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같은 일인지배체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재자 개인의 강력한 통치술이 뒤따라야 한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경우 대(代)를 이어 60여년간 북한을 지배하고 있지만 통치 스타일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김일성이 항일빨치산 출신이라는 경력을 내세워 권력의 정통성에 기반한 통치술을 폈다면, 후계자인 김정일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자신의 정치적 경력을 보완하기 위한 통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북한 독재정권 유지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김 부자(父子)의 통치스타일을 비교·분석했다.◆ 수령이 모든 ‘정책’ 결정=북한은 일인 독재체제이기 때문에 모든 정책 결정도 최고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이뤄진다. 다만 김일성이 공산주의 국가의 시스템을 본 따 형식적이나마 합의적 성격을 정책 결정과정에 포함시켰다면, 김정일은 개인이 독단적인 판단을 더 우선시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허문영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일성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하의상달(下意上達. 아랫사람의 뜻을 윗사람에게 전달)식이 많다”며 “각 부서의 합의를 거쳐 정치국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형태는 국가체제 운용에 나름대로 공산주의의 국가들의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김정일은 정치국을 활용하기 보다는 측근들을 통해 결정을 내린다”며 “친위 세력을 통해 보고체계 및 정책집행체계를 장악하고 문제처리시 해당 실무자에게 직접 연락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일성 시대가 형식적이나 합의적 성격이 있는 ‘위계 질서형 양두제 모델’이라면,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더욱 독단적인 ‘종횡무진 제왕형 모델’로 변화했다”고 지적했다.또한 “김일성과 김정일 둘 다 지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제 모델(the autocratic model)’”이라면서 “김일성이 정치국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는 편이고 김정일이 더 독단적이라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말했다.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김일성의 경우 당과 국가를 창건한 측면에서 카리스마적 통치에 비중을 뒀다면 김정일은 제도적인 지위를 통한 통치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간부 기용 스타일 면에서도 두 사람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은 주로 빨치산 출신들을 등용했고, 한 번 등용하면 오랫동안 기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김정일은 측근 중심의 정치를 펴면서도 의도적으로 경쟁구도를 조성하는 용인술을 펼치고 있다.외교관 출신 탈북자 현성일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최근 펴낸 자신의 저서에서 김정일 정권의 대표적인 정책 결정과정을 ‘측근정치’ ‘밀실정치’ ‘비준정치’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는 “간부들 속에서 ‘영원한 측근도, 영원한 비측근도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 지속적인 충성경쟁과 상호견제를 유지하는 것은 김정일의 측근정치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관리 수법”이라고 분석했다.◆ 영화배우VS영화감독=부자지간이긴 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은 개인적 성향이나 성품 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이 연구위원은 “김일성이 아버지같고 온화한 리더쉽의 소유자라면 김정일은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정적들과의 경쟁, 곁가지들과의 투쟁 과정을 거치며 상당히 도전적이고 대담한 리더쉽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허 연구위원은 “김일성이 배우적 성향이 강하다면 김정일은 밖에서보다는 뒤에서 연출을 하는 사람”이라며 “김정일이 노련한 영화감독은 될 수 있지만 따뜻함을 보여주는 자애로운 어버이상을 보여줄 수 없는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은 먼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은 없지만 목전의 이해관계를 타산하는 능력은 뛰어나며 대화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포착하여 공격하는 능력도 강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김정일은 특히 권력 승계 이후에도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도의 선전기법을 사용하게 된다. 북한 TV나 라디오에서는 김정일의 육성을 전혀 내보내지 않는다. 김정일을 찍을 때는 카메라를 상향식으로 비추는 경우가 많다. 모두 다 자신을 신비하고 베일에 쌓인 인물로 포장하기 위해서이다.또한 김일성은 수해 지역과 같은 재난 현장에도 직접 방문해 주민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김정일은 일반 주민들이 있는 곳에는 절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김일성은 외국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자주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망하기 직전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의 회담이 대표적이다. 1979년에는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과 면담을 갖고 이듬해에는 미국 하원의원 스티븐 솔라즈와도 만나는 등 서방권 인사들과도 꾸준히 접촉했다.한편, 베일에 싸여 연막 전술을 펼치던 김정일이 대외 언론에 가장 많은 모습을 보여준 계기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당시 김정일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직접 공항에 나와 비행기 바로 앞에서 손을 맞잡음으로써 파격적인 행보의 첫 장을 열었다. 김정일은 준비된 행사와 멘트를 잘 소화해냈고 임기응변의 유머까지 과시했다.극도로 통제된 대중노출과 그를 통한 신비감 조성, 카리스마의 조작은 바로 김정일을 오랫동안 권좌에 머물게 한 노하우라고 할 수 있다.◆ 외교 무대에서도 ‘신비주의’=김일성과 김정일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외교정책 스타일도 꼽을 수 있다. 