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지역의 선사시대 · 백제시대 가거지 추정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4년김 명 진1. 서 론충청남도 공주는 1964년 석장리 유적의 발굴을 통해 우리나라의 고고학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은 곳이다. 선사시대의 인간들은 취락의 입지에 있어 생존에 적합한 곳을 선택하려 노력하였다. 그들은 건조지반과 일조량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배후지로 채집대상, 전면으로 용수원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통해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그들은 주로 어로와 채집에 의해 생활하였으며, 이후에 신석기의 초보적인 농경의 발달을 거쳐 점차 생활모습과 주거지가 달라졌다. 하지만 신석기시대까지도 어로는 그들의 주된 식자원이였기 때문에 주로 강이나 호수의 인근의 입지를 선호하였다. 점차 고대사회에 들어서면서도 강이나 호수 등 용수확보는 중요한 요소였지만, 다만 변화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방어에 유리한 곳을 점하는 것이었다. 부락의 규모가 커지고, 지형에 대한 인식 스케일이 커짐에 따라 방어에 유리한 곳에 산성을 쌓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맞섰던 것이다. 이에 따라 주거공간의 기능분화가 두드러졌는데, 과거 방어와 저장, 생활의 기능이 한데 모여 있던 것이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는 저장과 주거가 분리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현재 공주뿐 아니라 충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선사유적은 대부분 강을 따라 분포하거나, 그 지류에 의존한 듯 보인다. 특히 금강의 중류에 밀집되어있는데, 공주 또한 선사유적이 다량 분포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고고학계의 인력부족 및 자료부족은 공주의 선사유적을 발굴함에 많은 제약이 된다. 본 보고서는 공주대학교 지리교육과 4학년 학부 수업 ‘지권환경구조론 및 실습’의 일환으로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현장답사 혹은 기술적 연구의 미비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기존 연구된 논문들을 토대로 공주지역의 선사시대와 백제시대 유적의 입지를 분석하고, 가거지를 추정해보도록 한다.2. 충남 공주지역의 선사시대 가거지 추정1) 공주의 고(古)기후선사시대의 공주는 지금과는 자연환경이 상에 숲을 이룰만한 교목이나 관목의 발달이 빈약한 가운데 다소 먼 거리에 위치한 소나무 숲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초본화분 중에는 인류의 식량으로 이용되어 온 벼과의 화분이 상대적으로 많이(14.0%) 산출된다. 그리고 시료B에서는 초본화분의 우세가 특징인데, 수목화분은 전체의 13.8%로 미미한 수준이다. 초본화분 중에는 벼과가 가장 우세하며(40.4%), 사초과도 다량 산출된다(14.5%). 위의 두 시료 모두 초본과의 점유율이 높은 것이 특징인데, 이는 소빙기(小氷期, stadial)의 한랭한 기후 영향으로 현재와 같은 온대의 활엽수림 대신 초원을 형성했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화분의 구성비는 황해의 시추시료에서 관찰된 11,000년 전의 한랭한 기후에서 형성된 퇴적층의 결과와도 유사하다(Yi et al., in preparation).)석장리 유적에서 발견된 후기구석기층과 탄천면 안영리 유적에서 발견된 포자의 화분분석을 통해 공주는 약 3만여년 전에도 활발한 구석기인들의 생활터였으며, 이 때 기후는 대체로 오리나무, 단풍나무 등의 수목이 자생하기에 알맞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1,000여전 공주 지역은 소빙기로 인한 한랭한 기후로 목본식물 중에는 소나무가 우세하였으며, 비교적 초본식물이 다수 분포하는 경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영리 유적의 화분분석에서 얻은 결과는 인간간섭에 의한 오류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타 다른 공주의 선사유적지에서 화분분석이 요구된다.2) 공주의 선사유적지 분포와 가거지 추정공주의 선사유적은 대개 대규모 토목공사, 건설을 통해서 발견되거나 연구자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경우가 많다. 현재 발굴된 유적은 공주 장원리 유적, 석장리 유적, 국곡리 선돌, 안영리 유적, 마암리 동굴, 산의리 유적 등이 있다. 아래 (표 1)은 기존 선사유적 발굴 결과를 취합하여 정리한 것이다.)표 1. 충남 공주의 선사유적지유적지명주변지세해발고도석장리 선사유적)(구석기 전기~후기)금강의 곡류와 유량이 많아지는 계곡안 사면의 하안 퇴적층해발천의 범람으로부터 안전한 곳인 인근 낮은 구릉지대에 거주하였을 것이다.청동기 시대의 유적들은 기존 선사유적들과 다르게 주거지 내에서의 공간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저장용 원형수혈(圓形竪穴)이 주거공간에서 분리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점차 농경사회로의 전환과 집단 내부에서의 사회변화가 원인으로 추측된다.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주로 저장용 원형수혈은 구릉 선상부 평평한 곳에 입지하며, 주거지는 그 아래의 산사면에 입지하는 경향이 보인다. 이것은 공주 이인면 산의리 산 4-10번지 일대에 위치한 청동기 유적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산의리 유적 발굴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8기, 저장형 구덩이 41기, 석관묘 28기, 옹관묘 8기, 백제시대의 석실분 40기와 옹관묘 4기가 조사되었다. 백제시대 유적은 전체 능선상에 넓게 분포하는 반면에, 청동기시대 유구는 주거지와 저장형 구덩이 분포지역과 분묘지역이 구분되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주거지와 저장형 구덩이의 입지에서도 차별성을 보이는데, 선상부의 평탄지대에 구덩이가 밀집되어 있고, 주거지는 구덩이의 외곽지대 사면부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위와 같은 양상으로 볼 때, 주거지의 기능 분화로 인해 매장용 혹은 저장용 원형수혈을 선상부에 두고 그 사면에 주거지가 입지하는 형태는 청동기 중기에서 시작된 주거지의 입지로 볼 수 있다. 