미국은 이 문제가 정치 쟁점화되는 것을 막고 여당이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도록 1500만 달러의 원조 유보 중 1000만 달러 빼내어 제공하였습니다. 이것은 박정희에게 불리한 소문을 잠재우고 여당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선거 직전 발생한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도 안정 희구적 선택 유도하였습니다.또한, 군정 당시 선거법을 개정하여 무소속으로는 출마를 불가하도록 하였기 때문에야당이 난립하게 되어 여당에게 유리하였습니다.또한 기존의 소선거구 단순다수제 방식에 처음으로 전국구 비례대표제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제1당에게 실제 득표율과 무관하게 의석의 절반을 배분하며, 1당의 득표율이 50%가 넘는 경우에는 전국구 의석의 2/3까지 배분하도록 했습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이 실제 얻은 득표율은 33.5%에 불과했지만, 의석은 63%나 되었습니다.또한 여전한 금권, 관권 선거도 공화당의 압승을 도왔습니다.1967 5.3 제 6대 대통령 선거제 6대 대통령 선거를 압두고 야당은 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한일협정 비준을 앞두고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커지고 야 선거로 볼 수 있겠습니다.1967 6.8 제 7대 국회의원 선거7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와 공화당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였습니다. 이 선거에서 2/3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여야 3선 연임을 위한 개헌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 선거를 앞두고는 야당이 신민당으로 통합되어 야당 성향 유권자의 표가 분산될 가능성도 적었고, 현실적으로 개헌선 확보는 쉽지 않았기에 이전 선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정과 불법이 횡행하게 되었습니다.7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국무회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이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선거법 시행령을 개정했으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헌법 조항에 위배된다는 해석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선관위는 대통령만은 당 총재 자격으로 유세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림으로써 대통령의 공화당 후보 지원 유세가 가능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행정부 장,차관 동행하여 공화당 선거 유세에 참여하여 공화당 후보의 지지를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선거결과 공화당 129석 신민당 45석을 차지하며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신민당은 “6.8 부정선거는 선거의 형식만을 갖춘 선거 쿠데타로 규정”한다고 발표하며 재선거를 주장하고 국회등원을 거부,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또 언론의 비판과 학생들의 전국적 데모도 이어졌습니다.박정희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며 공화당 당선자 8명을 제명하고 부정선거 공무원 직위해제, 선거부정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였습니다.또 여야 협상을 위해 선거관리 위원회법, 국회의원선거법, 정치 내 자금법 등이 개정되고 국회 내 6.8 부정선거조사위원회법을 제정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신민당이 등원하자 공화당은 야당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국회를 운영하였습니다.1967.07.08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문화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임석진 등이 동백림을 거점으로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한 사건입니다. 사건 니다.
