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도어시장과코오롱스포츠의 유통 및 전략-노스페이스와 비교-코오롱스포츠1) 아웃도어 시장현황2000년 2000억2005년 1조2007년 1조 5000억2008년 1조 8000억매년 20%씩 성장하면서 불황을 모르는 아이템이 되고 있다.아웃도어 시장 동향현재 아웃도어 시장은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백화점, 로드숍, 대형마트, 편집숍 등 다양한 유통채널에서 아웃도어 브랜드들이 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 볼륨화는 물론 새로운 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신규 브랜드 전개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주 5일 근무, 건강과 웰빙 붐의 영향이 대중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변화시키고 아웃도어 시장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대중화 추세에 힘입어 브랜드에서도 대중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유통망 확보에 나서고 있다. 백화점, 로드숍, 할인점과 아웃렛에서 아웃도어 조닝은 이제 구색 조닝이 아닌 메인 복종으로 자리한다. 홈쇼핑, 온라인 쇼핑몰 등 새로운 유통채널의 발현 역시 아웃도어 시장을 급팽창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그러나 이 같은 아웃도어의 대중화 추세 속 유통 변화가 순탄치만은 않다. 유통망 확보에 나서고 있는 업체들의 과다경쟁은 물론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에 집중하기 보다는 유통채널별 특성에 맞는 ‘맞춤형 유통 브랜드’로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기존 아웃도어시장을 지배해온 취급점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이를 주요 영업선으로 거래하던 중소 수입브랜드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취급점을 운영하던 점주들의 불만도 고조돼 거래형태 개선안을 요구하고 있다. 일부 로드숍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브랜드에서는 취급점 점주들의 구미를 자극시킬 만한 위탁 조건을 내걸어 자사 브랜드숍으로 전환시키는데 나서고 있다.과거 아웃도어 시장의 기반이 됐던 재래시장의 취급점이 붕괴현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빅 브랜드, 대형사 중심 체제로 볼륨화된 유통시장은 아웃도어업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대형매장으로 브랜드숍 차별화볼륨화된 로드숍의 격돌은 새로운 매장 형태를 강구하게 되는 유통망을 개척하기 보다는 시장 내 일정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유통형 브랜드와 전략적인 제휴를 꾀하고 있다. 수입사의 주요 유통망인 취급점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으며 브랜드숍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반면, 독자적인 브랜드 컨셉트를 고수하는 브랜드들은 스텝 바이 스텝으로 무리한 영업망 확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스스로 유통망을 제한시키고 있어 이례적이다. - 브랜드 선정이유과거에는 아웃도어 시장은 낚시나 텐트와 같은 레저용품으로 3~50대의 필요를 충족하고 있었으나, 주 5일 근무제의 확산과 건강과 레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층이 아웃도어 시장에 관심을 보이며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현재의 열악한 불황 중에도 호황을 누리는 아웃도어 시장에서 서열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양한 소재 개발로 꾸준한 노력을 하고 있는 국내 브랜드 코오롱스포츠를 선정하여 이런 아웃도어시장의 변화와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가 갈 길을 모색해보고자 하였다.2) History1973 코오롱스포츠 브랜드 탄생1985 코오롱등산학교 설립1986 아시안게임 공식 스폰서1988 올림픽게임 공식 스폰서2001 F/w GORE-TEX 의류 국내시장 전개2003 그린마운틴 봉사단 출범2003 Save The Forest 캠페인 전개2004 세계최고 내풍텐트 TORNADO 개발순수 국내 기술로 PROTECTOR WELDING 자켓 출시2004 챌린지팀 구성2004 미국 캘거리대학 인간행위연구소와 공동으로 등산화 연구 개발2004 K.O.P (KOLON SPORT OUTDOOR PARK) SHOP 런칭2005 GEEMAX3 (에너지효율 향상), 360 FRICTION (내마모성, 접지력 개선) MID-SOLE 개발2005 어린이에게 새생명을 캠페인 전개2005 파키스탄 난민 구호활동2006 한국해양연구소 부설 극지연구소 지원2006 하이프세이버자켓. I-SERIES 자켓 출시2006 약속릴레이 캠페인 진햏2006 포토트레킹 이벤트 진행 -> 고객 참여형 제품기 매출4) 코오롱스포츠의 유통구조일부 준사입을 제외한 전 제품을 전량 반품 가능한 위탁으로 운영해 재고 부담이 적다. 매장 오픈시 본사에서 사은품을 지원해주며, 메인 간판 및 매장 디스플레이도 설치해 준다. 또한 매장의 안정화 시점까지 본사의 물량이나 프로모션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매장 운영의 장기적인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백화점과 가두점을 중심으로 하는 유통구조 - 기능성 고가 제품군의 강화제2브랜드는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하는 유통구조 - 대중적인 제품ㄱ. 맞춤형 유통 브랜드로 볼륨화 -규모, 컨셉트 달리한 매장브랜드 볼륨화, 매장 대형화핵심 상권을 비롯 100여개 이상의 가까운 매장을 오픈한 일부 브랜드에서는 이미 동일 상권 내에서의 브랜드숍이 충돌하기에 이르렀으며 백화점과 로드숍, 할인점 등 동일 상권내 성격이 다른 유통채널에 진입한 브랜드들과의 경쟁으로도 매장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신규 매장 오픈보다는 효율 매장을 중심으로 유통망 정비에 나서고 있다.