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가들은왜 쫓겨나야 하는가?-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과 철학적 고찰 및 해결방안-철학과2009640008나재헌1. 문제의식홍대인근, 가로수길, 경리단길. 이 세 지역의 공통점은 문화·예술의 거리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는 이 세 지역이 동시에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을 겪고 있다는데 주목하고자 한다.우선 젠트리피케이션의 정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사전에 따르면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을 이르는 용어’라고 설명된다. 신사 계급을 뜻하는 '젠트리(Gentry)'에서 파생된 말로 본래는 낙후 지역에 외부인이 들어와 지역이 다시 활성화되는 현상을 뜻했지만, 최근에는 외부인이 유입되면서 본래 거주하던 원주민이 밀려나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앞서 언급했듯이 경리단길, 가로수길, 홍대 등 문화의 중심지를 선두로 하여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임대료가 저렴한 도심 지역을 중심으로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그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공간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저렴한 임대료를 보고 모여 만든 문화 공간들이 하나둘씩 유명해지면서 그 지역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나중에는 대규모의 유동 인구를 지닌 상업지구로 변화하게 된다. 대규모 상업지구로 변하면서 저렴했던 임대료는 빠르게 상승하고,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기존의 문화·예술인들은 동네를 떠나게 되며, 대규모 자본을 가진 대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사람들의 끊이지 않는 발길이 결국 문화공간을 형상한 이들을 떠나게 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물론 그 지역의 상권을 형성한 모든 문화·예술인들이 아무런 보상 없이 떠나는 것은 아니다. ‘권리금’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금전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권리금을 치르고 입주할 의사가 있는 임차인이 나타났을 국 그들은 그들이 형성한 문화적, 상업적 공간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2. 철학적 고찰-칼 맑스1)노동 착취론이즈음 되면 사회철학자 칼 맑스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맑스는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며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이야 상업에 있어서 상품의 가치가 화폐로 표시되어 가격 조정을 통해 이익을 창출시키지만, 사실 상품이나 노동의 가치는 그것으로 다른 재화나 서비스를 얼마나 교환 혹은 소비할 수 있는가가 척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한 만큼만 다른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맞으며, 딱 그만큼만이 그가 생산한 노동의 양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는 어떤 다른 노동을 전혀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윤을 챙겨간다. 칼 맑스는 이 부분에 주목한 것이다. 노동 없이 발생한 이윤은 어디서 발생한 것인가? 맑스는 이 이윤이 노동자의 임금의 일부분을 착취한 결과라고 주장한다.젠트리피케이션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본가인 임대인이 노동자인 임차인, 즉 문화·예술가로부터 노동을 착취하는 셈이다. 사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임대-임차인의 관계 자체가 칼 맑스가 지적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임대인은 아무런 노동 없이 임차인으로부터 임차인이 노동의 대가로 창출한 임금 혹은 소득의 일부를 빼앗아 간다.우리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문화·예술인들은 장사가 잘되어 수익이 보장되는 보이지 않는 환경을 조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노동을 착취당한 채 아예 생계 터전으로부터 쫓겨나게 됐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성한 문화, 예술 그리고 상업적 아우라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재화와 같은 상품 혹은 계약서와 같은 물리적인 법적 효력과 달리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손쉽게 빼앗긴다. 항상 이용당한 후 쫓겨나야만 하는 이들은 문화·예술인이라는 어)노동 소외론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서 우리는 맑스의 노동 착취론 뿐만 아니라 노동 소외 이론도 발견할 수 있다. 노동소외론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노동을 통해 드러낸 결과가 생산물인데, 그 생산물이 상품화되면서 더 이상 그 생산물이 생산자의 것이 아니게 되는 상황을 그렸다. 문화·예술인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자신이 만들어낸 일종의 창조적 아우라에 임대료라는 가격표가 붙고 상품화 되면서, 더 이상 이에 대한 어떤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일체의 향유도 못하게 되며 그저 쫓겨나기 때문이다.