김일성이 외교 면에서 세련되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김정일 은둔적 이면서도 소극적인 외교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김일성은 중국과 옛소련, 동유럽 등 사회주의권과 제3세계 비동맹권과의 교류에 치중했다. 그는 특히 중·소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까지 활발한 외국 순방 기록을 남겼다. 1975년의 경우 4월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회담하고,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된 5월에는 아프리카 5개국을 순방할 정도였다.1965년에는 수카르노 당시 대통령의 초청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 인도네시아 종합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중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때에는 김정일이 김일성을 직접 수행했다.반면, 국제무대에의 노출도 자신의 국제적 신비감과 가치를 떨어드린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중국과 러시아 정도만 방문하는 등 극도로 제한적인 해외 순방 외교를 펼치고 있다. 해외 순방시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김정일만의 특징이다. 그는 평양에서 모스크바까지 왕복 2만km를 넘는 거리를 무려 24일에 걸쳐 열차로 오가기도 했다.그는 아버지 김일성에게도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만류했다. 황장엽 전 비서는 김정일이 테러를 두려워해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을 거론, “김정일이 자꾸 김일성에게 ‘비행기는 위험합니다. 기차타고 다니세요’라면서 자신도 기차를 타고 돌아다녔다”며 “김일성은 그렇게 겁이 없었는데도 (김정일의 말을 들은 후) ‘내가 허리가 아파서’라면서 기차를 타고 다녔다”고 말했다.김 부자의 상반된 외교정책 스타일에 대해 이 연구위원은 “김일성 집권 시기는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이전이라 이들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가 조성됐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광범위하고 전방위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면서 “대표적으로는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비동맹외교의 활성을 들 수 있다“고 말했다.그는 “김일성이 당시 국제정세의 영향으로 포괄적이고 다각적인 외교를 펼쳤던 것에 비해 김정일은 핵문제로 인해 국제적인 제재를 받는 등 국제사회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때였다. 때문에 본인이 할 수 있는 외교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며 “결국 대중·대러 관계에 치중하거나 DJ 정부 이후에는 대남관계에 집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통일의 방식 : 점진적 평화통일1. 가능한 시나리오1) 무력통일: 가능하지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 어렵게 쌓아올린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무위로 돌리는 것.2) 북한붕괴 후 흡수통일: 지금 당장 북한이 붕괴하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북한을 흡수할 수 있다면 그리 나쁠게 없는 경로. 정치군사적으로 대치해 왔던 북한이 스스로 무너져내리고 우리가 아무문제 없이 대체할 수 있다면 반대할 사람이 없음. / 그러나 실제 이같은 기대가 조만간 충족될 가능성 높지 않음. / 또 북한 붕괴를 목표로 대북정책을 추진할 경우, 남북대결과 한반도 긴장고조 역시 감수하기 힘든 악조건이 될 것. - 북한을 붕괴시키고 흡수통일을 하려는 통일방식이라면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은 철저한 봉쇄와 전면적 대결기조여야.... / 아직 북한을 흡수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조건을 한국이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당장의 흡수통일은 어려움. 비용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 / 북한이 붕괴해도 우리가 원하는 한국 주도의 통일이 될지도 미지수. 북한의 권력공백 상태나 급격한 소요사태 발생 시 과연 지금의 동북아 정세에서 한국이 쉽게 북한지역을 정치적으로 장악할 수 있을까? 아직 유엔군과 휴전상태인 북한에 변고가 났을 때 유엔의 이름으로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또 중국의 개입가능성도... 북한 붕괴이후 북한 구성원이 한국으로의 통일을 자연스럽게 원하지 않는 한, 우리가 원하는 흡수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 준비되지 않은 해방이 분단과 전쟁이었듯, 준비되지 않은 급변사태는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재앙일 수 있음.3) 화해협력과 북한변화에 의한 점진적 평화통일→ 현실적으로 유용한 대북정책은 북한의 붕괴상황을 ‘대비하되’ (○)‘가정하는’ 대북정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즉 대비하되, 가정하지 않는 대북정책이 되어야 한다.-화해협력에 의한 점진적 통일방식이 반드시 붕괴 후 흡수통일에 배치되는 것 아님.과정으로서의 통일이지만 마지막 결과로 이루어지는 통일이 일방의 붕괴와 타방의 흡수라는 경로를 택할 수도 있기 때문. /- 독일의 예이른바 붕괴 후 흡수통일로 분류되는 독일의 경험이 화해협력에 의한 점진적 통일방식과 역사적으로 결합되어 있음.독일통일을 붕괴에 의한 흡수통일방식으로만 규정한다는 것은 절반의 분석.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동독의 자유선거 그리고 동서독 통합과정은 분명 붕괴 후 흡수방식에 해당.그러나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의 20여년에 걸친 교류와 화해협력의 신동방정책이 없이 하루아침에 동독이 붕괴되고 흡수통일된 것은 아님.동독이 붕괴되고 주민들이 자유의사에 의해 서독으로의 편입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20여 년 동안의 ‘접근을 통한 변화’ 즉 동방정책이라는 화해협력 정책의 성과였음.화해협력이라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지속됨으로써 붕괴 후 흡수통일이라는 ‘결과로서의 통일’을 가능하게 한 것.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당장의 북한의 붕괴가 아니라 화해협력의 남북관계를 통해 북한이 변화하도록 꾸준히 통일과정을 준비하는 것.- 결국 무력에 의한 통일이 바람직하지 않고 급속한 북한 붕괴에 의한 흡수통일이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에서 / 우리가 지향해야 할 통일의 방식은 남북의 화해협력을 증진시키고 평화를 증대시킴으로써 / 북한의 유의미한 변화를 유도하여 점진적인 평화통일을 여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경로가 됨.Ⅳ. 점진적 평화통일을 위한 대북정책 : 개입정책의 전략1. 개입정책의 개념일반적인 의미의 개입정책은 클린턴 정부시기에 비로소 체계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됨.