치열한 경쟁체제 속에서는 단일 브랜드 전개 보다는 새로운 이익 창출을 위한 서브 브랜드의 뒷받침이 필요한 시점이며 효율적인 매장 운영과 함께 고객에게 브랜드 가치를 함께 제공할 수 있는 매장전개가 필요하다. 다수의 비효율 매장을 유지하기 보다는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리고 고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할 수 있는 대형 매장으로서의 차별화가 효과적이다.코오롱스포츠 역시 라이프 스타일숍을 표방하는 대형 매장을 선보이고 있다. 아웃도어 문화의 기점이 되는 베이스 캠프로서 등산에 필요한 장비 및 연락시설을 갖추고 안전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또 청계산과 북한산 등 등산로 초입에 개설한 산악 문화 공간 KOP(코오롱스포츠 아웃도어 파크)에 이어 최근 진주에 지상2층 규모의 라이프스타일 샵 1호점을 개설했다. 라이프스타일 샵은 카페와 휴식 공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고객 편의 시설을 강화했으며 프랑스 디자이너 아릭 레비가 참여한 젊은 감각의 트렌지션 라웃도어 유통업체인 백컨트리닷컴, 딕스 등과 현지 진출을 협의할 예정이다. 코오롱스포츠는 또 브랜드 글로벌화를 위해 조 플래너리 전 노스페이스 마케팅 부사장을 영입했다 .5) 비교브랜드: The north face(주)골드윈 코리아의 '노스페이스'는 Authentic(전통주의), Premier(제일주의), Innovate(혁신의 혁신주의), Technical(첨단의 과학기술주의)라는 네가지의 Brand identity를 기반으로 경영되고있다.ㄱ. 선정동기The north face(더 노스페이스)는 Kolon(코오롱)을 제치고 매출과 브랜드 파워 1위를 달리고 있다. 국내 Outdoor Brand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두 브랜드를 비교하여 국내 아웃도어의 위력과 코오롱이 왜 더 노스페이스의 매출보다 적은지분석하여 코오롱의 유통구조상의 개선점을 찾고자 하였다.ㄴ. 규모(B가 outdoor에서 차지하는 규모, 매출, 매장수)런칭시기 : 1997년 F/W매장 수 : 백화점을 포함하여 총 160개(그 중 엑스라지 스토어가 59개)매출 : 2007년 기준 3000억 원 (아웃도어 시장의 20%)운영형태 : 100% 완사입ㄷ. 노스페이스의 유통구조지난 1998년 국내 진출한 ‘노스페이스’는 2000년 초반까지 지역 밀착형 전문점을 중심 유통채널로 유지하였다.이후 2002년부터 백화점과 대리점 병행 운영의 과도기적 시점에서 프렌차이즈의 활성화는 ‘노스페이스’, ‘코오롱스포츠’, ‘K2’ 등 리딩 브랜드의 볼륨화 전략과 함께 불붙기 시작하여 특히 2003년에 접어들면서 주 5일근무제, 웰빙 트렌드 부상으로 아웃도어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리점화가 가속화됐다.이어 2004년부터 2005년에는 효율성 위주의 유통망 구축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대형매장 개설을 통한 차별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노스페이스’와 같이 수요와 공급의 필요에 의한 매장 붐업이 엑스라지 스토어 같은 대형 멀티 컨셉숍을 운영 하게 되었다.ㄹ. 고객컨셉에 맟춘 X-large store2005년 9월 안동60대자연과 인간의 교감에 충실한 정통 아웃도어브랜드아이덴티티Never stop exploring160개 매장유통망백화점 포함 160개2006년: 1600억원2007년: 2100억원연간매출2006년 : 2350억원2007년 : 3000억원퍼포먼스, 트렌지션, 키즈 등 신규라인 확대, 애플 i-pod와 함께 i-pod컨트롤러가 장착된 I-Serise출시 통한 첨단 기술력 제안. 주요 지역내 고객 접점형 아웃도아 컨텐츠 제공하는 라이프 스타일 숍 강화브랜드 운영전략전통 아웃도어 브랜드 이미지 정립과 캐주얼 등 라인 확대로 젊은 층 흡수X-large store, Heart of seoul등 고객을 위한 아웃도어 문화공간 확대2007년 중국시장 진출향후 글로벌 전략 가동해외진출라이센스(국내 전개권)? 글로벌 브랜드 vs 토종 브랜드의 게임1968년 미국에서 탄생한 노스페이스는 골드윈 코리아를 통해 국내 시장에 소개된 글로벌 아웃도어 브랜드다. 노스페이스는 지난 1997년 론칭 돼 2003년 업계 최초로 단일 브랜드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했다. 지난해 3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국내 아웃도어 시장에서 20%의 점유율을 차지했다.노스페이스는 개발에서부터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산악인들과 스포츠 전문가들의 필드 경험을 반영해 극한 상황에서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설계했다.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이 뛰어난 제품, 인체를 보호해주면서도 활동성을 극대화 시킨 제품이 개발 원칙이다.1997년 국내 론칭 초기부터 지난 11년간 박 영석 대장 등 노스페이스가 지원한 국내 산악인들의 해외 원정 횟수만도 78회에 이른다. 이는 극한 상황에서의 필드 테스트를 통해 더 뛰어난 제품을 개발하고, 정통 아웃도어 브랜드로서의 이미지 제고에 주력하기 위해서다.노스페이스가 후원하는 스포츠 전문가들 중 안 병식씨는 지난 4월1일 영하 29도의 북극점 마라톤에서 우승해, 남극과 북극 마라톤을 모두 완주한 최초의 한국인이 됐다. 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소속의 신 윤선 선수는 지난 2월 열린 빙벽 월
