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분(古墳)이란 무엇인가(고분의 고고학적 의미)고분이란 일반적으로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흙을 높이 쌓아 올려서 만든 오래된 무덤을 말하는데, 이러한 정의는 현재 이전의 모든 무덤들을 총칭하는 분묘와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진정한 고분(또는 고총(古?))의 개념은 세계각지 공히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에 등장하며, 따라서 고분은 국가형성의 고고학적 지표가 된다. 고분은 시신을 묻는 단순한 무덤의 기능 이외에 피장자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기념물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자(死者)를 위한 것 보단 산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고분을 구성하는 부장품, 무덤형식, 장례법, 사후세계관 등 고분을 구성하는 유무형의 총체를 고분문화라 하는데, 고분문화에는 당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정보가 종합적으로 결집되어 있다. 따라서 한 시대의 고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시대를 통째로 이해한다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다. ‘고분’이라는 용어는 고대 국가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3세기 중후반부터 불교문화의 파급으로 고분의 조형이 쇠퇴하고, 고분 대신 화장묘가 출현하게 되는 통일신라, 발해까지의 시기에 걸쳐 조영된 무덤에 한정하여 사용한다.2.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고분의 대표적 묘제 기술고구려의 대표적 묘제는 적석총과 석실봉토분이다. 적석총은 지상에 돌을 깔아 묘단을 만들고 그 위해 묘곽을 만들어 매장부를 마련한 다음, 시신을 안치하고 돌을 덮어 봉분을 쌓는 축조과정을 거친다. 이때 묘곽 안에 목관을 넣었는지, 시신만 넣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구려 적석총은 무기단식적석총에서 기단식적석총을 거쳐 계단식적석총으로 변화하며, 매장 주체부는 수혈식구조에서 횡혈식구조로 변화한다. 석실봉토분은 내부에 할석이나 판석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고 그 외부는 흙을 쌓아 올려서 봉분을 만든 무덤이다. 고구려가 평양천도를 한 이후 주 묘제로 정착했으며,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대개 이러한 석실봉토분의 형식을 띤다. 초기에는 규격화 되지 않았기에 회칠을 하였다. 6세기에 들어 이전의 묘제들이 이러한 횡혈식 석실분으로 통일되며 이시기 신라에서 무덤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횡구식석실분은 형태면에서는 횡혈식석실분과 유사하지만, 연도가 없이 개구를 통해서 매장하는 방법이 다르다. 이러한 개구는 필요시마다 헐어서 사용하게 된다. 가야의 대표적 묘제는 대형의 목곽묘와 석곽.석실묘이다. 5세기 이전까지는 6가야 모두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지만 5세기 이후에는 독자적 양식이 나타난다. 가야의 묘제는 목곽묘에서 석곽묘, 수혈식목곽.석실묘, 횡혈식석실묘로 변천되며, 가야에선 수혈식묘제가 조금 오래 지속된다. 이 묘제에선 목관없이 바닥에 갈대를 깔고 안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금관가야에서 이러한 양식이 뚜렷이 나타난다. 또한 신라 중앙 지배층만이 배타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적석목곽분이 신라의 주변지역이던 가야지역까지 나타난다. 낙동강 동쪽의 가야인 성산가야와 고령가야에서는 이러한 신라고분요소가 나타나며 지배층은 수혈식석실, 일반백성들은 석곽묘를 썼다. 또한 가야는 순장풍습이 강했는데, 순장의 시초였던 부여의 요소를 많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환두대도를 90°꺾어서 부장하는 풍습이나 목곽의 뚜껑을 덮고 불지르는 풍습이 그러하며, 유물 또한 부여적인 유물을 가지고 있다.3. 고구려 적석총의 구조와 변화과정적석총은 지상에 돌을 깔아 묘단을 만들고 그 위해 묘곽을 만들어 매장부를 마련한 다음, 시신을 안치하고 돌을 덮어 봉분을 쌓는 축조과정을 거친다. 이때 묘곽 안에 목관을 넣었는지, 시신만 넣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구려 적석총은 무기단식적석총에서 기단식적석총을 거쳐 계단식적석총으로 변화하며, 매장주체부는 수혈식구조에서 횡혈식구조로 변화한다.북한학자들은 매장주체부의 형태에 따라 석광, 석곽, 광실, 석실 등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은 시기적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며,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무기단석광적석총, 기단석광적석총, 계단석실, 적석총, 봉석묘 등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는 점진적으로 형식이 변화하는 양식분은 모두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무덤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 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관을 안치할 때,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를) 만들었으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는데 이는 중국식의 벽돌무덤을 소화시키려한 것으로 보인다. 송산리 고분군에서 위의 5기의 고분과는 달리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식의 전축묘를 따랐다.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은 남북을 장축으로 가지는 긴 장방형의 평면에 터널형 천정을 가졌으며, 연도와 현실로 구성되어있는 단실묘이다. 이러한 전축분은 백제 웅진기에서만 나타나는 양식이다.사비기의 묘제는 석실 단면이 6각형으로 벽과 천정을 판석으로 꾸리고 중앙에 연도를 두는 사비기의 대표적인 고분군인 능산리형 석실, 즉 후기형 석실이 나타난다. 능산리형 석실의 출현과 함께 석실묘가 규격화되고 중앙과 지방간에 등급의 차이가 보이는데, 이는 무덤 축조에 일정한 규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시기의 대표적 왕릉군인 능산리 고분군은 총 7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의 구조형식에 따라 세 종류로 구분된다. 벽상면에 판석만을 올려놓는 평천정식석실, 벽상면에 장대석을 안으로 경사지게 쌓고 그 위에 판석을 올려놓은 평사천정식석실, 양쪽의 긴 벽상에 장대석을 안으로 경사지게 쌓아 곡면을 이루게 한 터널형천정식석실 등이다. 사비기의 묘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동안 통일되지 못한 백제의 묘제는 능산리형의 석실로 통일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5.