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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위일체논쟁으로써 아리우스논쟁과 니케아종교회의 평가C아쉬워요
    초대교회사(1)제목: 아리우스논쟁과 니케아종교회의제출자: 임 건 택 (3102005, M.div 1학기)1. 들어가는 말기독교 역사는 시초부터 신학적 논쟁들로 점철되었다. 바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 사이의 관계였다. 그 후 영지 주의적 사변에 관한 결정적 논쟁들이 야기 되었다.) 영지주의가 정통 기독교인들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있을 만큼 큰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구원론적인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독교가 시작되었던 첫 몇 세기는 이 세상에서 개인적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종교는 기독교를 제외하고, 신비주의 종교와 영지주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르낙(Harnack))은 영지주의를 “기독교를 심각하게 헬레니즘화한 것”이라고 말하고, 영지주의자들을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들”이라고 불렀다.)전체적으로 볼 때, 2세기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그 신학의 비중이 그리스 사상의 세계로 완전히 전이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리스 사상과 감정에 맞게 다시 표현 하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제3세기의 교회와 신학의 상황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점차로 성장하는 그리스도교적 자아의식이다. 어거스틴 이전 고대교회의 위대한 사상가인 오리게네스(185-253)의 삶과 그 영향을 통하여 동방에서는 콘스탄틴 이전 시대의 신학발전은 최고조에 달했다. 3세기 중엽 서방의 키프리안(Cyprian)은 전 교회 역사 가운데 교회 내에 교리를 완성하고 교회의 직분을 완성시킨 최초의 신학자이다.) 시프리안(Cyprian)이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있던 3세기 논쟁의 초점은 변절자들의 복원 문제였다. 이러한 초기시대의 신학적 논쟁들은 오랜 논쟁을 거쳐 결국 합의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시대의 논쟁들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샐 틈 없는 논리와 성결한 생활을 통해서 가능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개종 이후 사태가 변화하였다. 이제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이다.용어가 적당하다고 볼 수는 없어도 “역동적 군주신론”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신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던 비인격적 권능이고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역동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어 듀나미스(δυναμι?)가 권능(power),혹은 힘(force)을 뜻하며 그리스도 안에 머물렀던 비인격적 권능을 언급할 때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역동적인 관계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상의 대표자로써 데오도투스(Theodotus)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예수에게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 분파는 A.D 195년 로마교회로부터 정죄를 받았으나 아르테몬이 계승하여 안디옥감독이었던 사모사타의 바울에 이르기까지 3~4세기에 걸쳐 상당한 추종자를 모았다.)양태론적 군주신론은 아버지와 아들을 한 하나님의 두 가지 다른 현현 모습으로 이해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자신을 일치시키는 방향에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동일시로 인하여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노에토스(Noetos), 프락세아스(Praxeas), 사벨리우스(Sabelius)등이 다양한 형태의 양태론적인 군주신론을 발전시키려고 하였다.결과적으로 군주신론의 그리스도상은 교회에서 거절되었다. 역동적 군주신론의 경우에 예수는 완전한 인간도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를 극복(제거)하려는 양태론적 군주신론은 결국 인자로 오신 예수의 역사성을 완전히 간과하였다. 교회의 신학은 역동적 군주신론에 대하여서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본질적 동일성(ο??μοουσια)의 교리를 그리고, 양태론적 군주신론에 대하여는 신성의 독립된 세 위격( υ??ποστασι?)의 교리로 대응하였다.) 이렇게 삼위일체 신론의 전개 과정에서 이레니우스는 삼위의 동일 본질과 삼위의 본질적 통일성 개념우스는 오리게네스의 본체(υ??ποστασι?)개념을 받아들였지만 아들과 성령은 파생된 신성만을 가졌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라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아리우스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기독교적 유일신사상의 틀을 보존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는데, 로고스를 하나님과 동일본체로 이해하는 것은 두 개의 신을 섬기는 모양이 되므로 알렉산더가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유일신을 부인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서 알렉산더는 A.D 318년 자신의 책임 아래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회의(Synod)를 개최하여 아리우스에 의한 주장을 정죄하고 그와 그 동료들을 출교시켰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감독인 유세비우스에게로 피신하여 동방의 중요한 감독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게 되었는데 결국 오리게네스적으로 생각하는 동방의 많은 감독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북아프리카의 한 지역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지방 신학논쟁이 이제는 오히려 동방 전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심각한 교회의 분열양상을 띄기 시작하였다. 