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칠판」을 보고나서-‘교사가 지녀야 할 무언가’-한국영화 또는 영어권 나라들의 영화에 익숙해있던 나에게는 제3세계의 나라인 ‘이란’의 영화는 교수님께서 소개해주실 때부터 익숙하지 않게 다가왔다. 영화를 소개해주시면서 영화의 내용이 스무 번을 넘게 보아도 난해하게 다가온다는 교수님의 설명은 나에게 영화를 보기에 앞서서 비장함을 다져주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영화가 던져주는 신선함에 흥미롭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우리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교육’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고, 우리의 교육 모습에 그것을 투영하여 살펴보게 하였다. 또한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역할에 대해 나를 감정이입하여, 내가 ‘교육을 가르치려는 자’라면 혹은 내가 ‘교육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자’라면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이 영화는 칠판을 등에 지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여러 명의 사내들의 무리를 비추어주면서 시작된다. 교육에 관한 영화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던 나로서는 등에 지고 가는 것이 ‘칠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일각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예상한 교육에 관한 영화라면 당연히 ‘교실’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칠판을 지고 가던 사내들은 차차 길에서 헤어지게 되고 갈림길에 선 두 명의 사내가 등장한다. 바로 이들이 이 영화의 맥을 이끌어나가는 인물들이다. 한 명은 산 위에 있는 마을을 향해 떠나고, 나머지 한 명은 산 아래를 따라 난 길을 향해 떠난다. 이들이 길을 떠나는 목적은 모두 동일하다. 바로 교육을 받길 원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아쉽게도 단 한 명의 아이만이 교육 받길 원할 뿐이다. 대부분의 아이 또는 어른들은 그들의 등장에 문을 닫고 흔적을 감추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교육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끊임없이 그들에게 설득을 하며 교육의 필요성을 외치곤 한다. 과연 이 영화를 통하여 감독은 어떠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우리나라는 앞서 말하였듯이 전 세계적으로 교육열이 높은 국가에 속한다. 예전에 비하여 교사의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내에서는 교사라는 직업은 어느 정도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외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내재적으로도 수많은 교사들은 가르침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거나 교육을 통하여 만족감을 느끼고는 한다. 즉 교육에 관한 모든 것을 모든 이들에게 ‘당연시’여겨지는 것들이다. 특히 예비교사가 될 나에게는 더욱더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해보기 이전에 교육은 벌써 주어진 것이었고 내가 걸어갈 길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이 어색한 상황을 통하여 교육이란 왜 필요한 것일까?, 생존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교육이 필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교육의 필요성을 설파하면서 “곱셈, 나눗셈을 배우면 틀리지 않게 셈을 할 수 있고, 글을 배우면 편지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와 같은 교육의 외재적 특성을 말한다. 이황이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을 나누어 위인지학을 따르는 세태를 비판하며 위기지학을 학문의 목적으로 삼아야한다고 했으며, 교육대를 다니며 배운 것들도 외재적 목적보다는 내재적 목적이 추구되어야 내적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으며, 자발적인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배움 속에서 영화에서의 대사는 속물적이었고 그들이 진정한 교사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처럼 비추어졌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그들에게 교육은 사치스러운 것이 당연해보였다. 내가 영화 속의 교사였다 하더라도, 가르치기 위해서는 학습자가 당장 필요로 하는 그러한 세속적인 것들을 충족해주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교육의 의미를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우리의 교육의 모습도 그들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의 그들은 생존의 욕구가 보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기초적인 욕구들을 보장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들의 교육도 결국 지금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라는 외재적인 목적을 위하여 교육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의 외재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교사의 마음속에서의 교육의 목적은 언제나 내재적 목적으로 향해야 한다는 바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을 타인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또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인 학습을 이끌어 내가 위해서, 교사로서 무엇을 지녀야 하고 어떻게 해야 그들이 교육의 목적을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하는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수업 중에 교수님께서는 두 명의 교사의 모습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다. 