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설교자1. 설교라야만 한다.# 설교의 쇠퇴와 몰락 ? 일반적인 이유볼드윈 주의 등의 영향으로 연설에 대한 가치가 떨어졌고, 현대의 발전 된 교육과 높아진 지식수준이 연설이 아니어도 지식과 진리를 책에서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또, T.V, 라디오 등의 매체가 꼭 한 곳에 모여 연설을 듣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이러한 영향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설교처럼 입으로 전달되는 말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활동가는 위대한 연설가였다.# 설교를 쇠퇴시킨 ‘교회의 태도’ - 성경의 권위 약화, 강단꾼들, 설교에 대한 잘못된 개념 형성1)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진리에 대한 신뢰가 약화 됨.이것이 주된 원인이다. 성경의 권위가 상실되면 제대로 말할 수도, 설교 할 수도 없다. 설교의 위대함은 주제의 위대함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설교는 윤리적인 평화나 도덕적 훈계, 사회 정치적 담론에 자리를 내주었다.2) 강단을 점령한 ‘강단꾼들’의 등장이들은 강단을 점령하고 청중을 지배했으며, 쇼맨십이 상당하여 회중을 다루고 감정을 자극하는 것으로 청중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전문 직업인’이었다. 이들의 등장으로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해졌고, 웅변과 수사가 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설교가 오락의 한 형태로 전락해버렸다.3) 설교문과 설교 행위에 대한 잘못된 개념 형성여기에는 설교집의 인쇄와 출판이 영향을 끼쳤다. 문학적으로 재능이 있는 스코틀랜드 쪽 설교자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메시지의 진실성보다 문학적 표현에 더 강조점을 두었는데, 이것이 인쇄되고 출판되어 많은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설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형성 되었다. - 잘못된 방향의 설교가 인쇄와 출판으로 퍼져나감.이 모든 결과로 설교에 대한 ‘새로운(그러나 잘못된) 개념’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강연, 강의’이다. 설교가 아닌 강연이 되어버린 것이다.# 설교를 위협하는 요소들 ? 예배의 형식화, 오락적 요소, 간증, 하는 것으 가장 먼저 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부흥교회사를 봐도 어김없이 설교가 부흥의 중심에 있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날 때,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항상 새로운 설교가 등장하면서였다.2. 대안은 없다.# 단순한 질병의 문제가 아니다.인간의 필요를 사람들은 질병의 측면에서 보려고 한다.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질병에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을 거슬러 반역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것”이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영적으로 죽은 존재”, “맹인”, “어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야기한다.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무지’이다. 신체적, 영적 질병, 고통, 괴로움은 원죄의 결과요 타락의 산물일 뿐이다. 원인은 타락이며 질병은 결과이다.요악 :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질병에서 찾는다. 하지만 성경은 타락이 원인이요 문제라고 말한다. 질병은 원에 대한 결과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식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즉, 구원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이다. 즉, 인간에게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은 타락한 이유를 듣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듣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을 알려주는 일이야 말로 교회와 설교자의 ‘고유한’, ‘특별한’, ‘예외적인’ 임무이다. 교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런 내용을 알릴 수 있는 사람은 설교자 밖에 없다. 설교자는 이 고유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가 따로 ‘구별해서’ 세운 사람이다.요약 :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진리를 ‘듣는 것’이며, 이는 교회와 설교자의 ‘고유한 임ㅁ’이다. 설교자는 이를 위해 구별해서 세운 사람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세상에 많은 이류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매개체가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증상의 완화 정도의 수준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이다. 증상의 오나화는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하여 제거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기 때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소리다. 사람은 변하지 않고,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는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느냐는 주장두 번째 반대 의견은 책이나 잡지, TV나 라디오 등을 통해도 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맞지만, 정답은 아니다. 이것은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사람이 너무 많은 통제권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책을 읽거나 TV를 보다가 동의하지 않으면 덮어버리거나 꺼버리며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에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교회는 선교 공동체이다. 교회 자체가 메시지의 일부이며 회중이 모인 것 자체가 설교의 일부인 것이다. 교회는 단순한 인간의 모임이 아닌,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는 모임이다. 그 모임 자체로 설교적 역할을 하게 된다. 영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는 다른 활동으로 대체할 수 없다.