물론 이 창조적 아우라가 문화·예술인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품 혹은 생산품은,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이야기 하면, 에이도스를 갖고 만든 것이지만 창조적 아우라는 문화·예술인들이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창조적 아우라는 한 개인의 문화·예술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다수의 문화·예술가가 조금씩 형성해낸 것이기 때문에 창조적 아우라에 대한 소유권을 개인이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그러나 어떤 노동의 결과가 에이도스를 통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부산물에 대한 권리를 다른 이가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같은 맥락에서 직접적인 생산자가 아닌 한 그 부산물에 대한 향유도 생산자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정당화 될 수 없다. 노동의 결과에 대한 소유와 향유는 오로지 생산자만이 이룰 수 있다. 또한 창조적 아우라가 계량 불가능 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에게 귀속될 수 없고, 따라서 개개인의 문화·예술인들은 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반론도 타당하지 못하다. 우리는 문화·예술인들을 유적존재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현상이 한 개인에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아우라를 형성한 대다수의 문화·예술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저마다 각자가 창조적 아우라를 형성하는데 얼마만큼의 공헌을 했나’를 따져 묻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무의미허물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일이다. 따라서 문화의 가치가 가격표에 의해 정해진다는 점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순 없고 동시에 사회시스템이 자본주의적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처럼 사회 체제 자체를 변화시켜야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또한 자본가의 자본 또한 그들의 과거 노동의 결과로 얻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이 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를 따르려고 한다. 즉,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는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어야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맑스를 들어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통찰하는 이유는 이 문제에 있어서 문화·예술인들이 그들의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심지어 오히려 칼 맑스가 지적한 노동착취의 문제는 사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더욱 잘 들어맞는 듯하다. 왜냐하면 맑스의 노동착취는 노동자 임금의 ‘일부’를 자본가가 착취하는 것이지만,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이 형성한 창조적 아우라, 즉 노동생산물의 ‘전부’를 자본가들에게 빼앗기며 또한 문화·예술인들은 자신의 생산물인 창조적 아우라로부터 ‘완벽하게’ 소외된다는 사실 때문이다.이런 현상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문화·예술인들의 노동의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재화나 서비스에 대해서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길 꺼려한다. 보이는 재화나 서비스를 아무런 대가 없이 취득하는 경우 이는 도둑질이나 강도질이 되어버리나 보이지 않는 재화나 서비스의 경우엔 법적인 제도장치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3. 해결방안1)현 지방자치단체의 대응이와 관련하여 서울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이를 해결할만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이와 관련된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외부인사를 초청하여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나름의를 맡고 있는 커뮤니티 전문가다. 그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지역자산화 전략’을 대안으로 꼽았다. 지역자산화 전략이란 지역별로 공동체가 구성, 공동체 기업 형태로 지역자산을 소유 및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의 경우 대표적인 예로 런던의 ‘코인 스트리트 커뮤니티 빌더스’ 공동체 기업을 들 수 있다. 이 공동체기업은 런던 중심부에 버려진 부지에 협동출자를 하는 방식으로 주택, 가게, 갤러리, 식당, 카페, 공원, 스포츠 시설 등을 만들고 보육, 합숙, 가족 지원, 기업 지원 등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맞서는 영국의 방식에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이 공감하여 이와 같은 대응책을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소극적인 해결노력이다. 문화·예술인들 스스로가 생산해낸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자 스스로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어패가 있어 보인다. 아마 로크가 살아생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통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소유권은 주장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노동해서 생산해낸 것이라면 무엇이든 절대적으로 그에게 속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역자산화 전략은 노동의 결과물, 생산물과 관련하여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노동을 다시 한 번 주문한다.