○ 배경 및 기원클린턴 행정부가 ‘개입과 확대 전략’(engagement and enlagrement)를 국가안보전략으로 정리.냉전이 종식된 이후 변화된 국제환경 속에서 미국은 새로운 대외정책을 고민 끝에 제출. ~ 구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을 미국 주도의 제도적 틀에 편입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중국과 북한, 이라크 등 탈법국가들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변화를 유도하기위해 교류협력을 통한 개입정책을 추진하게 됨.이 같은 개입장식의 등장에는 기존의 군사적 수단이나 무력 사용 등 부정적 제재방식이 많은 비용 뿐 아니라 사실상 의도하는 바를 관철하기 힘들고 오히려 극단적인 전쟁 가능성까지 감수해야 하는 부작용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는 현실적 판단이 배경으로 작용했음.○ 개입정책의 정의- 즉 탈냉전 이후 비정상 국가와의 다방면에 걸친 관계 확대를 통해 미국이 의도하는 바대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및 국제규범을 수용하도록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인 소위 개입정책이 외교정책의 대안으로 채택된 것.한 마디로 개입정책은 ‘불량정권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한 전략’인 셈.- 일반적으로 개입정책은 ‘다양한 이슈영역에서의 포괄적 접촉 확대와 구축을 통해 대상국가의 정치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책’으로 정의될 수 있음. 즉 비정상적인 행태를 견지하는 문제국가를 정상적인 국가로 변화시키기 위해 기존의 봉쇄나 고립이 아닌/ 적극적인 교류와 접촉 확대 및 관계 개선으로 정책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개입정책인 셈./ 결국 개입정책의 핵심은 ‘다방면적 접촉 확대’와 이를 통한 ‘대상국가의 태도변화’로 요약될 수 있음.2. 한국의 개입정책 : 대북포용정책- 햇볕정책, 화해협력정책, 평화번영 정책은 남북관계 개선에 초점을 맞춰 한반도의 평화공존과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중장기적 관점의 대북정책임.- 보다 많은 접촉, 보다 많은 교류, 보다 많은 협력을 모토로 / 남북의 적대관계를 화해협력의 관계로 전환시키고 / 상화의존도를 증대시킴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유도해내는 것이 / 이른바 대북개입으로서의 포용정책인 것.- 이런 점에서 탈냉전 이후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은 큰 틀에서 미국의 개입정채고가 같은 맥락.즉 냉전시기 남북간 적대적인 체제 경쟁이 끝나고 북한의 지속적인 체제위기와 한국의 체제 승리가 확정된 탈냉전 시기에 / 한국정부는 과거 대북 강경정책 즉 북한과의 모든 접촉과 교류를 부인하고 차단하는 고립정책에서 벗어나 / 북한과의 화해와 교류협력을 확대함으로써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증진시키고자 함. ~ 이는 개념적으로 볼 때 미국이 비정상 국가에 취한 개입정책과 동일한 정책방향 (m- 미국과 차이. 미국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님. 옵션이 많음. 인게이지머트는 다양한 양시으로 나타날 수도.. 그러나 한국은 북한에 대해 옵션이 많지 않음.)○ 한국과 미국의 차이다만 한국의 개입정책은 미국과 차이가 있음.- 한국의 포용은 분단국가의 상대방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항상 통일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 그렇기 때문에 상대국가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함.
재외동포에 대한 대학생들의 인식도 조사:대학생을 중심으로목 차Ⅰ. 서론 21.연구 배경 및 목적22. 민족 긍지에 대한 개념 정리3Ⅱ. 연구설계41. 연구내용과 분석틀42. 연구대상 및 연구방법43. 역할 분담 및 연구일지6Ⅲ. 연구 결과의 분석81. 민족 긍지82.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132. 성별, 전공별 교차분석 결과(유의확률 중심으로)173. 민족긍지와 재외동포 관심도 교차분석 결과(유의확률 중심으로)19Ⅳ. 결론231. 연구결론232. 소감23【부록Ⅰ】분석결과(SPSS)25【부록Ⅱ】설문지36Ⅰ. 서론1.연구 배경 및 목적19세기 중엽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만주와 연해주로 떠나면서 시작되었던 한민족의 이주 역사와 정착의 역사는 어언 1세기 반이 되었다. 그 규모면에서도 한국의 재외동포)는 2007년 현재 세계 170여 개국에 7,044,716)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중국, 이스라엘, 이탈리아 다음으로 4번째로 많은 국가에 해당한다. 각 국의 인구대비 재외동포의 규모로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국가에 해당한다. 이 규모는 한반도 인구의 약 1/10에 해당하며, 이들의 경제력은 약 1,200억 달러로 한국 총 GDP의 1/4에 해당한다고 한다.이처럼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이들 재외동포는 각 국의 민족자산으로 인식되면서 그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즉, 21세기 세계화와 초국가주의 시대에 새로운 힘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글로벌 시대에 다언어, 다문화적인 특징을 지닌 이들 재외동포들은 국제관계 뿐만 아니라 국제무역부분에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중국, 이스라엘, 이태리, 그리스, 인도와 같이 큰 규모의 재외동포를 갖고 있는 나라들은 재외동포를 자국의 경제발전과 세계화전략에 활용하려고 적극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로 4,000만명 정도로 추정하는 해외 화교와 화인을 갖고 있는 중국은 세계화상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화교경제권 형성에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고 있다. 6,000만명(이중 352만명이 재외국민)으로족에 대한 긍지 부분과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대학생의 민족에 대한 긍지를 파악하기 위해 민족의 긍지를 측정할 수 있는 8문항, 관심도를 묻는 9문항, 인적사항 3문항 총 20문항을 작성하여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는“민족에 대한 긍지가 높으면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이 높을 것이다”라는 가정 하에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도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였다.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도는 재외동포에 대한 신문기사 및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 정도, 재외동포에 대한 자신의 태도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변수는 대학생의 민족에 대한 긍지이고 독립변수에 의해 발생되는 종속변수는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으로 나누었다.