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08학번 중국어 중국학과 전공 김희현입니다.전 성격이 밝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편입니다. 친구들의 고민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항상 예의를 중요시하는 부모님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사회적인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원래 성격이 매우 내성적이었고 할 필요 없는 걱정도 많이 하고 겁이 나서 타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잘 걸지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중학교까지 이런 제 성격 때문에 고생도 많았고 놓치는 것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올라가고 처음 사귄 친구가 제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친구는 크게 눈에 띄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하고 스스럼없이 처음 보는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제가 다른 친구들을 만들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며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저를 불러놓곤 했습니다. 어떻게 차츰차츰 변해갔는지 자세한 정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친구 덕분에 전 크게 달라졌습니다. 웃는 것을 습관으로 하고 다정하게 말할 줄 알게 되면서 사람을 사귀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만났던 많은 외국인 친구들에게 ‘인상이 참 좋다, 언제나 밝아서 보는 사람까지 기분을 좋게 만든다.’ 같은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가정적으로는 엄하신 아버지와 너그러우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더 많이 발전하도록 채찍질 해주시고 어머니는 언제나 옆에서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시며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하십니다. 막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받아서 자랑스럽게 부모님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성적표를 보시고 아버지는 ‘1등이 아닌데 만족할 수가 있느냐?’라는 말로 제 안일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고 어머니는 ‘정말 잘했다. 역시 우리 딸이 제일 자랑스럽다.’라는 말로 현재보다 더 잘하고 싶도록, 더 칭찬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고 어디를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고등학교 때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공부’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며 다방면에서 출중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가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나의 강점을 만들자고 다짐했었습니다. 제가 정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에 도전해 보기도 했습니다. 글을 멋지고 아름답게 쓸 줄 알도록 연습해서 소설이나 수필을 학교 교지에 싣기도 하고 공모전에 내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자와 외국어에 관심을 두고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자격증도 취득하고 해외에서 통역사를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회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빵을 굽기도 하고 사진기에 관심을 두고 사진작가가 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온종일 인터넷만 뒤적인 시간도 있었습니다. 손재주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 무엇보다 제가 언어에 관심이 많고 외국인 친구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 대단히 큰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중문과 교환학생 과정을 통해서 중국에 갔을 때 낯선 땅을 밟는다는 기분과 한국에서 겪기 힘든 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 덕분에 전 아주 들떠있었습니다. 길에서 외국인들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고 타국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중국어로 수업을 듣고 중국인 친구들을 사귀어 직접 중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전 외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을 선호하기 때문에 타국을 갈 때면 최대한 한국인이 적은 작은 도시를 찾아가는 편입니다. 중국에서도 한국인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소도시에 머물고 있어서 언어도 생각보다 금방 늘었고 외국인 친구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국 교환학생 기간이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머물렀던 첫 번째 기회였습니다. 흑인, 백인, 동양인 학우들이 같은 기숙사에 머물며 이야기도 나누고 각자 나라의 음식을 서로에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같이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서로의 문화를 공유한다는 것이 유학생에게 얼마나 큰 추억이 되는지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공부에서도 지지말자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방면에서 즐기고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학업에서 절대 손을 떼서는 안 된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수업시간에는 교수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친구들끼리 쪽지 시험을 치며 서로를 평가해 주기도 했습니다. 