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갑신)년과 1894(갑오)년의 개혁을 중심으로-1. 머리말이 논문의 저자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로 전환하는 시기에 당시 후진국이었던 조선은 식민지 위기에 처해있었고, 당시 조선인은 몽매하다고 일제는 많이 이야기하였다. 이 시기에 부르주아적 개혁자는 후진국의 자본주의화와 반식민지화의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 부르주아적 개혁자에 해당되는 것이 개화파인데 이 개화파를 주축으로 한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갑오개혁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조선에 있어서 2대과제인 자본주의화와 민족독립을 고수하는 것, 즉 사회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에 대해 개화파가 어떻게 대처하고 있었는가를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는 것이다. 즉 일제의 침략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조선의 주체적 요인을 추구하고, 그 역사적 교훈을 참작하지 않으면 현실에 대처하려는 이론적인 무기가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글을 서술하고 있다.2. 본론개화사상이 발생한 것은 1860년이고 개화파가 형성된 것은 1870년대라고 한다. 개화사상이 발생한 1860년대는 조선 사상사에서 주목되는 시기이다. 최제우의 동학사상, 위정척사 운동 등 3개의 사상은 구미의 조섬침략을 계기로 하여 그 위기감에 대처하여 성립한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3개의 사상은 그 후의 조선근대사상에 있어서 반봉건과 반침략투쟁의 기반으로 되고 있다. 사상사 속에서 말하자면 이러한 사상이 하나의 방향으로 질적 전환을 하지 못하고 유기적 제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식민지화의 한 요인으로도 된다. 구미의 충격에 대하여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대응한 것이 개화사상이고 이 개화사상의 기본적인 내용으로는 조선의 정치적 모순을 자각하고, 세계의 추세에 즉응하는 국내의 정치적 혁신을 꾀하는 것, 구미침략을 계기로 조선민중의 반침략투쟁을 반영한 애국사상, 선진문화를 도입하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것으로 요약된다.개화사상가들은 당시 정치되어 있어서 당시의 정치기구를 통하여 개화사상을 반영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배층의 젊은 청년에게 개화사상을 보급시켰다. 그 대표적 인물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개화파를 형성하여 근대적 개혁의 실천에 앞장섰다. 군인 지식인 상인등을 결집시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개화사상을 받아 통일시키는 동시에 제각기 다른 영향하에 있었던 문하생을 통합하여 개화파를 형성해서 근대적 개혁의 실천에 앞장섰다. 개화파가 형성된 것은 75년이전으로, 주요 구성원으로는 김옥균, 박영효 형제, 홍영식 등이었다. 이들이 바로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주요 인물들이었다.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일본 측 주장이고 후자는 청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논문에서는 후자의 연구를 소개하면서 논해를 보고 있다.개화파가 정변을 주체적으로 계획 실행한 과정과, 개화파형성의 활동이 근대적 개혁을 지향하고 있었던 점을 보면 김옥균은 80년 무렵부터 정부 내에서 발언권을 얻어 정변 이전에 민씨정권과 대항하여 근대적 개혁을 수행하였는데 그것은 신식군대의 양성, 인재의 양성, 사회 문화의 개혁운동, 기타 개혁,근대적 경찰제도, 근대적 우편제도로 대표된다. 민씨정권은 점차 무력해지고 개화파는 80년 무렵부터 정부 내에서 발언권을 높혀 위로부터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민씨정권은 이 정책을 방해하고 개화파의 주요멤버를 지방 또는 해외로 보냈다. 김옥균은 반동정책의 강화에 대항하여 종래의 평화와 점진적 방법으로부터 무력적 방법으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개혁을 수행하려고 하였다. 10월 17일 쿠데타를 결행하여 성공한 듯이 보였지만, 결국은 청군의 간섭과 호언장담하였던 일본군의 철수 등으로 삼일천하에 그치고, 개화파는 신정부를 조직하고 신정강을 발표했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하나의 문제이다. 정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이 아니라 개화파이고 일본은 협력자였다. 청군견불가피하였고 김옥균은 스스로 일본을 모델로 하여 조선을 개혁시키기 위해 그 우의와 조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한 것이었다. 개화파가 조선의 부르주아와 어느 정도 연결되어 그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해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지만, 그것과 개화파의 관계는 금후의 과제로 생각된다.1894년 갑오개혁에 대해서도 외인론과 내인론의 두 견해가 있다. 외인론은 일본인 역사가에 의한 견해이고 내인론은 개화파가 의로부터 행한 개혁이며 개화파의 주체적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90년의 중엽에는 일본은 여하한 구실을 갖고서도 조선침략전쟁을 시작할 주체적 조건이 일단 갖추어져 있었다. 90년경까지 달성한 자본주의와 군비확장 등이 제국주의의 기초저건으로 되었다. 조선은 청일 양국으로부터 침략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침략의 질에는 차이가 있다. 청국의 간섭은 강화되었지만 그것은 침략성과 일본 견제의 양측면이 있었다. 