우선 각 문항을 빈도분석을 실시하여 설문 결과를 해석하였다. 그 후 성별, 전공계열, 단대별로 그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도를 분석하고,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과 한민족에 대한 긍지를 서로 교차분석하여 유의미한 자료를 중심으로 상관관계를 분석하였다.2. 연구대상 및 연구방법1) 연구대상대학생들의 민족의 긍지와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을 연구하여 재외동포에 대한 대학생들의 인식도를 조사하고자 한다. 설문자료수집의 용이성을 감안하여 재학생으로 설정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전공을 인문 계열(예체능계열포함)과 자연 계열로 나누어 조사하였다.(1) 전공계열 (2) 성별(3) 학년2) 연구 방법(1) 비확률 표본추출(non-probability sampling)본 연구의 성격상 표본을 의도적으로 구성해야 하고 비용과 시간 면에서 확률표본추출보다 절약되는 비확률 표본추출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비확률 표본추출 방법 중에서 할당추출을 분석 방법으로 선택하였다. 할당추출은 모집단을 일정범주로 나눈 뒤, 이들 범주에서 정해진 수를 작위 적으로 추출하는 방법이다. 본 연구에서는 100명을 표본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이 방법은 층화추출과 같이 모집단을 대표하는 표본을 추출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학교를 대표할만한 표본을 추출하기 위해 이와 같은 방법을 선택했다음- 외국 체류 경험- 수업-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 유승준 추성훈 등의 유명 연예인들의 행동에 대한 인식6차4/13(월)14:00○ 타이틀 작성 및 설문지 초안 작성7차4/28(화)13:00○ 발표내용 정리 및 교수님 지적사항 정리8차4/30(목)13:15○ 발표내용 정리 및 교수님 지적사항 정리, 설문지 작성에 관한 논의9차5/8(금)14:00○ 설문지 작성을 위한 논의 및 테스팅을 위해 역할 분담10차5/12(화)13:15○ 테스팅을 하면서 지적받았던 사항들 정리 및 설문지 작성 완료,교수님 면담준비11차5/14(목)13:15○ 설문시작을 위한 마지막 모임12차5/28(목)13:15○ 설문 수집 정리 후 코딩작업 실시 및 보완점 논의13차6/11(목)13:15○ 보고서 작성에 관한 일정 논의14차6/17(수)10:00○ 보고서 목차 작성 및 역할분담 논의15차6/19(금)17:00○ 각자 맡은 부분을 종합하여 부족한 부분 수정 및 보완16차6/21(일)10:00○ 보고서 최종 점검 및 제출Ⅲ. 연구 결과의 분석1. 민족 긍지1-1. 재외동포가 해외에서 큰 성공한 소식을 접하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재외동포가 해외에서 성공한 소식을 접하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람이 82%, 보통이다고 응답한 사람이 17%, 부정적인 답변을 한사람은 1%로 나왔다. 이를 보면 대부분에 사람들이 재외동포의 성공 소식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재외동포도 같은 한국인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된다.1-2. 외국에서 한국을 비하하는 발언을 들었을 때 불쾌하다고 생각한다.외국에서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들었을 때 불쾌하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90%, 보통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7%, 불쾌하지 않다는 응답은 2.%가 나왔다. 이로 보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인 비하 발언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한국에 대해서 한국국민들의 자긍심이 높아진 결과로 생각된다.1-3. 한국 정치는 충분히 민주적이다.한국 정치가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 개인적인 문제라는 생각도 많아서 비슷하게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2.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2. 다음 중 누가 한국인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가?조사결과 재외동포 2,3세가 33%로 가장 높게 나왔으며, 다음으로 귀화 한국인21%, 한인입양인 16%, 혼혈한국인 15%, 잘 모름 14%로 나왔다. 재외동포 2.3세가 가장 높게 나타나기는 했지만, 한인입양인보다 귀화한국인이 상당히 높게 나타난 점이 특이하다.3. 당신은 재외동포에 대해서 평소에 어느 정도 가깝게 느끼고 있는가?재외동포에 대한 친근도가 42%, 그저그렇게가 53%, 잘모르겠다 5%, 한국사람만큼 가깝게가 4%로 나타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재외동포에 대한 친근도가 높지 않으며, 점점 더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4.당신은 한국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한국인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는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47%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한민족으로서 한국국적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람이25%, 한민족으로서 외국국적을 가진자를 포함한다는 사람이 14%, 외국인으로서 한국국적을 가진자라는 사람이 13%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아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을 반영해준다고 생각된다.5. 재외 동포와 관련된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는가?대학생들의 90%가 재외동포 관련 수업을 수강한 적이 없는 걸로 나타났다. 대학생들의 재외동포에 관한 관련 수업에 관한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5-1. 질문 6번에서 재외 동포 관련 수업을 수강했다면 그 수업을 수강한 이유는 무엇인가?수강한 적이 있는 10%의 경우 관심이 있다가 5%, 필수 과목이어서가 4%, 마땅히 수강할 과목이 없어서가 2%, 교수님이 좋아서가 1%로 나타났다.5-2. 질문 6번에서 없다고 질문한 사람들 중 재외 동포와 관련된 수업이 있다고 한다면 수강하겠는가?그리고 수강하지 한인 입양인(11%), 혼혈 한국인(9%), 잘 모름(3%) 순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한민족으로서 긍지가 보통이라는 입장은 잘 모름(11%), 재외동포 2,3세(10%), 한인입양인(5%), 귀화한국인(4%), 혼혈한국인(3%)로 나타났다. 