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별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하나님께서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을 택하심으로써 인간 타락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족들이 주요 등장인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궁극적인 주역이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내러티브에 적용된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그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으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오직 하나님께서 가족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실 때 비로소 하나님 이야기는 그들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줄거리가 전개되는 방식과 주요 등장인물들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내러티브 중 일부가 되는 과정을 계속 주시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약 백성에 관한 더 큰 이야기에 필수적인 하부 줄거리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하부 줄거리들 가운데 여섯 개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전체 성경 이야기에 필수적인 하부 줄거리들 가운데 첫째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처음으로 맺은 두 언약이다. 첫째 언약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통해 모든 인류와 맺은 것으로서 다시는 지상에서 물로 생명을 멸절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둘째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것으로서 특별히 두 가지 약속, 즉 큰 민족을 이룰 후손을 주고 그들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과 땅을 선물로 주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이 둘째 언약은 이삭과 야곱에게 반복되고 있으며, 그 후에 구약의 두 언약, 즉 율법을 선물로 주시는 언약과 왕을 선물로 주시는 언약을 맺는 근거가 된다. 둘째 하부 줄거리는 창세기에는 다소 미묘하게 나타나지만 그 이후의 성경이야기에서 전개되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주제에는 중요하다. 이 줄거리는 뱀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더불어 시작한다. 하나님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라고 뱀을 저주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용어는 선택받은 백성과 관련해서 12:7에서 다시 채택된 후손이다. 이 저주는사건이다.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거듭 상기해야 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 하셨나니 그리고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라고 고백했다. 둘째 에덴동산에서 상실한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이것은 이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규정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된다. 이 주제는 “하나님의산”에서 모세가 부름 받는 사건과 함께 등장한다. 그때 그는 “하나님 뵈옵기를”두려워한다. 이 주제는 19장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 산 앞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은 산을 범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장엄한 신현을 경험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주는 두려움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백성들에게 내려가는 행동을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모티프의 핵심적인 성격은 특히 25-40장에서 볼 수 있고, 32-34장의 앞뒤에서 성막에 관한 내용을 반복해서 기술하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그 이유는 성막이 회막의 기능을 수행하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들 다룬데 거하시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말라고 하나님께 간청한다. 셋째 핵심적은 요소인 십계명과 함께 율법을 받고 이어서 언약의 책이 등장한다. 이 율법들은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간계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언약의 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낼 것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내러티브에서 처음 등장한 율법에 관한 내용은 오경의 마지막 세 책에서 제시알 율법에 대한 더욱 상세한 설명을 미리 보여준다. 여기서 또한 이 율법들이 “봉신조약”으로 알려진 고대의 계 그 언약의 약속을 성취 하실 것이다. 둘째로는 가나안 정복은 거룩한 전쟁의 두 번째 단계를 포함한다. 첫 번째 단계는 모세가 주도했으나 신적인 전사이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통해서 수행되었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개입하도록 의도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려고 노예 상태에서 구출하셨지만, 가나안을 실제 정복할 때는 그들이 나서야 한다. 이것은 민수기에 두 개의 인구 조사 명단이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인구 조사는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을 계수하고 지파들을 전투 대형으로 성막 주위에 배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 등장한 명단은 출애굽 1세대가 가데스를 경유한 정복 전쟁을 대비하려는 것이며, 두 번째 명단은 출애굽 2세대가 요단 동편을 경유한 정복전쟁을 대비하려는 것이다. 셋째로는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직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을 기억하라 독자들은 이 내러티브 안에 삽입되어 있는 다양한 법에 관한 단락들을 읽을 때 그것들이 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민수기에 등장하는 성막의 중심적은 역할과 제가 직무에 관한 것들은 지금까지 오경에서 관심의 대항이었던 두 요소를 계속 강조한다. 그 두 요소는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올바른 예배다.신명기여호수아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연속적인 이스라엘 역사가 주로 신명기의 관점에서 서술되었으므로 이 부분의 역사를 신명기적 역사라고 부리게 되었다. 또한 신명기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와 예레미야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을 통해서 신명기의 영향은 신약의 중요한 인물들에게도 파급되었다. 신명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끄는 요인이 있다. 그것은 절대적인 유일신 신앙이다. 