중국의 조선 침략은 양적으로 압도적으로 보이지만 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내재적인 강력한 것으로 나타나지 못하였다. 또 조선 민중에게 반일감과 반청감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동일한 차원은 아니었다. 일본에 대한 반일감은 [90년대]에는 민족적 위기감으로 이루어져 강렬하였다. 반청감은 간섭에 대하여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특히 개화파는 근대적 독립?자주의 입장에서 한편에서는 구래의 봉건적인 [종주권]을 부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혁의 장애인 민씨정권의 기반을 배제하려는 의미에서 반청정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식민지적 위기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경제적 상황을 보면 76년 개항 이후 외국상품경제의 침입은 자생적인 자본주의적 맹아를 왜곡시켰다. 76년에서 84년경까지는 대부분 조선무역은 일본과 행하여 졌다. 일본상인은 영국제 면포 금속류 잡화등을 수입하고 조선으로부터 식량 금등을 수출했다. 이는 재래의 조선의 가내부업에 타격을 주었다. 중국 또한 불평등조약을 조선과 체결하여 일본상인에게 대항하였다. 중국상인의 변함없는 영국제 면포의 중계무 일본상인은 차츰 자국제 면포를 반입하고 쌀?콩?금?지금을 반출하고 있었다. 특히 수입에 있어서는 청?일이 균형을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수출에 있어서는 일본이 독점하고 있었다. 이렇듯 청과 일은 청?일 양국의 상인이 조선상인의 권익을 침탈하고 외국상품을 조선 내부에 침투시켜 농민적 상품시장을 침식하기 시작하였다.농민 봉기 부분을 보자면 조선말기는 민란시대라고 불리워질 만큼 농민봉기가 많았다. 특히 1862년 진주봉기 이후 그것은 격화되었다. 76년 개항이후 외국자본주의 상품의 유입은 내적인 모순을 격화시켰고, 그것에 대응하여 일어난 것이 [임오]폭동으로, 민씨정권과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최초의 대규모 투쟁이었다. 80년대는 일반적으로 지방적?분산적이었고, 반봉건?반침략은 그만큼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90년대의 농민봉기는 질적으로 전환한다. 90년대 봉기의 특징은 지역적으로 종래 삼남곡창지대에서 주로 나타났고 일본의 침략에 반대한 투쟁이었다. 농민은 물론 상인 어민 등 광범한 층이 봉기하였다. 그리고 동학운동의 전개이다.동학운동의 전개는 반침략 반봉건적 성격이었다. 94년의 갑오농민전쟁은 전라도 고부지방의 농민봉기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동학조직은 신도 뿐 아니라 일반농민도 결집시켜 그 중핵대가 되고, 전봉준 등 동학 지방간부의 다수가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청 일 양군의 개입으로 전쟁으로 발전할 위험한 정세추이와 농번기 등 농민군 내부의 사정에 따라 전주화약을 체결한 농민군은 지방으로 분산했다. 그러나 불법침입한 일본군은 철수를 거부하고 오히려 왕궁을 습격하여 청일전쟁을 개시했다. 이리하여 농민 주력군의 봉기에 호응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일투쟁도 근대적인 일본군과 개화파정권의 연합군에 의해 패퇴당하였다. 이는 민비살해사건 후의 반일의병투쟁으로 계승되었다.다음으로는 갑오개혁의 문제점에 대하여 알아보겠는데 갑오개혁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정권의 장악과정으로서 타율성을 지적할 수 있다. 일본군의 침략행위 결과 타율적으로 성립비자주성은 뚜렷하였다. 그리고 반봉건성을 본다면 일본과의 관계를 사상하고 종래의 봉건적 사회제도에 근대적 개혁안을 대비시키면 그 획기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하지만 대부분이 좌절되었다. 반침략에 관해 본다면 개화파 정권과 일본과의 관계를 보는 것이 중요한데 일본국의 조선침략을 추궁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침략전쟁에 협력하게 되었다. 이것은 개화파정권이 민족적 주체성을 방기하여 일본에 종속하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침략자인 일본군에 종속하여 반민족정책을 취하고 있는 개화파정권에 대한 비난이 여러층에서 일고 있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개화파와 일본군과는 모순이 존재하고 대립도 많아 일본에 저항한 면도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결정적인 때 어떻게 사건에 대처하는가가 문제이다. 또한 주관적으로는 일본을 이용하여 개혁을 단행하려 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90년대 특히 점령하에서는 객관적인 역관계에 의해 미이라를 파러 내려간 사람이 미이라가 된 것 같이 개화파가 이용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상 개화파에 초점을 두어 갑오개혁을 살펴 보았지만, 개혁 그것은 획기적인 것으로 그후 계승?발전된 것도 많았다. 그러나 일본의 패퇴는 일본에 의거하고 있던 개화파의 망명으로 끝나고 개혁의 대부분은 좌절했다. 그 이유는 조선민중에게 에네르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개화파의 태도 즉 침략군과의 관계,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개혁요구에 등을 돌리고 침략자와 연합하여 그것을 탄압하고 아래로부터의 에네르기를 압살한 것에 의한다. 갑오개혁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실천적 문제시각과 왜곡된 조선사를 내재적으로 추구해야 할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개혁의 측면만을 전체와 분리하여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개혁등을 당시의 민족적 과제 등과 연관시켜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조건의 차이는 다소 있다고 생각되지만, 현재의 반식민지 상황하에서 외국의 침략군과 결탁하여 어느정도의 개혁을 하는 것 보다는 민족적 모순이 기본적인 과제라는 것것이다.
