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경제-화교네트워크- 서론화교의 범주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화교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과 그 후예이다. 명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를 다시 찬찬히 곱씹어 보면 화교의 범위는 무모하리만큼 방대해진다.화교의 범주는 작게 보자면 중국국적의 보유자로써 해외에 정착한 자이지만 크게 본다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막연히 화교를 해외의 중국인과 그 후손 이라 정의 한다면 우리 한민족 가운데 상당수가 화교로 분류될 것이고 나아가 과거 몽고의 유럽 정복으로 피가 섞였던 동유럽 사람의 상당수가 화교가 될 터이다. 중국은 수천 년의 역사동안 다양한 민족 사이의 교류와 융합 그리고 혼혈을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단일민족이 아닌 56개의 다수 민족에 의해 건설된 다민족국가이며 나아가 이 56개 민족이 가지고 있는 역사가 곧 중국의 역사임을 화교는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교는 한족漢族 뿐 아니라 각 소수 민족의 해외 이민까지도 포함한다.위의 정의에 근거하면 한국에는 수백만 명의 화교가 존재한다. 한국의 기씨奇, 공씨孔, 맹씨孟 그리고 숱한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는 기자, 공자, 맹자 등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유명인사를 집안의 시조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족보상으로 그들은 분명히 화교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화교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 또한 이 논리의 비약에 동조하지 않는다.해외의 중국인과 그 후예를 가리킨다는 화교에 대한 정의는 이렇듯 황당하고 무모하다. 흥미롭게도 현대의 중국은 화교에 대한 이 무모한 정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나라의 유명한, 혹은 위대한 누구누구가 화교라는 소문은 중국을 고무시킨다. 이는 중국민족주의자의 열망이자 꿈이며 위대한 중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중국의 자기최면이다. 중국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화교를 만들어내었고 그 틀에서 해외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그들을 화교로 규정하고 화교로써의 싦을 요구하였다. 화교는 중국의 입장에 따라 해석되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화교겨놓은 생활양식과 중국인의 사고방식, 언어, 문화, 특색 등의 흔적은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들의 이주와 정착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이들은 여전히 중국인이 아니었다.2.당인唐人의 출현당나라는 고대 중국의 전성시기였다. 수도였던 장안은 국제적인 정치 경제 문화교류의 중심지로써 해외와의 무역이 활발히 진행되던 곳이다. 아랍, 동남아, 동아시아 사람들이 당나라로 들어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중국인 또한 해외 각지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 등지에 장기 거주하는 중국인과 이들의 마을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주로 중국과 동남아 현지 사이에서 혹은 중국과 아랍 사이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이 시기 중국인의 이주에서 과거와는 다른 특별한 의의가 발견된다. 즉 이들이 해외에서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들의 종족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그들 나름의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당나라 사람의 마을인 ‘당인가’에서 거주하면서 당나라 물건인 당화를 판매하였고 당나라 사람의 복장인 당장을 입고 당나라 사람의 문자인 당인서를 사용하였다. 당인이나, 당인가라는 이름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고 현재 이 명칭은 화교나 차이나타운을 일컫는 여러 호칭 가운데 하나이다.중국인 이주자는 현지 원주민과 스스로를 구별하면서 당인이라는 공동체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당인에 대한 자의식 즉 중국을 향한 일치된 정서의 형성은 화교가 만들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3. 명나라시기 1405년의 보물선명나라 시기 영락제永樂帝는 쿠데타를 통해 조카인 건문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약점을 감출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덕을 천하에 베푼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화鄭和를 수장으로 삼아 대규모의 해외사절단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화의 원정이다. 이는 세계 항해사상 유래가 없었던 역사로써 1405년부터 1433년까지 28년간 진행되었고 전체 14개 국가에 그 흔적을 남겼다. 그 규모 또한 실로 대단했다. 해외무역은 전면 금지되었고, 중국인의 해외이주 또한 중단되었다.정화의 원정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으로 완전히 종결 되었다. 하지만 동남아 당인사회는 정화의 원정으로부터 장래 화교로의 발전을 위한 문화적 자긍심을 부여받았다.4.청나라국민의 이민 에너지해외거주 중국인 상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국인을 해외로 내몰 수 있는 중국 안의 방출 에너지와 이를 받아들일 중국 밖 현지의 흡수에너지가 필요했다. 대략 16세기부터 비로소 해외거주 중국인을 둘러싼 환경에 이 두 가지 에너지가 마련되었다.우선 중국의 상품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남부지역은 이미 노동, 자본, 기술에 의한 공장이 운영되면서 시장을 매개로 한 상품경제가 성장하고 있었다. 비단이나 도자기는 고도의 정교한 기계와 수십, 수 백명의 분업을 통해 만들어졌고 이 상품은 더 큰 이윤을 찾아 시장에 유통되었다. 이러한 상품경제의 발전은 저오하의 원정이 끝나면서 금지된 민간인들의 무역활동을 끊임없이 유혹하였다. 