또 한민족으로서 긍지가 부정이라는 응답은 혼현한국인(3%), 재외동포2,3세와 귀화한국인 (각각 1%)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서 긍지가 높을수록 재외동포 2,3세를 한민족으로 더 가깝게 생각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또 귀화한국인이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을 차지함을 통해서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민족의식이 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3) 한민족의 긍지 정도와 한국의 역사 관심도한민족으로서 긍지가 긍정(62%)일수록,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관심도가 관심42%, 보통 18% 상당히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한민족으로서 긍지가 보통인 사람들 역시 역사가 관심 18%, 보통 14%, 무관심 2%로 나타났는데 긍지가 낮을수록 역사에 대한 관심도 또한 떨어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민족에 대한 긍지가 높을수록 역사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한국인 비하 영상과 재외동포 사건에 대한 관심도한국인을 비하하는 영상을 보았을 때 불쾌하다는 입장이 87%로 나타났으며, 이 중 재외동포에 대한 일을 우리 일로 생각하는 가에 대해서 긍정적인 대답이 60%, 보통이 23%, 부정이 4%로 나타났다. 그리고 비하하는 영상에 대해서 보통이라는 입장이 10%로 나타났으며, 이중 재외동포에 대한 사건을 우리 일로 생각하는 가에 대해 보통이 5%, 부정이 3%, 긍정이 2%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서 한국인을 비하하는 영상에 대해서 불쾌하다는 입장일수록 재외 동포에 대한 사건 사고에 관심을 더 많이 갖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으며, 비하영상에 대해서 보통의 반응을 보인 경우 재외동포 관련 일에 대해서 관심이 긍정에 비해 보통과 부정이 많음을 확인 할 수 있다.5) 한국사회복지체계 인지도와 재외동
참여민주주의와 직접행동- 2008년 촛불집회를 통해 바라본 참여민주주의 -- 목 차 -1. 서론2. 본론1) 참여민주주의(1) 참여민주주의의 의의(2) 대의민주주의 비판2) 2008년 촛불집회와 시민참여(1) 간략하게 소개(2) 촛불집회의 특징 : New Media의 사용과 관련하여① 행위자 분석② 비정치적 집단의 정치 참여 - 생활정치의 등장③ 네트워크 정치(3) 촛불집회와 참여민주주의3) 인터넷과 시민참여(1) 인터넷과 시민운동① 인터넷과 시민사회의 변화② 시민운동의 새로운 양상③ 온라인 시민운동의 성장과 특성④ 온라인 시민운동의 유형⑤ 온라인 시민운동의 한계(2) 2008년 촛불집회와 인터넷. 그리고 시민참여3. 결론1. 서론2007년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는 헌팅턴(S. Hunting)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consolidation)의 조건인 평화로운 두 번의 정권교체(turnover)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그 후 몇 달도 채 되지 않은 2008년 5월, 수십만 명의 시민들은 정부의 한미 FTA에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는 지난 1987년 이후 대의민주주의의 정착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목소리가 제도화된 정치를 통해 결코 정부 내로 '투입(input)되지 못하였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사례이다.)1987년의 민주화운동은 국민들의 직접적 참여에 의해 제도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를 보장받았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면서,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최고의 정치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면의 반(反)민주주의적 특징 역시 분명 존재한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적 목적 달성 이외에는 어떤 문화적이고 의식적인 변화나 내용이 함께 수반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의라는 커다란 장애물을 넘어서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정치적 목적의 달성이 내용적인 민주화까지 담보하지 못한다는 교훈 역시 1987년 이후의 통치라는 점에서 근원적인 한계를 지닌다. 스스로의 통치’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가 아닌 ‘대표’에게 통치를 맡긴다는 점에서 그러한데, 특히 대표성과 대웅성, 책임성의 측면에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대의민주주의 체제 하의 대표성 한계의 경우, 대의 민주주의는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제도 자체가 선호집약적인 다수결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비록 사표를 방지하고 다양한 시민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비례대표제’등의 방법이 고안되고 있지만, ‘대표’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대표되지 못하는 이익의 사각지대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례대표제가 실시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그 비율이 낮은 편으로 사표가 다량 발생하며 이는 정치적 효능감의 저하로 이어져, 투표율을 낮추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는 시민의 의사를 집약하고 대표해야 하는‘정당’이 사회적 균열을 전혀 반영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지역주의 균열만을 확대 재생산 하여 과다 대표하기만을 반복하여 왔다는 점에서 대표성의 한계가 더욱 부각된다. 내부적으로 과두화되어 정당기율마저 강한 우리나라의 정당들은 선거를 통해 사회 균열을 반영하는 데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대응성 측면의 한계는 대리인의 문제와 국가의 행정국가화 경향에서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대응성이란 선출된 대표들이 사회 균열에 대응하여 그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표는 시민 스스로가 아니라는 측면에서‘대리인의 문제’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대리인인 대표에게 실직적인 주권을 통해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선거 때에만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단속적인 방법뿐이다. 또한 사회가 고도화되고 복잡화됨에 따라 위임자인 시민과 대리인인 대표 사이의 간극이 점차 확장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귀족적이고 엘리트적인 민주주의 형태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대응성 확보가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며, 대표의 도덕적 해이,대표 운하 반대운동, 보수신문 불매운동, 수돗물과 건강의료보험 민영화 반대운동 등으로 다각화되는 양상을 보였다.