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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월군 문화유적 조사보고서 평가A+최고예요
    寧越郡 文化遺蹟調査 報告書Ⅰ. 영월군 개관1. 영월의 수리적 위치...............42. 영월의 역사............5Ⅱ. 영월군의 문화재 현황1. 문화재 지정 목록 현황.........62. 지정 문화재 목록..6Ⅲ. 영월군의 문화유적1. 관방 유적1) 영월 정양산성(寧越正陽山城)......82. 불교 유적 및 유물1) 흥녕선원지(興寧禪院址)..............102)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123) 영월징효국사부도(寧越澄曉國師浮屠)...........134) 영월법흥사부도(寧越法興寺浮屠).145) 영월법흥사석분(寧越法興寺石墳).156) 보덕사적개요:정양산성(正陽山城)은 계족산(鷄足山) 서남쪽 봉우리에 위치한 포곡형석성(包谷形石城)이다. 산의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해발 564.9m의 가장 높은 부분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진 경사를 따라 내성(內城)이 지어져 있고, 보다 서북쪽으로는 외성(外城)이 축조(築造)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내성의 서쪽 부분 밖으로 외성이 연장(延長)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내성과 외성의 둘레는 각각 약 1060m ? 570m로서, 자연 석벽으로 이용해 축조된 곳을 제외하면 약 1.3km에 이르는 규모이다. 성의 높이는 4m~11m로서 대체적으로 지형상 계곡처럼 파인 부분은 높고, 자연 단애 위에 성벽이 축조된 곳은 낮은 편이다. 정양산성은 남한강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영월로 진입하는 모든 움직임을 손바닥처럼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아울러 이곳을 중심으로 태화산성, 대야산성, 온달산성, 완택산성 등이 연결되어 있어 삼국시대 항쟁의 중심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정양산성의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화유적총람』에 거란국(契丹國)이 자주 침입하므로 고려(高麗)의 장군 왕검(王儉)이 축성(築城)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로 미루어 왕검성(王儉成)의 유래를 찾기도 하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정양산성을 정양산석성(正陽山石城)이라고 하고 둘레가 798보(步)이며, 성 안에 샘이 한 개 있고, 창고가 5칸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와 같이 정양산성은 예로부터 정양산석성과 왕검성 등으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삼국시대 영월은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접경지역으로서,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자 했던 삼국의 각축이 있었던 곳이다. 초창기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을 당시 내생군(奈生郡)이라 하였다가, 훗날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내성군(奈城郡)으로 개명되었다. 개명에 앞서 신라는 이미 진흥왕(眞興王) 때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영토를 넓혔는데, 동강(桐江)과것으로 보건대, 이 부도 역시 이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을 기본으로 삼았고 2개의 방형 판석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건립되었다. 지대석 위에는 팔각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는 연화대석(蓮花臺石)이 놓였는데 하대의 각 측면에는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연화대석에는 복련(覆蓮)이 돌려져 있고 각 우각마다 입사귀모양이 새겨져 있다.상대석의 상면은 원형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아래쪽에는 팔각의 괴임이 있고 그 위로 측면에는 연꽃무늬가 이중으로 조각되어 있다. 원형의 상면 중앙에는 팔각의 높직한 각형 받침을 새겼다. 탑신은 배가 부른 팔각 모양으로 전후 양면에는 묘비가 모각되어 있으나 그 밖의 다른 면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그 하면의 중심부에는 높직한 팔각의 괴임이 조각되어 탑신 상단부와 맞도록 되어 있다. 낙수면(落水面)은 밑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완만해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평범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옥개 정면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그 위에 1단의 각형받침을 새겨 팔각의 간석을 놓고 그 위에 보개를 받게 했다. 보개 정면에는 1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보주를 얹어 상륜으로 삼고 있다.