절강折江, 복건福健, 광동廣東, 대만臺灣 등 지역은 점차 밀무역의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중국인은 다시금 해외로 나가 이익을 만들만한 지역에 점포를 개설하였다. 상품경제의 성장과 함께 중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 또한 이민 방출을 위한 에너지를 더 한층 강화시켰다. 명나라 말기에는 왜구의 소란으로 중국 동남연해의 사회가 혼란에 휩싸여 현지의 주민은 삼삼오오 동남아로 피신하였고 만주족滿洲族인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자 수만의 명나라 충성파가 만주족의 지배를 거부하고 해외이주를 선택하였다. 중국 이민을 둘러싼 해외의 환경 또한 변모하였다. 세계각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서방 열강이 드디어 중국과 얼굴을 맞대었다. 이들은 동남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중국 이민자를 우대하였고 동시에 새로운 중국인을적극 유치하였다. 동남아 식민통치를 위해 중국인은 필요한 존재였다. 서방열강의 입장에서 그들은 서로 얼굴이나 머리카락 색깔이 달랐고, 사고방식이나 생화습관도 달랐으며 원주민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이들은 해외 이주를 위한 여러 가지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 정부의 허가를 받아 출국한 상인이나 관리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뱃사람도 있었고 이 허가증을 위조하여 해외로 빠져 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절대대수의 중국인들은 불법 조직이 운영하는 인력송출회사에 몸을 맡겼다. 이들은 약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일단 작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바다 위에서 서방의 식민지정부가 뒷돈을 대고 원양선박으로 갈아타고 동남아 현지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이민 추세에 대해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이미 억제할 수 없는 중국인 이민은 마치 홍수와도 같이 동남아로 넘쳐왔다’중국인 이주자 수는 급증하였고 1840년 이전 이들의 수는 이미 10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중국인 이주자의 수가 늘어나가 자연스럽게 이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 공동체는 현지의 중국인 이주자의 정서에 큰 변화를 발생시켰다. 과거의 해외거주 중국인은 중국에 대한 향수를 안은 채 중국을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시기의 해외거주 중국인은 점차 현지사회를 자신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기반으로 인식하였다.현지 정부는 그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주었고 현지 사회를 통치하고 있던 식민정부는 그들에게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약속해 주었다. 여기에 비해 중국은 여전히 해외거주 중국인에 대해 ‘중국인임을 스스로 포기한 간사한 백성’이라 하여 보호는 커녕 멸시와 탄압을 서슴치 않았다.수적으로 몸을 불린 해외거주 중국인 사회는 다양한 공동체를 운영하였고, 이 공동체는 이들에게 인신 및 재산의 보호와 함께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해 주었다. 동남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 중국연해 사람들이 선호하는 불고나 도교의 재단이 마련되었다. 중국인 이주자는 그들만의 공동체 내에서 그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정서적 문화적 안락감을 누릴 수 있었다.6. 500만 이민에너지통계에 따르면 1741년 중국의 인구는 1억 4300만 명 것이었다. 가난한 중국인은 중국 대륙 안에서 도저히 살아 갈 수 없었다.중국 안에서 이민 방출 에너지가 폭발하고 있는 것과 함께 중국 밖에서 또한 강력한 흡수 에너지가 급속히 강화되었다. 서방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동남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세계 각지의 식민지는 대량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동남아의 주석광산과 고무농장의 운영,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금광 채굴과 철도건설, 남아메리카에서는 플랜테이션 농장은 모두 노동력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19세기 초이래 영구, 포르투갈, 미국은 연이어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흑인 노예에 대한 노동력 착취가 불가능해지면서 세계 각지의 식민지에는 노동력이 극심하게 부족해졌다.중국의 이민 방출에너지는 자본주의의 목마름을 해소해주었다. 가난한 중국인들은 중국대륙에서 빠져나와 세계 각국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19세기 말까지 해외로 송출된 중국인의 수는 500만 명에 이르렀다.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 자본1. 화교자본의 본질과 특성해외에 거주하는 중국계 민족을 화교華僑, 화인華人 등으로 부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화교는 중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고, 화인은 거주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구분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들의 국적 확인이 어려운데다 이중 국적자도 많아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계 민족을 화교라고 통칭한다.이러한 화교 인구는 세계적으로 약 60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홍콩, 대만, 마카오 등 3대 지역에 약 2800만 명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약 2000만 명이 거주하며 나머지는 미국, 유럽 등지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80% 이상이 동남아 지역에 집중돼 있는 셈이다.화교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 된 것은 막대한 경제력 때문이다. 화교자본은 현금과 채권 형태로 1조 5000억 달러, 주식과 자산으로 5000억 달러 이상을 보유해 유동자금 규모가 최소 2조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다.