비록 백제시대에 이르러 그 분포가 산능선에 늘어지는 형태로 변화하였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도 매장의 공간은 주거공간보다 해발고도가 대체로 높아 그 연관성을 볼 수 있다.)선사시대의 유적 중에는 공주 마암리 동굴과 같이 강가에 인접한 동굴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청원 두루봉 동굴도 이와 같은 경우인데, 청원 두루봉 동굴은 지질상 옥천계 석회암층에 위치한다. 당시 선사시대인들은 대개 주거 양식이 발달하기 전, 강가에 인접한 동굴에 거주하며 인근 강에서 어로를 통해 생활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공주에는 금강 및 지류 인근에 많은 산지가 분포하므로, 이를 조사 고분과 관련된 유적이 많은데 이것은 고분과 관련된 일종의 장소감이 심적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백제 주거지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주거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유적의 발굴이 어려운 실정이다. 본 보고서 작성시 공주 내의 모든 백제 혹은 삼국시대 관련 유적 자료를 검토하였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조사된 유적들은 다음장 (표2)와 (표3)과 같다.표 2. 충남 공주의 백제 및 삼국시대 유적지유적지명주변지세해발고도하봉리 유적)(원삼국후기)동서로 길게 흐르는 구릉의 정상과 남사면에 유구가 분포해발 30~40m마암리 동굴유적)(구석기~삼국)금강 남안, 계룡산 북쪽 산줄기 사면에 위치하며 동굴의 높이는 약 20m이다. 입구는 동향이다.)해발 200m장원리 유적)(신석기~조선)소하천변 낮은 구릉해발 71.2m안영리 유적)(청동기~삼국)주변에 산지가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뻗어있으며 우교천과 석성천이 연결되는 금강변의 나지막한 구릉해발 150m이하의 저지대산의리 유적)(청동기~삼국)유적 북쪽전방으로 용성천이 흐르며, 나지막한 구릉 지대와 경작지로 추정되는 충적지가 있고, 주변 산세는 동·서로 해발 200m의 산이 가로막고 있다.해발 55m)장기면 시목동 고분(신관리 석실고분))전면을 금강으로 하는 낮은 구릉의 남사면, 구릉의 북사면은 거주에 적합단지리 고분)국도 32호선 신풍-우성간 국도 확장포장공사 구간 중 충남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산 37-1번지 구릉경사면정지산 유적무령왕릉이 위치한 정지산 북쪽자락, 금강쪽으로 돌출된 산정상 평탄부, 공산성 옥녀봉산성과 일직선해발 57m정상부수촌리 고분군)금강 북쪽 무령왕릉, 송산리고분군과 독립적 위치에 입지, 하지만 백제묘제를 사용(웅진천도 유도세력으로 추정)화정리 유적)유적 남쪽으로 비옥한 평야가 있는 구릉사면에 위치. 수혈은 구릉 정상부와 남쪽사면에 밀집(탄천면 화정리 28-1)장선리 유적저평한 구릉정상부안영리 새터유적구릉사면부30~35m송산리 고분군)공주시 서북쪽에 있는 해발 풍면 신정리고분군 추정지표조사24점골 고분군공주시 계룡면 화은리고려시대 석곽묘지표조사25동대리 고분군공주시 우성면 동대리토광묘 추정지표조사26장숭백이 고분군공주시 우성면 보충리미상지표조사27만골 고분군공주시 우성면 보충리미상지표조사28대성리고분군공주시 우성면 대성리미상지표조사29산의리 고분군공주시 이인면 산의리청동기-백제 고분군발굴조사30산의리 고분군2공주시 이인면 산의리백제시대 고분군발굴조사31취리신 고분군공주시 신관동 취리신백제시대 고분군시굴조사32분강리 고분군공주시 탄천면 분강리청동기-백제 고분군발굴조사발굴조사33금학동 고분군2공주시 금학동백제시대 석실분발굴조사(표2)는 기존 연구자들의 논문을 취합하여 얻은 자료로서 유적의 해발고도와 주변 지세의 묘사를 알 수 있다. 또한 (표3)은 공주시 통계연보(2007)에 기록된 공주지역의 고분군에 대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현재 발견된 공주 지역 내의 백제시대·삼국시대의 유적은 고분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주거지 유적은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를 거친 수혈식유구가 발견되었을뿐 그 원형을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고분군 및 여타 다른 유적의 위치를 연구하여 주거지의 분포도를 추정할 수 있다. 즉 백제의 가거지 추정에서 주요점은 그간의 선사시대인들이 선호하였던 가거지의 연속성을 바탕으로,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고려하는 것이다.공주는 과거의 웅진으로 475년 문주왕의 천도이후 538년 성왕의 사비천도까지 60여년동안 백제의 도읍이었다. 본래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한성시기를 거쳐,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이는 공주지역의 토착민의 입장에서는 근초고왕의 마한정벌이후의 새로운 정치적 변화였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고분문화이다. 고분문화란 한 집단이 가진 비교적 영속적인 양식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유지되는 특성이있다. 하지만 집단 간의 통합 혹은 문화적 교류를 통해 어느 정도 변화하며, 이에 따라 시신과 함께 매장하는 부장품의 종류 또한 달라진다. 이때의 부장품은 당시의 기 있다.
강원도 결혼이주자의 공간적 분석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3년김 명 진(200600543)1. 지역별?국적별 결혼이주자1-1. 강원도의 연도별 결혼이주자 추이강원도의 결혼이주자의 연도별 추이는 다음 표와 그래프를 통하여 쉽게 파악할 수 있다.구분계동북아동남아남부아중앙아미국러시아20062,0001,3*************72,2151,21*************0082,6301,3861,09*************,9881,3671*************102,9921,2861,55625793313표 2006-2010 강원도 연도별 국적별 결혼이주자. 단위(명). 행정안전부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간의 통계를 토대로 그 변화 추이를 분석하면 점차 강원도내의 결혼이주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주로 동남아로부터 유입되는 결혼이주자 외국인이 증가하는 추세를 반영한 결과로 위 그래프 ‘강원도 결혼이주자 국적별 변화 추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동남아의 대부분은 5년간 베트남인이 가장 많았으며 꾸준히 증가하였다. 