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 랑1. 이름본명은 윤식(允植)이다. 본관은 김해,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2. 출생과 가족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읍 남성리에서 출생했고 다복하고 여유있는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라났다. 영랑의 출생 당시 남성리 일대는 '탑골'로 불려졌다고 한다. 농업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농촌으로 이 시인이 나서 자란 집은 대나무 숲이 둘러싸여 있고, 멀리 남쪽으로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며, 가까이는 읍내를 굽어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다복한 환경에서 티없이 자라난 영랑, 그는 한 생애를 거의 고향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종호이며, 어머니는 김경무이다. 5남매중 장남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반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3. 학력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여 1919년 3·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인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세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23년 여름방학으로 귀국해 있던 영랑은 일본 관동대지진의 재해로 인해 도일하지 못했다. 학업을 중단한 채 고향에 머무른 그는 서울을 자주 왕래하면서 신흥 사회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문학운동에 전력하였다.4. 문단 경력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5. 교우관계영랑이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을 당시 박종화, 홍사용, 안석주, 정지용, 이선근, 이태준과 두텁게 지냈다. 뒤이어 1920년 동경 청산학원에 입학하면서 평생의 지우였던 용아 박용철과는 동창생이 되었다. 후에 영랑이 재혼하여 고향에 은거하면서 박용철과 시언을 주고 받게 되고 이 교환으로 인해 그들의 우정은 더욱 심화되었다.박용아, 이현구와는 강진파 시인을 형성하여 인간의 마음에 고요히 스미는 시를 선보였고, 역시 박용아, 정지용과 더불어 《시문학(詩文學)》을 창간하여 목적주의 문학과는 거리를 둔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하는 시를 썼다.6. 결혼과 이성관계1916년 13세 나이의 결혼 한 영랑은 후에 부인과 사별하게 되고, 18세 때 이화여전을 나와 그의 집에서 하숙하던 강진보통학교 여교사인 미모의 마재경과 열애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랑은 영랑이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오래 가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그는 22세 되던 해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정지용 등 문우들과 태화관 등에서 친교를 맺는 동안 최승일의 누이 동생인 숙명여학교 2학년 최승희(당시 13세, 나중에 조선 무용계의 여왕인 된 그녀는 좌파 문인인 안막과 결혼 후 월북)와 약 1년간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다. 영랑의 여동생 김순례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그는 1년 중 6개월은 서울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희와의 사랑도 양가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실을 맺지 못한다.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는 이유로, 최승희의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각각 반대했다고 한다. 이때 영랑은 실연의 충격을 못 이긴 채 생가의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발각되어 목숨을 건진다. 그리하여 영랑은 그 다음 해 숙부의 중매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와 교편 생활을 하던 김귀연과 재혼한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주례로 개성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들은 이후 슬하에 7남 3녀(2남인 김현복은 생후 1년 뒤 사망)를 두게 되니 김귀연은 호적상 본부인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강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로도 영랑은 서울의 명월관과 태화관에서 만난 여자들을 비롯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녀들의 경우도 이복이 섞인 관계로 서로 화해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그의 자녀 중 국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단국대 김현태 교수(5남)가 유일하다.7. 사망까지1) 사망영랑은 1950년 6.25 전란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숨어 지내다가 갑자기 날아든 비행기 폭격에 중상을 입고 9월 29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 시비, 묘묘는 서울 망우리 묘재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진에도 세워졌다.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외에 1949년 자선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 시선’이 있고 1918년 8월 문학세계사에서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8. 