기능주의 이론1. 서론? 오늘날 교육사회학의 연구에서 중심 과제로 부각된 교육의 사회적 기능, 교육의 기회균등, 사회변동, 계층 이동, 교육 계층, 직업의 배분 등에 관한 학자들의 시각은 매우 대립적인 관점이다. 먼저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으로 나눌 수 있고 거시적 관점에서 기능주의 관점과 갈등주의 관점에 따라 그 강조점이 크게 다르다.물론 기능주의 관점이 주된 흐름이라면 갈등주의 관점은 기능주의 시각에 대한 비판, 도전으로 전개되어 온 것이다. 각 관점은 자기들의 주장에 대한 장점을 제시하고 있고, 교육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서도 매우 대조적이다.1. 기능주의의 개관? 기능 이론은 발전과정으로 볼 때, 구조기능주의 이론을 간락하게 말하는 것으로 근래에 와서는 합의이론, 질서이론, 균등이론 등으로 불린다.? 기능 이론의 이론적 기초는 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콩트(A. Comte), 사회 유기체설을 주장한 스펜서(H.Spencer)에서 그 이론적 기초를 찾을 수 있고 뒤르켐(E. Durkheim)이 이론적 근거를 발전 시켰으며, 사회학 이론으로의 포괄적인 구축은 파슨스(Talcott Parsons)에 의해 기능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기능이론을 토대로 기술기능이론, 인간자본론, 근대화론 등이 등장하였다.2. 기능주의의 사회관? 사회는 유기체- 사회는 각각의 유기체와 같이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기능은 전체의 존속에 기여한다. 그래서 한 사회를 구조와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며 그 지속과 번영을 위하여 질서 균형 안정을 추구하며,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간의 합의와 통합을 이룬다고 본다. 예를 들어 직업 체계에서 말한다면, 각 직업 계층의 역할과 기능이 제대로 수행될 때 전체 직업체제는 순탄하게 기능하여 전체 사회의 안정과 통합이 잘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직업 계층 간의 마찰과 위화감이 조성되고 특정 직업 선호 경향, 근로자 부족 등 각종 문제가 생겨나 결과적으로 사회 경제적 발전을 저해하고 전체의 사회 안전과 통합을 약화시키게 된다.? 부분간의 상호의존성 - 사회의 각 부분은 하나의 인체로 상호의존적, 한 요소의 변환은 다른 요소에 영향을 준다.? 안정성 - 사회는 항상 안정, 유지하려는 속성으로 충격에 의한 급진적 변화를 반대한다.? 합의 - 상호유지와 안정에 관계한 가치나 신념은 기본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진다.? 부분간의 우열은 없다 -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부분에 있어 우열은 없으나 수행하는 기능상의 차이는 존재한다.? 사회 계층은 차등적 보상의 결과이다 - 사회계층은 기능의 차이, 업적의 차이로 사회적 보상을 차등적으로 받을 수 있다.? 각 부분의 자율성 - 사회의 각 부분에도 자율성이 있는 것처럼 교육 또한 독립적이며 자율적이다.3. 기능주의의 교육관? 기능 이론자들에 의하면 학교의 주된 기능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식 및 행동을 전수하는 것이다. 아동들은 타인과의 접촉을 통하여 사회적 존재가 됨을 배우고 적절한 사회적 가치를 발전시키기 때문에 학교는 중요한 훈련장소의 기능을 한다.? 기능주의의 기본 입장은 교육과 사회관계를 긍정적 관계를 파악하고 교육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회제도인 교육은 개인을 사회에 적응시킴과 동시에 개인을 전체 사회 속에 통합시키고 나아가 사회가 요구하는 인력을 양성하고 공급한다고 본다.? 학교 교육 기능을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처음으로 논의한 뒤르켐에 따르면 학교 교육이 전체 사회의 지배적인 행동 유형들을 의도적으로 전달해 줌으로써 한 사회의 존속에 기여하는 수단이라 한다. 이러한 사회화를 위한 교육의 기능은 보편적 사회화와 특수 사회화라는 두 가지 면으로 이루어진다.? 사회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교육은 사회 전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기능한다.? 교육은 사회화와 선발의 기능을 통해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유지한다.? 교육을 통한 사회혁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사회화란 개인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사회적 규범에서 내면화 시키는 것이다.? 사회화는 개인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회의 유지, 발전에 기여한다.? 교육은 선발의 기능을 통해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유지한다.? 선발은 학생들의 능력의 종류와 수준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학습자에 대한 진단의 기능을 한다.? 학교는 선발을 통해 학생들의 능력에 따른 다른 교육적 경험을 부여한다.? 선발을 통해 사회 진출, 직업 세계가 필요로 하는 학생들을 분류 여과기능한다.? 선발은 능력과 성취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소득을 배분한다.? 개인적으로 능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여 사회 평등에 기여한다.? 사회적 성취에 따라 사회경제적 지위를 배분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인력활용을 극대화 한다.4. 기능주의의 교육과정? 학교에서 다루는 교육내용은 보편적인 것으로 누구에게나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다.? 