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여행기국어국문학과200820742 강민상‘저는 그 누구에게도 이 회사를 추천해주고 싶지 않아요. 물론 저도 포함이구요.’떵떵거리며 회사를 나왔다. 드라마처럼 상사의 얼굴에 사표를 집어던지진 못했지만 통쾌한 마음 하나만큼은 카타르시스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난 카타르시스 뒤에 찾아올 무력감에 대비하지 못했다. 노동에 익숙해진 육체와 정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감당하지 못했다. 다시 취업 준비를 했다. 정말 가고 싶은 회사가 있었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보기 좋게 떨어졌다. 사실 요즘 같아서는 불합격이야 늘상 있는 일이지만, 그 때의 나는 감당도,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았다. 사표에 대한 후회가 가장 먼저 밀려왔고, 무력감이 날 잠식했다. 그리고 불합격 통보 10분 만에 유럽 왕복 항공권을 구매했다.어쩌면 내 인생 마지막 유럽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대한 오랫동안 많은 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여행은 2월 3일부터 3월 6일까지 31박 일정이었다. (사실 개강만 안했다면 두 달은 다녀왔을지도 모른다) 한 달 동안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프라하, 비엔나, 부다페스트, 베니스, 피렌체, 로마. 총 9개의 도시를 여행했다. 그 중에서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부다페스트는 내 유럽 여행 여정의 여섯 번째 도시였다. 단 한 번도 당도한 적 없는 부다페스트는 김춘수의 시어로, 글루미선데이의 선율로 각인된 곳이었다. 소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는 곳, 자살의 찬가가 울려퍼졌던 그 곳. 동구권 특유의 음울함이 내가 알고 있는 부다페스트의 전부였다. 사실 이런 음울함이 날 부다페스트로 이끌었다.비엔나에서 열차를 타고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4시간쯤을 달려 부다페스트 켈레티역에 도착했다. 다른 도시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고 조용했다. 우리나라의 서울역같은 곳이었음에도 매우 한산했다. 숙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갔다. 부다페스트 지하철은 규모는 작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지하상가가 있다. 편의점과 잡화점 등 다양한 상점 속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KPOP CAFE SARANG이었다. 수많은 한류스타들의 사진이 상점에 붙어있고 라면과 만두 같은 한국 간식을 팔고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는 순간 안에 있던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직원이 뭐라고 말을 했는지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아마도 ‘저기 한국인있다’ 정도의 말이었던 것 같다. 너무 당혹스러워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6시 정도가 되었다. 간단히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바로 나왔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고민되는 것 중 하나가 식사 메뉴다. 헝가리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물가가 무척 싼 편이고, 음식 값 역시 마찬가지였다. 10000원 정도면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종업원의 추천을 받아 굴라쉬와 스테이크가 포함된 헝가리 가정식 코스를 주문했다. 굴라쉬는 빨간 국물에 소고기가 들어간 스프였는데 그 맛이 육개장하고 비슷했다. 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훈족이 헝가리인의 조상이라는 설이 있는데, 굴라쉬를 먹어보니 틀림없이 맞는 듯 했다.레스토랑에서 나와 세체니 다리로 향했다. 청록의 현수교는 조명과 함께 야경을 빛냈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본 다리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괜히 도나우의 진주가 아니었다. 참 이상하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시간 타워브릿지라면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을텐데, 세체니 다리 위에는 나와 두세 명의 사람이 올라와 있을 뿐이었다. 이 넓고 아름다운 다리에 나만 올라와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내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이 내 것만 같았다. 사람이 없는 김에 큰 소리로 노래도 불렀다.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그것만으로도 여행은 의미 있는 것 같다. (후렴을 부를 때쯤 뒤에서 날 지켜보는 시선이 있음을 깨달았지만 끝까지 불렀다)부다페스트의 둘째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도나우강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부다페스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절대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mp3에 글루미선데이 원곡을 받아왔다. 부다페스트에서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비 내리는 날이야 말로 이 노래를 듣기 적격이었다.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의무적으로 울려고 노력했다. 한국은 우울하기 참 좋은 나라지만 울기엔 눈치 볼 것이 너무 많다. 마음놓고 울기 위해 먼 헝가리까지 왔다고하면 미친 소리 같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거 하나로도 충분히 가치있지 않을까 싶다. 전날 걸었던 세체니 다리를 지나 부다 왕궁으로 올라갔다. 부다페스트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부다 왕궁에 가기 위해서는 20분 동안 등산을 하거나, 케이블카를 타야한다. 