신명기에서 이 신앙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깊은 관심과 결부되어있다. 이것은 자기 백성을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 셋째, 모든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언약적 충성에 달려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원리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책의 서두에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 것도 경국 이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사기사사기를 읽을 때에는 전통적으로 사사들이라고 번역되 있는 단어가 이 책에서는 일차적으로 법관들을 가리키지 않고 도리어 그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일부를 위협한 대적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순가 지도자이며 부종장 이었던 것,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다”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표현들이 계속 나오기는 하지만, 모든 사사들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지도자 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한 지파나 몇몇 지파들이 압제를 당하면서 다른 지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언제나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며, 도리어 지파들 간의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것, 이 책에는 연대기적 표현이 여러번 나오고, 전체 구조는 간헐적인 이방민족의 압제로 시작해서 블레셋의 압제로 끝나는 당시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을 유의하며 읽어야 한다.룻기기근이 들자 엘리멜렉 가족은 여호와께서 조신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가서 살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죽음과 빈손뿐이었다. “희락”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오미는 자신을 “괴로움”이라고 부르고, 고향 곧 풍성한 수확물을 거둔 “떡의 집”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해서 소망에서 성취로의 여정, 즉 그녀의 궁극적인 기업 무를 자가 될 아들을 얻는 여정을 시작한다. 나오미의 이런 행동을 통해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그 사건들은 마침내 이스라엘이 위대한 왕을 얻는 것으로 이어진다. 독자들은 4:14에서 베들레헴 여인들이 나오미를 이렇게 축복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그리고 이 축복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다수가 언약에 대해 불성실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열쇠는 왕이 하나님과 맺은 어냑에 충실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열왕기에서는 이것을 신명기적 용어로 표현한다. 즉 왕은 중앙 성소에 대한 태도와 혼합주의나 이방신들, 특별히 가나안의 바알 숭배를 촉진시켰는지의 여부로 평가받는다.역대상?하이 시대는 회복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몇 차례 연기하다가 마침내 실현된 성전 건축 계획과 함께 주전 6세기 말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성전 건축은 주전 5세기 중엽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체계적 개혁과 더불어 실제로 추진되었다. 역대기 기자가 이런 시대, 즉 바사가 지배했던 유다 지방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했던 시대에 이 책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화복은 이사야가 예견한 영광스러운 “두 번째 출애굽”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최초의 징표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재건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교적 소수의 유대인 무리만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고, 두 번째 성전은 솔로몬 성전의 웅장함이 없었고, 약속된 영광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영적임 음울함이 예루살렘을 뒤덮고 있었고, 게다가 이방인들과의 결혼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학개와 스가랴가 나서서 제사장과 총독의 일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한 세대가 지난 후에는 제사장과 총독이 직접 나서서 개혁 운동을 주도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동일한 상황에서 역대기 기자도 나서서 유다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재진술한다. 이러게 하는 목적은 현 세대의 사람들로 과거의 위대한 역사와의 연속성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연속성이 유지될 수 있는 장소로서 성전과 성전 예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에스더하만이 유대인들을 말살하려다가 결국 자신과 가족이 모두 파멸하고 마는 이야기가 있느데,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처형대에 오히려 하만이 달린다. 하만은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려고 명령을 내리지만, 도리아 자시 재산이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그는 자신의 영예와 인정을.
영문밖으로 예수께 나아가자히브리서는 설교처럼 시작되고 진행되다가 마지막에만 서신처럼 끝난다. 히브리서는 바울서신들과 같은 편지 형식과는 판이하게 달리 아무런 시작인사도 없이 초대교회의 설교형식으로 시작된다. 히브리서 설교의 서론을 구성하고 있는 본 문단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각각 긴 한 문장으로 구성된 압축 문장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1:5~14는 구약의 일곱 말씀의 연쇄인용과 결론적 진술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서론을 히브리서 전체 설교 속의 한 작은 서교의 모델로 본다면, 히브리서 1:1~4는 서론, 히브리서 1:5~14는 성경인용과 해설 및 결론, 그리고 권면으로 이루어진 셈이 된다. 히브리서 설교의 서론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즉,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 “천사보다 뛰어나신 아들”, “이 아들을 통해 전해주신 그 큰 구원의 말씀을 우리가 경청해야함”이다. 히브리서 처음 1~4절은 위대한 설교의 장엄한 서막이다. 이 서론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초월적인 위엄을 보여주는 수단으로서의 계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원문에서 하나의 장문으로 이루어진 이 문단의 전체적인 주어는 하나님이지만, 의미상으로는 1~2절의 주어는 하나님이고 2~3절의 주어는 아들이기 때문에 의미상 주어를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아들에 대한 묘사”이다. 