교육과정의 결정과정이나 내용의 사회적의미를 분석하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교육 목표의 설정 내용의 선정과 조직 평가 등, 교육과정의 효율적 운영에 더 관심을 갖는다.5. 교육의 기회균등과 사회평등? 교육이 개인의 능력을 증진시킨다고 본다.? 교육을 통해 능력이 증진되며 이에 따라 높은 사회적 지위와 소득을 부여받는다.? 교육을 통한 사회적 계층의 상승 이동이 가능하다.?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면 능력과 환경에 맞는 능력의 개발이 가능해진다.? 업적과 능력에 따른 사회 진출을 통해 신분 상승이 이루어진다.?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면 될수록 사회가 평등해진다.? 기능론자들은 교육 기회의 확대를 교육 민주화와 평등화의 길로 여긴다.6. 교육문제와 교육개혁? 교육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기능주의는 교육의 문제는 교육내부의 조정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병리현상이라고 본다.? 교육 내부의 개혁을 통해 교육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육이 사회의 유지와 안정에 기여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교육의 개혁을 사회가 변화하는데 따른 교육 체제의 대응이라고 본다.? 사회가 변화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식과 기술이 요구될 때, 이에 맞는 인력을 제공하기 위해 교육을 변화시키는 것을 교육개혁이라고 본다.? 점진적이고 개량적인 방식으로 교육을 개혁하고자 한다.7.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기능주의의 입장?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소득이 배분되는 사회를 업적주의 사회 능력사회라고 한다.? 뛰어난 능력과 높은 실적을 보이는 사람에게 더 많은 사회적 가치를 배분한다.? 기능주의에서 학교는 능력주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 장치라고 본다.? 근대화가 진전됨에 따라 분업화, 전문화를 충족시켜주는 전문가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이다.? 학교는 전문적 지식과 전문화된 지식을 효율적으로 학습하는 데 기초가 되는 인지적 기술을 제공 함으로써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8. 사회화에 대한 기능주의 사회학자들의 입장과 교육론? 보편적 사회화, 도덕적 사회화는 전체로서의 사회가 요구하는 것으로 한 사회의 공통적 감성과 신념, 즉 집합의식을 새로운 세대에게 내면화 시키는 것으로 이를 통해 사회는 그 특성을 유지하고 구성원의 동질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사회가 분화되고 전문화될수록 사회의 동질성의 확보가 필요하므로 보편적 사회화는 더욱 요구된다.? 특수사회화는 분업화된 각 사회집단은 나름대로 요구하는 신체적, 지적, 도덕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게 된다. 개인이 속하여 살아가게 될 직업집단의 규범과 전문 지식을 학습하도록 하는 것을 특수 사회화라고 보았다.? 교육은 사회화의 기능을 수행한다.? 학교 교육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국가가 관여해야 한다.? 이기적인 어린 세대에게 규율 정신을 가르치는 것은 필요하나 체벌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교육 기회는 평등해야 한다.? 교육은 천성이 비사회적인 존재를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다.? 내면화가 사회 가치 규범의 보편화를 도모하여 사회 통합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학교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기존의 교육 양식과 전통을 지키고 이를 전수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등 지나친 보수적 입장을 보인다.? 학교 교육의 핵심은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는 도덕 교육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나하면 도덕 교육을 통해 사회구성원 간의 합의가 형성되고 각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충실하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속한 작은 사회 집단 간의 도덕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회 집단, 국가의 도덕에 내포된다. 이러한 뒤르켐의 기능론적 관점은 사회 내의 지배집단을 옹호한다는 비판을 갖는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로 인해 뒤르켐은 한 사회 내의 집단간의 차이를 경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편적 사회화는 한 사회의 공통적 감성과 신념을 새로운 세대에게 내면화 시키는 것이다.? 특수 사회화란 개인이 속하여 살아가게 될 직업 집단의 규범과 전문지식을 미리 습득하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질 수록 사회의 동질성을 유지 할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 사회화가 더 중요하다.? 사회화를 사회적 가치와 규범이 개인의 인성구조 속에 내면화되는 과정으로 본다.? 사회가 분화되고 전문화됨에 다라 역할 사회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뒤르켐의 특수사회화와 유사성을 가진다.? 기능 이론을 더욱 다듬어서 체계적 이론으로 발전시킨 학자이다.