중국에 있는 동안 낮지 않은 자격증도 취득했고 학점도 4.5점으로, 추억과 학업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었습니다.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고 혼자 한 달간 중국에서 배낭여행도 했습니다. 여자 혼자 다니기에 위험한 나라라는 것은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만 평생 이런 경험을 하기엔 쉽지 않을 것 같아 힘들지만 억지로 도전했습니다. 대륙이 워낙 커서 도시 간 이동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지만 저는 그 시간조차 즐거웠습니다. 중국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유명한 도시들을 골라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도시마다 색다른 정취를 마음껏 구경했습니다. 27시간 정도 달리는 기차를 탄 적도 있었는데 무척 지겨울 줄 알았지만 기차 속에서 중국인들과 친해지고 같이 음식을 나눠먹으며 이야기를 하니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습니다. 도시마다 풍경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고 먹거리도 달랐습니다. 중국만큼 한 국가 내에서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하고 생각됩니다. 여행을 끝냈을 때는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에 기분이 황홀할 정도였습니다.중국을 다녀온 뒤에 전 해외에 나가는 것이 너무 좋아졌습니다. 한국에서 항상 같은 것만 보고 같은 것만 배우며 공부와 학벌을 중시하는 풍조가 저를 지치게 만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타국의 문화는 어떤가 체험을 해보고 싶었고 죽기 전까지 50개국을 돌아보겠다는 목표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취미처럼 해외를 드나드는 것은 부모님께 너무 큰 부담을 지어드리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봐온 것이 많아서 우리 가정의 형편이 어떠한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항상 느끼고 부모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시기, 수시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주말, 공휴일 마다 틈틈이 돈을 벌어 생활비로 썼었습니다. 중국을 갔다 와서 해외에 가고 싶다는 욕구가 절정에 이르게 되어 전 휴학을 했고 4달 동안 수면부족으로 쓰러질 때까지 돈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유학자금을 모아 마침내 필리핀을 거쳐 호주로 유학 경로를 정하고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영어에 취약한 점을 감안해 필리핀을 거쳐 영어의 기본을 다졌습니다. 회화를 훌륭하게 구사한다기보다 어법을 알고 작문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의 클라이맥스였던 호주에 닿았습니다. 처음에는 호주에서 4달 정도만 영어회화를 공부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돈이 떨어져 비행기티켓도 구하지 못하고 당장의 생활비, 방값도 없어 정말 지옥에 떨어져 불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물가가 너무나도 비싼 호주에서 매달 부모님께 돈을 받아쓰는 것도 죄송해 밥을 굶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쪼그려 잠을 잔적도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어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매번 악덕 사장을 만나 여유자금을 남기기는커녕 생활비가 적자만 나지 않아도 다행이었습니다. 안 좋은 일이 겹치고 겹쳐 너무 힘이 들 땐 하루하루 눈물 없이 보내기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다수 했었습니다. 그렇게 큰 도시에서 한국인들에게 치이고 설상가상 영어는 점점 더 잊어버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한국인이 없는 소도시로 내려와 호주인 밑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돈을 벌고 차츰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초반에 너무 고생한 4달을 보상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즐겁게 일을 하면서 돈이 모이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만난 두 오빠 덕분에 드디어 호주에서 ‘살만하다’라는 느낌과 ‘이렇게 떠나기가 너무 아쉽다’라는 생각이 교차되었습니다. 전 1년 더 휴학을 연장했고 그동안 못했던 호주 여행과 외국인과의 생활, 영어회화 그리고 충분한 돈까지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호주에서의 경험은 저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위로해 줄줄 아는 마음가짐을 배웠으며 어떠한 것도 다 해낼 수 있다는 굳건한 의지를 주었습니다.저에게 있어서 해외생활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큰 부분입니다. 정말 저를 성장시키고 중요한 무언가를 알게 하는 시간은 대부분 집과 멀어져 있을 때였습니다.저는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남긴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라는 명언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선택하는 모든 것들이 저를 성숙하게 만들고 제 인생을 보다 값지게 만들어 줍니다. 제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반드시 해야 하며 제가 선택한 일들에 대한 후회를 입 밖에 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가 떨어지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제 이념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항상 스스로 옳다는 판단 하에 행동으로 옮기며 실수나 그릇된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돌아보고 피드백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봤을 때도 김희현은 충분히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보이지 않게 부단히 노력하곤 합니다.