5.16 군사쿠데타와 제 3 공화국 선거연 표 1961.5.16. 5.16 군사 쿠데타 발발 , 군사혁명위원회 설치 1961.5.18. 장면 총리 하야 1961.5.20.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 1961.06.10 중앙정보부 설치 1961.08.12 국가재건최고회의 정권 민정이양계획 발표 1962.3.16 정치활동정화법공포 1962.12.27. 국민투표에 의해 대통령중심제로 헌법 개정 1963.02.26 민주공화당 창당 1963.10.15 제 5 대 대통령 선거 ( 박정희 당선 ) 1963.11 월 26 제 6 대 국회의원 총선거 1963.12 월 17 제 5 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 제 3 공화국 출범 )5·16 군사쿠데타 배경 정치 · 사회적 - 집권당 민주당은 신 · 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 /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 군 ( 軍 ) 내부 - 6 ·25 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 과정 박정희와 8 기생 주도세력은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 ,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 ,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 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 - 초기에 미 8 군사령관 C.B. 매그루더 ,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 장면 ( 張勉 ) 내각의 총사퇴 , 대통령 윤보선 ( 尹潽善 ) 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 내용 ‘특수범죄 ( 반혁명 , 반국가행위 ) 처벌법’ , ‘ 정치활동정화법 ’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 제거 ‘중앙정보부 ’ 설치 / ‘민주공화당 ’ 조직 /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정치활동정화법 제 2 공화국에서 일정한 정치적 지위에 있었던 정치인과 5·16 군사정변의 이른바 혁명과업수행을 방해했다고 인정되는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 시켰던 법률 ‘ 정치활동 정화’ 대상이 된 주요인사 4,000 여명이 정치 행위를 전혀 하지 못한 6 년 여 동안 공화당 은 각각 두 번의 안정적으로 대통령 ·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둬 통치체제를 확고히 다짐 . 기성 정치인은 정치활동정화법이라는 사슬로 발을 묶어두고 그들은 공화당이라는 새 정당을 사전 조직 ,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 선거라는 형식을 밟은 민간정부를 다시 손에 넣음 .1962.12.27. 국민투표 의원내각제 대통령 중심제 대통령 권한 = 국군통수권 , 조약체결 및 비준권 등 일반적인 권한 + 긴급명령권과 계엄선포권 대통령 중심제로 되돌아 간 이유 ? - 제 2 공화국의 순수 의원내각제가 비효율적인 파쟁을 유발해 정국의 불안과 사회질서의 문란을 야기했고 , 확고한 리더십 보장을 위해 대통령제가 우리나라 현실에 더 맞는다고 판단됨 . 한계점 - 다수가 자유롭게 참여했다고 보기 어려움 . 당시 군정의 비상조치법이 헌법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었고 , 정당과 국회가 해산되었으며 , 정치정화법에 의해 기존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고 있었음 .1963.10.15 제 5 대 대통령 선거 사상논쟁 - 윤보선 : 박정희가 여순반란사건의 관련되었음을 폭로 - 박정희 : 매카시즘적 공세라고 비판 선거결과 - 15 만여 표 차이로 박정희 당선 윤보선의 패배 원인 ➀ 야권 후보의 난립 ➁ 사상논쟁에서 윤보선의 발언이 부정적 영향 끼침 . 선거의 형태 - 여촌야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국민의 신임을 받아 재집권 성공 ( 박정희 ) 군정종식을 내건 구정치인이 집권해 진정한 의미의 민정이양 ( 윤보선 )1963.11 월 26 제 6 대 국회의원 총선거 선거결과 - 공화당의 압승 . 민정당 제 2 당 . 