교육철학 및 교육사-ebs 다큐프라임 '칭찬의 역효과‘ 소감문 -이번 수업시간에는 저번에 보았던 ebs 다큐프라임 중 칭찬의 역효과란 부분을 보는 수업을 진행하였다. 전에 다큐프라임을 보았을 때 나의 교사관에 상당히 좋은 영향을 가져왔던 것이 생각나서 이번에는 어떤 긍정적인 영향이 될까 많은 기대를 가지고 시청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동안 칭찬이라 하면 나에게는 좋은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러한 칭찬의 역효과라는 제목은 나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끌기에 충분한 제목이었기에 나는 집중하여서 이 영상을 시청하였다.처음에는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나온 영상이 나왔다. 첫 번째 실험은 어린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20개 정도의 단어를 즉석에서 외워서 쓰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그룹은 ‘머리가 좋구나’ ‘똑똑하구나’ 이렇게 칭찬을 하는 것이고 두 번째 그룹은 그러한 칭찬이 아닌 노력하였구나 열심히 하였구나 이렇게 격려하는 식으로 말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잠시 관리자가 통화를 한다면서 답안지를 탁자에 나두고 나갔다. 이에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칭찬을 받은 그룹의 아이들은 그 칭찬에 보답하기 위해 답안지를 컨닝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두 번째 그룹은 거의 컨닝을 하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 이에 나는 아직 어려서 그런가 싶었지만 다음으로는 우리와 같은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하였는데 똑같은 결과가 나와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칭찬의 역효과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 칭찬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부담감을 가지고 남에게 뒤처지지 않게 또는 인정받고 싶어서 옳지 못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말이다.두 번째 실험은 파란방과 분홍방에 각각 아이들을 나두고 첫 번째 실험과 같이 분홍방에는 칭찬을 두 번째 방에는 격려를 하는 식으로 하고 끝으로 두 그룹에게 어려운 문제와 비슷한 문제를 선택하는 영상이 나왔는데 분홍반 아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문제, 파란방 아이들은 어려운 문제를 택하였다. 이 실험을 보더라도 칭찬을 들은 아이들은 자신이 만약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하였을 경우 자신이 머리가 나쁜 아이가 될까하는 두려움과 상대가 자신이 실망할까 하는 마음 때문에 비슷한 문제를 택하는 것을 보고 칭찬의 부담감으로 인하여 아이들의 발전을 더 저해하는 것이 되지않을까 생각이 들었다.세 번째 실험은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아용 책과 초등학교 2학년용 책을 나두고 어떤 책이든 빨리 읽어오는 아이에게 칭찬 스티커를 주는 방식의 실험이었다. 아이들은 스티커를 받기 위해 2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책을 다 읽고 스티커를 다 읽고 선생님께 달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이 실험시간에 읽은 책은 총 190권이고 이중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의 책은 단 22권 밖에 되지 않았다. 책을 위한 독서가 아닌 칭찬 스티커를 받기 위한 보상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되었다. 여기서 또 주목할 것은 가정에서 칭찬 스티커 방식의 교육을 하지 않았던 2명의 형제는 초등2학년 수준의 책을 정독 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보아도 칭찬의 역효과를 알 수가 있었다.네 번째 실험은 유치원에서 일주일간 야채 쥬스를 마시는 실험인데 한 그룹은 칭찬 스티커를 주고 한 그룹은 그냥 아무것도 주지 않고 단지 마시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칭찬 스티커를 받는 그룹이 압도적으로 마시는 양이 많았다. 하지만 마지막 날 칭찬 스티커를 주지 않고 자발적으로 마셔보는 실험에서는 칭찬 스티커를 받은 그룹의 아이들은 거의 마시지 않았고 그동안 자발적으로 마신 아이들은 많이 마셨다. 네 번째 실험은 두 학생의 수학 성적이 70점인데 이를 두고 선생님이 한 사람에게는 칭찬을 한 사람에게는 조언을 하는 방식을 취하였고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학생들이 어떠한 방식이 더 나은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한명 정도의 학생을 빼고는 모두 조언의 방식을 택하였는데 이유는 칭찬을 받으면 너무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너무 많이 칭찬을 받게 되면 의미없는 대화와 소통만이 늘어가는 것 같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는 어릴 때 영재였던 사람들의 성장 후 직업을 조사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몇 명 빼고 대부분은 거의 좋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칭찬을 받으면 그에 보상하려는 압박감과 만약 열심히 했는데 그 정도의 기대가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 때문에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다. 즉 나는 머리는 좋은데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래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 같은 경향인 것 같다.
