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tfood업계 치열한 경쟁 속 국내 1등 기업 롯데리아를 쫓는 다국적기업 맥도날드의 무서운 추격? 기업 선정 배경 및 동기외식 시장이 계속 커져가며 우리의 입맛이 점점 서구화 되고 있다. 따라서 서구식 음식문화인 패스트푸드 시장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세계화시대 서구외식업체와 우리나라 외식업체는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국내에 본격적으로 외식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시기는 88년 올림픽 경기를 치르면서부터 시작됐다. 그전 79년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갖춘 롯데리아가 창립되었지만 80년대 외국의 유명 외식업체(버거킹(82년), 웬디스(84년),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84년), 맥도날드(88년), 서브웨이(91년)가 본격적인 진출로 인해 외식업계는 치열한 경쟁이 불붙었다. 외식 체인들의 깨끗하고 밝은 실내 장식, 고급스런 서비스, 표준화된 메뉴, 상징물 등을 선보이며 외식산업이란 용어조차 없던 한국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롯데리아는 1979년 국내 최초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업체로 돛을 올려 소공점을 개설한 이래 국민복리증진과 고객을 위한 서비스 창출에 최선을 다해 왔으며 한국 외식 산업을 주도하며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왔다. 특히 롯데리아는 꾸준한 경영기술 혁신과 과감한 투자 및 상품개발로 최근 수년간 30~40%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국내 외식산업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발전을 이룩하여 왔다. 또한 98년도에는 업계최초로 400호점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으며, 2002년 7월에 800호점을 개점하였다. 작년 2010년에는 850점을 달성하여 점포개발 가속화로 대량 점포화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독주하고 있는 맥도날드가 유독 국내 에서는 롯데리아에 밀려 고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엄청난 물량과 뛰어난 서비스, 미국대형프랜차이즈, 세계화의 선두주자인 맥도날드가 국내시장에서 2인자로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이런 의구심을 해결하고 맥도날드가 롯데리아를 이길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이번과제를 통해 조사하고.06 한국 브랜드파워(K-BPI) 1위 인증 (한국능률협회컨설팅)2002.06. 800호점 개점(서울 혜화점)2003.06. 환경의 날 대통령 표창 수상2003.07. 롯데리아 900호점 개점(서울 신정네거리점)2004.01. 베트남 롯데리아 경영권 인수2006.12. 국가유통대상 산업지원부 장관상수상자바커피, 엔제리너스커피로 브랜드네임 변경2008.03. 엔제리너스 100호점 개점(서울 명동중앙점)2008.05. 중국 롯데리아 법인설립2008.11. 베트남 엔제리너스 1호점 개점 (킴도호텔점)2009.09. 엔제리너스 200호점 개점(서울 건대영존점)2009.12. '자랑스러운 프랜차이즈 기업인상' 수상2011.01. 퍼스트브랜드 대상수상2011.03. 한국산업의 브랜드 파워 패스트푸드 전문점부분1위 대한민국 브랜드 스타2011.04. 국가 브랜드 대상④ 롯데리아의 기업사명-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회, 모두가 자유롭게 제 할 일을 하 는 사회, 다 같이 풍요를 누리며 즐겁게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롯데그룹의 3L 정신과 더불어 롯데리아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업사명으로 고객 지향적인 기업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고객과 환경을 먼저 생각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기업,- 식생활 개선으로 풍요롭고 편안한 삶의 공간을 가꾸는 기업,- 서로 돕고 더불어 커 가는 조직문화를 구현하는 기업- 롯데리아의 기업정신 (QCST)국내 패스트푸드의 선도기업으로 국민의 새로운 식생활 문화를 창조하며 최고 품질의상품 (Quality), 미려하고 청결한 점포 환경(Cleanliness), 밝은 미소와 아낌없는 친절, 잠 깐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Service), 고객을 기다리시지 않게 하는 빠른 서비스의 실현 (Time)을 통한 고객만족을 추구하는 기업정신을 모토로 하고 있다.⑤ 롯데리아의 목표국내 1위 기업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 과거의 훌륭한 업적과 긍지, 자부심을 토대로 시대에 부응한 식생활문화를 창조? 개선하는데 모든 힘로 하였다면, 요즘 세대들은 그런 전형적인 모습에서 탈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그래서 식사를 가볍게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콜라로 대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화 된 음식 사업이 과거에 비해 더욱더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2)간편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추세 -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바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먹는 것도 복잡한것 보다는 간편하고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쫒고 있다. 