히브리서 설교의 서론을 구성하는 두 번째 문단에는 서론의 서론 마지막 부분에서 선언한 내용, 즉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들보다 뛰어나다는 논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이 연쇄적으로 인용된다. 모두 열두 구절로 구성된 본 문단의 마지막 구절은 결론적 진술이기 때문에 나머지 열한 구절은 구약성경 인용문 일곱으로 구성된다. 이 일곱의 구약 연쇄인용문 중에서 다섯은 시편에서 하나는 전기예언서에서 다른 하나는 모세 오경에서 인용되었다. 히브리서2:1~4는 히브리서에 나오는 경고들 중 그 첫 번째로서 아들을 통하여 전해진 말씀을 무시할 위험에 대한 경고이다. 이 엄에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으로 각각 재연된다. 히브리서 1~2장은 한 마디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그 말씀을 받아 전해준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었다. 히브리서 3~4장은 구약의 중심인물인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을 그리는 것으로 출발한다. 히브리서 5~7장은 히브리서 설교 내의 일곱 개의 성경강해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한다. 이 세 번째 강해는 지금까지 미루어온 대제사장에 대한 내용인데, 시편 110:4의 인용과 해석으로 이루어진다. 멜기세덱의 반차에 대한 설명을 위하여 창세기 14장이 부차적으로 인용되고, 이 주제를 위하여 히브리서 6장이 온통 할애된다. 이 단락이 길어진 이유는 중간에 끼어든 경고 구절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세 번째 강해는 히브리서 5:6~7과 7:17,21에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또한 여러 군데에서 암시되어 있어서 묶음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주제구절 역할을 하는 시편 110:4를 중심으로,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임을 증명하는 성경강해이다. 새 언약에 대한 구약 말씀인 예레미야서 31장을 인용하여 강해하는 제 4 강해는 히브리서 설교를 구성하는 일곱 강해 중에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 8:8~12에서 이루어진 예레미야서 31:31~34의 인용은 신약에서 이루어진 구약의 인용문 중에서 가장 길다. 이 네 번째 강해는 그 분량, 위치, 내용에서 가히 히브리서 설교의 절정이요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시편 40편이 보조 본문으로 인용되어 감동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히브리서 8~10장 은 히브리서의 기독론적 주해의 심장부이다. 주제는 언약, 성소, 그리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옛 레위적 제의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간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의 대부분은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 물론 이 히브리서의 심장부의 논의가 이미 히브리서 7:23~28에서 예견되었다. 이 작업에서 저자는 예레미야 이 단락의 구조에서는 대칭구조인 다양한 교차대구법이 사용되었다. 히브리서에서 제 5강해를 형성하는 히브리서 10:26~11:40은 비교적 길다. 그래서 중첩구조로 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문단을 크게 하나로 단순하게 볼 수도 있다. 즉, 히브리서 10:26부터 경고로 시작하여 10장 말미에서 다시금 권면과 함께 강해할 수절은 인용하고, 히브리서 11장에서 긴 목록의 예증을 통하여 강해와 권먼을 한 다음 마무리한다. 이렇게 되면 히브리서의 제 5 강해의 구조는 경고적 서론, 권면과 성경인용, 예증을 통해 인용된 성경에 대해 강해하기, 요약과 결론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본서에서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중첩구조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는 히브리서 설교의 다섯 번째 강해를 경고적은 서론: 배도의 죄와 심판의 실제성, 소망을 새롭게 하라는 권면과 강해할 성경인용, 예증을 통한 성경강해, 요약적인 결론 이렇게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구조에서 예증을 통한 성경 강해와 권면자료 및 요약적 결론의 역할을 하는 히브리서 11장은 단독으로도 잘 짜여지고 주의깊게 구성되어 한 단위를 이룬다. 히브리서 12장은 구약성경의 두 가지 말씀 인용과 강해로 이루어졌다. 히브리서 저자가 전반부에서는 연단에 관한 주제 하에 장언 3장을 강해하여 권면하고, 후반부에서는 시내산의 종말론적 완성인 시온산에 관한 주제 하에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본문을 염두에 두고 강해하여 권면한다. 히브리서 12장에는 11장과 달리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우선 장르 면에서 11장이 역사적인 이야기의 진술인데 반하여 12장은 목회적 권면이고, 11장은 직설법의 연속인데 반하여 12장은 명령법과 권유법으로 이루어졌고, 11장은 삼인칭이 사용된 강해이지만 12장은 일~이인칭이 동원된 현재 청중들을 향한 권면이다. 하지만 히브리서 11장 후반과 12장 초반은 연결어들로 긴말하게 묶여져 있다. 즉, 히브리서 11:39와 12:1의 “증거를 받다”와 “증인들” 그리고 히브리서 11로 묶어주는 일종의 묶음쇄가 처음과 끝에 위치한다. 이 문단은 비단 묶음쇄로만 묶여진 것이 아니라, 주제어들로도 묶여져있다. 히브리서 10장 후반부터 시작된 “인내” 가운데 견지되어야 하는 “믿음”이라는 주제가 11장에 이어 12장 전반부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히브리서 10:32, 36에 나왔던 “인내” 혹은 “참다”라는 어휘는 히브리서 12장의 1, 2, 3, 7절에 나오고 있고, 특별히 인내가 발휘되어야 하는 삶의 정황을 묘사하는 “징계”라는 어휘는 이 문단의 성경강해 부분에서 여덟 번이나 반복된다. 히브리서 12:1~13은 자연스럽게 3p 수분으로 나눠진다. 즉, 서론적 권면, 성경인용과 강해, 그리고 결론적 권면으로 구성된다. 이때 4절이 첫 문단과 둘 째 문단을 이어주는 돌쩌귀 역할을 한다. 4절에서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에서 청중에게ㄹ, 그리고 사용된 은유가 트랙경기에서 권투시합으로 전환되면서 이 지점에서 새로운 문단이 시작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두 번째 문단과 마지막 문단의 경계 신호는 12절의 설명적인 접속사이다. 히브리서 12:14~29에서는 구약성경의 어떤 구체적인 구절이라기보다는 옛 언약의 발원지인 시내 산에 대하여 묘사하는 구약의 본문을 강하게 암시하면서 자신의 강해를 진전시킴으로써 시온 산으로 대변되는 새 언약과 예T 언약을 강하게 대비시킨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마지막 강해를 경고성의 권면으로 시작하여 역시 경고성의 권면으로 마무리한다. 히브리서 12:14~17은 시작하는 경고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이다. 본 문단은 “따르라”라는 명령법으로 이루어진 14절의 일반적이 권면으로 시작하여 15~17절의 “살피라”라고 번역된 분사와 연결된 “없도록”혹은 “않도록”으로 번역되는 세 개의 부정어절로 구성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전 문단에서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나서 이제 다시 자신의 청중들을 권면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들의 이전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움을 피라게 해장이라기보다는 이미 나왔던 내용에 대한 부록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은 분명히 히브리서 전체 설교의 마무리이다. 