德川家康の人間經營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책 소개도몬 후유지 저이정환 역경영정신2004.07.15인물소개아명 다케치요[竹千代].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河] ·도토미[遠江] ·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 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1614∼1615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여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하였다(출처: 네이버 백과)저자소개도몬 후유지 (童門冬二)192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 도청에서 근무하다 작가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역사적 자료를 섭렵, 일본 각지에서의 정력적이고 면밀한 취재를 토대로 씌어진 그의 저서는 역사의 사각지대에 묻혀 있던 새로운 사실들을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도청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도쿄 도지사의 오른팔로서 행정적 수완을 마음껏 발휘했고, 재직 중에 아쿠타가와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오다 노부나가 카리스마 경영》《적을 경영하라》《남자를 위한 논어》《우에스기 요잔의 경영학》 등이 있다.도쿠가와 이데야스의 인간경영을 읽고.."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 중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 일본의 최고경영자 대부분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노부나가는 중세 이후 일본의 낡은 가치관을 타파했고, 히데요시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진 일본을 건설했고, 도쿠가와는 두 사람이 한 일을 완성시켜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관리했다. 즉 현대의 경영자들은 도쿠가와 막부를 265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만든 그의 경영방법을 배우고 싶은 것이다.나 또한 그러하다. 개인과 조직을 잘 경영함으로써 오랫동안 안정적인 국가를 일구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정성 어린 이해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나도 긴 시간 동안 안정적인 국가를 유지한 토쿠가와 이데야스의 노하우가 궁금하여 ‘도쿠가와 이데야스의 인간경영’을 읽게 되었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상적인 면은 자신만의 CI, 즉, 자신만의 이미지 통합전략이 있었다는 점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평생 '신뢰'를 지키려 애썼다고 한다.노부나가와 도쿠가와의 동맹은 노부가나가 죽을 때까지 20여 년 동안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맏며느리가 된 노부나가의 딸 고도쿠의 고자질로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죽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조차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끝까지 지킬 정도였다. 이러한 신뢰를 나타내는 미담은 아직까지도 많은 현대인들의 본보기가 되는 이야기이다. 현대기업들도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윤리경영의 경우 윤리기업이라 선전하면서도 그저 벽에 걸린 윤리경영 액자만으로 그 실천이 끝나는 경우가 있다. 즉 CI가 재대로 구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에 비해 20년이나 동맹을 지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신뢰성 있는 이미지로 많은 무역과 다른 나라와의 교류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또 백성들 또한 얼마나 그를 믿고 따라주었을까.그리고 항상 여론에 귀를 기울일줄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습이 상당히 본받을만한 점이라고 생각되었다.보통 한국 사람들은 듣는 것 보다 말하는 것을 즐겨 한다. 이에 반해 도쿠가와는 듣는 것은 천하의 귀, 보는 것은 천하의 눈, 도리는 천하의 마음이라는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시비를 가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올바른 도리를 해야 함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곧 이것이 선정이니 이것이야말로 태평성세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였고, 이것을 나라를 이끄는 통치 관으로 여겼다. 이중에서도 귀를 상당히 중시하였다.그래서 귀가 두 개나 있지 않은가? 항상 결정을 할 때 혼자만의 생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은 나로써는 상당히 마음에 와 닿는 말이었다.그리고, 도쿠가와는 신뢰를 지키고 여론을 반영하기 위해 도쿠가와는 무엇보다 안정된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의 4가지 전략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이 책에 드러난 많은 일화에서 이 네 가지 전략을 읽어낼 수 있었다. 너무나도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가 넷째 전략이다. 보통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들에게 배우는 자세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상인에게까지 본받을 점이 있다고 말을 한 것을 보면 항상 배우는 자세로 자기 계발에 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관련된 일화 중에 상당히 위인의 면모가 보여져 매우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종이 이야기였다.히데요시를 제압하고 천하를 움켜쥔 뒤 모든 다이묘가 도쿠가와 성으로 인사를 왔는데 마당을 걷고 있던 도쿠가와는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은 싶은 충동을 느꼈다.화장실에 갔다 나오는 도쿠가와의 옆구리에는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이었다. 손을 씻는데 그 종이가 떨어지면서 바람에 날아갔다. 그러자 도쿠가와는 맨발인 체로 마당으로 뛰어내려와 허공에서 춤을 추는 종이를 붙잡으려 했다.나무 사이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이묘들의 눈이 휘둥그래 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치 나비를 쫓듯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종이를 붙잡으려고 애쓰는 도쿠가와의 모습에 한결같이 웃음을 터뜨렸다."