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의 역사-제국주의, 군국주의 시대를 중심으로1. 우익2. 일본의 우익3. 일본 우익의 역사- 제국주의 시대(1895-1920년)- 군국주의 시대(1920-1945년)4. 참고문헌1. 우익)우익 혹은 우파는 정치적 성향 분포에서 좌익 또는 좌파에 반대되는 쪽으로, 일반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온건한 개혁을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말한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대칭되는 의미에서 보수주의, 반공주의, 민족주의 등이 우파로 간주된다.프랑스 혁명 이후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군주 중심의 국가관에서 민족, 시민 중심의 국가관이 확립되었으나,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으로 극단적으로 흐르게 되었다.2. 일본의 우익우익은 다른 정치성향과 마찬가지로, 지역에 따라, 국가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가치관이 풍토에 맞게 바뀐다. 이탈리아에선 파시즘이, 독일에서 나치즘이 나타난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의 우익은 특이한 색깔을 띈다.일본 우익의 사전적 의미는 한마디로 보수적 우파의 총칭을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우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민족파’, ‘애국자’, ‘국사(國士)’등으로 자칭하는 자들도 있다. 주로 민족주의, 배외주의, 국가지상주의의 입장에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단체로는 1997년 우익을 포함한 보수주의자 단체의 최대 조직으로서 결성된 ‘일본회의’가 있으며, 이 밖에도 ‘전일본애국자단체회의’, ‘전일본애국자단체연합·시국대책협의회’, ‘청년사상연구회’등이 있다.오늘날 일본 우익의 구체적인 활동은 일본국헌법의 폐지와 대일본제국 헌법 체제의 부활, 북방영토의 탈환, 반공주의와 일교조(일본교직원노동조합)반대, 반노동조합, 남녀공동참획(한국의 남녀평등기본법) 사회비판 등과 같은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비롯해 친미와 반미에 관한 논의, 북한의 납치문제 등의 외교문제, 그리고 대동아전쟁 긍정과 도쿄재판 부정, 야스쿠니신사 참배지지, 학교에서의 국기계양·국가제창의 의무화와 같이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민족주의와 배외주의를 강조하는 등의 다양한 방면에 걸쳐 관여하고 있다. 물론 모든 우익단체가 이러한 문제에 통일된 사상이나 행동을 보이는 건 아니며, 단체나 개인에 따라 현상에 대한 인식이나 당면 목표와 활동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이들이 거의 유일하게 공통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며, 천황이나 황실에 대한 비판에는 극도로 민감하여 때로는 협박과 테러까지도 불사한다. 또한 매년 정월 황거(천황이 살고 있는 궁)에서의 신년참하(신년 초 천황에게 수만 명의 일본인이 몰려가 하례를 하는 것)는 우익들에게 중요한 연례행사 가운데 하나이다.3. 일본 우익의 역사- 제국주의 시대(1895-1920년)현재 우리에게 ‘우익’이라 불리는 세력들이 일본에서 ‘우익’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던 것으로 고찰된다. 그들이 당시 ‘우익’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 하에서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성립된 사회주의 세력들은 1910년대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그 사회주의 운동 세력들이 1920년대의 초·중반 경에서부터는 ‘좌익’으로 불리게 되는데, 그 ‘좌익’ 세력들에 의해 행해진 사회주의 운동, 예컨대 노동 운동 등에 대해 대립적 입장을 취해 그들의 그러한 운동을 방해했던 세력들이 1920년대 말경서부터 출현하게 되었다. 당시 그러한 ‘좌익’ 세력들에 대항했던 세력들이 바로 ‘우익’으로 불렸던 것이다.‘우익’으로 불리기 이전 그들은 ‘국가주의’세력들로 불렸다. 사회주의 운동을 방해하는 국가주의 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은 일본이 청·일 전쟁, 삼국 간섭, 러·일 전쟁, 한·일 합방 등과 같은 대륙 침략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일으키는 과정에서였다.일본이 그러한 대륙 침략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일으키기 이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청·일 전쟁을 일으키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 세력들은 국권주의자들로 불렸다. 