난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아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부다페스트는 야경만큼이나 낮에 보는 풍경도 아름다웠다. 낮게 깔린 안개에 회색빛 빌딩은 더욱 빛을 바래고, 구름 낀 하늘은 도나우강의 뿌연색과 같았다. 보통 산을 오를 때는 잡념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부다에서의 등산은 나를 더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봤다. 새내기 때 고백했다 차인 기억에 피식 웃고, 군대 훈련소를 생각하며 걸음바꿔 걸어보기도 했다. 끔찍하게 잊고 싶은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귓가의 글루미선데이 때문인지, 소소한 추억마저 회상할 시간이 없었던 내가 불쌍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부다왕궁은 여느 궁처럼 웅장하고 화려했다. 하지만 웃음기 없는 사람처럼 딱딱하고 근엄했다. 부다의 모든 건물은 일정 채도를 넘지 않는 것을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단조롭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부다왕궁의 진가를 볼 수 있다. 부다페스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은 부다왕궁에서만 볼 수 있다.여독을 풀고 다음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세체니 온천에 갔다. 부다페스트는 유럽 최대의 온천도시이기도 하다. 혼자 여행을 하며 이곳저곳 잘 다녔지만 온천을 혼자 가려니 조금은 멋쩍었다. 세체니온천은 유적지와 같은 오라를 풍겼다. 궁전같은 외관은 물론이거니와 온천 내부는 각종 조각과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온천이라기 보단 워터파크 같았다. 할아버지들은 온천에 앉아 체스를 두시고, 소녀들은 공을 던지며 놀았다. 나는 천생 한국인인지라 느긋이 앉아 땀 빼기 바빴다. 내가 온천 속에 유일한 동양인인줄 알았는데, 한 까만 머리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중국에서 온 시진핑 주석을 닮은 그 친구는 자기도 혼자 왔다며 같이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온천에서 나온 우리는 맥주를 사러 마켓에 갔다. 그런데 왠걸, 밤 10시 이후에는 술을 팔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헝가리에선 못살겠구나 싶었다. 아쉬운대로 친구와 sns 팔로우를 맺고 헤어졌다.
대중가요에 녹아 있는 일상적 삶-시대에 따른 대중의 정서 변화를 중심으로인문학부 국어국문학과200820742 강민상1. 들어가며2. 1920-1930년대3. 1940년대4. 1950년대5. 1960년대6. 1970-1980년대7. 1990년대8. 2000년대9. 나오며1. 들어가며대중가요는 그것이 향유되는 시기의 대중들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근현대에 들어 수많은 역사적 변동을 겪어 왔고 이에 따라 대중들의 정서 역시 다양했고 급변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이는 대중가요가 대중들의 정서를 반영함과 동시에 대중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2002 월드컵 당시 한국 어디를 가나 항상 윤도현의 ‘오 필승 코리아’를 들을 수 있었다. 대중들은 이 노래 하나로 다 같이 뭉쳐 응원함과 동시에 서로 하나가 되었던 순간을 경험했다. 이처럼 대중가요는 대중성 혹은 통속성이라는 특성을 통해 대중들에게 쉽게 파고드는 속성이 있다. 본고는 시대별로 변화하는 대중들의 정서가 어떤 방식으로 대중가요 속에 투영되었는지 살펴보고 대중가요와 대중의 상호작용을 살펴보고자 한다.2. 1920-1930년대1920년대 유행하였던 ‘희망가’와 ‘황성옛터’의 노랫말을 살펴보면 모두 절망감을 노래하고 있다. 일본에 조국을 뺏긴 아픔과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시대상이 잘 들어난다. 이런 경향은 30년대 대중가요에도 계속된다.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 ‘불효자는 웁니다’와 같은 30년대 가요들의 주제는 조국을 잃은 서러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안타까움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대의 웃을 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상황을 노랫말을 통해 위로하려고 한 것이다.3. 1940년대1940년대 한국의 대중가요는 암흑기를 맞는다. 패망을 앞둔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해 대중가요의 창작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40년대의 대중가요의 대부분은 해방이후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대중가요의 노랫말에서 주로 찾을 수 있었던 정서는 분단의 비극, 해방의 감격, 항구지향성이다. 원래 항구는 해상운항의 본거지로 인구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이동성이 높다. 이동성은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항구의 노래가 많은 사회는 이동성이 높은 사회이다. 대표적인 예로 ‘목포는 항구다’, ‘울며 헤어진 부산항’ 등이 있다. 50년대의 사회변동의 조짐이 40년대 정치적 혼란기에 나타났고 이로 인해 항구지향적인 노랫말들이 등장한 것이다.4. 1950년대1950년대는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수난이 있었다. 50년대의 가사는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비애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이 주를 이룬다. 또한 해방 전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노래들이 극히 드문 것에 반해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별의 부산정거장’, ‘무너진 사랑탑’, ‘나 하나의 사랑은 가고’ 등과 같은 남녀의 애정을 그린 노랫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5. 1960년대6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중가요 노랫말의 정서는 급격하게 다양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60년대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낙후된 조국을 발전시키려는 경제 발전 계획이 국가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이런 상황으로 인해 과거와는 다르게 ‘서울의 찬가’ 같은 밝고 경쾌한 노랫말이 많이 등장했다.