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 및 변천과정신라의 적석목곽분은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 등 경주시내 평지에 있는 고분군의 대부분이 해당된다. 적석목곽분은 지하 또는 지상에 덧널을 짜 놓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뒤, 덧널의 상부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관의 위치에 따라 지하식, 지상식, 반지하식 등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지하식이다. 지하식은 지하에 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관을 짠신을 위로부터 매장하고 뚜껑을 덮는 수혈식과 옆으로 매장하고 그 매장한 한 쪽 입구를 밖에서 막아버리는 횡구식으로 구분되며, 발전 서열로 보면 수혈식에서 횡구식으로 나아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수혈식 석곽묘는 가야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신라 지역이나 백제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무덤 형식으로 특히 가야 지역에서는 분포지와 수량으로 볼 때 가장 대표적인 묘제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수혈식 석곽묘를 가야 고유의 묘제라고 생각하여 수혈식 석곽묘가 발견되는 지역이면 가야 지역으로 간주하는 경향도 있다. 석실묘는 일반적으로 연도가 달린 횡혈식 고분을 가리키는 말이나, 수혈식에 있어서도 내부공간(매장부)이 사람이 서서 다닐 정도로 거대한 것은 석실묘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석실묘도 내부구조에 의해서 수혈식, 횡구식, 횡혈식의 3유형으로 구분된다.수혈식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신을 위로부터 매장하는 것이며, 횡구식도 한 측벽으로 매장하고 나서 입구를 막아버리는 것이라는 것은 먼저 이야기한 바와 같다. 횡혈식도 옆으로 매장하는 점에서는 횡구식과 같으나 '연도'라고 하는 별도의 입구를 쌓아 그를 통하여 매장하고 매장이 끝난 후 연도 끝을 돌로 쌓아 패쇄하든가 문을 닫아 장례를 끝내는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서열 관계는 일반적으로 수혈식 -> 횡구식 -> 횡혈식의 순서로 발전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한편 이 3종의 석실묘는 거대한 원형 봉분을 갖는 중형, 대형의 고분군이 되는데, 특히 수혈식 석실묘의 경우 앞서 말한 수혈식 석곽묘의 확대 발전형이라고 믿어지며, 이러한 대형의 수혈식 석실묘에는 석실 외에 매장 석관으로 1기이상 많은 때는 32기나 되는 부곽을 가진 것도 있는데(고령 지산동 44호분), 이들 석곽은 순장곽인 것이 확실하다. 대형 고분에 있어서는 그 상당수가 이와같은 순장곽을 1기 이상 가지고 있는 다곽묘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령의 지산동, 성주의 성산동 등의 예에서 알 수 있다.7.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 비사벌가야의 중심고분군과 그 묘제5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고분은 마한의 주구 토광묘를 계승한 분구묘와 그 이후 옹관묘가 주를 이룬다. 이곳의 분구묘는 주구를 두르고 그 안에 성토를 한 후 매장주체부(목곽)를 안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3C 마한의 고유 무덤은 도랑을 두르고 그 안에 여러기의 매장주체부를 안치하는데 제일 큰 주체부를 정상부에 안치하는 형식을 하고 있다. 4C 이전의 분군묘는 노동력 동원이나 도구발달이 미미하여 작은 능선을 이용해 흙을 약간 쌓아 고분을 형성하였다. 그 이후에는 평지에 봉분을 만들어서 고분을 형성하였고 그 다음이 되어서야 분구의 크기자체를 크게 차지하기 위해 능선을 이용하였다.분구묘의 다음 단계에 옹관고분이 등장하게 된다. 주변에 주구를 형성한 후 거대한 분구를 형성하여 지상에 합구식의 옹관의 매장주체부를 9~10기 씩 매장하였다. 나주복암리 3호분의 경우 방대형이며 한변이 40m에 달하는 크기를 가진다. 종 48기의 무덤이 한 분구내에 존재하며 그 중 20기는 분구형성 이전에 만들어 진 것이며 28기는 분구를 형성한 후에 다시 파고 만든 것이다. 기존의 무덤에 새로운 무덤을 제작한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매장 관념의 차이로 보여진다. 선대 고분위에 중첩되는 방향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울산하대와 같은 경우에는 기존의 무덤을 갈아엎고 새로운 분묘를 제작한 경우도 보이는데 이는 다른 집단에 의해서 행해진 것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현상을 선행분묘파괴현상이라고 한다. 다른 이주집단이 종래의 집단의 분묘를 파괴하고 자신들의 분묘를 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곳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분구형성 이후 28기의 매장주체부들에는 옹관 22기, 석곽옹관 1기, 횡구식석곽 1기, 수혈식석곽 3기, 횡구식 석실 2기, 횡혈식 석실 11기, 목관묘 1기가 형성되어 있다. 밀폐형고분과 개방형 고분이 모두 존재하며 영산강 유역의 모든 묘제를 확인 할 수 있다. 옹관에는 합구식, 3합구식등이 있다. 바닥에 구멍이나 원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한대의 묘장농업, 공업의 기초공사를 위해 시공하거나 땅을 파는 과정에서, 혹은 고고학자들이 조사, 발굴 과정에서 가장 용이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은 한묘 이다.-한이 서한과 동한을 합하여 400여 년 동안 존속하여 그 연대가 아주 길기 때문-동시에 당시의 중국은 통일된 대제국으서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고 경제도 상당히 발달하여 인구가 많았기 때문-한대의 지주 관료계급이 후장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묘 중의 부장품 종류가 다양하고 수량도 많아서 쉽게 눈에 띠며, 또한 묘실도 전, 석을 사용한 구조이기 때문에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모두 중요한 원인한 대의 묘장은 시대적인 특색을 가장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서한중기 황하유역에서는 땅속에 횡으로 토동을 파서 묘광을 만들었으므로 ‘횡혈’이라고 할 수 있는 묘제가 시작되어 유행하였다.-서한시대에는 주로 중원지역에서 아주 큰 공심전을 써서 묘실을 만드는 방식도 성행하였다.-동한에 이르자 중원 및 남방 · 북방의 변방지역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소형전을 써서 아취형의 묘실을 축조하는 방식이 보편화-서한말기 부터는 석실묘가 유향하기 시작하였다.