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명: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제6차 리포트학 과학 번성 명담당교수현재원 교수님제출일2010. 11. 29패러디 작품에 대한 이해1. 패러디란 무엇인가.패러디라는 기법은 예술의 한 표현방법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표현기법으로서 작가 스스로가 자기만의 생각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기 어려운 시대상황에서(폭압적인 시대상황) 우회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기법중 하나로서 다양한 예술작품들에서 사용되는 방법이다. 영화를 비롯하여, 음악이나, 미술작품 등 이 기법이 사용되는 곳들은 다양한데 오늘은 미술기법에서 사용되는 패러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2. 작품에 대한 분석패러디는 원작에 대한 도전이다. 원작에 대한 명성에 기대어 원작을 존중하고 원작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의도에서 사용되기도 한다.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을 패러디한 사진 속의 두 작품은 이러한 패러디 정신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모나리자가 그려진 시대는 예술작품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르네상스 시대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을 패러디함으로써 작가는 무엇을 얻으려고 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우선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는 현대에서도 그 해석에 대해 분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모나리자’는 르네상스 최정점의 작품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표현과 내용면에서 완벽을 지향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소 또한 해부학, 골상학에 대한 정확한 지식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현이 되었으며 다빈치가 이를 제작할 때 모델의 웃음이 자연스럽도록 악사와 광대를 동원해서 웃을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르네상스는 중세를 벗어나 인간적인 자각, 인간성의 회복이 뚜렷하게 드러난 시기였던 만큼 모나리자의 미소 또한 기존의 형상을 벗어나 가장 인간적으로, 또 이상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치밀하게 계산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려고 했었고 모델의 덕이 잘 드러나도록 한 르네상스의 이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가장 인간적이고 이상적으로 그려져야 했을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계산적인 과정을 거치는 오류를 범했다. 아마도 이를 패러디한 마르쉘 뒤샹의 ‘L.H.O.O.Q’는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유화를 사용한 원작에 비교하여 가장 원초적인 미술재료인 연필을 사용한 이유나, 프랑스 속어로 '엉덩이가 뜨거워' 란 의미의 제목도 이러한 다빈치의 르네상스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비판하는 듯하다.다음으로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살펴봄에 앞서 그림이 그려지게 된 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작품의 배경이 왕정복고에 반대하여 봉기한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 끝에 결국 부르봉왕가를 무너뜨리고 루이필리프를 국왕으로 맞이한 7월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를 찾아 기득권층과 싸워나가면서 자유를 찾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한 후 로버트 콜스콧의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라는 작품을 살펴보면, 작가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여신의 주위에 있는 수많은 흑인들을 보면 작가는 자유를 원하고 같이 싸웠던 흑인들의 현재의 지위와 사회적 홀대를 비판하는 듯하다.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는 백인들만이 기득권층과 싸운 것은 아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그랬고, 프랑스의 대혁명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를 획득한 후에 흑인들에 대한 처우는 그 전의 기득권층하에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작가는 아마도 이러한 현실을 혁명을 가장 잘 표현한 들라크루아 작품을 패러디함으로써 극대화시키려고 한 듯하다.