이제는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던 성경인용과 강해 그리고 권면이나 경고의 형식을 벗어나서 주로 짤막한 목회적 주의사랑이 연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히브리서 설교의 목회적-신학적 정점은 12:14~29의 제 7 강해이기 때문에, 히브리서 13장은 하나의 큰 설교에 형식적으로 붙어 있는 부록 정도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즉 히브리서 13장의 전부 혹은 일부분이 히브리서의 진정한 부분이 아니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들로는 13장의 형식이나 내용이 앞부분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지점에서 앞장과의 분명한 일관성이 있는 연결점이 없어 갑자기 어조나 주제가 변한다는 점 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우선 히브리서 13장의 어휘와 주제가 히브리서 전체를 마무리 하기에 손색이 없다. 더욱이 이 마지막 장의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문단인 7~19절에는 히브리서의 이전 장들과의 주제적인 연관성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앞에서 나온 몇몇 주제들을 그저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요한 주제들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적용적인 권면에서는 오히려 최고 절정으로 끌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3장은 초대 교회 서신서들에 나타나는 마무리와 흡사한 면이 많다. 이 장은 목회적 주의사항과 공동체를 향한 권고사항으로 구성된 마무리권면, 하나님을 향한 공식적인 송영, 개인적인 안부와 인사, 그리고 간단한 축복 등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서신적 마무리이다. 히브리서 13장의 처음 문단인 1~6절은 네 개의 짝을 이룬 권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단순히 1~3절과 4~6절로 이루어진 두 개의 소문단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첫 소 문단은 평강과 상호 관심이 표명되어야 한다는 형제 사랑에 관한 권고이다. 이 형제 사랑은 손 대접, 그리고 감옥에 있는 자들이나
아모스서의 형성과 신학예언은 짧은 마디들로 전해진다. 이점이 아모스와 같은 책을 읽는 일이 창세기나 마가복음, 또는 로마서를 읽는 것과 다른 이유이다. 아모스서는 이야기 전개가 거의 없고, 생각의 줄기도 없으며 내적인 일관성 때문에 관심을 끌 만한 절이 몇 절 혹은 기껏해야 한 장도 채 못 된다. 예언은 짧은 마디들 속에서 발원하였고 짧은 마디들로 문자화 되었다. 그래서 이 짧은 마디 하나로부터 얻은 의미를 파악한다면, 우리는 이 책의 기원과 본질적인 특성에 대하여 올바른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아모스서의 저자가 한 명 이상이라는 말은 불가불 원래 예언이 이차적으로 첨가된 내용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개념으로 이끈다. 그래서 원래 말이 나중에 계속적으로 개작된 말들보다 더욱 사실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럴 경우, 우리는 예언의 흐름, 즉 예언 혹은 부연설명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상호작용과 종합을 이해하기 위하여 발견해야 할 의미의 원천을 무시하는 결과로 끝난다. 어떤 사람들은 다수의 작성자 개념이 아모스서의 권위를 위협하며 그래서 만족스럽지 못한 해석 방식을 나타낸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과제가 이 개념을 부끄럽게 여셔 후퇴하거나 아니면 이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이해와 신앙을 위해 그 개념의 함축성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이렇게 말하는 세 가지 이유는 첫째, 그 개념은 역사적 사실이다. 아모스서는 한 사람 이상에 의해 작성되었다. 사실을 무시하는 신앙은 가치 없는 신앙이 될 위험의 소지가 있다. 둘째, 작가는 아모스서가 개작과정의 최종산물이라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과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책을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작의 각 단계는 아모스의 말들의 해석과 활성화, 즉 새롭게 달라진 현실 속에서 그것들을 실제적으로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읽고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연속적인 활성화 과정이 없었더라은 불가피하게 상당한 순환논리를 감수하면서 오랬동안 연구를 진행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이것들을 하나의 모음으로 읽으면 그 독특한 특설들을 손쉽게 그리고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우선 아홉가지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일단 후대의 단계에도 익숙해지고 나면 A단계의 독특성들은 마치 서로 다른 색깔을 구별하듯이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첫째,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A단계의 청중은 이스라엘 농경 사회의 엘리트 지도층이다. 이들 엘리트는 북왕국 이스라엘 전역의 성읍들에 살지만, 수도이면서 도시권력의 일차적 중심지인 사마리아에 집중적으로 살았다. 그들은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가 앗수르에게 함락되기 전에 살았던 자들이다. 둘째, 모두 하나의 기본 메시지에 집중한다. 권력자들은 힘없는 자들을 엘리트 지도층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였다. 이 압제 속에, 실제 그런 압제를 바탕 삼아 힘있는 자들은 사치를 즐겼다. 셋째, 후대에 속한 신탁들과 구분되는 특징적인 문체를 공동작으로 갖고 있다. “그중에서 하나도”처럼 어떤 문구들은 반복되거나, 정죄가 심판으로 바뀌는 신탁의 종결부에서 보통 포도나무와 포도주가 다섯 번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렇게 어떤 사상이 반복해서 출연하는 것을 주목하면 이런 문구나 사상은 전형적인 아모스라고 말할 수 있다. 넷째, 구두로 전해졌다. 신탁의 형식들은 구술 형태를 모방한다. 예언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들이 주로 야외에서 연설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주의와 시선을 끄는 어조를 사용하되, 마치 우리 시대처럼 벨칸토 창법이나 확성기가 보편적이지 않은 문화권에서 종종 듣는 “고음으로 부르는 노래”처럼 현악기 뜯는 소리같은 것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아모스가 즐겨쓰는 점진적 절정, 인용, 수사적질문 같은 극적인 수사법도 그의 구두 전달법을 나타낸다. 다섯째,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정죄하는 메시지는 직선적이다. 부연설명도 하지 않으며 대상을 통틀어 말한다. 나중 단계에서처럼 그런 행위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식의 역설적데 그에 관해 읽은 내용은 이런 특성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이 단계에 포함되지 않는 구정들의 내용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 작성단계에서 온 신탁들이 아모스와 다른 8세기예언자들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는 데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을 수 있지만, 아모스 본인이 작성한 것이 분멸한 첫 단계의 신탁들만을 근거로 하여 그것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 별도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 작성과정을 구별하게 해주는 방식 한가지가 바로 아모스의 연대책정이다.