작품세계1) 초기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 회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비애의식(悲哀意識)은 영탄이나 감상(感傷)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정감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2) 1940년 전후, , ,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난다. 이러한 죽음의식은 초기 시에서와 같이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민족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①검은벽에 기대선채로해가 수무번 박귀었는듸내 기린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그가슴을 퉁 흔들고간 노인의 손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었으려나땅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이저졌을 나박같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사람인양 꾸민 잣나비떼들 쏘다다니여내 기린은 맘둘곳 몸둘곳 없어지다문 아조 굳이 닫고 벽게기대선채해가 또한번 박귀너늘이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거문고」②내 가슴에 독을 찬지 오래로다아직 아무도 해안 일 없는 새로 뽑은 독멋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나는 그 독이 벗도 선뜻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않어 너 나 마주 가버리면이억천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잣고 흘러가고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것임을[허무한듸!]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한고 보낸어느 하루가 있었던가〔허무한듸!]허나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내 산체 심증의 밥이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네 맡긴 신세임을나는 독을 품고 선선히 가리다.마금날 내 깨끗한 마음 건지기 위하야.-「독을 차고」위 두 편의 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①에서 이리떼와 잣나비떼 ②에서 '이리' '승낭이'의 등장이다. 바로 이러한 동물의 알레고리는 급박하고 숨막히는 당시의 시대상을 체감케 한다. 실제로 이 시가 씌어진 해인 1939년은 친일 문학단체인 '조선문예협회'가 결성되었고 일본에 의해 국민징용령이 공포됨과 동시 매월1일 흥아봉공일로 제정하였으며 마침내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창씩개명이 공포(11월 10일)된 바 있다.①의 시에서 핵심어는 물론 기린이다. 기린은 또한 시제인 '거문고'의 비유이며 나아가 '거문고'는 동시에 시인 자신이거나 우리 민족 전체를 상징하고 있다. 즉 '기린=거문고=시인자신 ? 민족전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린은 무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본시에 울음을 울지 못하고 '검은벽에 기대선채'이다. 따라서 '검은벽'은 기린이 마음대로 실컷 울수 있는 본연의 자유로움을 막는 시대적 상황이다. 그 '검은벽'을 사이에 두고 바깥은 거친 들판으로서 '이리떼만 몰려 다니고' '잔나비떼들 쏘다니'는 그야말로 조선민족에게는 정신적?육체적 황야인 셈이다.4연을 살펴보자면 영랑의 기막힌 내적 통곡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 치하라는 그 '벽'에 기댄 기린은 또 한 해가 바뀌건만(영랑이 이 시를 쓰기는 1938년 12월이며 이듬해 1월호에 발표된 것이다) '이 밤도' , '맘놓고 울 수 없는 상황을 더욱 가슴아파하며 전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한 시인으로서의 영랑의 처절한 고발과 저항의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문 아조 굳이닫고'를 '자폐적 상황'으로 보기보다는 그것은 오히려 시인의 투철한 시대인식 속에서 얻어지는 자기성찰이며 나아가 더욱더 강인한 저항정신의 한 과정에 자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양한 인식과 창작방법론의 다기화채만식 「탁류」Ⅰ. 서론이번 시간에 알아볼 작품은 채만식의 「탁류」이다. 「탁류」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요한 점은 그의 문학 가치만큼이나 작품에 대해 다양한 연구 평가가 이뤄져 왔다는 점이다.지금부터 시대상황과 연관시켜 채만식의 문학의 기존 연구성과와 의의, 「탁류」의 다양한 연구방법등을 살피고 비교?분석하여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1930년대 시대상황191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한민족에 대한 폭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혹화되어 갔고, 이에 따라 우리의 대항 역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우리 나라에 식민지 파쇼통치를 실시했는데, 이런 일본의 압력은 당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30년대에 더욱 더 가혹해진 일제의 조선탄압정책은 그 이전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발생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공황위기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물화의 공급이 수요를 훨씬 웃돌게 되자 재고가 늘어나고, 물품생산의 중단이 발생하면서 실업자가 증가하는 등 경제공황의 위기는 일본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이다. 