대한민국의 외국어 교육에 관한 연구 논문들은 주로 19세기 이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1880년대 이후 조선의 개방정책으로 인해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고 이 학교에서 영어를 비롯한 서구언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대에 이미 삼국이 중국과 정치, 문화 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또 왕래가 빈번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삼국시대부터 중국과 언어적 교류도 있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국어 교육의 흔적을 찾아서 어떻게 시작되고 정착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 고려시대까지는 한글로 기록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보아서는 우리말이 구어로만 존재하고 문어 형태로는 없었던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철기문화와 함께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한자를 우리말로 표기하여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두라는 훈독訓讀방법, 향찰鄕札이라는 훈독과 음독을 겸한 방법, 또 중국의 경서經書를 우리말로 읽는 구결口訣법이 이 시대에 창안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삼국시대의 지식층은 한자 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고 또한 문장이나 글을 작성하는 데에도 중국인 못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중 략>≪일본서기≫ 중“…..아직기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우지노와키이라츠코[兎道稚郎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에 천황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하고 물으니, 아직기가 '왕인이라는 사람이 뛰어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불렀으며.…." <삼국시대> 외국어 교육의 흔적 신라의 최치원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 비언어적 의사소통이란?언어 이외에 상대방과의 거리, 몸짓, 시선의 마주침, 얼굴표정 등을 매개로 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 행복한 표정으로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안녕하세요라는 언어대신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 모두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해당된다.◎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종류1. 거리(근접정도) : 친밀도에 따라서 신체간의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2. 행동(바디랭귀지) : 상대방의 몸짓이나 자세를 통해 생각하고 있는 것 또는 하고자 하는 말을 파악할 수 있다.3. 시선 : 눈동자의 움직임 또는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고 있는지 피하고 있는지에 따라 정서를 파악할 수 있다. 4. 표정 : 얼굴 표정을 통해 타인의 정서에 대한 공감력이 증가하고, 감정이입이 더 잘 일어난다.<중 략>1.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존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에 설사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기분이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지만 그의 표정이나 몸짓을 통해 그는 자신의 감정이나 내적 경험을 표현하기 때문에 짐작할 수 있다. 엄마는 아이의 얼굴표정만 보아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듯이 비록 말이 없는 상황이라도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항상 존재한다.2.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지 않을 수 없다.언어의 사용여부와 관계없이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항상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언제든지 의사소통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내가 비언어적 메시지를 보내고자하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나의 사소한 행동이나 얼굴표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은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읽는다.