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노래들이 대부분을 이뤘고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전원을 동경하는 노래들도 등장했다.6. 1970-1980년대1960년대에 시작된 대중가요의 급격한 변화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 노랫말의 주제는 경향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화 되었다. 70년대의 노랫말들은 유행가적 말투나 표현방법에서 벗어나 시적 상태로 승화된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등 차분히 관조하는 태도가 생겼고, 문학성이 있는 노랫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70년대에는 대중가요의 계층화가 생겼다. 팝송과 통기타의 유행, 대학문화와 청년문화의 형성이 이런 현상을 발생하게 했다. 즉 대중가요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등의 특수한 목적성을 갖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런 연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노래가 많아졌다.7. 1990년대90년대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대표되는 새로운 장르의 인기가수들이 대거 출몰한 시기였다. ‘트롯’으로 대표되었던 대중가요의 장르는 댄스와 힙합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노랫말 역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빠른 리듬에 불리는 노랫말은 기존의 것보다 언어의 형식이 파괴되거나 변형되는 경우도 있었고 영어와 같은 외국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90년대 유행가는 신세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 신세대라는 일부의 집단의 정서를 담은 것을 대중가요라고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기성세대의 정서를 담은 노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각종 대중매체는 댄스와 힙합 같은 자극적이고 신선한 노래를 선호했기 때문에 그런 장르를 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성세대들은 트롯과 같은 장르의 노래를 향유하고 있었다.‘난 알아요’, ‘교실이데아’, ‘학원별곡’ 등의 90년대 히트곡은 기성세대에 대한 신세대의 반발심을 담고 있다. 화법이 매우 직설적이고 10들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8. 2000년대2000년대에는 10대들이 대중가요의 가장 큰 소비층으로 자리 잡았고 대중매체들은 10대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한 콘텐츠를 만들어 왔다. 이런 현상은 기성세대들을 대중문화에서 내쫓는듯한 모습을 보여 왔다. 장윤정, 박현빈과 같은 신세대 트롯 가수들이 등장하여 큰 인기를 끌었지만 아이돌과 댄스 위주의 가요계를 바꿔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학교 교명 로마자 표기법의 오류 분석국어국문학과200820742 강민상1. 들어가며2. 고유명사 표기의 오류2.1. 지역명을 딴 대학 교명의 오류2.2. 국가명 및 종교 관련어 표기의 오류2.3. 기타오류3. 자음·모음 표기의 단순 오류4. 나가며1. 들어가며2000년, ‘로마자표기법’이 개정되었다. 우리나라에 로마자표기법이 처음 생기게 된 것은 1939년이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매큔과 하버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하던 라이샤워가 만든 ‘매큔-라이샤워법’이 최초의 우리말 로마자 표기법이다. 이후 1948년, 의 부록으로 <한글을 로마자로 적는 법>을 제정했으나 10년이 갓 지난 1959년에 을 새롭게 공표하였다. 1984년에는 ‘매큔-라이샤워법’을 근간으로 하여 새로이 개정을 거쳤는데 ‘˘’(반달표)와 ’(어깻점) 등 특수 부호를 사용함으로써 텍스트의 컴퓨터화를 다소 번거롭게 만든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2000년 7월 7일에 문화관광부에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발표하면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로마자 표기법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본고가 주목할 점은 대학 교명의 로마자 표기법이다. 현행 로마자 표기법의 7항은 ‘인명, 회사명, 단체명 등은 그동안 써 온 표기를 쓸 수 있다’ 로 기존 로마자 표기법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대학 역시 단체에 속하기 때문에 로마자 표기법의 개정에 따르지 않고 기존의 그것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발음과 그 괴리가 너무 큰 경우가 많으며 그간 수없이 개정된 여러 로마자 표기법 중 그 어떤 것에도 맞지 않는 다소 엉뚱한 로마자 표기 방식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본고는 이런 대학 교명의 로마자 표기법 오류를 오류의 원인의 뚜렷한 교명들을 분석한 후, 그 원인이 뚜렷하지 않은 단순한 자음과 모음의 표기 오류를 묶어 살펴보고자 한다.2. 고유명사 표기의 오류2.1. 지역명을 딴 대학 교명의 오류지역명을 딴 대학교의 교명은 로마자 표기법의 적용범위에서 다소 애매한 위치를 갖고 있다. 지역명은 로마자자 표기법에 따라 지역명이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고 있는 형태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은 무성음과 유성음의 대립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행 로마자 표기법에서 자음 ‘ㄱ, ㄷ, ㅂ’은 g, d, b로 적으나 받침 소리로 사용될 때에는 k, t, p로 적는다. 이에 따르면 부산대학교의 교명은 Busan National University가, 경기대학교는 Gyeonggi University가 되는 것이 맞다. 또한 현행로마자 표기법에서 파찰음 ‘ㅈ’은 J로 표기하며, 그의 격음인 ‘ㅊ’은 'ch', 경음인 ‘ㅉ’은 jj로 표기한다. 이에 따르면 전북대, 전남대, 제주한라대 모두 ch 대신 j를 쓰는 것이 맞다.