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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 전기의 지배층 요약 평가C아쉬워요
    당 전기의 지배층문화인류학과061664 정태진Ⅰ. 序 言수당의 사회를 중국사에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라고 하는 과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2가지의 방향에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 하나는 ‘당 송의 변혁’을 전제로 하여 송대 이후와 비교하는 관점의 방향으로 여기에는 당조 율령체제의 붕괴에 초점이 두어져 이 시기를 중국사상의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중세에서 근세로의 이행기로 볼 것인가의 이른바 시대구분의 논쟁이 큰 비중을 차지하여 왔다. 또 하나는 수당제국의 성립의 근거를 통하여 이 과제를 해결하려고 한 바, 여기에는 남북조 이래의 귀족제의 변질과정이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Ⅱ. 隋唐貴族制論의 檢討수당대를 고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중세로 볼 것인가의 시대구분에서 상반된 견해의 표출은 황제지배의 전제적 특질과 당시 지배층으로 인식되고 있는 귀족의 사회적 특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비롯한다. 이른바 ‘귀족즉기생관료론’과 ‘중세귀족제사회론’이 그것이다.수당대가 귀족제사회라는 이론은 일찍이 내등호남의 “육조시대에서 당의 후기까지는 귀족제의 시대이다”라는견해가 계속 보강되어 온 이른바 경도학파의 학설이다. 그러나 ‘귀족’의 정의와 ‘귀족제’의 본질적인 구조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가 전혀 없이 귀족대관이 당시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관념적인 면만으로 위진남북조, 수, 당 시대는 귀족제사회라고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왔다.그러나 귀족제 시대를 ‘육조에서 당까지’라고 하여도 귀족제는 그 가운데서도 위진남조 북조 수 당의 시대에 따라 각각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현실을 반영하여 그 성격이 다양할 것이기 때문에 귀족제사회의 구조와 내용을 일층 심화하면서 대국적인 서술을 보여야 하였던 바 이의 역저가 궁기시정의 이다.귀족제를 군주권을 기반으로 하는 관료제와 대립시켜 논술하고 북주정권이 종래의 귀족주의를 배척하고 군벌적 관료주의를 지향하였으며, 수도 북주를 계승하여 북족적인 에너지로서 귀족제도를 파괴하고 당은 수를 이어 위진 이래의 중국적 전통인 력을 중시하는 나머지, 자칫 아시아적정체론으로 빠지기 쉽다는 점을 들어 국가권력 또는 황제권력을 고정적으로 파악하지 말고 그것을 내면에서 지지하며 또 시대의 진행과 함께 그것을 변질시키고 극복하는 동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지배층의 성격면에서 수당 전기가 전대에 비해 큰 변화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시대를 ‘후기 귀족제’, ‘군벌적 귀족제’, ‘신 귀족제’ 등의 용어로서 사설에 집착하려는 인상이 짙다. 남북조를 통일한 수 문제에 단행된 일대 정치개혁 즉 중정제의 폐지, 향관의 폐지, 지방행정기관의 개편, 자사의 병권회수, 지방장관의 벽소권 박탈, 지방관의 이부인선 장악, 지방관의 임기제 및 회피제 등은 남북조 이래의 귀족제 타파에 획기적인 조치로서 황제에 의한 군권강화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진정한 의미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모든 통치기구가 횡적 종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동일한 법령에 행정이 동시에 전국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운용되는 체제를 말한다. 당대 문서행정에 대하여는 서역고문서의 비교적 풍부한 관문서에서 폭넓게 연구되어 왔으며 당대 관문서의 엄밀성과 정확성은 전대에 유례없는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Ⅲ. 貴族의 宮僚로의 誘導1. 關中集團과 山東貴族당초의 지배층은 서위 우문태의 ‘관중본위정책’으로 규합된 관농집단으로 이들의 중심은 서위 이래 융합된 관농호한민족의 무력재지자들이며 황실 및 곤싱도 관농집단의 중핵의 팔주국의 후예들로서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이씨를 옹립한 것이다. 이연을 중심으로 태원에서 일어난 집단을 호족집단이라고도 하나 이연집단은 태원유수의 지위를 이요안 관료집단의 성격이 강하여 이점에서 당조는 수조의 성격과 본질적으로 틀림이 없다.일반적으로 호족이란 누세동거로서 결합된 종족의 혈연집단을 구심점으로 세력화된 것을 말하는데 이연은 태원유수로 주둔한 지 2년밖에 안되고 혈연이라야 부자밖에 없다는 점에서 호족으로 성장할 만한 시간적 혈연적 요소가 전혀 없다.당초는 아직도 위진남북조 이래의 문벌존종의 기풍이 강하게 타파의지는 산동귀족에 큰 타격을 준것만은 사실이나, 그 타격은 정치면에 한한것이고 사회적인 우월은 간단히 소멸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벌에 대한 일반의 존경을 당실 및 관인에 대한 존경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몇 가지 정책이 시도되었다.2. . 姓氏錄의 編纂당조에 들어와 문벌에 대한 관인우위의 시도는 태종 정관초의 씨족지 편찬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씨족지의 출발은 문벌의 부정에서였지만. 이는 문벌 그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산동사성과 같은 특정의 귀족을 부정하는 전제 위에 일체의 문벌을 군권하에 두어 당조에 의한 새로운 귀족제의 정립과 질서확립을 꾀한 것이다. 따라서 시족지 편찬의 본래 이념인 문벌 부정의 본격적인 구현은 무후가 들어선 이후 추진된 현경 4년의 성씨록에서부터이다.철저한 관위본위에 입각하여 편찬된 성씨록은 사족들, 특히 산동귀족들에 불신되어 훈격으로 비난되었고 씨족지가 당시 각계사인을 망라한 고위관료에 의하여 찬정되었음에 비하여 성씨록은 하급관료들이 맡았기 때문에 더욱 더 불신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후가 들어선 고종조에도 관위우위의 원칙을 성씨록의 편찬으로 유도하려던 정책에도 불구하고 사족들간의 산동귀족에 대한 상혼은 여전히 계속되었다.씨족지 성씨록 등의 편찬 그 자체가 무너지지 않는 귀족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러한조치는 주로 죽은 조선의 신불겨정으로 나타난 것이며 산동귀족이 정치생활을 하는데 실질적인 참여를 가로막는 것은 아니었다.남북조 이래 국가공권에 의한 씨족 문벌의 흠정이 계속행하여지고 그때에 따라 사회에서 운위되고 있는 문벌의 기준이 달라져 왔다는 것은 사회변동이 극심한 상황하에서 문벌의 급격한 승강의 지위의 불안정을 보임과 동시에 국가권력의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그 시점에 따라 씨족 문벌에 대한 대응책을 실시하여 귀족사회의 자립성과 독자성을 크게 제약하였다.