동아시아 국제체제< 목 차 >1. 동아시아 국제체계를 둘러싼 문제들2. 화이질서3. 동아시아 국제체제의 내포와 외연4. 동아시아 조공시스템에 따른 결론5. 현재의 동아시아 - 중국, 아세안, 일본6. 결론 및 맺음동아시아 국제체계를 둘러싼 문제들1) 조공체제동아시아의 국제체계를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포섭적인 역사적 시스템으로 구상하고자 할 때, 지금까지 이루어진 많은 논의의 특징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우선 제기된다. 동아시아 국가들(중국 및 조선, 일본, 베트남 등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국가들) 사이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이념을 바탕으로 조공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는 점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조공체제이다.”라고 할 만큼 동아시아에서 조공체제는 민감한 부분이라고 꼽을 수 있다.- 조공체제=일원적 국제질서에 대한 재검토조공이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헌상하던 행위를 말한다.조공관계는 이념적으로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국제질서라고 규정짓는 접근방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공관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중국과 그 상대국과의 관계는 상호의존관계였다고 파악하는 방법이 있다. 또한 양자간에 몇 가지의 중간적 관계도 지적되고 있다.여기에서 조공관계를 이념적으로 어느 정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원리로 파악할 수 있는가, 중국에서 본 조공관계가 종속관계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국가 간 관계’로서의 국제관계가 동아시아에서 과연 기능하고 있었던가라는 문제가 도출된다.- 중국의 안과 밖조공관계의 검토는 한편으로는 중국사의 측면에서 그 이념, 제도, 운용의 완결성이나 계통성 등, 대략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상당히 엄밀한 체계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이에 대해 중국의 바깥쪽에서 또는 중국의 주변지역에서의 검토도 진행되어왔다.조공체제는 조선, 일본, 베트남 등 중국의 주요 관계국에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일원적인경고하고 나섰다. 하지만 세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것이다.북한은 최근 소련의 경제사정이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게 경쟁의식을 표출하기 위하여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여겨진다. 전쟁 억지 전략 (자국의 힘의 우월성을 과시하여 타국이 애초에 도전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미국은 전쟁 억지가 불가능한 ‘테러’단체에 대해 선제공격이론을 적용하고 있다. 테러의 가능성이 있는 집단 또는 개인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전쟁발발의 씨앗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 선제공격을 북한에게 사용할 의사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 군사동맹인 남한을 인질로 잡고 있으며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로 남한, 미국 그리고 그 외 다수의 국가들을 언제든지 섬멸할 수 있다는 것을 표면화하려는 듯이 보인다.북한의 독단적인 핵무기 개발은 세계에 위협을 주고 있으며 그 문제는 북한 및 동아시아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38140국제정치이론, 도변소부 외 엮음, 권호연 옮김, 한울아카데미, 1992.현대국제정치학, 하영선 이상우 공저, 나남, 1997.현실주의 국제정치학, 이춘근, 나남, 2007.화이질서(1) 화이질서중국의 입장에서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 관계를 가리킨다.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전통적인 우월의식, 곧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났다.중국은 고대로부터 자국을 문명이 발달한 세계의 중심, 곧 중화(中華)라고 자부하였다. 반면에 주변 국가들에 대하여는 문명이 미개한 야만인이라는 뜻으로 '이(夷)'라 칭하며 낮추어 보았다. 자신들 이외의 타자들을 남만(南蠻)·북적(北狄)·동이(東夷)·서융(西戎)으로 구분하여, 중국의 천자(天子)가 모든 이민족을 교화(敎化)하여 세상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천하국가관’을 낳았다.화이질서란 이처럼 중국이 자국의 문화와 문명 그리고 민족(한족)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는 중책과 통치조직청나라때의 중국은 이질적인 민족이나 집단을 다수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들에 있어서는 일원적안 화이질서를 배치하려함과 동시에, 실제 정책에서는 각기 다른 통치조직에 의해 통할하려 하였다. 주변국과의 관계로부터는 끊임없이 침입의 압력을 받아 다양한 견제와 균형의 관계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다음으로 중국사를 통해서 권력관계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첫 번째로 이호예병형공의 6부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조직과 총독이나 순무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조직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중화하에서의 화이질서는 현실적 운영에서는 중앙의 이부가 장악하고 있었던 관료의 임면권에 의해 관료기구의 전체가 유지되기는 하였지만, 구체적인 역할에서는 중앙과 지방이 병행하였고, 지방기는 중에 문관과 함께 무관이 배치되어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특징적이다. 두 번째로 중국역사에서 통치정책 및 이의 배경이 된 역사적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실로서 중원(한민족의 농업·수공업 생산지대)과 주변(변경 또는 이민족지역 등 화이질서의 바깥둘레 부분) 사이에서, 양자의 비중이 상호교체 해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중원과 주변은 서로 정치·경제·군사적 연관성을 긴밀하게 함으로써 중화질서의 관계 전체를 형성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세 번째 새방과 해방사이에서 중원을 유지하고 주변으로부터 침입을 방지함과 동시에 새로운 확대를 추구하는 정책을 변방책이라 일컬어졌다. 