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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략경영 사외이사제와 기업의지배구조
    SK 텔레콤의 사외이사제 박진태 오유나결론 및 토의 기업의 지배구조 사례소개 사외이사제 SK 텔레콤 기업소개 CONTENTSSK 텔레콤 기업소개SK 텔레콤 연혁사례소개 사외이사제SK 텔레콤의 사외이사제 도입배경과 과정구분 93 년 94 년 95 년 96 년 매출액 4,281 7,829 13,225 26,760 매출원가 2,372 4,531 9,339 20,264 판매 및 일반 관리비 199 428 1,106 1,875 영업이익 1,710 2,871 2,789 4,620 경상이익 1,327 ( 31%) 2,464 ( 31%) 2,739 ( 21%) 3,679 ( 14%) 당기순이익 769 1,287 1,808 1,965 종업원 수 1,607 1,934 2,988 3,626 구분 94 년 95 년 96 년 매출액 28 453 709 매출원가 17 290 541 판매 및 일반 관리비 10 16 29 영업이익 0.64 146 137 경상이익 -68 20 159 당기순이익 -47 19 117 종업원 수 40 55 80 ( 기술 :41) SK 텔레콤 단위 : 억 대한텔레콤 단위 : 억사외이사제 [outside director system] 기업 경영의 투명성 을 높이기 위하여 대주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외부 전문가 ( 대학교수 , 변호사 , 공인회계사 , 언론인 , 퇴직관료나 기업인 등 ) 들을 이사회에 참여시키는 제도사외이사제의 역할SK 텔레콤의 사외이사제 내용 사외이사 3 인과 사외감사 1 인 선임 국내 기업 중 가장 먼저 사외이사 승인거부권 제공 국내 최초 외부 감사인에게 상주사무실 제공 계열사간 거래에 관련된 것이나 국외투자를 할 경우 과반수 이상의 사전 동의 의무화 실시SK 텔레콤의 사외이사제 주요활동사외이사제 문제점 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2619029사외이사제 문제점 사외이사 선정방식 문제점 지배주주가 사외의사 후보 선정하고 주주총회에서 자신이 추천한 입후보 선임 →독립성 확보 어려움사외이사제 문제점 사외이사의 정보부족 전체 상장기업의 45.8% 는 이사회가 열리기 1 주일 전 에야 사외이사에게 회의 자료를 제공 사외이사에게 분기당 1 회 이상 정기적으로 경영 정보를 제공 하는 기업은 43.6% 사외이사 활동 지원 을 위한 조직 ( 겸업부서 포함 ) 을 갖춘 곳은 31.8% 수준 . 사외이사를 법정 최소인원인 이사총수의 4 분의 1 만을 선임 → 다수결에 의해 의사 결정하는 이사회에서 수적인 열세로 인해 업무집행 감독 견제 어려움 사외이사 비율의 문제점사외이사제 문제점 의견개진의 부족 ( 거수기역할 ) 정보의 부족 오너 친분 있는 사람 영입 → 감시기능 바닥 ' 만장일치제 이사회의 거수기 ' 로 전락사외이사제와 경영전략 주주중시경영 올바른 기업지배구조확립기업지배구조기업지배구조 기업의 목표인 이윤 극대화 또는 기업가치극대화 와 일관 된 의사결정 을 하도록 감시 하고 통제 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 .실패요인 대주주의 실제 주식보유에 비해 과대한 권한행사 기업경영실적을 파악할 수 있는 회계자료가 투명하지 않음 → 내부거래 빈번하게 발생 각종 법령들은 대주주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있음 → 소액주주의 권리보호나 이사회의 권한이 미약함대응방안 대주주의 독점적 경영권 제한 회계 감사 및 공시기준 강화 소수주주권 강화 , 외부견제장치 개선 정부차원에서 기업지배구조 모범기준 제시 이사회의 회장과 최고경영자의 역할분리→ 독립적운영결론 합리적 의사결정 기업의 투명성확보 견제를 통한 균형확보 지속가능경영 ( 계속적기업 ) 올바른 기업지배구조토의주제 현재 우리나라 사외이사제의 문제점 ( 선임방식 , 의견개진부족 , 사외의사 비율부족 ) 을 해결할 수있는 방안은 ? 최근 ‘기업지배구조 개선’ 상법 개정안 ( 이사회의 감독기능 강화 , 집중투표제 간접적 의무화 , 소액주주를 위한 전자투표제 일부 의무화 ) 이 입법예고 되었는데 , 기업지배구조를 법으로 규정함 으로써 얻는 긍정 ㆍ부정적 효과는 ?Q AREFERENCE SK 텔레콤 홈페이지 www.sktelecom.com 공정거래위원회 www.ftc.go.kr 금융감독원 www.fss.or.kr 2009 KT G 지속가능경영보고서 한국기업지배구조지원센터 장세진 , 『 경영전략 제 7 판 』, 박영사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 “ 사외이사제 ” “[ 사회이사 5 년 현주소 ] 성공사례 -SK 텔레콤 ”, 매일경제 , 2002.3.28 “ 사외이사 ‘ 참석률저조 , 거수기불과 ’”, 머니투데이 , 2002.2.25 “[ 사외이사 ] 사외이사 40 명 설문조사 …90% ‘ 전문성 부족’ 절감 ”, 매경 ECONOMY,2012.4.16 “ ‘거수기’ 사외이사제 손본다 … 제도개선 추진 ”, 경향신문 , 2007.11.28 “ 금융지주 사외이사 안건반대 ' 제로 '… 연봉 5 천만원 ”, 연합뉴스 , 2013.6.20 “[ 심층취재 ]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 …‘ 방패막이’ 논란 ” KBS 뉴스 , 2013.2.26 “[ 사설 ] 기업 지배구조마저 법으로 강제하는가 ”, 중앙일보 , 2013.8.1{nameOfApplication=Show}
    경영/경제| 2013.09.23| 28페이지| 1,000원| 조회(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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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페라 카르멘 감상