맑스를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문제를 통찰했다고 하더라도, 맑스와 같이 경제사회로서의 현대시민사회 전체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칼 맑스의 해결책을 따르자면 임대인의 재산권에 대한 침해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를 따르겠다는 이 논의에서도 벗어난다. 또한 그렇다고 지역자산화처럼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해결을 문화·예술인들에게 떠넘기는 것도 불합리하다.따라서 각자 개인의 재산권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 재산권에는 보이지 않는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도 포함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핵심이 생산자의 생산물에 대 한다.
1. The companyHOW evian® CAME TO BE ? In 1789, The Marquis de Lessert, a distinguished nobleman from neighboring Auvergne, France decided to seek relief of his kidney problems. He regularly strolled in the nearby town of Evian and one day sampled the water which ran from a spring on the property of Monsieur Cachat. He found the water “light and easily passed” and was determined to drink it regularly. It cured him, and the news spread. Specialists made their analyses and gave their approval. Crowds began to gather to sample the effects. Encouraged by Lessert’s advocacy of the ‘miraculous’ water, local doctors began to prescribe it as a health remedy thus began a fascinating history that continues to this day.
인간과 언어-인간, 언어 그리고 종교-철학과2009640008나재헌목록1. 서론2. 본론(1) 언어 → 인간(2) 언어 → 인간 → 종교? 기독교? 불교3. 결론4. 참고문헌1. 서론인간과 언어라는 과목을 통해 얻고자 하였던 지식은 사실 주로 언어 그 자체를 다루는 언어학이 아니라, 과목명에 명시된 바와 같이, 말 그대로 인간과 언어의 관계를 알고자 하였다. 자세히 말해 “의사소통의 도구로써의 언어와 그것의 화자로서의 인간”이라는 언어와 인간의 관계가 종속된 대상과 독립된 대상이라는 상하 관계를 지칭한다면,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알고자 하는 인간과 언어의 관계는 1:1 관계로서 상호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즉,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언어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언어는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가 우리의 주된 관심사이며 후자가 주제가 될 것이다.실제로 언어는 인간의 수많은 도구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용자로서 인간이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뜻 보기에 당연해 보인다. 반대로 라캉과 같은 구조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의 정신, 정확히는 주체의 형성이 언어라는 사회적 그물망을 통해 형성된다고 한다.인간 → 언어언어 → 인간사실 인간이 언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예들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어 보인다. 인간이 처한 환경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언어를 쓰게 하였는가를 보면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이누이트 족이 사용하는 ‘눈’이라는 어휘의 다양성, 농경사회에서의 농작기구들에 대한 수많은 어휘들 등을 들 수 있겠다. 도식적으로 살펴본다면,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간이 언어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겠다.문화 → 인간 → 언어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언어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간이 자신의 환경, 문화, 사상에도 영향을 받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물론 직관적으로는 당연히 문화와 사상 또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반대로의 방향 또한 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먼저 언어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지, 그리고 그 인간이다.’