과목명: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제5차 리포트학 과학 번성 명담당교수현재원 교수님제출일2010. 11. 291. 서론2. 『안토니아』에 나타난 캐릭터유형 분석1)『안토니아』에 나타난 여성인물의 유형(1)안토니아-대표적인 여성상(2)다니엘-감성적인 여성상(3)테레사-이성적인 여성상2) 『안토니아』에 나타난 남성인물의 유형(1) 크룩핑거&바스-여성들의 조력자(2) 피터-가부장제 또는 가부장제하의 폭력3) 그 밖의 인물들3. 결어지극히 페미니스트적인 그러나 휴머니즘적인 영화 『안토니아』1. 서론페미니즘의 사전적 의미는 여성억압의 원인과 상태를 기술하고 여성해방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운동이나 그 이론, 또는 여성 중심적, 여성 지향적인 의식 혹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여성주의 담론을 의미한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항하는 여주인공 안토니아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감독 또한 여성이다.영화는 주인공 안토니아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그래 죽을 때가 됐어”라는 안토니아의 독백에서 죽음조차 그녀가 선택하는, 즉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은 이 영화가 앞으로 어떠한 전개과정을 보여줄지를 유추해볼 수 있게 만든다. 이 영화는 안토니아를 중심으로 4대의 여성 가계(Line)가 남성들과의 투쟁과 협력을 통해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그녀가 이끄는 여성 주도적인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로서, 주인공 안토니아와 그녀의 딸인 다니엘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해보고자 한다.2. 『안토니아』에 나타난 캐릭터유형 분석이 영화에는 다수의 여자 주인공(heroine)들과 그녀들과 관련이 있는 다수의 남자조연들이 등장한다. 보통의 영화에서는 남자가 주인공이고(hero) 그를 돕는 여성들이 조연임에 반해 이 영화는 여자가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들로 등장하고, 주위에서 여성들을 돕거나 또는 적대적인 다수의 남자조연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완벽한 남성들은 한명도 등장하지 않으며, 여성들과 비교했을 때 결함이 있는 캐릭터들로 등장하여 안토니아와 그녀의 딸들의 주체적이고 강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1) 『안토니아』에 나타난 여성인물의 유형(1) 안토니아2차 세계대전이 끝난 네덜란드의 어느 마을, 안토니아는 딸 다니엘과 함께 어머니의 임종을 맞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안토니아의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창녀들과 바람을 폈던 남편을 원망하며, 노망이 든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마도 안토니아는 어린시절 남편 때문에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연유로 주체적이며 강한 여성으로 거듭나게 되었을 것이다.이러한 연유로 안토니아는 테레사가 피터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직접 피터를 응징할 정도로 담대하며, 어린아이들에게조차 놀림받는 "미친 입술"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들을 포용할 줄 알며, 자신의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그녀의 자손들 역시, 그녀를 닮아 자신의 삶에 당당하다. 각자 한 가지씩의 재능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여성을 억압하는 근본원인이 되는 결혼을 부정하는 것도 안토니아와 똑같다. 그녀를 중심으로 안토니아‘s 라인이 형성되어가는 모습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보여주는 만찬장면은 이러한 감독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2) 다니엘안토니아의 주체적인 삶의 가능성은 딸과 손녀에게서 심화된다. 특히 다니엘은 주인공인 안토니아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비추어지는데, 남성을 대표하는 캐릭터인 피터와 대립하는 모습(대립할 뿐만 아니라 그를 무기로 공격하여 상처를 입히고 마을에서 쫒아내는 역할을 하는 점)이나, 딸인 테레사의 선생님인 라라앤더슨과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동성애를 하는 모습은 그러한 면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다니엘이란 캐릭터의 가장 큰 특징은 그녀가 생각하거나 바라는 것들이 환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그녀가 감성적으로 뛰어난 캐릭터이고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할머니인 일레곤다의 장례식에서 그녀가 노랫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환상이 보이는 장면이나(일레곤다는 죽어서야 비로소 남편에게서 해방되었음을 암시), 다니엘의 딸인 테레사의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서 선생님인 라라앤더슨이 “비너스의 탄생”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것이 그 예이다. 그 밖에도 여러 장면들에서 다니엘은 그녀의 어머니인 안토니아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페미니즘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하지만 그러한 그녀도 여성들의 가장 큰 권리이자 의무인 출산을 원한다는 점에서 그녀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대변하지만, 그녀 또한 어머니라는 사회적 구속에서는 해방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아이를 갖기 위한 수단으로서 남성(씨제공자)을 찾아 도시로 나간다는 설정과 성행위 후 도망치듯이 빠져나오는 에피소드로서 관객들에게 이러한 생각은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만들며, 이러한 감독의 의도는 다니엘이 사실은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였다는 사실로서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3) 테레사다니엘의 딸인 테레사는 감성보다 이성이 발달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3살이 채 되기도 전에 수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에 재능을 보이게 되며, 안토니아의 친구인 크룩핑거에게 학문적 가르침을 받게 된다. 