    카르멘 과연 그녀는 누구인가?영어영문학과201013638 오유나다양한 뮤지컬 작품을 보았지만 그 전에‘카르멘’에 대해서 들어 본적은 없었다. 심지어 카르멘이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돈주앙이나 카사노바는 나쁜 남자, 옴므 파탈의 전형으로서 익히 들어왔지만, 카르멘이 팜므 파탈의 대표적인 여성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나쁜 남자는 널리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비해 나쁜 여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옴므 파탈은 나쁜 남자, 팜므 파탈은 나쁜 여자로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왜 우리나라에서 나쁜 남자는 널리 쓰이는 반면, 나쁜 여자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을까 궁금해졌다, 한국사회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유교적 사상으로 인해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며, 삼종지도(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한다는 유교적 사상)처럼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존재함으로써 여성들을 자신의 그늘 아래 두고 지배해야한다는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팜므 파탈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수동적인 태도로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처럼 동화 속에 등장하는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들은 오히려 많은 여자를 만나보고 여자들을 강한 태도로 리드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 사회에서 나쁜 여자보다 나쁜 남자가 더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럼 과연 카르멘은 어떤 여자이기에 많은 남자들을 유혹했으며, 어떤 치명적인 매력을 가졌는지 궁금해졌다. 처음 무대에 등장한 그녀는 긴 머리와 육감적인 몸매로 수많은 담배공장 처녀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그런 그녀의 외적인 모습은 많은 남자들을 매혹시키고 사랑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면서 나는 왜 카르멘이 팜므 파탈이 되었는가, 과연 그녀를 창녀 또는 집시여인으로만 봐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카르멘’ 역시 다른 문학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는 ‘로미오 줄리엣’과 같은 보통의 사랑이야기와는 다른데, 그 이유는 바로 카르멘이 가진 사랑에 대한 가치관 때문이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은 제 1막에서 그녀가 불렀던 ‘Habanera(하바네라)’의 노래가사에서 잘 나타난다.‘사랑은 담배연기와 같은 것’,‘사랑은 자유로운 새’,‘사랑은 집시와 같다’라는 가사를 통해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적인 사랑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그녀의 가치관이 나타난다. 집시 여인 카르멘은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전형이다. 이는 남성을 유혹해 죽음이나 고통 등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숙명의 여인'을 뜻하는 사회심리학 용어인데, 팜므는 프랑스어(語)로 '여성', 파탈은 '숙명적인, 운명적인'을 뜻한다. 이러한 팜므 파탈의 모습은 ‘카르멘’의 무대가 된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도시 세비아와 잘 어울린다. 세비아는 집시들이 많기로 유명했고, 이들 대부분이 담배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하나로 트인 작업장 안에서 500명 이상의 여공이 빽빽하게 들어앉아 온종일 담뱃잎을 말았다고 하니 그 환경의 열악함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여름에 통풍 장치도 없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옷을 거의 벗은 채로 일했고, 그러다보니 남성 감독자들의 성희롱 대상이 되는 것은 예삿일 이었을 것이다. 양가의 규수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시대인 만큼 담배공장 노동자들은 모두 가난한 하층민 처녀, 유부녀, 과부들이었다. 카르멘은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팜므 파탈이 되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을 소유하길 원했다. 