그런데, 국권주의자들이라 불리던 그들이 국가주의자들로 불리게 된 것은 일본이 청·일 전쟁 이후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들과 대항해 가는 과정에서 일으켰던 대륙 침략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체험함으로써였다. 그들은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들과 대항해 가면서 일본이라는 국가가 자신들의 최고의 생존수단이라고 하는 사상을 갖게 됐던 것이다.그 결과 그들은 일본이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들과의 투쟁을 통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일본 자신도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들의 경우처럼 식민지를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식민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등과 같은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을 통해 한국·중국 등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러시아와 대결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자 주전론主戰論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보다는 ‘사회’가 더 중요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들은 비전론非戰論의 입장을 취해 국가주의자들의 ‘주전론’에 대항했다.청·일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 사이 이상과 같이 국권주의, 국가주의자, 우익 등으로 이어진 길을 걸어갔던 인사들은 지역적으로는 주로 큐슈의 서북지역 출신들이고, 일본의 대륙 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던 대륙 낭인 출신들이었다. 그들이 대부분은 현양사, 흑룡회, 낭인회 등으로 이어지는 국가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고, 또 그들은 일본주의 운동, 동문동종 운동, 대외강경 운동, 대러 개전 운동, 한·일 합방 운동, 중국 혁명 운동, 만몽 독립 운동 등을 통해 국가주의 운동을 전개했다.당시 일본은 천황제라고 하는 정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천황의 국가이지 국민들의 국가가 아니라고 하는 황도주의 사상이 존재했었다. 국가주의자들은 일본이 천황의 나라이고 일본인들이 천황의 신민이라고 하는 바로 그러한 황도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국가’보다는 ‘사회’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주의자들의 그러한 사상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천황제에 대해 서로 대립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천황제를 지탱시켜 나가는 사상이라 할 수 있는 황도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천해 가는 국가주의자들은 황도주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주의 세력들, 즉 좌익 세력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일본은 대외적으로 청·일 전쟁에서, 러·일 전쟁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들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대립과정에서 탄생한 존재들이 국가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이 대륙 침략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로 전환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익과 좌익으로 전환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 간의 근본적 차이는 그들이 천황제를 지탱하는 황도주의 사상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있었다. 국가주의자들은 황도주의 사상을 철저히 받아들임으로써 우익으로 전환해 나갔고, 사회주의자들은 그 사상을 철저히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좌익으로 전화해 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군국주의 시대(1920-1945년)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우익 세력들은 대전 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확장이 차단되는 국제적 정세가 펼쳐지자 그전까지는 다른 차원에서 우익활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그때까지의 우익 활동은 정치, 경제, 외교 등을 추진해나가는 일본 정부의 자세에 대한 지적, 감시, 교정 등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대전 이후부터는 국가 국체의 존재 방식에까지 관여하게 된, 소위 ‘국가 혁신운동’의 형태로 전환해 나가게 됐다.