-서한에서 동한시대까지 어떤 지역에서는 ‘애묘’가 있었는데, 그 묘광은 역시 횡혈식한대묘제의 이러한 변화는 시대적으로는 주로 서한중기에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지역적으로는 먼저 황하유역에서 발생한 다음 점차 각지에 보급되었다. 서한전기에는 통치계층들이 여전히 전국시대 이래 수혈식 토갱묘를 습관적으로 사용하여 묘중에 목곽을 만들었다.장사현 마왕퇴한묘, 강능현 봉황산한묘, 북경 대보대한묘 등은 서한 전기 및 중기의 토갱목곽묘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묘중의 관곽은 주대 이래의 예제를 따르고 있다. 장자천자편과 순자예논편에서는 ‘천자의 관곽은 일곱 겹이고 제후는 다섯겹이며, 대부는 세겹, 사는 두겹’이라고 하였다. 물론 어떤 경주에는 예제에서 규정한 바를 엄격하게 따르지 않는 예도 있다. 장사 마왕퇴2호묘의 피장자는 태후 이창 자신이지만 2관1곽만을 사용, 북경 대보대 한묘와 장사현 함가호 한묘중에서는 이른바 ‘황장제주’를 사용하였다.‘황장제주’는 묘도, 용도, 외회랑, 내회랑, 황장제주, 전실, 후실로 구성되어있다. 15000개의 방목으로 액자형의 목장(담장)을 축조, 방목은 길이 90cm, 폭 10cm이다. 담장의 내부는 목판으로 3면을 에위싼 관실을 축조하고 2곽3관을 안치했다. 관실의 전방에 전실이 위치, 목장과 관실 사이에 회랑이 형성귀족의 대묘 중 하북성 만성현의 중산청왕묘와 산동성 곡부현의 노왕묘는 서한 중기에 새로 나타난 횡혈식묘의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절벽에 거대한 동혈을 파고 묘실을 만든 것으로 ‘애묘’라 할 수 있다. 묘는 측실 전실 후실 등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중산정 유승의 묘를 예로 들면, 묘 중의 남측실은 거마방으로 수레와 수레를 잇는 말이 들어 있었으며, 북측실은 창고로 음식물이 들어있는 도기들이 대량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전실은 넓은 홀이며 휘장과 각종 부장품이 진열되어 있었고, 후실은 내실로서 관이 놓여있었다. 전실과 양쪽 측실은 모두 목재를 써서 가옥형태로 만들고 지붕에는 기와를 덮었다. 후실 또한 석판을 써서 가옥형으로 만들고, 앞에는 두 짝의 돌문을 달고 그 문에 동으로 도금한 문고리받침쇠를 장치하였다. 결국 묘의 형태 및 결구가 완전히 지상의 주거건축을 모방하였으므로 ‘자하궁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묘에서는 관곽 또한 종래의 예제를 탈피하였다. 관곽의 겹수는 이미 묘주인의 신분을 헤어릴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한대의 새로운 묘제는 또한 중원 일대에서 성행한 ‘공심전묘’ 로 나타나고 있다. 전국시대말기의 공심전묘와는 다른 것으로, 한 대의 공심전묘는 종종 횡혈식 토동 내에 묘실로 축조되는 것이다. 공심전묘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그다지 크지 않으며, 대개 당시의 중소 지주계층의 것이다. 서한전기에는 공심전묘의 묘실은 장방형이었으며 형태도 목곽을 따랐는데, 서한중·말기에 이르며 묘실의 천정부는 종종 양쪽으로 비탈진 형상를 하게 되며 남벽을 문 모양으로 만들었으므로 한층 가옥의 형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벽돌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나 그림은 묘실 내부의 장식이 되었으며, 어떤 묘에는 채색벽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낙양에서 발견된 한 기의 공심전묘에는 일, 월, 청룡, 백호, 주작 및 복희, 여화의 형상이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서한중기 이후에 중원과 관중 일대에서 처음으로 소형전을 사용하여 건축한 묘가 출현하였는데, ‘전실묘’라 한다. 전실묘는 일단 출현하자 신속히 보급되어 중원지역에서 공심전묘를 구축하고 점차 그 자리를 대신하였으며, 장강유역 및 남·북방의 변방지역에서도 당시 여전히 계속되고 있던 토갱목곽묘와 대체되었다. 동한에 이르자 전실묘는 전국각지에서 유행하여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종류의 묘제가 되었다. 대귀족, 대관료의 전실묘의 규모는 아주 크고 구조도 복잡하며 그 배치는 그들의 저택과 동일하다. 어떤 전실묘에는 채색된 벽화가 있다. 비교적 유명한 벽화묘로는 하북성 망도의 부양후묘와 하남성 밀현의 홍농태수 가족묘를 예로 들 수 있다. 전자에는 묘주인에 소한 관리 및 시종 등 인물이 주로 그려져 있으며, 묘실의 배치가 그의 관서를 꼭 같이 본 땄다. 후자에는 거마출행도와 연회백희도를 그려 묘주인 생전의 호사했던 생활을 표현하였다. 1972년 내몽고 화림격이 이에서 발굴된 한기의 대규모 전실묘의 묘주인은 관직이 호조환교위에 이르렀다. 묘안 벽화의 내용은 아주 풍부한데, 중요한 것은 거마출행도의 형식으로 묘주인 생전의 관직경력 전부를 묘사하였으며 벽화상에 쓰여진 문자로 그 내용을 설명하였다.서한말년부터 또 다른 새로운 석실묘가 출현하여 동한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 묘실은 많은 정제된 석재로 축조하고 석재위에는 각종 화상을 조각하였으므로 ‘화상석묘’ 라 부른다. 그 분포는 산동성에서 강소성북부, 하남성에서 호북성북부에 가장 많으며 사천성중부, 섬서성북부와 산서성서부 일대에도 적지 않다. 1954년 발굴된 기남한묘로 묘 내에 한 폭의 화상이 있는데 이는 묘주인이 생전에 거주하던 저택을 표현하였으며, 묘실이 바로 화상 중의 저택과 일치하다. 화상의 제재는 아주 광범위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주관료계층의 생활과 행적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기남한묘의 주인은 생전에 아마도 장군이었던 것 같으며, 때문에 묘문상부의 가장 두드러지는 위치에 한 폭의 정치한 전투도를 조각하였다.동한대 사천성지역의 전실묘의 경우, 종종 묘실의 전벽에 따로 일종의 ‘화상전’을 끼워넣어 장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화상전묘’라 칭한다. 화상전에는 정방형과 장방형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전 위의 화상은 모두 진흙덩어리가 마르기 전에 틀을 이용해 찍어낸 것이며, 소성후에 채색을 가한 것도 있다. 화상전의 제재는 아주 광범위하여 강경, 연음, 무악, 차기 등 지주관료계층의 생활장면이 있는가 하면 또한 수확, 사냥, 뽕잎따기, 토란캐기, 쌀방아, 양조, 조리 등 각종 사회생산활동의 정경있는데 농후한 지방색을 띠고 있다. 이러한 화상전은 대규모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종종 여러 다른 지방의 묘 중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전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화상의 내용이 반드시 묘주인과 직접 관계있는 것은 아니다.-------------------------------------------------------------한대묘장제도의 배치형태는 묘역이 가장 전방에 묘궐, 이후 신도의 양측에 동물 혹은 인물 석조상, 사당, 묘비, 분구의 순서로 배치한다.한 대에 이르러 분구가 보편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진한시기 묘 상부의 분구는 전국시대에 비해 보편화 되었다 현존하는 대형 분구는 대부분 대형의 목곽묘, 전실묘 혹은 석실묘이다. 분구는 항토로 축조, 규격은 묘주인의 신분, 재부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한 대에 이르면 지주관료들은 묘앞에 사당을 설치하였고 또 묘역 전방에 묘궐을 세웠다. 동한대 묘 앞의 사당과 묘궐은 주로 석재로 지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있다.