테레사는 격식과 틀 안에서 사고할 것을 강조하는 교수를 조롱할 정도로 지적으로 똑똑하며 남성들과 자유로운 성관계를 맺으면서 남성 세계를 조롱할 정도로 성적으로도 매력적이다. 다만 이런 그녀도 남성을 대표하는 피터에게 강간을 당함으로써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지만, 그러한 한계조차도 할머니인 안토니아가 응징을 하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만들면서 안토니아의 강한 여성의 모습을 강조하는 하나의 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그녀 또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게되지만 결혼은 하지 않으려고 하며, 출산 후 아이를 대하는 그녀의 반응은 무덤덤하며 심지어 냉담하기까지 하다. 여성의 근원적 ‘모성애’라는 기존 관심을 깨뜨리는 이러한 그녀의 성격 또한 감독의 또다른 의도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2) 『안토니아』에 나타난 남성인물의 유형(1)크룩핑거&바스크룩핑거는 테레사의 스승이다. 테레사가 여성의 지적 측면을 강조하는 캐릭터로서 그려지는데, 크룩핑거라는 인물이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바스라는 캐릭터는 안토니아를 항상 도와주는 캐릭터로서 크룩핑거와 더불어 여성을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둘은 가부장사회에서도 모든 남성이 여성에 대하여 우월의식이나 지배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협력적인 관계로서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2)피터피터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바는 한마디로 얘기하면 가부장이다. 작품의 배경이 농촌인 것과 농촌이란 사회가 물리적인 힘에 의존하는 사회이며 이런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물리적인 힘을 갖추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점은(덩치도 남들에 비해서 크며, “순종 야생마”라는 표현처럼 거친 성격으로 그려짐) 그가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상징하며, 이러한 폭력성과 비윤리성은 자신의 친동생인 디디와 안토니아의 손녀인 테레사를 강간하는 모습으로 극대화된다.
과목명: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제7차 리포트학 과학 번성 명담당교수제출일예술로 승화되었지만 서커스의 본질을 잃어버린 ‘태양의 서커스’1. ‘태양의 서커스’의 유래‘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서크 듀 솔레이)는 캐나다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서커스이다. 서크 듀 솔레이라는 원명칭은 불어이고, 영어로 번역하면 Circus of the Sun, 즉 ‘태양의 서커스’라는 뜻이다. 불어로 된 이름을 갖게 된 연유는 ‘태양의 서커스’가 1982년 캐나다의 퀘벡 주 근처의 작은 예술인 마을 베이생뽈(Baie-Saint-Paul)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2. 단순한 서커스가 아닌 종합예술로서의 ‘태양의 서커스’‘태양의 서커스’를 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그 공연방식과 구조였다. 보통 서커스라고 하면 사방이 막힌 돔 형태의 천막에서 미리 설치한 여러 가지 기구에 서커스 단원들이 공연을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태양의 서커스’는 여느 서커스와 달리 탁 트인 공간에서 공연을 한다. 특히나 메인스테이지와 백 스테이지로 나뉘어지는 독특한 구조는 관객들로 하여금 서커스와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서커스를 하는 동안 흥겨운 음악이나 장중한 오케스트라의 향연을 들려줌으로써 관객들이 더욱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시각적인 효과에 청각적인 효과를 곁들임으로써 관객들에게 좀더 버라이어티한 공연을 선사한 것이다. 또한 공연단은 무대 뒤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 사이에서 등장함으로써 무대와 관객들간의 관계를 좀 더 가깝게 만들고 이러한 점에서 마치 브라질의 ‘삼바’축제처럼 관람객들로 하여금 실제로 ‘태양의 서커스’라는 축제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을 낳게 만드는 것 같았다. ‘태양의 서커스’에서 관객은 다른 서커스처럼 단순히 관람하고 박수치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고 자신들의 환상적인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종합예술인 것 같았다. ‘태양의 서커스’ 안에는 서커스의 구경꾼들이 따로 존재했고 나름대로의 테마를 가지고 예술성을 띄면서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태양의 서커스’는 세계적인 서커스 공연답게 각 테마에 등장하는 내용들도 다양했다. 