이에 일본은 상품 판매 시장의 확대와 정복야욕을 위한 만주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자신들의 계획을 위해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선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30년대 이전보다 조선에서의 착취를 보다 강제적으로 집행하고, 인적·물적 자원을 가혹하게 동원하는 한편, 조선 민중의 민족해방운동을 가차없이 탄압하였다. 1930년대 일제의 조선에 대한 경제 정책은 '농공병진' , '북선개척' , '지하자원개발' , '농촌진흥' , '자작농창정'등의 슬로건 하에 추진되었다. 이것은 모두 만주침략을 위한 수단으로써 우리 민족을 이용하고자 한 일본의 간교한 술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일본은 만주사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연결지점이 될 수 있는 조건, 특히 북한에 도로망야만 했다. 이런 일제의 반봉건적·식민지적 착취와 억압은 더욱 거센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일제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비단 농민·노동자들에게만 생성되었던 것이 아니라 친일 반동지주와 예속자본가 같은, 일제와 결탁한 일부 세력을 제외한 조선 민족 모두의 일반적인 감정이었다.이처럼 1930년대는 일본의 강압적인 탄압에 의해 우리 민족이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받았던 시대이며, 이와 아울러 민족의 반일감정 또한 거세게 일어났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생존권뿐만 아니라 사상의 문제에까지 개입하여 강압적인 탄압정책을 폈으며, 이러한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은 우리의 문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2. 1930년대의 문학계1930년대의 식민지 억압 통치는 우리 민족의 생존권 뿐 아니라 자유로운 문학창작의 권리마저도 박탈했다. 문학에 대한 일제의 억압이 강해지면서 우리 문학계의 경향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게 되었는데, 반일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부류와 시대를 외면하는 문학을 한 부류, 그리고 반일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부류의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193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이 식민지였던만큼 사회주의적 의식과 결합하여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 내용을 담은 소설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작품들을 주류로 활동한 작가들은 1925년 8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E)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계급문학운동을 시작했다. 계급문학운동은 문학의 성쇠와 그 운명이 사회적 현실과 직결된다고 하는 소박한 에서 출발하여 사회주의 이념과 결합하면서 계급적 투쟁의식을 강조하는 행동 실천 문학으로 변화되었다. 이들은 식민지적 현실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자본주의적 지배라는 계급적 논리로 파악한 작가들로 한설야, 박영희, 김기진, 송영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카프계의 계급문학운동은 1930년대에 한층 더 심해진 사상적 탄압으로 계속적인 성과를 얻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은 31년과 34년 제 1·2차로 이루어진 카프의 집단적인 검거상태로 인해 전면적하고 일제의 공격 가능성을 일축하는 문학만을 다룬 부류가 있다. 그런데 이 당시 또 하나의 주요 문학 부류로써 빼놓을 수 없는 소설군으로, 앞에서 말한 두 소설군의 성격을 절충한 중간적 성향의 문학이 있다. 이런 중간적 위치에 있는 작가들은 일제 감시를 피하고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문학적 고민을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글이 세상에 빛을 보지도 못하고 일제의 검열에 의해 사라질 것을 염려하는 까닭도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문학을 통해 무지한 조선민족을 깨어나게 하고 식민지 해방의 절실함을 공감토록 해야겠다는 작가(지식인)로써의 소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문학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글 속에서 자신과 유사한 인물의 투영으로 나타나고 특히, 엘리트 지식인 계층이 생존권과의 투쟁에서 실패하고 몰락해가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생존권과 작가(지식인)의 소임이라는 두 갈등 요인 사이에서 소설은 지조와 변절이라는 문제를 다루게 되는데,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 채만식의 장편소설 「태평천하」, 단편「치숙」, 김남천의 단편 「생일 전날」, 「경영」과 「맥」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결국, 이 당시 작가들에게 있어 이상적인 문학은, 식민지 현실을 고발함과 동시에 일제의 검열을 통과할 수 있는 문학인데 이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하지 못한 작가들을 중간적 위치의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들 작가들은 완전히 해방을 외칠 수도, 시대를 외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각 작가의 성격 등에 의해 다르게 나타났는데,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고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갈등 속에서 당시의 상황을 너무도 비관론적으로 바라본 작품들도 있었고, 생존과 지조의 두 역할을 모두 소화하기 위해 일제의 눈을 속인 경우도 있었다. 