이 부도는 하대석의 구성과 안상, 복련, 귀꽃 등 각 부분의 조각 수법이 신라 말 고려 초에 많이 유행된 석조 부도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 밖에도 중첩된 연꽃무늬, 탑신부의 문비모각 양식, 옥개석(屋蓋石)의 추녀와 귀꽃 장식 수법도 고려 초엽까지 통용된 수법이다.≪참고자료≫문화재청 홈페이지 : www.cha.go.kr박명자, 『청산에 묻힌 보궁을 찾아』, 중명, 1999.[춘천] : 강원도,『文化財修理報告書 :도지정문화재,2005』, 2008[영월] : 寧越郡, 『寧越 正陽山城 綜合整備 및 資源化 方案 計劃』, 2007[춘천]: 江原道, 강원향토문화연구회,『江原文化財大觀 :도지정편,1』, 2006종목시도유형문화재 제73호명칭영월법흥사부도(寧越法興寺浮屠)시대고려 시대지정일1982.11.03소재지강원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산422-4④ 영월법흥사부도(. 일반적인 사찰 해우소의 특징대로 경사지에 2층 누각식으로 세우고 위층에서 떨어지는 대소변이 아래층 땅 바닥에 그대로 쌓이게 하고 이를 다시 사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건물은 평주를 사용하여 구성하는 전형적인 중층누각식(重層樓閣式) 구조방식으로 하층의 굵은 원기둥을 인방으로 긴결한 위에 귀틀을 짜 얹고 그 위에 상층 기둥을 세워서 상하층을 연결하고 있으며, 하층 귀틀 간에는 동귀틀을 건너질러 구조를 보강하고 있다. 그리고 상층의 각기둥 위에 얹은 대들보는 홍예보 형태로 처리하였고, 그 위에 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얹었다. 지붕은 홑처마의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고, 고미반자를 시설하였다.내부공간은 도리방향으로 전후 2열로 나누어 각각 6칸씩의 대변소를 배치하면서 전후면 벽을 따라 통로를 설치하였으며, 각 칸의 전면은 열려있고 측면과 후면은 막혀있어 사용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있다.외벽은 판벽으로 구성되었는데, 하층의 경우, 후면 출입구 하부와 그 우측 두 칸에 각각 자연석 계단과 와편쌓기 마감을 한 이외의 나머지 전면과 양측면에는 모두 판벽을 설치하였다. 상층에는 출입 칸을 제외한 모든 칸의 상인방까지 판벽을 설치하였고, 그 상부는 개방시켰다. 1999년에 한 차례 해우소 수리가 있었다.≪참고자료≫문화재청 홈페이지 : www.cha.go.kr국립춘천박물관, 『강원도 역사와 문화Ⅰ: 충절의 고장 영월』, 2005.[영월] : 寧越郡, 『寧越 正陽山城 綜合整備 및 資源化 方案 計劃』, 2007[춘천]: 江原道, 강원향토문화연구회,『江原文化財大觀 :도지정편,2』, 2006[춘천] : 강원도, 『江原道指定文化財 : 實測調査報告書 : 용소막 성당, 보덕사 극락보전』, 2000⑩ 영월무릉리마애여래좌상종목시도유형문화재 제74호명칭영월무릉리마애여래좌상(寧越武陵里磨崖如來坐像)시대고려 시대지정일1982.11.03소재지강원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산139(寧越武陵里磨崖如來坐像)유적개요:영월 무릉리 마애여래좌상(寧越武陵里磨崖如來坐像)은 법흥사로 향하는 도로의 왼편에 위치한 주천강변의 이 곳에 머물렀다. 이와는 달리 그해 순흥(順興)에서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李甫欽)등이 상왕의 복위를 은밀히 꾀하고 있었으나 이 일이 발각되어 관련자들은 참살당하고, 노산군은 종사득죄의 구시로 세조 측근으로부터 죽임을 강요당하다가 1457년 10월 24일 사약을 받고 17세를 일기로 영월에서 승하하였다.단종이 승하한 후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강가에 버려졌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 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거두어 현 장릉이 위치하고 있는 동을지(冬乙旨)산 기슭에 매장하고 잠적해버린 후,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중종11년(1526) 왕명에 의하여 영월군수 박충원이 봉분을 꾸몄고,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24년(1698)에는 노산군에서 복위하면서 익호를라 하고 조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조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대왕릉비는 숙종 24년(1698)에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면서 세운 것으로 비석전면에는 이라 쓰여 있다.이 장릉은 다른 능과 다른 몇 가지 특징점이 있는데 우선 무덤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라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또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이 장릉에서 첫 선을 보였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 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을 배향하기 위하여 정조 15년(1701) 왕명으로 장릉 및 충신단을 설치하고 정단에는 안평대군이하 32인, 별단에는 조수량 등 254인을 배양한 것이다. 그 밖에 것으론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참고자료≫문화재청 홈페이지 : www.cha.go.kr春川 : 江原道,『文化財修理報告書 :도지정문화재,2005』,2008文化財廳 [編],『文것이다.