① 행위자 분석촛불시민을 개념적으로 규정한다면, 정치보다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실천하는 시민, 사회 위기시에 적극 참여하는 모니터 시민(monitor citizen) 그리고 이성과 아울러 감성을 중시하는 감성시민으로 파악할 수 있다. 2008년 촛불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제도화되지 않은 영역에서 다양한 주체적 지위를 갖고 열정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실천한 시민’으로 규정할 수 있다.)5월 2일 처음 개최된 촛불집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기 10대들의 참여에서 인터넷 카페모임, 화이트칼라, 가족동반 참여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확장되었고, 그 연대의식과 결집력이 한층 강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② 비정치적 집단의 정치 참여-생활정치의 등장2008 촛불 시위는 전통적 비정치참여 집단으로 분류되었던 여학생과 청소년, 유모차 부대등 주부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개인들의 참여도 정치집단이 아닌 82Cook, MLB Park, 엽혹진 등과 같은 비정치적 동호회를 중심으로 나타났다.‘82Cook’(http://www.82cook.com)은 촛불시위 이전에는 리빙노트, 살림노트, 요리법등의 정보를 공유하는 비정치적인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대다수의 회원이 여성이며 30-40대 주부들이 주요 이용층이다. 이들 회원들은 촛불시위 과정에서 일부 자발적인 참여자들을 중심으로 ‘나라사랑모임(나.사.모.)’을 만들어 식수를 배달하거나 김밥을 제공하고 응원 메시지 등을 보내는 활동을 하였다. ‘MLB Park’(http://www.mlbpark.com)는 메이저리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커뮤니티이다. 단순히 미국 프로야구에 관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는 사이버 커뮤니티였지만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다가 촛불시위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2008년 5월 19일부터 5월 23일까지 모금운동을 통해 1,300여.만 원을 모아 경향신문(정치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에 의한 조직적 동원과 주도가 아니라, 다양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둘째, 여당과 야당을 포함한 제도권 정당들이 광우병 쇠고기 수입이라는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기존 정치권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인 것이며, 새로운 대안적 정치의 부상을 알리는 신호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2) 인터넷과 시민참여(1) 인터넷과 시민운동시민운동은 사전적 의미로 시민의 입장에서 행하여지는 정치·사회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시민운동과 단체들의 역사가 본격화되는 것은 1987년 6월 항쟁을 겪은 직후부터이다. 6월 항쟁 이후 각종 시민 결사체가 분출하고 시민 사회가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일시에 발달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6월 항쟁 이후 20년에 가까운 기간은 민주주의, 시민사회, 시민 권리를 위한 사회개혁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은 통상적으로 1989년 경실련의 창립부터이며 이에 따라 시민운동의 역사는 현재까지 15년의 시기로 역사성이 규정되곤 한다. 15년의 역사에서 시민운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2000년 총선연대의 폭발적인 영향력이 이후, 대학에는 NGO관련 대학원과 학과, 강좌가 우후죽순으로 개설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학문적 영역부터 언론, 시민단체 활동가들까지 일반적으로 한국의 시민운동은 15년의 역사로 평가되고 있다 할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해방이후의 좌익운동내지 혁신운동의 흐름이 4.19혁명, 5.16군사 쿠데타, 30여년의 군사정권의 ‘개발’세력의 집권에 따라 철저히 막혀있었지만, 한국 민중의 전태일 열사의 분신정국,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제1차적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라 할 1987년 민s)의 경우 영국의 Green net을 중심으로 www.apc.org을 통하여 스웨덴, 캐나다, 브라질, 니카라과, 호주를 비롯한 25개 국가의 회원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환경, 평화, 인권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정보통신기술 활용법을 교육 지원하고 있다.3) 온라인 시민운동의 성장과 특성① 온라인 시민운동의 성장)한국사회의 IMF 위기에 대한 타개책으로 국가가 강력하게 추진한 정보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2000년대에 이르러 인터넷의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게 되고 인터넷 시민운동 또한 인터넷의 대중화와 함께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온라인 시민운동의 성격 또한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다. 과거 네티즌의 활동 공간이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면 최근에는 개인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로 변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정치 웹진의 기자나 필진들이 담론을 형성하고, 집단 카페 중심의 공간이 그 동력을 제공했다고 한다면, 지금은 카페보다는 개인화미디어가 재생산되면서 그 양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 개인 미디어들이 구성한 네트워크가 다시 개인화된 커뮤니티를 온라인상에서 존립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 예로 예전에는 시민단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면서 네티즌과 소통을 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네티즌의 성장 속도를 시민단체가 따라가기엔 역부족이게 되었다.② 온라인 시위의 특성매우 빠른 시간 안에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제기된다는 점이다. 게시판에 올라온 하나의 글이 파문을 일으켜 웹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전파되고, 곧 몇 시간 내에 전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즉 이는 공적 의제의 형성과정이 매우 빠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자신들과 공통된 관심과 생각을 가진 집단을 쉽게 찾을 수 있음은 물론 기존의 대중매체를 통해서가 아닌 네티즌들이 자체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기회가 등장하게 된다는 특성을 갖는다.4) 온라인 시민운동의 유형① 조직/동원 유형조직/동원의 유형에는 오프라인에서의 행동을 촉구하는 온라인 운동이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 시위 장소와 시간, 방법을 홍보하며 대중다.