왕정 이스라엘은 발전된 형태의 농경사회를 나타낸다. 그런 사회에서 농업은 일차적인 생계수단이고, 금속 쟁기날은 농업의 기초이며 기구와 무기는 철로 제조된다. 사회학자들은 이 기준으로 정의되는 사회들, 즉 과거에 대다수의 인류가 살았던 종류의 사회들이 많은 특성들으 서로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발전된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두 가지 주요 계층, 즉 엘리트 지도층과 농민 사이의 극단적인 사회적 격차이다. 엘리트 지배층은 통치 계층이다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이들은 전형적으로 땅의 50~70%를 소유한다. 일너 불균등한 토지소유의 기초 위에 그들은 사회의 엄청난 권력과 부까지도 마음대로 하며,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농민에게 지배력을 행사한다.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는 이들은 대개 도시, 특히 수도에 거주한다. 엘리트 지배층은 농민과 아주 다른 문화정보를 소유하고 있어서 두 계층의 격차는 동일 사회 안에서 상이한 두 문화를 창조한다. 엘리트 문화의 구성원들은 농민이나 도시빈민을 동료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민은 땅을 경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전형적인 농경사회의 60~80%이상을 차지한다. 농민들은 땅에서 생산한 것들 중에서 생계용 식량, 대체식량, 의례에 쓰이는 식량을 제외하고 남는 잉여농산물은 모두 엘리트 지배층에게 바친다. 엘리트 계층은 이 농부들이 잉여생산물을 직접 소비하기도 하고 또 보조원, 상인, 기술자, 그리고 농사를 짓지 않지만 엘리트의 생활을 떠받드는 자들에게 나을 더욱 분명하게 그려 나가노라면, 그가 선언한 표현들이 새롭고도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아모스는 지배층이 농부들을 상대로 벌인 전쟁의 세 가지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는 엘리트 지배층이 토지 권리를 행사하는 억압적인 방식과 그들이 챙기는 이익,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농부들의 손실이다. 두 번째 측면은 엘리트 계층의 다락상이다. 세 번째 측면은 엘리트 지배층이 시장의 타락을 조장하고 그 경제를 조종한다는 것이다. 농부들이 힘들여 거둔 농산물은 인위적으로 높은 가격으로 책정되어 도시의 시장을 통해 유통된 후에 비로소 농민들의 수중으로 돌아온다. 아모스의 신탁들은 농업경제의 상당히 넓은 영역이 농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시장 논리의 힘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아모스의 선포는 지배층의 행동에 예리한 정곡을 찌른 것이어서 하나의 단단하고 명료한 관심사로 축약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경제적 불의이다. 이것은 새로운 통찰이 아니다.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사실이다. 아모스는 억압적인 사회형태와 행동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들만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아모스는 명백한 것을 묘사한다. 정의의 원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사마리아의 엘리트 지배층의 죽음을 목도하는 자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아모스 신탁의 성취는 이 원리의 진실성과 아모스의 권위를 입증해 줌으로 중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모스의 말들이 청중들에게 전혀 불필요했다. 아모스에게 가까웠던 그 현실은 엘리트 지배층의 멸망이다.아모스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한 일들은 그대로 일어났다. 살만에셀 5세는 722년 늦여름 혹은 가을에 사마리아를 점령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전쟁으로 죽었다. 살만에셀의 계승자인 사르곤 2세는 2만 7290명의 생존자들을 앗수르 왕국의 먼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이주당한 사람들은 엘리트 통치 계층 사람들 대부분과 그들에게 종속된 기술자들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안전하다. 아모스가 비은 A단계의 특징과 대조되는 아모스서의 B단계의 특징 목록을 작성하게 해준다. 첫째 아모스 A가 특정하고 제한된 청중에게 선언하는 반면, B단계는 일반적인 청중에게 말한다. 보통 그들은 심지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아모스 B는 세 집단, 즉 앗수르 침공 이후 북쪽에 남은 사람들, 남쪽의 일반 백성, 그리고 남쪽의 지배층에게 말한다. 이것은 실제로 남왕국의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정적이다. 둘째, 아모스 A는 단 하나의 기본적인 메시지, 지배층이 포로로 잡혀가 죽을 것을 선포했다. B단계는 정의를 실행하라느 다른 기본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다. 셋째, 아모스 A의 신탁처럼 B단계의 신탁들과 다른 자료들은 문체상 일련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 대부분은 A단계 신탁과 구분이 된다. 아모스 A의 대부분은 시문인데 비해, B단계 자료는 상당부분 산문이거나 시문을 산문으로 바꾼 것이 대부분이다. 넷째, B단계는 곳곳에 구두가 아닌 글로 기록된 문서였다는 표식을 갖고 있다. 혹자는 그것이 주요한 문학작품의 일부로써 신명기 역사의 첫 번째 또는 요시야의 편집과 함께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물론 아모스 신탁이 히스기야나 므낫세 통치 시기에 작성된 초기 수집물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글로 기록되거나 혹은 구전된 수집물로 존재한 아모스 A신탁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것을 말할 방도는 없다. B단계는 작성된 그대로 청중들에게 혹은 그들에 의해 일혀지기를 바랐다 그것은 아모스 A신탁과 동시에 수집, 보존, 보급, 그리고 잃여졌음을 나타낸다. 다섯째 아모스A신탁이 직접적으로 선포되고 역설적 반전을 피하는데 반하여 B단계의 신탁들과 내러티브는 필요하다면 역설적으로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선택의 기회를 열어두기 위해 신중하게 애매모호함을 유지한다. 여섯째, A단계처럼 B단계의 형태는 의미를 진전시킨다. 따라서 B단계의 형태는 결과를 열어두는 경향이 있다. 심판 연설의 B단계 연설은 예언자의 소송과 논쟁이며 그것은 노력을 요구하며, 결과에 대해 미확다.
신명기 역사 연구사 및 최근 동향 정리신명기 역사란 여호수아로부터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ㅎ까지 이르는 명칭이다. 룻기는 히브리어 성서에서 성문서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제외된다. 우리말 성서에서 창세기로부터 민수기에 이르는 사경과 신명기를 포함한 신명기 역사를 제1역사, 그리고 역대기 상하와 에스라, 느헤미야를 역대기 역사 혹은 제2역사로 부른다. 제1연사는 대개 예언이나 약속의 말씀이 역사화하거나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도식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다. 마찬가지로 신명기에서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 모세의 말이 신명기 역사에서 성취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신명기역사 이론의 기원은 1943년에 출판된 노트의 전승사연구 라는 책과 함께 시작되었다. 전기 예언서에 대한 이전의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기술될 수 있다. 하나는 오경비평과 같은 자료비평으로 이는 특별히 여호수아에 대한 연구가 집중되었다. 다른 접근 방법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를 하나의 문학 단위로 보려는 경향이다. 