이러한 작업은 당초에 적극적인 의지로 관철되엇고, 특히 무후기의 성씨록에서 보인 관위우위의 정책은 귀족의 관료로의 유도에 결정적인 촉진제가 되었다.의 정치면에서 이탈을 추진하였던 바 이제 귀족들은 관위에 집착하지 안을 때 귀족으로서의 지위와 조락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재력이 없는 한 서인의 과거등제는 매우 힘든데 반하여 귀족은 일반인이 구해 볼 수 없는 서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 수학하기 위한 재력의 배경도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문벌귀족이 받았던 물적 조건을 크게 인정해야겠지만 문벌 그자체로서 득관시키지 않음으로써 과저제가 문벌귀족제의 타파에 큰 작용을 하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조의 과저제의 의의를 크게 인정하면서도 당조를 귀족제사회로 파악하는 견해 가운데는 과거등제자가 대부분이 귀족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어느 역대 왕조건 과거등제자는 특권계급의 전유물이다시피 하며, 당조의 귀족은 전대와 같은 문벌에만 의존하던 계급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또한 당조의 과거에 등제하여 고위직을 점한 구 귀족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모두 남북조 이래의 문벌귀족의 정통혈족이었는가도 문제가 된다.문음출신제도는 사실상 남북조 사족정치의 유습으로 고종초까지는 입관의 대종으로 성행하였으나, 무후 등장 후 문음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관중집단의 대관이 많이 몰적되었으며 문음의 3코스 모두가 쇠약하여졌다. 즉 한 대 낭관의 유업인 시위코스가 문관우위책에 따라 점차 미약해지고 예관코스도 과거출신자의 우대로 침체되었으며, 학관코스도 경학 경시의 풍조로 하락되었다. 특히 시문 위주의 과거제 융성으로 경햑의 전당인 각종 학교가 황폐화하고 귀족자제들은 학업을 버리고 보다 편이한 방법으로 출신을 얻으려고 광분함에 따라 학관의 존재가치마저 땅에 떨어졌다.이와 같이 사관의 방도에서 문음의 평가저하는 과거출신자가 관료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여 가고 있던 당시의 현실에서 더욱더 조장되었다. 곧 인물평가의 기준이 문자나 부조의 음이라고 하는 것보다 개인의 재질이나 능력에 그 비중을 두어가고 있음을 뜻한다. 무 위후 때 과거등제자는 중서사인 같은 문필직과 간의대부, 습유, 보궐 등의 언관 및 어사 등의 이른바 청요직을 점었다.원래 관제에서는 문음출신을 대량으로 중앙관서의 중간층인 6~8품에 진출시켜 기존 정치집단의 존속을 꾀하는 한편, 과저로서 소수신인을 등용하여 지방하료직에 보하려 하였는데 이러한 본 의도와는 정반대의 현상을 일으켜 과거가 중시되고 문음이 경시받게 되었다. 문음을 주로 하고 과거를 종으로 한 귀족제적 율령관제가 무위후기에 들어와서 주 종의 원칙이 전도되었음은 확실하며 이는 곤 관중본위의 관료귀족제를 기초로 한 율령관제의 현실과의 괴리를 의미하는 것이다.무 위후조에 시문의 융성과 함께 진사과가 이토록 존중됨과 함께 부화경박한 기풍도 크게 일어나 선거가 크게 혼란하였음을 지적하기도 하나, 이는 진사출신자들의 우대를 기존영역의 침탈로 생각하는 구관료귀족계의 반발에 지나지 않는다.이와같이 당조에 들어와 귀족의 관료로의 유도책이 여러 가지로 강구되었고 특히 무위후조의성씨록 편찬이나 과거의 중시는 이러한 방향으로의 유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리하여 귀족은 종래 문벌에 의한 사회적 존경에서 관위에 의한 정치적 평가로 전환되었으며. 아울러 관위로 향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관료제의 기반이 넓게 형성되었던 것이다.Ⅳ. 新興宮僚의 擡頭서민들의 관료에의 진출은 육조 문벌귀족사회에서도 귀족억압이라는 황제의 의사와 귀족의 사회적 압박에 대한 한인의 적극적인 권력욕구가 결합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인이 서민인가에 대하여는 견해가 일치하진 않지만, 문벌귀족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존재였기 때문에 황제를 배경으로 한 한인의 권력에의 접근은 공명부화한 귀족사회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관료기구로의 서민의 진추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현상이겠지만, 당대의 서민의 진출은 한인출신이 관료계에 진출하는 남북조시대와는 성격이 다르다. 남북조의 귀족제적 신분사회는 엄격한 사서의 신분을 기초로 한 것으로, 한인은 몰락한 하급 사인도 다수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 서민은 아니었다. 당대는 양 천의 신분제 사회로서 관인도 서민도 양인에 속하는 부류였기 때문이다.당의
    인문/어학| 2011.11.30| 6페이지| 1,000원| 조회(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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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루맛쇼`비평
    영상인류학의 이해- ‘트루맛쇼’를 보고어떠한 글 혹은 영상을 비평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혹은 선행해야할 것은 바로 글과 영상이 어떠한 형식으로 만들어졌는가를 알아야한다. 형식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고서는 비평이나 평론을 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내가 본 “트루맛쇼”의 경우에는 다큐멘터리이다.그렇다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첫 글에서도 언급했다싶이 우선적으로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고 넘어가야할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때때로 사회적인 주제를 사용하고 개인이나 단체의 실제 생활이나 사건에 기초를 두는, 또는 어떤 현상에 대한 분석에 기초를 둔 영화물이나 라디오·텔레비전 프로그램이다. 미국의 연방통신위원회(FCC)는 “뉴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 정치, 경제문제 등 과거의 사건을 자료로 삼아 극화하지 않고 다루는 형식인데 일반적으로 필름과 테이프를 많이 사용한다.”고 다큐멘터리를 정의하고 있다.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두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좁은 의미로는 시사적인 사회문제를 다룬 정보 프로그램을 말한다. 사회적으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대중설득을 통한 교정(矯正)적 행동을 이끌어 내는 것이 목적이다. 