이에 따라 인스턴트 혹은 패스트푸드 사업이 성행하는 건 당연한 결과로 보여진다.3) 세계화의 가속화 - 과거 롯데리아가 부딪쳐야 할 경쟁 상대는 대게 국내의 기업들이 었지만, 세계화가 가속화되므로 인해 각국의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계속해서 진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화가 가속화되므로 인해 각국의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계속해서 진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롯데리아는 전보다 훨씬 외국 기업과 경쟁해야 할 일이 많아 지고 있다. 또한 소비자들의 사고방식이 전에는 국산 제품을 애용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 생각했지만 요즘의 소비자는 어느 나라 제품이든 좋은 질과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낮은 질과 서비스를 가지고 있는데 단지 국산품이라는 이유로 구매하는 시대는 지났다.? 경쟁사와 의 비교? 마케팅 전략?롯데리아①롯데리아의 4P 분석상품개발 (Product)- 고객의 입맛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롯데리아는 항상 고객들의 생활 습관이나 기호를 조사 수렴 하여 고객의 입맛에 맞는 신제품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 음식은 비록 외국 에서 온 것이라도 맛 만큼은 우리 입맛에 맞게 개발하고자하는 상품개발팀과 롯데 중앙 연 구소의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 될 것이다.☞ IDEA회의 ? 국내시장의 조사 ☞ 기초조사 ? 영업, 마케팅 중앙연구소등? 해외시장의 조사 ? 관련부서 간 조사내용 공유? 소비자성향 조사 ? 해외시장 조사? 신제품 자료수집 ? 소비자 성향조사? 관련부서 아이디어 공유 ? 신제품 자료 조사? 인터넷 검색 정보 ? 신소재, 신기술 조사의 세계화를 꿈꾸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롯데리아는 계속해서 러시아, 동구권 진출 및 동남아시아 시장의 선점을 위해 방콕, 마닐라, 자카르타 등지의 진출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3) 롯데리아 점포 현황- 롯데리아는 경영기술 혁신과 과감한 투자 및 상품개발로 최근 수년간 30-40%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국내 외식산업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발전을 이룩하여 왔 다. 또한 '98년도에는 업계최초로 400호점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으며, 09년도에는 811호점을 가지고 있다.촉진 (Promotion)롯데리아가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분야가 바로 촉진분야이다. 롯데리아의 촉진 전략은 TV를 통한 어린이와 젊은 세대한테 어필하는 전략을 주 전략으로 한다. 특히 가벼운 유머나 해프닝을 소재로 해서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정감 있는 상황과 한국식 정서포착으로 타 제품과는 다른 한국인의 속성을 끄집어 냄으로써 롯데리아의 이미지는 코믹하면서도 한국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하고 있다.1) 롯데리아의 광고 컨셉- 롯데리아 광고 컨셉은 유괘하고 즐거운 광고다. 홈서비스를 알리기위해 선배가 햄버거를 후배에게 사줌으로써 여자친구가 사귄다는 내용, 예전 버거소녀 양미라를 등장시켜 우스깡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이지아를 광고모델로 선택해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컨셉, 여자들을 타겟으로 한우레이디버거를 만들어 고급이미지를 만들어 냈다.2) PR, 광고 방법- 본사 자체에서는 전단지, TV광고, 신문 잡지 광고, 또한 인터넷 베너 광고 등을 한다.그 달의 행사에 맞는 포스터 홍보물 등을 제작하여 각 점포에 배분하여 매장의 안 밖에붙이도록 한다. 점포 자체로는 mate를 통한 길거리 전단지 배포 등등 통한 판촉 활동을 벌인다. 전단지는 할인 쿠폰 혹은 무료 쿠폰 등으로 고객을 유인한다.②롯데리아의 STP 분석롯데리아는 소비자의 욕구가 다양해짐에 따라 외식 산업에 있어 기존에 존재하는 욕구 외에도 다른 욕구가 존재함을 파악했다. 그 중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지역별, 이용 시간대별, 연령계층별로 시장을 세분화해 분석해 보았다.구분유형특징Main Target점심/저녁 시간대를 이용하는 상권 밀집 지역의 0세~30대까지의 남녀 유소년?청년 계층소비 성향이 강하다패스트푸드에 충분히 적응된 계층상권 밀집 지역의 주요 소비 계층음식에 대한 관여도가 낮음(패스트푸드는 저관여 식품의 성향)어린 고객의 경우 가족 동반의 성향을 띄어 고객층의 확대Sub Target주부를 포함한 가족단위,장년?노년계층주요 소득계층주부의 경우 주요 타겟층인 유소년 계층과 함께 소비하는 성향이 짙다과거와는 달리 가족 단위의 외식 빈도수가 높아짐바쁜 일상의 직장인주요 소득계층시간적 여유가 부족하여 패스트푸드 이용 빈도가 높음3) Positioning맥도날드의 타겟그룹은 이처럼 다른 어떤 브랜드보다 상당히 광범위하며, 이 때문에 다양한 계층, 나이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소구할 수 있는 맥도날드만의 이미지를 개발해내야 했다. 기존의 패스트푸드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 즉 무언가 무미건조하며 단지 신속함과 저가의 인식적 측면을 지양하고 모든 이에게 동시에 소구될 수 있는 느낌을 찾아내었다. 창업자인 레이 크락은「따사로운 느낌」이라는 말로 이 포지셔닝의 엄청난 힘을 예언하고 있었다. 맥도날드가 만들어 낸 이 인간적이고 따사로운 느낌에는「가족」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어떤 형태이든 가족의 일원이며, 가족관계야 말로 가장 인간적이며 따뜻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맥도날드는 따스하고 인간적인 가족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③롯데리아와 맥도날드의 SWOT 분석강점(STRENGTHS)- 높은 시장 점유율과 성공한 마케팅 전략- 강력한 유통망 구축- 토종 브랜드라는 이점- 로열티 지불이 없음약점(WEAKNESSES)- 강력한 경쟁 상대 존재(맥도날드)- 경쟁으로 인한 과다 출혈- 임대료 상승 문제- 인력난, 인권비 상승기회(OPPORTUNITY)-소비자 층 확대-간편화, 신속화를 원하는 각한다.