일제의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우회적 방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기법으로는 풍자를 들 수 있다. 이런 우회적인 방법을 잘 사용한 작가로는 채만식을 들 수 있는데,채만식이 올바른 사회인식 능력을 가지고 소설을 썼기 때문에 그의 작품 속에 그 당시 사회 이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평가한 논자들에 대해 살펴보겠다.이주형은 석사논문(서울대 석사논문, 1973)에서 1930년대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광범위하게 다룬 사회학적 상상력을 지닌 작가로 규정했다.김윤식은 {한국문학사}(1977)에서 식민지 치하의 한국문인들을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작가와 동반자 작가3), 두 개의 비순응적 인식태도를 지닌 작가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로서 채만식의 문학을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이재선은 {한국현대소설사}(1979)에서 무기력한 지식인을 등장시켜 전락한 사회환경과 정신적 억압하에 있는 지식인의 불행한 조건을 거듭 확인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조만현은 {한국현대소설연구}(1987)에서 1930년대에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리잡은 지식인 주인공의 삶과 식민지 치하에서의 무기력함, 자신이 취해야 할 방향에 대한 고뇌의 문제를 채만식이 소설 속에서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했다.다음으로는 채만식 소설에 대해 좀더 깊게 들어가서 그의 소설 속에 사용된 문체적 특징이나 기법에 대해 연구한 논자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채만식의 문체나 기법에 대해 본격적인 가치평가를 시작한 사람은 정한숙에 의해서였다.구인환은 {한국근대소설연구}(1977)에서 근대소설의 이상적인 문체인 감각적이고 간결한 문체에 반기를 들고 서술적 문체를 수용한 작가라고 했다.최창록은 {한국소설의 문체론적 연구}(1978)에서 부단한 자각의식에 의해 시대 문체를 반역하고 개인 문체를 승화 발전시킨 작가라고 했다.신동욱은 {동양학}(1982)에서 지식인의 시대적 적응이 거의 불가능한 점을 자기풍자의 논리로 문제삼은 작가라고 했다.이처럼 대부분의 논자들이 채만식의 시대적 현실인식 면에서나 그의 기법과 문체적인 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항상 긍정적인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하림의 경우, 그는 [채만식과 1930년대](《현대문학》, 1973)에서 부는 군산을 축으로 여러 인무들의 여러 사건들이 복합적 구성으로 비교적 탄탄한 구조를 이루며 다루어지는 반면에 후반부는 서울이라는 단일한 공간에서 초봉이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단일한 사건과 인물의 단순성에서 통속적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여러 번의 격정적인 플롯의 등장이 소설적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있고, 더욱이 초봉이에 의한 형보의 살인 행위와 같이 사건을 해결하는 행위가 너무 저속하고 잔인하다는 데서 통속적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초반부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다루어지고 있어서 리얼리즘 소설로서의 기본적인 구도를 갖춘 반면에 후반부는 초봉이의 연애담으로만 일관함으로써 단순하고 저급한 연애 소설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임화의 논리에 김남천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며 「탁류」를 세태소설이 아닌 ‘순문학’족에 더 가까운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채만식의 「탁류」는 그것이 사태적일지언정 세태적은 아니다. 「탁류」는 현실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 세태로서 표면을 가리운 태도가 아니고 그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태도까지 나아갔으며 자본주의의 현대적 기구의 일족 악기관인 ‘시세’에 대한 분석적인 설명을 했으며 거기서 작중의 주인공들과의 이해관을 분명히 하고 나가서는 노주인공 정주사의 과거를 추구하여 중산계급의 현대적 몰락 과정을 설명했으며 일반 하층 빈민층의 생활에 대한 동정의 이를 남주인공 승재를 통해서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전체로 봐서 정면으로 현실에 대한 반영이 아닌 대신에 거기에 대하여 풍자를 가하고 증오까지를 던진 데서 사태적인 한계까지를 넘어서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작품에 대하여 세태소설의 의미는 아무래도 합당하지 않는 듯 하다.류진아는 임화의 평에 대해 「탁류」의 서사구조의 의미를 인물을 통해 작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좁게 사용해서 생긴 결과라고 비판하면서 「탁류」는 서사가 부족한 작품이라기 보다 다른 어느 장편보다 일관된 서사를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서사에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것이다.