난 이 말을 들을 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냐하면 국경으로 향하는 무리에 합류한 교사와 물건을 운반하는 아이들을 만난 교사의 모습은 조금은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전자의 교사는 끊임없이 아내와 아들을 평가하였고 그들이 듣거나 말거나 일방적인 교육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나 후자의 교사는 똑같이 교육을 원하는 자를 찾아 떠났지만 그들의 상태를 평가로서 단정 짓거나 아무도 듣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르칠 내용들을 말하고는 다니지 않았다. 영화에서도 두 교사의 교육의 결과는 다르게 그려진다. 후자의 교사의 경우, 유일했던 제자가 영화 종반에 죽고 말지만, 어찌됐든 그는 배움의 기쁨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학습하려는 의지를 가진 학생을 만났다. 그렇지만 전자의 교사는 그렇지 못했다. 이것은 과연 그들이 만난 사람이 달랐기 때문에 우연적으로 발생한 결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의 교사의 경우, 그가 아내와 아들에게 끊임없이 “10점 중에 2점을 주겠어요.”, “나를 따라하면 2점에서 3점을 더 주겠어요.” 등과 같은 말을 하였는데 지속적으로 그런 말을 하자 영화를 보고 있는 나조차도 짜증 아닌 짜증이 났었다. 두 교사의 차이를 극명하게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가 어렵지만, 분명 내가 보기엔 두 교사 간에 차이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이 제자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고의 차이를 빚어내었던 것 같다. 물론 학습자가 준비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겠지만 말이다.
-이종원 교수님-일류로 가는 길 - 대학문국(大學文國)내가 지향하는 통섭흔히들 교육을 일컬어 백년지대계라는 말을 한다. 백년을 내다보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안목을 가르칠 수 있는 그러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교육에서는 장기적인 안목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며 인간 사회 속에서 교육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다. 반면에,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발맞추어 증가하는 여러 지식의 개념들을 교육의 장에 반영하자는 요구도 있다. 이에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2007년 개정이후로 ‘수시 개정’이라는 방안을 선택하였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요구하는 지식과 기능들을 교육과정 속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개편보다는 수시로 개정해나가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백 년을 관통하는 지식을 가르칠 필요성이 요구되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변화하는 삶 속에서의 요구되는 지식들을 학생들이 배울 필요성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요구들을 적절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남겨두고, 무엇을 새로 추가하여 가르쳐야할지 명확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한 답이 바로 이 동영상에서 최재천 교수가 말하고자 한 ‘통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통섭이란 지식의 통합이라고도 칭하는데, 자연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이론이라 한다. 동영상에서 최재천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에서 학생들의 특성을 더욱 살리고자 하는 취지하에서 인문학과와 자연과학과, 즉 소위 말하는 문과와 이과로 나누고 있는 것이 오히려 학생들의 배움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개인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기본적인 바탕이 마련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이런 기본 바탕을 무시한 채 이루어지는 ‘절름발이’ 현상을 자아내고 있다. 창의성은 결코 우연성으로만 이루어지는 결과물들이 아니다. 근본 없이 어느 순간 반짝하며 샘솟는 사고가 아니라, 깊이 내재되어있는 학문들을 바탕으로 새롭고 획기적인 사고를 일컬어 창의력이라 표현한다. 이것은 비단 창의력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전문 분야에 전문성을 부각하기 위해서는 나의 전공뿐만 아니라 그 바탕에 기본 학문들이 있을 때,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전 세계 사람들이 유전자 발견의 공을 크릭이 아닌 왓슨에게 돌린 까닭도 세 명의 과학자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자연 과학과는 다르게 왓슨이 남들과 다른 인문학적인 소양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최재천의 교수의 예는 더욱 와 닿는 예이다.시대가 흐르면서, 한 분야를 파고드는 것마저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너무나 방대한 지식의 양도 문제지만, 다른 시야에서 보지 못하는 외골수적인 태도는 그 학문이 지니는 의미를 명백하게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여기에 최재천 교수는 깊게 파기위해서는 넓게 파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넓게 파기 위해서는 나 혼자 파는 것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럿이서 파야한다고 한다. 