구석기 시대는인류의 등장부터 약 1만년 전까지를 아우르는 선사시대 명칭의 하나.[[구석기시대;(Paleolithic)란 이름은 본래 유럽에서 기원한 것이다. 19세기 유럽의 선사시대는 사용되었던 유물의 재질 및 제작기술을 토대로 석기?청동기?철기시대의 세 시기로 구분되었으며, 이후 영국의 러복(John Lubbock)이 처음으로 석기시대를 구석기와 신석기의 두 시대로 나누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 일본인 학자에 의해 함경북도 동관진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유적이 확인되었으나,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연구가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구석기시대가 우리 역사의 일부로 된 것은 1960년대 초 남한에서 공주 석장리유적 북한에서 웅기 굴포리유적이 조사되면서부터이다. 이후 1970년대 후반 연천 전곡리유적은 유적의 범위 및 출토 유물의 양과 내용면에서 세계적이며, 1980년대 중반 이후 조사된 단양 수양개 선사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후기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발견된 유적의 숫자는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의 구석기유적은 전국적으로 100여 기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또한 임진?한탄강유역, 보성?섬진강유역 등 지역적으로 분포밀도가 상당히 높은 곳도 많다. 구석기시대는 대부분 지질학적으로 흔히 빙하시대로 알려져 있는 갱신세(更新世,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홍적세∼약 180만 년 전에서 1만년 전까지)에 해당한다. 그러나 최근 아프리카에서 알려진 인류의 기원은 약 500만 년 전까지 소급되며, 발굴된 석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는 약 250에서 3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듯 구석기시대는 인류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사피엔스 등 인류의 조상들이 등장하고 확산된 시기이기도 하다.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주로 돌을 떼어내서 다듬어 만든 뗀석기를 사용하였으며, 수렵채집생활을 하였다.신석기문화발전 단계에서 구석기시대 다음 금속기 사용 이전의 선사시대 명칭.약 1만 년 전 이후, 곧 후빙기(後氷期화의 시기적 흐름(편년)의 뼈대가 세워지게 되었다.청동기시대신대륙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구대륙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대개념이다. 광석에서 구리를 추출한 후 주석, 아연, 납 등 몇 가지 다른 금속과 배합하여 청동기를 주조하는 기술은 고도의 숙련도와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석기만을 사용하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직업의 전문화, 교역의 발달, 계층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는 혁신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대체로 간단한 소형 제품을 만든 동검(銅劍) 이전 시기와 본격적으로 단검(短劍) 등의 각종무기와 공구(工具) 등을 본격적으로 제작 사용하던 동검을 표지(標識)로 하는 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동검 이전 것이라 주장되는 예로서, 遼寧 旅大市 쌍타子 3기, 평북 의주 신암리(新岩里) 하층의 단추, 칼 등이 있다. 그 연대는 B.C. 200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며, 이는 곧 한국 청동기시대의 상한이 될 수 있다. 최근에 북한 학자들은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는 동검의 연대에 대해서 이른바 전자스핀공명 연대측정법으로 B.C. 3000년까지 올리기도 하나, 같이 나오는 중국계 청동무기를 고려하면 B.C. 10세기경을 크게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초기철기시대한국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시대구분 용어로, 청동기시대에 이어서 새로이 유입된 철기문화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한반도에서는 철기의 유입과 이미 정착되어 있던 발달된 청동기문화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초기철기문화에 후기 청동기문화를 포함하여 B.C. 300년부터 서력기원 전후까지를 초기철기시대로 설정하고 있다.이 시기에는 먼저 대동강유역에 요령지방과 판이한 한국적 세형동검(細形銅劍), 정문경식세문경(精文鏡式細文鏡), 그리고 철제무기, 농구, 공구 등이 출현함으로써 시작된다. 대동강유역의 고조선(古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도 철기문화권의 형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철기문화가 한반도 전역으로 파급되었을 것이다.이 시기는 Ⅰ식세형동검, 정문역사학에서의 삼한시대, 부족국가시대, 성읍국가 등이 이에 해당되지만 원초삼국시대(原初三國時代) 혹은 원사시대(原史時代)의 삼국시대라하여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 명명하였다. 이 시대의 실연대는 서력기원 전후로부터 300년까지로 정의된다.이 시기의 문화적 특징은 청동기의 소멸과 철기의 발달 및 보급, 철제 농구와 소에 의한 농사의 발전, 그리고 저화도의 민무늬토기가 아니라 높은 온도의 단단한 회색 김해토기(金海土器)의 생산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변화는 낙랑군을 통한 중국 한문화(漢文化)의 자극에 의한 것이며, 특히 낙동강유역은 철을 생산하여 낙랑(樂浪)과 일본(日本) 등에 수출하기에 이르렀다.이 시기의 유적에는 집자리, 조개무지, 가마 등 생활유적이 있고, 무덤에는 움무덤(木棺墓와 木槨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독널무덤(甕棺墓) 등이 있다. 유물에는 김해식토기(打捺文土器), 철기, 골각기, 장신구 등이 있다.현재 한국고고학에서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원삼국시대를 대신하여 삼국시대 전기(三國時代前期)로 하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즉 삼국시대의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삼국(三國)은 삼한(三韓)과 마찬가지로 초기철기시대의 토착세력을 바탕으로 등장하였고, 그 후에 삼한지역을 통일하여 삼국을 정립하였으므로 삼국시대 전기로 부르자는 것이다.