여성들은 무조건 자신들의 말에 복종하고, 한 남자만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르멘은 이러한 보수적인 사회에 대항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남자들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녀 스스로를 팜므 파탈로 만들었을 것이다.오페라‘카르멘’은 프랑스에서 처음 상연되었을 당시 인기를 끌지 못한 채, 대중들에게 외면당했다. 초연 당시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았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 원인으로는 주인공의 부도덕성에 있었는데, 그 당시 오페라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이며 상류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카르멘이 가진 팜므 파탈의 이중적 여성상과 살인과 자살이라는 돈 호세의 태도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보수적이며 가족적인 극장에서 비극적이며 성적인 내용의 ‘카르멘’은 미카엘라라는 여성상을 창조함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한다. 그 당시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미카엘라라는 여성상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던 부조리함의 수위를 낮추었다, 또한, 자칫 남성적인 목소리로 꾸며질 수 있었던 음색을 미카엘라라는 역할을 집어넣으면서 중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미카엘라는 단순히 대중의 인기를 얻고, 비평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은 아니다. 미카엘라는 그 시대의 남성들이 원하던 여성상을 대표하고 있다. 그녀는 카르멘과는 다른 한 남자만을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여성이다. 즉, 미카엘라는 카르멘과 대조됨으로써 카르멘의 부조리함과 팜므 파탈적인 매력을 부각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시골 출신의 군인 돈 호세는 외골수의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여자에게 쉽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지만, 한번 마음을 주면 그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는 남자이다. 그러나 안달루시아 지방의 뜨거운 피를 가진 여자 카르멘은 그와 사뭇 대조적이다. 돈 호세는 그녀의 퇴폐적 매력과 춤에 넋을 잃고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포로가 된 돈 호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와 함께 떠난다. 그는 그녀를 풀어주어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산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을 감내한 그였지만, 사랑의 영원함과 구속을 거부하는 카르멘은 그를 버린다. 성실한 병사에서 아름답고 정열적인 카르멘의 매력에 빠져 그녀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호세는 카르멘에게 이용당하지만 그녀를 잊지 못해 주위를 맴돈다. 하지만 그녀를 소유하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점점 호세의 집착적인 사랑에 염증을 느끼고 도망치려 한다. 이런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그는 최후의 결단을 내린다. 그녀를 죽임으로써 영원히 자신의 곁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페라‘카르멘’은 소용돌이에 휩싸인 호세와 태양처럼 뜨겁고 폭풍처럼 거친 카르멘의 사랑과 그에 따른 파국을 다룬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인문/어학| 2012.01.12| 3페이지| 1,000원| 조회(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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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미드라마 everyman 레포트