라는 동사를 통해 그 책의 전체를 읽고 있는 것인지, 부분을 읽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정보가 부가되는 각각 다른 동사를 사용하고, 터키어의 경우 철수가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직접 본 것인지, 아니면 전해들은 것인지에 따라 각각 다른 동사가 사용되어 한국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보다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이런 예를 보면 각각의 언어들은 어떤 같은 명제를 표현하더라도 해당 언어의 화자에게 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화자가 세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학자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가 말하는 것을 보면 세계를 파악할 때 다른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며, 따라서 그것에 맞게 그들의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학자들은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사실은 같으며,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사실 또한 같으나 단지 언어가 다르게 표현될 뿐이라고 주장한다.호주의 북부에 ‘Pormpuraaw’라고 하는 조그만 사회가 하나 있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왼쪽, 오른쪽, 앞, 뒤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어휘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동, 서, 남, 북, 즉 방위의 개념을 사용하여 방향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네 왼쪽에 있는 컵 좀 줄래?” 대신 “네 남남서쪽에서 약간 더 서쪽에 있는 컵 좀 줄래?”라고 하는 식이다. 따라서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공간에 대한 지각이 우리와 다르다. 좌우앞뒤의 개념은 세상에 ‘나’를 중심에 두고 세계를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주관적 관점이고, 방위의 관점은 세계를 고정시켜두고 나를 그 위에 위치시키는 관점이다. 이들에 대한 재밌는 실험이 하나 더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카드(가령 태어나서 성장하여 죽음에 이르는 사람을 묘사한 일련의 카드뭉치들)들을 그에게 준 뒤 순서대로 나열하는 실험이었다. 우리의 경우 카드를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놓는 것이 ‘차례’대로 놓는 것일 것이고, 반면 히브리어 화가 없을 듯싶다.스텐포드 대학교에서 실시한 또 다른 실험이 있다. 실험자는 영어화자가 스페인어화자나 일본어 화자에 비해 ‘주어’를 확실히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파악했다. 가령 영어에서는 “철수가 병을 깨뜨렸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스페인어나 일본어에서는 “병이 깨졌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을 바탕으로 실험을 실시되었다. 당연히 피실험자는 영어화자, 스페인어화자, 일본어화자로 구성되었다. 우선 피실험자들 모두에게 누군가 계란을 깨뜨리고, 물을 엎지르고, 풍선을 터뜨리는 등의 영상을 시청하게 했다. 그 후 피실험자에게 ‘누가’ 일을 저질렀는지 기억 하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영어화자의 경우 대부분 사건의 주체에 대해 기억했지만 스페인어나 일본어화자의 경우 누가 그랬는지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실험은 언어의 사용 습관이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지의 유무를 확실히 보여주는 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이 밖에도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은 많다. 이제 우리는 언어에 영향을 받은 인간이 문화?환경에 영향을 미치는지, 미친다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찾아볼 것이다.(2)언어 → 인간 → 문화여기서 주의해야할 사항이 있다. 종속변수로서의 문화의 변화가 과연 언어라는 독립변수의 산물인지 계속해서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언어가 인간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 인간이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두 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도식적으로 보면언어 → 인간 + 인간 → 문화 = 언어 → 인간 → 문화 (?)이 관계가 반드시 필연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직관에 의존하여 판단하기 보다는 언어에 영향을 받은 인간이 환경, 문화, 사상,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는지 구체적인 예와 함께 분석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2)-1 기독교서양 문화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에 기독교 사상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약 2000년 전부터 서구던 이유는 시대적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는 교리가 가장 ‘믿음직’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여기서 ‘믿음직’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가 가장 합리적이었다든지 혹은 교리가 실제와 부합하는 증거가 많다든지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직’하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와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 사람들의 학문적 사상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플라톤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세계가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었고, 이는 기독교의 현세와 내세(천국)라는 세계관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다. 