이유 ➀ 경제안정화 프로그램 박정희에게 불리한 소문을 잠재우고 여당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기여 ➁ 케네디 대통령 암살 - 안정 희구적 선택 유도 . ➂ 야당의 난립으로 야당 지지 성향의 표가 분산 ④ 제 1 당에 유리하도록 규정한 전국구 의석 배분 방식 ⑤ 금권 , 관권선거연표 1964.09 월 베트남 파병 시작 1964.06.03 일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6.3 사태 ) 1965.06.22 한일협정 정식 조인 1965.08.13 국회 , 야당 불참 속 한일협정 비준안과 전투사단인 맹호부대 파월안 통과 1967.02.07 신민당 정식 발족 ,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 , 당수에 유진오 선출 1967.05.03 제 6 대 대통령 선거 ( 박정희 당선 ) 1967.06.08 제 7 대 국회의원 선거 1967.06 월 총선거 부정 규탄시위 1967.07.08 동백림 간첩단 사건 발표 1967.11.29 신민당 의원들이 등원해 175 일만에 국회 정상화 1969.09.14 3 선 개헌안 통과 1969.10.17 국민투표 1970. 08.15 일 박정희 대통령 , 남북 통일에 관한 8.15 선언 발표 1971.04.27 제 7 대 대통령 선거 ( 박정희 당선 ) 1971.05.25 제 8 대 국회의원 선거1967 5.3 제 6 대 대통령 선거 야권 갈등 - 우여곡절 끝에 신민당 합당 - 후보 단일화 윤보선 . 박정희 vs 윤보선 양자 구도 - 박정희 직전에 비해 여유롭게 승리 116 만 표 차이 박정희 승리 이유 ➀경제적 성장 : 제 1 차 경제개발 5 개년 계획 (’62-’66) 의 성공으로 인해 도시지역의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 상승 . ➁ 대선 전 보여줬던 야당의 분열 ➂여전한 금권 , 관권 선거1967 6.8 제 7 대 국회의원 선거 박정희와 공화당의 목표 : 3 선 연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2/3 이상의 의석 (175 석 중 117 석 이상 ) 을 차지 . 이전 선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정과 불법이 횡행 .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행정부 장 , 차관 동행하여 공화당 선거 유세에 참여 . 선거결과 : 공화당 129 석 신민당 45 석 신민당 “ 6.8 부정선거는 선거의 형식만을 갖춘 선거 쿠데타로 규정 ” - 재선거 주장 , 국회등원 거부 , 단식 농성 / 언론의 비판 , 학생들의 전국적 데모 대통령의 수습 : 유감 표명 . 공화당 당선자 8 명 제명 . 부정선거 공무원 직위해제 . 선거부정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 여야 협상 : 선거관리 위원회법 , 국회의원선거법 , 정치 내 자금법 등 개정 . 국회 내 6.8 부정선거조사위원회법 제정하기로 합의 . - 신민당이 등원하자 공화당은 야당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국회 운영1967.07.08 동백림 간첩단 사건 중앙정보부가 “ 문화예술계의 윤이상 · 이응로 , 학계의 황성모 · 임석진 등이 동백림을 거점으로 194 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 ”고 발표한 사건 1967 년 12 월 3 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 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음 . 7 대 국회의원 선거 부정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가 이 사건을 부각시켜 부정선거에 대한 여론을 무마 하려는 시도로 추정 .1969 9.14 3 선 개헌 국회 통과 변칙적 - 제 3 별관 새벽 두시 , 대다수 야당 의원들에게 통고조차 하지 않고 공화 당 107 명 , 정우회 11 명 , 대중당 1 명 , 무소속 3 명 등 122 명이 참석하여 3 선 개헌 통과시킴 . 내용 - 대통령 연임 조항 삭제 후 3 번 연임 허용 , 대통령 탄핵 발의와 통과에 필요한 의원 수 30 인에서 50 으로 , 과반수에서 3 분의 2 로 늘림 , 국회의원이 장 , 차관 겸직할 수 있도록 함 , 국회의원의 최대정수 200 인에서 250 인으로 늘림 . 1969 10.17 국민투표로 승인1971.04.27 제 7 대 대통령 선거 배경 - 3 선개헌 이후 박정희의 장기집권 우려 여론 . 박정희 vs 김대중 : 박정희 승리 ➀박정희에 대한 대도시 지지율 하락 : 박정희의 장기집권 가능성에 대한 우려 ➁지역주의 투표 행태 : 영남 박정희 , 호남 김대중 이유 : 경제발전 불균형 전략으로 농촌 중심의 호남 지역은 경제발전 혜택으로부터 소외 됨 . 절차적 민주주의 후퇴 : 도시 지역에서의 심각한 지지 이반 , 농촌지역 산업화의 폐해에 따른 좌절감으로 인한 호남의 심각한 저항 .1971.05.25 제 8 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 분란에도 불구 야당의 선전 : 공화당 118 석 , 신민당 89 석 , 국민당 1 석 , 민중당 1 석 . 여야 간 의석의 차이 크지 않음 지역 대결 구도 뚜렷하지 않음 . 오히려 여촌야도 의 현상 : 3 선 개헌에 따른 민심 이반과 장기집권에 대한 우려가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뚜렷하게 나타남 . 