Ⅰ. 서론얼마전, 내로라하는 유명한 영화배우들이 광화문 앞에서 정부의 스크린쿼터제 축소 안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1인 시위를 벌였다. 이전부터 공공연하게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던 스크린 쿼터는 배우들의 이러한 직접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더욱 더 사회적 이슈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스크린 쿼터제 축소를 놓고 어떠한 쟁점이 맞서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고,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Ⅱ. 본론스크린 쿼터(Screen Quota)란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영할 때 자국의 영화를 일정 기간 이상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규제하는 조치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모든 극장은 연간 일정한 일수 이상의 한국 영화를 반드시 상영해야만 하며 이 제도의 정확한 명칭은 '한국영화 의무상영 제도'이며 '스크린쿼터제'는 관행적으로 불리는 용어다.스크린쿼터제는 국내 영화관에서 외국영화의 자유로운 상영을 허용하지 않는 반면 국산영화는 일정 기준 이상의 상영일수가 보장되도록 차별적으로 대우한다는 점에서 보호주의 정책의 일종이다. 즉, 국내 영화시장에서 수입외화와의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외국영화에 의한 무차별 시장잠식을 견제하고 자국의 영화산업을 보호하려는 정책인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약 10여개 국가에서 스크린쿼터제가 시행되고 있다.우리나라에 스크린쿼터제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66년 영화법 제2차 개정이 이루어지면서였다. 그 이후 스크린쿼터제의 구체적인 내용은 수차례에 걸친 영화법 개정을 거치면서 여러번 변화되어 왔다. 영화진흥법의 규정에 의하면 1년 중 2/5일 이상, 즉 146일 이사이 한국영화를 상영하도록 의무화하였다. 하지만 문화관광부장관과 지방자치단체장의 재량으로 최대 40일까지 감경이 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는 106일 이상인 셈이었다. 그런데 지난 3월 7일 정부는 미국과의 FTA 협상을 위해 영화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쿼터일수를 기존규정의 절반수준인 73일로 축소하고 감경조항은 모두 삭제하도록 하에서 스크린쿼터제의 축소ㆍ폐지 문제가 처음으로 중요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한ㆍ미 BIT 협상)이 시작된 1998년부터였다. 처음에는 영화인들, 정확히 표현하면 한국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스크린 쿼터 축소 저지운동에 나섰으나, 곧 많은 시민사회단체들과 정치인들이 같이 연합, 동참함으로써 무시못할 정치적 저항세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BIT협상이 수년동안 지지부진하면서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도 간간히 제시되었다. 그리고 최근 미국과의 FTA 협상논의가 시작되면서 다시금 열띤 찬반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지금부터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쟁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첫 번째로, 스크린쿼터 폐지 또는 축소를 주장하는 입장이다.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가장 두드러진 근거는 바로 한?미 투자협정(BIT)을 위해서 스크린쿼터가 양보해야한다는 것이다. 외국인투자 유치, 대외 신뢰도 제고 등의 측면에서 미국과의 투자협정 체결이 필요한 만큼 스크린 쿼터를 축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며 BIT가 외국인투자를 유치를 늘려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미국과의 투자협정 협상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지난해부터 외국인투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는 지난 99년에는 155억달러를 웃돌았지만 계속 줄어 올 상반기에는 26억6,000만달러에 그쳤던 것이다. 그래서 투자협정이 체결되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예측치 못한 정책 및 규제 변화에 따른 위험비용이 줄어들어 투자수익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투자를 유치할 것으로 예상되는 투자협정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즉, 투자협정 체결이 곧 우리의 개혁 및 개방정책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심어줄 것이라는 분석을 보이고 있다.또한, 국가신인도의 문제를 삼으면서 계속해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주장해 외국에 배타적인 나라로 비치고 있어서, 결국은 한국경제의 고립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마지막으로 한국 영화산업의 강화된 경쟁력 최근 2~3년간 시장점유율 50% 내외 수준을 유지할 정도로 경쟁력을 갖춘 한국 영화산업이, 나라 경제를 위해 희생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렇게 강화된 경쟁력을 바탕으로 영화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경쟁을 통해 더욱 더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논리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스크린쿼터 폐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문화가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상품이라는 관점을 취한다는 것이다. 특히 영화의 경우에는 그 특성상 이러한 문화상품화에 더욱 부합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스크린쿼터와 한국영화에 대한 이들 논의의 관점은 영화를 경제적 영역 안의 문화산업으로 보고, 미국영화산업과 한국영화산업의 대립구도와 전체 미국산업과 한국산업의 틀을 통해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를 위해서 문화산업으로서의 한국 영화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고 포기할 수 있느냐로 인식하는 것은 이를 경제적 논리와 그 전략에 따라 포기할 수도 있는 하나의 ‘산업’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두 번째로, 스크린쿼터 유지를 주장하는 입장이다.