    About Everyman영어영문학과201013638 오유나서양의 중세기는 암흑기로서 고전과 고대문화의 전통이 말살되었고,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그리스도교회는 모든 연희(演戱)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10세기까지 연극은 거의 흔적조차 없었으나 그 뒤 교회의 미사행사에서 싹텄다고 보이는 종교극이 발전해 중세연극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우의적(寓意的) 교훈극인 도덕극 등이 대중 속에 파고들게 되었다. 공연방식도 발달하여 이동(移動) 연극형의 패전트 방식, 복수 동시상연형의 맨션 방식 등 고전 그리스극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했고 극작가의 독립성은 배제되었다. 또한 중세연극은 그리스·로마의 고대연극이나 르네상스연극 고전주의 연극에는 대치되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특징은 극의 종류와 형식이 자유롭고 다양하다는 점이다. 민중의 폭넓은 참가를 반영하여 제제와 취급방식에서도 민중적 특징이 현저하였다.중세연극은 크게 도덕극(morality play)과 기적극(miracle play) 형태로 나뉜다. 기적극(miracle play)은 Bible(성경)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성경을 바탕으로 한 이 극들은 10세기경 성당에서 중세 교회의 미사 전례문에 끼워 넣는 시구인 ‘트로프(trope)’라 불리던 라틴어 전례식의 짦은 부분들을 극화시킨 작품에 기원한다. 기적극의 주요 스토리는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고 고통의 나락으로 빠지지만, 그 죄를 뉘우치고 성모, 성자에게 빌면 그가 거기에 나타나서 기적을 보여 죄인은 구제를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영국에서 탄생한 기적극들은 그 저자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작품들은 천지창조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쳐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성서적 인류 역사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까지 주요사건들을 시대 순으로 묘사하고 있다. 각 장면은 독립된 ‘이동 무대마차(Pageant Wagon)’ 위에서 상연되었는데, 그 마차를 적절한 도시의 각 정거장으로 끌고 다니면서 전 작품을 상연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프랑스 12세기 말의 작가 장 보텔의 《성니콜라극(劇)》, 13세기의 작가 뤼트뵈프의 《테오필극》 등이있다.도덕극(morality play)은 진, 선, 미, 악, 신앙, 허영등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하여 주요인물로 한 종교극이다. 그 중에서도 악마나 익살꾼 등은 희극적인 요소를 담당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도덕극은 민중에게 계몽과 도덕적 교훈을 주고, 또한 인간의 혼의 구제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중세 말기(14~16세기)에, 설교에 얼마간 희극적 각색을 첨가한 것으로서 발전했는데, 작자는 대개 성직자였다. 고정된 무대에서 공연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적(靜的)이며, 현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지루한 연극형태이다. 대표적인 작품은 영국의《Everyman》인데 지금까지도 공연되는 유일한 작품이다.?‘Everyman’은 작자미상의 중세 연극중의 하나인 도덕극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 신(God). 그러나 인간들은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쾌락을 탐하며 신을 까맣게 잊고 살아간다. 이에 분노한 신은 사신(Death)을 불러 Everyman을 잡아오라 명령한다. 방탕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던 Everyman에게 Death는 결산서를 가지고 서둘러 떠나자고 한다. 하지만 Everyman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Death에게 돈을 주겠으니 시간을 더 달라 부탁한다. 그러나 Death는 죽음은 왕이나 귀족, 부자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며,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Everyman이 그의 여행길을 함께 할 동반자를 찾아 같이 가게 해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인다. 이에 Everyman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친척(Kindred), 재화(Goods), 우정(Fellowship) 등에게 같이 가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그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Everyman의 부탁을 거절한다. 엄청난 실의에 빠져있던 Everyman은 마지막으로 평소 친분이 없던 선행(Good-Deeds)을 찾아가 부탁을 하게 되고, 선행은 그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주지만, 평소에 Everyman이 자신을 잘 돌보지 않아 일어설 수조차 없다며 지식(Knowledge)의 충고를 듣자며 제안한다. 이들의 도움 덕분에 Everyman은 크게 깨달음을 얻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치며, 스스로의 채찍질로 참회를 한다. 이에 믿음은 힘을 얻고 Everyman에게 참회의 외투를 입혀준다. 마침내 Everyman은 오직 믿음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천사가 나와 그들을 맞이한다.