    인문/어학| 2011.11.20| 50페이지| 1,000원| 조회(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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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시 문화재 조사보고서
    全州市 文化財調査 報告書목 차Ⅰ. 머리말Ⅱ. 전주의 문화재 현황1. 문화재 등록 현황2. 지정문화재별 목록3. 전주시 지도Ⅲ. 전주의 문화재1. 불교유적(1)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莊嚴具)① 은제 도금 금강경(銀製鍍金金剛經)② 유리 사리병(琉璃 舍利甁)③ 금제 방형 사리합(金製方形舍利盒)④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⑤ 청동 주칠 도금 사리외함(靑銅朱漆鍍金舍利外函)(2) 전 낙수정 동종(傳 樂壽亭 銅鍾)(3) 남고사지(南固寺址)(4) 여래불적도(如來遺適圖)(5) 동고사(東固寺)(6) 학소암(鶴巢庵)(7) 서서학동석불입상(西棲鶴洞石佛立像)(8) 인후동석불입상(麟後洞石佛立像)(9) 천고사석불좌상(天高寺石佛坐像)(10) 극락암목조여래좌상(極樂庵木造如來坐像)2. 유교유적(1) 전주향교일원(全州鄕校一圓)(2) 전주향교대성전(全州鄕校大成殿)(3) 화산서원비(華山書院碑)(4) 반곡서원(盤谷書院)(5) 황강서원(黃岡書院)(6) 충신이흥발지려(忠臣李興?之閭)(7) 지행당(趾行堂)3. 기록유산(1) 전주이씨고림군파종중문서(全州李氏高林君派宗中文書)① 허여문기(許與文記)② 동복화회문기(同服和會文記)③ 동복화회입의(同服和會立議)④ 동복화회성문(同服和會成文)(2) 전주이씨칠산군파종중문서(全州李氏漆山君派宗中文書)(3) 연안이씨이유길가전고문서(延安李氏李有吉家傳古文書)(4) 전주향교소장완영책판(全州鄕校所藏完營冊板)(5) 전주부지도(全州府地圖)(6)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7) 승암사소장불서(僧岩寺所藏佛書)4. 성곽 및 관아 시설(1) 전주 풍남문(全州 豊南門)(2) 전주 풍패지관(全州 豊沛之館)(3) 남고산성(南固山城)(4) 동고산성(東固山城)5. 주거 및 건축유적(1) 한벽당(寒碧堂)(2) 문학대(文學臺)(3) 학인당(學忍堂)(4) 천양정(穿楊亭)(5) 추천대(楸川臺)6. 무덤 및 제사유적(1) 경기전(慶基殿)(2) 경기전 정전(慶基殿 正殿)(3) 조경묘(肇慶廟)(4) 조경단(肇慶壇)(5) 회안대군묘(懷安大君墓)(6) 관성묘(關聖廟)7. 기 타(8) 1.17O84문화재자료제178호전동성당사제관(殿洞聖堂司祭館)일제강점기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1가 200-12002.04.0685등록문화재제172호전주 신흥고등학교 강당 및 본관 포치(全州 新興高等學校 講堂 및 本館 포치)대한제국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1가 1882005.06.1886등록문화재제173호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博多屋)(全州 中央洞 舊博多屋)일제강점기전북 전주시 중앙동 2가 462005.06.1887등록문화재제174호전주 다가동 구 중국인 포목상점(全州 多佳洞 舊 中國人 布木商店)일제강점기전북 전주시 다가동 1가 282005.06.183. 전주시 지도ABCDEFGHIJKLMNOPQRSTU* 지도에 표기된 문화재는 본 조사보고서에서 조사한 문화재를 선별해 표기한 것임.Ⅲ. 전주의 문화유적1. 불교 유적 및 유물(1)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莊嚴具)지정구분국보 제123호명칭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莊嚴具)시대삼국 시대소재지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893 국립전주박물관지정일1966.07.26이 유물은 1965년 왕궁리석탑 해체 수리시 5층 석탑의 제1층 옥개 윗면 중앙에 장치된 방형석 위에 뚫린 2개의 사리공에서 나타났다.발견 당시 두 사리공은 1매의 방형석으로 위를 덮고 접점에는 강회로 밀봉되어 있었고, 동서로 구분된 두 사리공은 바닥에 회칠이 된 가운데 다양한 색상의 유리구슬을 실로 엮은 받침을 두고, 그 위에 청동 주칠 도금 사리외함이 각각 놓여 있었다.