이는 중화질서의 유지에 군사·방위문제도 도입되어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장군·도통 등을 중심으로 한 군사계통은 병부·형부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행정관으로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배속된 지역은 ? 북변·서북변 ? 북경북방 ? 황하·양자강유역 ? 동·동남연해의 네 지역이다. 이 지역분포에서 대외적 관계로서 중시되고 있는 지역은 북변의 방위와 동남변의 해방이었다. 북변은 북방유목민·러시아·이슬람계 민족들의 침입에 대한 방위선이며, 동남연해는 명말청초에는 왜구나 명의 유신의 공격에 대비했던 방위선이었으나, 그 후 해외이민의 장악, 어왔던 회사(回賜)라는 청나라측으로부터의 하사품에 대해, 각각의 조공국측에서 볼 때 화이질서를 유지하고 기능시키기 위해 중국측이 지불하는 일종의 코스트였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조공관계를 기본으로 한 통치관계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는데, 지역적으로는 역내의 교역, 정보, 이민, 금은의 이동 등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흡수하고 배출하는 중심으로서 중국이 기능을 발휘하고, 주변 국가들과 화이관을 공유해가면서 조공-책봉관계의 실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2) 국제질서를 둘러싼 아시아모델과 유럽모델일정한 역사적 조건하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지역의 국제관계도 대단히 유사한 구성을 나타내왔다.즉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중심지역은 자기 자신이 창출?축적하는 것 이외에도 주변지역이나 타 지역과 교류하여 적극적으로 이들 지역의 축적을 흡수함으로써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해왔다.아시아에서 중심-주변관계를 형성했던 내용이 조공체제이고, 이중에는 대등한 조약관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이해를 바탕으로, 거꾸로 유럽에서의 국제관계 원리를 보면 어떠한 특징이 떠오를 것인가?중국이 조약관계와 역사적으로 무관계였던 것은 아니며, 17세기에 이미 러시아와 사이에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고, 상호통상을 규정하고 있다. 또 일본이나 서양도 호시국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공원리와는 다른 호시원리의 범주가 그 속에 포함 되어 있다.서양에서 발생했던 이른바 대등관계=조약외교의 이념은 동아시아에서 보여졌던 것과 같은 중심-주변관계와는 무관했던 것인가.유럽에서 중세 비잔틴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심-주변관계에서 알프스 이북의 서유럽은 그 주변에 위치하고, 그 주변지역 상호의 관계로서 중심을 연결한 대등외교=교섭관계가 생겼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중심적 기능을 했던 중국은 거대한 농업생산을 기초로 한 유통-교역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나, 유럽의 중심에서의 경제구조는 지중해 교역권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교역의 중심이 이동했을 때 비스스로 작은 중화, 곧 소중화(小中華)라고 여기며 문화의 우수성을 자부하기도 하였다.과거 화이질서의 국제관계는 구체적으로는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났다. 주변 국가들은 중국 황제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중국 황제는 직접 통치하지는 않으면서도 일종의 종주국 형태로서 해당 국가를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이러한 조공-책봉의 관계는 청나라가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몰락하면서 종식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는 다시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 질서를 재편하여 국익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며,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여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고자 하는 이른바 동북공정도 새로운 화이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된다.중화사상 [中華思想 ]중국에서 나타난 자문화 중심주의적 사상으로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중화사상은 중국에서 나타난 자문화 중심주의적 사상으로서, 중화(中華) 이외에는 이적(夷狄)이라 하여 천시하고 배척하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중(中)은 ‘중앙’이라는 뜻이며, 화(華)는 ‘문화’라는 뜻으로, 중화(中華)는 자신들이 온 천하의 중심이면서 가장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선민(選民) 의식을 나타낸다. 그리고 자신들 이외의 타자들을 남만(南蠻)·북적(北狄)·동이(東夷)·서융(西戎)으로 구분하여, 중국의 천자(天子)가 모든 이민족을 교화(敎化)하여 세상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천하국가관’을 낳았다.‘중화사상’은 통일적인 민족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유가(儒家) 사상이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자리를 잡은 한(漢) 시대에 이르러 체계화하였다. 왕자(王者)의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유가(儒家)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이론에서는 왕자(王者)가 살고 있는 중국의 땅은 물론, 그 변경이나 새외(塞外)의 지역도 ‘왕화(王化)’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왕화’의 영향은 멀어질수록 희미해지지만, 중화의 문화가 미치지 않는 .