비록 하나의 문학 단위이기는 하나 한 번 이상의 편집을 거쳤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노트는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가 하나의 통일된 역사이며 이는 포로기 때의 단일 저자가 기록했다는 것이다. 노트는 이 역사가를 신명기 역사가라고 불렀다. 노트는 이 역사에서 단일 저자의 집필로 말미암아 비슷한 언어나 이데올로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트에 따르면, 이 단일 저자는 그가 수집한 전승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노트는 신명기 역사가가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요소요소에 역사적 인물들을 등장시켜 연설을 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1장과 23장에 있는 여호수아의 연설로 하여금 정착 시대의 처음과 결론이 되도록 했으며, 사무엘상 12장에서 행해진 사무엘의 유언은 사사 시대로부터 왕국 시대로의 전이가 되는 경계석이 되도록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노트는 신명기 역사서의 저작 연대를 여호야긴이 옥에서 석방된 기원전 562년이 지난 후 얼마 되지 않은 기원전 6세기 중반, 즉 기원전 550년경으로 보았다. 비록 여호야긴의 석방 이야기는 나오지만 540년경 조금 이후인 제2이사야에 나오고 있는 포고귀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신명기와 열왕기가 원래 한 문학 단위를 이루고 있다는 노트의 주요 주장은 학계에 큰 호응을 얻었고 일반적인 통설이 되기에 이르렀다. 노트는 사경과 신명기 역사가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개의 문학 단위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카우프만이나 엥그넬도 그들 독자적으로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른 견해 역시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예를 들면, 프리드만은 사경을 신명기 역사에 연결시키면서 이를 제1역사로 본다. 이러한 견해는 페캄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상세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추종자를 얻지는 못했다. 노트의 이론 중 가장 먼저 지적된 점들 중의 하나는 시념ㅇ기 역사의 저술목적에 관한 그의 신학적 입장이다. 또한 폰라트는 신학적인 면에서 노트가 본 신명기 역사관의 비관적 측면에 반해서 은혜라는 면에서 노트의 견해에 균형을 잡아주었다. 폰라트에 따르면 신명기역사의 맨 끝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호야긴의 석방은 신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확실히 야웨의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심판의 의미는 포로기의 정황에서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신명기가에 있어서 다윗과 맺은 야웨의 연약이 실패로 무산되어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명기역사의 역사적 전망에 관한 두 번째 중요한 목적은 1961년에 볼프에 의해 제시되었다. 볼프는 노트와 폰라트 모두를 비판했다. 볼프는 사사기에 잘 나타나고 있는 죄와 징벌, 그리고 회개와 구원이라고 하는 도식에서 신명기역사의 목적을 봉았다. 볼프에 따르면 신명기 역사의 목적은 노트처럼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폰라트가 말 한 것처럼 분명한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야웨가 이전에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희망의 가능성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폰라트와 볼프의 분석은 약점을 가진다. 폰라트의 연구는 통찰력이 있으나 목적에 관한 한 다윗 왕조라는 주제의 의미, 구성, 연대에 관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신명기는 신명기의 관점에서 씌어진 역사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삶의 전승을 이해함으로 신명기역사의 기조를 이해할 수 있다. 노트의 관점에서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저자 계층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대포적은 두 학자는 영국의 니콜슨과 예루살렘의 바인펠트이다. 신명기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는 이들의 연구는 신명기 역사가 신명기 전승자들 계열의 종교인들이 저자였다고 본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각기 다른 신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왕조였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에 부합되면 왕권이 유지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예언자의 기름부음을 받아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 새 왕이 되어야 한다는 현대 시민계약사회의 사상과 유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남유다는 하나님이 선택한 다윗 왕조와 신학만이 영존해야 한다고 하는 다윗 왕조 신학 설이었다. 신명기 역사가 어떻게 현행의 긴 역사의 형태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과정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편집의 단계로 보는 경우와 신명기역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문화로 보내려는 경향이다. 신명기역사가 어떻게 현행의 긴 역사의 형태로 이루어 졌는지에 대한 과정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신명기역사 저술의 편집적인 두 번째 주요 입장은 현재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이론으로서 크로스와 관련되어 있다. 크로스는 저자와 연대 그리고 신명기역사의 목적에 대해서 같은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살핀다. 옙센이나 그레이와 같은 학자들은 포로기 버전의 가치를 원용하면서 열왕기상에서 두 주제를 추적한다. 편집자Dtr1은 당시사람들에게 요시야가 재시행하려고 했던 모세 계약에 순종하도록 격려했고 이를 통해서 다윗 왕국을 복원시키기 위해 시도한 것으로 여겨졌다. 주제의 변화를 주목한 크로스의 견해는 미국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던 반면, 유럽 학자들로부터는 별 지지를 얻지 못했다. 크로스가 주목한 요시야 위치의 중요성은 이미 노트를 비롯한 이전 학자들에 의해 주목이 된 터였고 계속된 연구는 요시야 개혁때 원본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증거를 더욱 와충하는 듯 했다. 학계에서 자주 거론되지 않는 삼 단계 이론은 메이스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이는 단계 이론과 층 이론을 결합해서 제시되고 있다. 맨 처음단계는 DtrG가 시작되었을 때 북광국의 멸망과 히스기야 개혁의 그늘아래서 씌어진 것을 열왕기라고 본다. 스멘트는 여호수아서(1:7-9,13:1bB~6.23)와 사사기에서의 몇몇 선택된 문구를 중심으로 여호수아서가 여러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 졌음을 지적했다. 페캄과 호프만은 신명기역사가 원래 단일 저자에 의해서 포로기 때 저작된 것임을 주장하는 노트의 견해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단순한 답습은 아니고 수정을 가했다. 페캄의 1985년도 연구 논문에서 노트의 문제를 그가 신명기역사의 자로를 단편적으로 불연속적이었던 것으로 이해한 데 있다고 본다. 