에드워드 호퍼(1882~1967) 삶과 그의 작품의 사회문화적 관점에드워드 호퍼는 고독을 그리는 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작품을 사회문화적 관점을 통해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의 대한 작품을 글로 논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림을 통해 그의 작품을 보며 의미를 부여하여 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들은 많지만 간단히 몇몇 작품들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그림첨부 맨 뒷장호퍼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수 십년 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뒤, 1950년대 이후 점차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다.에드워드 호퍼는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공통의 요소들을 가장 세련되고 깊은 어조로 이야기한 화가이다. 고독함, 소외, 단절, 자연과 문명, 여성과 이를 바라보는 욕망에 이르기까지의 소재를 주변의 자연과 도시의 환경, 메마른 공기의 도시인들을 등장시키며 고독함에 관한 장편 소설 내지 영화를 보는 듯한 정서를 평생에 걸쳐 그려왔다.호퍼 작품의 특징은 색채를 인상적으로 병치하고, 인물들을 배경에서 두드러져 보이게 한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자연 혹 은 인공적인 환경 속의 ‘현대인’이라는 주제에 극단적으로 정확히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의 그림은 가끔 기분 나쁜 불안감을 풍기기도 한다. 한편, 무표정한 풍경을 따뜻한 갈색조로 연출한 작품이나 해안을 묘사한 작품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평온하다.호퍼에게 중요한 것은 그림의 주제 자체이고, 그의 그림에서 재현되는 ‘장면들’은 이중적 의미를 띈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에는 전형적인 미국의 분위기가 담겨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생활과 이로 인한 단절에 따르는 소외감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또한 그의 그림은 리얼리즘적 특성이 대단히 강조되는가 하면, 단순한 현실 복제 경향과 단절을 나타내고, 심지어 현실에 상상적 비전을 부여하는 회화로 여겨진다.또한 그는 1960~70년대 팝 아트와 신사실주의 미술에 강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실험적인 작품에 영 벗어날 길 없는 고독감을 보여주고 있다.호퍼의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심리 추구 경향은 때론 회화적 관습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그의 초기 작품들에 의해 압도되는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의 회화기법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드러내다가, 1910년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와 화가 자신의 작업, 스튜디오에서의 개인적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모티프와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 예로, 호퍼자신이 지내던 이나 이곳을 소재로 해서 그린 , 유화 , 그리고 를 들 수 있다.호퍼의 작품세계는 그가 프랑스 인상주의에서 미국을 관심을 옮겨가는 도정에 있는 풍경화들로 대표한다. 호퍼는 같은 순수 풍경화 이외에, 일찍부터 자연과 문명이 서로 교차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엄격히 구분되는 구도를 보여준다. 그는 평생토록 다리와 수로, 선착장, 등대 등을 그렸다. 호퍼는 1909년의 에서 자연과 문명, 문화의 테크닉을 긴밀하게 혼합하면서도 두 차원을 명확히 구획하는가 하면 변모시킨다. 루브르궁은 위협적인 기후여건 속에 그려져 있으며, 다리나 선박, 작은 배와 같은 문명의 상징들에 의해 거의 모습이 감춰져 있다. 특히 이 그림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화가가 구사하는 스타일이 기이할 정도로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면은 호퍼의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더욱더 의미를 지니게 된다. 1910과 1920년에 해안선을 그린 유화들은 강한 대조와 두꺼운 색채로 특징지어지는 반면에,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강조하는 또 다른 경향의 풍경화가 자리를 잡아갔다. 여기서는 인상주의적 화법에서 세부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화법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모습이 관찰되는데, 이 점에서 호퍼의 사실주의 화가로서의 특징을 확인 할 수 있다.호퍼의 1914년의 이란 그림은 화가가 프랑스 인상주의에 탐닉하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작품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후 본격적으로 추구하게 될 심리적으로 코드화된 그림들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유럽의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이 미국 는 여러 단서들이 존재한다. 이처럼 이 호퍼에게서 회고적 의미를 부여받을수 있다.호퍼의 초기 작품들에서 작가가 나중에 추구하게 될 모티브와 주제들을 분간해낼 수 있다. 바로 이러 까닭에 호퍼의 프랑스풍 그림들과 그림들 사이의 전환은 대단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호퍼의 작품세계 첫 국면은 그림들로 끝을 맺는다. 