결국 1972 10.17 유신체제 선포 : 더 이상 선거에 의존하지 않게 됨 .제 3 공화국의 특징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무력으로 몰아낸 군사정권 . 불공정하고 비민주적 인 절차 (3 선 개헌 )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공권력 개입 . 농촌 지역 유권자의 동원을 위한 금권 선거 횡행 . 상당한 정도의 역동성 ➀세 차례 대선 결과 상당히 경쟁적 : 5 대 15 만표 차 , 6 대 116 만표 차 , 7 대 94~5 만표 차 ➁ 여촌야도 현상 : 금권 선거와 준봉투표 ➂지역주의 : 영호남 간의 경제계발 혜택 차이Q A{nameOfApplication=Show}
-현대건설 인수과정--목 차 -Ⅰ. 연구목적Ⅱ. 기업소개- 현대건설-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그룹Ⅲ. M&A의 배경- 현대건설 부도 및 회생과정- 채권단의 구성- 현대자동차그룹의 상황- 현대그룹의 상황Ⅳ. M&A 진행과정Ⅴ.주가변동사항- 사건별 주가분석- 컨소시엄 내 주가그래프 비교Ⅵ. M&A 그 후-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그룹Ⅶ. 결 론- 공시는 시장에서 유효한가?- Good or Bad Signal 분석- M&A에 대한 시장의 Good Signal 평가 기준은?Ⅶ. 출 처Ⅰ. 연구목적- 현대家의 현대건설 M&A 사례 분석을 통해 M&A 과정에서 발표되는 공시가 주식시장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해 봄으로써 공시제도의 유용성을 검증해본다.- 현대자동차동차그룹과 현대그룹의 투자자가 현대건설 인수과정에 나타난 여러 상황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아보고, 그렇다면 어떠한 요인이 그 평가를 내리도록 작용했는지 요인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회계학특강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들이 어떤 상황에 적용되었는지 대입해보고 M&A가 완료된 이후의 현대자동차 그룹과 현대그룹의 변화에 대해서도 함께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Ⅱ. 기업소개? 현대건설 (피인수 기업)1947년 창업주 고(故) 정주영을 중심으로 한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가 병합하여 현대건설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60년대부터 태국, 월남, 미국 등을 시작으로 해외시장으로 진출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80년대에는 건물의 건설 뿐 아니라 화력·원자력 발전소건설에 뛰어들어 사업의 방향을 넓혔다. 국내에서는 경제발전을 이룩하던 70·80년대에 발전소나 다리 등을 건설하여 한국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家의 모태기업이라는 상징성을 가지는 기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이 발생하면서 유동성위기를 맞아 부실기업으로 전락하였으며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워크아웃체제에 돌입한다. 2006년에 매각이 추진되었지만 현대그룹이 매입을 희망하던 그 당시에는 부실 책임이 있는 현대가에 현대건설을를 중심으로 100조 7000억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2010년 6월말 기준으로 3사의 현금성 자산과 예금만 10조원을 웃돌았다. 단기 자금 조달원인 기업어음 발행잔액이 0일 만큼 재무안정성이 높았다. 현대자동차 그룹은 외부차입 없이 자신들만의 자금으로서 현대건설을 인수할 만한 충분한 자금력을 갖춘 상태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한다면 이미 현대자동차그룹이 가지고 있던 건설사인 현대엠코와의 시너지효과를 예상할 수 있었고, 현대건설이 목표로 했던 고속철도 및 철도차량 사업에 현대제철을 통해 안정적으로 자재를 조달함으로써 현대제철과의 시너지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현대건설이 가지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 또한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현대상선에 대한 경영권 행사를 할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현대가의 모태라는 상징성을 갖춘 현대건설을 인수함으로써 장자적통의 정통성 또한 확보할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 그룹 입장에서 외적으로는 그룹내 여러 분야의 기업들의 긍정적 시너지 효과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글로벌 그룹으로의 성장동력을 얻을 수 있고, 내적으로는 아버지가 일으킨 기업을 물려받는다는 상징적인 성격이기도 한 것이다.? 