이들 양파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폭력까지도)에 나서게 된 것이다.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콘스탄틴 황제로써는 이러한 제국 내 분열 양상을 중재하기로 마음먹고 코르도바의 감독인 호시우스를 통해 양파의 화해를 꾀하였다. 그러나 양파 간의 갈등은 결코 중재로 해결할 수 없다는 심각성에 대하여 호시우스는 콘스탄틴 황제에게 보고를 하게 되고 황제는 제국 전역으로부터 교회 감독들을 소집하여 대 종교회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2) 니케아 종교회의(325년)(1) 종교회의의 성격최초의(1차) 에큐메니컬 공회의라고도 일컬어지는 니케아 종교회의는 325년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틴에 의해서 소집되어 소아시아 비두니아(Bythinia) 지방에 있는 황제의 별장인 니케아(Nicea)시에서 모였으며 동방을 중심으로 하여 약 300여명)의 감독들이 운집하였다. 회의의 주된 안건은 알렉산의 결정콘스탄틴 황제는 이제 결정에 합의하도록 요구하였고 결국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신앙선언문을 작성하게 되었다.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신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분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드신 창조자이시다.그리고 한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신 자이시며, 독생자(only begotten)이시다.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신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다. 낳으신 자이시고 만들어진(창조된)자가 아니다. 아버지와 한 본질(ο??μο-ουσιο?)이시며 그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존재케 되었다. 그는 우리 사람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성육신하셨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는다.그리고 성령을 믿는다.그러나 "아들이 안 계신 때가 있었다"든지, "그가 태어나시기 전에는 그가 계시지 않았다"든지, "그가 무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아들이 다른 본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다"든지 "피조물"이라든지, "가변적"이라든지, "변화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보편교회가 저주한다.』)신조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아들 곧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여기서 아들과 아버지의 본질을 규정짓는 한 개념으로 사용된 개념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신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한 것 일뿐(다시 말해 신성에 관한 정의 일뿐) 그 위격 간 관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회의의 다양한 분파(아리우스 지지자, 온건한 오리게네스파, 알렉산더 감독 지지자, 앙키라의 마르셀, 코르도바의 호시우스)모두를 일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리우스 자신과 그 동료들은 이 개념을 전혀 받아들제공 못한다. 신 인식 없이는 구원도 없다. 아타나시우스의 결정적인 용어는 다음과 같다 : “말씀이 육신이 된다면, 우리가 신격화(Vergottlicht)되는 것 아닌가” 인간의 신격화는 인간 본성이 썩지 않는 불멸성(Unsteblichkeit)으로 재창조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서방신학에서 우세한 도덕적인 구원 이해에 반하여 육적인(physich)구원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니케아회의 후 5년이 지나면서 “위대한 회의”) 옹호자들은 번번히 패했다. 왜냐하면 황제의 주된 관심은 신학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데 있었으며, 이런 상황을 정치적 수완이 좋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정략적으로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니케아회의 옹호자들의 이론이 시벨리우스주의 이론과의 유사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곤 하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설명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콘스탄틴의 죽음(337년)은 아리우스논쟁의 또 다른 양상을 제공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의 세 아들 중 장남인 콘스탄틴2세(Constantine∥:고울과 북아프리카)와 막내인 콘스탄스(Constans:이탈리아와 일리리아지역)는 서방을 분할하여 통치하였고, 둘째인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안디옥중심)는 동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서방의 통치자인 콘스탄틴2세는 아타나시우스파를 옹호하였고, 동방의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파를 옹호하였다.) 그 후 13년이 지나는 동안 제국의 왕권은 콘스탄티우스로 재편되고 콘스탄티우스는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 남는다(350년).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를 옹호했으므로 아타나시우스파는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콘스탄티우스가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됨으로써 아리우스주의가 정치적으로 진전됨에 따라서 니케아 신조를 반대하는 자들의 여러 입장이 점점 명확하게 윤곽이 드러났다. “동일본질”(homoousios)형식을 반대하는 무리들 가운데 각각 상이본질파(Anomoeans)),동류본질파(Homoeans)), 유사본질파(Homoiousi었다.
    인문/어학| 2010.10.15| 10페이지| 2,000원| 조회(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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