즉 학문 간의 담을 낮추고 소통의 길을 열어 자유롭게 서로 다른 학문을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요즘 대학에서도 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간학문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간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개인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안목을 제시하고, 또 개인의 단점도 보완할 수 있는 상호작용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여러 전문가들을 통해 학문간의 통합, 즉 통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학문 간에 통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바탕으로 한 기본 학문이 탄탄하게 다져져야 하며, 나의 분야를 비롯하여 다른 분야에 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인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또한, 타학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다른 학문들도 포함할 줄 아는 관대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장기적인 학습 태도가 몸에 배어있어야 한다. 다학문적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단기적 목적을 지닌 학습으로는 역부족하다. 흔히들 시험에 성적을 잘 받기 위하여, 혹은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와 같은 단기간적이고 근시안적인 목적을 위한 학습은 그 목적이 충족되었을 때 지속성의 필요성이 사라져 학습이 중단되어 여러 학문의 지식을 갖추는 데 장애 요소로 작용한다. 정의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들은 전 생애에 걸쳐서 학습할 수 있는 자세를 지닐 수 있도록 하며, 그 과정 또한 신명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이런 초석을 다져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초등학교 현장일 것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것이고 낯선 것이다. 통섭이라는 단어조차 우리에게 생소한 것은 통섭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까닭이다. 또, 그 과정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이다. 통섭을 교육현장에서부터 그것도 초등학교 현장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지식의 통합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게 나아가야 하는 길로 제시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초등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질 통섭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이미 저학년을 위하여 현장에서는 통합교과가 개설되어 행해지고 있다. 통합교과는 우리나라 교육과정의 역사에 있어서 5차부터 등장되었는데, 통합교과의 등장 배경에는 미분화된 아동들의 낮은 인지 수준과 보다 지속적인 학습 흥미 유발을 고려함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들의 성장과 동시에 학년이 올라가면서, 교과 내의 통합적인 측면들이 줄어들다가 3학년에 접어들어서는 통합교과가 사라지고 분과된 과목들을 배우기 시작한다. 현재 우리의 교육과정에 있어서 통합교과는 마치 학생들에게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에 앞서서 ‘Warming up"을 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된 도구적인 교과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통합 교과를 통하여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통섭을 경험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마련해줄 수 있다. 분과되어 있는 과목 속에서 지식을 전수받은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학문 간의 경계를 구분 짓게 될 것이다. 통섭은 이러한 것들을 지양한다. 앞서 말하였듯 학문 간의 벽을 낮게 하여 교류가 오갈 수 있고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어야 한다. 초등학교 현장에서 이러한 학문 간의 만남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최초의 기회가 통합교과를 통해 가능해진다.
아동문학 감상문-「책 먹는 여우」를 읽고-▶작품 목록 및 해설-작품 서지 사항-작가프란치스카 비어만연도2009.10.11서명책 먹는 여우(Herr Fuchs mag Bucher)출판사주니어김영사평점★★★★☆8.75참고3학년 필독 도서, 창작동화-줄거리-이 책은 한 책벌레 여우 아저씨에 관한 내용이다. 여우 아저씨는 책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한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책을 먹어버리기까지 할 정도이다. 그러나 여우 아저씨는 책을 그냥 먹지 않고 꼭 소금 한 줌, 후추를 조금 뿌려 간을 해 먹어야하는 버릇이 있다. 식성이 좋은 여우 아저씨는 책을 사다가 결국 거의 모든 물건들을 전당포에 맡겨버려 더 이상 책을 살 여유가 없게 되었다.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여우 아저씨는 국립중앙도서관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점점 책이 도난당하고, 침에 젖어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결국 여우 아저씨는 덜미를 잡혀버립니다. 도서관에서 출입금지를 당하였고 그 후 읽을 것도 먹을 것도 구할 데가 없어진 여우 아저씨는 시름시름 앓다가 길모퉁이 서점에 가서 책을 훔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여우 아저씨는 책을 훔쳐왔지만 경찰에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거기에서도 배가 너무 고픈 여우 아저씨는 교도관을 꾀어 종이와 연필을 얻어 글을 쓰게 됩니다. 책이 완성되었고 여우 아저씨는 먹기 전에 교도관에게 먼저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교도관은 여우 아저씨가 쓴 글을 읽고 너무나 재미가 있어서 이 책을 출판하리라 마음을 먹고 따로 복사를 해둔 뒤 여우 아저씨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교도관은 교도관 일을 그만두고 출판사를 차려 여우 아저씨가 쓴 글을 출판하였고 그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우 아저씨는 업적을 인정받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부자가 되었습니다.