베트남인은 2007년 528명에서 2010년 1013명으로 약 2배정도 증가하였다. 또한 2순위로는 필리핀인이 많았다.2010년에 특이할만한 사항으로는 캄보디아인의 수가 늘어 이전 년도까지 기타로 분류되었던 것이 2010년에는 국가 명으로 집계되기 시작하였다. 캄보디아 결혼이주자는 2010년 3월 5일 캄보디아 정부는 인신매매 방지를 위해 자국민과 우리국민간의 국제결혼을 잠정중단한 이래 상기와 같이 국제결혼 절차를 정비하였는바, 향후 양 혼인당사자에 대한 직접 심사를 통해 중개인 개입 여부 및 인신매매 여부에 대한 조사를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으며, 2010년 4월 29일, 국제결혼 절차를 정비한 캄보디아 정부와 대한민국의 국제결혼이 재개되었다. 이로써 캄보디아 결혼이주자의 수는 점차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결혼이주자의 성별 분포는 여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았으며, 2010년에는 남자가 158명 여자가 2,876명으로 결혼이있다. 그러나 이러한 강원도 내 여성 결혼이주자의 절반가량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들의 배우자 직업은 농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35%인 350명으로 가장 많았고 단순 노무 17.5%,기능직이 14.7% 등으로 67%가 농어업이나 단순 노무에 근무했다. 절반이 넘는 이주여성가족이 고정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중·하위 생활계층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 기초생활 수급자도 14.3%로 매우 낮았다. 월평균 가구소득은 156만원으로 전국 가구당 월평균소득 294만9,000원에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0만~200만원 미만이 54.1%, 100만원 미만이 17.2%였다. )1-2. 강원도의 지역별 결혼이주자(2006~2010)①2006년도 강원도 지역별 국적별 결혼이주자계동북아동남아남부아중앙아미국러시아기타춘천시1268737-2---원주시3702499748335강릉시19916327-1126동해시674819-----태백시24174-3---속초시43385-----삼척시321-----홍천군29019684-9-1-횡성군1296356-10---영월군834141-1---평창군1559847451--정선군763437-1--4철원군1279622-8--1화천군563515-6---양구군735117-5---인제군594314-2---고성군9257341----양양군523616-----② 2007년도 강원도 지역별 국적별 결혼이주자계동북아동남아남부아중앙아미국러시아기타춘천시*************216원주시37*************강릉시15611632--215동해시996033-1221태백시2911132111-속초시895624-1125삼척시824138---12홍천군205959269111횡성군1323189-7--5영월군973461-1--1평창군1026436-2---정선군784234-2---철원군1096444---1-화천군623817-7---양구군783833-7---인제군533913-1---고성군844143-----양양군614118-2---③ 2008년도 강원도 지역별 국적별 결혼이주자계5315580-3627동해시1085744-2131태백시804132-5-11속초시1117726-3-23삼척시9659343----홍천군189869416-11횡성군1474490-13---영월군1094761-1---평창군966133-2---정선군1064757-2---철원군1156145-8-1-화천군734225-6---양구군874436-61--인제군725021-1---고성군1025049-1-11양양군663925-1--1④ 2009년도 강원도 지역별 국적별 결혼이주자계동북아동남아남부아중앙아미국러시아기타춘천시*************1217원주시60*************강릉시3*************동해시1115153421태백시692638311속초시134824113133삼척시1224868312홍천군21381122271횡성군147291099영월군116436931평창군11860553정선군14043921211철원군123695121화천군5827256양구군73333451인제군6939291고성군108475812양양군67273811⑤ 2010년도 강원도 지역별 국적별 결혼이주자계동북아동남아남부아중앙아미국러시아기타춘천시*************2216원주시61*************강릉시*************3동해시125497011-22태백시753139-3-11속초시1266847121-1삼척시134458231--7홍천군2097212817-13횡성군134309419---영월군106396313---평창군1205862-----정선군1514310232---철원군13676581---1화천군542327-4---양구군673229141--인제군703238-----고성군873647-112-양양군672142211--2006-2010년, 5년간의 강원도 결혼이주자를 강원도 내 지역별, 국적별로 분류하여 표와 그래프로 한 결과 대체로 5년간 원주와 춘천에서 결혼이주자의 분포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주로 동북아와 동남아가 그 출신지였다. 또한 2006년 홍천이 춘천보다 결혼이주자 인구수에 대해 우위를 점하였적으로 3순위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2006-2007은 강원도 내에의 결혼이주자들이 홍천에서 춘천으로 그 분포가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2008년도부터는 대체로 안정되어 원주, 춘천, 강릉 순으로 그 우위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전국적인 경향과 유사한 것으로 외국인 결혼이주자의 분포 또한 그 경향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2. 지역별 인구구조강원도 내 인구 성장률은 근 5년동안 평균 -0.62(%)으로 꾸준히 감소추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비해 65세 이상의 인구 수는 계속 성장하였고, 15-64세의 인구는 점차 감소하였다. 또한 0-14세 인구도 감소추세에 있다. 이는 노령화에 대한 전국적인 경향이 강원도 내에서도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노령화 지수를 보면 더욱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데, 5개년 사이에 73.7에서 96.0으로 22.3만큼 높아졌다. 이 때문에 강원도는 노령화에 대한 정책, 도시계획 등 다방면의 대비책이 필요할 듯하다. 