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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정권의 도약기 - 무일푼에서 일궈낸 경제기반
    박정희정권의 도약기 - 무일푼에서 일궈낸 경제기반(초기 대외 자본조달 성과에 관하여)현대한국의형성 (김혜정교수님)서강대학교 경제학부20090582 김도경Ⅰ. 서론20090582 김도경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지 30년이 흐른 지금에도 박정희에 대한 찬반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례로, 유신과 민주인사 탄압 그리고 독재라는 역사적 사실은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는 근거로 많이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의 연구자들은, 당시 한국의 심각했던 경제난과 안보문제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 이루어냈던 일련의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이러한 비판들에 대하여 반박하고 있다.필자는 박정희의 이러한 정책적 접근방식에 도덕적, 절차적으로 결정적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지 않으며,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현대 민주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종이 되어왔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번 논의에서는, 시대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박정희정권의 도덕적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한국의 근대화라는 측면에서 이루어낸 그의 업적과 그 방법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해보고자 한다. 특히, 이 논의는 당시 파산상태였던 한국경제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했던 대외자본조달 측면에 집중될 것이다. 한일 외교관계 정상화, 미국과의 동맹, 베트남 지원군 파병은 바로 이러한 논의의 핵심에 서있다.Ⅱ. 전후 한국의 사회·경제적 위기1945년 8월 대한민국은 얼떨결에 얻은 광복의 기쁨으로 떠들썩했다. 한국민들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부강한 통일조국을 이루려는 하나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수탈정책에 혹사당했던 한국경제는 이용 가능한 자원과 자본의 부족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근대화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국토분단과 해방공간의 민족분열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새로운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한국전쟁기간동안 100여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공업시설, 민가, 기타 사회공공시설의 약 3분의 1가량 훼손되었다. 그 중 공업생산시설이 42%, 공장건물은 44%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기간 중 51년 52년에 있었던 심각한 기근은 한국민들을 기아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저수입→저저축→저투자→저생산→저소득 의 악순환이 반복되었으며, 베이비붐으로 인한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북한으로부터의 수십만의 전재민들은 생필품과 주택 부족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가중시켜갔다.1950년대 말에는 보릿고개를 견디지 못하고 아사하는 사람의 수가 급증하였으며 피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생겨났다. 1960년대 초에 이르러 경제문제는 한국사회의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민들은 10%에 달하는 생산 감소의 영향으로 40%를 육박하는 물가상승을 견뎌야 했다. 어느 영국기자는 “한국이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며, 61년 발행된 일본정부의 「한국경제에 관하여」라는 보고서에서는 한국경제에는 인구과잉/자원부족/군비압력/민족자본결핍 등 많은 문제가 존재하므로 경제성장과 자립경제를 달성하는 것이 거의 절망적임을 인정하고 있다.Ⅲ. 국제정치와 경제여건 1 (한일 외교관계 정상화)절망 속의 한국경제를 다시 일으키는 데에는 당대의 국제정치와 유리한 경제여건상의 조화가 큰 몫을 차지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적절히 이용하여 한국 경제를 살리고자 했는데 회고록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그 절박함을 느낄 수 있다.“무엇보다도 자금이 필요하다. 미국이 도와준다고 해도 원조를 배로 늘려줄 리도 없고믿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는 한국이 당당히 받아낼 돈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반일감정이니 굴욕이니 하여 망가뜨리는 일은 대단한 국가의 손실이다”제3공화국 수립 후 박정희는 대일외교관계의 방향 전환과 국방력 증강 사업에 집중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미국의 대동아시아 정책, 특히 일본과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국익과 한국정부의 요구를 연결시켰는데,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기간과 조건을 미국과 협상함과 동시에 대일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 문제에 대응해 나아갔다.당시 한국의 대일 국교 정상화는 1947년 이후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었다. 이는 소련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두 양극의 냉전 체제하에서 동아시아 내의 새로운 질서와 기강을 확립하고 나아가 일본을 미국의 파트너로 삼으려는 견제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박정희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경제적인 것이었다.물론 박정희의 빠른 국교정상화에 대한 동기를 비단 경제적 문제에 국한시키는 것은 매우 편협한 사고일 지 모른다. 그 이면에는 미국의 강한 압력과 미?일 그리고 한?