-작가소개 : 프란치스카 비어만-프란치스카 비어만 독일 빌레펠트 출생의 작가는 1992년 독일 함부르크 조형예술학교에서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션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진, 애니메이션, 음악, 음향, 그래픽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를 가진 12명의 젊은 예술가들과 공동 작업을 하며 영역을 넘나드는 즐거운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자유롭고 널린 사고로 쓴 그의 책은 많은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다.그녀가 출간한 ‘책 먹는 여우’는 최근 한국에서 100쇄를 돌파했다. 지금까지 35만 명 어린이 독자들이 이 책을 만났다. 『책 먹는 여우』에서는 전반적으로 유쾌한 문장과 희극적인 그림 속에 가벼운 풍자와 해학이 반짝이는 작품이다.대표작인 『책 먹는 여우』에서 보이듯 비어만 작품의 특징은 풍부한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글과 함께 자유로운 색 쓰기와 화면 구성, 그림과 글의 절묘한 배합으로 확고한 작가만의 개성을 나타낸다는 것에 있다. 지은 책으로 『두 여자 친구가 속을 터놓네.』, 『행운의 책』, 『꼬마 돼지 도라는 발을 동동』, 『내가 정말 바라는 건요』, 『게으른 고양이의 결심』등이 있다.-‘네이버 책‘ 발췌-▶작품별 감상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개성 넘치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일수록 책의 내용보다는 그림이나 디자인을 보고 먼저 손이 가게 되어있는데 「책 먹는 여우」는 이러한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여우 아저씨의 특이한 책읽기 버릇으로 인해 빚어지는 내용에 관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책들이 재미있기에 여우 아저씨가 저렇게 행동하는 걸까?’하는 생각을 하게끔 해줍니다. 요새 아이들은 컴퓨터나 텔레비전과 같은 시각적인 미디어들에 쉽게 노출되는 까닭에 주변에서 아이들을 관리해주지 않는 이상 아이들이 책을 생활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책’을 소재로 한 동화를 이용한다면 아이들의 독서 생활에 보다 유용하게 활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우 아저씨는 자기 물건들을 전당포에 맡기고 심지어 도둑질까지 하게 된 이유는 오직 책을 읽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은 여기에서 기이한 여우 아저씨의 행동을 보고 책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바꿔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평소에 책을 좋아하던 아이라면 여우 아저씨의 행동에 공감이 가면서 더욱 독서를 촉진할 수 있게 되고, 또는 책을 멀리하던 아이라면 ‘나는 책이 싫은데 여우 아저씨는 왜 이렇게 책을 좋아하지‘라는 의문과 함께 내가 책에 대해 진정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게 됩니다. 즉 아이들이 「책 먹는 여우」를 읽음으로서 독서를 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이 책을 계기로 책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가져 꾸준히 독서를 하게 할 수 있는 이중의 효과를 지니고 있는 책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저 같은 경우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영어 단어를 암기 할 때 사전 한 페이지를 다 외우면 한 페이지를 찢어먹어야 완전히 자기 것이 된다는 속설이 기억났습니다. 실제로 찢어 먹어본 경험은 없지만 겨우 외운 영어 단어를 잊어버리기 싫은 마음은 동일하기에 이유야 다르지만 여우 아저씨가 책을 한 권 다 읽고 나서 먹어버리는 식성이 한 편으로는 공감이 가기도 했습니다.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책의 ‘유용성’에 관해서도 강조를 할 수 있습니다.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 아저씨는 평소 꾸준한 독서를 하였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여 감옥에 갔을지라도 9백 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양의 그리고 베스트셀러가 될 만큼 아주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글 솜씨덕분에 여우 아저씨는 감옥에서도 나올 수 있었고 그리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부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독서를 한다면 언젠가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독서의 필요성과 유용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가 생활 속에서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강조할 수 있습니다.「책 먹는 여우」를 통해서 또한 독서의 지도방법에 관해서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우선 여우 아저씨는 독서 후에 책을 먹을 때 그냥 먹지 않고 꼭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먹고는 합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서도 다음과 같은 글을 싫어놓았습니다. 이러한 문구를 통하여 아이들은 소금과 후추가 무엇을 뜻하는지 여우 아저씨는 왜 책을 먹을 때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먹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것입니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옮긴이는 ‘마음의 양식으로 책을 먹을 땐 즉 책을 읽을 때는 자기 나름의 양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는 대로 그냥 받아먹지 말고 알맞게 간을 맞추어 먹으라는 뜻입니다. 