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Ⅰ. 서론-------------------------------------------------- 2Ⅱ. 본론-------------------------------------------------- 21. 사역 시기-------------------------------------------------- 22. 시대적 배경-------------------------------------------------- 23. 다시스(Tarshish)와 니느웨(Nineveh)------------------------------- 3(1) 다시스(Tarshish)-------------------------------------------- 3(2) 니느웨(Nineveh)-------------------------------------------- 3① 성읍의 역사-------------------------------------------- 3② 고고학상의 니느웨-------------------------------------------- 44. 요나의 불순종과 고뇌-------------------------------------------- 5(1) 당시 앗수르인들의 종교관------------------------------- 5(2) 당시 앗수르 니느웨의 위용------------------------------- 5(3) 요나의 불순종의 이유------------------------------- 6Ⅲ. 결론-------------------------------------------------- 6* 참고문헌 * ---------------------------------------------------- 8Ⅰ. 서론요나서는 요나 선지자의 니느웨 선교를 통하여, 하나님께 먼저 택함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사명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요나서를 살펴보면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에 만연해 있었다.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 선지자가 나흘 동안을 외쳐야 하는 규모의 도시에서 단 하루만을 외치고도 니느웨 백성들이 쉽게 회개하는 모습이 나오는데(욘3:3~4), 이러한 모습은 이런 시대적 상황이 좋지 못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2. 시대적 배경우리가 아는 데로 요나는 B.C. 790년부터 750년까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 동안에 살았다. 여로보암은 그의 증조 할아버지인 예후 때 이후로 백성들이 끊임없이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도록 압력을 받아 왔었으므로 약한 나라를 지탱해왔다. 그러나 여로보암 아래서 백성들은 그들의 과거의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는 하맛(Hamath)과 다메섹을 획득하였고, 요나가 예언했던 것처럼 하맛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사해 바다에 이르기까지 펼쳐있는 전 영역을 이스라엘에게로 회복하였다.(왕하 14:25). 참으로 여로보암은 사마리아의 왕위에 오른 군주들 가운데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이었고, 그 왕국의 미래는 가장 희망차 있었다.이와는 반대로 앗수르의 일반적인 상황은 정반대였다. 즉 모든 것이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고 앗수르는 그 바탕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아닷니라리 4세(B.C. 약810~782)의 눈부신 통치가 막을 내린 직후였다. 팔레스타인과 서방 국가들에 대한 그의 세 번의 원정으로 그는 헷, 두로, 시돈, 오므리의 땅 즉 북이스라엘, 에돔, 그리고 블레섹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있었고, 그의 대규모의 승리들을 통하여 그는 앗수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아닷니라리는 당시 이미 죽었고, 앗수르는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요나로 하여금 앗수르의 몰락을 보다 더 원하게 한 것이 바로 이 몰락의 모습이었다.3. 다시스(Tarshish)와 니느웨(Nineveh)(1) 다시스(Tarshish)성경의 민족표에서 야완의 아들(창10:4, 대상1:7)로 되어 있으며, 또 그들이 거주한 지방명이다. 동쪽의 스바, 시비와 대조적으로 최서단의 땅이라고 하였다(시72섬 고대의 성읍 노라(Nora)에서 출토되었다. 그것에는 이 섬에 있던 다시스, 즉 ‘정련소’에 대해 기록되고 있다.(2) 니느웨(Nineveh)앗수르 제국 최후의 동방(東方) 수도인데, 티그리스 강 동쪽 유셀 강의 합류점에 있는 현재의 모술(Mosul)의 대안에 있었다. 메소보다미아 지방에 있어서 최고, 최대의 성읍 중 하나였으나, B.C. 612년의 함락 이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앗수르어로는 ‘Ninua’ 또는 ‘Nina’라고 한다.① 성읍의 역사전통적으로는 니므롯이 창설자이다. 그는 메소보다미아의 다른 고성읍과 같이 니느웨를 건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창10:10~12) 확실히 니느웨의 거주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던 증거가 있다. B.C. 3000년대 말경의 설형문자(楔形文字) 문서나 함무라비(Hammurabi) 법전(B.C. 1670년경)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이 성읍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B.C. 8세기에 사르곤 Ⅱ세의 아들 산헤립(B.C. 705~681 재위)에 의해 앗수르 제국의 수도로 되고, 그 후 제국의 전성기를 통하여 수도의 지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 이전에도 B.C. 12세기 말 경부터 이미 앗수르의 주요한 도시로 되어 왕궁이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이곳을 제국의 수도라 하고, 왕의 상주지로 한 것은 산헤립에 비롯된다(왕하19:36). 이어 에살핫돈(B.C. 681~669), 앗수르바니발(Asshurbanipal, B.C. 669~633)은 이 성읍에 영광이 있게 하였다. 특히 앗수르바니발의 궁전과 도서관은 유명하다. 그러나 B.C. 612년 메대와 갈대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니느웨는 함락되었다. 이 함락과 멸망을 예언한 사람은 나훔과 스바냐이다. 나훔은 번성의 극에 달한 니느웨가 정복된 땅으로부터의 약탈품으로 가득찰 모양을 ‘사자의 굴’로 말하고, 또 “그 속에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하면서 ‘피 성’이라고 평하였다(나2:11, 3:1). 그리고 그 멸망을 애곡하는 자가 없을 것이유적이라는 결론에 처음으로 도달하였다. 1842년 다시 봇타(P.Botta)에 의해 발굴 되었으나, 곧 그의 활동은 그 곳으로부터 약 16㎞ 북쪽골사밧(Khorsabad)으로 이동되어 거기서 사르곤의 궁전 일부를 발굴하였다. 1845년과 1850년 사이에 레야드(Layard)는 모술(Mosul)시의 남쪽 29㎞지점에 있는 님룻(Nimrud)에서도 살만에셀 3세의 궁전 일부를 발굴하였다. 또 같은 곳에서 앗수르최후의 세 군주의 궁전의 어떤 부분도 발굴한 것으로서 모술보다 티그리스를 건너 대안을고대 니느웨의 유족과 동일시하기에 이르렀다. 니느웨의 폐허는 고스르(Khosr) 강에 의하여 분할된 두 방축으로 성립되어 있다. 