이런 오류 현상은 유무성음을 확실히 구분하던 기존의 로마자 표기법에서 현재는 일반 한국인이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개정된데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각 대학의 설립연도 혹은 인가연도를 그리고 영문 교명의 형태를 살펴볼 때 경기대, 전남대, 전북대, 부산대는 ‘매큔-라이샤워법’ 혹은 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매큔-라이샤워법’ 에서는 ‘ㄱ, ㅈ, ㅂ’을 ‘k, ch, p로 ‘ㅜ’는 u로 적고 있다. 참고로 경음은 ‘pp'와 같이 반복하여 적고 격음은 어깻점 (’)을 사용하여 적었다.제주한라대의 경우 그 설립연도를 봤을 때 1959년 제정 된 을 따라야하지만 그 형태는 ‘매큔-라이샤워법’ 혹은 을 따르고 있다. 은 전자법으로 현행과 같이 'ㄱ, ㄷ, ㅂ, ㅈ'을 g, d, b, j로 적어야한다. 제주한라대의 교명이 을 따르지 않은 것은 이미 지역명이 Cheju로 굳어져 사용되었던 것이 그 이유로 추정된다. 제주대학교 같은 경우도 2008년까지 Cheju University로 표기했던 것을 봤을 때, 이런 현상을 뒷받침 해준다. 마찬가지로 위의 예들 모두 굳어진 지역명의 로마자 표기로 인해 오류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길게는 50년 넘게 사용해온 교명을 쉽게 바꾸기에는 경제적 손실을 비롯하여 대표성과 상징성을 상실a National Sport University가톨릭대학교 - Catholic University그리스도대학교 - Korean Christian University감리교신학대학교 - Methodis Theological University위의 학교에서 우선 주목할 점은 ‘한국’이라는 국가명의 로마자 표기다. 한국체대 같은 경우 Korea National Sport University로 표기하며 그 발음을 로마자 표기법으로 옮기지 않고 교명을 번역하여 영어로 표기하였다. 대부분 ‘한국’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하는 교명이 이런 형태다. 이런 학교들은 국립인 경우가 많고 한국체육대학교, 한국예술종합원, 한국과학기술원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반면 한국외대 같은 경우 ‘한국’이라는 고유명사를 발음에 우선하여 ‘Hankuk’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종전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현행 표기에 따르면 ‘Hanguk'으로 표기해야한다. 이런 표기는 ’한국‘이라는 국가를 부각시키기 보다는 학교이름 자체를 고유명사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hankuk' 자체를 고유명사로 볼 수도 있다. 일례로 이웃나라 일본은 자국의 영문표기를 'Japan' 대신 'Nippon'으로 표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실제로 다양한 표기에서 Nippon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 국영방송 NHK가 가장 익숙한 예다)고려대학교의 경우 ‘고려’라는 고유명사를 ‘Korea’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분명한 로마자 표기법 오류지만 ‘의도된 오류’라고 볼 수 있겠다. ‘Korea’라는 단어의 어원이 ‘고려’에서 왔고, 어원을 반영한 표기를 통해 ‘한국’이라는 대표성을 획득하고자 한 교명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이러한 표기는 ‘국어의 표준 발음법에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로마자 표기법의 규정에 상당히 어긋난 것이다. 학술어로서의 ‘고려’의 영문표기가 Goryeo인 점을 봤을 때 Korea로 적는 것보다는 Goryeo로 적는 것이 훨씬 타당해 보인다. 또한 ‘Korea 로 적는 것의 문제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가톨릭‘이 표준어인 것에 따라 올바른 표기법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대학교의 경우 ‘Geuriseudo University'가 올바른 로마자 표기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번역체인 'Korean Christian University'를 사용한다. 이렇게 번역체의 교명을 사용할 경우 학교명이 고유명사로서 가치를 획득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스도’라는 단어 자체 역시 ’Christ (Kristo)'을 어원으로 갖고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에 비해 발음의 괴리가 심하다. 종교 관련 단어를 교명으로 가진 학교에서 이런 번역체가 사용되는 이유는 종교의 국제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크리스천 계열의 종교는 그 중심지가 영어권 국가이고, 종교의 영향력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다. 이런 이유로 한국식 발음을 로마자 표기법으로 표기하는 대신 번역체를 사용하여 통일성을 획득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2.3. 기타오류아주대학교의 경우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그 어떠한 로마자 표기법으로 표기해도 ‘Aju'가 되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주대학교의 표기는 ’Ajou‘이다. 이와 같은 표기 오류의 원인 아주대학교의 설립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주대학교는 1973년 '한불기술초급대학설립에 관한 협정'을 근거로 하여 세워진 학교다. 이런 이유로 영어가 아닌 ’불어식 발음‘을 따른 표기를 하게 된 것이다.선문대학교의 경우 Seonmun이 아닌 Sunmoon으로 표기한다. 이런 오류에는 두 가지 원인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설립자인 통일교 총재 ‘문선명’의 로마자 이름에서 교명을 따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선명은 대외적으로 자신의 이름의 로마자 표기를 Moon Sun Myung으로 하고 있다. 또한 그의 한자 이름 文鮮明은 선문(鮮文)대학교의 교명과 일치한다. 두 번째 이유는 영어 단어 Sun(태양)과 Moon(달)의 의미를 내포하기 위한 것이다. 선문대의 캐릭터가 해와 달을 형상화한 ‘해달이’라는 자 표기법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성음과 무성음의 대립을 나타내는 표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는 대학교명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오류다.