특히 어업종사자가 많은 지역에서 고령화는 어업 수확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인구구조,부양비별2*************092010총인구 (명)1,479,2841,470,4471,461,3181,452,1481,442,929남자 (명)746,526742,240737,718733,124728,479여자 (명)732,758728,207723,600719,024714,450성비101.9101.9102.0102.0102.0인구성장률 (%)-0.61-0.60-0.62-0.63-0.630-14세 (명)266,027256,611246,306235,887225,50815-64세 (명)1,017,3071,010,2731,004,7741,000,478996,38665세 이상 (명)195,950203,563210,238215,783221,035인구구성비:0-14세 (%)18.017.516.916.215.6인구구성비:15-64세 (%)68.868.768.86545.445.144.8유소년부양비 (백명당)26.225.424.523.622.6노년부양비 (백명당)19.320.120.921.622.2노령화지수 (백명당)73.779.385.491.598.0중위연령(세)38.138.839.640.441.1중위연령-남자(세)36.637.438.138.939.6중위연령-여자(세)39.740.541.342.042.8표 2006-2010 강원도의 인구구조와 부양비율. 통계청3. 특정사례지역 조사 - 원주원주는 강원도 내에서 근 5년간 가장 많은 결혼이주자 분포를 보이는 곳이다. 앞서 제시된 강원도 결혼이주자의 지역별, 국적별 통계에서 원주에 관한 사항만 추출한 후 원주에 대한 결혼이주자의 추이를 확인 할 수 있다.구분계동북아동남아남부아중앙아미국러시아기타20**************************5*************7**************************2*************2291224946표 원주의 2006-2010년간 결혼이주자 수원주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도시답게 많은 외국인 결혼이주자가 분포하고 있으며, 이는 2006년 동북아시아 출신의 결혼이주자의 수가 많았지만, 점차 동남아시아의 수가 늘어 2009년부터는 동남아시아 출신의 결혼이주자 수가 더욱 많은 경향을 보인다. 세부 국적별 결혼이주자의 순위는 2007년 베트남>조선족>중국 을 제외하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베트남>중국>조선족의 순서로 그 규모가 크다. 성별은 주로 여자가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결혼이주자의 전국적인 경향과도 일치한다.다소 흥미로운 점은 원주는 강원도 내의 대도시로 도내 농촌과는 달리 미비하지만 결혼 이주자중 미국인과 러시아인의 수가 조금씩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2010년 원주의 미국인 결혼이주자 9명중 7명이 남자라는 것도 눈길을 끈다.4. 참고문헌 및 자료외국인 주민 실태조사자료(2006~2009). 행정안전부통 계 청 http://www.kostat.go.kr/강원일보 http://www.k)
Ⅴ. 본시 교수학습 지도계획1. 본시 교수학습 과정안일시2010. 11. 4교시10교시지도교사김명진교수모형발문수업모형대상2학년 4반장소사범대 110호단원Ⅵ. 유럽 근대 사회의 성장과 확대4. 자본주의의 발전과 산업 혁명(2) 산업 혁명의 전개교수학습자료활동지, ppt, 동영상관련영역학습목표● 영국의 산업혁명 배경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기술 발달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고민 한다.수업단계교수-학습 내용교수 - 학습 활동학습자료 및 유의점교사학생도입(3분)◇인사 및 출석 확인◇전시학습확인◇학습목표제시◇동기부여학생들의 분위기를 안정시키고, 인사를 한 후, 출석을 부른다.학생들과 저번 시간에 배웠던 내용에 대해 복습한다.형식적인 학습목표 제시를 피해, 학생들이 무엇을 알아야하는지 키워드를 제공한다."산업혁명“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왜 구태여 혁명이라고하는지 묻는다.산업혁명에 대해 학습하기위한 접근법을 학생 생활과 연관지어 설명한다.?ex)노트, 노트북“00학생은 왜 노트필기를 하는가?”선생님과 인사를 한 후, 출석을 부른다.선생님이 묻는 질문을 통해 전시학습의 내용을 떠올린다.선생님이 이번 시간에 알아야할 키워드를 제시한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산업과 혁명의 뜻을 제대로 알고 이것을 다시 조합한다.선생님의 발문을 심각한 주제로 삼는다.ppt,실마리적접근법(소서사적접근법)정서와 학습전개1(10분)◇핵심발문◇단순발문-교과내용 전달풀턴과 그의 증기선 영상을 보여주고,“풀턴이 왜 증기선을 만들었을까?” 에 대해 묻는다.증기선의 용도와 그것이 운송했던 물건들에서 사고를 확장하여 산업혁명 당시의 배경을 설명한다.-단순발문“증기선은 무슨 용도의 물건일까?”“무엇을 옮겼을까?”“왜 그 양이 많아졌을까?”풀턴이 증기선을 왜 만들었을까 생각한다.이것에 대해 알기위해 증기선의용도에 대해 고민한다.선생님의 단순 발문을 통하여 증기선이 옮겼던 것이 무엇이고, 왜 당시 그것의 운송량이 많아졌는지 파악한다.-교과 내용적 지식; 교통 수단의 발달,인클로져 운동,매뉴팩처, 선대제,여러기술의 발달(ex방적기)되도록 학생들의 상상력을 자극 시키는 화법을 구사한다.-‘상상해봐’‘생각해봐’‘떠올려봐’‘그림을그려봐’◇단순발문풀턴의 영국 여행기를 통하여, 왜 영국이 다른 곳보다 산업혁명이 빠르게 진행되었는지 설명한다.-“왜 영국이 미국보다 산업혁명이 빨랐을까?”산업혁명 이전 시대에서 영국이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찾아본다.(이전 수업들의내용을 되짚으며 진행한다.)_교사의 단순발문을 따라오면서 당시 시대상에 대해 이미지화 할 수 있다.이전 수업 시간들에서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빠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다.역사란 항상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것을 보여준다.전개2(2분)◇핵심발문다시 핵심발문으로 돌아가 학생들의 고민을 더욱 심화시킨다.