그 중 하나, 즉 북쪽에 있는 것은 ‘구윤직’(Kuyunjik)이라 불리우는데, 레야드에 의해 발견되어 산헤립(B.C. 705~681)의 궁전과 앗술 바니발(B.C. 668~626)의 궁전이 거기 건립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 즉 남쪽에 있는 것은 ‘네비유누스’(Nebi Yunus, 선지자 요나라는 뜻이며, 그가 여기에 묻혔다는 전설에 기인한 명칭)라 불리우고, 그 곳에는 산헤립, 에살핫돈(B.C. 681~668)의 궁전이 건립되어 있었다. 이들 궁전은 웅장하였으며, 유적으로부터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였던 대 창고가 발굴되어 수천 개의 토판(土版), 원주형의 도장, 흉상, 조상(彫像), 기타 고고학상 흥미있는 진짜 고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성벽에 둘러 쌓여 있던 성읍은 길이 5㎞, 넓이 1.6~2.4㎞, 면적 730ha, 여리고 성의 약 250배의 넓이로서, 고대 니느웨의 성곽선(城廓線)의 자리를 정밀하게 더듬을 수가 있다. 산헤립의 8각 프리즘(Eight-sided baked clay prism, 이것은 B.C. 694년에 기록된 것인데, 산헤립의 연대기의 제 4판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프리즘의 No.103,000이다)에 의하면, 니느웨의 성벽에는 남과 동에 7개, 북에 3개, 서에 5개, 도합 15개의 문이 있었다. 그사이에서 많은 점에서 유니크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앗수르가 이 지방에서 패자로 되었을 때, 앗수르는 우주의 주, 세계의 창조자이며 지배자 등의 칭호가 주어졌다. 앗수르와 그의 성읍과의 관계는 밀접하였지만, 그를 위해 특히 성별된 산인 에비 산에는 그의 성소가 설치되어 있었다.앗수르는 때로는 왕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장신구를 달고, 같은 포즈를 취한 모습으로 새겨졌다. 신년제(新年祭)가 집행되는 방의 문에 남아 있는 양각(陽刻)에 의하면 “디아맛드에 도전하는 앗수르의 모습은 산헤립의 그것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앗수르의 왕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에 따라 주된 신들의 상을 만들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앗수르인에게 있어서 산들은 특히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앗수르 왕들은 산중에 많은 돌 비석을 세웠다. 또, 산들은 제각기 특별한 신들과 결부되어 있었다. 산들 뿐만 아니라 티그리스, 유브라데 양 대하도 특히 그 원류가 거룩한 것이었기 때문에 왕들은 해안에 석비를 세우고 거기서 무기를 씻고 희생을 바쳤다.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앗수르는 지배자로서 자기의 종교를 유다에게 강요하고, 유다 왕 중에는 자진하여 앗수르의 종교를 도입하려는 자까지도 있었다.예를들면 아하스 왕은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려고 다메섹에 갔을 때 거기서 본 제단의 도면과 모형을 유다 본국에 보내어 예루살렘의 여호와의 전 안에 그와 같은 것을 만들게 하였다. 귀국한 아하스 왕은 그 제단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왕하16:10~20). 또, 친앗수르적 정책을 채용한 므낫세 왕도 앗수르의 종교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윌 성신을 숭배하고, 어린 아이를 희생으로 바쳤다(왕하21:1~9).요시야 왕에 의한 종교 개혁은 이와 같이 앗수르의 강력한 영향하에 있던 유다의 종교 사정을 청산함으로써 동시에 유다의 정치적 독립을 획득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2) 당시 앗수르 니느웨의 위용고대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은 니느웨를 세계에서 가장 큰 성읍으로 불렀었다.
이단사이비연구 - 안상홍 증인회1. 배경(기원)안상홍은 1918년 1월 13일. 전북 장수군 개남면 명덕리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부산시 해운대구 우일동 808번지에서 살았으며, 부친의 고향은 경남 함안이었으나 그 외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37년에 일본에 건너갔다가 1946년 10월에 귀국하여 이듬해인 1947년 7월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는 침례를 인친 낙섬에서 1948년 12월 16일 이명덕 목사에게 받았다. 1953년부터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고 하는 안상홍은 1956년에 10년 안에 예수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안식교 목사의 설교에 반박하는 간증문을 통해 초대교회의 진리가 자신을 통해서 회복될 것임을 지시받았다고 한다. 옛날 윌리암 밀레 예수재림운동 당시에도 다니엘 8장 14절에 2300주야 해석을 서기 1844년으로 해석하고 그때에 예수 재림하시리라고 믿고 전도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날이 되기 전에 하젠포스나 윌리암포이 같은 사람들에게 묵시로 보이시기를 이 앞으로 새로운 진리가 두 계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신 묵시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약하고 보잘 것 없었던 화입 부인을 택하여 당신의 사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지금 전하는 이 진리도 처음 보내시고자 하실 때에 광경을 제가 보았습니다. 1962년 진리를 갈망하는 23명의 성도들과 안식교에서 탈퇴한 후 1964년 4월 28일 부산에서 '하나님의 교회 예수증인회'를 창설. 교회를 설립. 안식교에서 분리해 나왔다. 교세 확장에 힘써 1965년 4월 10일 포항교회, 1969년 3월 31일 풍기교회, 1972년 3월 28일 서울교회, 1975년 7월 8일 진도교회, 1983년 4월 18일 울산교회, 1981년 9월 15일 마산교회, 1983년에 대구교회를 설립하였고 교주 안상홍이 1985년 2월 25일 예언대로 운명하므로 3월 22일 본부를 부산에서 서울로 옮겼고, 6월 2일 교회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6장에는 예수님께서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된 보혜사가 바로 안상홍이요, 그래서 성부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며 성자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이고 성령 하나님의 이름은 '안상홍'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황당무계한 해석이요, 참람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2) 신부라는 여교주 장길자한편으로 안상홍증인회 신도들이 추종하는 여교주가 있는데 이들에 의해 소위 '어머니' 로 불리우는 장길자라는 여인이다. 