또한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와 천국은 초감각적 세계로서 지향의 대상이 된다는 점, 의식의 고양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영혼의 왕국이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이는 한편으로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또한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이런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변화와 운동이 존재하는 현상계와는 달리 영원불멸한 것인데, 이런 ‘영원히 변치 않는 세계’라는 컨셉이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파르메니데스가 ‘영원히 변치 않는 세계’를 가정했던 이유,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언어에 있다. 먼저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없음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으며, ‘無’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러한 전제를 갖고 논의를 이어갔다. 당시 그리스의 언어를 보면 지금의 영어와 같이 ‘있음’과 ‘~임’이라는 뜻을 모두 be동사가 표현했다. 즉 예컨대 한국어처럼 상태를 나타낼 때 ‘~이다’를 사용하고, 존재를 나타낼 때 ‘있다’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is를 사용한 것이다. 도식적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있음 없음is is not임 나타내는 동사를 혼용하였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사상가 혹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의 초월적 세계관을 갖게 하였으며, 이것이 서구세계가 기독교를 주된 종교로 받아들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2)-2 불교동양 문화의 영향을 미친 종교로는 불교를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불교의 중심 사상은 자비(Maitri-karuna)사상이다. 먼저 자비의 개념은 산스크리트어를 통해 어원적으로 살펴보아야 의미가 명확해 진다. 자비를 뜻하는 Maitri-Karuna의 마이트리(Maitri)는 우정을 뜻하는 말이며, 카루나 (Karuna)는 연민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두 개념은 상투적인 의미로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그 개념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 각각 주체로서 대칭적인 관계를 형성하는지, 혹은 주체와 대상간의 비대칭적인 관계를 형성하는지를 따져본다면 큰 차이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이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구도’라는 개념을 알아야하는데, 간단히 말해 구도란 ‘불법의 정도를 구함’이라는 뜻으로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이며 구도자란 ‘도를 깨우친 사람’을 뜻하고 구도의 대상은 ‘도를 깨우치려는 사람’을 뜻한다.우선 마이트리(우정)는 구도자와 구도의 대상간의 관계가 벗의 관계로 평등하다. 구도자와 구도의 대상 둘 모두 잠재적으로 불심(깨달음에 도달하는 데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지니고 있으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즉, 구도자가 구도의 대상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조력자이기는 하지만 그 관계가 평등관계인 것이다. 반면, 카루나(연민)의 경우, 구도자와 구도의 대상 사이의 관계가 수직적이다. 따라서 구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불쌍한 중생들의 구도를 위해 힘을 쓸 암묵적인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다.불교는 경전을 통해 전파되었다. 3세기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 시절에는 티베트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티클라마칸 지역으로 퍼졌으며, 이 경전이 후에 중국으로 넘어와 서부 아시아로 전파 되었다. 이 때, 초기 불교는 ‘Byama-p되었다.
우리나라 철학교육의 개선 방향.-프랑스 철학교육을 롤 모델로 하여-서울시립대학교철학과2009640008나재헌목차들어가는 말1. 철학의 정의(定義)와 철학의 목적Ⅰ. 철학의 정의(定義)Ⅱ. 철학의 목적2. 프랑스 철학교육과 우리나라 철학교육의 차이Ⅰ. 프랑스 철학교육① 교육방법② 평가방법Ⅱ. 우리나라 철학교육① 교육방법② 평가방법3. 개선 방향 -프랑스 철학교육의 도입-맺는 말들어가는 말대한민국의 중등교육을 받고 있는 중·고등학생들 중 상당수가 철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들 뿐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철학이 무엇인지 모른다. ‘철학’이라고 하면 대개 점집을 떠올리며 작명(作名)을 하거나 관상을 봐주는 곳인 줄 안다.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철학의 위상이 어쩌다가 이렇게 실추된 것인지, 혹은 어쩌다가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몰상식한 나라가 된 것인지 원인을 분명히 파악할 수는 없다. 반면, 우리나라와 교과과정과 평가방법이 확연히 다른 프랑스에서는 철학을 굉장히 중요시하며 국민들도 그 해에 바칼로레아가 실시되면 꽤 오랜 기간 그 문제를 상기하며 열띤 토론을 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정서적 분위기로 미루어 봤을 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과정과 평가방법이 이 사태에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비판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사고력을 제고하는 철학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는 프랑스의 교육방침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철학 교육을 고찰해 보고 철학이 갖는 목적을 통해 철학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상기하여 우리나라 고등학교 철학교육의 부족한 점과 개선할 점을 찾아보기로 한다.