시민혁명이란 무엇인가?;서양근대사 보고서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3학년김 명 진(200600543)목 차Ⅰ. 개 관Ⅱ. 본 론 ; 시민혁명에 대한 접근1. 생각의 혁명 ‘계몽주의’ ; 프랑스를 통해 본 계몽주의2. 혁명 경기장의 선수 입장 ; ‘영국’, ‘미국’, ‘프랑스’라는 경기장3. 혁명이 지나간 자리Ⅲ. 시민혁명이란 무엇인가? ; 경기는 계속되고 있다Ⅳ. 참고 문헌??Ⅹ?Ⅸ. 개 관시민혁명이란 무엇인가 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한권의 책으로 해결되는 질문이 아니며, 상황에 따라서는 기존 학자들의 견해만으로는 보고서를 작성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학부생의 수준의 본 보고서는 그 내용들이 다소 비전문적일 수 있으며, 기존의 견해를 그대로 차용할 수 도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서 다양한 논문과 연구들을 접하며 소신 껏 시민혁명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학부생 본인에게는 학문적 도전일 수도 혹은 흥미로운 학습주제가 될 것이다.현 보고서에서는 그간 개론서에서 이야기하는 시민혁명의 대표적인 사례인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대혁명을 중심으로 서술 되었으며, 다만 시민혁명의 정의에 대해서는 위 세 가지 사례를 비롯하여 더욱 광범위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좁게는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넓게는 16c 네덜란드의 혁명, 프랑스의 2월 혹은 7월 혁명, 파리코뮌 등도 포함되는 관점이다.이는 시민혁명이란 어느 한 시점에 제약된 정태적인 역사가 아니라, 현대에도 계속적으로 성립되고 있는 사상의 줄기이며, 역사적 움직임으로 그 성격이 ‘동태적이란 관점’이 보고서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민혁명의 세 가지 대표사례를 통해 시민혁명의 공통점을 추출해내고, 이것이 발동한 지역의 특색과 상황을 분석해 공통의 요소가 차별적으로 표출된 원인에 접근하고자 한다.Ⅰ. 본 론 ; 시민혁명에 대한 접근0. 생각의 혁명 ‘계몽주의’ ; 프랑스를 통해 본 계몽주의랑스에서는 문자해독률이 1686~1690년의 29%에서 1786~1790년에는 47%로 상승하고 특히 파리 지역에서는 성인 남자의 문자해독률이 70%정도에 육박했다. 전반적인 독서수준의 미흡함 즉 대중적인 종교서적에 대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독자층은 양적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그 예를 18세기 파리의 유리장인이었던 메네트라가 쓴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유리장인이었던 메네트라는 극히 민중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사상과 개인사를 정리하여 나갔다. 그는 구체적이고 독특한 개인만의 사상을 발생시킨 것은 아니었으나, 체제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줄 알았으며, 여러 시기가 지날 때마다 그에 걸맞는 사상들로 자신의 사고 맥락을 전환하였다. 이는 오늘 날에도 많이 나타나는 민중적인 사상 해석이며, 극히 개인적이고 서민적인 사상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독서습관은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민중들에게 부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그러나 계몽사상의 중심에는 구체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 예로 절대왕정은 지방 학술원 등을 통해 오히려 정치, 행정 분야의 엘리트. 즉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이른바 ‘구체제의 부르주아지’를 육성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계몽주의는 특권계급에 맞서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민중을 제외한 모든 계층에 의해 공유된 이념으로 볼 수도 있다.)민중을 제외한 모든 지도부 계층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계몽주의의 현실화된 모습으로 스스로를 지키려 하였으며, 한 편에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틈을 마련하기 위해, 구체제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는 계몽주의의 모습이 어떤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생각의 특성’상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가 가능하고 자기 합리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사상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여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에서 사상을 지배계층 뿐만 아닌 제 3의 세력(삼신분)의 비판적 사고 도구로서 사용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몽사상가라는 의미가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가지 시 정신 ③경험적 근거에 입각하는 자연주의적 태도(계몽사상의 진보주의는 세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 ④종교는 비판의 가장 중요한 대상) 이라고 할 수 있다.1. 혁명경기장의 선수 입장 ; ‘영국’, ‘미국’, ‘프랑스’ 라는 경기장영국, 미국, 프랑스는 사상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서부터 자연적 기후, 지형까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영국, 프랑스, 미국의 각기 다른 시민혁명의 모습을 발생하게 하였다. 이는 각기 다른 환경의 ‘혁명경기장’에서 치루어지는 ‘혁명경기’로 비유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각각의 차이를 가진 세 경기장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시민혁명을 전개하였다. 물론 역사의 흐름을 놓고 보았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유사한 것이 많지만 민중의 개입 정도의 차이가 극명하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이라는 혁명의 무대가 각기 다른 특성과 사람들 그리고 우연적 요소들의 복합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영국은 1628년 찰스 1세의 권리청원과 이후의 의회 해산, 그리고 이어지는 1640년부터 1660년의 청교도 혁명을 통해 중요한 역사적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청교도 혁명 당시 크롬웰 휘하의 조직된 군사력은 무분별한 프랑스의 농민봉기랑은 다른 양상이었으며, 그들은 종교적으로 단합된 조직된 군대였다. 