..PAGE:1동아시아의 경제권화교 네트워크근대동아시아의 전개..PAGE:2근대동아시아의 전개INDEX서론1화교의 범주화교의 역사2조선에 간 기자당인唐人의 출현명나라 시기 1405년의 보물선청나라 국민의 이민 에너지100만 명의 이민과 청나라의 이민금지 조치500만 이민 에너지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3화교자본의 본질과 특성화교네트워크 조직적 특성대한민국에게 주는 시사점결론4..PAGE:3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사전적 정의 화교는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과 그 후예이다.화교의 범주는 작게 보자면 중국국적의 보유자로써 해외에 정착한 자이지만 크게 본다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위에 정의에 근거하면 한국에는 수백만 명의 화교가 존재한다.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화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 또한 이 논리의 비약에 동조하지 않는다.화교는 중국입장의 따라 해석되었을 뿐 중국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화교를 만들어냈고, 그 틀에서 해외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그들을 화교로 규정하고 화교로서의 삶을 요구하였다.그들의 효용성 이전에 우리가 화교, 그들 삶에 과정을 살펴야 한다.사전적 범주..PAGE:4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조선에 간 기자중국은 화교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 인물인 기자奇子를 거론한다.한국의 기奇, 기箕, 서徐, 선우鮮于, 한韓, 등 성씨는 족보에서 기자를 시조로 삼고 있다.또 다른 화교의 시조격으로써 거론 되는 인물이 서복徐福이다.서복은 진시황의 명령으로 소년, 소녀 삼천 명을 데리고 불로초를 찾으러 동쪽으로 떠났다는 인물이다.기자나 서복이 조선이나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이야기 또한 진위가 불분명하다.그들이 남겨놓은 생활양식과 중국인의 사고방식, 언어, 문화, 특색 등의 흔적은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들의 이주와 정착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이들은 여전히 중국인이 아니었다...PAGE:5경제 문화교류의 중심지로써 해외와의 무역이 활발히 진행되던 곳이다. 아랍, 동남아, 동아시아 사람들이 당나라로 들어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중국인 또한 해외 각지로 이동하였다.이 시기 중국인의 이주에서 과거와는 다른 특별한 의의가 발견된다. 즉 이들이 해외에서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들의 종족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그들 나름의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중국인 이주자는 현지 원주민과 스스로를 구별하면서 당인이라는 공동체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당인에 대한 자의식 즉 중국을 향한 일치된 정서의 형성은 화교가 만들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PAGE:6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명나라, 1405년 보물선명나라 시기 영락제永樂帝는 쿠데타를 통해 조카인 건문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약점을 감출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덕을 천하에 베푼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화鄭和를 수장으로 삼아 대규모의 해외사절단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화의 원정이다.정화의 원정은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고 인도양을 건너 인도, 스리랑카를 방문한 후 페르시아 만,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동부 해안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7차례 걸쳐 진행된 원정을 통해 중국인 이주자 사회에 대한 통제와 감시 그리고 지지와 회유를 통해 현지의 중국인 이주자 사회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정화의 원정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으로 완전히 종결 되었다. 하지만 동남아 당인사회는 정화의 원정으로부터 장래 화교로의 발전을 위한 문화적 자긍심을 부여받았다...PAGE:7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청나라 국민의 이민 에너지해외거주 중국인 상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국인을 해외로 내몰 수 있는 중국 안의 방출 에너지와 이를 받아들일 중국 밖 현지의 흡수에너지가 필요했다.중국의 상품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남부지역은 이미 노동, 자원정이 끝나면서 금지된 민간인들의 무역활동을 끊임없이 유혹하였다. 절강折江, 복건福健, 광동廣東, 대만臺灣 등 지역은 점차 밀무역의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중국인은 다시금 해외로 나가 이익을 만들만한 지역에 점포를 개설하였다...PAGE:8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청나라 국민의 이민 에너지명나라 말기에는 왜구의 소란으로 중국 동남연해의 사회가 혼란에 휩싸여 현지의 주민은 삼삼오오 동남아로 피신했다.만주족滿洲族인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자 수만의 명나라 충성파가 만주족의 지배를 거부하고 해외이주를 선택했다.세계각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서방 열강이 드디어 중국과 얼굴을 맞대었다. 이들은 동남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중국 이민자를 우대하였고 동시에 새로운 중국인을 적극 유치하였다.