현대그룹의 상황2003년 고(故)정몽헌 회장의 죽음으로 그의 아내인 현정은이 현대그룹을 지휘하게 되었다.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증권, 현대로지엠, 현대상선 등의 주 계열사를 중심으로 한 현대그룹은 자산규모 12조 4000억으로 현대자동차그룹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초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현대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성 자산은 1조 1800억원 수준으로 이것은 현대건설 매각가격을 단순 지분가격(주가 7만3500원 기준)으로만 계산한 2조9000억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현대건설 단순 지분가격에 30~40%가량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더하면 현대건설 인수가격이 4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시장에서는 현대그룹이 외부 자금조달을 통해서 자금을 마련해 현대건설을 인수한다고 해도 과도한 인수자금 지출로 인한시스은행 예치금 1조2000억원에 대해 "현대상선 프랑스 현지법인이 해당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것"이라며 "현대건설 주식 또는 현대그룹 계열사 자산 등을 담보로 제공한 사실이 없다"고 밝힘- 2010.11.24정책금융공사, 자금 조달에 의문 제기- 2010.11.25현대그룹, 현대자동차그룹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 2010.11.29현대그룹, 현대자동차그룹에 500억 손해배상 청구 소송- 2010.11.29현대자동차, "현대그룹 자격 박탈하라"라고 반격현대건설 채권단 현대그룹과 MOU 체결. 그러나 현대그룹이 5영업일(다음 달 6일) 이내에 대출계약서 등을 통해 자금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하기로 결정- 2010.11.30현대자동차그룹, 현대상선 현대증권 등 현대그룹 주요 계열사를 대상으로 무고 및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장을 제출- 2010.12.03현대그룹,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의 공증을 받아 예치금 1조2000억원이 무담보 · 무보증 대출이라는 내용의 확인서 제출- 2010.12.03현대자동차그룹,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만 담은 확인서일 뿐이어서 효력이 없다"고 즉각 반박- 2010.12.06현대건설 채권단, 현대그룹이 제출한 대출확인서가 현대건설 인수 자금 출처 증빙을 위한 충분한 자료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출계약서 제출을 재차 요구하기로 결정. “7일 오전까지 만족할 만한 추가 소명자료가 제출되지 않을 경우 최종적으로 주주협의회의 의견을 수렴해 양해각서(MOU)에 따라 5영업일간의 추가 소명 요청을 할 예정”이라고 설명- 2010.12.10현대자동차, 입찰 방해로 외환銀에 대해 500억 손해배상 소송. "현대건설 매각 절차를 투명하게 진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피고발인 3명이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양해각서(MOU) 체결,대출금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 과정 등에서 본연의 임무를 위배했다"며 "특히 프랑스 나티시스은행 예치금 1조2000억원의 무담보 · 무보증 대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대그룹 측에 요구한 대출 관련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다. 한 채권단 관계자는 "2차 대출확인서를 통해서도 구체적인 계약조건이 담긴 내용을 알 수 없고, 실제 인출할 수 있는 돈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어 효력이 없다고 잠정결론을 내렸다"고 언급했다. 더욱이 현대건설 입찰 안내문에는 무리한 차입으로 인수자와 매물(현대건설)이 동반부실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인수자측이 현대건설 주식이나 자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차입인수(LBO)방식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었다.