강좌 중국사Ⅲ-당송 변혁기론-레 포 트1.문제제기중국사에서 당말(唐末)~오대(五代)~송초(宋初), 즉 8세기 후반에서 10세기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변화상을 당송변혁이라 한다.이 시기에 이루어진 변화의 제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지만, 이러한 변혁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통일된 견해 도출되지 못했음.이러한 것의 주된 이유는 내등이 당송변혁의 구체상을 밝히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송 이후의 시대를 근세라 주장한 데 반해 , 전전직전은 당송간의 변혁은 인정하되 당말까지가 고대이고 송 이후는 중세라는 견해를 제하여 두 견해가 평행선을 이루며 대립되었기 때문이다.이후 양자의 설을 계승하여 지지하는 경동학파 와 동경학파의 논쟁이 일어남일본학계에서 먼저 제기된 당송변혁에 대한 논쟁은 단순히 그 시기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느냐하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시대구분론과 결부된 변화의 성격에 초점이 두어져 왔고, 또 그러한 차원에서 주로 당송간의 토지소유 형태의 변화라든가, 생산관계의 구조 변화에 집중하여 논의가 진행되어 온 데다 중국의 현실적 정치상황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왔다는 특성을 보여왔다.이 글에서는 당송간의 정치?경제적 변화와 그 배경 및 사회 변모의 여러 양상을 다음의 접근방식을 통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1) 기존의 논의에서 전개된 주된 논점이 과연 어떤 것이며, 그 결과 추출된 개략적인 합의점 혹은 대립점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2) 당송간에 행해진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검토한다.3) 당과 송 사이의 사회적 변화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2. 사료- 당대 율령격식에 대한 재검토3. 논증과정3-1. 당송변혁기론의 발단과 전개◎당송변혁과 시대구분론중국사 전체의 시대구분과 결부지어 당송변혁이 가지는 시대적 성격에 대해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왜냐하면 당송변혁이 시대구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는 하나 이것이 시대구분의 기준이 되는가 마는가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다름.다만 이 부분에서 다룰 내용은 당송변이자 내등의 가설을 또 다른 의미에서 세계사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주장함.송원시대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당시 사회에서 상품생산의 발달, 노동의 분화, 생산의 지역적 전문화, 직업선택의 자유 등 근세적 특질들을 추출함으로써 페어뱅크나 라이샤워 같은 구미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 ‘송 이후 근세설’은 당 중기 이전 사회와의 현격한 차를 밝힌 점과 송 이후의 근대적 지향을 추출한 점은 공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두 번째로 ‘송 이후 중세설’을 주장한 동경학파의 전전직전과 전전가등번의 견해를 보겠다.1)전전직전① 당말?오대에서 고대사회가 종결됨을 3가지 가설로 주장● 동아시아 역사의 발전은 일체적·상관적이어서 각 민족이 개별적으로 발전하지 않았으며 각각 그 ‘시대격’을 가지지도 않았다.● 중국 고대사회의 하한은 당말·오대 즉 10세기 전후의 단계이고 이 앞의 사회가 실은 고대사회이다.● 전국시대에서부터 당말까지의 역사를 추진한 동력은 호족이며 그 대토지경작은 주로 노예에 의해 이루어졌다는데 이것이 바로 고대의 특징그의 견해는 주로 전전가등번의 학설을 계승한 것.2) 전전가등번①수당 이전의 중국사회에서 노예가 주로 대관료?호족의 대토지경작자였다고 보고, 균전제의 붕괴를 전후하여 노예농경이 쇠퇴하고 전호농경(佃戶農耕)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함이러한 현상은 송대에 이르러 현저해졌으며 이것이 고대와 중세사회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라 주장함.※경도학파와 동경학파들은 송 이후의 사회가 봉건사회인가 아닌가로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그 주요한 쟁점이 된 것이 대토지소유와 지주·전호관계였음.◎장원제와 지주?전호관계시대구분론과 관련해 토지소유의 형태와 기본적 생산관계로서의 지주?전호관계가 다루어 지듯이 당송간 사회변혁의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과제이자 그 해명이 바로 변혁의 성격을 결정하는 관건이라 여김.1)장원기원은 멀리 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감.주로 왕공·귀족의 별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에 딸린 전원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디게 된 것은 당 지위 강화 방향으로 나아감③ 업주론: 업주는 지주와 전호의 중간적 존재로 업주의 출현으로 지주의 전호지배는 간접화되고, 전호가 신분이 상승하여 업주가 되기도 함④ 전호의 경작권 문제-일전양주관행⑤ 완전항조운동(소작료 지불 거부 운동) 등이 나타나기도 함→아직까지는 송대 대토지소유와 지주?전호관계는 그 성격에 관해 명확한 결론을 내기 어렵고 해명되지 않은 많은 문제가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이전 이후 시대와의 연관성하에서 지엽적이기보다는 거시적인 안목이 요구됨.3-2. 안사의 난 이후의 정치·경제적 변화◎ 당조 지배구조의 변모당송을 경계로 사회의 성격을 달리할 변화를 보이게 되는 변혁의 시작은 대게 안사의 난에서 비롯되었다는 데에 합의를 이루고 있다.그러나 결코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전반적인 사회의 성격이 급작스럽게 변화했다는 것은 아님. 