이 그림들에는 아직도 인상주의의 영향이 여전하지만, 미국의 자연풍경은 역동성과 표현성이 배가된다. 빛과 어둠, 물과 단단한 대지 사이의 경계는 보다 확연해지고, 색채 또한 밝고 강한 대조로써 두드러지게 표현된다.호퍼의 작품세계는 애머슨이 말하는 지각의 내적 진실을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독립적 상징체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점점 더 애매성을 더해 간다.이 좋은 예이다. 이작품은 현대적 지각 양식을 따르는 호퍼의 전형적 풍경화 가운데 하나이다.은 살아 움직이는 공간과 생명이 없는 공간사이의 긴장감을 빛과 그림자가 직각이나 뚜렷한 윤곽을 가진 형태 위에서 펼치는 조합으로 변환시키는 호퍼의 테크닉을 보여준다. 또한 이 그림은 문명의 지배적인 면모를 전제로 하는 지각력을 화가가 의도적인 아이러니로써 연출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며 19세기풍의 상점들이나 주변 건물들은 개인적 독립이란 미국적 이상과 거대 산업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과 긴장감을 표현해낸다.1931년에 그려진 에서는 빛과 그림자의 영향으로 들판과 밭, 건물 사이의 경계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양상을 보여준다. 자연공간과 문명공간 사이에 경계가 이루어지는 대신에, 문명이 자연속으로 회귀하는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회화적 투사에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그림은 1920년대 미국의 경제 침체기에 농촌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 버리자 넓은 땅이 휴한지로 버려지던 상황을 반영한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때, 그림으로 재현된 향수 어린 농가의 모습은 날카로운 사회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는 셈이다.1920년대 말 호퍼는 집이나 풍경, 도회지 정경을 인간적 삶의 관점에하면 하나같이 텅 비어 있고 죽은 듯이 보인다. 전반적으로 사람들은 거센폭풍에라도 갇힌 듯이 꼼짝않는 고정된 듯한 형색을 보인다. 게다가 사람들의 실루엣은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전반적으로 평온한 가운데 내적 동요가 느껴진다.이전 작품들이 드러내는 회화적 투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호퍼의 1940년대 작품들을 보면, 그의 도회지 풍경화가 자연과 문명 간의 대립을 강조하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경험세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1938년 에서 호퍼의 이전 그림들에서 발견되는 회화적 투사를 답습하는 동시에 또 다른 특이성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한 여성이 혼자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열차 내부 공간은 기이한 방식으로 확장된 모습을 보인다. 열차 좌석은 마치 부르주아 살롱이나 되듯이 과도한 쾌적성을 보이며, 창문이 있는 벽면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자연 풍광은 단조로운 듯이 보이는가 하면, 외부의 풍경뿐 아니라 내면의 풍경으로도 보인다. 또 이 작품은 고립의 감정이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애매성을 간직하는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회화적 개념을 1957년의 이란 작품에서도 마주치게 된다. 호퍼는 이 작품에서 창문에 의한 소외 효과를 겨냥한다. 과도할 정도로 큰 모텔 창문 너머로 전형적인 서부의 풍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침대가에 앉아 있는 여성은 풍경을 바라보지 않고 도리어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때 그림은 마치 고정된 이미지를 배경으로 한 초상화느낌을 준다. 이 그림은 부동성과 움직임을 동시에 심리학적으로 표현해낸다. 이제 막 여성의 육체로부터 튀어나온 듯이 보이는 모텔 앞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의 커다란 전면은 남근적 상징이다.한 여성이 도시전경이 내다보이는 창문 앞에 벌거벗은 채로 서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1944년의 이란 작품은 단순한 모티브의 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폭넓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그림 속 여성은 실제보다 작아보이며, 수건으로 벌거 전통과 비교해 볼 때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새롭게 재해석하여 기발하고 참신한 느낌을 준다. 문제의 핵심은 이 그림과 이 그림이 재현해내는 것 사이의 관계에 있지 않고,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적 재현이 사실은 환상일 따름이란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실상 리얼리즘적 재현이란 개인의 능력을 뛰어넘은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질서정연하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복구해내려는 허구에 뿌리를 둔 환상이다. 호퍼의 후기작들은 순수한 현실에 대한 이와 같은 허구성을 꼬집는 반발의 의미를 간과하고서는 제대로 이해할수 없다.호퍼의 작품은 의미에서 볼 때 모든 회화 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회화 작업의 이미지를 통해서 구현되는 순간 지각이나 감각의 즉시성은 소멸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리얼리즘 성향이 매우 강하면서도 소외 효과를 자아내는 다양한 기법을 구사했다.