    인문/어학| 2011.12.26| 2페이지| 1,000원| 조회(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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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죽헌 답사 보고서 평가A좋아요
    강원의 찬란한 유산오죽헌(烏竹軒)을 다녀와서[2011.04.02]201013638영어영문학과 오유나우리 지역의 문화유적 한 곳을 답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강릉이 고향이기에 강릉의 문화유적에 대해 답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강릉에는 그렇게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있지 않았다. 선교장이나 오죽헌이 전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풍으로 오죽헌에 자주 가기는 했었지만, 그곳에 대하여 제대로 조사해 본 적이 없어 고향의 문화유적 하나쯤은 제대로 알아두자는 취지에서 오죽헌을 답사하기로 결심했다. 5만원권을 발행하면서 지폐에 들어갈 인물 선정에 있어 많은 논란들이 있어왔다. 여성부에서는 현모양처의 표본인 신사임당을 지폐에 넣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로 사회진출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 현모양처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는 성차별이라고 강조하면서 신사임당을 반대했지만, 결국 5만원권의 주인공은 신사임당이 되었고, 그로 인해 그녀의 아들 율곡이이와 오죽헌에 대한 사람들이 관심이 이어졌다. 따라서 이 글에서 오죽헌과 오죽헌의 주변건물 그리고 신사임당과 율곡이이, 현재 오죽헌의 모습과 문제점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오죽헌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양식으로 신사임당과 율곡이이가 태어난 집이다.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으며,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4면을 굵은 댓돌로 한 층 높이고 그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배치하여 네모기둥을 세웠다. 건물을 향하여 왼쪽 2칸은 대청이며 오른쪽 1칸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대청 앞면에는 각각 띠살문의 분합(分閤)을, 옆면과 뒷면에는 2짝 씩의 판문(板門)을 달고, 그 아래 벽면에 머름을 댔다. 온돌방은 뒤쪽 반 칸을 줄여 툇마루를 만들고, 앞벽과 뒷벽에 두짝열개의 띠살문을 단 것 이외는 모두 외짝문이다. 천장은 온돌방이 종이천장이고 대청은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에 걸쳤으나, 온돌방과의 경계에 있는 대량(大樑)은 그 아래 중앙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고, 자경문을 들어서면 율곡기념관 앞에 꽤 넓은 공간이 있다. 그 옆에는 율곡이이의 사당인 문성사로 가는 길이 이어져있는데 문성사 한쪽에는 어제각이라고 하여 율곡이이가 사용하였던 벼루와 함께 율곡이이의 저서인 이 보관되어있었다. 문성사로 들어서게 되면 그 왼편으로 신사임당이 용의 꿈을 꾸고 율곡이이를 나으셨다는 몽룡실이 있다. 각 방마다 안내판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놓았으며, 신사임당의 시나 그림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다.오죽헌(烏竹軒)은 이름 그대로 검은 대나무 집으로 그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다섯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둘째 딸의 아들 율곡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다. 권처균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집 주위에 까마귀와 같은 검은 대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오죽헌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가본 오죽헌에는 집안 한쪽에 오죽이라고 하여 검은색 대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오죽은 줄기가 첫해에는 녹색이고 솜대와 비슷하지만 2년째부터 검은 자색이 짙어져서 검은색으로 된다. 줄기의 빛깔은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가 아름답기 때문에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오죽에 대해 미리 조사를 해보았었는데, 사진으로 보는 오죽보다 오죽헌에 있는 오죽이 훨씬 더 검고 날렵해보였다. 하지만 관상용으로 심기에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보통 대나무에 비해 키가 작고 둘레도 작고 아담하여 가정의 뒤뜰에 심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되었다.오죽헌은 본래 형조참판을 지낸 수재 최응현의 집이었다. 최응현은 조산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북평촌으로 옮겨왔는데, 둘째 딸이 이사온과 혼인하자 이 집을 둘째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이사온과 최씨(최응현의 딸) 사이에는 용인 이씨만이 태어났으며, 용인 이씨는 서울 사람임당과 모친인 이씨 부인이 외가 쪽과 밀접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전기의 가족문화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신사임당과 그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이 친정 쪽에서 거주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사임당이 결혼한 것은 1522년인 19세 때로 남편은 덕수 이씨 가문의 이원수이다. 이후 2년 뒤인 21세 때 맏아들 선, 26세 때 맏딸 매창, 33세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는 등 모두 4남 3녀를 낳아 길렀다.?기록에 따르면 사임당은 38세 때 서울 시집에 정착하기까지 근 20년을 강릉에서 주로 살았다고 한다. 아들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어머니 이씨와 마찬가지로 친정에 아들이 없어 시집인 서울에 가서 살지 않고 친정인 강릉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결혼 몇 달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후 시가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 살기도 했다.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리는 사이에 셋째 아들인 이이를 강릉에서 낳았다. 사임당은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시와 글씨,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현모양처로 인품과 재능을 겸비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기에는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조선 유학을 보수화로 이끈 인물인 송시열이 사임당의 그림을 찬탄하면서 천지의 기운이 응축된 힘으로 율곡 이이를 낳았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천재화가 보다는 그를 낳은 어머니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사임당에 대한 유학자들의 존경은 18세기 유학적 가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더욱 올라 마침내 그녀는 부덕과 모성의 상징으로 변화해 갔다. 