지속적 이민을 위한 조건 즉 중국 안의 방출 에너지와 중국 밖의 흡수 에너지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해외거주 중국인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1571년 스페인이 마닐라를 점령했을 당시 중국인 수는 150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초 동남아에 거주하는 중국인수는 10만 명으로 추산된다...PAGE:9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100만 명의 이민과 청나라의 이민 금지 조치청나라의 역대 황제는 동남아 곳곳에 잔존하는 명나라 추종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아래와 같은 해외무역을 금지조치를 발표하였다.해외무역 금지조치 이후에도 서방식민지가 보장하는 보다 나은 삶은 동남연해의 중국인들을 끊임없이 유혹하였다.중국인 이주자 수는 급증하였고 1840년 이전 이들의 수는 이미 10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중국인 이주자의 수가 늘어나가 자연스럽게 이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 공동체는 현지의 중국인 이주자의 정서에 큰 변화를 발생시켰다...PAGE:10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현지 정부는 그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주었고 현지 사회에 대해 ‘중국인임을 스스로 포기한 간사한 백성’이라 하여 보호는커녕 멸시와 탄압을 서슴치 않았다.수적으로 몸을 불린 해외거주 중국인 사회는 다양한 공동체를 운영하였고, 이 공동체는 이들에게 인신 및 재산의 보호와 함께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해 주었다. 중국인 이주자는 그들만의 공동체 내에서 그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정서적 문화적 안락감을 누릴 수 있었다.100만 명의 이민과 청나라의 이민 금지 조치..PAGE:11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청나라 3대 황제순치제청나라의 이민 금지 조치순치제는 ``마음대로 바다에 나가 역적에게 화물을 넘겨주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조치를 내렸다. 더 나아가 천계령(遷界令)을 내려 외국과의 왕래를 철저하게 금지시켰는데이 천계령이란산동반도 이남에서 광동연해에 걸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해변 30~50리 안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길시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했으며 고발인에게 죄인의 가산을 몰수하여 주었다. 이 해금정책(海禁政策)은 강희제에 이르러 폐지되었지만 후에 서양오랑캐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항청운동이 계속일어나자 지나족들이 서양오랑캐들과 의기투합할 것을 염려한 건륭제에 의하여 다시 시행되었다.순치제는 지나족들을 식민통치하는데 성공했지만 젊은 나이에 천연두를 앓아 24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순치제의 뒤를 이어 강희제가 즉위했다.“모든 관원, 병사, 민간인이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무역을 하거나 정착하여 집을 짓고 경작을 하는 자는모두 체포하여 죄를 엄히 다스린다.”..PAGE:12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500만 이민 에너지통계에 따르면 1741년 중국의 인구는 1억 4300만 명이었는데 불과 110년이 지난 1851년 인구는 4억 32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이렇게 증가된 중국의 인구는 제한된 자연조건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또한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 이래 중국 전역은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청나라 정부는 영국, 연합군의 침략에 대해서도 무참히 무릎을 꿇었다.1851년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란1853년염군捻軍의 반란1855년회민回民의 반란1873년1851년, 4억 3200만 명의 인구→ 1873년, 3억 5000만 명으로 감소수많은 중국인은 파산하였다. 이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해외로의 도피이거나 청나라 지배층에 대한 반란이었다...PAGE:13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화교 자본의 본질과 특성해외에 거주하는 중국계 민족을 화교華僑, 화인華人 등으로 부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화교는 중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고, 화인은 거주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구분된다.이러한 화교 인구는 세계적으로 약 60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홍콩, 대만, 마카오 등 3대 지역에 약 2800만 명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약 2000만 명이 거주하며 나머지는 미국, 유럽 등지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화교화인..PAGE:14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화교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 된 것은 막대한 경제력 때문이다.화교 상권을 미국과 유럽연합에 이은 세계 3위의 경제세력이라고 평가할 정도다.중국, 홍콩, 대만 등 3개국만을 포함하는 중화경제권의 시장성은 구매력 평가기준의 GDP 규모면에서 이미 1990년에 미국의 절반수준에 육박해 있으며 2002년에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하였다.태국에서는 전체인구에서 화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단3%에 불과하지만 부의 80%가 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다.태국의 경우는 최상위 10대 재벌 중 9개 재벌이, 인도네시아에서는 상위 10개 재벌 모두를 화교계 자본이 차지하고 있다.화교 자본의 본질과 특성..PAGE:15근대동아시아의 전개서론화교의 역사동아시아 중화경제권 형성과 화교자본결론화교 자본의 본질과 특성화교들이 오늘날과 같은 자본을 형성하게 된 배경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② 유교의 영향③ 소수민족이라는 데서 오는 생존자업 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