이들은 스크린쿼터 폐지를 주장했던 입장과는 반대로 외국인투자 유치 효과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 BIT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스크린쿼터제에 우선한다면, 과연 실익이 있는지를 먼저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BIT의 기대 효과는 검증된 바가 없으며 근거없는 막대한 외화 투자 유치를 위해 연간 18조원에 이르고 향후 무한한 문화경제적 가치를 지닌 영상문화시장을 포기하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하고 있다. 또한, 미국과 쌍무협정을 맺은 37개국 가운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은 하나도 없고 모두 경제규모나 대외신인도가 많이 떨어지는 동구권, 아프리카, 아시아 빈국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스크린쿼터제의 정착으로 한국 영화의 배급력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크린쿼터 연대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 917개 주요 개봉관을 전국 주요 개봉관 의무 일수와 상영 일수를 비교해본 결과, 2003년 상반기는 극장의 평균 한국 영화 상영 일수인 68.1일(성수기 감경일수 포함)보다 8.9일 초과한 평균 77일을 상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03년 상반기 한국 영화 평균 상영 일수(일수점유율)는 77.1일(45.7%)로 나타났으며, 올해 시장 점유율은 47.2%를 기록한 것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서 발표했다. 이것은 극장에 걸린 시간 동안 한국 영화가 극장에 실속있는 수익을 가져다 주었음을 암시한다. 게다가 이러한 현상은 몇 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어서 더 이상 스크린쿼터제가 극장주에게 한국 영화 상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한국영화의 선전은 스크린쿼터제가 한국영화 성장에 있어서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스크린쿼터가 한국 영화 시장에서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스크린쿼터가 한국 영화의 상영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안정적인 배급망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한국 영화가 제작면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높은 수준의 내적 완성도를 가진다 할지라도 배급망이 없이는 이를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 작품의 질을 떠나 우선적으로 ‘배급망’에 의해 영화의 상영이 결정되는 영화 시장은 일반 상품 경제와는 다른 영화 산업의 특수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크린쿼터제가 없을 경우 단 한 번의 점유율 축소가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나락으로 우리 영화를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미래 핵심산업으로서의 영화산업의 중요성을 들고 있다.현재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우리 영상문화산업의 총 규모는 18조 5천억이다. 2000년 이후 국내 문화산업 전체 성장률은 21.1%, 영화는 14.6%로, 같은 기간 우리나라 평균 경제성장률 6.1%의 3.5배(영화는 2.4배)에 달한다. 향후 10년 뒤에는 GDP의 10%을 점하게 될 성장산업이라는 예측도 설득력있게 나오고 있다. 영화, 방송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다양한 윈도우를 거쳐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영화가 비디오, 음반과 방송망을 통해 확장되는 복합영상산업의 핵심 고리이자 캐릭터 등 복합 이미지 산업의 중추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며, 미국은 이미 불붙은 21세기 고부가가치산업전쟁에서 독점적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려는 전략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13일 미국 의회에서 초국적 미디어기업들은 ‘자유무역을 위한 문화산업 연대(EIC)’를 결성하여 전세계 문화시장 장악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실까지도 있다. 그들이 굳이 한미협정을 추진하면서 스크린쿼터제를 걸고 넘어지는지에 대한 속뜻에서도 영화산업의 중요성은 이미 감지되고 있는 것이며 경제관료들은 스크린쿼터를 포기함으로써 단지 영화를 내주자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 파급이 불가피한 미래의 황금밭인 영상문화산업 전체를 흥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이렇듯, 스크린쿼터제의 축소 문제를 놓고 문화관광부와 영화인들, 그리고 재정경제부를 비롯한 경제부처나 재계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필자 역시 후자쪽에 찬성하는 입장이다.첫 번째로, 우리나라의 흥행 영화 장르를 비롯하여 빈번하게 나오고 있는 장르를 살펴보자면, 대부분 조폭코디미, 성(性)관련 시리즈로 이어지는 조금은 저급하다고 보여지는 삼류 영화에 불과하며 이는 영화의 다양성의 부재로 이어진다. 물론 최근 들어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의 수준도 높아져 그에 따른 영화들(가령 ‘취화선’이나 예술 영화로 주목받고 있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도 속속들이 개봉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이는, 올해 영화 점유율이 47.2%에 달하는 등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지만, 만약에 스크린 쿼터제의 축소 또는 폐지가 될 경우에는 앞으로는 영화 장르의 다양성을 기대해 보기는커녕, 흥행만을 목적으로 한 저급한 상업영화의 범람이 예상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영화 장르를 시도하려는 제작자들도 상당수 줄어들 것이며 이는 영화분야에 있어서 다.