사리공 내에는 사리장치 1식과 금제판경, 금동여래입상과 청동령 등이 발견되었는데, 탑의 심초석에 뚫린 품자형 3개의 사리공 중에서 이미 1개소는 도굴이 되어 텅 비어있었다. 동편 사리공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금동사리외함 내부에 금제 방형 사리내합이 놓여 졌고 그 안에 다시 금제연화대좌 위에 놓인 진녹색의 유리사리병이 안치된 모습을 띠며, 금동여래입상 역시 발견되었다.또한 서편 사리공에서 발견된 금동법사리외함 역시 동편의 외함과1990,『文化財誌』[전주] : 전라북도, 1998,『全北文化財大觀 : 도지정편(하)』[전주]: 國立全州博物館, 2001, 全羅北道의 佛敎遺蹟 :佛像·塔·石造物 篇, 2001, 國立全州博物館 學術調査報告 ;第8輯(10) 극락암목조여래좌상(極樂庵木造如來坐像)지정구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1호명칭극락암목조여래좌상(極樂庵木造如來坐像)시대조선 시대소재지전북 전주시 덕진구우아동 1가 산3지정일2000.03.31극락암목조여래좌상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에 있는 조선 후기 사찰로 추정되는 극락암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몸속에 복장기(腹藏記)를 넣고 있었으나 도난당하여 정확한 조성연대 등을 알 수 없지만, 고개를 아래로 약간 숙이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와 단정한 신체, 자세의 안정된 구조 등이 조선 후기(17세기경)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완주군 송광사(松廣寺)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 및 정수사(淨水寺) 삼존불좌상(三尊佛坐像) 등 인근 지역의 17세기 불상들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목조불상으로 연구 가치가 높다.全州 : 全羅北道 文化藝術課, 1990,『文化財誌』[전주] : 전라북도, 1998,『全北文化財大觀 : 도지정편(하)』[전주]: 國立全州博物館, 2001, 全羅北道의 佛敎遺蹟 :佛像·塔·石造物 篇, 2001, 國立全州博物館 學術調査報告 ;第8輯2. 유교유적(1) 전주향교일원(全州鄕校一圓)지정구분사적 제379호명칭전주향교일원(全州鄕校一圓)시대고려시대소재지전북 전주시 완산구교동 26-3외지정일1992.12.23향교는 유학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지방의 행정단위인 주(州), 부(府), 목(牧), 군(郡), 현(縣)에 성균관을 축소하여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전주시 교동에 소재하고 있는 전주 향교는 고려시대(우왕 6년(1380))부터 있어 왔다고 전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추정하건대 전주에 향교가 설치된 것은 고려 성종 2년(983) 전주목이 고려 12목 가운데 하나로 되었고, 이후 곧 987년 지방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 그분재기(七男妹分財記)에 있어서 장차자(長次子)나 출가한 여식까지도 공평하게 분재한 사실은 남녀의 권리존중문제에 있어 차등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문(遺文)전편의 내용에는 당시의 국가의례나 사가 종중 향당(鄕黨)의 관습의례를 낱낱이 들어내고 있다.또한 이 유문의 문장내용은 대부분이 이두문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이두는 조선의 초기와 중기에 유행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전편을 통한 공사문헌의 서식이라든가 문법, 당시에 유행된 고사성어, 선조들의 문장, 필적은 일반적 학문 연구의 대상도 되거니와 특히 후대들로 하여금 선조의 학덕을 그대로 살필 수 있는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자료인 것이다.