성균관대학교 - SungKyunKwan University 중앙대학교 - Chungang University경희대학교 - Kyunghee University 건국대학교 - Konkook University서경대학교 Seokyeong University 조선대학교 Chosun University현행 로마자 표기법에서 자음 ‘ㄱ, ㄷ, ㅂ’은 g, d, b로 적으나 받침 소리로 사용될 때에는 k, t, p로 적는다. 위의 예시들은 모두 종전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종전 로마자 표기법은 유성음화된 ‘ㄱ, ㄷ, ㅂ, ㅈ’을 제외하고는 모두 k, t, p, ch로 표기했다.모음에서도 다양한 오류가 나타난다. 종전 표기법과 ‘매큔-라이샤워법’에서는 ‘˘’(반달표)와 ’(어깻점)를 쓴다는 특징이 있는데 ‘ㅓ,ㅕ'를 표기할 때 ?와 y?로 표기했다.서강대학교 - Sogang University 명지대학교 - Myongji University건국대학교 - Konkook University교명은 고유명사라는 점에서 짓는 사람 자의적으로 로마자 표기를 정할 수 있다. 위의 예시들도 발음상 더 가까운 것을 찾기 위해 eo대신에 o를 쓴 것으로 보인다.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위의 예시들은 각각 ㅓ,ㅕ가 ?와 y?의 형태로 쓰이던 것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U모음의 오류도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다. U모음의 오류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u로 표기돼야할 ㅜ모음이 oo로 표기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eo로 표기돼야할 ㅓ가 u로 표기되는 것이다.건국대학교 - Konkook University 숭실대학교 Soongsil University삼육대학교 - Sahmyook University 숙명여자대학교 - Sookmyung Women's University위와 같은 표기는 u로 표기돼야 할 ㅜ가 oo로 표기되는있다.
조용필 가사의 사랑과 동심·청춘의 메타포 연구-다른 대중가요들과의 메타포 비교분석을 중심으로국어국문학과200820742 강민상1. 들어가며2. 사랑의 메타포2.1. 「축복(촛불)」2.2. 「모나리자」3. 청춘·동심의 메타포3.1. 「고추잠자리」와 「못 찾겠다 꾀꼬리」3.2. 「마도요」4. 나오며1. 들어가며한국 대중가요는 조용필(1950.3.21)을 빼놓고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한국 대중가요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80년대를 주름잡던 슈퍼스타 조용필은 현재까지도 '가왕'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빛나는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196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69년, 미 8군 무대에서 데뷔하였다. 1971년, 3인조 음악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록 음악으로 전환하였으며 1974년쯤에서야 자신의 이름을 쓴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되었다. 26세가 되던 1975년에 솔로로 전향하여 발표한 트로트 음악, 이라는 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처음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껏 세운 기록들만 해도 무수히 많다. 정규 1집은 대한민국 최초 100만장 이상 팔린 앨범이었고 일본진출 앨범 역시 1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뿐만 아니라 1994년에는 대한민국 가수 최초로 1000만장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했다. 본고에서는 이런 슈퍼스타 조용필의 인기 요인을 그의 노래 가사에서 나타나는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메타포를 분석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조용필의 노래는 그의 1집부터 11집까지의 타이틀곡을 대상으로 하였다. 본고는 이번 분석을 통해 조용필이 대중가요사에서 갖는 의미와 그의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2. 사랑의 메타포한국 대중가요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 많이 있다. 이는 한국 대중가요로 한정 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시간적 범위를 더 넓게 생각해본다면 인간의 입을 통해 노래가 불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운드와 조용필의 애절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비극적이고 슬픈 분위기를 풍긴다.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노래에서 ‘촛불’은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축복’은 ‘촛불’이 상징하고 있는 대표적인 메타포 중에 하나이다. 환한 빛과 따뜻함이라는 촛불의 속성은 많은 노래 가사에서 사용된다. 하지만 조용필의 가사는 기존의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하지만 그렇지 않아 작은 촛불하나 켜보면 달라지는 게 너무나도 많아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내 주위엔 또 다른 초 하나가 놓여져 있었기에불을 밝히니 촛불이 두 개가 되고 그 불빛으로 다른 초를 또 찾고세 개가 되고 네 개가 되고 어둠은 사라져가고-god 「촛불하나」2000년에 발표된 god의 「촛불하나」는 조용필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촛불’을 사용하여 노래 가사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god의 노래에서의 촛불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밝은 촛불이 힘이 되길 기원하는 ‘축복’의 내용을 담고 있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촛불의 이미지 역시 god의 노래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하다.