한편 아무리 읽어도 영 도움이 안 되는 책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우 선생처럼 털의 윤기도 빠지고 소화도 영 시원찮아 화장실에서 살아야 하니까요’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소금과 후추는 개인의 주체적인 감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소위 넘쳐나는 정보의 사회 속에서는 개인의 정보의 취사선택능력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독서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책들 속에서 어떤 책을 읽을지 선택하여야 하고, 그리고 책을 읽었을 지라도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를 통한 주체적 감상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작가는 이러한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소금과 후추라는 미각적인 감각을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강아지똥」을 읽고-2학년 문학 수업을 들었을 때 조를 이루어서 국내 작가 한 명씩 선정해 조사하여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조에서는 이청준님을 택하였지만 다른 조에서 「강아지똥」의 저자이신 권정생님에 대하여 조사·발표하였다. 그 때 발표를 보면서 부끄럽지만 권정생님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되었고 왜 우리 동네 아동문학을 파는 서점 이름이 ‘강아지똥’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국어교육 시간에 교수님께서 다시 「강아지똥」에 관한 과제를 내주셨고 국내 아동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 하니 덥석 책까지 사서 읽어보게 되었다. 막상 사고 나니 정말 ‘어린이들이 읽을 법한’ 느낌이 나는 책이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 얇디얇은 책의 참신함과 문학성을 느끼기 위해 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 책을 읽어보기 위해 한 장 한 장 찬찬히 읽어보았다.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라는 시였다. 이 시에서도 연탄이라는 사회에서 쓸모없고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를 소재로 삼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따뜻했던 존재임을 밝히며 연탄재의 가치와 소중함을 역설하고 있다. 「강아지똥」에서도 마찬가지로 날아가던 참새에게도, 지나가는 병아리 떼에게도 외면당하던 강아지 똥은 결국에는 민들레가 잘 자라기 위해 거름이 되어주면서 하찮게 여겨지던 강아지 똥마저도 쓸모 있음을 말하고 있다.이 책 맨 뒷장에는 아동문학 평론가인 이재복씨가 ‘이 세상 가장 낮은 곳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강아지똥」에 관한 그의 평을 실어놓은 것이 있다. 아이들은 책을 통하여 언어를 배울 뿐만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정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심미감을 발달시킨다. 그 뿐만 아니라 독서를 통해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고의 발달을 키우게 된다. 이때까지 왕자나 공주 이야기와 같은 기존의 문학들은 어딘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재복씨의 글을 보며 권정생님의 「강아지똥」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아름다움을 주제로 삼지 않더라도 강아지똥과 같은 소소함 안에서도 따스함을 이끌어 낼 수 있고 멋을 찾아낼 수 있는 데에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은 「강아지똥」을 읽으며 특별히 멋을 내지 않더라도 멋을 부릴 수 있음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이재복씨가 말했던 것처럼 한국 정서에 맞는 그러한 향토적 정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강아지 똥이라는 낯선 존재에 관해서도 새로이 인식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이다.또한 「강아지똥」을 읽으며 아동문학에서 새롭게 주목한 것이 있는데 바로 일러스트, 삽화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글을 통하여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고를 신장하도록 유도하고 강조하지만, 아동기 때에는 삽화를 통하여 텍스트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여 아이들이 글을 읽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글귀를 통하여 공감을 유도하기 보다는 삽화를 통하여 아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가 더욱 쉬울 것이다. 성인인 나만 보더라도 [“뭐야! 내가 똥이라고? 더럽다고?” 강아지 똥은 화도 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어요.] 라는 구절을 읽는 것보다 보라색 배경에 강아지 똥 주변으로 그물그물한 선이 그려져 있고 강아지 똥이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손으로 닦고 있는 삽화를 보는 것이 와 닿고 삽화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삽화의 배경색을 통하여 글의 정서와 분위기가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아이들의 독서 활동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흙덩이가 자신의 과거 얘기를 하며 곡식도 가꾸고 채소도 키웠다는 부분에서는 화사한 분홍색이 배경색이었지만 가뭄이 들어 흙덩이가 아기 고추를 살리지 못하고 죽게 해 버렸다는 얘기를 하는 부분에서는 검은색으로 표현하여 바로 앞 뒷장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흙덩이의 얘기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표지를 바로 넘기면 검은색 바탕에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으로 조그마한 점들이 무질서하게 그려져 있는데 처음에는 왜 이렇게 표현을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책 후반부에 보니 강아지 똥이 비를 맞아 자디잘게 부서져 민들레 뿌리로 흡수되는 장면을 표지 바로 다음 장면에서와 같이 표현을 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아동문학에서의 삽화는 단순히 아이들이 심심하지 않도록 여백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서 어느 것 하나 까닭 없이 표현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