넓은 의미에서 다큐멘터리는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프로그램까지 가리키며 역사적, 전기적 또는 자연관찰기나 여행기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에서 사실적인 내용을 담은 필름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이제 다큐멘터리의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았으니 비평해야할 ‘트루맛쇼’의 내용적인 면을 살펴보자.‘트루맛쇼’의 경우 제작자인 김재환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처음 만들 때부터 를 생각했습니다. 영화관에서 관객이 일어날 때 를 보면서 가졌던 생각을 다시 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를 보면 트루먼이 진실이라고 믿는, 크리스토퍼 피디가 만든 가상 세계가 나옵니다. 에서도 시청자가 진실이라고 믿지만, 실은 제작사와 방송사가 온갖 가짜를 동원해서 만든 '맛집 방송'이라는 가상 세계가 나오죠. 다만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더 만들었습니다. 이 가상 세계로 시청자를 속이는 세계를 또 촬영하는, 우리가 만든 식당이라는 또 다른 가상세계가 있죠. 결국 방송사가 에서는 트루먼의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내용이나 소재는 어느 정도 다를지라도 다큐멘터리의 구성이라던지 혹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트루맛쇼의 제작자인 김재환 감독의 경우에는 영화 초반부에 말했다싶이 ‘역지사지 프로젝트’ 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제 1편으로서 ‘트루맛쇼’를 제작했다고 했다. 아직까지 이러한 프로젝트가 없는 만큼 매우 큰 반향을 일으킬 꺼라 예상된다.방송 3사는 아주 강력한 지배력을 갖고 있다. 한국사람 누구나 Tv를 보게 된다. 특히 방송이라는 것은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적인 특징을 가진 매체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맛’이라고 하는 것은 미각적인 요소로 결국엔 이 요소는 청각과 시각을 통해 조작과 가능성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방송사가 맛을 시각과 청각적인효과로 활용해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는 ‘맛’의 상실이 된다는 점이다. 요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맛’이라는 조건이 말이다.가 개봉되고 나서 이 조그만 영화는 공정함을 대표하는 방송3사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설마 사실일까' 하던 일들이 적나라하게 영화에서 드러났다. 음식점들은 1000만 원의 출연료를 브로커에게 건네고 방송에 '맛집'으로 포장돼 나온다.그 결과는 영화의 내레이션처럼 "TV에 나오는 맛집이 왜 맛이 없는지"로 드러난다. 어떤 가게는 익혀서는 안 되는 캐비어를 버젓이 불에 구워 삼겹살과 함께 내놓고(심지어 가짜 캐비어였다), 방송에서 위생불량으로 걸린 돈가스집은 곧바로 소문난 맛집으로 다른 방송사 교양프로에 소개된다. 돈만 주면, 어떤 식당이든 전국 최고의 명소가 된다. 이게 한주에 177개의 맛집, 1년으로 환산하면 무려 9229개의 식당이 '맛집'으로 지상파 3사 방송에 나오는 원리다. 맛집 프로그램에 맛은 없었다. 당황한 문화방송(MBC)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으나 법정서 패했고, 한국방송공사(KBS)와 서울방송(SBS)에서는 맛집 프로그램이 줄어들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영화에서 나온 문장 그대로 '역지사지 퍼포먼스'가 일어난 것이다. 항상 '까기'만 하던 방송사가 구차한 돈벌이 수단을 폭로당했다.우리는 브라운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수많은 광고, 홍보들에 노출된 채 머리로는 생각하거나 의심의 여지 없이 보이는 것만 믿고 있는 '병'에 걸려있다. 대한민국 미디어를 이끄는 KBS, SBS, MBC의 방송 3사에서는 각각 '맛 집'에 관한 프로그램들로 부터 시청자들의 수신료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TV를 본 후, 맛 집 애호가 라던지 여타 시청자들은 그 맛 집을 자연스레 찾아간다. 찾아 가서, 그 메뉴를 찾거나 방송에서 노출된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은 현재, 판매되지 않는 메뉴이거나 맛이 지지리도 없다. 왜 그럴까, 그렇다면 이 방송은 100% 방송사의 조작이거나 사기 치는 인터뷰어 들이 만들어낸 '거짓 혹은 과장' 이라는 결론이다.?그래서 의 감독, 김재환은 상당한 자비를 털어 라는 음식(분식)점을 일산에 오픈한다. 말도 안 되는 맛을 내는 맛 없는 맛 집으로, '맛 없는 맛 집' 이라는 말이 어폐가 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말은 방송 3사를 통해서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철저히 '영화만을 위한 맛 집, 맛 Taste'는 철저히 방송 제작자들을 속이기 위한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맛?Taste'는?제작자들을 속이는 '몰래 카메라 현장'이다. '맛'에서는 청양고추로 범벅된 말도 안 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니 상상조차 하기 싫은 먹거리를 내놓는다. 청양고추를 무식하게 썰어놓은 돈가스, 육안으로도 청양고추가 살아서 꿈틀대는 기분이 드는 듯한 돈가스가 주 메뉴다. 맛이 '방송을 타기 위해서' 몇 백에 달하는 비용을 방송국(혹은 홍보대행사)에 제공한다. 그러면, 방송의 일정이 잡히고 작가는 음식점에 전화를 걸어 방송을 위한 '뻔하디 뻔한 연출'에 필요한 '요청'을 한다. 가령, 그 음식점에 독특한 메뉴가 없다거나 별 다른 메리트가 없어 방송의 시청률이 떨어지려 하면 작가들은 신 메뉴를 '일시적'으로 개발한다. 에서는 대표적인 일례로 캐비어 삼겹살을 언급한다. 이후, 그 메뉴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 메뉴는 '일시적인 특별 시즌 메뉴' 였다고 발뺌한다. '방송을 위한 메뉴' 였을 뿐. 결국, 방송을 기획한 브로커 PD의 말도 안 되는 신 메뉴 개발이었다는 것. 그 신 메뉴의 맛은 보장되지 않은 것이며 머릿 속에 맴도는 시나리오일 뿐이다. 즉, 방송에서 필요한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 상상임신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상상음식이란 말은 처음 들어본다. 캐비어와 삼겹살의 궁합은, 캐비어의 고장에서는 용납이 될 수 없는 것. 캐비어-철갑상어 알의 가격은 상당하다. 하지만 캐비어 삼겹살에 듬뿍듬뿍 올라가는 인심 좋은 사장님께서 쓰는 캐비어는 '생선 알'에 불과할 뿐이다. 몇 통에 몇 천원밖에 하지 않는. 또한 캐비어를 주 재료로 사용하는 외국의 셰프는 삼겹살과 캐비어가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경악 한다. 캐비어는 차갑게 요리되어야만 하는 재료인데 말이다. 우리나라 인심 좋은 사장님들과 PD들, 작가들이 개발한 메뉴 덕분에 왠지 외국인 셰프에게 '창피하고 부끄러운 기분이다. '맛 Taste'의 요리사는 요리를 만들면서도 '이것을 먹을 수 있을까' 라고 의심하며 "방송이 사기 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라는 말을 한다. 