중국의 사자탈춤과 태극권이 등장하는가 하면, 남미쪽의 춤에서 유래한 무술인 ‘카포에라’ 공연과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인 킬트(Kilt)를 입고 백파이프를 부는 공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클럽의 디제이와 같은 모습의 흑인이 믹싱(mixing)을 하는 모습과 동양의 전통악기인 북을 치는 모습에서 동서양의 조화를 엿볼 수도 있었다.다섯 번째 무대에서는 비로소 전통 서커스로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 남성 공연자가 공중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잡고 서커스를 보여주는데 남자의 모습을 벽에 비추어 그림자를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시각효과를 극대화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이와 동시에 메인무대에서는 투명한 상자 안에 갇혀있는 듯한 여자의 공연이 행해지는데 서커스라고 보기보단 마치 행위예술에 가까웠다. 이 두가지의 상반된 형태의 서커스들은 이질적인 느낌보다는 묘하게 어울리면서 관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다.전반적으로 공연은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과 뛰어난 안무, 현란한 무대장치와 조명들, 그리고 인간의 몸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몸짓, 전통적인 서커스에 예술적인 요소들을 결합시킨 새로운 느낌의 퍼포먼스였다. 즉 기존의 서커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엔 음악, 미술, 연극, 무용, 체조, 마술 등 정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종합예술”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다른 공연과는 한 차원 높은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요인들이었고 그러한 점이 ‘태양의 서커스’를 세계적인 서커스로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워낭소리 감상문워낭이란 일소를 부릴 때 사용하는 코뚜레에 연결하여 소리가 나는 종의 일종이다. 그들에게 있어 워낭은 일소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아버지를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그들이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다. 영화의 마지막부분에서 소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할아버지는 코뚜레와 함께 워낭을 풀어주는데 이는 할아버지와의 관계의 단절과 이 세상과의 단절, 즉 죽음을 암시한다.그리고 영화에서 할아버지께서 일터로 나가실 때 항상 리어카에 달고 노랫소리를 들려주던 낡은 라디오, 일소와 함께 한평생을 할아버지와 함께한 또 하나의 동반자이자 할아버지의 유일한 사회와의 연결고리이다. 라디오에서는 태풍이나 장마에 관한 뉴스를 비롯하여 할아버지 내외가 농사를 지으실 때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흥겨운 노랫소리도 나온다. 그랬던 라디오도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낡고 오래되어 결국 고장이 나고 이 모습을 보시던 할머니는 “라디오도 고물, 영감님도 고물, 다 됐어. 다 됐네”라는 씁쓸한 웃음과 함께 눈물을 훔치시는데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곧 떠나갈지도 모르는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이 영화에서 할아버지는 봉화송이 축제 로고가 그려져 있는 조끼를 입고 일을 나가신다. 그렇다면 그 조끼에 그려져 있는 봉화송이 축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축제는 즐겁다. 모두가 즐겁고 서로의 것을 나누는 마당이다. 일한 것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그 동안의 노고를 보상받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축제에 참여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나눌 만큼 여유로운 삶을 살지 못했고, 일한 후에 즐거움을 찾을 만큼 여유롭지 않다.결국 영화에서 봉화송이 축제의 의미와 역할은 이런 할아버지의 삶을 좀 더 부각시키는 장치이다. 더욱 치열하고 고달픈 할아버지의 삶과 대비되는 ‘축제’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좀 더 할아버지의 삶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서 늙은소는 자꾸 일터에서 힘들어한다. 늙어서 힘을 내지 못하는 소를 대신해 이미 암소를 샀기에 팔아버리라는 할머니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할아버지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는 늙은소를 우시장에 데려가게 된다. 하지만 500만원이 아니면 안팔겠다는 할아버지는 결국 소를 팔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 소를 팔지 않고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늙은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닌 가족이상의 의미였기에 팔수 없었고, 함께 나란히 겨울을 나기위한 땔감을 지고 다리를 절면서 돌아오는 장면에서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서 뒷바라지 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생각나면서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결국 겨울용 땔감을 다 나르고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이 늙은소는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고, 할아버지께서 코뚜레와 워낭을 풀어주시자 곧 죽게 된다. 