원삼국시대의 용어에 대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지적되었다. 첫째, 이 용어는 1~3세기를 원사(原史)시대로 보는 데에서 출발되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역사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지적하였다. 둘째, 원삼국이란 개념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프로토 타이프(proto-type)로 간주한다고 하나 실제는 고구려를 제외한 지역의 문화를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의 내용이 학자간에 주장이 달라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즉 기원전후로 문화가 변화되는 기준이 학자들간에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따라서 이 시대의 명칭을 고고학적 입장에서 철기시대(鐵器時代)로 하거나 문헌사에 근거를 두어 삼국시변경을 빼앗았던 분서왕을 자객을 보내 죽이기도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보다 약 200년, 백제보다 약 100년이 뒤늦은 내물마립간(356∼401) 때에 이르러 고대왕권이 성립되었다.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이 계속되자, 이들이 신라에 미치는 압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고대국가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간 것이다.구석기시대구석기시대는 통상 전기?중기?후기구석기시대로 세분되고 있지만, 각 세부 시기의 경계 및 내용은 지역에 따라 다르며, 연구자에 따라 시기구분을 달리 하기도 한다. 다만 유럽의 경우 25~20만년과4만년 전 전후를 경계로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고 잇다. 중기구석기는 약 10만∼7만 5천년 전에 시작하여 약 4만∼3만 5천년 전에 끝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통일된 시기구분이 확립되어 있지는 않으나, 석기 제작기술의 진화와 발전에서 대체로 이와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 믿어진다. 다만 우리의 경우 전기와 중기가 석기의 제작기술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반면, 후기구석기시대와 이전 시기는 유물 제작기술 및 돌감[石材]에서 비교적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신석기 시대편년은 한반도 전체를 묶을 경우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산리 유적 발견 이후 전기 이전의 초창기-고신석기 단계가 설정되기도 한다.전기-전형적 침선계 빗살무늬 토기 등장 이전 단계로 평저를 특징으로 한다. 지자문,융기문,오산리식,영선동식 토기가 이시기에 속한다. 중서부지역에선 전기 후반에 첨저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한다.중기-침선계 빗살무늬 토기가 확산 되었다. 동북과 서북지역에서는 평저토기가 게속 되나,영동지역을 포함한 중서부 이남지역에서는 첨저의 포탄형 토기가 유행 한다.후기-민무늬 토기가 증가하는 경향이있으며, 동북과서북 지역에선 뇌문,중서부지역에선 동일게 침선문,남부내륙 및 해안지역에선 이중구연 등의 특징이 있다.이런 양상은 동북아 전체와 대비시 침선문토기가 등장해 중심을 이루는 중기를 기준으로 그 앞뒤를 나누행하는 시기이다. 요동과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처음 주조철기를 위주로 하는 중국 연(燕)나라(기원전 300∼100년경) 철기문화의 영향으로 도끼?창?낫?손칼 등의 철제 농공구류와 손칼모양 청동 화폐인 명도전(明刀錢), 전국계(戰國系)의 회색 타날문 토기 등이 공반되는 이른바 세죽리-연화보유형 문화가 성립되어 초기철기시대로 접어든다. 중남부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 중엽 무렵 도끼?끌 등의 주조철기가 처음 출현하는데, 당진 소소리와 장수 남양리, 부여 합송리(合松里) 등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의 청동기는 비파형동검에서 발달한 좁은놋단검[細形銅劍]과 줄무늬거울[細文鏡]로 대표되며, 동과(銅戈)?동모(銅?) 등의 무기류와 방울달린 동기?농경문 청동기 등의 의기(儀器)도 성행한다. 토기에서는 긴 목을 가진 항아리형태의 검은간토기와 입술 부분에 점토띄를 두른 점토대토기?두형토기 등이 사용되며, 유구석부?석도?석검 등의 등의 석기도 계속 보이고 토광묘나 옹관묘 같은 새로운 묘제가 출현한다.문화유형으로는 세죽리-연화보유형 , 대해맹-포자연 유형, 단결-크로노프카유형 , 남성리-초포리 유형등으로 나뉜다.이 시기는 Ⅰ식세형동검, 정문경식세문경으로 대표되는 1기(B.C. 300~100)와 Ⅱ식세형동검, 거여구(車與具)의 부장, 세문경의 소멸, 철기생산의 본격화 시기인 2기(B.C. 100~기원전후)로 세분된다. 청동기에는 세형동검, 동꺾창(銅戈), 동투겁창(銅矛), 팔주령(八珠鈴), 기타 의기 등이 있고, 철기에는 도끼, 화살촉, 창 이외에도 괭이, 낫, 반달칼 등의 농구가 있다. 토기에는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원삼국시대북부지역-부여,고구려,읍루,옥저,예 등 여러 종족이 활동 하였다고구려 유적은 요령성 환인현의 혼 강을 따라 분포하는 망강루,고력묘자,상고성자,사도령자,적속총이 있고, 집안지역에는 우산하,만보정,산성하,동대파고분군이 있?.부여 고고학적 지표는 석관묘를 축조하는 서단산문화를 기층문화로 하는 포자연 문화로 이해되며 길림성길림시,
한 대의 묘제에서 가장 시대적인 특징은 수혈에서 횡혈로의 변화로 실의 개념이 나타나고이에 구조적으로 벽이 등장 하며 서한 이후 사후세계관의 변화로 장구의 변화가 출현 한다한 대 능원의 구성은 먼저 묘궐이 있다. 묘궐은 묘역에 들어서는 문 같은 것을 말한다. 서한 시기에 출현하여 동한 시기에 유행하며 주로 석재로 제작되어 표면에는 화상을 조각하거나 묘주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산동성 가상현의 무씨궐이 대표적이다. 그 다음 신도를 따라서 서있는 인물이나 석조상들이 있다. 이것도 서한 시기에 출현, 동한 시기에 유행한다. 곽거병묘의 석인, 석수가 최초의 형태이며 천상, 벽사, 진묘를 의미한다. 사당은 분구의 묘비 앞에 있는 것으로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것 또한 서한기에 출현하여 동한시기에 유행한다. 기와 얹은 사당도 있으나 동한시기에는 사당은 대부분 석재로 축조하고 벽 사이에 각 종 화상을 조각 하였다. 묘비는 주로 동한시기에 유행했으며 석재로 제작하였다. 비문에는 묘주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전시대는 분구를 축조하지 않았으나 한 대에 이르러 분구를 크게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정치권력 출현을 예고 하고 토목기술의 발전과 관련이 있어 높은 신분일수록 분구는 더욱 크게 조성되었다. 신분에 따라 분구의 높이를 정해 놓았었다.