호퍼의 후기작들에서 마주치는 세련성은 그림의 구도와 단순한 재현이 서로 긴말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1927년의 는 이미 호퍼의 작품세계가 지닌 이 같은 특성을 예고하는데, 내용이나 제목에서 애매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란 제목은 사실 자동판매 시스템을 갖춘 식당을 연상하기에는 일견 무리가 없지 않으며, 하물며 식당 한가운데 앉아 잇는 여성과는 무관해 보이기까지 한다. .호퍼의 후기작 1961년의 은 긴장감을 회화적 내용에 대한 변모로 연출한다. 이 작품의 벌거벗은 여성은 방 안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햇빛에 노출된 채 모순된 감정을 자아낸다. 여성의 단호한 자태는 자신감을 드러내며, 스스로의 육체에 대해서도 떳떳하다. 반면 여성의 두 다리는 벌거벗은 몸 뒤로 가늘고 길게 뻗은 직선의 그림자로 인해 변형되어 있다. 비교적 어두워 보이는 방 안은 보호받는 공간이란 인상을 주지만, 그럼에도 그 경계는 희미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두 언덕은 나지막하지만 바다의 큰 파도처럼 견고해 보인다. 마치 정복한 영토를 비추는듯한 밝고 활달한 햇빛은 자다.
2000년대는 “광고의 시대”라고 할 만큼 수많은 광고들이 만들어 지고, 여러 경로로 접하고 있다.최근 들어 이전과는 달리 광고산업의 성장세가 국내 경제성장률을 하회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경제는 지속적으로 플러스 성장을 유지해 왔지만, 광고산업은 급격한 변화를 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광고산업은 국내 경제의 성장과 함께해 왔다. 즉 국내 경제성장률과 광고산업은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해 온 것이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하여 국내 광고산업 성장률은 전반적인 국내 경제규모의 확장세와는 달리 저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광고산업 자체가 갖는 특징으로부터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다른 산업의 성장 및 구조변화에 큰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영향을 주는 상호연관성이 매우 높은 산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나타나는 광고산업의 구조 변화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국내외 경제구조 전반의 변화와 함께 맞물려 봐야 한다.국내 경제구조 변화와 광고시장의 변화-최근 국내 광고산업이 보이는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인 광고산업의 성장세가 과거와는 달리 정체되어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국내 광고산업은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하여 변화를 보이고 있다. 즉 1997년 까지는 국내 경제성장과 거의 밀접한동조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 이후에는 성장이 정체됨은 물론 큰 폭의 변동을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광고시장 주도 업종 분석2000년대에는 ‘가정용 전기전자, 컴퓨터 및 정보통신’ 및 ‘금융, 보험 및 증권’업종이 ‘식품, 음료 및 기호 식품’ 및 ‘서비스’업종과 더불어 광고시장을 이끌어 오고 있는 업종으로 나타난다.광고시장 주도 업종의 이용 매체 변화 분석광고 시장 주도업종의 매체이용 형태를 5대 매체(TV, 라디오, 케이블, 신문, 잡지)별 또는 크게 방송매체와 인쇄매체로 구분한다.전반적으로 전통적인 매체인 TV와 신문의 광고비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데, 2000년대 들어서 케이블의 가세로 전통적인 TV와 신문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케이블 매체의 비중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가정용전기전자, 컴퓨터및정보통신’ 업종의 경우 2000년대 들어 TV매체의비중이 50%대를 유지하고, 케이블 매체의 비중도 2000년대 중반이후로 꾸준히증가하고 있다. 반면 신문과 잡지 등 인쇄매체의 비중은 1990년대에 비하여하락하여 최근 35%대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제일기획- (단위 :백만원)연도TV라디오신문잡지케이블계200020,6872,50421,2141,6341,73647,775200119,5372,37217,5005,4651,65246,526200224,3942,78020,2004,6052,34554,324200323,6712,75118,9005,0062,97553,303200422,3502,65317.4364,2563,99950,694200521,4922,68316,7244,3684,86850,135200621,8392,79917,0134,5916,72152,963200721,0762,80717,8014,8418,29754,822200818,9972,76916,5814,8048,60051,751200916,7092,23115,0074,3887,79446,129경제구조 변화와 광고 시장의 변화2000년대 들어 광고시장의 성장률은 경제성장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추세이다.특히 2007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에는 광고시장의 침체가 지속되고 있는 상태이다.-2000년대 광고산업 정체의 원인1)전 세계적인 차원의 전통적인 광고매체 기반 광고산업의 정체 경향의 반영2)국내 경제구조의 변화로 인한 국내 광고 산업의 기반 약화 즉, 국내 광고산업이 미국 등 선진경제권의 광고산업에 비해 경제 구조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2000년 이후 대외의존도와 주요산업의 비중연도대외의존도제조업서비스업생산자 서비스200834.148.838.415.6200729.446.540.416.8200628.446.340.316.7200528.246.340.016.5200026.945.040.016.72000년대 광고시장 현황한국의 광고 산업은 지난1970~80년대를 지나1997년 IMF 외환위기전 까지 매년 두자리 숫자로 성장신화를 지속해왔다 하지만 IMF외환위기 직후 광고시장은 한국의 경제위기와 더불어1998년에 ?5.2%라는 사상 최악의 마이너스성장을 경험, 그간의 지속적인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이후한국광고시장은1999년에 32.6%라는 수직상승의성장률을 보여 IMF 외환위기이전의 광고비 수준을 회복함으로써 한국경제의 잠재력을 보여주었고 2000년에는 전년대비26.7%의 고도 성장률을 보였다, 이로써 총 광고비5조8,534억 원을 달성하여 광고시장5조원시대를 열었다. 