일간의 비밀 협약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명백한 사실은, 시의적절한 외교정상화의 긍정적 영향으로 인하여 한국경제가 도약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민족의 쓰라린 과거를 돈 몇 푼과 맞바꾼 굴욕적 외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실제로도 피해액에 턱없이 모자라는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총액 8억 달러라는 외자는 현재가치 약 100조에 이르는 금액으로, 포항제철소 건설을 비롯 70∼8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중화학공업 발달의 근간이 되는 등 한국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일부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해보상의 양적 부분에만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발전의 시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큰 손해를 막을 수 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인들은 박정희가 내린 선택의 장기적 안목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군사·보안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라도, 정치·외교적 호전으로 인해 한국에 가져다 준 이익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일본은 미국을 대신하여 한국의 가장 중요한 외국대부금의 주요내원이 되었으며, 기술도입과 대외무역의 주요한 상대가 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대일의존도는 나날이 증가해 결국 일본경제에 종속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한·미·일의 경제적 공조체제(일본은 한국의 자금공급원의 역할을 하며, 미국을 상품판매의 주요시장으로 하는 트라이앵글 무역구조)는 훗날 박정희의 대외수출지향형 공업육성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의 국부 증가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 긍정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Ⅳ. 국제정치와 경제여건 2 (베트남전 파병 특수)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것은 한미관계와 한국경제의 고속성장에 모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중대한 사건이다. 실제로 이는 가시적인 경제 성장과 더불어 안정적인 국가안보를 위한 한·미간의 관계증진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1961년 미국은 당시 남과 북으로 나뉘어있던 베트남의 이북지역에 대하여 특수전쟁을 발동하였으며 1년 6개월 만에 북베트남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이는 미국의 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 우려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베트남 사이의 어떠한 이념적·정치적 분쟁의 내용에 대하여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많은 미국의 동맹국들 중에 하필 한국군만 월남전에 개입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한국의 상황을 비교해 본다면 상대적으로 쉽게 그 답을 찾아 낼 수 있다.휴전된 지 10년이 되지 않은 한반도에서는 북파/남파 공작원들의 크고 작은 테러와 침입이 계속 되었다. 당시 한국은 오직 미국의 원조에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형세였으며 이는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에 관한 일체의 문제들 까지도 주한미군에 의탁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월남전은, 베트남에서 미군 병력이 급속히 필요해짐에 따라 미국이 주한미군의 부분적 철수를 의미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는 곧 국가보안의 문제로 귀결되기에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태로운 일이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미국의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냉전 정책에 맞추어 한국의 목표를 재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발전과 안보기회를 최대화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것이었다.베트남전쟁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강한 질타를 받고 있었다.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존슨은 동맹국들을 전쟁에 참여하도록 고무하여 베트남전이 비단 미국만의 전쟁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맹국들은 모르는 척 하거나 소극적인 응부를 하는 것에 그쳤을 뿐 한국처럼 대량의 병력을 출동 시킨 국가는 없었다. 실제 통계를 보아도 한국군 병력은 미국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구체적으로는 1966년까지 총 2만 3865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었으며 1969∼1972년 사이에는 최대 4만 7872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에 상시 주둔했고, 1971년 7월 한국이 베트남에서 철군할 때까지 30만 명 이상의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복무하였다.
    사회과학| 2010.06.02| 5페이지| 5,000원| 조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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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화적 비교