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셧나요 아아~연약한 이 여인을 누구에게 말할까요 사랑에 촛불이여 여인의 눈물이여너마저 꺼진다면 꺼진다면 꺼진다면 바람아 멈추어라 촛불을 지켜다오바람아 멈추어라 촛불을 지켜다오 연약한 이 여인을 누가 누가 누가 지키랴~-이희우 작사 「축복(촛불)」위 가사에 나타난 촛불의 이미지는 ‘축복’이긴 하지만 god의 노래가사처럼 혹은 대중들의 보편적인 생각처럼 희망적이거나 밝은 분위기가 아니다. 가사 속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수 없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연약한 이 여인’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촛불 밖에 없다. 이 촛불이 꺼지지 않게 화자는 소망하고 있다. ‘촛불’이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속성은 god의 노래와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희망적이기 보다는 비극적이다. 촛불이 이렇게 비극적 속성을 띠게 되는 이유는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화자가 부재 상태이되어 비극적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3.2 「모나리자」조용필의 10집 타이틀곡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의 제목을 차용했다. 조용필은 모나리자의 오묘한 미소와 신비로운 분위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에 대입하여 노래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거나 대입하는 경우는 시대를 불문하고 상당히 많다.달 갓치 두렷한 님을 뎌 달 갓치 거러 두고달달이 그린 졍을 어늬 달에 푸러 볼고지금의 달 보고 쟝탄식 하니 애 끗는 듯.-, 『시가요곡詩歌謠曲』위 작품은 『시가요곡詩歌謠曲』에 수록된 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사랑하는 임을 달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예전부터 사랑하는 임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한 경우는 많았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달’과 ‘새’ 등과 같은 자연물이 많았다면 요즘에는 말 그대로 ‘사물’, 즉 물건에 빗대어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조용필의 「모나리자」 역시 그림이라는 사물에 사랑하는 임을 빗대어 표현한 경우이다.내 모든 것 다 주어도 그 마음을 잡을 수는 없는 걸까미소가 없는 그대는 모나리자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돌아서야 하는 걸까눈물이 없는 그대는 모나리자 추억만을 간직한 채 떠나기는 너무 아쉬워끊임없이 속삭이며 그대 곁에 머물지만 이토록 아쉬워 오오정녕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 줄 수가 없나 나의 모나리자 모나리자 그런 표정은 싫어정녕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 줄 수가 없나 그대는 모나리자 모나리자 나를 슬프게 하네-박건호 작사 「모나리자」조용필의 「모나리자」는 대중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명화의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갖췄다. 알 수 없는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는 모나리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표현하여 모나리자에 대한 애타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 노래가사에서 쓰인 이미지는 비단 모나리자의 모습뿐만이 아니다. 모나리자가 비록 사람이지만 움직일 수 없는 그림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일방적인 사랑에 대해서도 잘 나타내고 있다.불러도 아무 대답 없는 넌 모나리자 여긴 너의 자리의 수록곡 「모나리자」는 조용필의 노래와 같은 사물을 통해 사랑하는 이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모나리자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는 조용필의 노래와 흡사하다.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차가운 미소를 가진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조용필의 노래가 모나리자 이미지를 차용하여 모나리자의 모습을 묘사하며 화자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엠블랙은 모나리자 자체의 이미지만 사용할 뿐 모나리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런 차이는 점점 호흡이 빠르고 짧아지는 현대 대중가요의 ‘댄스 팝’에서 서사적인 가사를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3. 동심·청춘의 메타포지금 현재 대중가요에서 ‘동심’이나 ‘청춘’에 대한 노래를 찾는다면 결코 쉽게 찾을 수 있진 않을 것이다. 19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포크 중심의 ‘청춘문화’가 대두되면서 당대 대중가요는 가수들부터 소비자들까지 청춘의 영향력이 대단했다. 사회가 변화하고 안정됨에 따라 청춘에 대한 노래는 점점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청춘에 관한 노래가 있더라도 대부분 앨범의 타이틀곡이 아니고, 청춘을 주제로 노래하는 가수들 역시 인디씬 쪽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1980년대 발매된 조용필의 10개의 정규앨범 타이틀 곡 중에서 청춘과 동심에 관련된 노래는 무려 세 곡이나 된다. 10개의 타이틀 중에서 3분의 1에 가까운 곡이 청춘과 관련된 노래인 것이다. 본고에서는 조용필 노래에서 동심과 청춘을 나타내며 사용한 메타포를 분석해보고자 한다.3.1. 「고추잠자리」와 「못 찾겠다 꾀꼬리」「고추잠자리」 1981년 발매된 조용필 3집 앨범 타이틀곡으로 슬로템포와 미디엄템포의오고감이 반전의 매력을 주는 곡이다. 청년층뿐만 아니라 중장년층에게도 폭넓은 인기를 얻은 곡이었고 당시 KBS라디오차트에서 24주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외로움 젖은 마음으로자리는 향토적이고 전원적인 이미지이다. 