맥카터는 크로스의 견해를 추가하면서 디트리히와 베이욜라를 포함하는 견해를 최근에 발표하였다. 맥카터는 포로기 이전 편집층이 예언자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베이욜라가 분류한 대부분의 자료를 맥카터는 예언자적인 DtrP로 돌린다. 맥카터에 의하면 예언자적인 역사의 저자는 사무엘서에 내재되어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를 모았다고 본다. 반시스터즈는 고대 근동의 역사기록에서 노트의 포로기 때 역사가는 이스라엘의 첫 역사가이면서 서구문명의 첫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시스터즈의 주장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참된 역사기록이 고대 근동사에 비추어 볼 때 비교적 후대에 등장했다고 하는 가정에서처럼 역사적이거나 신학적인 것에 근접하는 것들 모두가 후대이어야 한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시스터즈의 책은 신명기 역사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가 시도한 dh와 고대 근동 역사물, 다시 말하면 희랍역사물과의 비교는 현대 학자들이 간과한 신명기사가의 작품 배후에 숨겨진 목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신명기 역사에 대한 노트의 천재적인 견해는 신명기로부터 열왕기하까지의 책들이 원래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크로스의 견해는 이 커다란 덩어리가 노트의 견해보다 이른 시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전체적인 통일성은 유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신명기 역사의 두 번째 편집자는 요시야 이후 비교적 간단한 부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 역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료와 편집에 대한 연구는 가치가 있는 노력이었고 그 결과 이 커다란 역사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밝히게 되었다.
시대를 꿰뚫는 목자의 심장을 가져라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 만약 완벽한 교회가 있더라고 우리가 그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 완벽하지 않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완벽한 교회를 찾고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벽한 교회를 찾고 또한 완벽한 교회를 만드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 이상적인 교회상을 가지고 그렇게 만들어가고자 노력해야 하고 진짜 해야 할 일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필수적인 개념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개념들은 너무 간단해서 사람들이 쉽게 무시해 버리지만, 또한 지치고 낙심한 목회자를 힘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바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첫째, 이미 아에서 지적했듯이 어느 교회도 완벽하지 않다 그런 교회를 찾고 있다면, 당신은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 교회를 찾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교회와 목회자는 가능한 한 완전해지기 위해 힘써야 한다. 둘째, 당신이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교회는 지금 당신이 섬기고 있는 그 교회라는 것이다. 상상속에 있는 교회에 매달려 있거나, 아니면 10년 전에 떠나 온 교회를 소망하면서 탈출 전략을 짜는 데 골몰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교회를 개선하기 위한 효과적인 계획을 계발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는 모든 성공한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교회가 우왕좌왕하고 목회자가 자신의 직분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집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교회를 짧게 표현 하자면 ‘믿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도들로 변화시키고 그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자들로 양육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백성의 삶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나라로 인해 사람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이 주신 완벽한 선물을 망쳐 버렸으며,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 외에는 그것을 다시 억을 수 있는 길이 없다. 우리의 회복과 구속에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주를 통틀어 행해져야 할 것은 이것 밖에 없다. 남겨진 것은 바로 지상명령이다. 예수님의 초점은 분명했다. 우주의 중심 문제는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이 땅의 모든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분이 오신 까닭이고 우리에게 지상명령을 주신 까닭이다.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앞서야 한다.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사탄의 지배아래, 그리스도가 없는 문화의 영향아래, 그리고 고삐 풀린 육신과 정신과 정욕의 파괴 아래 상고 있다. 지역교회가 자신의 본성과 목표를 향하여 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단일 문제에서다. 이것은 또한 현재 무너져 있는 교회들을 ‘바로잡기’위하여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곳이다. 교회란 정확히 무엇일까? 스트롱이 쓴 자신의 조직신학 책에서 내린 정의에 의하면 “개별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의 소규모 모임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이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주어진 지역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법에 따르며 자발적으로 연합한다.”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과 과업을 우리의 삶과 교회를 위한 또 다른 초점으로 대체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가 개인적 과업이나 지역 교회의 과업, 아니면 교단의 과업을 가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직 하나의 과업이 존재하며, 바로 이 하나는 아버지에 의해 그분의 아들의 사역을 통하여 세워지고 진행되었다 그분의 과업이 우리의 유일한 과업이 되어야 한다. 그 과업은 이론 안에 존재하거나 추상적인 이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모든 사람을 구속하시고자 하는 진정한 과업으로, 우리는 이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역 교회의 상황 속에서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과업이다.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이 기능들은, 먼저 이것을 자신의 가슴속에 단단히 품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교회에 주입될 수 있다. 