소문대로 구두쇠야."이렇게 빈정거리는 다이묘도 있었다. 이윽고 종이를 붙잡은 도쿠가와는 그것으로 손을 닦더니 다이묘들에게 싱긋 웃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나는 이렇게 해서 천하를 손에 넣었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읽고-김경일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 저바다 출판사2001.11.30유교는 동양의 큰 나라인 한중일 세 나라를 이끌어가던 사상이다.유교의 기본정신은 자신에 대한 엄격한 규율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한다. 곧,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을 기본도리로 여기는 사상이다.우리의 뿌리가 되어오던 유교사상을 저자가 왜 비판하는가?저자는말한다저자는 유교가 만든 현대 사회에 대해 ‘한국에 사는 열 가지 괴로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일본이여 들어오라, 중국이여 기다려라’, ‘공부는 끝났다’, ‘한국인을 넘어서’ 이 다섯 가지 주제로 비판하고 있다.‘한국에 사는 열 가지 괴로움’에서는 글로벌화 되는 세계 추세를 전제로 삼으며, 한국의 폐쇄적인 면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신토불이’라는 단어에 일종의 기피증과 문화적 폐쇄성이 교묘하게 숨어있다고 하며 좋지 않은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국경의 벽을 깨고 세계로 나아가 큰 지구라는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드러내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주제에서는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유교적 사상이 어떤 오류들을 낳았는지 샅샅이 파헤친다. 우리나라 역사 중 최악의 역사 중 한일합방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금과옥조로 생각해온 유교 문화의 온갖 병폐가 붕괴 사이클을 따라 퇴적되어오다가 붕괴의 시점에서 마침내 터져버린 최악의 재앙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효라는 사상을 유교에서는 조상이 아들인 자손을 통해 성씨를 이어가고 핏줄을 이어간다는 의미를 담은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저자는 짧은 생물학적 생을 극복한다는 의미를 담은 말로 해석을 하며 유교를 비판한다. 그 밖에도 여성의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한 유교적 남성들이 다양한 창조성 없이 그저 시커먼 먹물 속에서나 헤매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일본이여 들어오라! 중국이여 기다려라’라는 주제에서는 일본과의 역사적인 악연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의 강제 통치를 경험하여 가지고 있는 컴플렉스 때문에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더 이상 구시대적인 발상이며, 우리가 앞길을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므로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나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에 건네준 문화의 일 단면 만을 가지고 일본을 문화적 속국으로 치부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라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창의성으로 여러 곳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공부는 끝났다’에서는 평전적인 글공부를 벗어나 삼차원으로 능력을 이끌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등수체계적인 성적과 교사의 권한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상하적인 구도의 교육은 학생들을 주눅들게 하는 주범으로 지적한다. 또한, 창의성을 모두 짓밟아 버린다고 주장한다.‘한국인을 넘어서’에서는 서양이 동양을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물질적 힘 때문만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휴머니즘과 합리주의적인 정신 때문이었음을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탐욕과 질투 그리고 권력욕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국가적 횡포와 정치적 속임수에 휘둘리지 않으며, 왜곡된 역사 속의 엑스트라에서 벗어나 삶의 무대의 주역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저자는 한국의 폐쇄성의 기반은 유교에 있으며, 글로벌화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찌들어 있는 유교적 찌꺼기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우리의역사의동반자_유교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분명 한국사회에 유교의 찌든 오류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처럼 공자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교는 한중일 삼국을 이끌어가던 사상이고, 유교는 자신에 대한 엄격한 규율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기본정신으로 한다. 유교는 서양문물에 대한 배척사상도 아니며, 비효율적인 교육의 창시자도 아니며, 권력욕을 지지하기 위한 사상도 아니다. 그리고 유교사상도 한때는 조선의 기초가 되는 사상으로 지금 한국사회 건립의 토대가 되어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뿌리를 비판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닌 유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우리들의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유교만을탓하지말자왜 한국사람들은 유교적 사상을 도태시킬 수 없었을까? 