제목 : 중세유럽의 무역-부제목 : 11세기 이후 지중해지역을 중심으로1. 서론1) 배경2) 작성 목적2. 지중해 무역의 거래 상품3. 중세 이탈리아의 상업 문서들1) 서신2) 회계장부4. 결론5. 참고문헌1. 서론1) 배경고대부터 줄곧 지중해는 인간, 상품, 정보, 기술 등의 교류의 장이었다. 하지만 지중해를 통한 교류의 규모와 성격은 시대별로 달랐다. 11세기 이전 시기, 이슬람의 지중해 진출로 인해 대륙으로 후퇴한 서방 기독교 세계가 경제성장과 인구증가에 힘입어 지중해로 본격적인 진출을 모색했다. 12-13세기 동안 지중해를 통한 세 문명권, 즉 서방 기독교 세계, 비잔티움 제국, 이슬람간의 교환은 더욱 활발해졌고, 그와 동시에 지중해의 재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경쟁도 가열되었다. 이러한 각축전에서 승자는 서방 기독교 세계였고,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바르셀로나와 같은 해양 도시국가들은 14-15세기 우세한 해상수송 능력을 바탕으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후발주자였던 서방 기독교 세계가 중세 말 지중해 교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 시기의 교류의 결과였다. 즉 서방 기독교 세계는 동방으로부터 선진적인 지식, 기술, 사고방식 등을 전수받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 작성 목적본 과제는 중세세계의 무역, 그 중에서도 유럽 지중해 무역에 대해 기술할 것이다. 주제를 이렇게 잡은 이유는 지중해 무역이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에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사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시점이 여러 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가 15세기 유럽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바뀐 것이다. 포르투갈 스페인으로 시작된 식민지 무역은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을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기에 이르렀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또 그 전까지만 해도 동양이 서양보다 문화, 기술적인 면에서 우세해 있었지만 15세기를 기점으로 그것이 완전히 역전되어 후에 동양의 대부분 지역이 서양의 지배를 받는 위치가 되었다. 막대한 자원을 가졌고 이를 통해 새로운 상인 계층이 급부상했으며,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사회로 이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식민지 무역 시기가 이렇게도 중요하지만 그 전 서구세계와 동방세계를 이어준 지중해 무역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지중해 세계를 통해 들어온 동방의 새로운 기술들과 후추 등 향신료는 서구 세계에 동방을 향한 욕심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역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 과제에서는 첫째, 지중해 무역의 중심이 되었던 상품과 둘째로 중세 이탈리아의 상업문서들에 대해 기술할 것이다.2. 지중해 무역의 거래 상품11세기 지중해 무역의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주로 향신료, 견직물, 귀금속과 같은 고가의 상품들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수입되었고 , 목재, 금속, 노예 그리고 올리브유와 꿀과 같은 1차 농산물이 서양에서 동방으로 수출되었다. 당시 지중해를 통해 거래된 상품 목록의 총수는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11세기 말 이집트의 유대인 출신의 국제무역상 니심은 120여종의 상품을 거래하고 있었다.14세기 초 피렌체의 주요 상사 중에 하나였던 바르디 상사의 주재원이었던 발두치 페골로티가 작성한 『상업실무』 에는 동지중해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이 구입하는 스페치에리에(spezierie)라 불리는 향료의 목록이 나와 있다. 