사후세계관을 알수 있는 장제에 관한 내용으론 서한중기 이후의 횡혈식묘, 특히 동한의 전실묘와 석실묘의 경우에는 묘실 자체가 곽의 작용을 하게 되어 전곽, 석곽이라 할 수 있으며 묘실 내의 장구로는 관만이 있다. 귀족들의 목관은 좋은 목재를 써서 아주 정교하게 제작하여 외관이 아름답고 극히 사치스럽다. 만성 두관묘의 칠관은 수많은 옥으로 장식하여 마치 옥관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관을 덮는 번이라는 비단을 사용하였다. 이 정번에 그림을 그렸었다. 그 그림의 내용은 천상세계, 인간세계, 지하세계를 표현하였다. 마왕퇴1호묘와 3호묘에 정번이 발견되었다. 또한 감숙성무위동한묘에서는 그림이 없고 묘주인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명정이라고제가 금지하였다. 동한 조정은 또한 소수민족의 수장에게 옥의를 보내주었다. 견책은 묘 안에 각종 부장품의 명칭과 수량을 기록한 죽간으로 이루어진 장부이다. 부의라고도 불리어진다.한 대 사람들의 상례, 장속 사상의 중심은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여 대우하는 의사여생이었다. 때문에 묘실의 형식과 구조는 현실생활중의 가옥을 모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장품도 현실 생활에 있는 모든 것 들이었다.사자가 저승에서도 만족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각종 각양의 음식물을 부장하였다. 만성한묘 유승의 묘에는 5천키로에 달하는 술을 부장하였다. 그리고 옷과 옷감도 당사의 주된 수장품이다. 마왕퇴1호 한묘에는 두루마기, 혼옷 치마 등의 명주로 된 수 많은 의복들이 출토되었다. 각종 동기, 칠기와 도기는 한묘에서 가장 자주 보는 수장품인데, 그들의 주된 것은 용기로서 당시에 음식물과 음료를 넣은 것이 분명하다. 서한전기와 중기에는 항상 주로 살아있을 때 사용하던 각종 진귀한 기물을 묘속에 납입하였는데 후기로 갈수록 오로지 수장하기 위해 만든 도제명기가 현저하게 증가한다. 시대가 흘러갈수록 동한묘에서의 대량 부장품은 주로 도제명기로 이루어진다. 이유는 장원경제의 발전에 따라 지주계급층의 수장품에 대한 관념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정된 귀중품보다는 장원의 동산과 부동산을 상징하는 도제명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한 대의 지주계층은 토지의 점유에 대하여 특히 중시하였는데 이는 부사, 부토라는 흙덩어리를 보고 알 수 있다. 서한중기의 묘에는 실제 말과 수레를 부장하였는데 후기에는 도제의 수레의 모형과 말을 부장하였다. 또한 흙뿐만 아니라 청동으로도 인형을 만들어 부장하였다. 그리고 강남지방에서는 수상교통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배 모양의 도자기도 부장되었다. 한 대에는 대체로 화폐에 대한 중요성이 날로 깊어지기 때문에 동전을 부장하는 기풍이 이루어졌다. 서한시대에 유행하였는데 동한후기로 갈수록 점점 많은 동전들을 부장하였다. 또한 무덤에는 백서라 하는 두어 사조로 하여금 의지하게 하고 묘지에 대한 소유권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또한 진묘병이라고 하는 길상구나, 바램등의 주서를 기록한 도병을 부장하였다.그렇다면 한 대 묘제의 시대적 특징과 흐름에 대해 알아보자.한 대에 이르러 가장 큰 묘제의 변화는 횡혈식 동혈을 이용하여 묘실을 축조하고, 그 묘실을 현실생활 속의 가옥을 모방하여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진대의 묘제를 이어받은 서한 전기, 중기의 대표적 목곽묘는 장사현 마왕퇴한묘, 강능현 봉황산한묘, 북경 대보대한묘 등이 있다. 장강유역과 남방 및 북방의 주변지역에서는 서한 전기와 동한 중기가지 유행하였다. 일반적으로 장방형의 수혈식 토광내에 목곽을 축조한다. 대형인 경우에는 경사식, 혹은 계단식의 묘도를 구비한다. 장사, 형주지역에는 밀도가 높은 백색 혹은 청회색의 석고를 목과의 주변에 발랐다. 신분에 따라 관, 곽의 수가 달랐다. 귀족의 대묘 중에는 황장제주라는 묘제도 있었다. 서한후기의 연왕 유건의 묘이다. 황장제주란 기록에 나오는 묘제로 황제의 묘제라는 뜻이다. 묘도, 용도, 외회랑, 내회랑, 황장제주, 전실, 후실로 구성되어 있다. 15000개의 각목으로 나무담장을 축조하였다. 나무담장안에 관실을 축조하고 2곽 3관을 안치하였다. 한의 묘제가 수혈식에서 횡혈식으로 가는 과도기적 묘제라 할 수 있다.하북성 만성현의 중산정왕묘와 산동성 곡부현의 노왕묘는 서한 중기에 새로 나타난 횡혈식묘의 대표적인 것이다. 절벽에 거대한 동혈을 파고 묘실을 만든 것으로 애묘라 한다. 측실, 전실, 후실 등의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실과 양쪽 측실은 모두 목재를 써서 가옥형태로 만들고 기와를 사용하였다. 묘의 형태 및 결구가 완전히 지상의 주거건축을 모방하였다. 이 때부터 관곽의 겹수는 이미 묘주인의 신분을 헤아릴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한 대의 새로운 묘제는 중원 일대에서 성행한 공심전묘로 나타나고 있다. 공신전묘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크지 않으며 당시의 중소 지주계층의 것이다. 서한전기에는 공신전묘의 묘실은 장방형에 관중 일대에서 처음으로 소형전을 사용하여 건축한 묘가 출현하는데 전실묘라 한다. 전실묘는 출현하자 신속히 보급되어 동한에 이르자 전실묘는 전국 각지에서 유행하여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종류의 묘제가 되었다. 하북성 망도의 중산간왕묘 망도현의 태원태수묘와 같이 대귀족, 대관료의 전실묘의 규모는 아주 크고 복잡하며 그 배치는 그들의 저택과 동일하다. 어떤 전실묘에는 채색된 벽화가 있는데. 묘주인 생전의 호사했던 생활을 표현하였다.서한 말년부터 또 새로운 석실묘가 출현하여 동한에 이르러 성행한다. 화상석묘로 묘실에는 많은 정제된 석재로 축조하고 석재 위에는 각종 화상을 조각해서 석실묘, 화상석묘라 부른다. 그 분포는 강소성 북부,산동성, 하남성에 가장 많다. 기남한묘의 묘 내에 화상이 있는데 이는 묘주인이 생전에 거주하던 저택을 표현하였으며, 묘실이 바로 화상 중의 저택과 일치한다. 중요한 것은 화상의 주제는 지주 관료 계층의 생활장면과 생산활동이다.한 대에는 특히 부부합장이 유행하였는데 동혈합장보다는 이혈합장이 대부분이다. 서한중기 이후에 동묘 합장이 유행 하게 된다. 이때부터 동한까지 일정한 제도가 이루어 진다. 이는 횡혈식 전석 구조의 묘실이 편리함을 제공 하였고 내세관의 반영이라 하겠다..통치계층의 분묘중 중 최고인 것 은 황제의 능이다. 대체로 서한 제능의 형태는 진시황능을 모방하였고, 동한 제능은 또 서한의 제도를 이어 받았다. 능원의 범위는 매우 크며 , 평면은 정방형으로 분구를 중심으로 하여 4면에 담장을 쌓고 매 담장의 정중앙에 1개의 문을 설치하여 모두 4개의 문이 있었다. 제능에는 공신이나 신하의 배릉,배총이라 한다. 그리고 한 대의 황제들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축조하는데 수릉이라 하였다.전반적인 묘제의 흐름과 함께 중원지역의 한묘의 형식에 대해 알아보자.한 대 중원지역의 한묘의 형식은 총 5개의 형식으로 분류하는데 낙양 소후한묘는 서한중기에서 동한 말기까지의 시기로 중원지역 한묘 연대의 기준이 된다. 한 대 중원지역의 한묘의 형식은 총 2형은 호형의 공심전묘로 전축묘이다. 이실이 더욱 발달한다. 3형은 전, 후실이 출현하며 수혈식 묘도와 계단의 형태가 생긴다. 궁륭식의 전실과 호형의 후실을 갖는다. 