말하자면 사임당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모성의 신화화는 17세기를 거치면서 생산되고 18세기에 와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식을 낳고 이내 계속 생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도 한다. 이이가 6살 때까지 강릉 오죽헌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154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실과 율곡이이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문성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오죽헌을 정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사용하는데 이 방이 바로 몽룡실이다. 몽룡실은 율곡이이가 태어난 방으로써 율곡이 태어나던 날 신사임당은 검은 용이 이 방으로 날아와 마루에 서려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몽룡실 뒤꼍에는 율곡매(栗谷梅)라고 불리는 나무가 있다. 이는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에 심었으며?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은 매화 그림을 즐겨 그렸고, 첫째딸의 이름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또 율곡이?10세 이전까지?쓰던 용연벼루에도 움트는 매화 가지가 새겨져 있는데,?매화꽃이 피고 열매 맺듯이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에서 꽃망울이 없고 움트는 가지만 새긴 것이라 한다. 이 율곡매는 신사임당이 태어날 당시부터 상당히 굵었을 고목매화를 보아온 추억을 살려 훗날 매화그림으로 승화시켰을 것으로 짐작되어 그에 상응하는 역사적인 가치가 있으며,?다른 매실나무보다?굵은 매실이 달리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를 겸비한 매실나무라고 할 수 있다.문성사는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오랜만에 가본 오죽헌의 전경은 어렸을 적 기억 속에 있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매표소도 생겼고, 오죽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신사임당과 율곡이이의 동상, 정승, 여러 불상, 각종박물관등 전에는 볼 수 없던 관람요소들이 생겨있었다. 길도 깔끔해졌고, 음했다.
    인문/어학| 2011.06.08| 8페이지| 1,500원| 조회(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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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 어떤인물인가?
    명성황후: 조선의 마지막 왕비영어영문학과201013638, 오유나명성황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인물 중에 한명이다. 자주 사극드라마나 영화, 책, 뮤지컬의 소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우리는 매 작품마다 그녀에 대한 다양한 시각 차이와 함께 에피소드들을 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조수미의 뮤직비디오 ‘나 가거든’에서 일본낭인들에게 살해당할 때,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고 하는 그 대사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조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조선의 마지막 왕비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주어 가슴 뭉클하게 만들었다. 또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는 그녀의 호위무사와의 사랑과 외국의 문물에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그녀의 일대기를 보여주어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했던 그녀의 삶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늘 긍정적이지는 않다. 백성과 조선의 안위보다는 청과 러시아라는 외세에 의존해 그녀의 권력을 지킬 궁리만 했다는 평가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명성황후에 대한 엇갈린 평가들을 그녀와 관련된 여러 정치적 사건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명성황후는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변에 알려졌다.?16세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씨로부터?완화군을 얻고 명성황후를 돌보지 않았으나 왕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완화군이 태어나자?흥선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명성황후는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졌고?대립하기 시작하였다.?특히 후에?원자가?태어났으나 5일 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을 가지고대원군과 더욱 대립하였다.?명성황후는 대원군의 반대파인 민승호, 대원군의 형 이최응, 그 아들 재면,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대원군의 반대 세력인 김병국, 조두순, 이유원 등을 규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평소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사이에 늘 갈등이 존재한다고 알고 생각했었는데, 그 갈등에 한 여인의 질투심이 담겨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명성황후가 개화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의자를 가지고 흥선대원군과 대립을 한다고 여겼는데, 그 대립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있는 점에서 실망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내외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이유로?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이를 이용하여?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하고,?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또한 고종에게 비 중심의 세력으로?정권을 구축한 뒤,?개방정책을 펴서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여 민씨 세력이?위협을 당하자 비는 궁궐을 탈출, 충주·장호원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하였다.?국내가 혼란해지자 고종은 대원군의 힘을 빌렸고, 명성황후가 오랫동안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자?대원군이 중전의 국상을 선포하려 하였다.?이때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고?대원군은 톈진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했고, 명성황후 중심의 정권이?다시 수립되었다. 명성황후가 충주에 피신했을 때,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명성황후가 충주에서 강가에 있는 한 노파에게 명성황후를 아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노파는 명성황후에 대해 악담을 퍼부었고, 궁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녀는 그 노파의 사형을 명했다고 한다. 