이들은 장길자가 요한계시록 21장 9절과 22장 17절에 나오는 어린양의 아내요 신부라고 주장하며,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바로 장길자라고 해석하여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나오는 어머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이 하나님으로 믿고 받드는 안상홍이 그녀를 하나님의 신부로 지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어머니라 하여 장길자를 하나님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내라고 하는 교주 장길자는 안상홍과 결혼한 것도 아니고 세상 남자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고 그 자녀들은 불신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장길자를 어머니이며 하나님으로 받들고 있으니 안상홍의 이단교리에 미혹된 이 같은 결과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3) 토요일 안식일 주장이들은 토요일 안식일을 철저히 지킬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교주 안상홍이 안식교에서 안식일교리를 배웠기 때문에 안식교에서 나온 뒤에도 안식교의 안식일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특히 안식일교리를 주장하며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안식교와 동일합니다. △ 안식일이 '영원한 표징'이라고 출31:13, 겔20:20을 근거로 제시하고, △ 안식일에 자기의 '규례대로' 들어갔다는 말은 안식일을 지켰다는 의미라며 눅4:16, 행17:2을 근거로 삼고,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으니 안식일이 '주일'이라며 마12:8을 근거로 대는 등의 주장이 안식교와 동일합니다. AD 321년에 콘스탄틴 칙령에 의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표징인 (출 31:16; 겔 20:12) 안식일이 어찌 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며,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증거라고 사도행전 13:27, 42, 16:13, 17:1∼2, 18:4 등을 제시한다. 또 안식일이 변경된 근거라고 하여 , , , 등의 사전류의 내용들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 그리고 가록릭 교리서나 교리문답들을 가지고 안식일을 주일로 바꾼 것은 천주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자기들은 성경에 있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고 기성교회는 가톨릭이 만든 주일을 지키고 있으니 자신들이 성경적인 참 교회라는 주장이다. 과연 이들의 주장대로 안식일이 폐하지 않은 절기인가? 그리고 가톨릭에서 안식일을 변경시켰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들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엉터리 주장이다.(3) 구약의 안식일은 지켜야 하는가?안식일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절기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십자가에서 구약의 절기와 규례들이 폐했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2:14~17에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분명히 폐했다고 하였다. 무엇이 폐한 것인가? 절기, 월삭, 안식일이다. 이 문제는 십자가에서 폐한바 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폄론치 말라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하여 안상홍 측은 폐하였다는 말은 날짜가 폐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적인 의미나 방법이 폐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날짜를 지키는 것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즉 구약의 절기인 유월절이 폐했다는 것은 그 날짜는 지켜야 하지만 구약의 유월절 지키는 방법만 바꾸어 졌다는 것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증거로 신약 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전혀 없고,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5)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켰는가?이들은 누가복음 4장 16절을 인용하여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키셨다고 주장하며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셨으니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그 본을 따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왜곡된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 두 가지로 변증할 수 있다.첫째,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시지 않았다.본문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셨다'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신약의 어느 곳을 살펴봐도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셨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또 신약 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도 없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신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관습(규례)을 따라서 '들어가신' 것이다. 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는가? 그것은 회당에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모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하여 들어가신 것이다. 안상홍 측은 본문에 '들어가셨다'라는 말을 '지키셨다'라고 변조시킨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왜곡시켜 자기들의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이단들의 수법인 것이다.둘째,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없다.이들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셨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셨으니 그리스도인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모든 유대인의 규례를 지키셨다. 즉 할례를 받으셨고, 율법의 전례를 다 지키셨으며(눅2:21~27), 수전절과 같은 유대절기를 지키셨다.(요10:22~23). 예수께서 지키셨으니 우리도 지켜야 한다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수전절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규례들을 지키지 않고 있으며 안상홍 측도 할례나 수전절을 지키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규례들을 행하셨다고결례도 함께 지켜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면서 안식일만 강조하는 웃지못할 모순 속에 있는 것이다.(7) 콘스탄틴에 의하여 안식일이 변경되었는가?