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이해체육교육과20092026 추 효 정노장 사상의 교육철학적 의의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통칭하여 노장사상이라고 한다. 동양 철학을 큰 두 축으로 분리하자면 유가사상과 노장사상으로 나눌 수 있다. 유가사상은 오늘날의 진보進步 사상과 같이 진進을 주장하며 창조, 지속적으로 성장을 추구하였으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도에 의해 정치를 이끌기 위한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의 형태를 지녔다.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재하기위해 노력하였고,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러한 유가사상은 민중을 위한 통치, 덕치를 주장하였지만, 이것 또한 한 소수 집단이 다수를 지배하는 것을 용인함으로써 폭력적인 지배를 수긍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택선고집(擇善固執) 하면서 예를 들자면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을 분리하여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면서 더욱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 진리는 더욱 우월한 어떤 하나라고 칭할 수 있다. 반면 노자는 이러한 일체의 인위적인 권력이나 명예 재물로부터 물러날 것을 주장하는 귀歸를 주장하였고, 자연의 생성변화의 흐름이 최선의 도가 된다. 노자는 만물은 평등한 존재라고 주장하였으며,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물을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만든 인위적인 제도, 질서, 계급 따위를 부정하였다. 이런 철학으로 하여 그 당시의 군주들에게는 무시당한 철학이었다. 그렇지만 노자는 이런 것을 신경 쓰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최고의 ‘도’라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사고로만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에게 도는 무無 라고 표현 되어있는데, 이것은 말이라는 어떠한 인위적인 형식으로는 인지할 수 없고, 존재하는 사물 유有의 내면에 숨겨진 사물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교의 ‘도’가 보편적이고,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길이라면, 이러한 노자의 ‘도’는 정해지지 않고, 수많은 길이 있으며 어떤 입장에서 어떤 도를 찾든지 그것은 모두 ‘도’가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에게 교육이란 불언지교 不言之敎 로써 언어라는 하나의 사회적 약속으로는 뜻을 다 말할 수 없으며, 교육은 형이상학적이고, 무형이고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현재 우리가 언어로써 그저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우리의 교육현실의 한계점을 찾을 수 있다. 노자가 말한 교육은 자연에 대한 공감과 인위적인 요소를 배재하고 말로 통칭할 수 없는 느낌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다른 것과 차별과 구별을 두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름으로는 그 사물, 사람의 전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일부분인 것이다. 우리가 개미라고 부르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구별 부분이지, 그것의 전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부분에서 유가와의 차이점이 또한번 드러나게 되는데, 유가에서는 인식 가능한 대상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며, 인의예지라는 이름을 붙여 표현 할 수 있다. 반면 도가의 사상에서는 인식 불가능한 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 도가 트인 사람일수록 말로 표현할 수없어서 침묵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며 , 이것으로 하여금 공자가 학식을 제자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유세로 보고 비판적으로 적고 있다. 또 하나 노장사상의 대표적인 것은 모든 사물은 평등하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사람들의 인식에서 상대적으로 인식된다. 대립되는 개념도 없고, 한 가지 의미로 고정불변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물은 상대적으로 상호 전환한다. 이것은 절대적 기준으로 인해 인식의 상투성을 반성하고, 인위적 작풍을 청산, 인위적 이분법을 버리기를 촉구하고 있다.장자는 노자와 큰 틀을 같이하기는 하지만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인다. 노자의 도는 유有의 근원이고, 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지만, 장자는 도는 무궁한 생성변화 그자체이며, 그 도와 함께 소요逍遙 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개인주의적이고,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바이다. 장자가 전하는 도에는 주로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그중 가장 눈여겨 봐야할 것은 장자의 소요이다. 장자의 소요유 逍遙遊는 목적 없이 배회하며 놂을 의미한다. 소요유 그자체가 목적이 된다. 장자의 도는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것인데, 이로써 세상을 조감할 수 있게 된다. 장자의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와 붕새 이야기는 이것을 의미한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한가지 밖에 보지 못한다. 이런 개구리의 입장이 유학을 의미하는 것인데, 정치개혁을 하고자하는 유학은 한 가지 틀 안에서 세계를 조명하며, 기존의 논리, 기득권의 논리를 고집한다. 또 혼돈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홀과 숙은 모든 사물을 자신이 생각한 사고의 틀로 파악하여 분석과 분별전의 통체적 세계로 상징되는 혼돈을 죽음으로 치닫게 한다. 여기서 홀과 숙은 유가적 사상을 뜻한다. 이러한 독단적인 생각은 세계의 파멸을 일으킨다. 하지만 장자의 붕새는 이러한 우물 속과 독단적 생각을 뛰어 넘고, 하늘 높이서 세계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멀리보고 다양한 시각을 갖게 한다. 유학처럼 한 가지를 고집하고, 좀 더 나은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것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새로운 시각을 갖고 자연의 시각을 갖게 한다. 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찰나에 살고 있고, 모든 사물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유용한가. 유용하지 않은가를 재지 않는다. 유용하지 않은 것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고, 유용한 것이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을 전환하여 생각하길 원하며, 유용성을 초월하여 조감하길 원한다. 이곳에서도 모든 사물이 동일한 가치를 지닌, 만물제동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은 몽접주인이라는 장자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데,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대목에서는 주로 우리가 인생의 허무함이라고들 알고 있지만, 이것은 장자가 표현하고자한 내용과 어긋난다. 장자는 인간과 인간을 제외한 자연의 경계의 모호함으로 물아일체 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자연과 인간의 소통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은 인과 과로 이루어졌으며,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상호침투, 동화의 관계이다. 이로써 인위에서 벗어나 자연의 시각으로 사고의 다양성과 유연성을 얻을 수 있다. 장자의 교육은 말로써 표현할 수밖에는 없지만, 그 말에 교육이 구애받아서 본뜻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말은 그저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쓰고 그것을 표현했으면 말에 집착하지 말고, 뜻을 위해 형상을 쓰고, 뜻을 얻었을 때는 형상을 잊어버리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