다빈치 코드의 비밀세계 출판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린 원작의 후광에다 순제작비 1억3000만달러(1216억원), 최초의 루브르박물관 내부 촬영 등 다양한 화제성으로 눈길을 끈 영화 ‘다빈치 코드’가 드디어 18일 그 화려한 베일을 벗었다. 나 역시도 부푼 기대를 안고 사상 초유의 예매율을 기록했다던 대열에 합류하여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은 후에 가서 언급하기로 하고 먼저 줄거리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특별강연을 위해 파리에 체류 중이던 하버드대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은 깊은 밤 급박한 호출을 받는다. 루브르 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 자크 소니에르가 박물관 내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시체 주변에 가득한 이해할 수 없는 암호들... 그중 'P.S.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는 암호 때문에 살인누명까지 뒤집어쓴 랭던은 자크의 손녀이자 기호학자인 소피 느뷔(오드리 토투)와 함께 자크가 남긴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랭던과 소피는 시시각각 좁혀오는 경찰 조직과 파슈 국장(장 르노)의 숨 가쁜 포위망을 피하면서, '모나리자', '암굴의 성모' 등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 속에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을 추적한다. 하지만 코드 속에 감춰진 실마리를 쫓아 진실에 접근할수록 비밀단체 시온 수도회가 지켜온 비밀을 지워버리려는 '오푸스 데이'의 추격은 더욱 격렬해지고, 마침내 두 사람은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꿀 거대한 비밀과 마주하게 되는데...-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다빈치 코드’ 원작 소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나는 영화를 보는 2시간 30여분 내내 하품을 연달아 하거나, 휴대폰 시계를 계속 들여다 보는 등 지루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마디로 막상 뚜껑이 열리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라는 속담을 되뇌게 한 것이다.영화는 저자 댄 브라운의 원작 소설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 예수의 부활 부정, 후손의 존재 등 기본 전제와 성배를 찾는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등장인물들의 관계 등 대체적인 스토리 전개는 원작에 충실한 편이었다. 소설을 영화화하다보니 단순화하거나 생략한 부분도 적지 않지만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소설에 상세하게 거론됐던 가톨릭계의 어두운 면에 대한 주장은 영화의 줄거리를 깨지 않는 선에서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하고 넘어갔으며, 극중 암살자인 사일러스의 비중이 원작에 비해 다소 축소된 면이 있었다.최초로 루브르박물관에서 찍었다던 화제답게 일반인에게 생소한 ‘크립텍스’(문서보관용기)의 구조나 웅장한 루브르박물관 내부를 보는 시각적 즐거움을 줬다는 점에선 나 뿐 아니라 일반 관객으로부터 비교적 호평을 끌어낼 수 있게 하는 요소였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클로즈업 장면에서는 모든 관객의 시선을 한 눈에 끌기에 충분했다.그러나, 다빈치 코드와 시온수도회의 비밀 풀이 과정이 원작 소설만큼 긴박감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다시 말해서, 뭔가 미적지근한 느낌을 들게 한 것이다.그것은 영화 자체가 전반적으로 원작의 줄거리를 화면에 옮기기에 급급하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런 기승전결의 흐름 속에 드러날 수 있는 반전과 클라이맥스의 진수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극 중, ‘리 티빙’이 소피에게 성배의 진실이라며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설명은 친절하다 못해 과도하기까지 해서 긴장감은 커녕 느슨함만 더하게 해서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대두된 “갈채는 없고 비웃음만 나오는 영화”라는 식의 혹평에 왠지 모르게 공감이 갔던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에너그램과 피보나치 수열, 각종 종교적 기호와 상징에 관한 원작의 인문학적 설명이 거의 삭제되었고 실제로 영화상에서 주인공들의 도망치는 모습에만 상당 시간을 할애하는 덕분에 원작의 뛰어난 스릴러는 사라지고 밋밋함만 남게 된 것이다.결과적으로 원작을 읽은 나로서는 2시간 30여분의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원작을 충실히 구현하지도 -삭제, 축소의 기능으로 인해- 그렇다고 새로운 시도도 하지 못한 한계 때문이다. 상업적인 흥행에는 성공할지는 몰라도 그 이상의 호의적인 반응을 일궈내기에는 한마디로 역부족인 영화라고 느껴졌다.원작 소설과 영화의 비교는 이쯤에서 마치기로 하고, 이제 ‘다빈치 코드’가 말하고 싶었던, 나타내고 싶었던 메시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계속되는 논쟁, 허구인가 사실인가?대한민국이란 한 나라를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소위 인간들을 전쟁의 광기로 내몬 치명적인 동기는 바로 종교였다. 