북한 정치체제의 특성과 대남정책그리고 통일과제- 목차 -1. 북한 정치체제의 특성(1) 사회주의 정치체제(2) 수령 절대주의 신정 세습체제(3) 군국주의적 병영체제2. 북한의 대남 정책(1) 북한의 대남인식과 통일관(2) 대남정책의 목표와 통일방도(3) 북한의 통일정책변모3. 결론(1) 북한의 최근현실과 핵문제(2) 통일방안 및 소견< 주제 >북한 정치체제의 특성과 대남정책, 그리고 통일과제1. 북한 정치체제의 특성북한정치체제가 내세우는 지배이념은 ‘김일성 주체사상’이라고 부르는 정교하게 구성된 전체주의 이념체계이다. 사회유기체설을 바탕으로 하는 강한 집단주의 이념으로 이 지배이념이 존중되는 한 전체주의 특성은 유지될 것이다. 북한은 ‘조선로동당’을 국가조직의 상위에 두는 1당 지배체제를 헌법에 규정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 1당 지배 전제국가이다. 권력기구인 당과 정부조직의 조직원리를 민주집중제 원칙에 두고 있는 절대주의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고 질서유지를 위한 강제력을 갖추고 있다. 북한은 또한 군이 국가기구를 지배하는 군국주의 국가이다. 국방위원회가 정부를 통제하는 특이한 국가이다. 간추리면 북한은 사회주의, 전체주의 국가이다. 그리고 1당 지배의 전제주의 국가이며,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국가이다. 그리고 군지배국가이다.북한정치체제는 여러모로 특이한 체제이다. 스탈린 시대의 구 소련과 유사한 체제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작동원리는 오히려 문화혁명 때의 중국과 비슷하고, 천황을 신으로 모시던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과도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강한 민족주의적 요소를 갖춘 선민적 전체주의라는 점에서는 나치 독일과도 닮은 점이 많고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점에서는 신정체제와도 흡사하다. 그렇다면 북한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몇 가지 기초요소를 살펴보자.(1) 사회주의 정치체제사회주의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인식하고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전체주의 사상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 이런 사상에서 사람은지 김일성은 이를 이유로 주위 세력들을 숙청 및 제거하였다. 1967년 수정주의자라는 명목으로 같은 빨치산 계열마저도 숙청하고 김일성의 권력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었다. 같은 해 1967년, 김일성은 당중앙위원회 15차 정원회의에서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공식화했다. 이때를 기준으로 김일성은 유일한 권위자가 되었다. 1970년 수령제를 도입하여 김일성의 절대적 신격화를 헌법상에 명기했다. 수령은 인민대중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으로 출현하고, 그 출현은 단 한번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 이후는 수령에게 가장 충직한 사람이 수령의 지위를 물려받을 수 있다. 즉, 신정체제에서는 권위의 승계가 있을 수 없고 보통사람은 신성(神性)을 가질 수 없다. 김일성만이 신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김일성이 사망한 뒤에는 그저 그 권위를 빌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김일성이 사망한 뒤 김일성이 누렸던 주석의 직위는 아무도 승계할 수 없었고 신성을 가지지 않은 김정일은 오직 김일성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했다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김정일이 국가 주석직이나 당 총비서직을 이어받지만, 김일성의 권위를 승계한 것은 아니다. 북한은 김일성이 죽었어도 김일성의 권위로 나라를 다스리는 특이한 신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주체사상 발전과정북한은 정권수립 초기부터 대체로 1960년대 중반까지는 Max-Lenin주의를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았다. 북한정권의 중심인 로동당이 자체의 이념을 앞세워 수립된 정당이 아니라, 소련점령군에 의하여 만들어진 정당이었으므로 소련 공산당의 이념체계를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었다.북한이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서의 지배이데올로기 수정을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중국과 소련 간의 이념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정치적 필요성이 생겼고, 또 소련에서 진행되던 스탈린 격하운동과 이에 따른 Max-Lenin주의의 재해석으로 북한의 1당 지배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필요성이 요구되어 김일성은 1950년대 중반공식으로 채택했다. 4대 군사노선이란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그리고 전군의 현대화를 말한다. 전인민의 무장화는 적은 인구와 제한된 재정을 감안하여 현역병 외에 모든 가동인원을 동원체제로 묶어 예비 전력화한다는 계획이다. 전국토의 요새화는 적의 공격을 흡수하는 능력을 극대화하여 전력소요를 줄임과 동시에 영토방위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전군의 간부화는 예비 전력을 일시에 현역화할 수 있도록, 현역병을 동원된 예비군을 지휘할 수 있는 간부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는 평시의 군 유지비를 줄이기 위함이다. 전군의 현대화는 공격에서 속전속결이 가능할 수 있도록 기동장비와 화력장비를 고도화하는 계획이다.이러한 4대 군사노선에 따라 북한의 전사회가 병영화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9만 명의 정규 병력을 두고 700여만 명의 예비군을 추가했다. 현역과 예비군 제도를 두어 갑작스러운 전쟁이 발생했을 때에도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예비군 중 173여만 명의 직장예비군은 17세부터 45세까지의 남성을 500시간 이상 훈련시켜 전쟁 시 후방방위를 맡도록 하고 있다. 414여만 명의 고령 직장예비군은 4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성을 160시간 훈련시켜 시설 경계 및 민방위를 담당하도록 한다. 