여기엔 총 286가지의 상품이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같은 상품인 경우도 원산지별로 구별되어 있기에 이를 원산지 별로 분류하면 인도, 중국, 극동 상품의 비율이 26%, 지중해 연안지역 상품이 25%, 근동과 이집트 지역 상품이 20%이다. 이를 보면 지중해 무역 전체에서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후추와 생강과 같은 향신료의 비중이 압도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지중해 연안 지역들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전체의 반을 상회한다. 이는 동지중해 지역이 현지에서 생산된 다양한 상품들을 지중해를 통해 유통시키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동지중해에서 기독교 상인들이 구입하는 상품의 종류도 다양해졌지만, 몇 가지 중요한 상품들이 여전히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14세기 후반 시리아, 이집트등지에서 돌아온 선박의 물품을 보면 4가지 상품 즉, 후추, 생강, 설탕, 면화가 전체의 80%정도를 차지한다. 시리아와 이집트행 베네치아선단의 경우도 가장 중요한 선적품은 후추, 생강, 설탕이었다. 반면 흑해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서유럽으로 수입되는 상품의 구성은 다르다. 로마니아에서 오는 제노바 선박의 경우 명반의 비중이 가장 크다 그 다음으로 밀랍, 유향수지, 견직, 모피, 곡물 등이 그 뒤를 잇고, 후추와 생강과 같은 향신료의 비중은 아주 낮다.여기서 중요한건 면화와 명반과 같은 저가의 상품들이 대량으로 거래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세 말 면화는 지중해의 면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생산지였던 시리아와 터키로부터 수 만 자루의 면화가 지중해를 통해 서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소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된 명반 또한 대량으로 거래되었다.명반과 명화 이외에도 중세 말 지중해를 통해 대규모로 거래된 저가의 대중상품들이 늘어났다. 곡물, 포도주와 같은 식량자원, 직물산업에 필요한 다양한 원료들이 일상적으로 유통되었다.지중해를 포도주 거래도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포도주는 동지중해 뿐 아니라 흑해로까지 수출되었고, 다시 몽고인들에게까지 대량으로 팔려나갔다.상품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상품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십자군 이전 지중해 교역에서 서방 기독교 세계가 동방의 선진지역에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은 기껏해야 노예, 목재, 무기제작용 금속 정도였다. 반면 이슬람과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서방으로 수입된 상품은 주로 향신료와 가공된 2차 상품들이었다. 하지만 동방과의 경제적, 문화적, 기술적 교류 덕분에 산업과 농업 기술이 서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이를 이용해 서유럽은 이전까지만 해도 이들 지역으로부터 수입했던 여러 물품들을 점차 자체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 이들 상품들을 동방으로 수출하기까지 하였다.(ex 종이)그리고 특히 서양에서 직물산업의 발전은 동방과 서방사이의 상품의 흐름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주로 완제품 형태의 직물이 수입되었지만 중세 말로 갈수록 완제품의 수입은 줄어들었다.유럽의 직물산업의 발달로 완제품 형태의 수입은 줄어들었지만, 직물 산업에 필요한 원료의 수입은 오히려 늘어났다. 중세 말 원면, 명반, 염료와 같은 1차 원료들이 지중해를 통해 대량으로 서유럽으로 수송되었다. 유럽 내의 모직물산업의 발전 덕분에 14세기 후반부터 유럽산 모직물의 동방수출은 늘어났다. 유럽은 동방과의 무역에서 항상 적자상태에 있었는데, 12세기에는 주로 수단산 금으로 이를 메울 수 잇었다.종합해 보면 11세기 말 십자군 이후 4세기 동안 지중해를 통해서 거래된 상품의 종류, 거래 규모 그리고 상품의 흐름 등에서 변화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변변히 수출할 물건조차 없던 서구 지역이 이제 산업제품들을 수출할 정도로 성장했다. 동방에서 수입한 원료로 가공한 물건이 동방으로 다시 수출되긴 하였으나 무역수지에서 서방은 적자를 보고 있었다. 또 면직 산업과 염색업의 발전은 동방산 원료의 지속적인 공급 없이는 불가능했는데, 이는 동방과 서방의 상호의존성이 더욱 증대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지중해는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비잔틴, 서방 기독교 세계를 경제적으로 묶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다.2. 