우선 1장에서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목적을 분명히 하여 다시 한번 철학의 정의를 상기 시키고, 2장에서는 프랑스 철학교육과 우리나라 철학교육의 대조시켜 우리나라 철학교육이 철학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3장에서는 1장과 2장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 철학교육의 개선방향을 프랑스 철학교육을 롤 모델로 하여 제시하고자 한다.1. 철학의 정의(定義)와 철학의 리스 어의 Philosophia에서 유래 했다. 접두사 Philo-는 ‘사랑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고, sophia는 ‘지혜’를 뜻한다. 따라서 Philosophy는 지(知)를 사랑하는 것, 즉 ‘애지(愛知)의 학문’이란 뜻이다. 「Naver: 백과사전: 철학 [哲學, philosophy]」,『Naver』, , (2009. 12. 6.)어원적으로는 그렇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철학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임마누엘 칸트는 ‘철학은 가르칠 수 없고, 다만 철학하는 법을 가르칠 뿐이다’라고 했다. 그만큼 철학이 무엇인지 명명백백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실재로 우리나라 철학 교과서에서도 철학이 무엇인지 전혀 서술하지 않았고, 단지 철학의 동기만 서술할 뿐이다.명명백백히 구체적으로 철학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는 없을 지라도, 그 카테고리를 넓혀 추상적으로 정의해 보자면, 철학은 과학이나 도덕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고민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과학은 무엇인가가 왜 비존재가 아니고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답할 수 없고, 도덕은 도덕이 명령하는 행동에 대하여 왜 근원적으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이런 물음에 관하여 연구하고 사고하는 것이 철학이다. 물론 혹자는 종교도 이런 물음에 대하여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가 신학과 관련하여 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그 둘 사이에 차이점은 존재한다. 철학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다. 물론 종교도 합리적으로 현상이나 사태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신(神)에게 의지하여 신념이나 신앙으로 대답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스티븐 로, 『철학학교1』, 하상용 역, ㈜창비, 2004, pp.6~7.1-Ⅱ. 철학의 목적아무리 일상적인 문제에만 골몰하는 사람이라도 그 나름대로 자기 삶의 철학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드물며,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철학적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간에게 철학은 철학적 호기심의 목생활에 유익한 결과를 이끌고자 함이다. 그러나 철학은 수학, 물리학, 경제학 등 일반적인 학문과는 그 성격과 목적을 달리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철학은 지혜를 사랑함이다. 따라서 지혜를 갈구하는 행위 자체에 목적을 두지, 얻어진 지혜를 다른 어딘가에 사용할 목적을 갖진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철학은 철학 함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2. 프랑스 철학교육과 우리나라 철학교육의 차이2-Ⅰ.프랑스 철학교육2-Ⅰ-① 교육방법철학교육을 떠나서 프랑스의 교육 방법은 독서로부터 출발한다. 교과서가 아닌 문학책들을 읽고 요약하고 비판하는 것이 주가 된다. 그러한 글쓰기는 보통 발표와 토론으로 이어지는데, 보통의 경우 어떤 주장을 하든지 반론이 쏟아진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방법은 온갖 수사력과 독서로부터 얻은 지식들을 총 동원하여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것밖에 없다. 최병권, 이정옥,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1』, 서울: ㈜휴머니스트 퍼블링싱 컴퍼니, 2003, p.14.이러한 방법으로 사고하는 법을 몸으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 기본이다.대학입학자격시험 응시자들에게는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에 관계없이 철학 개념들의 목록과 이에 관련된 문제들의 목록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철학자들의 목록이 주어진다. 철학 개념이라 함은 예를 들어 크게 나누어 보면 인간의 조건, 지(知), 행동으로 나뉜다. 이러한 개념들에 관하여 완벽히 숙지한 다음 그와 관련된 철학적 문제를 제시한다. 그 다음으로 철학자들에 관하여 배우는데 그 목적은 그들의 사고과정을 알고 이해하여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배경이 되게 함이다. 김예숙, 「프랑스 고등학교의 철학교육」,『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 6집, 2002, pp.41~7.고등학교 3학년에게 행하는 철학 교육은 각각의 학생이 스스로 사고(思考)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 앞으로 그들이 갖게 될 개별적인 의무 사항들과 공공의 의무 사항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식을 개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프랑스 교육부는 철학 수업을 통해 ‘의미들’에 대해, 그리고 훈련시킨다. 