앉아서 투덜거리기만 하면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기증들을 당신의 교회로 서둘러 사져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당신은 영원히 기다려야 할 것이며, 당신의 교회는 할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교회의 다섯 가지 기능은복음전도, 제자훈련, 친교, 봉사, 예배이다. 먼저 복음 전도는 길을 잃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죄를 회개하고, 죄 사람과 영생의 선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히 그분을 주님으로 따르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복음 전도는 성도들이 고백하고 그들의 삶 가운데 살아있는 복된 소식이다. 두 번째로 제자훈련은 매우 낯익고 자주 토론되는 것이지만, 제자훈련은 아마 교회에서 가능 미약하게 실행되는 기능일 것이다. 제자훈련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 평생의 순종의 여정으로, 그 사람의 가치와 행동을 변화시키고 그를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서 섬기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민들에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신회라며, 그분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방법을 가르치는 과정이다. 셋째로 친교는 회중들 가운데 있는 친선의 감정 그 이상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나누는 긴밀한 영적 관계의 결과다. 친교는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네 번째로 봉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원들로 교회 내부에 있느 사람들에 대한 돌봄으로, 또 교회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교 다리 하나는 그 자체로는 다른 세 다리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없다. 나머지 것들의 희생을 치르면서 과도하게 한 종류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면, 사실상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교회에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완벽하신 뜻에 따라 네 가지 영역 모두에서 성장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들을 통하여 영혼을 추수하심으로써 입교자와 수제자를 통한 그리스도의 몸에 수를 더하신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때, 하나님은 교회들에게 수적인 증가를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치라고 명하신다. 구속의 필요는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업은 이 구원의 메시지를 세상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교회에 나타나는 두 번째 결실은 영적 변화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탄생을 유년기에 비유하는 구절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위대한 비유다. 거듭난 사람들은 제자훈련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린이가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일련의 이정표를 지나듯이, 성도들은 영적인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에 영적인 변화를 통과한다.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교회 안에 나타나는 세 번째 결실은 봉사의 확장이다.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는 성도와 비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열려 있는 예배와 모임을 통하여 봉사의 기초를 다진다. 이 밖에도, 이런 교회는 지역사회의 다양한 필요들을 채워 주는 동시에, 성경 연구와 다른 대외 봉사활동도 더한다. 채워 주어야 할 것을 보면 볼수록, 봉사의 영역은 더욱 확장된다. 교회는 수와 영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성령이 자신들에게 봉사의 기회를 더 많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네 번째 결실, 곧 진정한 교회 성장의 척도는 그 교회가 얼마나 실제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지상명령, 곧 주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 있는 지역 교회에서 나와 스타일과 정체성을 가지도록 유도한다. 우리의 교회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성공적인 전략을 계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당신의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동일한 교회는 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 다른 교회의 성공이나 모델들을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성장을 바란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역이나 예배 등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하고, 또한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의 효과를 극대화 해야 한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작하지 않고서 건강한 교회를 성장시키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들은 그들이 새로운 지역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거나 기존 업체를 살들일 때 바로 이 간단한 원리를 이용한다. 기업들은 확장을 위하여 현재 하고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 방법은 예비 입교인을 확인하고, 조직을 계발하고, 훈련하고, 그들의 가정에서 모이고 그들을 얻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닫힌 모임도 중요한데 닫힌 모임은 하님 나라의 리더들을 세우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짧은 기간동안 자가 훈련을 통하여 성도들을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닫힌 모임은 섬기는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닫힌 모임을 위한 전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 수 있도록 당신이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회원으로 들어올 사람들을 위한 모임들을 계획해야 한다. 또한 이렇게 성숙한 성도들은 사역 팀으로 훈련해야 한다. 사역 팀은 교회에서 예배의 사역을 완수하고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과업은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는 절박한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시작하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지금 모습 그대로 리더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교회의 기초를 완전히 이해해야 하며 옛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절대 방법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