안상홍 측은 초대교회에서도 안식일을 지켰으나 321년 로마의 콘스탄틴에 의해서 예배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요일 예배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콘스탄틴의 강제 법령에 의하여 변경되었다고 주장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제 역사적인 사실들을 고찰해 본다면 또 하나의 역사적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첫째, 콘스탄틴 이전에도 주일(일요일)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안상홍 측의 주장대로 A.D. 321년 콘스탄틴에 의하여 주일(일요일) 예배가 강제적으로 시작되었다면 콘스탄틴 이전에는 주일 예배가 없었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자료들에 의하면 콘스탄틴 훨씬 이전에도 주일(일요일) 예배가 초대교회에서 드려지고 있었다는 사실들이 있다. A.D. 107년에 쓰여진, 베드로의 후계자로 알려진 안디옥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의 서한 9절에 벌써 구약의 관습인 안식일은 끝나고 주일에 예배해야 하는 의미에 대하여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A.D. 70~80년에 쓰여진 바나바서신 15절에도 분명하게 주일(일요일)에 왜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여러 초기 문헌들에 콘스탄틴이나 교황권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초기 교회들에 주일(일요일) 예배가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이로 보아 안상홍 측의 'A.D. 321년의 콘스탄틴 안식일 변경' 주장은 역사적인 오류이다.둘째, A.D. 321년의 콘스탄틴의 칙령은 안식일 변경의 칙령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안상홍 측의 주장은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에 콘스탄틴이 강제적으로 안식일을 변경하여 일요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곡해한 것이다. 이 또한 역사적인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A.D. 321년에 콘스탄틴이 주일에 쉬라는 명령을 내린 바가 있으나, 이는 안상홍 집단의 주장처럼 안식일 변경의 명령이 연합회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1. 하나님의 작정 개관지금부터 하나님의 사역,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무슨 일들을 하시는가에 대한 논의를 하려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창조와 섭리가 포함된다.먼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이라는 초월자가 영원 전에 세워놓은 계획이 관연 있을 수 있으며 그 계획에 따라 오늘의 만사가 진행되고 움직인다는 개념을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반론이다.이신론(자연신교, Deism) : 18세기 영국에서 주장, 창조자 하나님은 말하면서도 오늘의 세계는 그 분과는 상관없이 운행된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오늘의 세계가 운행된다는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 거부, 성육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부정된다.범신론 : 세상의 모든 개체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행위와 동일시하므로, 세상의 피조물의 행위와 구별되어 이해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이나 섭리적 행위를 말하는 역사적 기독교회의 가르침 거부, 세상의 악도 하나님의 것이 됨.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인격적인 존재라는 말이 함축하는 바는 그가 생각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으며, 어떠한 일을 목적하거나 계획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실제로 역사 속의 모든 사건들을 창세전에 계획하신 것이며, 그 분의 작정하신 바대로 오늘 운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무엇이 일어날지를 주권적으로 결정하셨으며, 또한 그의 예정의 계획에 따라 그의 전 창조 사역에서 그의 주권적인 의지를 작용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라는 말과 일치.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의 논의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작정이 되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1) 하나님의 작정의 성질(The Nature of the Divine Decrees)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앞으로 발생케 될 모든 사건들을 미리 정하신 그의 영원하신 계획이나 목 하지는 않으셨던 다른 일들, 즉 자신의 이성적 피조물들의 죄악된 행동들이 있다. 이러한 행동들에 관계하는 작정은 대개 하나님의 허용적인 작정(permissive decree)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이러한 행동들의 미래 발생이 하나님에게 확실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가 그것들을 그의 이성적 피조물들의 자유로운 행위에 의해 일어나도록 하용하신다는 것을 의미. 하나님은 이러한 죄악된 행동들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신다.개혁신학에는 허락적 작정, 타락이 경륜에 내포 혹은 허용되어 있다. 타락을 허락하신 것은 타락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과 더 깊은 본성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타락이 경륜 안에 들어와 있어도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전통적 개혁신학이다. 그런데 타락을 하나님의 경륜 속에 넣으므로 동시에 이것이 개혁신학의 약점이다.G. C. Berkouwer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륜 속에 죄를 넣을 수 없다고 하여 죄가 하나님의 경륜 밖에서 일어난 것으로 하였다. 죄는 생소한 것이어서 죄를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인과적으로 해명 불가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책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좋은 방안이나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과 상관없이 지상에서 생겼다고 하는 극단적인 견해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류 역사 시작에 생긴 큰 사건에 방관자로 계시는 것이 된다. 어떤 의미로는 하나님 보다 더 큰 세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5) 행동하려는 작정은 행동 그 자체가 아니다. 