요약 : 다른 매개체로 설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설교가, 그리고 교회가 가지는 핵심요소를 잊는 주장이다. 교회는 그 자체로 메시지의 일부이자 설교의 일부이다. 특히 영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다른 것이 대체할 수 없다.3. 설교문과 설교 행위# 설교를 ‘대화’로 대체할 수 있을까왜 굳이 설교를 해야 하는가? 토론, 대화로 충분히 복음을 전하고, 전도할 수 있지 않은가? 라는 반대 의견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먼저 그 방법은 효과적이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반대한다.# 하나님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라는 사실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며, 그렇게 믿어야 하는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신 분이며, 우리는 경건하고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오락이 아니다.복음의 문제는 인생에서 가장 심각하고 엄숙하며 긴박한 영원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자신의 몸의 질병에 대해서도 토론하고 오락거리로 전락시키는, 오랜 시간 노력하여 설교문이 완성된다면, 이제 그 설교문을 어떻게 ‘전달’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준비해야 한다.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설교 행위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1) 설교는 전인격이 관련된다. 설교자의 인격, 행동, 삶, 동작 등 모든 것이 관련된다.2) 또한 하나님의 메시지, 명령을 위임한 자라는 권위에 대한 인식, 자각이 필요하다. 교만하고 자신감에 넘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가진 권위에 대한 인식과 자각을 가지고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3) 설교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설교문과 형식에만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게 따라가는 자유로움이 필요하다.4) 설교는 청중과의 상호작용임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5) 설교는 진지해야 한다. 동시에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 설교는 결코 가볍지 않다. 메시지 자체의 진중함이 전달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루해서는 안 된다. 진지함과 지루함은 다른 것이다.6) 설교자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먼저 매료되어야 한다. 스스로 설득 당하지 못하고, 흥분되지 않는 것으로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 설교자는 메시지에 매료되어 열심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7) 또한, 청중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설교는 일방적인 주입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소통이며, 청중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그들의 관심, 삶의 여건, 고민 등에 대한 관심. 즉 회중을 향한 사랑의 관심이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8) 열심과 관심은 자연히 뜨거움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믿으며, 회중을 사랑한다면, 자연히 뜨거운 열정이 생길 수 밖에 없다.9) 설교자는 긴박해야 한다. 설교는 영혼에 관한 일이며, 영원에 관한 일이다.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이들을 살리는 일이다. 이것은 긴박할 수 밖에 없다.10) 이 모든 것이 작용할 때 설득력 있는 파토스, 즉 감정적 호소가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이다. 설교는 하나님이 사이고 이성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일반적인 훈련 다음으로는 특별한 훈련도 필요하다. 원어, 신학, 교회사에 대한 연구이다. 원어는 성경의 정확성을 파악하는 것을 위해, 신학은 설교의 깊이와 안정성을 위해 필요하다. 무엇보다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교회사를 통해 이단에 빠진 이들의 오류와 교회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흥시키시는 하나님의 선교 역사, 그리고 위대한 설교자들의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있다.마지막으로 설교는 배우는 것도 아니고,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영혼을 향한 사랑, 진리에 대한 지식과 내주하시는 성령이다. 이것이 첫째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 외의 것들은 도움을 받는 정도의 위치에 있을 뿐이다.# 설교자의 소명. 하나님과 영혼을 향한 사랑. 선포에 대한 압박과 외부의 검증들. 이 부분을 보며 내 소명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인위적인 양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학을 배운다고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설교를 많이 한다고 해서 설교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 속에 하나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영혼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다. 진리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전하고 선포하고자 하는 열정이다. 무엇보다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는가를 점검해야 한다.소명에 대한 내용은, 소명을 받은 사람이어도 계속해서 점검해야 할 부분인 듯하다. 사람이 악해서 까먹고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소명. 그것을 점검하는 것이 설교하기 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다.7, 회중설교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 간의 상호호환이 일어나는,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둘 사이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에는 강단을 강조함으로, 오늘 날에는 회중석이 자신의 권리를 강조함으로 서로를 분리시키고 있다.회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