이 같은 광고시장의 확대는 2000년의 소비투자 등 실물경기의 활성화에 따른 8.5%의 높은 경제 성장률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광고주들의 기대로 인한 기업광고의 증대, 시드니올림픽 특수, 벤처 업종의 대규모 광고 수요 등이 주도했다. 그러나 2001년, 한국 광고 시장은 어려운 한 해를 보낸다. 2000년 두 자리 숫자의 높은 성장을 했던 광고 시장이 2001년에는 -2.4%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전년보다 위축이 되었다. 광고 시장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2001년 광고업계는 여러 변화를 겪었다. 그동안 매체별 구성비 측면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했던 신문이 TV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2002년의 한국 광고 시장은 다시 호황을 누리게 된다. 2001년 마이너스 성장에 비해 19.8% 성장이라는 수직적인 성장을 기록해, 2002년 총광고비는 6조 8,477억 원으로 전년도에 비해 1조 원 이상이 증가해 광고 시장 규모 6조 원 시대를 연다. 2002 한일 월드컵과 부산아시안 게임이라는 스포츠 특수, 그리고 대통령선거 등 각종 이벤트에 따른 광고 수요의 확대가 2002년 광고 시장의 활성화와 성장을 주도 했다. 2003년의 한국 광고 시장은 그리 밝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기업 환경과 불안한 투자여건, 가계 대출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가계부실, 금융 불안, 청년실업의 증가 등으로 국내 경기가 얼어붙어 광고 산업의 위축을 가져왔다. 하지만 여전히 2003년 광고 시장은 6조 원대를 유지했다. 2003년 한국 광고 시장이 큰 폭의 시장 감소를 벗어나 일정 규모의 시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경제 사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보통신, 부동산, 금융, 식품, 서비스 등 광고 주력 업종의 지속적인 광고 투자 증대와 브랜드광고의 활성화, 그리고 무엇보다 광고비 지출이 경기침체나 소비 위축시에는 브랜드의 자산 가치를 지키는 마케팅활동이라는 인식이 보편화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2003년의 광고 시장은 4대 매체 광고비가 저조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케이블TV와 온라인광고가 급격한 증가를 보여 뉴미디어의 광고시장 가치를 가늠하게 했다.2004년 총광고비는 6조 8,401억 원으로 2003년 6조 9,868억 원에 비해 1,467억 원이 감소, -2%라는 마이너스 성장한 것으로 나타나 한국 광고 시장이 연이어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수출 호조로 인한 경상수지의 개선, 아테네올림픽과 같은 광고 호재와 이동통신업체들 간의 광고 경쟁, 그리고 IT업종의 가격인하에 따른 광고 확대 등에도 불구하고 소비시장에는 여전히 소비심리가 위축되었고, 경기 불안과 고유가, 달러화 약세 등 국내외적으로 전반적인 소비 감소가 광고 시장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하지만 2004년 광고 시장이 큰 폭으로 축소된 것은 아니다. 4대 매체 광고비가 2002년부터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것에 비해, 뉴미디어광고가 2002년부터 연속적으로 높은 성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케이블 TV의 34.4%성장과 중소기업의 중심광고로 잡은 인터넷 미디어의 45.4%에 이르는 고성장에 힘입어 전체 광고 시장은 큰 폭으로 하락하지는 않았던 것이다.2005년은 대내외적의 경제적 불안 요소들이 개선되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수출경기의 지속유지, 기업의 신규투자 확대 등에 힘입어 내수 시장이 살아날 기대 속에 광고 시장이 성장하는 계기를 맞았다. 기업의 지속적인 광고비 투자억제도 주춤해 2005년 광고 시장은 2004년에 비해 3.1%성장을 기록, 국내 총 광고비가 최초로 7조 원을 넘어 7조 539억 원으로 전년에 비해 2,318억 원이 증가했다. 광고 시장 규모 7조 원 시대가 열린 것이다.2005년 광고 시장의 성장을 주도한 것은 뉴미디어인데, 케이블 TV가 전년 대비 21.7%, 온라인이 44.4%로 고도성장을 기록해, 뉴미디어광고 시장이 최초로 1조 원을 돌파하여, 국내 광고매체 시장이 뉴미디어시장으로 확대되면서 변화하고 있는 과정을 나타낸다. 또 위성DMB와 지상파DMB가 가시화되고, IPTV등 새로운 매체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hkd고 시장은 다소 활기를 띠었다. 그밖에 중국 광고계와의 교류, 웰빙광고의 열품, 방송광고 전송 시스템의 온라인화, 국내주요 광고 회사들의 해외진출 등도 2005년 광고 시장의 활성화에 기여한다.2006년 한국의 광고 시장은 국내경기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뉴미디어광고의 성장에 힘입어, 총광고비 7조 6,300억 원 대로 성장했다. 이 같은 광고 시장의 확대와 유지는 한국 경제에 비록 달러화약세, 원유가 상승 등 대외 경제 불안 요소가 잠재되어 있으나, 기업의 설비투자가 본격화됨에 따라 그동안 억제되어 왔던 기업의 마케팅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광고에 대한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특수, 뉴미디어와 옥외광고의 지속적인 성장도 2006년의 광고 시장 성장에 보탬이 되었다.