그 자체가 조용조를 근간으로 한 이전까지의 국가구조가 한계에 이르렀으며, 이전까지와는 다른 사회체제를 강구하지 않는 한, 당이라는 왕조의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함.1) 당 전반기의 지배구조대내적으로 율령을 기반에 두고 정남을 대상으로 한 균전제, 조용조제, 부병제를 중심으로 한 대민지배의 형태 띠고 있었음.대외적으로는 이민족과 책봉관계 혹은 기미정책을 통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그러나 7세기 후반부터 지배체제가 동요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단적인 표현이 바로 도호이다.2) 도호-일반민이 국가의 지배로부터 일탈한 것을 의미하므로 당시 사회문의 집중적 반영도호의 발생원인으로는 자연재로 인한 기근이나 관리의 폭정 등을 들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는 토지의 겸병에 의한 소농민의 몰락과 유망, 즉 농민층이 분해와 절충부의 편중배치에 따른 부병역의 압박을 들 수 있음.→이에 국가가 취한 정책이 괄호정책임3)괄호정책- 호적에 기재된 본관으로부터 도망한 도호와 적외의 전을 찾아내 국가가 다시 이를 장악하려는 정책을 말한다.개원 11년(723) 우문융의 정책이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이었다고 평가 받는다.우체제 최고지휘자는 절도사로 변경에 10절도사가 설치됨.모병제의 탄생은 개원25년(737년)에는 재진을 원하는 병사와 객호? 번인을 뽑는, 장정건아(장기간 변방의 병사로 충원한다는 뜻)라 불리는 직업적인 용병제도가 실시. 이로써 부병제는 붕괴하고 모병제가 성립되었다.부병제는 자가부담이 원칙이었으나 모병제는 병사의 의료와 식량까지 지급해야 했으므로 국가의 부담이 증가했음.◎번진체제의 성립과 구조변경에만 설치되었던 번진이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각 지방의 방비와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내지의 전 영역에 걸쳐 40개의 번진이 두어져 변경과 합쳐 총 50개 정도의 번진이 설치되어 이전 변경번진에서 ‘내지번진’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음.절도사는 안사의 난 이전 군권만 장악했던 이전과 달리 관찰사와 주의 자사를 겸임했고, 중앙정부와 주 사이에 번진이 두어져 한 번진이 2,3개의 주 혹은 10여개의 주를 관장, 이로써 절도사는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됨.1) 번진의 구조반측지지①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분권적 혹은 반독립적인 성향을 지닌 번진② 안사의 난이 일어났던 화복의 동부에 반란군에 투항한 유력한 장군들을 절도사에 임명하여 병력과 지배영역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화북과 화중지역에서 이러한 경향이 심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하북삼진이다.③ 이들은 절도사직을 세습하면서 상호 혼인관계를 맺고, 조세를 중앙에 상공하지 않고 독점하였으며, 영역 내 에서 관리의 임명. 파면을 자의적으로 행하였음.순지① 당의 지배체제에 편입된 번진② 환관이나 관료를 절도사로 임명한 강회지역. 화중. 강남지역이 해당.③ 반측지지와는 달리 조세를 중앙에 상공했고, 이 지역은 풍부한 인구와 농업생산력의발달로 인해 당조가 멸망할 때 까지 중요한 재정적 기반번진내부의 권력구조-군구성정규군은 관건과 단련으로 구성① 단련: 지방의 치안 유지, 농한기에 소집?훈련 받는 병사, 절도사와 주종관계 아님.② 관건: 관에서 모든 생활기반을 제공받는 용병, 번진병력의 주축-아중군:와 함께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음. 고종 때 세로서 확립되었으며 용도는 관료의 봉록에 충당된 듯함.전납이 원칙이었고, 9호등제에 의하여 징수되었으며 천보연간 일반민인 8·9등호의 경우 각각 452문, 222문이었다. 안사의 난 이후 769년 700문,500문으로 거의 2배 가까이 증액되었다. 왕공·관리도 부담해야 했고, 주호만이 아니라 객호도 부담, 상공업자는 본래의 호등에 2등을 더해 부과하였음. 이미 개원 때부터 두 차례로 나누어 징수하고 있었음.② 지세- 원래 구황대책으로 농민에게 곡물을 거두는 데 기원이 있는 것으로 고종 말년인 680년 이후 지세라고 불리게 되었음.경조부에서 770년 이후 경지를 3등으로 나누고 하세와 추세를 징수하였으며, 변조·회조라 하여 원래의 목적과 달리 군비나 일반 정부의 용도로 쓰여지는 한편, 안사의 난 이후에는 계속 늘어나 지세가 전조를 능가하게까지 되었음. 토지소유량의 다과에 의한 것임.③청묘전과 지두전- 안사의 난 이후, 영외의 관직인 사직이 증가하자 부족한 관료의 봉록과 관청의 경비에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764년에 제정한 것임. 1무당 10문씩 전납토록 하였음.768년에는 15문으로 증액,770년 25문을 받던 지두전과 합쳐 명칭을 청묘전이라고 하고 5문을 감한 35문을 징수했음.3) 양세법의 문제점① 관리의 부정: 3년마다 실시되어야 하는 호등제정이 20년간 실시되지 않았고 호등제정시 관리의 부정이 행해져 은호의 수가 납세호의 2배가 넘음.② 진봉의 폐해: 황제에게 바치는 사적인 재물인 진봉의 다과에 따라 승진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앞 다투어 진봉을 바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규정 외의 징수를 행하였음.③ 유통경제의 활성화와 양세법 전납의 원칙에 따라 동전의 부족현상이 심화되면서 화폐의 가치는 높아지고 물가는 떨어지는 전중화경 현상이 발생함.④ 도호의 문제도 심각했음.3-3. 당송간 사회변혁의 여러 측면◎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경제 중심의 남이1) 농업생산력의 발달‘농업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비약적인 변화를 보였음.