이 말도 되지 않는 청양고추 범벅 돈가스는 방송을 통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도 좋고 맛도 좋은, 그래서 마니아층이 많은 기막힌 음식'으로 변질된다. 방송사들은 요리를 개발하고 조리한다. 맛있는 것처럼 만들어내고 온도도 뜨끈하며 포장도 기막히게 해댄다. 방송을 '탄' 이후, 그 '흔적'을 남기기 위해 기념액자와 플래카드 등을 걸어놓는 것. 그것이 원칙이다. 그 가격 또한 방송사 및 홍보대행사에서 미리 정해두고 음식점에게 돈을 '뜯어 낸다'. 각종 음식점들은 자신들의 메뉴들이 주요 방송 3사에 등장했음을 토대로 '허세 아닌 허세'를 부리며 기세등등 이다. 왜, 장충동 족발 동네, 신당동 떡볶이 촌을 가면 연이은 점포들이 서로가 자신들이 '원조' 이며 '방송사 출연 횟수'를 따져가며 말도 안 되는 기 싸움을 벌이지 않는가. 돈 몇 백에서 천 만원 남짓의 비용만 투자하면, 당신도 방송을 살 수 있고 맛대가리 없는 실력을 만 천하에 선보일(?)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미식전문가들과 외국에서 긴 유학생활을 해온 셰프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맛 집 다큐멘터리, 혹은 VJ 물의 형식 혹은 각본은 아주 뻔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다녀 본 다양한 레스토랑 및 음식점에서 '정말 맛 집'으로 추천할 만한 곳은 서울 시내에서 고작 2~30곳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독후감/창작| 2011.11.01| 4페이지| 1,000원| 조회(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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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계사회의 여성과 남성
    서론1. 모계사회의 이모저모남성의 권위나 지배 · 관리권이 분산되어 버리는 모계사회에서는 어ㄸ?ㄴ 방법으로 고정된 사회집단을 형성할 수 있을까? 우선 남성이자신의 권위를 행사함에 있어서 갖아 중요한 것은 거주 문제이다. 즉 혼인을 한 후 남성이 어디에서 거주하느냐의 문제이다. 대체로 부계사회에서는 부방거주, 즉 여자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혼인을 행한다. 이에 비해 모계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거주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첫째로 아내방문혼인데 혼인을 한 후 신랑이 밤마다 신부 집에 가서 아침이 되면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거주 방식이다. 이 경우에는 남편의 경우 평생 동안 이런 식의 방문을 계속하면서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이 생겨도 자식에 대한 교육적 · 경제적 책임을 전혀지지 않는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집에서 모계종족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즉 자식들은 모계종족의 토지에서 수확한 식량으로 어머니 형제를 비롯한 모계종족들에 의해 양육되는 것이다.둘째는 모방거주 즉 처가살이혼인데, 이는 모계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거주방식이다. 이 경우 모계사회의 사위는 상당히 열등한 지위에 놓여있으며 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유대관계도 미약하다. 따라서 모계사회는 아버지 및 남편으로서의 남성의 체면이 서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셋째는 부방거주, 즉 시집살이혼의 거주 방식이다. 이 거주방식에서는 남녀 모두 아버지의 생가에서 태어나 아들은혼인을한 후에도 그 곳에서 계속 살며, 딸은 남편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만약 모계사회에서 이러한 거주방식을 채택할 경우 모계종족의 남녀가 분산해 버리기 떄문에 종족의 재산을 관리 · 운영할 사람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모계사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남성은 혼인을 하면 자신의 모계종족거주지로 옮겨가는 거주규제를 취하고 있다.모계사회는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와 외삼촌, 그리고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친자식과 생질과 생질녀이라는 중층적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성립하고 있다. 모계출자는 남성이 자신의 자식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자식들을 다의 권한 아래 둔다는 조건에서 이라는 형태로 미크로네이사의 독립을 승인 했다.3) 미크로네이사의 국가건설미크로네시아 의회는 1975년에 국가건설의 기본이 되는 헌법초안을 완성시킴으로써 400여년간에걸친 외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했다.국가 건설에 착후라 당시 섬사람들은 해양통일국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희망과는 달리 미국은 극동군사전략에 있어서 주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라는 기준을 세워서 이들 지역들을 갈라 버렸다. 사이판을 중심으로 하는 마리아나의 섬들은 티니안, 사이판에 미군기지를 건설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안정된 재정원조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의 자치령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 섬들은 라는 이름으로 다른 섬들과 결별하게 되었고 그 외의 지역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1978년 실시된 헌법초안의가부를 결정하는 주민투표를 행한 결과 3개의 정치단위로 분열해 버렸다.미크로네시아는 100년이라는 기간동안 볼 때 스페인, 독일, 일본 그리고 미국이라는 네 나라에 의해 지배당해왔다. 더욱이 이들은 통치자가 바뀔때마다 서로다른 제도와 사고방식을 강요받아 왔다. 그리고지금 겨우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단계에 와 있지만 외국어선의 입항료와 코프라의 수출만으로는 국가의 재정적 독립을기대하기 어렵다. 이렇듯 산업기반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는 경제적 기반의 모든 것을 미국을 비롯한 외국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6.미크로네시아와 나필자가 처음으로 미크로네시아를 방문햇던 것은 1974년 여름이다. 