만약 차입을 하더라도 자기 자금인 보유현금을 통한 조달과 타인자금인 차입을 통한 조달인 경우는 엄격히 분리해 평가를 하고 있다. 보유현금은 잔고증명만 내면 되지만, 차입은 대출확약서 등 차입관련 증빙 일체를 내야 한다. 또 차입을 하려면 내부 결의를 했다는 증빙이 있어야 하며, 금리, 보증 제공 유무, 상환조건에 대한 증빙을 전부 제출해야 한다. 차입이라면 이런 것들을 처음부터 제출해서 차입이라고 해야 하는데, 현대그룹이 통상적인 현금인 것처럼 잔고증명을 내 허위자료를 제출했다는 것은 명백한 자격 박탈사유라고 현대자동차그룹은 주장했다.결국 채권단은 현대그룹이 추가로 제출한 자료를 법률적 구속력이 없는 문서로 판단, 현대그룹과의 양해각서(MOU)를 파기하는 안건을 냈다. 현대건설은 이에 반발하여 법원에 ‘양해각서 해지금지 등 가처분신청’을 제출했다. 현대그룹의 전략기획본부 하종선 사장은 “채권단이 지속적으로 대출계약서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지난 11월29일 MOU체결 이전에 외환은행 측과 만난 자리에서 대출계약서는 나티시스은행과의 비밀유지 협약으로 인해 제출할 수 없기 때문에 대출확인서로 제출하겠다고 명백히 이야기한 바 있다”라며 가능한 모든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결국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는 결렬되었고, 현대건설은 2011년 1월 7일 인수합병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현대자동차그룹에 의하여 오랜 인수과정을 거친 끝에 4월 1일 최종 잔금 4조4,641억원에 인수되었다.→ 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전 공식참여를 선언한 후 현대상선의 주가가 급등했다. 시장에서는 자금력면에서 유리한 현대자동차그룹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승리할 경우 현대상선 경영권분쟁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현대상선의 주가가 상한선인 14.95%로 급등하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오늘 최종으로 인수참여를 확실시함으로써 현대상선에 대한 경영권분쟁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자동차 주가는 3.86% 상승하였으나 M&A보다는 최근 해외시장 개척과 신용등급 상향조정에 따른 영향이 크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현대건설은 매각 발표 이후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와 이날도 3.19% 상승했다.④ 2010.09.24 ~ 2010.11.02 현대상선, 현대건설 인수자금 조달 중 변동사항9월 현대자동차의 현대건설 인수전참여가 확실시 되면서 현대상선의 주가는 계속 상승해 왔다. 현대상선의 9월 주가상승률은 62.7%에 달했다. 본격적인 현대건설 매각 작업 돌입과 함께 현대건설 매각 이후 현대그룹 지분구조의 핵심인 현대상선을 두고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그룹간 지분 경쟁이 빚어지면서 주가가 크게 뛸 것이라는 기대감이 매수세로 이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10월 중순부터는 약세로 돌아서는데 이는 현대그룹이 회사채 발행, 자사주 매각, 유상증자 등 현대건설을 인수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돌입함에 따라 현대그룹의 자금 조달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상선의 재무적 부담이 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혹여나 현대그룹이 승리하게 되면 현대건설 인수에 들어간 과도한 인수금액 때문에 현대상선마저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예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매각 발표가 난 이후로 주가 재평가 영향으로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현대건설 이슈에는 크게 변동을 보이지는 않고 코스피의 상승세와 더불어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⑤ 2010.11.16 현대건설 채권단, 현대그룹을 M&A 우선협상자로 지정(현대상선 -14.95% / 현대건다.