이는 지배권 내부에서의 내란이었으며, 이에 일반 대중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다. 기존 왕당파에게 대항하는 의회파는 무분별한 민중의 도움 없이도 크롬웰의 의지가 개입된 ‘조직된 철기군’의 도움을 받아 왕권에 대항할 수 있었고, 곧 승리하였다. 크롬웰은 유능한 군사조직자였으며, 이는 탁월한 신식군대(New Model Army)를 창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조직된 철기군’은 프랑스 혁명의 일반 대중과는 달랐으며, 이에 크롬웰의 존재는 프랑스의 혁명지형의 차이에 기여하였다.또한 청교도 혁명 이후 1688년 휘그당은 정치개혁을 주도하여 권리장전을 이룩해냈다. 이것이 유명한 무혈혁명인 ‘명예혁명’ 무장시켰으며, 이 불안은 곧 분노로 돌변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을 구속하던 봉건문서와, 지주의 성을 공격하였고, 이는 지주출신이 많았던 유산계급으로 하여금 민중에 대한 일부의 불신 내지는 존중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파리와 같은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당시 부르주아의 법률혁명을 위해 활동하였던 애국파의 기민한 대처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당시 절대주의에 대응하는 유산계급과 농민의 식량문제, 그리고 민중적 형태의 폭력이 우연적 혹은 필연적 요소에 의해 같은 길을 걷게 되었고, 이는 영국 보다 훨씬 민주적인 형태의 혁명을 초래하게 되었다.프랑스 농촌운동은 도시의 유산계급의 혁명과는 상이한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였으며, 이는 크게 세 가지 목표를 갖고 나타난다. 각각 반봉건적 폭동, 식량 폭동, 항세 폭동이 그것이다.) 이는 지리적, 주기적(계절적, 정치적)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구 분발생 건수 (비율)비 고반봉건적 폭동1,137건 (56.3%)가장 빈도가 높음.식량 폭동565건 (28%)도시에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광범위함.항세 폭동109건 (5.4%)염세와 보조세에 대한 폭동이 주를 이루었다.표 1. 프랑스 혁명기의 농촌 폭동(1789-1791))농촌 폭동은 반봉건적 폭동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무자비하고 단순한 수준의 폭동이 아니었으며, 점차 조직화되고 규모도 커졌다. )1789년 7월 말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7월 26일 뤼니에서 폭동 주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피에르 마지이에(Pierre Mazillier)가 동료들에게 “성이 아니라 문서를 불태워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농민봉기는 과거 자크리의 난보다 훨씬 조직된 것이며, 이는 몇 세기 간의 농민들의 불만과 분노의 방향이 정확히 자신들의 필요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특히 18세기의 프랑스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곡가가 62% 증가했으며(1725/35~1775/1789) 임금은 26%(1726/41~1771장과 참가 선수들의 비교위에서 분석한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지도 토대로 그 성격을 살펴보면, 영국은 표면적으로는 절대왕정을 향한 진보적인 운동인 듯싶으나, 내부적으로는 유산계급의 기득권을 지키고 확대시키려는 보수주의적인 운동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또한 유산계급에 대해서는 영국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민중운동의 영향력 때문에 한때는 진보적인 운동이었으며, 다만 결론적으로는 프랑스도 혁명의 결과에 있어서(분배) 보수주의적인 성향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미국의 경우는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어떤 차이를 가질까? 미국의 경우는 경기장에 입장한 선수가 다소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와 상이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절대왕정과 의회 그리고 민중들이 개입되었다면, 미국은 식민과 식민지배층의 대립이었고, 그 내부적으로는 식민지의 유산계급이 영국의 절대왕정에 대한 반동이었다. 식민지의 유산계급은 프로테스탄트가 많았고, 그 운동은 1765년부터 1776년 사이에 도처에서 급진주의자들의 ‘미국의 자유 수호’ 라는 애국적인 구호 아래서 발발하였으며, 그 대상은 식민지의 지방적 귀족이었다. )따라서 미국혁명은 독립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식민지귀족에 대한 전쟁이 된 투쟁에 민중을 결합시킬 수 있었고, 그것은 식민지 내에서 사회혁명의 과정이기도 하였다.지금까지 언급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시민혁명이 발발하였던 상황을 비교해 보았다. 다소 차이점에 대한 언급들이었지만, 영국, 프랑스, 미국 모두 조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은 1628년 찰스 1세에 대한 권리청원 당시에도 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과세로 인해 발생하였으며, 이후 1688년 명예혁명 당시에도 의회와 국왕의 쟁투중 가장 민감한 사안은 조세권에 있었다. 이것은 다소 종교적으로 포장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다수의 젠트리로 구성된 유산계급과 국왕 간의 세속적인 다툼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프랑스는 1789년 5월 5일 삼부회의 소집 자체가 자국민에게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의회의 동의를 얻고자다.