지금의 미크로네시아 연방 트루크주의 낙도 우르르 섬에서 4개월을 지냈는데 그 목적은 이듬해 외나와에서 개최된 국제해양박람회의 정부출전관에 전시할 민족표본자료의 수집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트루크는 직경 50Km 길이의 환초에 둘러싸인 화산군도로 이루어져 있다.1) 섬사람들의 일본인관섬사람들 , 섬의 장로들 눈에는 필자의 모습이 아마 전쟁 전의 일본의 강한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비쳐진 느낌이다.2) 조사지로 가는 길미크로네시아는 야프섬을 제외하면 모두가 이라 날은 공동어로작업이 없어도 아침 7시경부터 소형카누를 타고 산호초부근에서 잠수하여 작살이나 무거운 낚시 추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는다.카누가옥에서는 손도끼로 카누의 노를 만들면서 고기잡이에서 있었던 일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의 잡담을 나누고 오후 6시 무렵 아이들을 데리고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가족단위로 모여서 빵열매를 쌓아 만든 요리와 삶은 생선을 먹는다.⑵야자술과 코프라빵나무열매가 열리지 않아서 타로와 저장용 마르만을 주식으로 해야 하는 10월에서이듬해 3월까지는 북동 무역풍이 강하고 비오는 날도 많아져서 남자들이 고기잡이에 나가는 날은 일주일에 하루나이틀정도이다. 즉 이 때는 음식이 부족해지는 시기인 것이다. 이 때문에 하루에 타로 2개로 버티는 날이 계속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추장은 남자들에게 야자의 새순에서 액즙을 채취하는 허가를 내린다. 이 액즙은 로 불려지는 흰색의 달콤한 음료로 어린아이나 여성들이 상당히 좋아한다.남자들은 빵나무가 열리지 않는 시기에는 고기잡이보다도 육지에서의 생산활동에 임한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술자리를 벌이기 때문에 실제로 일하는건 오전뿐이다.코프라는 잘 익은 야자열매 속에 붙어 있는 과육이다. 코프라에는 양질의식물성 기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있어서 일본으로도 대량 수출되고 있다. 코프라를 만드는 날에는 야자나무 잡초를 제거할 때 숲 속에 모아 둔 야자열매를 집으로 운반해온다. 이 야자열매를 반으로 갈라서 열매 속에 들어있는 과육을 깍아낸 다음 4일 정도 햇볕에 말린다. 코프라를 만드는 작업은 푸코스의 2~3채의 집이 한 조가 되어 진행한다.코프라를 사러 오는 배는 1년에 4~5번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코프라를 팔아서 손에 넣는 현금은 많아야 300달러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코프라가 유일한 환금작물이며 그 외에 현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다만 현금이 필요할 때는 자신과 아내의 모계종족의 사람들에게 협력을 구하면 된다.⑶항해자사타와르남성들이 무인도에까지 고기잡이를 하러 을 두르기 시작하고 동생들을 돌봐준다. 또한 어머니와 이모들과 함께 숲에 가서 모계종족의 재산인 야자나무숲과 타로밭의 경계를 익혀 두기도 한다.여자아이는 초경 전에 파초포를 짜는 기술을 몸에 익히는 것이 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또한 모계종족의 남형제에 대한 예의범절 등도 상세히 터득해야만 한다. 즉 유아기까지 함께 놀고 지냈던 오빠에게 경어를 사용한다든지 혹은 오빠 앞을 서서 걸어서는 안되고, 오빠의 소유물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등의 금기사항을 배운다.또한 남자아이들은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고기잡이나 다른 섬으로 카누항해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잠수하는 법, 물고기를 찌르는 법, 통발을 치는 법, 카누의 조정법 등 바다에서의 엄한 훈련을 받는다.부모들은 모든 자식들에게 섬생활에 필요한 기술이나 기초적 지식을 가르치지만, 항해술이나 카누제조법 등에 관한 전문적 지식은 의욕과 소질을 가진 아이에게만 가르친다. 즉 전통적 지식을 계승할 능력을 갖는 아이에게만 을 시키는 것이다.샤타와르 섬에서의 자녀교육은 산모의 태교에서 시작하여 자식을 응석받이로 기르면서 어린이를 자신들의 세계에 방임해 두는 시기, 그리고 어른들의 세계에 합류시키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시기로 구분되어 있다.⑸ 성인의례(성인식)소녀가 12 · 13세경이 되어 초경을 맞이하면 일정기간동안 월경가옥에 격리된다. 초경을 하고 있는 소녀는 월경가옥에 머물면서 하루에 세 번 바닷물에서 목욕을 한느 것 외에는 오두막 안에서 누워만 지낸다. 특히 월경 중의 여성들이 흔히 하는 돗자리나 허리천을 짜는 일은 초경의 소녀들에게는 금기로 되어 있고, 식사도 시중든 사람이 해주는 음식만을 먹는다. 이런 식으로 5일간을 월경가옥에서 지낸다. 6일째 되는 날 바다에서 목욕을 하고 울금가루로 화장을 한후 월경감옥에서 나온다. 마을 경계점에서 소녀를 맞이하는데 소녀가 도착하면 라는 의례가 행해진다.소녀들에 비해 소년들은 특정한 성인의례를 행하지 않는다. 다만 소년의 아버지가 아들이 고기잡이, 야자나무나 빵나무의 손질리 자신이 혼인해서 들어온 아내의 모계종족에서는 로서 아내의 남형제와 손윗 사람들의 지배 아래 놓여지며 오로지 아내의 모계종족을 위해 으로서의 지위에 만족해야만 한다.4) 이혼사타르사회에서의 이혼은 아내가 남편을 쫓아내든 남편이 스스로 떠나가든 일단 별거생활을 거친 후에 성립한다.이때 두사람 중에서 먼저 재혼하는 쪽이 배우자 혹은 배우자의 모계종족에게 허리천 30장을 지불하면 두 사람의 이혼은 사회적으로 승인된다. 이러한 이혼대금은 라고 불려지는데 이것은 별거생활을 시작하면서 지불되지는 않는다. 즉 별거한 부부가 다시 합칠 의사가 없어도 일정 기간의 별거생활을 한 후에 르와르를 지불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있고 설사 외도가 이혼의 원인이 되어도 르와르는 의도를 한 당사자가 배우자에게 지불하는 위자료는 아니다.5) 간통사타와르사회에서 을 가리키는 라는 말은 라는 의미이다. 는 을 의미하는데 , 여기에 목적어로 사람의 이름이 오면 혼외성교를 가리킨다. 그런데 혼외성교를 해도 이혼으로 연결되지 않고 설사 그 현장이 들켜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사회적 제재를 수반하는 성관계 즉 간통이란 기혼자끼리 결혼을 목적으로 행하는 성관계, 그리고 특정한 관계 등에 있는 사람의 배우자와의 성관계 혹은 혼외성교에서 아이를 임신했을 경우를 말한다.5. 죽음와 의례1) 재앙의 현대적 해석부상에 의한 죽음, 잇따른 죽음, 그리고 아기의 갑작스런 경련에 대한 사타와르 사람들의 대응방식은 그들이 크리스트교와 근대적 의료기술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이 바로 최근까지 전승해온 을 상당히 중시하고 있다. 또한 그 지식의 대부분은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타와르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종교에 강한 집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 생명관사타와르 사람들은 인간이 살아있는것은 어떤 영적 존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영적 존재는 사타오르로 군이라 한다. 군은 형체를 갖고 있는데 그의 형상은 군이 깃들어 있는 사람의 모습된다.