현대건설 인수전목 차 연구 목적 기업 소개 M A 배경 M A 진행 과정 주가변동 분석 M A 그 후 결론 느낀점 출처연구 목적 사례를 통한 공시의 유용성 검증 M A 에 대한 시장의 반응 분석 시장의 Good or Bad Signal 평가요소 분석기업 소개 1. 현대건설 현대가의 모태기업 ( 상징성 ) 한국 경제 성장기에 큰 역할 2000 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 발생 유동성위기 , 부도위기 부실기업 전락 공적자금 투입 , 워크아웃 2006, 2010 년 매각 추진기업 소개기업 소개 2.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 정몽구 재계 2 위 (42 개 계열사 ) 자산규모 100 조 7 천억 주력기업 - 현대자동차 , 기아자동차 , 현대 모비스 , - 현대 제철 , 현대엠코 , 현대로템 , 현대카드 등기업 소개 3. 현대그룹 회장 : 현정은 재계 21 위 (12 개 계열사 ) 자산규모 12 조 4 천억 주력기업 - 현대상선 , 현대 엘리베이터 , 현대증권 , 현대 로지엠 , 현대아산 등M A 배경M A 배경 순환출자구조란? - 그룹 내의 여러 산하 기업이 순차적으로 다른 기업에 출자하는 구조 - A 기업이 B 기업과 C 기업의 지배권을 가짐 - 장부상 자본금을 늘리기 위해 사용 - 장부상 자본금과 실제 자본금이 큰 차이 - 연결된 어느 한 기업이 무너지면 다른 기업들까지 자본 구조가 부실해진다.M A 배경 현대그룹 VS 범현대일가 - 현대상선의 지분율 : 현대그룹 39.77 % 범현대가 32.29%M A 배경 만약 현대건설이 현대자동차에 인수합병 된다면? - 현대상선의 지분율 : 현대그룹 39.77 % 현대자동차 4 0.59% - 현대상선의 지배권이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생김M A 과정과 주가변동 2010.06.29 현대건설 매각 작업 재개 - 채권단 지분 34.91% 공개경쟁입찰 방식으로 매각 결정 2010.08.12 - 현대상선 “ 인수전 참여 이사회 결의 ” 2010.09.24 현대자동차그룹 , 인수전 참여 공식선언 ( 자금 + 경영능력 ) - 5 월부터 내부 TFT 존재 ( 김 장 , 골드만삭스 , PwC 삼일회계법인 ) - 사업다각화 목적① ② ③ ㅇ ① ② ③ ① ② ③2010.09.29 - 현대상선 지분경쟁 본격화 ( 우호세력에 자사주 일부매각 )-457 만주 中 90 만주 현회장의 현대그룹 측 지분율 0.6% 상승 - 넥스젠캐피탈 , 자사주 매입 후 4.34% 로 지분율 증가 -Why? 12 월 상환우선주 1000 만주 소각시 , 현대그룹 지분율 : 40.8% 39.77% 로 하락 예상 나머지 자사주 367 만주 (2.56%) 도 모두 매각 예정 현대그룹의 현대상선 지분율 합 = 42.33% 현대자동차그룹 = 32.29% M A 과정과 주가 변동M A 과정과 주가 변동 2010.10.22 현대상선 4,500 억 회사채 발행 2010.10.28 현대 그룹 계열사인 현대부산신항만 지분 매각 - 2000 억 조달 현대상선 유상증자 발표 4000 억 조달예정 2010.11.02 현대상선 5000 억 규모 기업어음 발행① ② ③ ④ ① ② ③ ④2010.11.15 현대건설 인수 본 입찰 마감 2010.11.16 현대그룹 5 조 5 천억 vs 현대자동차그룹 5 조 1 천억 현대그룹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2010.11.19 채권단 , 인수자금 재검토 결정 현대자동차 , 해외 외부조달자금 1 조 2 천억에 대한 재검토 요구 현대그룹 , M A 무산가능성 M A 과정과 주가 변동M A 과정과 주가 변동 2010.11.29 현대자동차 , 현대그룹 자격 박탈 요구 현대건설채권단 - 현대그룹 , 조건부 MOU 체결 2010.11.30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 현대상선에 대해 현대건설 인수자금 조달관련 프랑스 현지법인에 담보 , 채무보증 등 제공여부 보도에 대한 조회공시를 요구 2011.12.06 채권단 , 대출확인서만으로는 불충분 . 대출계약서의 제출 요구 현대건설 및 계열사 자산 담보로 활용했는지의 여부 논란 자금출처의 불투명성M A 과정과 주가 변동 2010.12.14 동양종금 , 8000 억 풋백옵션 소명자료 제출 2010.12.20 현대그룹 , MOU 해지 , M A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박탈 2010.12.21 현대자동차그룹 , M A 우선협상대상추진 2011.01.04 법원 , 현대상선의 MOU 해지금지 가처분신청 기각 (MOU 해지 재확인 )M A 과정과 주가 변동 2011.01.07 현대자동차그룹 , M A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2011.01.14 채권단 - 현대자동차그룹 MOU 체결 2011.02.24 현대자동차그룹 , 4 조 9601 억원에 현대건설 인수M A 과정과 주가 변동 2011.03.15 현대건설 지분 34.91% 매입 2011.04.01 현대건설 , 현대차그룹의 일원으로 새 출발 . 