●일제하의 한국영화1.영화유입 및 조선영화의 시작(1903~1919)과거 일제 강점기를 겪은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 영화를 활동사진이라 부르는데 활동사진이란 말그대로 움직이는 사진이라는 뜻인데, 당시 조선인들의 영화에 대한 경외심을 부분적으로 반영한말이라 볼 수 있다.조선에 영화가 처음 들어온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는데, 1897년 10월 10일 런던타임즈 19일자 보도기사에 따르면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심훈이 우리나라에 처음 활동사진이 들여와 일반에게 공개 했다고 하는데 출처가 불확실하다. 이에 대해 정리를 하자면 조선에서 처음으로 활동사진이 상연된 것을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은 황성신문 1903년 6월 23일자이다. 이 신문에는 최초로 영화상영 광고문이 게재되었는데, “동대문 전기회사 기계실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흐리거나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상영하는데 입장료는 동화 10전”이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그러나 이 이전에 이미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들과 서구 열강들과 일본의 조선 진출시기 등을 고려해볼 때 1903년 이전에 들어온 외국 교육, 종교계 인사들에 의해 영화가 비공식적 경로에서 상영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10년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 해였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해는 한국 영화역사에서 흥행이 본격화된 해라고 말할수 있다.1910년대 말에 이르면서 우리나라도 영화제작의 꿈이 실현되는 중요한 전기를 맞게된다.극중의 장소를 재현하기 어려울 경우 영화로 찍어서 연극 사이사이에 보여주는 이른바 활동사진 연쇄극(kino-drama)시대가 열렸다. 1919년 10월 27일 김도산이 이끄는 극단 신극좌에 의해 단성사 무대에 오른 가 바로 그 주역이다. 그 후 일본의 방식과 내용을 모방한 연쇄극은 장르 결합이라는 첨단성으로 서울과 지방에서 한때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서로 양식적 특성을 손상시킴으로써 지속적인 호응을 받지는 못하간에 끼워 넣는 형식이며 제작자인 박승필의 결단으로 김도산이 일본으로 건나가 전자 응용기계 (영사기)를 구입하였다.입장료는 1원 50전 하는 특등을 포함해 네 등급으로 나눠 받았는데, 가장 싼 3등이 당시 설렁탕 네 그릇값에 해당하는 요금임에도 불구하고 “초저녁부터 구경꾼이 조수같이 밀려드는 대성황”(매일신보,1919.10.29) 한달동안 장기공연을 했다. 잇달아 김도산은 제2작을 비롯하여,,,(1920)등을 내놓아 연쇄극 시대를 주도하였다. 이때 나온 연쇄극은 대체로 통속적 사랑 이야기이거나 혹은 전통적 윤리관에 기초한 것들이었다. 그 당시 인기의 내리막 길에 있던 신파극에 활기를 가져다준 계기가 된 이작품은, 관객들이 신파극에 식상해 있었고 장안에 꽤 많던 신파 극단들은 파산에 이르렀는데 김도산의 신극좌 에서 활동사진 연쇄극 제작으로 관객 동원 에 성공하고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되자 다른 신파 극단에서도 연달아 활동사진 연쇄극 제작에 열을 올렸다.이기세는 등을 만들었고, 임성구는 등을 만들었는데 주로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신파였다.장한몽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배우 마호정이 출연해 화제였다. 당시만 해도 여자들이 무대에 서는 것을 금기로 여겼기 때문이다.의리적 구토가 아쉬운점은 유독 촬영-편집과 같은 기술 부문은 일본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이 당시는 민족 정신이 투철하지 못했던 당시의 연극, 영화인들이 일제의 신파극과 연쇄극을 그대로 모방하여, 조선영화의 출발은 일제 치하라는 역사적 암흑기에 그것을 극복하고 제어하기 보다는 일본연극, 영화의 가장 부정적인 모습을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조선영화 역사가 치욕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할수 있습니다.3.무성영화 전기 (1923~1926)연쇄극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무성영화가 시도되었습니다. 무성영화는 말 그대로 소리가 없는 영화여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변사가 영화의 장면을 해설하거나 배우의 대사를 대신하여 소리를 냈다.조선에서 무성영화가 제작되던 시기는 1923년에서 1934년까지이다. 이 10신국에서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서 제작한 선전 영화로 윤백남이 손수 각본을 쓰고 연출했으며, 출연은 우리 나라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와, 권일청,문수일,송해천,안세민,김응수 등 신파 배우들이 출연했다. 조선총독부 선전영화였으므로 물론 제작자는 일본인이었고, 촬영과 편집도 일본인이 맡았다. 스토리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온 지식 청년 영득은 불량배들에게 휩쓸려 노름과 주색에 빠져. 영득의 방탕한 생활로 그의 집안은 파산 지경에 이른다. 이 때 영득의 약혼녀인 정순의 아버지가 저축해 두었던 영득의 빚을 갚아 준다. 영득은 심기일전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정순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민다는 내용의 계몽물이었다.뒤이어 영화는 안타깝게도 일본인의 제작-감독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연쇄극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상설관 조선극장의 경영주였던 일본인 하야가와는 1923년 동아문화협회(지금 서울 명륜동)를 섭립하고 을 제작했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대 소설을 최초로 영화화하면서 제작-감독-촬영을 모두 일본인이 담당했다는 것은 슬픈일이다.이 흥행을 거두자 당시 조선영화의 주도자였던 박승필은 (1924)만들었다. 