Report과목명담당교수학과학번이름『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는 현대를 규명하기 위해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함은 물론, 그 구성에 있어서도 독특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의 시작을 개항, 시민의식의 확대, 자본주의 문물의 유입 등의 상투적인 잣대로 진단될 수 있겠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이 책에서는 급격한 서구문명의 유입으로 봉건적 가치관이 무너지고 의식의 변화가 일면서 현대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 1930년 전후를 ‘현대성’의 시작을 작가가 찾아낸 각종 문화의 자료들을 분석하는 것을 통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또한 저자는 현대는 사건으로 점철된 역사를 통해서가 아닌 인간의 일상성을 통해 밝혀질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우리에게 현대는 ‘형성’ 되었다기보다는 ‘이식’ 된 것이어서 ‘거부반응’도 상당하였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새로움에 대한 충격과 반발,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이상한 것에 대한 취향과 혐오감, 서양에 대한 적대감 혹은 부러움, 야만과 열등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한탄 등등이 뒤섞인 태도들이 현대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러한 우리의 보편적인 심성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우리는 불과 10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생활양식 자체가 바뀌는 급성장을 이룩하였고 어느 날 바뀌어버린 세상에 적응해가며 ‘현대성’을 실감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 생각의 틀은 언제 어디에서부터인지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작가는 7개로 나뉜 각 장마다의 주제를 현대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물질과 과학의 측면, 지식인의 삶의 방식과 사고의 형태, 대중문화의 형성과 유행의 양태, 변모된 여성관, 도시적 삶과 경제적 측면, 육체와 성을 둘러싼 시각의 변모 등으로 구성하여 30년대를 전후 한 사회 문화적 상황을 그리고 있다.특히 이 책의 강점은 당대의 잡지, 신문, 광고, 사진 등 여러 시각자료들을 적절하게 선택 배치함으로써 현대의 ‘실물’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 극도의 두려움을 나타냈다. 그것은 개항 이후 나타나게 될 사회적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 자신이 더 빠르고 숨 가쁘게 달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지각했던 모습으로 설명되고 ‘현대성’을 논하기에 앞서 현대의 시작을 규명하는데 있어서도 현대의 시작을 알리는 일상 생활 저변의 움직임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를 인식할 만한 힘을 일반대중은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당시 우리 사회의 현대화는 전적으로 외세에 의한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수동적인 변화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책에서는 ‘현대를 바라보는 눈’ 에 대해서도 살피고 있는데 저자는 주로 자유와 평등을 앞세우고 대중의 감성을 견인 할 줄 아는 일반 대중에 주목하고 있다. 그 당시 현대를 맞이함에 있어 ‘백성’들에게 옛것을 지키는 것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 중 우선수위에 있어 앞은 어느 것이었을까? 일반 백성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과 문화적 괴리감으로 인해서 옛것을 지키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리라 생각이 된다,과학이 발전하고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대중들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현대의 물질들을 소유하지 못한 사회는 주눅 들어야 했으며,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려 하기에까지 이른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당시의 과학화의 결과에다 초점을 맞추기보다 과학화가 일반 대중에게 가져다준 물질문명에 대한 소외 즉, 정신적 충격에 대해 진지하게 살피고 있다. 요즘에도 첨단 과학 기술이 나오면 신기해하고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국가 혹은 단체들은 주눅 들기도 하고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전혀 새로운 분야에 전혀 새로운 기술들과 문물들이 들어왔을 때의 그 문화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그 당시의 일반 대중이 어떤 문화충격을 받고, 어떻게 비판하고, 어떻게 수용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얼마 들어오지 않은, 더구나 ‘백성’들은 구경하기도 힘들었던게 문화적 충격이었다면 지식인층에게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당시의 새로운 지식인들은 이른바 일본이나 중국 혹은 서구를 통해 신식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이 피폐한 문명과 낙후된 경제, 봉건적인 정치에서 벗어나 진보된 문명을 받아들이고 개조와 개혁을 통해 강건해지기를 갈망했었다. 