반면에 이실의 규모는 소형화한다. 제 4형은 전, 후실 모두 궁륭식의 천정을 갖는 전실묘이다. 전실은 방형 궁륭식이고 후실은 장방형의 형태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5형은 횡혈식 전실 구조로 평면형태이다. 묘도는 수혈식, 수혈과 계단, 사파식으로 경사면으로 묘도를 만든 형식을 말한다.중국 한왕조가 번성했던 시기 한반도에서도 큰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기원전 108년 평양을 중심으로 설치된 한나라의 낙랑군은 한반도 중, 남부 지역의 삼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삼한 사회의 소국들은 낙랑군과의 직, 간접적인 교섭을 통하여 한의 선진 문물에 접하고 사회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묘제 토기, 동경, 마구, 철검 등의 무기류, 장신구 등 수 많은 유물들이 낙랑과의 교역으로 퍼져갔다. 특히 기원 후 2세기 중후반대의 삼한 후기에 접어들면서 한식문화 요소의 유입이 가속화된다. 이중에서 특히 한경과 화폐는 비교적 시기적으로 편년이 분명한 편이다.한경은 낙랑과의 교섭 과정에서 수입된 가장 특징적인 교역물 중 하나이다. 원래는 화장도구의 하나였지만 진, 변한 지역으로 전해지면서 조문경, 정문경 등 이전의 동경이 지닌 전통적 의미가 투영되어 위세품으로 전화되어 주로 수장묘에 한정되어 출토되고 있다. 이 지역의 출토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 째는 전한경의 유입과 그 방제경이 제작되는 단계와 둘 째, 후한경이 유입되고 그 방제경이 제작되는 단계로 구분된다.먼저 서한경은 익산 평장리 유적의 반리문경이 있다. 반리문경은 중국 서한 초기 대표적으로 유행한 동경으로 반리문이란 이무기가 감겨있는 문양을 뜻한다. 전국시대 반리문경과는 다르게 사엽문, 규구문에 의해 4분할이 출현한다. 반리문은 쌍선이나, 삼선의 형태로 표현되며 명문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성운문경은 창원 다호리 1호묘, 밀양 교동, 경주 용전동,
왕흥사지 (王興寺址)■ 지정번호 사적 제327호■ 시 대 백제시■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48외Ⅰ. 개 관577년에 백제 위덕왕이 자신의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였다. 《삼국사기》에는 600년 봄 정월에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李枚葬時 神化爲三' 즉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Ⅱ. 가람배치삼국사기에 660년 11월 5일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계탄(?灘, 부여강)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고, 7일에 이겨 700명을 목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절터는 폐허가 되었다.Ⅲ. 발굴조사1934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일원에서 왕흥명 기와와 석조불 좌상,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면서 처음으로 왕흥사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백제문화권 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부여 왕흥사지(사적 제427호)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제5차 발굴조사를 마치면서, 2004년 6월 15일 "왕흥사는 탑지와 금당지가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1금당식'이며 이는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 구조인 것으로 확인됐다"라는 내용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 국립부여박물관은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터에서, 백제시대 사리 장엄구를 발견하여 같은 해 10월 24일 일반에 공개했다. 2007년도 8차 조사에 이어 추가조사가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Ⅳ. 발굴성과2007년(제8차) 발굴조사는 2002년(제3차) 조사에서 남동편 일부가 확인되었던 목탑지의 전체적인 규모와 축조방식을 비롯해 동서석축, 왕의 왕흥사 행차와 관련하배치와는 다른 구조를 보인다.계단지는 하층기단과 상층기단 사이에 너비 2m, 폭 120cm로 축조되었으며 동·서·북변에서 확인되었으며 남변에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유실되었다. 이러한 계단의 구조 및 계단이 4변에 모두 잔존하는 점 또한 부여에서 조사된 백제 사찰과 다름점이다. 북편 계단지 북쪽으로는 금당으로 이어지는 크기 65×45cm의 장방형 보도석 3매가 확인되었다.2. 출토유물① 부여 출토 금동탑편현재 부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시대 유물로 추측되는 금동탑편이다. 이 탑편의 지붕처마에 나타나 있는 서까래는 사각형의 단면을 가로방향으로 눕혀 사용한 것으로, 이와 비슷한 형식은 중국 남방계 건축에서 지금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백제시대에 이와 같은 형식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한편 법륭사의 모든 건물에 각형(角形) 서까래가 사용된 사실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② 미륵사지 출토 소로편1987년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소로는 그 규격이나 모양으로 보아 안압지의 것과 같았는데 그 높이가 9.5cm이고 위 폭이 15.8cm 그리고 밑폭이 8.4cm로 복원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양으로 보아 이 부재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지만, 백제의 소로도 이와 거의 유사했을 것이라는 점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소로로서 알 수 있다.3. 사리기사리함은 심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 마련된 크기 16×12cm의 장방형 사리공(깊이 16cm) 내부에 안치되어 있었다.청동사리함 내부에는 은제사리병(외병)이 봉안되었고, 그 내부에 다시 금제사리병(내병)이 봉안되어 3중 구조로 사리기가 안치되어 있다.위: 사리함과 사리병, 아래: 명문 ①사리공 : 사리공은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제 뚜껑이 덮여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청동재질의 사리함이 노출되었다. 출토 당시 뚜껑의 보주형 손잡이 부분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②청동사리함 : 직경 7.9cm, 높이 10.3cm의 원통형으로 연봉 문양이 음각된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덮여 있으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연봉 주변으로었는데 앞으로 분석을 진행할 예정이다.