흔히 우리는 유교사상을 해외문물 배척주의의 사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시대에도 중국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해외문물을 받아들였다. 해외에서도 종종 우리나라의 도자기가 발견되고, 우리나라에서도 해외와 교류한 흔적이 있다.조선시대에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을 받으려 흥선대원군도 조선에 와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을 잘 대접하고 그랬지만 프랑스가 거절했다. 그 영향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하였고(병인박해)그로 인해 프랑스가 쳐들어 왔다. 그리고 미국상선 제너럴호가 조선에 와서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괴롭혀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배를 불태우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미국이 쳐들어왔다.(신미양요) 게다가 오페르트가 조선에 통상요구 거절은 받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도 생겼다.이러한 많은 서양 국가들과의 갈등과 진보적인 문화와 유교문화의 급격한 차이가 문물교류를 막았다.하지만 곧 일본에 강제통합 당하게 되고, 한국을 되찾은 이 후에도 한국의 사회가 급격하게 발전하게 됨으로 써 유교적 사상을 도태시킬 틈도 없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남아있는 유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닌 왜 남게 되었는지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산향토기업 세정의 기업전략부산향토기업, 세정-기업전략을 중심으로목차1.서론_세정의 선정동기 32.본론 4가. 세정소개·······································4세정의 역사계열사 및 보유브랜드 현황이념 및 비전세정의 매출 및 순이익나. 전략·············································8그랜드 가치향상 전략CRM전략물류전략CSR전략_나눔경영사업다각화와 해외진출3. 결론 154. 참고자료 16서론_세정의 선정 동기세정은 부산의 향토기업 중에서도 맨주먹으로 일궈낸 기업이라는 면에서 유명하다. 그리고 1998년 혹독한 IMF한파 속에서도 새 브랜드 '니(NII)'를 출시해 3년 만에 매출액 1000억원대로 육성시킬 만큼 사업수완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세정은 고향을 지키며 패션사업이 꼭 수도권에 위치해야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패션사업도 정보화 될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과연 세정은 누가 설립했는가? 바로 박순호 회장이 위의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작년 초청특강으로 뵙게 된 박순호 회장은 동아대에서 경영대학원을 수료하고 명예 경영학 박사 또한 취득한, 동아대의 선배이다. ‘도전정신’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세정을 선정하게 되었다.이 레포트에서는 박순호 회장이 세정을 작은 공장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만드는데 어떤 경영전략을 펼쳤는지 알아보고자한다. 본문은 세정의 기본정보를 기반으로 브랜드 가치향상전략, CRM 전략, 물류전략, 윤리경영전략, 사업다각화, 해외 진출 전략에 대하여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본론세정 소개세정의 역사세정은 1974년 7월 1일 설립되었으며, 이후의 내용은 과 같다.1974. 071976. 011980. 071984. 051988. 021989. 041991. 071991. 121993. 071995. 051995. 051995. 081996. 021996. 081996. 101997. 071997. 091998. 061998. 081998. 주얼 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실용명품주의 브랜드 크리스크리스티가 런칭하여 10대청소년부터 2~30대까지 안을 수 있는 고감각의 포트폴리오 구축하고 있다.세정21 : 전국적 규모의 복합매장을 통해 인디안을 비롯한 세정그룹 패션 브랜드의 이월제품 재판매를 전개하고 있는 이코노 패션부분의 대한민국 최고 기업이다.세정어페럴 : 30여년 역사를 지녔으며, 끊임없는 디자인 혁신과 첨단설비, 완벽한 생산관리로 연간 100만장의 티셔츠를 생산하고 있다.세정산업 : 철저한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설립하였으며, 엄격한 소재선택과 첨단 자동화설비를 통해 최고품질의 스웨터를 생산한다.세림어패럴 : 최고품질의 신사복을 생산하며, 사전문제점 파악과 사후검사 시스템을 강화하여 무결점 제품을 공급하여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세정건설 : 사람과 사람, 사람과 환경, 나아가 환경과 인류를 생각하는 공간의 가치창조를 추구한다. 첨단기술과 풍부한 프로젝트 경험을 바탕으로 사전 기획부터 사후관리까지 정성을 다하여 최상의 고객만족을 제공한다.세정I&C : 대한민국 패션유통 최고의 정보기술회사.세정C&C : 쇼핑, 레저, 문화가 복합된 광주 세정아울렛으로 세계적 수준의 아울렛 유통 비즈니스를 실현한다.세정인력개발원 : 최적의 교육 인프라와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우수한 교육효과를 창출한다. 노동부지정 산업교육 기관으로서 산업인력연수를 지원하고 있다.청도세정악시유한공사 : 세정이 100% 단독출하자여 설립한 법인으로서 세계최대규모의 악기를 생산, 유통하고 있다.세정악기 미국지사 : 청도세정악기유한공사 생산악기의 수출량 증가에 따라 2002년 미국 LA에 설립된 법인인다.세정아리안 : 중국 산동성 최대 규모의 주상복합 상가. 프리미엄 아울렛과 고품격 오피스텔로 구성되어 쇼핑, 주거, 오락, 휴식을 동시에 제공한다.청도세정복장유한공사 : 스웨터와 바지를 전문적으로 생산한다.