여기서 과연 그녀는 백성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 조선의 국모가 맞을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녀가 정말 현명한 왕비였다면, 그 노파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 노파를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짚어 보고, 노파와 토론을 벌여 더 나은 정책을 수립하는데 노력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조선시대에 왕비가 정치적 권력을 가진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그 권력을 남용하고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1884년 김옥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그녀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는 청에게 오히려 계속해서 힘을 실어주었다. 청의 개입은 조선의 자주성을 잃게 하는 요소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계속해서 조선의 정치문제에 청을 개입시켰다. 이후 명성황후는 점차 정권을 좌우하며, 대원군에의 복수심을 키우고?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치성 명분으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국고를 낭비하기도 하였다.?이를 보고, 혹자는 명성황후를 ‘조선의 된장녀’ 라고 칭하기도 한다. 당시 백성들은 생활이 많이 피폐해져 있었지만, 그녀는 국고의 대부분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닌 그녀의 사치품과 파티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외국의 드레스와 초콜릿, 보석과 사치품들에 관심을 보이며 자주 외국영사관의 부인들과 파티를 여는 장면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외국의 문물을 거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보기 좋으나, 그 이면에는 국고를 낭비하며,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난다. 명성황후가 서양의 문물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좋아했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백성들의 생활과는 정 반대되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프랑스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자신의 사리사욕 채우기에 급급했던 모습이 연상이 된다.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면서 조선에서의 청의 입지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일본의 입지는 날로 강성해져갔다. 사실 일본은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부터 조선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이 일본을 업고 갑오개혁을 진행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선 식민지에 한걸음 더 나아가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명성황후가 일본의 야욕을 알고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일본 세력을 조선에서 추방하려고 한 것은 식민지를 겪은 현대를 살고 있는 입장에서 충분히 옳은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서양 삼국, 즉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국간섭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와의 친분을 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하였는데, 이는 정책상 일본에 불리하였다. 결국 그녀의 반(反)일본 정책은 일본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1895년 8월 20일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명성황후를?살해하였다. 봉록을 받지 못하고 유랑하는 무사 계층을 가리키던 낭인(浪人, 로닌)은 상당수가 조선과 만주에 진출하여 일본의 대외침략주의에 앞장서고 있었다. 일본 낭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한다. 그 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되었고, 1897년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밖 홍릉에 안장되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황후(明成皇后)라 칭해졌다. 그러나 을미사변은 오로지 일본인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을미사변의 국내 거물급 협력자로는 유길준과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의 한국인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 1894년 가을 명성황후가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은사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 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부분이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명성황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이다.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어떠한 행동을 했는가 보다는 일본 낭인들의 손에 죽은 그저 한없이 불쌍한 조선의 마지막 왕비일 뿐이다. 하지만 위에 언급했듯이 그녀의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청을 비롯한 러시아 등 외세의 개입을 용인한 개화정책은 그녀에 대한 불쌍하고 가냘픈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명성황후에 대한 당대의 평가기록을 살펴보면,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다. 암살 직후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날짜미상의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영국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도 더 악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명성황후의 사치와 민씨 정권의 매관매직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는 일본인을 제외하면 모두 긍정적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명성황후가 영리한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어의였던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에서도 명성황후는 우아하고 근엄했다고 표현하였다.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썼다 있다.
    인문/어학| 2010.12.05| 5페이지| 1,000원| 조회(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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