    인문/어학| 2011.11.01| 24페이지| 1,0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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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원화 시대의 민족문제
    다원화시대의 민족문제목 차Ⅰ. 서론1. 연구배경 및 목적2. 티베트의 특성과 생활양식1) 자연적 특성2) 생활양식⑴ 의식주⑵ 가족관과 결혼제도⑶ 출생과 죽음의 의식Ⅱ. 본론1. 티베트 불교의 형성과 토착화1) 티베트 불교의 형성과 특수성2) 티베트 불교의 토착화2. 티베트의 독립분쟁1) 중국의 대소수민족 정책과 티베트⑴ 1959년 민주개혁 이전의 티베트의 모습⑵ 중국 중앙정부의 티베트정책 및 효과2) 국제사회의 개입과 중국의 대응⑴ 국제사회의 티베트지지와 중국 대응의 사례1- 2008년 ‘3.14’ 시위의 전개⑵ 국제사회의 티베트지지와 중국 대응의 사례2- 북경올림픽 보이콧 선언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1. 연구배경 및 목적티베트, 즉 중국공식 행정구역 명칭인 西藏 自治區(서장자치구, 이하 서장(西藏)))는 중국의 소수민족 자치구 가운데 하나이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중국의 행정구역 가운데 가장 먼 변방지역으로 주요도시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교통로는 극히 제한되어 있고, 한정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극도로 열악한 생산조건을 갖추고 있어 경제발달 정도가 낮은 수준인데 이는 다른 소수민족자치구에 비해서도 낮은 편이다.결국 티베트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특수성은 이 지역이 갖는 고유한 지역성에 근거하여 역사적으로 발달, 고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티베트가 갖는 자연환경과 종교, 독립운동 등의 전반적인 이해를 목적으로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2. 티베트의 자연적 특성과 생활양식1) 자연적 특성티베트의 자연환경에서 눈에 띄는 것은 평균 해발고도가 4,000m 이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원지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티베트지역 지형을 구분하여 보면, 남쪽 지역은 산지?호수?분지?곡지 지대로 히말라야를 낀 고산지대가 대부분이며 북쪽 지역은 고원 호수분지 지대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기후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티베트는 강수가 시기적으로 집중되며, 건조-습윤 계절이 분명하고 강수일수가 많으며 강수 강도가 약하고 야간에 않는다.따라서 그 토양적인 특수성을 감안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첫째, 인도불교를 모체로 하는 불교 그 자체이면서도, 원시 불교는 물론 동남아시아 일대에 전파된 소승불교 또는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진 대승불교와도 전혀 다른 독특한 형태로 전개하였다. 둘째, 티베트고원이라는 폐쇄사회에서 생겨나고 성장했다. 셋째, 정치와의 결탁이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에 비해 훨씬 심하다. 넷째, 활불사상이 존재함으로써 ‘라마교’라고 불린다.위와 같은 특수성에 입각해서 티베트불교가 ‘라마교’라 불리는 이유는 우선 티베트불교의 주술성에 있다. 주술성이 농후한 것이 밀교인데, 인도불교 최후기의 밀교사상이 직접 티베트에 도입되므로, 티베트불교의 중요한 특색을 이루는 근거가 된다. 또한 티베트인들은 토착종교인 본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토양에서 배양된 주술을 좋아하고 샤먼을 믿으며 때로는 마술을 좋아하는 민족성도 있기에 티베트불교는 밀교적 색채가 짙다.두 번째로 티베트인들의 라마에 대한 광적인 숭상이다. 불교의 삼밀귀의에 비해 티베트불교는 라마보를 추가한 사보귀의가 행해진다. 라마는 삼보와 신앙자간의 중개자로 숭배되며, 영원한 진리인 법도 스승인 라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앙자와 결부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은 삼보 이상의 존재로써 라마보를 중시한다. 원래 라마란 스승, 선지식 또는 선우의 뜻으로, 교법을 신앙자에게 교시하는 자인데, 결국 삼보의 총합체, 삼보 이상의 존재로 승화한다.세 번째로 라마 내지 라마에 대한 특이한 신앙이 결국은 티베트불교의 독특한 활불사상을 만들어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전생이 활불사상을 낳은 사상적 배경이다. 영혼 자체가 다른 육체로 전생한다는 사상은 불교의 삼신설의 응신과도 다른 티베트불교의 독특한 것이다. 이 전생사상은 본교의 영혼부유설과 유사성이 있다.네 번째로 활불사상의 사회적인 구현으로 종교가 정치와 결합하였다는 것이다. 달라이라마를 정점으로 하는 법왕제는 티베트의 독특한 통치형태다. 달라이라마를 관음보살의부유설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특수 제도다. 티베트인들이 전통적으로 영혼불멸설을 믿기에 쉽게 토착화 하였다. 또한 티베트 왕조에 법왕 세 사람이 있는데, 송찬간포는 관음보살의 화신, 적송덕찬은 문주보살의 화산, 적조덕찬은 금강수보살의 화신으로 불린다.이 제도는 13세기말 카마카규파 창시자 뚜숨겐빠의 제자 깔마박히가 죽으며 자신의 전세를 예시하면서 시작했고, 겔룩파가 일어난 이후 흥성했다. 초기의 각 종파는 스승과 제자간의 계승이나 가족 세습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종카파의 개혁 이후 겔룩파는 승려가 결혼하는 것을 엄금했으니 재산과 학문을 계승시키려고 만들어냈다.티베트인들의 활불에 대한 독실한 신앙은 티베트의 정교합일 통치를 더욱 굳게 해줬다. 활불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는 달라이 라마와 판첸엘더니가 있다. 특히 달라이 라마는 종교지도자이며 또한 최고의 정치지도자다. 또한 티베트 보호신인 관세음보살의 화산이라 그의 법력이 무진장하기에 그에게 목숨 바쳐 충성해야 한다.1737년 달라이 라마 7세가 청나라 이번원에 올려 보낸 숫자만 보아도 매우 놀라울 지경이다. 그 때 달라이라마에게 속한 사원은 3150개소에 달하고 승려는 302560명이나 되었으며 그가 차지하고 있는 농노는 121438 가구에 달한다. 판첸에게 속한 사원은 327개소, 승려는 13670 명, 그리고 그가 차지한 농노는 6752가구에 달했다.⑸ 정교합일불교가 티베트 사회와 서로 결합하여 불교가 티베트화 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제도다. 송찬간포는 자신의 모습을 한 불상을 만들게 했다. 이것은 불왕합일의 불상이고, 신왕융합 혹 천왕합일의 관념으로 당시에 티베트 민중 사이에 유행하였고, 이것은 또한 고대 티베트인의 전통적인 제정일체 관념과 민간에 널리 퍼져있는 본교의 문화심리에 부합되어 티베트 민중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 불상은 티베트가 만든 최초의 불상일 뿐만 아니라 불왕일체의 관념으로 특별히 제작하였기에 티베트불교 역사상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다.이러한 불왕일체의 과념으로 인해 티베트. 그 사원의 경당에는 “티베트의 제일”이라 불리는 “포덕가룡” 불경이 있다.2. 티베트의 독립분쟁1) 중국의 대소수민족 정책과 티베트⑴ 1959년 민주개혁 이전의 티베트의 모습봉건제하에서 티베트의 농지와 농노의 최고 소유권은 티베트지방정부에 있었고, 티베트정부는 사원과 귀족이 중죄를 지었을 경우 그 토지와 농노를 몰수할 권한이 있었다. 몰수한 토지와 농노는 정부 임의로 처리했다. 이처럼 원칙적으로는 토지와 농노가 정부소유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불교사원, 궁가와 귀족 등 3대 영주가 티베트의 95% 이상의 경작지와 목장, 목축 등 중요 생산수단을 점유하는 동시에 농노의 인신을 점유했다. 3대 영주 중 사원은 가장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소유했다. 1959년이전 티베트의 사원과 상층 승려는 티베트 경작지의 약 37%를 소유하고 목축이나 목장 소유도 이와 비슷한 비율이었다.종교적 색채가 강한 티베트 정부 역시 종교사업에 막대한 지출을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사원과 상층 승려는 사회적 부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부의 최대 소비자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티베트정부는 티베트승들의 종교적 활동에 다음과 같은 지원을 했다. ‘티베트의 철방사(哲蚌寺), 색납사(色拉寺), 감단사(甘丹寺)등 3대 사원에는 16,500여명의 티베트승이 있었다. (哲蚌寺 7,700명, 色拉寺 5,500명, 甘丹寺 3,300명). 그 외에 라싸 부근의 기타 사원에도 약 10.000의 티베트승이 있었고 매년 藏力 正月 에는 라싸에 한달 동안 모였는데, 이를 "전대소(傳大昭)“라 했다. 1개월 동안 2만 이상의 티베트승의 음식은 완전히 티베트 지방정부가 제공했다. 2월초 2-3천명의 티베트승이 라사에 모였는데 이를 ”전소소(傳小昭)“라 했다. 