인디안세정상해복식무역유한공사 : 중국내 유통망 개설, 아웃소싱을 통한 원가절감 및 빠른 물량공급으로 세정 패션산업의 경쟁력 이익93,498,636,658Ⅵ. 영업외수익11,974,242,588Ⅶ. 영업외비용23,289,709,241Ⅷ. 법인세비용차감전순이익82,183,170,005Ⅸ. 법인세비용20,908,740,155Ⅹ. 당기순이익61,274,429,850전략브랜드 가치향상 전략현재의 세정이 있기까지 성장의 발판 역할을 해온 것은 단연 ‘인디안’이다. 70년대 티셔츠 브랜드로 시작된 ‘인디안’은 80년대 토털브랜드로 거듭나면서 대리점 체제로 전환, 공격적인 영업과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성장 기반을 굳혔다. ‘인디안’의 최대 강점은 섬유소재 개발로서 품목과 품종의 다양화를 위해 원사 개발에 주력, 면 100%의 특수가공 된 원사인 ‘실켓사’를 최초로 개발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인디안’은 1988년 연 매출 120억원에서 10년 후인 1997년에 2,600억원, 현재 3,500억원의 국민 브랜드로 성장했다. ‘인디안’의 성장에 힘입어 캐주얼 ‘인디안’, 정장 ‘패러다임’, 진 ‘인디오스’, 여성캐주얼 ‘소노지아’ 등 4개 브랜드를 복합 구성한 유통형 브랜드 ‘인디안모드’를 선보였으며 2001년 대대적인 리뉴얼을 단행 캐주얼 ‘인디안’, 여성복 ‘앤섬’, 아웃도어 ‘인디안스포츠’, 액세서리 ‘NI Collection'으로 구성된 현재의 ‘인디안’으로 자리를 잡았다. 2005년 ‘트렌드 베이직’ 컨셉을 바탕으로 런칭한 남성 토털 브랜드 ‘트레몰로’는 탄탄한 생산기반과 발 빠른 기획력, 높은 감성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할인점 시장의 볼륨 브랜드로 틀을 잡아가고 있다.‘폴베이’의 경우 올 봄 리런칭 후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캐릭터 라인을 확장하고 빠른 리오더 시스템 및 스폿 생산을 도입해 상품력을 강화, 과감한 색상 사용, 천연소재와 고급원단 활용, 고가 라인 확대, 명확한 컨셉 구분 등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마트 남성복 부문 선두권에 진입한 ‘런딕’은 원활한 유통망 확보, 리오더와 스폿 생산을 통한 효율적인 재고관리와 판매 로스의 최소화가 강점이다.‘인디안’영에서 보여지 듯 세정의 브랜드 전략은 양적 확장과 질적 개선의 절충, 고급제품 개발 및 지역 맞춤형 유통 개설, 높은 감성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압축된다. 또한 저가 및 고가 상품의 효율적 구성을 통해 소비자 선택권을 대폭 확대하는 한편 CRM 시스템을 활용한 유통과 지역 특성에 맞는 판촉 활동 등으로 브랜드 가치제고에 주력하고 있다.특히 최근에는 해외 관계사를 활용한 다양한 소싱처 개발과 국내외 생산시설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품질력 개선과 생산성 향상, 원가절감 등을 실현했다. 여기에 톱스타를 기용한 과감한 스타마케팅 전략도 브랜드 안착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전략세정의 고객 관리는 CRM, HRM human resource management, 인적자원관리 : 조직구성원으로 하여금 지식 획득, 정보 접근, 기술(기능)향상, 직무 태도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계획적, 조직적인 학습활동으로 정의하며, 교육훈련, 교육, 훈련, 연수, 산업 교육, 기업 교육, 인력개발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등 과학 경영에 의한 철저한 형태의 관리다.국내 최초로 380만명의 고객 데이터를 구축하고 있는 세정은 IMF로 업계 전반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면서 시작됐다. 2001년 DB팀 정식 출범하였으며, 그해 2월 제정보너스 카드 제도 도입이 되었다. 2010년 현재까지도 보너스 카드제도는 더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세정의 보너스카드는 매장에서 즉시발급이 가능하다. 그리고 상품구매니 멤버쉽 카드 제시 시 포인트 적립 및 사용이 바로 가능하다. 또한, 구매금액의 2%를 현금성 포인트로 적립하여 1만점 이상 누적 시 현금처럼 사용이 가능하고, 각종 이벤트 행사시 해당고객별 다양한 혜택을 수여(기념일 10%추가할인)하며, a/s우선접수 처리, 각종 이벤트 행사시 우선초대 등의 혜택으로 단골고객을 유치하고 있다.(그림2, 3)세정의 CRM 시스템 또한 업계 최강을 자랑한다. 1992년전략에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그리고 세정에서 블로그 형의 웹진 올리비아로렌과 인디안의 이벤트 정보, 생활정보를수록 및 댓글 달 수 있는 공간인 세정파크(http://www.sejung-park.co.kr/)를 운영하면서 고객들이 패션에 관한 다양한 정보와 생활 정보를 얻게하며, 고객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그림4)물류전략세정은 특히 물류전략으로 패션의 빠른 주기를 완벽히 소화해내고 있다.(그림 5, 6, 7)우선 물류비 절감에 따른 경쟁력 확보를 위해 대형 물류 자동화 시스템 구축에 돌입, 당시 120억원을 투자해 제1 물류 센터를 완공했다. 이로써 신속한 물류 서비스가 가능해져 수요공급 조절은 물론 안정된 데이터 관리, 물류흐름의 단순화, 자동화를 통한 시간단축과 환경개선으로 흑자폭을 늘릴 수 있었다.2000년대에 들어서는 DAS DAS(Digital Assorting System)의 효과로는, 첫째, 작업방법의 변화를 들 수 있겠는데 종전의 수작업 위주에서 전산시스템의 도입으로 전환된 점이다. 둘째, 1회 작업 대리점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데 종전의 20~30개점 정도의 작업 수준이 1차 도입 이후 164개점, 2차 시스템 증설 이후는 320개점까지 작업 대리점수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에 비례하여 1일 처리물량도 늘어났으며 도입 전 7,000~10,000피스 정도의 물량이 20,000~23,000피스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인원과 출고작업 시간은 감소되어 출고작업 인원수는 1일 16명에서 12명으로 4명이 감소되었고, 출고작업 시간은 종전 6시간에서 4시간으로 2시간이 단축되었다.등에 투자, 제2 물류센터를 구축하고 2003년에 제3 물류센터, 2006년 여주 물류센터 건립으로 물류 체계를 완비했다. 이에 따라 전국 900여개 이상의 대리점을 연결하는 쌍방향 네트워크를 통해 판매 후 대리점까지 24시간 이내에 출고하는 일일 배송체계를 갖출 수 있었으며 제품입고에서 출고까지의 물류 흐름을 자동화해 보관효율과 출고작업 능력을 향상시켜 연간 17억원의 물다.