하지만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는 향토적 분위기를 일부분 풍기긴 하지만 이 노래의 주된 정서를 향토적 정서라고 할 수는 없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청춘의 답답함 혹은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정도로 이 노래의 정서를 살펴볼 수 있다.어두워져 가는 골목에 서면 어린 시절 술래잡기 생각이 날거야모두가 숨어버려 서성거리다 무서운 생각에 나는 그만 울어버렸지하나 둘 아이들은 돌아가 버리고 교회당 지붕위로 저 달이 떠올 때까맣게 키가 큰 전봇대에 기대 앉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이제는 커다란 어른이 되어 눈을 감고 세어보니 지금은 내 나이는찾을 때도 됐는데 보일 때도 됐는데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김순곤 작사 「못찾겠다 꾀꼬리」조용필의 4집 타이틀곡 「못찾겠다 꾀꼬리」는 「고추잠자리」를 작사한 김순곤이 작사했다. 같은 작사가의 곡인만큼 두 곡은 공통점이 많다. 그 중 가장 큰 공통점은 동심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이다. 고추잠자리와 어린 시절 놀이할 때 사용하던 구호를 통해 동심을 회상하고 있다. 이런 회상과 동시에 현재에 대한 답답함이 드러난다. 「고추잠자리」에서는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라는 가사를 통해 나이가 든 현재 상황이 탐탁지 않음을 나타낸다. 「못찾겠다 꾀꼬리」에서 화자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 ‘어른이 되어도 찾을 수 없는 어떤 것’에 의해 답답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책을 제시해주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고 그저 담담히 화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대중들의 감수성을 자극했다.3.2. 「마도요」「마도요」는 1987년 발매된 조용필 9집의 타이틀곡으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마도요)’라는 새를 통해 표현한 노래이다. 마도요
조용필이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조용필 작품의 장르의 초월과 결합을 중심으로국어국문학과200820742 강민상1. 들어가며2. 단조 이지리스닝과 록의 결합3. 장르의 초월3.1. 록3.2. 단조 이지리스닝3.3. 트로트와 민요4. 조용필의 가치5. 나오며1. 들어가며한국 대중가요는 조용필(1950.3.21)을 빼놓고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한국 대중가요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80년대를 주름잡던 슈퍼스타 조용필은 현재까지도 '가왕'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빛나는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196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69년, 미 8군 무대에서 데뷔하였다. 1971년, 3인조 음악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록 음악으로 전환하였으며 1974년쯤에서야 자신의 이름을 쓴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되었다. 26세가 되던 1975년에 솔로로 전향하여 발표한 트로트 음악, 이라는 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처음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껏 세운 기록들만 해도 무수히 많다. 정규 1집은 대한민국 최초 100만장 이상 팔린 앨범이었고 일본진출 앨범 역시 1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뿐만 아니라 1994년에는 대한민국 가수 최초로 1000만장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했다. 본고에서는 이런 슈퍼스타 조용필의 인기 요인을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은 그의 작품세계를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조용필이 대중가요사에서 갖는 의미와 그의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2. 이지리스닝)과 록의 결합조용필은 단조 이지리스닝과 록을 결합하여 대중가요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내었고 이것은 대중가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지리스닝은 1960년대 미국에서 유입된 장르로서 트로트의 5음계에서 벗어나 7음계를 구사한다. 미국식 빅밴드와 흡사한 악기편성과 연주방식이 도입)되고 가수의 창법 역시 이전과 달라지는 양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곡으로 , 와 같은 곡들이 있다. 이런 노래들은 이전의 트로트 양식의 노래와는 달리 7음계를 사용하며 미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화성과 선율을 볼 때 기존 트로트와 같이 단조롭고 7음계를 사용하긴 했지만 5음계가 여전히 주로 사용되었다.조용필은 이런 이지리스닝을 록과 결합하여 새로운 퓨전장르를 선보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 등이 있는데 이 곡들은 모두 가수 자신인 조용필이 작곡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조용필은 60년대의 단조 이지리스닝을 기반으로 록의 샤우팅 창법과 화려한 화성을 구사했다. 조용필 등장 이전 캠퍼스밴드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록은 반복적인 화성과 선율에 비교적 빠른 리듬이 결합된 작품들이었고, 저음부에서 순차적으로 고음부로 올라가 절정의 샤우팅이 충격적이고 파괴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필은 샤우팅을 강조하기 위해 노래의 전반부에서는 읊조리듯 말하다 후렴에서 폭발하는 가창방식을 구사했다. 조용필은 이런 가창 방식을 통해 기존의 캠퍼스 밴드들의 경쾌하고 발랄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1960년대의 트로트적 단조 이지리스닝의 분위기를 계승하면서 극적이고 격렬한 록의 요소가 가미된 노래를 선보였다.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배명숙 작사 한 여자가 울고 있는 비오는 거리 밤새도록 가로등도 비에 젖었네슬퍼할 수 없어요 잊을 수도 없어요 이슬에 맺혔네 두 눈에 맺혔네눈물인가 빗물인가 눈물인가 빗물인가잊지마세요 잊지마세요이희우 작사 또한 가사 역시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음악적 분위기와 가사의 문학적 정서가 상통하고 있다.1985년 발표된 은 그동안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르였다. 