이 집회시의 식량도 티베트 지방정부가 제공했다. 포탈랍궁에는 항상 5백여명의 티베트승이 거주했고 이들도 매년 대량의 양식을 소비했다. 티베트 지방정부 수입의 50%정도는 티베트승의 생계유지에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볼때 1959년 이전 티베트의 승려들은 정부로부차지하고 문교위생사업비 17%, 농목업 지원 및 공상업 지원 지출은 5% 미만이었다. 1959-1965년 사이에도 중앙 재정보조는 전체 티베트 지방정부 예산의 69%였다. 그러나 재정지출 내역을 보면 기본건설 지출 31%, 기업 유동 자금 지출 16%, 공상업 및 무역지출 11% 행정관리비 지출이 20%이다. 문혁기(1966-1976)에는 재정지출 중 기본건설비가 38%인데 반하여 사회복지비지출은 0.11%, 문교위생비 지출은 12%에 불과했다. 이런 시기별 자료를 기초로 볼 때 중앙정부는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티베트를 재정지원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앙의 재정지원은 그 사용에 있어서 티베트인들의 직접적인 생활향상을 위한 사회복지비나 농목업 지원비의 비중은 극히 적었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을 중국정부에 우호적이도록 하려는 경제적 지원의 효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개혁후 중앙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티베트에 재정적 지원을 할 것을 약속했다. 1984년 4월 중앙은 1985년 티베트독립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티베트에 인민폐47억元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또한 중앙과 북경, 상해, 산동성, 복건성, 사천성, 절강성, 강소성 등 9개 성, 시가 공동으로 티베트의 43개 사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1994년 1월에는 중앙 관련부문과 전국 각 성과 자치구가 공동으로 투자액이 23억元에 달하는 티베트의 62개 항목의 사업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개혁기에 강조되고 있는 위와 같은 경제적 지원이 티베트인들의 직접적인 생활향상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는 의문이다. 과거 중앙정부가 티베트에 제공한 재정보조의 대부분은 행정사업경비로 사용되었고 생산성 투자로 사용된 부분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개혁후에도 중앙의 재정지원은 주로 비생산적인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의 실질적인 소득향상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예컨대 개혁기 티베트의 행정관리비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기본걸설비에서도 비생산적 부분에 지나치게 투자되고 있다. 1984년 티베트와 전국의 기본건설 다.
    인문/어학| 2011.11.01| 20페이지| 1,000원| 조회(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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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목민에서 도시민으로
    1. 서론이 책의 서술은 지질학적 성분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19세기 생활양식, 그리고 식민시대의 농업 생산과 그에 따르는 생활방식, 가족집단의 형성과정이 전개되어 온 방식을 다루면서 오늘날의 이민취업이 어떻게 발전하였고 또 어떤 방식으로 재생산되는지를 설명하는 식으로 나아간다. 이어서 이민 취업이 고므라센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 놓고 있고 고므라센이라는 마을을 어떻게 또 다른 하나의 ‘도시’로 탈바꿈시키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2. 본론이 책에서 제목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목민의 정의는 일정한 가축을 방목하기 위하여 항상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이동생활을 하는 민족으로, 옛날부터 건조지대 초원이나 반사막지대에 거주한 민족이다. 이 책에서 이런 유목민을 ‘노마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기후에 맞게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정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또 시간이 되면 다른 마을로 떠나는 생활을 하였다. 정주민들은 이들에게 자신의 가축을 맡기는 것과 같은 호의적인 생활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호의적이고 평화롭게 살다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 사이에 피지배와 지배관계가 있기도 하였다. 노마드 부족들이 정주민들을 일방적으로 약탈과 굴욕적인 영토 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우리 나라 속담인 ‘머리 검은 짐승은 들이지마라’라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같이 평화롭게 지내기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방적인 약탈을 벌이는 경우도 많았던 노마들의 생활을 보면 말이다.이렇게 북아메리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후에 맞게 정주민들과 노마드의 생활들로 나누어 이분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프랑스령이 이들을 식민지 지배를 시작하면서 이들의 생활은 바뀌기 시작하였다.알제리와 저자가 조사한 북아메리카 남부 튀니지가 프랑스의 보호령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마드들은 자신들이 자유롭게 정주민들을 약탈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양식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가 노마들을 일정 지역에 정착시키기 위해 ‘농업개발’이라는 미명 아래여 경제적인 풍요를 얻고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도시노동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북아메리카의 혼인 체계는 이들의 생활양식을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이들의 혼인체계는 외사촌, 사촌들과 같은 친척들간의 결혼을 선호한다. 이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유목민에 의해서 정주민들이 공격당하고 약탈당했다는 것의 피해의식에서 생긴 결혼풍습이다. 집안의 여자를 모르는 사람, 타인에게 주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이 들은 사촌같의 결혼을 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친족도를 보면 거의 폐쇠적이다. 이러한 점이 혼인체계는 뒤에서 말할 이민취업에 커다란 발판이 되기도 한다.이 책은 2장부터 시작하여 7장에 걸쳐 이민취업이 시작된 계기, 이민취업이 가져온 결과, 이민취업이 만들어낸 재생산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내용을 이민취업에 국한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이 말은 이민취업이 북아메리카의 주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북아메리카 남부 마을 튀니지와 고므라센에 국한되어 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이러한 실정일 것이라고 생각된다.이민 취업이 나타나는 이유들을 살펴보면 프랑스의 정책으로 인해 유목민들이 정주민들이 살던 곳에 정착시키는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을 책임질 생활양식을 제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적인데 더 많은 인구를 먹여살려야 하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그 안에서 그들의 생활을 유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민 취업이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 보면 프랑스 사람들의 문화를 보고 그들 보다 선진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 그들의 문화를 닮아가려고 부를 얻기 위해 이민 취업을 한 것으로 이 책에서는 간주한다.이 지역에서 나타는 이민 취업은 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민 취업과는 다른 것 같다. 