작정은 사건의 미래 발생을 확실하게 해주는 신적인 속성들의 내적 현현이나 실행이지만, 그 대상들의 실현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창조 작정은 창조 자체가 아니고, 칭의 작정이 칭의 그 자체가 아님. 작정과 작정의 실행 사이에는 구분이 있어야. 작정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성문법의 성격도 없고, 인간의 의지에 강요나 의무를 부과하지 않음(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서 은밀한 의지 : 작정적 의지로서 반드시 이루어진다, 계시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성경의 설명에서 벗어난 개념,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성은 그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됨에 있어서 인간을 결코 로봇과 같이 행동하도록 하지 않는, 즉 인간의 인격적인 활동을 배제하지 않는 주권성이다. 하나님의 주권성의 강조는 인간의 책임성 또는 인격적 활동을 무시하게 되는 것으로 오해, 칼빈주의에 대한 알미니안의 비판의 대표적인 것, 전자가 하나님의 주권이나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들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킨다는 지적,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인격적 활동(자유로운 지정의적인 활동)을 배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포함한 주권이라는 점을 말하는 균형잡힌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물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작정, 예정, 섭리 등의 개념들이 적어도 이론적으로 인간이 인격성과 상충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성경의 문맥에서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결코 상충되지 않고 조화하며 공존하는 개념이다.예를들어,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확고하나, 그 진행과정에서 예수님이 로봇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행하셨다. 우리들의 생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성취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들을 억지로 구속하고 강제하지 않고 각자 나름대로의 취향과 의도에 따라 살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작정하셨던 그길이 되는 것이다.성경에서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던 사실에서, 그의 형들은 요셉이 장차 애굽의국무총리가 될 것을 알고 억지로 판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동기에서 팔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의적인 행동들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하신 바를 이루어 가셨던 것이다.(5) 효과적이다(시 33:11; 잠 19:21; 사 46:10) : 하나님의 이 계획은 반드시 실현되는 것이며,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효과적으로 성취되는 계획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계획을 자신의 행위에 의해 실현시키시려고 결정하신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러므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그러나 죄를 지으면 그 죄의 대가를 받아야, 죄 값은 사망이다. 다 죄가 전제되어 있고, 그 중 일부는 그 법도대로 공의가 실현되게 하고, 일부는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 그러므로 만인구원은 구원이 아니다.(1)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된다.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작정하셨다면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하기로 되어 있는 그대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자유행위를 작정하셨을뿐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자유이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역시 가르친다(창 50:19, 20; 행 2:23; 4:27, 28). 성경의 문맥 속에서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은 그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인격적인 활동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을 앞의 작정의 주권성에서 보았다.의지의 자유가 신적 작정과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능력을 올바로 생각하지 못한 것, 도덕적 자유란 인간이 자기의 이전 사상과 판단, 성향과 욕구, 심지어는 품성까지도 조화시켜서 그의 도덕적 행위를 자유로이 결단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이 자유는 법칙을 갖고 있으며, 그 법칙을 더 잘 알면 알수록 인간은 일정한 상황하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더욱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 법칙을 만드셨기에, 그리고 충분히 이해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동의 방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도덕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인간의 미래의 행동을 결정하실 수 있다.(2) 구원에 대한 인간적 노력의 모든 동기를 제거한다.하나님의 작정대로 사건들이 발생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가질 필요가 없고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멸망으로 작정된 자는 최선을 다하여도 멸망할 것이고, 구원으로 선택되었다면 구원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도 구원에 이를 것이 아닌가?대답) 1. 하나 수 있다.마 11:25-30(주권적 구원계시---복음으로의 초청)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행 18:1-11(전도에서 낙심---택자가 많다고 격려해서 더 적극적으로 전도하게)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이다.