마지막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한 선물을 주고서야 늙은소는 그 일생의 짊을 풀었다는 듯이 조용히 눈을 감는데, 늙은소는 할아버지의 인생의 동반자이자 또 다른 분신이 아닌가 싶다. 늙은소의 무덤 옆에서 워낭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서 자식을 잃은 것과 같은 할아버지의 아쉬움과 슬픔을 느낄 수 있었고 이 영화의 제목인 워낭소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픈열대’ 감상문2003313609 법학과 정비용아파트에서 무직으로 혼자사는 주인공에게는 신문구독이 유일한 낙이다. 항상 우유와 신문으로 하루를 시작하지만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신문이 사라지게 된다.그에게 있어서 신문이란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기에(주인공에게는 아마 TV가 없는듯하다.) 신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이런 단절로 인한 심각한 불안증상을 보이게 된다. 밥을 먹을 때는 물론이고 화장실에서도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매스미디어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는 현대인을 우회적으로 풍자하는 것이고, 집착의 정도를 넘어선 일종의 질병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문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주인공을 계단에서 매섭게 노려보는 여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이런 세태를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주인공은 신문을 찾지 못하자 신문배달부에게 전화를 해서 당장 신문을 다시 가져다주지 않으면 신문을 끊어버리겠다고 큰소리치다가도 이내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인다. 신문구독의 중단은 자신에게 더 큰 손해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엄포와는 다르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나중에는 비굴해지는 모습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저절로 쓴웃음을 짖게 만든다.신문을 잃어버린 이틀째부터 주인공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항상 반바지차림에 웃옷을 입지 않는다는 설정으로부터 주인공은 그동안 집안에만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밖을 나가지 않고 폐쇄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신문이라는 유일한 사회와의 통로의 단절(즉 분실)로 인해 다시 사회속으로 편입된다는 점은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그리고 이렇게 잃어버린 신문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문을 훔쳐간 것으로 의심되는 아파트 주민을 발견하게 되는데 주인공은 신문을 도둑맞음으로써 비로소 주변과의 대화를 시작한다는 점도 재미있다. 그는 매일 신문배달부에게 신문의 내용을 듣기도 하고 중년 남자가 보고 있던 신문이 자신의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하면서 주변과의 의사소통을 조금씩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감독의 또다른 의도를 엿볼 수 있는데, 정보를 받아들이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주변과의 의사소통의 단절보다 더 큰 부정적 영향, 즉 정보수집통로가 단일화되었을 경우의 문제점을 이러한 매스미디어가 잘못되었을 경우 사람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줄 수 있는지로 보여주고 있다.실제로 주인공은 신문의 내용가운데 연재소설의 여주인공인 윤아의 생활에 관심이 있고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를 원하지만, 사람들은 총각장관과 여배우의 스캔들에만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 정작 자신이 원하는 소설속 여주인공의 정보는 찾기가 힘들게 된다. 현실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이런 문제점들(정부의 정책에 대한 홍보용 책자로 전락해버린 언론, 사람들의 관심사를 본질과 다른방향(가쉽거리)으로 돌려버릴 수 있음.)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 감독의 선견지명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으며, 청년실업의 문제를 블랙코메디로 승화한 최신영화 ‘방가방가’로 흥행을 달리고 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범인을 찾으려는 여러 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게되자 주인공은 신문을 찾는 것 대신에 이런 의존증을 치료받기 위해 의사를 찾게 되나 그조차 담배 중독에 빠져있다는 설정은 언론을 올바르게 계도해야 할 정부나 사회단체의 무능함을 비꼬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조차 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