현대건설 인수전 종료① ② ③ ④ ⑤ ⑥ ⑦M A 과정과 주가 변동 현대상선 현대건설 인수 - Bad - 주가하락 현대자동차그룹에 의한 현대건설 인수 - Good - 주가상승 현대건설 현대그룹이 인수 - Bad - 주가하락 현대자동차그룹에 의한 인수 - Good - 주가상승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인수 초기 - Bad - 주가하락 후기 - Good - 주가상승현대그룹 현대건설 인수에는 실패했지만 ,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 M A, 그 후M A, 그 후 지주회사 : 한 기업이 지배회사 ( 모회사 ) 가 되어 외부기업이나 산하에 있는 자회사의 주식을 전부 또는 지배가능한도 ( 보통 50% 초과 ) 까지 매수하여 그 자회사를 지배하는 회사M A, 그 후 지주회사의 장점 분사화를 통해 쉽게 분리매각 유연한 사업의 진입 및 퇴출 지주회사와 자회사 간의 전략적 의사결정 가능 유사한 업종의 자회사의 경우 , 통합적 관리 가능 단순투명한 소유지배구조 지주회사의 단점 소액자본으로 다수기업의 지배가 가능해 , 경제력집중수단으로 악용될 우려M A, 그 후M A, 그 후 현대그룹의 수직계열구조 불안한 현대상선 경영권강화방안으로 고심한 결과물 현정은회장을 중심으로 지배구조 안정화하는 목적 순환출자구조에서는 현대건설이 M A 되는 경우 그룹 전체 경영권이 흔들렸지만 수직구조에서는 현대상선과 자회사 만으로 위험의 축소가 가능M A, 그 후 현대자동차그룹 시너지효과 기대되지만 장기적 통합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자동차그룹 M A, 그 후결 론 공시는 시장에서 유용한가 ? - 유용하다 . 그러나 그 유용성은 공시의 내용 , 기업의 규모 , 사전유출 여부 , 공시내용이 기업에 미칠 수 있는 리스크의 크기 에 따라서 달라진다 . Good or Bad signal? -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 bad signal -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 bad or good signal - 현대상선의 경영권 분쟁 good signal 시장의 Good or Bad Signal 평가 기준 ? 인수기업의 자금력 , 재무건전성 , 경영능력 , 신뢰성 , 피인수기업의 가격 , 인수 후 시너지 효과 , 인수 후 통합가능성출 처 매일경제 (http://www.mk.co.kr/) 한국경제 ( http://www.hankyung.com/ ) 이데일리 ( http://www.edaily.co.kr/ ) 머니투데이 ( http://www.mt.co.kr/ ) 아시아경제 ( http://www.asiae.co.kr/ ) 파이낸셜뉴스 ( http://www.fnnews.com/ ) 전자공시시스템 (http://dart.fss.or.kr/)끝 감사합니다 .{nameOfApplication=Show}
목차금융권 노동시장분석 금융권 직무분석 국민은행 기업분석 국민은행 채용프로세스분석 입사전략금융권 노동시장분석1.종사자수 - 164,958 명 / 23,749,708 명 2.평균임금 - 평균 389.2 만원 3.평균근속년수 - 10.2 년 4.성비 - 남:74.4%, 녀:25.6% 5.평균학력 및 학력분포 6.평균연령 및 연령분포-자료:노동청(www.molab.go.kr/)금융권 직무분석금융사무원 필요역량 고객상대업무 대인관계능력 현금출납업무 수리능력,정확성,성실성 금전관련서류업무 신뢰감,정직함,책임감 관련학과 상업계 고등학교, 전문대학 및 대학교의 경영학과, 회계학과, 경제학과, 금융보험학과, 법학과 등. 관련 자격 및 면허 금융 및 보험 관련 분야의 관계기관에서 실시하는 자격증금융권 직무분석입직 및 진출분야 은행, 종합 금융사, 증권사, 보험사, 우체국 등 승진 및 경력개발 공채: 사원 → 계장 → 대리 → 과장 → 부장 → 지점장 과거 : 순환보직 / 최근 : 전문가양성 직업전망 미국 발 금융위기로 금융시장 위축 → 부실자산 정리본격화 → 인건비 감축노력 → 인터넷의 발달 → 향후 5년간 현 상태 유지 또는 감소 → 글로벌화 → 외국어, 전문성 필요경영비전, 핵심가치국민은행 기업분석국민은행 채용프로세스분석채용프로세스 지원자격 학력, 연령 및 전공 제한 없음 TOEIC 700점 ,TOEFL CBT 217점 ,iBT 82점 , TEPS 577점 이상자 국가공무원법 제33조(결격사유)에 해당되지 아니하는 자 남자 지원자의 경우 병역필 또는 면제자 우대사항 금융관련자격증 어학능력 우수자 KB국민은행 주최 공모전 수상자 및 대학생 홍보대사 우수 활동자 KB인턴십(장기) 수료자국민은행 채용프로세스분석논술유형(=필기 유형) 일반 논술 및 기획안 논술 2가지 주제를 90분 동안 작성 1차 면접유형 PT면접: 개인별 발표/ 면접관 3명 / 발표 5~7분 질의응답 5분/ 준비 30분 / 시사주제(지정) 역량면접: 4인1조/ 면접관 2명(실무진) / 40분소요 /인성면접 – 자기소개서 질문, 상황질문, 시사질문 등 토론면접: 10인 1조/ 면접관 2명(실무진)/토론60분/토론전 사회자 선출/ 시사주제관련 2차 면접유형 임원면접 : 4인1조/ 면접관 3명(임원진)/ 40분소요{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