중세 이탈리아의 상업문서들과거를 아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기록이다. 기록을 통해 과거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어디서든 마찬가지겠지만 이탈리아에서도 13세기 이전 주된 기록자는 성직자였다. 그들은 종교적인 기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외에 것들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13세기 이후 이탈리아에서 기록 작성자로서의 성직자의 독점적 지위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속인들 특히 공증인과 상인들도 기록을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주 된 기록사항들 중 프라토 출신 다티니가 남긴 문서들은 방대한 양으로 중세 이탈리아의 무역사를 잘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다티니의 문서를 중심으로 중세 이탈리아의 상업문서들을 설명하겠다.1) 서신당시 상인들의 세계에서 편지는 중요했다. 상인들은 상당 시간을 편지를 쓰는데 할애해야 했고, 특히 고용인이나 상사의 주재원들은 자주 이렇게 “고되고 귀찮은 일”에 불평을 토로했다.상인들에게 처음부터 편지 쓰기가 중요한건 아니었다. 12-3세기 지중해를 무대로 활동했던 이탈리아 상인들은 주로 상품을 가지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순회상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현지에서 중요한 사업상의 결정은 상인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세 말로 접어들수록 상업 조직의 변화가 오면서 편지 쓰기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점점 전문화, 체계화, 조직화되었다. 상인들은 여러 지역을 순회하지 않았고, 해외 시장에 자신의 주재원을 상주시켰고, 자신은 본토에서 사업을 총괄 지휘했다. 결국 본국과 해외시장 사이의 정보교환의 필요성은 더욱 늘어났고 이와 동시에 편지 쓰기의 필요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편지의 도입부는 지난번에 받은 편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거래 내역, 상인의 동향, 상품의 가격 정보, 생산지별 상품의 가격정보와 환율 등이 편지의 주 내용이었다. 상인 편지에 일상적으로 언급되는 것들은 상품과 시장에 관한 정보였지만, 상업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군사, 정치, 외교 등에 관한 정보도 매우 중요했다.
근대 이후 동아시아의 모색-명대의 도시-1. 도시2. 중국의 도시를 이루는 기본요소3. 명대의 도시에 관하여①명대 도시의 체계②명대 도시의 인구③명대 도시의 발달④명대 도시의 분포⑤명대 도시의 회관⑤명대 도시의 회관4. 진(鎭)에 대하여5. 도시의 형태6. 요새화한 수도7. 도시의 외관8. 도로와 수로9. 마을10. 노점과 가게11. 참고문헌1. 도시도시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도시(都市)는 인간의 정치·경제·사회적인 활동 무대가 되는 장소이며, 인구 집중으로 인해 비교적 인구 및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을 말한다.”)도시는 인류문명이 시작되면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도시의 존재는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볼 대 중국 사회에서 도시는 어느 정도까지 세계적인 공통성을 띠게 된다. “이것이 도시의 공통적인 특색이다”라든가, “이것이 농촌과는 다른 공통분모이다”라고 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곧 ①인구의 대량성, ②인구의 밀집성, 그리고③도시성(도시의 독자적인 이질성), 거기에 이르는 과정(도시화)이라고 하는 ‘세가지 구분’으로 요약될 수 있다. )2. 중국의 도시를 이루는 기본요소중국의 도시에서는 현성, 즉 현급 행정기관의 소재지가 도시의 규모로서는 최소한의 형태를 갖춘 기초적인 단위였다고 할 수 있다. 수학용어로 말하면 상수에 해당한다. 성 제도가 실시되었던 명대나 청대를 예로 들면, 전국의 지방행정은 수도에서 성-부주-현에 이르는 형태로 관할되었는데, 예를 들면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라는 도시는 당시 광주부라 불리는 부성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내에는 근교까지 관할하는 번우와 남해라는 2개 현의 청사가 소재하기도 했다. 당대 장안과 명·청의 북경 같은 수도라고 하더라도, 또 청대 중국 본토에 18개나 있었던 성도라 하더라도, 300여 군데에 달하는 부성·주성 부류 가운데 상위 몇 번째에 속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부성·주성 도시는 반드시 현성과 현청사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현성의 수는 송대~청대에 1,지 않았다.)