알기 쉬운 예정론(Predestination)R.C 스프룰 지음 (생명의 말씀사)*R.C Sproul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끌어가는 신학자, 심오한 진리를 알기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웨스터민스터 대학과 피츠버그 대학원, 화란의 자유대학교 공부. 리폼드 신학대학원 교수, 낙스 신학 변증학 교수.제 1장 갈등예정이라는 어휘 자체가 불길한 냄새를 풍긴다. 예정론이란 숙명론으로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태어나기도전에 모든 것이 다 결정되었다면 인간은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이라는 어쩌면 어렵게 여겨지고 기피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정론은 성경에 명백하게 제시된 교리이기 때문이다. (엡1:4,5,11 ;롬8:29...)예정론은 결코 칼빈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신학을 성경의 토대위에 세우고자 한다면 예정의 개념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실지로 모든 교회들은 어떤 형태로든 예정론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성경적인 입장에 서려면 예정의 교리를 가지느냐 버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될 뿐이다.책상위의 문구 *예정론을 지지하는 개혁주의적 입장의 학자들 : 어거스틴 , 토마스 아퀴나스, 마틴 루터, 존 칼빈,조나단 에드워드, 프란시스 쉐이퍼, 로저 니콜, 제임스 보이스, 필립 휴즈...*반대견해를 가진 학자들 :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필립 멜랑크톤,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C.S루이 스, 노르만 가이슬러, 존 워익 몽고메리, 빌리 그래함.....제 2장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예정론이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늘나라나 지옥을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기 전 뿐만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정론은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사실은 어떻게 이해하든 아주 냉혹한 말처럼 들린다. 적어도 불신자들에게 있어선 더욱 그렇다.1. 하나님의 주권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최아니라는 말이 된다.이런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한다면 무신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악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2. 하나님의 주권과 악의 문제 : 거룩하신 하나님과 악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느냐? 이 문제를 회의론자들은 “기독교의 아킬레스의 발꿈치(the Achilles'Heel of Christanity)"이라고 부른다.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무시하고 세상에 악이 들어왔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악조차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말인가? 여기서 많은 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야기한다. 악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서 죄를 범하려는 최초의 성향을 얻었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사탄에게로 돌린다. 사단에서 속아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단지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면 모든 죄는 사단의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하나님의 말을 인용했을 때, 아담과 하와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결구 선악과를 먹은 것은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서이다.타락하기 전 인간은 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죄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죄를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질문에 모두 답하고 있지는 않다.단지,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악이 발생하도록 허용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이다.그렇다고 하나님의 결정을 악하다고 말할수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 악을 허용하신 사실도 선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용하신 그 악은 여전히 악한 것이다.철학자들의 질문)하나님이 인간이 범죄 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그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도 않으시며, 주권자도 아니시다. 범죄를 허용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그러나 이 사실이 하나님이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타락한 피조물을 위하여 완전한 구원의 계획도 ? 라고 말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여지없이 침해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강제적인 능력을 거기에 사용하지 않으신다. 단지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택한 일부의 사람들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선 여전히 모른다가 정직한 대답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구원받는 것이 공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다루시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결정은 언제나 공의로우시다. 구원받은 사람은 긍휼을 얻은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행위에 대한 합당한 공의를 받은 것이다. (품꾼 이야기)제 3장 예정과 자유의지예정과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예정이란 어떤 힘에 의해 정해진 상태이고, 자유란 내가 결정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유의지란 이라고 말한다.그러나 과연 어떤 성향이나 특정한 기질 없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결정했다면, 그것은 그런 성향이나 동기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의지를 으로 정의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욕망을 통해 결정된다. 이것이 인간타락의 초점이다.어거스틴은 타락한 인간이라 해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이다.어거스틴은 타락전과 타락후의 인류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1)타락전 :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2)타락후 : 죄를 범할 수 있는 능력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무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다시 말하면 타락 후 인간은 죄없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말이다.