전북 : 전라북도 문화공보 담당관실, 1984,『내고장 全北의 뿌리』全州 : 全羅北道 文化藝術課, 1990,『文化財誌』[전주] : 전라북도, 1998,『全北文化財大觀 : 국가지정편』(2) 전주이씨칠산군파종중문서(全州李氏漆山君派宗中文書)지정구분전라북도 유형문화재제103호명칭전주이씨칠산군파종중문서(全州李氏漆山君派宗中文書)시대조선시대소재지전북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2가 561-1지정일1982.08.30이 중종문서는 고림군 이훈의 적자(嫡子)인 칠산군 이선손으로부터 10대에 이르는 문서들이다. 현재 이것들은 남원군 둔덕방(屯德方,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살고 있는 칠산군파 종가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약 500년이나 되는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문서들이다. 한지에 쓰여진 문서는 조선조의 가족제도, 노예제도, 경제문제, 관습의례, 윤리도덕, 문학예술, 사회구조와 당시 이두(吏讀)문자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이 종중문서중 전라북도유형문화제 제103호로 지정된 내용을 다음과 같다.종 별지정번호지정일수명 칭왕 기년 도유형문화재"""""""""제103호"""""""""1982.8.30"""""""""거칠산정행장(居七山正行狀)개명단자(改名單子)호적단자(戶籍單子)동생화회성문(同生和會成文)호적단자(戶籍單子)국문서한(國文書翰)종중완의문(宗中完議관과 서익헌, 수직사만 남아있으며, 동익헌의 경우 현재는 초석만 남아있다. 1976년도 보수 당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전주부성도’ 에 의하면 정면에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이 중첩되어 내삼문 동쪽으로 맹청, 서쪽으로 무신사 등이 있었고, 담장 서쪽에는 책판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담장 밖에는 군기고, 화약고 등이 었었고, 중산문 서쪽에는 아영청, 후원에는 진남루와 매월당, 청연당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객사는 본래 객관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고을마다 거의 관 건물로 설치하였으며 그 규모는 대략 중앙에 주건물을 두고 그 좌우 동 ? 서에 양익헌을 달았다.객사 본관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동서길이가 17.5m, 남북이 12.6m로 이루어져 있다. 옆면의 기둥간의 간격은 중앙이 6.3m, 좌우가 5.6m씩으로 훨씬 넓다. 본관은 동서 25.0m, 남북 16.6m의 네모형 축대 위에 건축되었는데, 앞 툇간에 툇마루를 깔고 고주에서 벽을 두어 칸마다 4분합 띠살문을 설치하고, 띠살문 윗부분에는 홍전을 두었다. 측면과 뒷면의 벽은 흙벽으로, 내부의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서익헌은 남북이 각각 21.5m, 폭 13.3m 너비의 네모형 축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을 보관에 접하여 세워졌다. 서익헌은 앞퇴간에 툇마루를 깔고, 작은 규모의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를 깔아놓았다. 감실에는 궐(闕) 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망궐례를 하거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었다.전북 : 전라북도 문화공보 담당관실, 1984,『내고장 全北의 뿌리』全州 : 全羅北道 文化藝術課, 1990,『文化財誌』[전주] : 전라북도, 1998,『全北文化財大觀 : 국가지정편』이리나, 2009,「전라북도 지역 문화재 고찰을 통한 중학교 미술 감상 지도 연구 : 전주 지역을 중심으로」, 원광대 교육대학원(3) 남고산성(南固山城)지정구분사적 제294호명칭남고산성(南固山城)시대삼국 시대소재지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산228지정일1981.12.10남고산성은 전주시내를 한눈에 있다.