붉은 청년근위대라고 불리는 학생예비군은 118여만 명인데, 450시간의 훈련을 거쳐 전쟁 시 투입되도록 한다. 이렇게 북한은 사회전체를 병영화하는 작업을 실시하고 있다. 약 1000만 명의 무장화가 이루어 졌으니 세계 다른 국가들이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정권을 이어받으면서 1995년 1월 1일에 선군정치를 선포했다. 김정일 정부의 특색이라고 볼 수 있는 통치형태가 선군정치이다. 북한은 선군정치를 ‘인민군대 강화에 최대의 힘을 넣고 인민군대의 위력에 의거하여 혁명과 건설의 전반 사업을 힘 있게 밀고 나가는 특유의 정치’라고 정의한다. 단순한 구호로 시작한 선군정치는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주의자들로부터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민족해방과, 남반부 인민들을 착취계급에서 해방시키는 인민민주혁명, 이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하는 것이다. 고로 대남정책은 이 과제들을 달성하기 위한 자원배분과 행위체계 구축으로 구성된다. 북한의 대남정책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2) 대남정책의 목표와 통일방도북한의 대남정책의 목표는 조선로동당 규약 서문에 잘 명시되어 있다. 2012년 4월 11일 당대표자 회의에서 개정된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로동당의 당연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강성국가를 건설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를 김일성, 김정일 주의화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데 있다’라고 되어 있다. 민족해방이란 남한을 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혁명은 남한의 자유 민주정권을 봉건적, 반동적 정권이라 규정하여 이를 타도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정권인 용공 또는 연북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불리한 국제정세에 적응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조금씩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화통일의 목표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북한의 1차적 목표는 전국적 범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는 것이고, 2차적 목표는 온 사회에 김일성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적화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즉 김일성, 김정일주의화)는 바로 공산화를 의미한다. 북한의 철학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공산주의 사회는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 할 때 성과적으로 이루어진다. 공산주의 사회는 주체사상의 요구에 맞게 사람과 사회가 개조됨으로써 인민대중의 자주성이 실현되는 사회이다.’라고 한다.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첫 번째, 북한식 사회주의 확산이다. 북한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전 한반도의 공산화이다. 북한이 한반도를 공산화시키려는 이유는 계급론적 입장에서 한반도를 사회주의화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족주의군사력은 공세용, 전쟁용으로 여겨진다.(3) 북한의 통일정책변모북한은 무력통일 노선과 평화통일 공세를 병행해왔다. 1950년 6월 25일에 발생한 북한의 남침뿐만 아니라 1968년에 있었던 1.21사태, 10월의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3년 아웅산 테러, 1987년 칼기 폭파 등 북한의 무력통일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선언으로 한반도에 유래 없는 평화의 기운이 싹트는가 싶었지만, 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양측의 의견대립이 발생하여 남북대화는 다시 교착되었다. 이렇게 무력통일 노선이 진행되어 왔지만 동시에 평화통일 방안도 엿볼 수 있다.대표적인 것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이다. 북한은 1960년대에 ‘연방제’로 통일할 것을 주장하였다. 1973년 6월 23일에 한 제안에서는 고려라는 국호를 첨가하여 ‘고려연방제’로 바꾸었다. 그리고 1980년 10월 10일 로동당 제6차 전당대회에서 민주라는 수식어를 덧붙인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김일성에 의해 제시되었다. 김일성은 고려민주연방제를 ‘자주적 평화적 통일과 민족대화합’의 3대 원칙 하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단기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방법은 통일보다 평화에 관심을 갖는 남한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동시에 국제적으로 평화공존 이미지의 확산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고려민주연방제는 남북의 양쪽 지역정부가 내정을 맡고 외교와 국방은 중앙정부가 맡는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이다. 이 방안에서 제시한 연방의 구성 원칙은 남과 북의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동시에 남북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세우고, 그 밑에 남북이 동등한 권한과 의무를 갖는 연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하자는 것이다. 연방국가 기구로 최고민족연방회의와 그 상임기구인 연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정치?국방?외교 등 연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연방제의 운영원칙은 최고민족연방회의와 연방상설위원회의 공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