또한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는 미디어에 대항하여 비판의식을 길러줄 것을 의무로 삼고 있다. 위의 책, pp.36~7.이러한 교육방법과 목적은 철학의 목적에도 부합한다. 철학의 목적은 철학함이고, 철학함이란 간단히 말하여 사고(思考)함이다. 독서로부터 시작하여 요약, 비판하는 글쓰기 과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발표와 토론은 우선 철학함의 기본자세를 가르친다. 이를 통하여 자유로운 사고를 유도하며 철학교과시간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 사고의 결과를 효과적으로 주장하는 법을 가르친다.2-Ⅰ-② 평가방법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소논문 형식으로 답안을 제출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평가방식에 객관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논문과 텍스트 주해시험의 채점과 평가는 채점자인 철학교사의 고유한 주관적 판단과 신념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 철학교사는 자신의 생각 및 입장과 무관하게 수험자 자신의 분석에서의 논리성 및 논증의 타당성과 건전성이 주(主) 평가대상이 된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주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윤성우, 「프랑스에서의 철학 교육에 관한 소고-바칼로레아의 교사의 역할 및 자격을 중심으로-」,『프랑스학연구』, 제 31권, 2005, p.524.또한 우리나라의 수능시험의 출제와 채점이 대학교수 위주로 이루어지는 반면, 프랑스에서는 소집된 일선 철학교사들이 출제와 평가를 하는데, 그들은 채점의 원칙들을 잘 익힌 후 임하게 되고, 모범답안이 있으며 매우 구체적인 채점 기준표가 지급되므로 채점자의 주관성은 극히 배제된다고 한다. 채점자는 철저히 기준표에 의거하여 채점을 하며, 채점 기준표는 어떤 언급이 있으면 몇 점을, 또 어떠한 요지의 글이면 몇 점을 주라는 식의 지침이다. 김예숙, 앞의 책, p.36.물론 프랑스 철학교육이 요구하는 공통적인 철학적 지식과 각자가 비판적으로 자기반성을 이루어낼 수 있는 고유한 능력 사이의 딜레마가 존재할 수 있으나, 철학 함 이라는 철학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2-Ⅱ. 우리나라 철학교육2-Ⅱ-① 교육. 더구나 철학은 우리나라 수학능력시험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철학의 대체예로 생각하는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이 존재하는데 실상 철학(哲學)이라기보다는 철학사(哲學史)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어떤 사태에 대한 나름의 비판의식을 길러주는 식의 수업은 일체 없으며,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생각을 배울 뿐이다. 프랑스로 치자면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방법 없이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는 식이다.윤리와 사상이라는 교과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교과는 도덕적 지침과 그에 상응하는 사상을 가르치는데 그친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일괄적으로 배부하는 윤리와 사상 교과서의 머리말에도 “『윤리와 사상』은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적인 윤리관과 사상적 틀을 형성하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로 보아 윤리와 사상이라는 교과는 자율적인 사고를 장려하기 보다는 도덕적 틀을 마련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물론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교사는 그러한 지침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의 자율적인 사고를 펼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수학능력시험이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2-Ⅱ-② 평가방법앞에서 언급했듯이 수학능력시험에는 철학이라는 과목이 없다. 내용상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이 철학을 대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시험문제의 유형상 이미 철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수학능력시험은 수리영역의 몇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객관식으로 출제 된다. 국한된 범위 내에서 답을 골라야 하는 성격의 유형은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칠 수 없게 만든다. 철학은 무한한 사고의 범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오지선다의 객관식 유형의 시험은 오직 다섯 가지 카테고리 안에서의 사고만을 허용한다. 그러므로 고등학교 교사는 다양한 사고를 허용하기 보다는 사고의 폭을 좁혀 오지선다 안에서 답을 맞출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철학함을 가르치기 보다는 철학사(哲學史)가르치는 것이 더 효율적.