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면 다시 죄를 범하지 않을 능력을 소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죄를 범할수 있는 능력도 제거되지는 않는다.육신에 있는 자들과 육신에 있지 않은 자들을 구분해 주는 것은 성령의 내주이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이 사람은 없다.그런 면에서 예정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제 4 장 아담의 타락과 나의 타락예정의 교리 속에 감추어진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우리의 죄악 된 성품을 어떻게 아담에게서 물려받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세운 적이 없다. 우리의 불평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은 확실히 우리 모두를 대표한다.(롬5:12-19) 타락의 저주가 모든 인류에게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고, 그것을 허용하셨다. 타락은 일종의 사고가 아니다. 어쩌다가 죄의 구덩이로 미끄러진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두 발로 뛰어든 것이다. 타락을 예정하신 하나님은 또한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도 예정하셨다.그렇지 않다면 예수님도 우리를 대표할 수 없다. 우리에게 타락이 없었던 것처럼 구원도 없다.제 5 장 영적 죽음과 영적 생명: 거듭남과 신앙칼빈의 5가지 원리 (TULIP) 1)Total Depravity(전적 타락) 2)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3)Limited Atonement(제한적 속죄) 4)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5)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중요한 예화 1.죽을병이 들어 고통당하는 사람(죄인) 몸은 전적으로 마비되어 있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치료약을 주셔야만 회복할 수 있다. 혼수상태다. 하나님이 치료약을 만들어 주셔야 살 수 있다. 하나님이 99%의 일을 하신다. 하지만, 1%는 인간이 할 일이다. 그것은 그 치료약을 입을 벌려 먹는 일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2. 타락한 인간을 수영을 못해 물에 빠진 사람으로 비유된다. 두 번이나 물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다시 물 밑으로 들어가면 죽을 것이다. 유일한 소망은 구명대를 던져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선을 정확하게 그 사람의 손앞에 던지신다. 이제 그 사람이 구명대를 붙들데서도 미미하지만, 선을 행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개혁주의적 견해는 인간은 완전히 죽었다고 선포한다. 그는 입을 벌릴 수도 없다. 구명대를 잡을 힘도 능력도 없다. 그는 이미 물에 가라앉아 죽었다. 이 죽은 사람을 하나님이 건지셔서 인공호흡을 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셨다.(거듭남, 중생)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회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되는 것이다. 오직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품과 성향을 주시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요6:37)*칼빈주의에 대한 오해 :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시는 반면 다른 사람들에겐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는 것을 칼빈주의로 오해한다.하나님은 필사적으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을 못 오시도록 막으신 적이 없으시다. 예정에 관한 중요한 핵심은 생래적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원하는 마음을 심어주실 때에만 그리스도를 원하게 되며 갈망까지 가지게 된다.그것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표현한다.제 6 장 예정은 이중적인가?이중적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의 마음속에는 믿음을 일으키시고, 버린 자들의 마음속에는 불신앙을 심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혁주의적 견해가 아니다. 칼빈주의 견해는 선택의 작정은 적극적인 것이고, 유기의 작정은 소극적인 것이다. 이중적이라는 말은 그 근거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했다는 구절(출7:2-5)과 롬 9장의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불신앙을 심어주실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원래 사람의 마음은 강퍅하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행사하고 있는 억제력을 제거하시면 된다. 하나님은 때로 구속적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타락는가?
헬라어 문법과 계시적 논리로 접근한예정과 구원, 그리고 전도의 상관관계롬 10:13, 구원, 엡 1:4a, 예정, 전도1. 에베소서 1:4a 문법적으로 접근하기엡 1:4a를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문법적으로 접근해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1) 창세 전: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한 때가 “창세 전”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창세 전이라는 문장을 헬라어로 보면 ‘우주의 기초가 놓이기 전(πρ? καταβολ?? κ?σμου)’이라는 뜻입니다. 우주의 기초란 천국이고, 우주의 기초가 놓이기 전이라면 천국이 지어지기 전이라는 말이겠지요?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존재하실 적에 예정이 이루어 졌다는 말입니다. 그 때는 천국도 없었습니다 (천국도 피조된 세계라는 것을 아시지요?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전 영원에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천사들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인간들도 없었습니다. 오직 성 삼위 하나님만이 계셨습니다. 그때 이미 예정이 이루어진 것이지요.(2) 우리를 택하사: “택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엨살레사토(?ξελ?ξατο)입니다. 이 단어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것들을 하나씩 살피면 도움이 됩니다.(2-a) 동사의 시제: 동사의 시제가 일반과거형입니다. 