보통 이민 취업이라고 하면 자신의 국가 보다 경제적 형편이 높거나, 화폐가치가 높은 나라로 가서 공장이나 산업체에 들어가 육체적 노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 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나라의 이주민 노동나온 노동자들을 토대로 고므라센의 이민취업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차이에 대해 비교해 보았다.먼저 고므라센에서 이루어지는 이민 취업의 방법은 가족구성원을 통한 이민 취업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가족 구성원들 중 윗사람들이 먼저 이민을 가 그 곳에서 이민 취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성인이 된 아랫 사람들이 그들을 거들며 이민 취업에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민취업의 경우를 보면 그냥 아무 지식 없이 현재의 중소기업 인력난과 관련해서 중소기업에서 직접 채용한다. 즉,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이민 취업의 경우에는 아무런 연관성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취업만을 목적으로 온다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점은 또 있다. 그들의 취업하는 업종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고므라센의 경우에는 이민 취업을 나가 제과점같은 곳에서 일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이민 취업자들은 공장이나 산업체에서 일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이민 취업과는 다른 고므라센의 이민취업은 이런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은 가족을 부양을 목표로 그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재화를 벌러 다른 나라로 이민 취업을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면서 그들을 생각하며 재화를 벌어 가족을 기쁘게 할 날만을 기다린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일 것이다.고므라센의 이민 취업에 대해서 더 살펴 보자. 이들은 큰 도시 시장에서 그들의 과자엔 ‘베녜"를 판매한다. 이렇게 자신들의 자리를 잡고 먼저 이민 취업을 나온 사람들 밑으로 고므라센 사람들은 견습직, 봉급생활, 또는 동업자로 이민 취업을 먼저 시작한다. 견습직은 보통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고므라센 젊은이들이 친척이 운영하는 제과점에 위탁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국한하여 이들에게 기술을 배워간다. 그러므로 지금 받는 봉급은 없는 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습직을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봉급생활은 견습생의 단계를 지나 피고용인의 지위를 얻는 단계를 말한다. 처음 견습생활을 하던 제과은 관계를 유지 하다 보면 동업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동업인은 자유동업자 자본투자 동업자로 나뉜다. 자유 동업자는 재정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자유동업자의 지위는 안정적이지 못하지만 잘 될 경웨는 자유동업인에서 몇 년 후 자본투자를 하는데 참여할 자격을 얻는 투자동업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본투자 동업자는 두 사람이 이상이 사업자금을 대고 또 사업을 직접 경영하는 데도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가족집단과 지역집단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면 유대를 강화 시킬 수도 있고 고향마을에 남아 있는 집단 사람들과도 교통을 더욱 원할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이민 취업형태를 가지고 고므라센 사람들은 자본을 벌어드려 자신의 고향마을로 돌아간다. 그리고 벌어온 자본을 통해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면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기본 성질이다. 고므라센도 이러한 사람의 기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민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그들의 집을 호화스럽게 꾸미고 부자들의 마을을 만든다. 그렇게 하여 고므라센이 도시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이민 취업을 통하여 돈을 벌어와 자신들의 고향에서도 이러한 취업현상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즉, 마을에 경작지나 빈터로 사용하던 분지에 새 시가지를 만들기 시작함으로써 구지 이민 취업을 나가지 않아도 마을에서 취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고므라센에서의 건축붐은 이민취업자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행하는 재투자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지만 그들의 사회를 발전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갈망하던 도시 문화를 자신들의 고향에서도 이루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민 취업을 통해 벌어온 부를 마을에서 자랑하고 싶어서 건축붐을 일으켰지만 그 것은 곧 낙후되었던 고므라센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 일으켰고 농촌에 의지하면서 그렇게 부유하지않지만 생활고에 시 때문이다. 자신들의 삶이 너무 어려워 다른나라에 나가서 힘겹게 번돈으로 그들의 부를 자랑하는 면도 참 좋게 생각한다. 일한 만큼 자신들을 즐기게 하는 능력 그 능력은 어느 인간이나 부러워할 항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 마저 일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이들이 이렇게 이민 취업을 통해서 힘겹게 벌어온 돈을 흥청망청 쓰지는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책 도입부에 보면 이들의 결혼식을 할 때 쓰는 비용을 우리나라 돈으로 최소 450만원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치 스러운 생활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전통적인 혼례의 절차의 마지막 부분은 낙타를 타고 마을을 도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외제차를 이용하여 다른 집에 비해서 더 가격이 높은 차를 타고 마을을 돌아야한다는 결혼식의 풍조가 풍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부를 자랑하는 것을 떠나 별로 그렇게 좋은 행동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부를 창출한 사람들이 고용인력을 만들고 그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며 자국의 경제를 이끌어 가는 면은 좋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치품들을 통해 위계질서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전통적인 의미를 퇴색한다는 점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민 취업을 통해 벌어온 재화를 통해 자국의 경제 발전이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찬양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사치적 풍조로 사람들에게 위계질서를 심어주는 것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이런 나의 걱정은 고므라센에서는 이미 이루어 지고 있었다. 신흥부자들의 마을과 빈공층의 마을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렇게 이미 빈부격차가 시작 되고 있었다.이런 고므라센의 이민 취업은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프랑스의 이민법이 바뀌어 더 이상 할수 없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즉, 고므라센의 이민취업의 형식은 자신만 돈을 벌어들이러 외국에 나가고 가족들은 고향에 남겨두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민법이 바뀌어 자신뿐만다.
    독후감/창작| 2011.06.17| 5페이지| 1,500원| 조회(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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