[the great gatsby]인문 고전 서적에 부쩍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요즈음,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발간하는 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 위대한 개츠비가 올라와있는 것을 보고 꼭 한 번 읽겠다고 다짐한지 오래지 않아 영화로 개봉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후로 영화가 개봉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마침내 시간을 내어 보러 갔다. 책으로 읽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영화 자체만을 보고 평가하자면 ‘꽤 잘 만든’ 영화였다고 말하고 싶다.줄거리가 끝까지 전개되기 전, 처음 작품의 내용을 모를 땐 이게 무슨 삼류 연애/로맨스 영환가 싶었다. 개츠비의 오래된 사랑, 비극적인 헤어짐, 그 헤어짐이라는 결과를 바꾸려는 주인공의 노력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차마 걸작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무렵에 다다를수록 어느 누구도 캐치할 수밖에 없는 작품의 풍자 메시지가 극명하게 드러났고,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읽은 순간, 무엇이 ‘위대한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든 것인지 알 수 있었다.작품을 접할 때는 시는 물론이고 소설 또한 그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표현되어서인지 이 영화가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영화야 원래 ‘미장센’이라는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여태껏 나온 모든 영화들이 필연적으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고, 또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즉 타 삼류 영화도 그 정도의 시대상은 반영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와 그 영화 간의 차별성을 느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소설의 미장센은 독자가 행간을 통해 직접 만들어 내야한다. 즉 미장센을 구축하는데 소설이 얼마만큼의 도움을 주며, 얼마만큼의 여지를 주는가가 작품성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소설의 경우에는 시대상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가가 영화보다 훨씬 극명하게 나타나며, 그것이 작품을 위대하게도, 삼류로도 만드는 것이다.여기서 원작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드러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에 대한 소설의 우월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소설은 글로 표현되기 위해 만들어졌고, 영화는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탄생의 방법론적 방향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순히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소설은 어찌됐든 언어로 표현되는 예술이기 때문에 언어가 그 언어의 한계성을 넘어서는 순간 그 작품은 어느 정도 예술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지만, 영화는 시각, 청각 등의 감각을 모두 자극할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에 언어의 한계성을 뛰어넘기에 소설보다 훨씬 용이한 측면이 있으며, 그러므로 예술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소설보다 조금 더 다양한 접근 경로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소설을 영화화 할 때에는 행과 행 사이에 감추어진 것들도 표현되어야 하는데, 주의할 점은 원작을 훼손할 정도의 표현은 당연히 지양되어야 한다. 소설의 영화화에 따르는 이러한 제약 혹은 의무가 그 과정의 필연적인 한계가 될 것이다.이러한 필연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 ‘위대한 개츠비’가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음악과 디카프리오의 연기력 덕분이다. 원작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세트와 배경에 대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굳이 평하자면 ‘흠잡을 데가 없다’ 정도. 미술 감독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원작의 느낌을 훼손시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음악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시대상을 반영하기는커녕 반대로 1920대의 음악이 아닌 현대의 대중음악을 사용하였는데, 소설의 영화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로 읽혀졌다. 독자는 원작을 읽을 때 텍스트가 표현하지 못하는 청각적인 부분을 개개인의 경험에서 끌어다 메운다. 현재 개봉된 영화를 보는 관객은 대부분 현대 대중음악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 작품 속의 행간에 현대 대중음악을 삽입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그것에 부응하여 영화 또한 관객이 독자로서 책을 접할 때 상상했던 것에 공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을지 관객이 작품 현장에서 느낄 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을지 모르겠지만 음악의 선택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디카프리오의 연기도 단연 최고였다고 말하고 싶다. 성공한 신흥 부자로서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보자마자 ‘아! 미국인!’이라는 느낌 또한 멋들어지게 표현해 내며 명불허전임을 증명했다. 그의 연기에서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감정이 폭발하는 씬 보다는 약간은 모노토너스한 부분이었는데, 예를 들어 첫 등장에서 닉에게 보여주는 ‘신흥 부자 미국인의 미소’라든지 하는 부분이었다. 얼핏 보면 가볍게 여길만한 씬 이지만 생각해보면 그만큼 그 표정과 아우라를 미국사람처럼 ‘만들어’ 낼 배우도 드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