이것은 단회적인 행동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벌써 예정을 다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을 벌써 다 선택하셨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지금 다시 뽑지 않으십니다. 내일 마음이 바뀌어서 또 뽑지도 아니하십니다. 게다가 선택한 자를 취소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의 예정은 창세 전에 일회적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2-b) 동사의 태: 동사의 태가 중간태로 쓰였습니다. 중간태는 한국어에는 없는 특이한 태입니다. 헬라어에서 중간태는 주어가 자신을 위하여 행동한 것을 의미하는 재귀용법으로 쓰입니다. 예컨데 “A가 B를 (중간태로) 선택했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A가 자신을 위하여 B를 선택했다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행동이 중간태, 즉 재귀용법으로 쓰였습니다. 이는 우리를 선택한 이유가 당신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된 사람들은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분을 영원토록 왕으로, 주인으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인본주의 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겠지요?(2-c) 동사의 의미: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적은 수를 많은 무리에서 뽑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적은 수 만이 예정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미적 접근은 성경을 통하여 지지를 받습니다. 계시록 20장에 등장하는 백보좌 심판때에 놓인 두 종류의 책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는 생명의 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심판의 책입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헬라어의 수가 이 책들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 아세요? 생명의 책은 단수(βιβλ?ον)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책은 복수(βιβλ?α)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자가 더 적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7장에 있는 길 비유도 마찬가지지요? 지옥으로 인도하는 큰 길에는 찾는 자가 많지만(πολλο?), 천국으로 인도하는 작은 길에는 찾는 자는 적다고(?λ?γοι). 하나님께서 적은 수의 사람들을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2. 에베소서 1:4a와 로마서 10:13은 모순인가?당연히 떠오르는 논리적 질문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롬 10:13에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것은 예정론을 상쇄하는 가르침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엡 1:4a과 롬 10:13만 있다면 논리적 오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두 절만 있는게 아닙니다. 이 외에도 예정과 구원에 관한 수 많은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다 살펴본다면 이 두 구절이 절대로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좋겠네요. 엡 1:4a는 생선의 머리부분입니다. 그리고 롬 10:13은 생선의 꼬리부분입니다. 그리고 몸통부분은 성경의 여러군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 다 기록할 수 없으니 몇 개의 구절만 살펴 볼까요?3. 엡 1:4a와 롬 10:13 사이에 몸통 붙이기(1) 롬 10:14~15: 우선 롬 10:13부터 봅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맥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대신 15절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보세요.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구원이 이루어지는 순서가 역으로 되어있지요? 처음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고 있는 자를 보내셔야(?ποσταλ?σιν:신적 수동태) 합니다. 그 다음에는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전파를 불신자가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불신자가 전파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불신자가 믿게된 예수님의 이름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13절에 있는 “누구든지”는 문자적인 “아무나”가 아니라, 14~15절에 있는 모든 순서를 밟게된 자들을 나타낸다는 것이죠.(2) 행 13:48: 이제는 위에 있는 순서에 살을 좀 더 붙여 봅시다. 위의 순서를 보면 보내신 자의 복음 전파를 듣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헌데 우리가 알다시피 전파한 자의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믿는것은 아닙니다.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는 더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말 자유의지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 13:48은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줍니다.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이 구절을 보면 전파한 자의 복음을 들은 자들이 다 믿지 않습니다. 그대신 몇 사람만 믿습니다. 그 몇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입니다. 여기에 “작정된 자(τεταγμ?νοι)”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사건 후에 있는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지요? 창세전에 일반 과거형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단회적 예정(?ξελ?ξατο) 이후로 시간이 지나게 되었고, 그 예정이 이 세상에 태어나 완료형으로 살고 있던 예정된 자들에게 임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오직 예정된 자들만이 들은 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예정된 자들이 영생으로 향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방향 전치사(ε??)가 붙어 있습니다. 복음이 들려지면 예정된 자는 들은 그것을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되어 예정의 완성을 향해 들어간다는 뜻이지요. 고로 물고기의 머리와 몸통과 꼬리를 연결하자면 이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