이처럼 3중으로 된 백제시대 사리기는 정교한 세공기술과 다양한 재질의 호화로움 뿐 아니라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연대와 내용이 분명한 삼국시대 최고이자 유일한 사리기이다. 사리병이 사리를 직접 넣는 용기라면 사리함은 이것을 밖에서 감싸고 보호하는 용기이다.4. 사리공양구사리공 주변에는 다종다양한 8,000여점이 넘는 사리공양구가 매납되어 있었는데 심초석 안치 과정에서 사리를 봉안하고 왕족을 비롯한 귀족을 중심으로 귀중한 각종 물건들을 공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발군된 사리장엄구를 혹자들이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발굴 성과”라 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여진다.출토된 공양품은 대부분 장신구로 금제, 은제, 동합금, 옥, 유리, 철제 등 그 재질도 다양하다.왕흥사지에서 출토된 사리공양구들은 당시 고분 출토품과 유사한데 이는 목탑이 석가의 무덤이므로 사리 봉안시 고분 매납 부장품과 같은 맥락에서 기타 장신구들이 넣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며, 명문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운 것이라면 그와 부장품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Ⅴ. 왕흥사지 기와 가마터 발굴조사가마터의 위치는 부여읍 규암면 신리 39번지 일대로서 왕흥사지 중심 사역에서 동편으로 약 150m 벗어난 외곽지역이며 백마강변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300m 정도 떨어져 있다.왕흥사지를 감싸고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는 드무재산의 동편 끝부분 남록으로서 산자락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약간 굽어져 휘어진 경사지에 기와 가마터가 밀집되어 있다.풍화암반과 암반을 파내고 축조한 백제시대 가마 10기와 고려시대 가마 1기가 확인되었는데 가마터 주변에서 플라스크(Flask)형 원형 구덩이와 주공 등 공방시설과 관련된 유구도 일부 확인되었다.1.출토유물왕흥사지 전체 유구 배치도 발굴조사 결과 암·수 평기와를 비롯하여 연화문 수막새, 명문와, 토기류, 토제품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가 대부분으로 가마터 조성에 사용된 평기와편과 생산된 제품으로 구분되의 구조와 기능도 철처한 계획하에서 건설되었다. 성왕은 사비로 천도를 하면서 국가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각기 5기, 5방으로 나누었는데 특히 수도인 사비의 경우는 방위에 따라 동, 서, 남, 북, 중으로 나누었다. 그 중 가운데에 위치한 절이 바로 정림사이다. 이와 같이 정림사의 창건시기가 천도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진 사찰임을 입증하는 것이다.Ⅱ. 발굴조사사명이 새겨져있는 명와정림사지는 1942년에 일본인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3-4년간의 소규모 조사가 이루어져 사역의 1/3에 해당하는 면적에 대해 발굴한 결과 금당지와 강당지, 중문지, 회랑지의 일부가 확인되어 전형적인 일탑식 가람인 것이 밝혀졌다.그 후 1979-1980년 까지 2년간에 걸쳐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사역 남편의 동서로 양분된 연지를 발굴하였다.중문지는 탑에서 남으로 중심거리가 19.9m 떨어져있고, 기단부가 다른 건물지에 비하여 삭토가 심하여 초석이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상층기단은 없어졌으며 3칸x1칸의 규모임이 밝혀졌다. 금당지는 탑에서 북쪽으로 중심거리가 26.27m정도 떨어져 있으며 중문지와 마찬가지로 파괴가 심하여 원상은 알 수 없지만 차양칸의 2중기단으로 추정된다. 강당지는 금당지 북쪽에서 31.7m 거리에 떨어져 있으며 평면구성이 7칸x3칸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이 강당지에는 정림사지 석불좌상이 놓여있다.정림사지 출토 고려기와정림사지 출토 고려기와출토유물로는 백제시대와 고려시대의 기와류가 대부분이였으며 많은 와편이 폐기 된 2개소의 기와구덩이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다량의 기와도 출토 되었다. 대부분은 무문파편들였으며 암막새로는 단판연화문과 평와로는 승석문, 격자문, 평행선문 등의 기와가 수습되었으며 소조상과 소조불두, 도용이 출토되기도 하였다.정림사지 출토 연꽃무늬수막새정림사지 출토 도용공주정지산유적(公州艇止山遺蹟)■ 지정번호 사적 제 474호■ 시 대 백제시대■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 2-1번지Ⅰ. 개관충남 공주시 금성동 대부분은 자연적으로 삭평되거나 인위적으로 삭평되었다. 집자리 주변에는 단면이 복주머니처럼 생긴 저장혈(貯藏穴)이 1~2기씩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자리 내부에서는 그릇받침편, 바리, 완, 굽다리접시, 세발토기, 두껑접시, 항아리 등의 백제토기가 비교적 많이 출토 되었다.② 저장공(貯藏孔)저장공은 40개소가 확인 되었는데, 11?17?18?22?23?24?25?28호 저장공에서는 그릇받침편을 비롯한 토기편이 출토되었고, 37호 저장공에서는 내부에서 기둥구멍과 석재가 확인되었다.2. 정지산 2기 유적(6세기 전반)정지산 2기 유적은 정지산 유적의 중심시기인데, 앞 시기의 움집자리(竪穴住居址)와 지상 가옥을 모두 철거한 후에 능선 정상부를 깎아내어 내부에 건물을 세웠으며, 호(壕)와 목책(木柵)을 시설하여 외부와 격리 시켰다. 중심부에는 독특한 기와건물지 1동(棟)이 배치되고, 그 주변에 부속건물인 대벽건물지(大?建物址) 7동을 세웠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나무기둥을 이용한 울타리로 구획하였고, 그 바깥쪽에는 호와 목책을 시설하였다. 내부 울타리용 나무기둥은 방형(方形)을 사용하였으며, 외부 목책은 원형 또는 말각방형(抹角方形)의 나무기둥을 사용하였다.또한 정상 아래로 7보능 능선상에는 중심건물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들었음직한 목책(木柵)시설인 기둥구멍이 3~4겹 정도 둘러쳐져있다.① 기와건물지기와건물지는 능선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데 사방을 ‘L’자 모양으로 삭평한 다음 그 돌출된 공간상에 건축하였다. 기와 건물의 규모는 장변 8m, 단변 6m의 크기로 기둥은 3열로 배치되어있는데, 바깥쪽의 1?2열은 비교적 소규모의 기둥들이 매우 촘촘히 세워져 있고 안쪽의 제3열은 한 변에 2개씩 모두 4개의 커다란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건물은 당시의 일반 건물과는 달리 기둥을 받쳐주는 적심(積心)과 초석(礎石)을 생략한 채 단지 일정 깊이의 토광만을 판 후 곧바로 기둥을 세운 뒤 지붕에 기와를 얹어 만든 것으로, 건축물의 내구성을 강하게 하려는 이러한 초석이나 적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