그래서 서구와 강대국의 문화와 철학적인 기조를 수용하고 이를 조선에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당시의 지식인들은 변화하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똑똑히 해낼만한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선구자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식민지시대라는 한계를 미리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적 문화의 주체를 담당하려했던 식민지 지식인들의 현대적 자기 발견은 국제적 힘의 질서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적 투쟁의식과 함께 현실적 좌절감에서 비롯된 열등의식이 뒤범벅된 채로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저자는 당시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들 자신은 스스로를 좌절로 몰아가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과거는 현재를 보는 거울이라고 했듯이 지금의 상황과 그 당시의 상황이 이 자료를 통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무 뜻도 모르는 채 달달 외우기만 하고 단편적인 지식만을 습득하는 현재 학교 교육, 학교를 나와도 직장을 구하기가 힘든 청년 실업자들, 무조건 외국으로 유학을 가려하는 도피 유학생들, 지식만 가르치고 배울 줄 알았지, 도덕적인 양심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 교사들. 70년이 지난 지금의 문제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룸펜’, ‘데카당’이 현재의 시대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만 이들이 존재를 한 것뿐만 아니라, 요즘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학진학을 하는 현실을 보면 ‘룸펜’, ‘데카당’이 과연 그때에만 존재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자가 지식인들에 대한 설명을 할 때 너무 개화에 대한 지식인들의 태도만 서술한 것이 약간 아쉽기도 가능하게 한다’ 는 대중문화의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즉 대중매체의 확산을 통해 문화적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에 대중매체가 일제에 의해 통제되는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는 대중문화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을 발견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가 시작되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중문화의 본질은 비극적이며 외래 의존적이며 무저항적이며 감각적이며 퇴폐적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말하는 한국 현대성에 내밀한 정체는 바로 ‘식민지 현대’이다. 현대로 막 진입하려는 언저리에서 기다릴 틈도 없이 개화·개량·계몽이란 이름으로 서구의 현대가 개입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현대는 발전되지 못한 상태로 전제되어 식민의 당위성 설득에 사용된 진보된 문화에 대한 폭력적인 이식을 수용하도록 강요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대중문화에 대한 특징, 즉 획일화되고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로 인해 일반 대중을 우민화 시켜 탈정치화를 통해 일제의 통치에 유리하게끔 하게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반 대중은 클래식과 같은 어렵고 심오한 그런 문화보다는 쉽고 재밌는 저급문화들을 더 선호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과연 영화를 제외한 라이도, 축음기, 스포츠 등이 인텔리, 부르주아 계층 이외의 계급에서 즐길만한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아마도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비롯한 여러 계층에서는 그것을 즐길 수 없기에 1920~30년대에 대중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 영화가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새로운 문화의 보급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때에 따라서는 다소 파격적인 인식을 보급하게 된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 이 시기만큼 여성이 사회의 전면에 드러나고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억압과 미몽에서 벗어나려는 현대화의 역정에서 여성의 변화는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교육을 통해 여성의 지위는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고등교육을 받은 신식 여성의 등장과 함께 여성 해방 문제가 대두되며 흔히 ‘신여성’이라고 불의해 만들어진 선택이었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기생이나 다방 마담, 바의 여자들이 과연 신식 교육을 받아서 당당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이전부터도 일반 여성들보다 자유로운 활동을 했었다. 저자는 신여성 열풍의 주체 중 하나로 기생을 꼽고 있다. 기생들은 새로운 사고와 사상을 비교적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살롱문화의 적극적인 향수자로서 그들은 새로운 현대적인 삶의 본질에 근접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시대의 기생들은 현재의 술집의 종업원과는 달리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범인들보다는 높은 수준에 속해 있으면서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자주 접하기 때문에 거부감이 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구식 여자들과는 달리 얽매이는 것이 덜 했기 때문에 보다 개방적인 사고를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사람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닌 인간적인 척도로는 인식하거나 감지하지 못할 거대한 공간, 그렇게 이루어진 공간을 우리는 '도시‘라고 부른다. 현대성의 본성을 꼽아 도시성이라고 둘러말해도 옳을 만큼 도시는 현대의 상징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도시적 집중은 삶의 구조를 뒤바꾸고 도시적 인간의 탄생을 낳았다. 처음 도시는 문명의 상징이었으며 진보와 문화의 결정체였다. 도시화는 새로운 문물의 도입이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며 이런 도시화는 당대 지식인들에게는 ‘문명화’의 척도로 비쳤다. 도시는 현대화의 표상으로서의 모습을 띠어갔지만 그러나 그것은 파행적인 식민자본주의화의 모습이었다. 서울은 쪼개지고 갈라져 그 자체로 식민도시의 구조를 형성해갔다.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현대는 더 가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도시화는 이른바 도시적 감수성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감성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도시적 인간, 도시적 지식인이 생겨나고 그들은 이제 도시를 하나의 비평과 서술의 대상으로 삼아 도시적 삶의 양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도시가 발생할 당시의 사람들이 느끼는 도시와 현재의 사람들이 느끼는 도시의 차이는 무엇일까? 현재 사람들이 느끼는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