    인문/어학| 2011.10.15| 56페이지| 1,000원| 조회(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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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답사기
    경복궁과 조선왕조경복궁은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궁답게 한양의 중심에 위치한 법궁이다. 또 조선 역사를 상징하는 궁답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법궁이다. 1395년 창건 이래로 여러 차례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 상태로 방치되다 1867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중건되었다. 2010년 11월 6일, 나는 해태상을 지나면서 조선의 역사 속으로 발을 디뎠다.경복궁을 들어서면서 생각 없이 지나쳤던 광화문, 알고 보니 신분에 따라 다니는 문부터가 다른 곳이었다. 중심인 왕을 기준으로 왼쪽은 무신이, 오른쪽은 문신이 지나가는 길이라 한다. 일제강점기에 철거 되었다가, 최근에서야 복원되었다 한다. 이 문을 지나 흥례문이라는 또 다른 문을 지났다. ‘예를 표한다’는 뜻을 가진 이 문은 광화문과 함께 철거 된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복원되었다 한다. 영제교를 지나 곧장 가보니 또 다른 문인 근정문이 있었다. 계속된 문 퍼레이드(?)에 경복궁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어렴풋이나마 실감했다. 근정문을 지나니 근정전이 보였다. 그런데 이 주변의 길은 유난히 울퉁불퉁해서 걷기에 불편했다. 바닥이 화강암이어서, 편편하면 눈이 부실까봐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 했다. 사소한 것들까지도 세세하게 신경 쓴 조상들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길을 걸을 때 신는 특수한 신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궁궐의 중심인 근정전, 이 주변에 다다르자 왠지 숙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절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이곳에 서서 앞을 보니, 마치 신하들이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이한 점은, 근정전 처마에는 삼지창 모양의 뾰족한 것들이 박혀있었던 점이다. 조사해보니, 새들의 배설물을 막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목조 건물이니 좋지 않은 영향을 주리라. 다시 한 번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했다. 또 다시 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사정전이었다. 이곳은 왕의 공식적인 집무실이라 한다. 여기에서 시사와 상참 등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근정전을 본 후에 본 곳이어서 그랬을까? 궁내에 있는 건물치고는 소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정전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천추전, 오른쪽으로는 만춘전이 있다. 이 두 건물들은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이는 줄 알았으나, 이들 역시 보조 편전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했다. 사정전과 달리 온돌방을 갖추어 추운 계절에 쓰였다 한다. 마치 별장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사정전을 나와 앞으로 가니 강녕전이 보였다. 강녕전은 왕의 침실이라 한다. 강녕전 안은 井자 모양의 공간 배치를 해놓았는데, 방이 유난히 많았다. 왕이라 방도 많이 쓰나하는 생각을 했는데, 실은 가운데 방만 왕이 쓰고 나머진 상궁이 숙직을 했다 한다. 이 건물 역시 일제강점기에 철거 되었으나, 후에 복원했다 한다. 양의문을 들어가니 교태전이 보였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소라 한다.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다. 여기에서 여러 그림들이 그려진, 옆으로 나온 굴뚝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은 경회루, 큰 연회를 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경회루는 예전부터 거기에 있었던 마냥 자연스럽게 연못과 어우러져 있어, 감탄을 자아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옛 집현전 터에 있는 수정전이다. 일제 때, 학자들이 태만하길 바라면서(困) 앞에 나무가 심어져있었다 한다. 건물 앞에 나무가 심어져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상당히 조잡해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문/어학| 2011.10.15| 1페이지| 1,000원| 조회(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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