②명대 도시의 인구명대의 북경성 내외의 인가가 110만은 된다고 기록되어있다.)③명대 도시의 발달명나라시대를 포함한 봉건사회 후반기의 도시 발달은 남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상공업 중심의 시진(市鎭)이 발달하고 중국의 도시발전사상 가장 웅장하고 휘황한 도시인 북경이 조성되었다.북송대 춘추전국시대에 이어 두 번째 도시발전의 절정기가 나타났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를 이전과 뚜렷이 구별된다는 점에서 ‘도시혁명’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도시의 신속한 발전과 도시상업의 혁신적 경영방식의 힘입어 새로운 형태의 도시형 취락인 진시(鎭市)가 대량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진(鎭)은 원래 군대의 관할구역단위였으나 북송시기부터 행정구역의 단위로 변화되었으며, 초시(草市))는 지속적으로 발달되어 시진(市鎭)으로 승격하거나 기존 도시의 확장에 기여하기도 하였다.이 시기, 특히 명대 도시발전 중 가장 뚜렷한 현상은 소규모 상공업도시라 할 수 있는 시진이 대량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진(市鎭)이란 시(市)와 진(鎭)의 통칭으로서 이들의 발전은 청대에 이르기까지 도시발달에 있어서 활력소가 되었다. 시는 물론 진도 일반적으로 종전의 봉건 통치자들이 통치의 목적으로 설치한 )왕도(王都), 주부(州府), 현성(縣城)과는 달리 상품경제의 생성물이라는 데 의미가 크다. 기능유형에 따라 이들 시진은 수공업형과 상업형의 두 유형으로, 수공업형의 진은 방직·차·사탕·담배·도자기·광업 등의 상이한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 중 일부 진은 동시에 상업중심지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 상공업 시진은 상품경제가 비교적 발달한 동남연해 일대에 집중되었으며, 그 중 일부 진은 크게 발달되어 현성 내지 )성도(省都)에 못지 않은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명대 중국의 4대진(大鎭)으로 지칭되었던 상공업도시인 경덕진(景德鎭)·불산진(佛山鎭)·한구진(漢口鎭)·주선진(朱仙鎭)(개봉서도(開封 西都))은 행정상으로 볼 때 진에 불과하였지만 그 규모는 성도에 못지 않았다. 이 중 경덕진은 도자확대되어 경제의 중심이 완전히 남방으로 옮겨가고 도시의 발달도 남방에 집중되었으며 남방 중심의 도시체계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특히 명·청대에 이르러 대·중도시가 대부분 동남연해 일대에 집중되었으며, 강소·절강의 2개성에 전국의 약 1/3에 해당하는 도시가 집중되고 북방지역에는 전국의 1/4에 지나지 않으며 북부와 내륙으로 갈수록 도시의 발전이 저조하였다.)⑤명대 도시의 회관송대 이후 원·명·청시기 도시와 도시 사이를 왕래하는 객상의 활동이 정상화되고, 이와 함께 10대 상방이라 불리는, 동향의 고리를 기본으로 하는 유력 상인단체의 존재가 전국적인 규모로 생겨난다. 말하자면 휘주방, 산서방, 광동방, 복건방, 영소방, 동정방, 사천방, 산동방, 강서방, 용계방이다. 대도시에서의 동향을 기본으로 한 객상단체는, 진출한 도시에 “회관”이라든가 “공소”라 불리는 동향 단위의 거점을 설치했다. 그 배후사정을 살펴보면, 1421년 북경천도 뒤에, 각 성에서 과거나 벼슬살이를 위해 상경한 자가 향당이라는 인연으로 결속하고, 여기에 객상이나 이미 정주해 있던 동향상인이 가세했다. 한편 15-16세기부터 각 지방의 도시에서는 동향상인의 단체에 관리나 신사의 참가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또 같은 시기에 도시가 아닌 미개발 지방의 농촌이나 산촌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먼저 와서 살고 있던 주민들의 압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향단체를 만들었고, 이것이 이윽고 그 지방의 지역에서 회관·공소로 발전한 예도 있다.명대 만력년간) 무렵부터 회관·공소의 설립이 활발해지고, 도시간의 원격지 상업이 정착화 되었다고 알려져 왔는데, 실제 언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어느 시기에 확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회관이라든가 공소라는 이름을 붙인 단체는 16세기 무렵부터 알려졌다.회관·공소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단체규칙 장정에 설립의 취지·목적·회칙·규약을 갖춰 현의 수장에게 신고해서 허가 도장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며, 그 전개는 명대 만력년간 이전으로 소급되지. 