일제강점기시대의 패션0. 서론_일본이 택한 식민지 도구, 패션패션이란 어떠한 사회적 역할에 적합하다고 사회적으로 규정되거나 수용되는 재단, 색상, 실루엣, 재료 등과 관계가 있으며, 특히 이러한 스타일의 반복적 변화가 관련된 것이다(Bernard Barber, Lyle Lobe). 패션은 시대를 반영한다(Christian Dior, 1947년) 즉, 패션은 사회적인 상황과 긴밀한 위치에 있다.역사 속에서 많은 권력자들이 하위 층의 패션을 제한하거나, 자신의 패션을 과장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피력하고자 하였다. 신라 제 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7-836) 때인 834년에도 금령)이 반포되어 민중들의 의복을 제한하여 서열을 바로잡고자하였다. 그리고 바로크시대 유럽에서도 과도한 레이스의 사용을 제한하고 리본사용을 장려하여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인 주도권을 잡기도 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패션의 속성을 이해했고, 패션이라는 도구로 조선을 지배하고자 하였다.조선말엽에 실학, 천주교 및 기독교의 전파, 동학의 영향으로 근대화는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립으로 근대화는 매우 미미하고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로 간접적인 통치아래 조선은 문호개방을 하게 되고, 의복의 근대화는 서서히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조선의 남성들은 단발령을 하게 되고, 양장을 한 엘리트 급증하게 된다. 반면에 여성들의 의복은 남성보다 천천히 근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1910년부터 1945년 일제 식민지시기를 지내면서 조선의 의복은 직접적으로 제한, 변형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의 의복은 매우 근대적이고 실용적으로 변하게 된다.경술국치 10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이 어떻게 조선의 의복을 어떻게 통치했으며, 변형되고 당시 새로 받아들여진 의복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알아본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조선의 상징 백의, 여성 노동자들의 몸뻬, 남성들의 국민복에 대하여 서술한다. 그리고 그 의복들이 어떤 형태로 남아 있고 어떻게 고대부터 시작된다. 고대 동의족(東夷族) 또는 조선족이 이를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양을 하느님으로 알고 자기네들은 이 하느님의 자손이라 믿어 태양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백의를 입다 이것이 풍속이 되었다고 정의하고 있다.) 반면에 백의입기를 강요한시기도 있었는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이다. 평민은 항상 흰옷을 입게끔 강요되었다. 이는 관직 자와 평민을 구분하기위함이였다. 이를 미루어 생각해보면 백의의 상징성은 모두 백성을 달래어 백의를 입히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도 보인다. 반면에 조선시대 헌종 때는 흰옷을 잦은 빨래 때문에 경제적 방법으로 흰옷의 착용을 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백의는 민중을 대표하고 의미하고 표현하는 옷으로써 동학농민운동에서도 상징적인의미로 사용되었고, 민중들은 여전히 자랑스러운 백의민족으로써 백의를 입기 원했다.그림 백의로 가득한 조선의 거리그림 백의로 가득한 시장이를 견제한 일본은 한일합방 초기에 색의를 장려하여 백의를 조선에서 없애고자하였다. 여기서 색의는 흑의(黑衣)를 일컫는다. 흑의를 입으면 때가 잘 타지 않아 세탁을 자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경제적이라는 이점을 공고하였다. 1979년 조선총독부는 흑색견습생을 모집하고 흑의에 대한 장점과 염색 방법 등을 가르치는 수업도 실시하였다. 그리고 순사복을 모범 흑색 복으로 제시하여 흑의 입기를 장려하였다. 하지만 민중들은 기존에 입던 옷을 입기 원했고, 흰옷이 염색과정이 더 적기 때문에 경제적이라 생각하며 더불어 일제에 대한 반감으로 색의를 입기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직접적인 제압을 하게 된다. 장날에 관리가그림 모범흑색복인, 순사복물감으로 백의에 물감을 칠하기도 했고 먹물이 든 물총을 쏘기도 하였으며, 백의를 입은 사람은 관공서 출입을 금하여 불이익을 주었다. 이로 인해 흑의로 옷을 염색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수는 백의를 입고 다니며 일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세계2차 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오자 백의를 입은 조선인은에서 새로이 만들어낸 노동복이 아니라 에도시대)부터 일본 농촌에서 유래한 바지이다. 몸뻬는 카루산, 탓츠케라 불리는 산고(やまばかま [山袴])에서 유래하였다. 초기에는 일본 동부지방에만 입혀졌으나, 1940년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시체제가 되자 남성들의 국방색의 국민복과 함께 1942년 ‘부인표준복’으로 일본에서 제정되었다. 그 당시 7종류의 표준복이 있었으나, 제일 활동하기 유용한 몸뻬바지만 확산되었다. 활동성이 좋은 몸뻬는 여성들이 노동을 함에 있어 필수적으로 되어갔다. 그리고 일본 여학생들도 교복으로 몸뻬를 착용하여 항상 전시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몸뻬를 입지않고, 노동에 참여하지않는 여성들을 부끄러워하였다.그림 산고(やまばかま [山袴])그림 일본학생의 몸뻬그림 일본의 몸뻬그림 노동을 하는 몸뻬바지의 여성들그림 몸뻬 장려 포스터한국에서는 일본보다 앞선 1938년부터 몸뻬를 입기를 강요하였다.1938년 이전 조선의 여성들은 대부분 한복을 착용하였다. 30년대 초반에는 여러 가지색의 세루치마 저고리를 동색으로 해 입곤 하였다. 