특히 이필우는 쵤영을 맡았고, 에서는 현상, 편집, 녹음까지 다 맡아 전적으로 조선인들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무성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장화홍련전내용은 계모의 학대로 인해 죽은 장화(김옥희)와 홍련(김설자) 두 자매가 원혼이 돼, 고을 사또(우정식)앞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한 끝에 원한을 풀게 된다는 내용으로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다음의 신문보도에서 이 영화에 쏠린 관객들의 관심이 어느정도 인지 알수가 있다.?당시신문기사“일반이 손꼽아 기다리던 조선 고대소설의 영화극은 단성사에서 초일을 내이자 만도의 인기가 비등하여 조선에 상설관이 생긴 이후로 처음 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최초의 예정은 십일일까지 상영할 작정이였으나 인기가 굉장하여 매일 밤표를 사 사지고도 입장치 못한 관객이 많았었고 또 시기를 놓친 이도 적지 아니하여 유감 없이 해 달라조선 최초의 활극영화 (1926)을 제작하나 역시 흥행에는 실패하게 된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일본인 요도의 자본으로 설립된 조선키네마에 흡수된 이경손, 이규설 등의 조선 영화인들은 일본의 대히트작이었던 (1926)의 조선식 리메이크 작업에 참여한다. 이규설의 감독 입문작이자 나운규 출연작이기도 했던 는 흥행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일본의 모방영화라는 점에서 세간의 평은 좋지 못했다.이상과 같이 이 시기의 조선의 영화인들은 순수 조선인의 자본과 기술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긍정적 의미도 있었으나, 일본에의 모방과 자본, 기술(특히 촬영은 거의 일본이었음)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흥행에만 몰두한 나머지 야기된 몰시대성과 비예술성은 이 시기의 조선 영화인들이 역사적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맹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조선총독부의 영화검열이 시기 조선을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영화계에 대해서도 조선총독부의 각종 법령과 규칙을 통하여 제재를 가하였다. 특히 영화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호도가 상당히 높았으므로 일본측에서는 그 영상적 효과를 겁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때문에 조선총독부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이미 시행하고 있던 검열를 보다 구체화하여 1922년 6월 ‘활동사진 검열에 관한 규칙’을 발표하고 이를 위해 영사실까지 새로 짓고 영화에 대한 검열을 개시하였다.이후 1926년에 ‘활동사진 필름 검열규칙’이 제정되어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검열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검열에 의해 절단된 내용의 대부분은 키스 장면이며, 이 외에 미국기를 흔드는 장면, 방화나 폭탄 투입 장면, 다이너마이트 사용 장면, 부녀자 마취장면, 강도질 장면 등 조선인들의 반항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폭력적 행동에 대해 대단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4.무성 영화의 정착(1925~1934)을사보호조약 체결에 앞장섰던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이 죽고 마지막왕 순종황제가 승하한시기로 1926년에 나활의 진솔한 일단을 정확히 파악했을 뿐 아니라 시대의 분위기를 짜임새 있게 묘사했다. 단순히 조선의 인물과 풍경에 접근하는 것 이상의 만족을 거두었다.나운규는 에 이어 1926 , 1927, 1927 등의 4편을 조선키네마에서 낸 후 ,자신의 직접 프로덕션을 만들어 영화활동을 시작했다.풍운아의 내용은 러시아 용병에 가담했다가 귀국한 청년 니콜라이 박이 조국의 차가운 현실 앞에 직면하자 좌절감을 안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는 사소한 오해로 가출했던 아내가 남편이 응모한 현상 소설이 당선되면서 화목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는 내용이며 는 백년해로를 약속한 여자가 악덕 부호의 유혹에 넘어가 결혼하게 되자 들쥐로 통하는 정의파 청년이 나서서 폭력배 일당을 물리치고 여자를 다시 애인의 품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활극조의 신파극이다.이후 일제의 영화에 대한 검열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 대한 도피와 조선 영화인들의 영화에 대한 철저하지 못한 인식은 조선영화의 오락화 경향을 더욱 조장하였다. 이 와중에서도 여러 능력있는 새로운 감독과 배우들이 등장하였고, 극장업자들이 일제의 검열 강화에 맞서 검열료 인하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조선최초의 영화잡지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이 나온 1935년 까지 약 20여편의 무성영화가 계속 제작됐다. 이 중 카프계열의 영화인들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인 조선영화동인회가 만든 과 같은 사회적 소개를 다루려 노력하는 작품이 더러 있었으나, 그 표현정도는 미미한 것이었고, 대부분 통속 애정극이나 권선징악류의 영웅담이 주를 이루었다.5.발성 영화 시대 (1935~1945년)우리 영화제가 순원이던 발성 영화 시대를 맞이한 것은 1935년 10월 3일부터 13일까지 10일간 단성사에서 공개된 이명우-이필우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때부터 였다. 세계 최초의 발성영화 1927가 나온지 8년만이다. 우리나라에서 발성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먼저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