혼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독교가 있었고, 그 저변엔 JESUS를 신으로 볼 것인지 인간으로 볼 것 인지란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대립되는 지점, 그 지점에서 인간들은 피를 흘렸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부시정권의 ‘이슬람 테러세력들 과의 성전‘이 바로 그 예일 것이다.영화 상영을 법적 공방으로 까지 몰고 간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주요 쟁점은 이야기가 기독교적 근간과 대립을 세우는 부분이다.개인적으로도 나 역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다빈치코드’ 이야기의 주요 기둥이 되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설은 가히 충격을 넘어 경악 할 만 했다. 나를 비롯한 기독교인에게 있어선 ‘성경’이란 불가항력적인 신성한 의미를 지니며 그 자체가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 대해서 분노의 행동을 표출하며 노여워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또 다른 충격을 몰고 오는 것일 뿐이다. 영화란 어차피 ‘픽션’(fiction))이며 말 그대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허구’에 불과하다. 이 영화를 보며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 과연 그럴 것이다. 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있다 해도 그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진 못한다.
< 유토피아 >‘유토피아’,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뜻은 말 그대로 이상향(理想鄕)이었다. 과연 이상향이라는 단어를 당시 어떤 사회적 배경을 중점으로 작가인 토머스 모어가 강조하고자 했는지, 그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책을 덮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모어는 유토피아 안의 공유제도를 주장하며 말 그대로 귀죽 중심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계급과 빈부의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이상적인 국가를 설정한다. 모든 것이 공동의 소유로 되어있는 유토피아에서 금전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적 해방을 실현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초기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요컨대, 사유 재산의 부정, 계획적인 생산과 소비, 인구 배분의 합리화, 사회적 노동의 계획화, 노동 조건의 개선, 소비의 사회화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 실현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모어가 강조하는 이상적인 세계는 어디까지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윤리적 관념이 제대로 박혀있는 즉, 이성에 입각한 인간상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쾌락이 타락한 쾌락이 아닌 인간의 이성성이 유지된 본능적인 개념이라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성악설을 지지하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었다. 인간이 여타 동물보다 고등동물인 까닭은 이성과 본능의 중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크겠지만 인간은 대체적으로 본능에 더 충실하며 끌리게 돼있으며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 가득한 것이 보통이다. 헌데, 유토피아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한 치의 욕심도 없는 인간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 금화를 돌처럼 여긴다는 대목에서 느낄 수 있었다 - 뿐만 아니라 그토록 강조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유토피아의 생활방식은 ‘노예제도’가 있음으로 해서 사실은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느껴졌다. 물론 노예는 범죄자나 부랑자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된 제도이긴 하지만 노예제도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간의 계급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논리가 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고 있는 의의는 분명하다. 유토피아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은 사실일 것이나 바로 그런 실제적인 불가능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가능성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론적인 실현 가능성이 바로 유토피아가 갖는 진실성이며 현실 비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즉, 적어도 현실을 탈출하기 위한 현실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적극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의 관습적인 요구에 맹목적으로 타협해 버린다면 우리는 현실 속에 영영 묶여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현실 비판이야말로 유토피아의 진실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유토피아’의 중요성은 그 이성에 있기 보다는 비판을 제기한 그 자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