치마는 짧아지고 있었고, 그에 반하여 저고리는 길어지는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총동원법)과 비상시 국민생활개선기준(1939년)의 제정으로 의복에 큰변화가오게된다. 다양한 색의 한복이 금지되고, 검정치마와 흰 저고리입기를 강요받았으며, 이전에 유행하던 퍼머넌트도 금지되었다. 저고리의 길이는 다시 짧아지고 치마는 길어졌다.그리고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몸뻬이다. 일본은 몸뻬라는 의복으로 자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회를 통제하고, 여성들을 노동하도록 강요하였다. 하지만 치마만 입어오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몸뻬는 매우 수치스러운 의복 이였다. 조선에서 여성들이 입는 바지는 고쟁이) 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바지는 속옷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몸뻬를 입는다는 것은 조선의 여성들로 하여금 속옷을 입는 흉한 모습으로 변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여성들은 전통사회의 가치관을 무시하고 실용과 경제성만을 위한 몸 작업 시 편리한 저고리나 실용적인 남방셔츠를 함께 코디하여 입었다. 일본의 몸뻬는 일본의 전통의상들과 같이 다양한 문양이 있던 반면에 조선의 몸뻬는 문양이 거의 없는 심플한 형태였다. 조선의 여학생들은 여름에는 블라우스에 몸뻬를 착용하였고, 겨울이 되면 재킷과 몸뻬를 함께 입게되었다. 조선의 사회에 자리잡은 몸뻬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최초의 양장바지가 되었다.그림 고쟁이그림 한국의 몸뻬그림 몸뻬를 입은 한국학생여성 최초의 바지는 많은 영향을 불러일으킨다. 여성과 남성이 같은 신체를 소유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바지이다. 바지는 여성의 신체를 활동 화시켰고,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켜왔다. 미국에서는 1850년 아멜리아 블루머 여사가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터키식 바지를 고안했다. 이 하나의 바지는 여성의 활동성을 더욱 활성화시켰고, 여성들도 자전거, 승마 등의 다양한 레저운동에 참가하기 용이하게 하였다. 바지로 인해 여성은 남성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그림 블루머 입은 블루머 여사그림 레저에 적합한 블루머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강압에 의한 몸뻬의 착용 이였지만, 전쟁이후에도 바지는 애착되게 된다. 전쟁 전의 신여성과는 달리 전쟁 후의 신여성들은 바지도 과감하게 착용하게 되고 사회생활에도 적극 참여하게 된다. 몸뻬는 여성의 사회진출을 위한 발판 역할을 하게 되었다.나. 국민복소화13년 국사 총동원법이 통과되면서 법률로서 작동하였다. 이 또한 여성의 표준복인 몸뻬처럼 일본보다 조선에서 먼저 시행되었다. 총독부의 제복을 시작으로 국민복의 착용이 강요 되었다. 전 조선의 관공리와 보통학교 교원들도 국민복을 입게 되었고, 여교 원들에게는 제복을 고안하여 입게 했다. 또, 남학생들은 머리를 삭발하게 하고 교복자체를 국방색으로 바꾸게 하였다. 국민복은 전쟁의 긴장감을 상기시키고, 국민들의 통치를 용이하게 했다. 주로 엘리트층을 통제하기위한 의복으로 위 계층에서 아래계층으로 하향전파 되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여전히 옷을 살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한복을 건 사서 입게하지않고 양복을 사게 될 때 양복대신에 국민복을 사도록 강요하는 식으로 국민복을 파급하였다.그림 국민복을 착용한 안동금융조합 직원들그림 한국 신문에 실린 국민복그림 국민복 차림의 학생들국민복은 군복과 유사했기 때문에 주머니가 많아지고 천이 실용적이며 움직이기 쉬웠다. 국방색을 띄고 있었으며 튼튼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일명 밀리터리화 된 것이다. 세계2차 대전 당시 국민복을 강요당한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밀리터리 바람이 불었다. 유럽이나 미국 등의 국가에서는 밀리터리한 형태가 전쟁과 함께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주고 어깨는 넓어지고 움직이기 편한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그림 밀리터리 패션그림 밀리터리 여성정장하지만 이러한 국민복이나 밀리터리화 된 의복들은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사라진다. 조선의 남성들은 다시 한복이나 양장을 주로착용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남성들의 양장이 이전보다 많이 증가하게 된다.다.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식민지시대 패션한일 합방으로 일본의 직접적인 정치아래 영향을 받은지 10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 시대의 패션은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거나 새로운 패션의 길을 열어주었다.백의는 식민지 시대를 지낸 이후로 백의민족이라는 한국의 이미지를 더 강하게 상징하게 되었다. 길에서 먹물을 뿌려대고, 생활의 많은 부분을 금지당하면서도 강하게 반발하면서 백의를 지켜왔다. 흰색의 맑고도 완고한 이미지와 일제 식민지에도 불구하고 하얗게 지켜낸 조선인의 굳은 심지가 합쳐져 한국을 상징한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도 생전에 이러한 상징을 가진 한국의 백색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몸뻬의 경우에는 과거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의 정서에 깊이 스며들어있다. 해방이후에도 자연스럽게 농촌사회에 자리 잡은 몸뻬는 일하는 여성들의 기본 복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 옷이 우리 역사의 아픔이 있는 의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이 없다. 오늘날에도 과거와 거의 동일한 형태로 우리 삶에 있지만 오히려 농촌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