대한민국 매스미디어 속의 조선족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4학년김 명 진(200600543)序우리들은 매스미디어 속에서 여러 가지 문화적 현상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 내용(contents)들은 대중의 기호에 맞춰서 표현되고, 공감되며, 유행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대중의 개개인들이 이것을 답습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 동안 단순히 지표상에 나타나는 지리적인 혹은 수리적 위치와 질적인 상호관계 등에 대한 연구의 결과를 떠나서 매스미디어라는 특질을 반영한다. 또한 매스미디어는 우리의 일반적인 현실을 뛰어넘어 극명한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 이는 현실의 일부분을 단적으로 나타내어 당시 사회와 문화를 분석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매스미디어에 나오는 문화적인 사례들은 매스미디어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흔히 매스미디어의 대표 격인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이나, 현재 가장 두드러지게 성장한 인터넷의 소셜미디어, 그리고 오래전부터 대중과 소통)해온 영화나 음악, 소설 등의 문화적인 콘텐츠는 현대 대중의 요구에 맞는 여러 색채의 테마를 갖고 있다. 다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러한 매스미디어의 콘텐츠들은 상업성이 짙으며, 대중이라는 고객의 구미에 맞게 요리 된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그러나 자극적이고 강렬하게 시선과 흥미를 끄는 내용의 것이더라도 그 이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들이 많다. 또한 이러한 경향이 현재 ‘사실’을 가미한 ‘드라마’를 원하는 대중의 기호와도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근래에 모 프로그램에서 일약 스타가 된 ‘백청강’이라는 조선족 청년과 조선족을 다룬 영화 ‘황해)’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위의 두 사례보다는 덜 자극적인 것이지만, ‘연변통보’, ‘흑룡강신문’ 이라는 조선족의 인터넷 커뮤니티 또한 문화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매스미디어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이 보고서는 ‘매스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문화적 현상 찾기’ 라는 주제에 맞게 현재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미디어속의 대중문화 속에서 그 사례를 찾았으며, 좀 더 그 1910년 일제의 식민통치 중 토지를 잃어버린 많은 파산농민들과 항일의병, 애국지사 등이 이주하였다. 특히 1919년 한반도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탄압이 강화되어 수많은 독립군과 반일지사가 동북 망명을 시도하며, 1919년에 한민족 이민이 43여만 명에 달하였다. 당시 자료마다 이주민의 수가 달라 정확한 집계가 어렵다. 다만 연변대학의 심혜숙 교수에 의하면, 그 중 약 64%에 달하는 한민족이 연변지구에 거주하여 룽징을 중심으로 집거지구를 형성하였으며, 당시 룽징은 동북의 한민족 이민과 한반도 및 연해주 한민족 이민의 문화교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고 한다.)일제의 강제이주 시기(1931년~1945년)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병참기지화 하려 하였다. 당시 일제는 9·18만주사변을 전 후로 하여 많은 한민족을 강압적으로 이주시켰다. 1996년 일본 명석서방(明石書房)에서 출간한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1912년 238,403명, 1931년 630,982명, 1937년 931,920명, 1942년 1,511,570명, 1945년 2,163,115명의 한민족 이민이 동북지역으로 이민하였다고한다.) 한민족의 동북지역 이민사 시대구분)위와 같이 한민족의 동북지역 이민은 150년도 되지 않은 역사이지만, 그들의 수는 200만을 넘는 것은 이주 당시 일제의 국권 침탈과, 강제 이주정책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이주한 한민족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했다. 특히 당시 ‘반일’이라는 중국내 공통 주제는 조선족의 정황과도 맞아 떨어져 중국의 한족(漢族)과 조선족은 함께 항일운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역사적 상황은 조선의 해방이후 중국의 혁명에 일조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조선족은 당시의 중국 혁명에 가담함으로써 어느 정도 중국의 민족성 또한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韓)민족의 정체성과 중국인의 정체성의 미묘한 혼합이 지금의 조선족을 만들었다. 그들은 조국 해방이후 많은 사람들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정학’이다. 김구남은 아내를 한국에 보내기 위해 빚을 지고 연길에 남아 택시운전을 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한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조선족 내에서도 경제적 약자인 ‘김구남’은 ‘면정학’이라는 조선족 내의 살인청부업자 혹은 개장수의 신분을 가진 악당에게 이용당한다. 이 때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조선족의 모습은 대체로 어두우며, 배경으로 나오는 연길조차 혼란스러운 도시처럼 보인다. 또한 한국에서의 격투장면 등에서 잔인하게 낭자하는 선혈은 보는 조선족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주기 충분하였을 것이다.조선족은 앞서 살펴본 그들의 이주 역사만큼 치열하며, 거침없는 느낌을 갖고 있다. 나홍진 감독은 이를 영화 속에서 잘 표현하였으며 이는 곧 ‘조선족’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동북지역으로 고난의 이민역사를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것에서 하나의 문화적·상업적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다만 그 표현에 있어 선혈이 낭자함이 있었지만, 그들의 역사가 치열하다는 것은 짐승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주인공의 행동거지마다 고국을 떠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처절함이 묻어나는 것이였다.