노래의 도입부와 중간 중간 나오는 내레이션과 노래의 시작부터 폭발적으로 올라가는 음정은 새로운 가창 방식이었다. 이 노래는 반복적인 화성을 사용하고 있지만 샤우팅 창법을 사용하고 단조 이지리스닝의 유려한 선율과 화성이 만들어내는 비극적 페이소스를 계승하는 점을 볼 때 단조 이지리스닝과 록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3. 장르의 초월3.1. 록조용필은 앞에서 살펴본 단조 이지리스닝과 록이 결합된 장르보다 한층 더 록에 가까운 장르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단조 이지리스닝에서 벗어나 캠퍼스 밴드의 것과 유사한 밝고 경쾌한 노래를 작곡했다. 지금까지도 불려지는 가 그 예다. 특히 여태까지는 우리나라 노래에서는 거의 쓰지 않았고 팝송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복잡한 화성 진행과 독특한 가성을 구사함으로써 새로운 취향의 미국 대중음악을 받아들이고 있던 층과 젊은 층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는 가 실린 조용필 1집에 실려 있는데 한 앨범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다루며 장르의 결합까지 이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982년 발표된 는 반복적인 화성과 빠른 리듬이라는 전형적인 캠퍼스밴드의 록의 특징을 보인다. 당시 록이라는 장르가 대학가의 밴드 위주로 공연되던 장르라는 점을 볼 때 조용필이 얼마나 다양한 장르를 소화한 가수인지 알 수 있다. 1985년에 발표된 는 현재 한국대중가요에서 말하는 록에 더 가까운 특징을 보인다. 드럼으로 연주된 전형적인 록 비트와 일렉 사운드의 조합은 전형적인 록의 모습을 보여준다.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반짝이던 눈망울이 내 마음에 되살아나네박건호 작사 노래의 가사를 살펴보면 음악적 분위기를 따라 상당히 경쾌하고 발랄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 와 같이 여성의 사랑에 대해 다루고는 있지만 무게감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는 와 같은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내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볼 때 조용필이 다양한 장르를 다룬 만큼 가사의 내용 역시 다양성을 띠고 있으며 가사는 노래의 음악적 분위기를 따라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음악적 분위기와 가사가 담고 있는 정서의 연관성은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3.2. 단조 이지리스닝조용필 1960년대부터 이어진 이지리스닝의 경향을 그대로 노래하기도 했다. 역시나 조용필 1집에 수록되어 있는 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노래는 60년대 트로트를 기반으로 한 단조 이지리스닝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조용필 한 사람이 부른 노래지만 장르에 따라 창법이 큰 변화를 보여 마치 다른 가수의 노래 같기도 하며 혹은 다른 앨범에 실린 노래 같기도 하다. 음악적 특징뿐만 아니라 가사 역시 1960년대의 단조 이지리스닝과 유사하다.다시는 생각을 말자 생각을 말자고그렇게 애타던 말 한마디 못하고 잊어야 잊어야만 될 사랑이기에깨끗이 묻어버린 내 청춘이건만 그래도 못 잊어 나 홀로 불러보네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오사랑 작사 조용필이 남성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가사에는 여성적인 정서가 묻어나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하고 홀로 그리워하는 내용의 가사는 1960년대 당시 트로트와 단조 이지리스닝의 결합된 노래의 정서와 통한다. 조용필이 이렇게 다양한 정서의 노랫말을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에 비해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되어감에 따라 대중들의 정서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3.3 트로트와 민요조용필은 트로트까지 구사한 가수다. 1981년 발표된 앨범 ‘미워 미워 미워’에 수록된 와 가 대표적인 예다. 이 노래들은 1960년대 이미자 노래를 연상시키는 현악기 연주가 주도하도록 되어 있다.) 조용필은 또한 와 와 같은 트로트 곡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조용필의 장르의 초월은 민요 작품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과 을 과감하게 자신만의 창법으로 소화하여 앨범에 수록했다.4. 조용필의 가치조용필은 20세기 한국가요사에서 불렸던 모든 장르를 불렀던 가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장르를 섭렵했다. 조용필에게 붙여진 가왕, 국민가수라는 별명은 당연해 보인다. 그가 이룬 장르의 초월과 결합은 여러 연령층, 다양한 장르의 음악팬들을 매혹시킬 수 있었다. 한 앨범 안에 록과 트롯, 이지리스닝과 포크, 심지어 민요까지 다양한 장르를 수록했다. 현재의 아이돌 음반이 10대에게만 소비되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앨범은 청소년부터 중장년층까지 소비자로 만들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이는 조용필에게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주었다. 10대 대상의 쇼프로그램에서는 하얀 스카프를 걸치고 온몸을 흔들면서 를 불러 발랄한 오빠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중장년 대상의 무대에서는 단정한 나비넥타이에 검은 정장을 입고 를 불러 성숙한 장년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당시 카세트테이프의 보급으로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10대들도 조용필의 음반을 구매할 수 있었고 이런 보급의 용이성은 조용필의 파급력을 더욱 더 크게 해줬다.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조용필의 오빠부대는 이런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