    Санкт-Петербург유럽을 향한 창 상트-페테르부르크*목차상트 페테르부르크 문화의 상징 및 문화 중심지로서 도시공간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비교 문화중심지로서 전이가능성 결론*1.상트 페테르부르크러시아의 북쪽 수도 북쪽의 팔미라 북쪽의 베니스 러시아의 유럽 물위에 세워진 도시 인간의 뼈 위에 세워진 도시 . . 유럽을 향한 창*표트르 대제*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제4대의 황제(재위 1682∼1725). 터키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 차지하였고 러시아의 서구화, 근대화를 위해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다.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벌여 최종 승리하였으며, 1721년 원로원이 그에게 ' 임페라톨'(황제)이라는 칭호를 보내면서 러시아 절대주의왕정이 확립되었다.상트 페테르부르크*1703~ 상트페테르부르크 Санкт-Петербург1914~ 페트로그라드 Петроград1924~ 레닌그라드 Ленинград1991~ 상트페테르부르크 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анктПетербург*상트 페테르부르크상트 페테르부르크*성 이삭성당(Иссаикский собор)1958년에 완성된 러시아 최대 규모의 성당으로, 100m 높이의 황금색 돔과 8개의 돌기둥, 화강암 벽돌로 쌓아 올린 건축물이다. 성당 내부는 22명의 화가,조각가들이 남긴 모자이크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로 메워졌다. 150여 명의 성인들의 모습과 성서내용이 그림으로 새겨져 있다.*에르미따쉬(Эрмитаж)에르미타슈는 프랑스어로 은인(隱人)의 암자(庵子)라는 뜻이다.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동궁(冬宮) 옆에 소(小)에르미타시를 짓고 황실에서 수집한 미술품들을 보관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소장품이 늘어남에 따라 증축 및 개축이 이루어져 동궁과 소에르미타시, 구(舊)에르미타시, 에르미타시극장, 신(新)에르미타시 등 5동의 건물이 연결, 지금의 규모를 갖추었다.*피의사원1883년에서 1907까지 건축되었으며, 알렉산드르 2세 황제가 처참한 상해를 당했던 장소로 유명하다. 이곳은 피의 사원 또는 피의 구원으로 불리우며, 황제가 당한 사건은 1881년 3월 1일날 벌어졌으며, 다음날 8월 2일에 시의회에선 특별한 회의를 열고 알렉산드르 3세에게 죽은 황제를 위해 《도시사회관청에 작은 예배당과 동상을 건축하라》고 부탁했다.*여름궁전, 여름정원과거 러시아황제들의 여름거주지였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중 하나이다. 8개의 박물관과 173개이상의 분수대가 있는 하부공원, 상부공원이 위치한다*페테르부르크 역사요새화 –도시의 시작 (1703)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토끼섬에 요새를 건설 항구도시 건설과 천도 –러시아 근대화 시도(1712) 서유럽의 선진문물을 도입하기 위한 노력 (제도, 예술, 교육, 문화) 예술가들의 도시 – 문화재창출의 도시 푸쉬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 키로프 발레단 혁명 – 도시의 수난(1918년 모스크바 천도) 제카브리스트 봉기, 농노해방, 피의 일요일,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 볼셰비키 혁명(소비에트 국가 설립), 모스크바로 다시 천도.*페테르부르크 역사제2차 세계대전-영웅도시 독일의 포위(900일간) ,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음. 소련의 붕괴-도시의 회복 1991년 9월 국민투표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지명을 되찾음 블라지미르 푸틴-새로운 도약의 시기 도시건설 300주년에 맞추어 페테르부르크의 세계화를 준비*2. 문화의 상징 및 문화 중심지로서 도시공간수도 못지 않은 정치,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도시의 존재를 가능케 함.광활한 영토 잦은 국가권력의 중심지 이동 영토확장과정 – 거점도시 확보노브고르드 ▶키예프 ▶ 블라지미르-수즈달 ▶ 모스크바 ▶ 페테르부르크 ▶ 모스크바*중심지로서의 모스크바동유럽 평원에 위치 정치, 경제, 종교 등 문화중심지 역할에 이로운 지리적 이점 오카강, 볼가강, 돈강, 드네프로강 등 수로교통의 요충지 자연발생적으로 시장이 형성, 사회문화적 중심지 형성 장자상속 (왕권의 분산을 차단) 통치구조적 특징, 모스크바의 세력확산에 기여 교회의 중심 1240년 키예프의 몰락, 1300년에 블라지미르로 옮겨왔으나 대주교 사망, 이후 모스크바에서 교회업무 관장 (교회의 중심)*페테르부르크의 위상변화소련(모스크바)러시아 (페테르부르크)과거에 대한 향수, 페테르부르크의 위상이 부각사회주의 정권의 몰락, 이전으로의 회귀*3.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전통적 비교1917년 혁명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비교가 유의미함 – 전통적 비교 로 한정한 이유 모스크바로의 천도(1918.3) 이후 이미지가 역전됨*19세기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비교*19세기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비교모스크바에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의무감으로 산다. 2. 모스크바에서는 차를 마시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커피를 마신다. 3.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심장, 페테르부르크는 두뇌..이다. 4. 모스크바는 웃고, 페테르부르크는 일한다. 5. 모스크바는 어머니이고 페테르부르크는 아버지이다. 6. 보통 모스크바는 여성으로, 페테르부르크는 남성으로 비유된다. 7.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가자면, 유럽의 경계선을 넘는다.*20세기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비교모스크바에서 장작을 패면,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나무가루(톱밥)이 날린다. 2. 네바강의 눈물은 모스크바로 흘러 들어간다. 3. 모스크바가 헛발질을 하면, 페테르부르크는 따라 한다.1918년 모스크바 천도 이후, 모스크바의 지령을 따라야만 했던 페테르부르크, 또한 소비에트 러시아 시절에 레닌그라드 공산당 지도부가 행정적, 정치적으로 모스크바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던 상황을 표현. - 모스크바에 종속된 페테르부르크의 비참한 운명을 비유적으로 표현함.*4. 문화중심지로서 전이 가능성*문화중심지로서 전이 가능성*5. 결론상트 페테르부르그의 현재적 가치 고찰 문화수도의 이미지 – 러시아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시킬 수 있음 2. 모스크바가 가지고 있는 수도 기능의 일부를 이전 - 정부기관 중 문화부의 이전이 제 1순위에 올랐음. (실질적으로 수도 이전의 가능성은 현실성이 없음)*감사합니다 Q A*{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10.06.02| 24페이지| 3,000원| 조회(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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