매해 한국으로 근로를 위해 입국하는 조선족의 수는 상당하다. 다음 표를 보면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있다.연도‘07.12.31‘08.12.31‘09.12.31‘10.12.31‘11.3.31총체류자(명))241,617302,379306,334284,145293,985 연도별 ‘한국계 중국인’ 외국인 근로자 추이)2007년부터 2011년 3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외국인 근로자중 한국계 중국인의 숫자는 3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다만 불법체류자중 통계에 기록되지 않은 수를 포함할 경우 이보다 조금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를 떠나 이주의 역사를 살고 있던 조선족은 다시 ‘코리아 드림’을 안고 한국의 출입국심사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비용이 상당하다. 이것은 ‘코리아 드림’을 품고 한국에 오는 조선족들의 첫 관문이 된다. 그러나 이 보다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은 조선족 사회에서의 가정 해체 도시로의 이촌향도나 한국행을 택하고 이에 따라 조선족은 한족이나 여타 민족에게 농토를 내주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허룽(和龍)시는 예부터 조선족이 과수원은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조선족들이 과수원을 타민족에게 양도하고 외국근로행을 나섰다. 이로써 허륭시의 과수원은 중국의 호도거리 시행 전에 100%, 호도거리 시행후에는 90% 조선족이 도급을 맡았는데, 현재는 허룽시의 900무중 95%가 타민족이 경영하고 있다는 것이다.)조선족의 한국근로자행은 단지 농토를 빼앗기는 문제만이 아니다. 근래 지린성(吉林省)의 성도인 장춘(長春)에서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 여대학생들이 술집에서 일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조선족의 경우 그 여대생들의 부모들이 대부분 한국근로행을 택한 편부모가정이거나, 혹은 부모가 모두 한국으로 근로행을 간 가정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족사회에서 청년층 혹은 현 부모세대가 부푼 꿈을 안고 떠나는 ‘코리아 드림’의 기회비용은 지금 우리나라의 농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며, 사회 내 문제로서의 그 심각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3. 백청강의 위대한 탄생, 조선족의 위대한 탄생 MBC 방송사에서 방영한 공개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로고(좌측) 2011년 5월 27일 방영된 최종 경선에서 연변청년 백청강의 우승 장면(우측)2011년 6월 3일자로 종방된 MBC 방송사의 ‘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백청강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하였다. 연변의 청년으로 한국의 공개 오디션 방송에 참가하게된 백청강은 최종경선에서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우승을 이뤘다. 그의 모습은 조선족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백청강이 우승을 할 당시 우리나라의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백청강의 우승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되었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조선족이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조선족 음모론’ 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이후회에 만연해있다. 실상 조선족들은 한국뿐 만이 아닌 일본, 미국 등지로도 초국가적 이동을 하는데, 그 중 한국이 가장 적응하기가 쉽고, 별다른 기술 필요 없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이 사실은 한국으로 유입되는 조선족의 다수는 중국 조선족 사회 내에서도 비교적 저소득층이 많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하지만 실제로 2005년 12월 2일 자의 흑룡강신문에서는 일본특별취재팀의 한광천 기자가 쓴 “재일본 중국조선족의 현주소: 방대한 엘리트군체(群體) 형성, 일본주류사회에 진출성공”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는 1980년대말 연변을 중심으로 일본 유학 붐이 일면서 시작된 조선족의 일본진출이 2005년에 근 5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으로 유입된 조선족들과 달리, 중국 소학교(초등학교)의 일본어 우수자들로 고중(고등학교) 혹은 대학교육까지 받은 인재들이다. 이들은 전공과 함께 민족교육까지 받은 자들로 집단정체성도 강하여 일본 내에서 활동도 활발하다고 한다.) 또한 조선족 학력과 관련해 조선족의 인재들은 일본뿐 아니라 외국 유명대학에서 약 1만여명이 유학하고 있고, 중국 대학입시에서도 최근에는 해마다 전 성(省) 장원(수석)을 배출하고 있다.) 위 사실로 볼 때 조선족에 대한 국내의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그리고 지금의 한국인들은 그들을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보다는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인식의 틀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나, 문제는 한국 내에 있는 조선족들의 낮은 소득과 정치적 입지에 따라 인터넷의 가상공간 등에서 일종의 조선족 게토(ghetto)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한국 네티즌들은 그동안 온라인 게임이나, 보이스 피싱 등의 주제를 통해 조선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백청강이 대중문화의 전면에 출현함과 동시에 같은 처지의 조선족들이 인터넷 공간에 나타나자 그들을 인터넷 게시판과 소통공간에서 배제시키려는 적개심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지리학적인 용어로서의 기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