조직과 개인의 관계에서 학교의 문제점조직과 개인의 관계에서 학교의 문제점을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조직과 개인에 대하여 간단하게 알아보겠다. 조직이란 사회 안에서 개인이 모여 구성된 집단을 말하며,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은 조직을 위해 일해주고 그로부터 대가를 받고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렇게 조직과 개인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대립적인 관계를 가지기도 한다.조직과 개인이 서로 대립적 관계로 되는 이유는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욕구는 별개로 존재하며 상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개인은 조직 속에서 조직이 가하는 통제로 인하여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인간성을 상실하며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조직과 개인의 관계를 통하여서 학교의 문제점도 알 수가 있다.일단 이제까지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까지 거의 15년 가까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 동안은 학교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 생각하지 않고 다녔다. 하지만 이 과제를 하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15년 학교생활 동안 내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던 학교의 문제점들이 몇 가지 정도 있었다.일단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같은 반의 학생 중 한명이 약간 상태가 다른 아이들 보다는 이상하였다. 이러한 아이를 나를 포함한 반 아이들은 약간씩 멀리하기 시작하다가 왕따를 시키기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 아이가 너무 싫었고 반 아이들과 나는 그 아이와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따돌림을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요즘 학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였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하기는 하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참 그 친구에게 미안하였고 그때의 내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점은 바로 요즘에도 이슈가 되고 있는 일진들 즉 학교의 불량학생들의 일인 것 같다. 나의 학창시절에도 꼭 일진이라 칭하면서 수업 분위기도 흐리고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며 그 아이들의 돈까지 뺏고 또 청소년으로써는 해서는 안되는 흡연도 하는 등 학생의 신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학생들이다. 물론 이 아이들이 이렇게 된 것이 꼭 학교만의 탓은 아니라고는 보지만 어느 정도 학교에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요즘의 입시제도 때문인 것 같다. 과열된 입시 경쟁으로 인하여 학교에서는 학생의 인성을 키우는 원래의 목적 보다는 오직 공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만 수업을 진행하고 주입식 교육만을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학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몇몇 학교는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인성을 형성하지 못한 학생들이 일진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 이러한 과열된 입시경쟁으로 인하여 학생들 사이의 돈독한 우정 보다는 서로를 경계하고 경쟁자로써 인식하는 태도가 생기는 등 참 안타까운 현 교육 실태인 것 같다.이러한 문제는 교육부라는 조직에서 내리는 교육정책과 그 교육정책으로 인하여 생기는 학생 개인 간의 문제라고도 생각이 된다.그리고 또 요즘 선생님들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는 교권 추락의 문제도 학교 문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권의 지위가 높았고 그리고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이정도로 교권이 추락하지는 않았었다.요즘에는 여러 뉴스 등에서도 나오듯이 학생이 여선생을 희롱한다던가 아니면 선생님이 훈계하는데 대들거나 심지어는 욕을 하거나 선생님을 폭행하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솔직히 나도 미래에 선생님의 꿈을 가진 한 사람으로써 이런 사건을 접할 때 마다 분노가 치솟고 한편으로는 앞으로 내가 선생이 되고나서는 더욱 이렇게 될 것인데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과연 어떤 부분에서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러한 문제는 학생들 조직과 선생님 개인 간의 의사소통 부족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라 생각한다.그렇다면 이렇게 의사소통이 부족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상급기관 즉 교육청이나 이사회 같은 조직에서 내려오는 지침들 같이 잡다한 업무가 많아서 선생님 개인이 과중한 업무 분담으로 인하여 학생들과 대화를 할 시간이 줄어들고 또 그에 의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선생님 또한 예민해져서 학생들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짜증을 내는 등 이러한 문제들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