중국적인 대범함이라고도 할 수 있고, 중국적인 애매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면, 행정도시의 숫자를 함부로 늘리지 않는 이면에는, 문무 관료제도 규모에 정해진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국가 징수할 수 있는 조세량의 규모, 재정규모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보아 인구가 늘면, 행정경비는 비례적으로 증가하므로, 당-청대 사이에 인구가 약 5배로 증가한 중국사회에서는, 당대에 1,500개가 조금 안 되던 현성도시의 개수가 청대에는 8,000개 정도로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는 1,200-1,3000곳 전후였으며, 과거로 임용되는 관료의 수도 항상 일정하게 3만이 조금 안 되는 정도였다. 더 파고들어 이야기하자면 현급 도시의 행정기능을 서서히 민간사회로 넘겨주면서, 기존의 행정도시의 체계를 유해 온 셈이다.경험적으로 보아 상해처럼 언젠가는 현성이 되리라고 예측하는 지방집락을 경과적으로 “진”으로 놓아둔 경우가 상당히 있다. 반대로 현을 통합하고 폐지할 필요가 생겼을 때, 진이 폐현을 수용하는 공간이 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현과 현의 경계가 산지라면, 거기에 진이 생기는 경우는 대체적으로 드문데, 평지가 이어지는 곳이라면 거기에 진이 생기기 쉽다.)5. 도시의 형태기후와 지형이 도시 형성에 영향을 미쳐 북쪽 지방에서는 진흙집으로 구성된 마을과 바둑판 모양을 이루는 도시, 그리고 단층집들이 주로 발견되는 반면 남쪽 지방에서는 포석을 깐 좁은 골목길과 복층집들이 많이 발견되지만 대체로 주거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6. 요새화한 수도15세기 초, 영락제는 남경에서 북경이라고 다시 명명한 몽고 원 왕조의 옛 수도 따뚜(마르코 폴로의 칸발릭)로 수도를 옮겼다. 북경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성벽에 의해 두 개의 사변형으로 나뉘어 있다. 성벽은 기왕에 있던 흙벽에 다시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이로써 유럽에서는 유례가 없는, 높이 약 12m, 아랫부분의 두께가 23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원형 담이 보호하는 문들 위에 거대한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중 5세기에 지어진 몇몇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다양한 짐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하는 경사면이나 계단을 통해 성벽 위의 순찰로에 올라갈 수 있다.)명나라시대에 북경은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있었다. 북부에 벽으로 둘러싸인 외조가 있고 그 안에 내조가 있었다7. 도시의 외관성벽 위에서 바라본 중국 도시의 모습은 제국 어디에서나 비슷했다. 지붕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까닭에 규칙적으로 홈이 패여 전체적으로 바둑판 모양을 형성하는 대로들을 제외하고는 어디에 길이 있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뒤얽힌 낮은 건축물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집단 주거지 곳곳에 조성해 놓은 숲이 퇴색한 기와지붕의 물결에 보다 신선한 색조를 부여하였다. 선을 그어놓은 듯한 지평선은 여기저기 서 있는 불교 사원이나 수도원의 지붕, 멀리서 보면 종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파고다. 대도시인 경우에는 시간을 알리는 데 이용한 북탑과 종탑 꼭대기로 인해 끊겼다. 정원과 공원도 무수히 많았다. 특히 북경에서는 장중한 황궁 성벽이 공간을 압도하는데, 그 너머로 반대편 도시 성벽과 성문 방어용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대도시에는 성벽을 따라 외호를 파 놓았다. 이 외호에 온갖 종류의 오물들을 버렸기 때문에 특히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악취가 진동했다.)8. 도로와 수로15세기 초 명 왕조가 보수한 대수로는 양자강과 북경을 잇는다. 이 수로를 통해 나룻배들이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수도로 실어 날랐다.대부분 도시의 도로들은 포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북경만은 벽돌로 하수 시설을 건설하고 많은 도로들을 포장했다. 하지만 관리 소홀로 얼마 안 가 바퀴 자국이 깊게 파이고 포석의 틈이 벌어져 하수 시설이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도로 양편에 포석이나 자갈을 이용해 인도를 깔았는데,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엉망이 되고 말았다. 공공질서가 무너질 경우에는 곳곳에 설치한 나무 방책을 잠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