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용갱을 통해서 본 진대의 군사력》Ⅰ. 서론만약에 고대 유럽의 군대와 중국 군대간에 실제로 전쟁이 벌어졌다면 당시 중국(진나라)의 군사력이 페르시아의 칼날을 단 전차나 알렉산더의 막강한 기병부대, 로마제국의 장갑 보병군단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전에는 누구도 이 질문에‘막을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시황릉에 딸린 1·2·3호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잇달아 발굴된 1976년 이후로는 그 답을 진시황의 지하군단(地下軍團)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중국의 군세(軍勢)와 전술이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카르타고, 로마를 능가했을 수도 있다고.이 보고서에서는 병마용갱 출토유물을 통해서 진대의 군사력. 즉, 진시황의 군사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싸웠는지 알아보고, 병마용갱이 중국사 연구에서 가지는 의미를 평가해 보겠다.Ⅱ. 본론1. 진대의 군사들의 무기1) 청동 수{3호 용갱에서 발견된 청동으로 만든 수. 1·2호 용갱에서와는 달리 3호 용갱에서는 고대 전쟁터에서도 보기 힘든 수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무기는 위쪽이 뾰족한 다각추로 되어 있고 몸체는 나무 자루를 박아 넣을 수 있도록 둥글게 만들어져 있는데, 대규모 작전보다는 근거리 살상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3호 용갱의 호위 병사들이 지녔던 무기라고 할 수 있다.2) 청동 극{1·2호 용갱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청동 극(戟). 창(槍)과 과(戈)가 결합된 것이다. 말에 탄 적병을 끌어내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극의 위쪽에 새겨진 글씨는‘삼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였다. 이는‘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는 뜻으로‘사공구’는 아마도 청동 극을 제조한 공장 이름인 듯하다. 여불위는 진시황 때의 승상으로, 새겨진 글씨를 통해 병마용갱이 진시황릉의 부장품임이 증명되었다.3) 쇠뇌와 쇠뇌에 부착했던 방아쇠, 청동화살촉{{좌측은 쇠뇌와 쇠뇌에 부착했던 방아쇠. 우측은 청동으로 만든 화살촉. 2호 용갱에서 거의 1백 개에 이르는 쇠뇌가토된 뒤 고고학 발굴 팀인 장점민 대원은 한 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책상 위에 종이 뭉치를 올려 두고 검으로 가볍게 종이를 베어 보았다. 단번에 19장의 종이가 베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예리한지 짐작할 수 있다. 과학적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검은 청동·납·주석의 3가지 금속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세 금속의 비율이 적당해야만이 검이 예리해져“철을 흙처럼, 돌을 가루처럼”자를 수 있다는 것이다.이 검은 2천2백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으면서도 아직도 새것처럼 반짝인다. 이는 검신 표면에 10∼15마이크론의 크롬 화합물 산화층이 덮여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나라 때에 이미 크로마이징(chromizing)이라는 산화 처리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기술을 검 제조에 이용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2. 진대 군대의 각 병과{1) 쇠뇌병(보병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 보고서에서는 보병과 구별한다.){좌측은 무릎을 꿇고 앉은 쇠뇌병. 우측은 서 있는 쇠뇌병이다.진나라 시대에는 활을 쏘는 병사들의 경우 경장비와 중장비의 구별이 있었는데, 가볍게 무장한 사수는‘인강’이라고 하고, 무겁게 무장한 사수는‘척장’이라고 일컬었다. 이는 활을 쏘는 방식에 따라 이름 붙인 것으로,‘인강’은 어깨로 활을 잡아당기는 것을 나타내고,‘척장’은 발로 밟아 활을 당기는 궁노병을 말하는 것이다. 진용 2호 용갱의 큰 진 앞에는 334좌의 궁노병으로 편성한 독립된 소형 방진이 배열되어 있다.입사용(입사수 : 서있는 자세의 사수)의 얼굴은 오른쪽으로 등은 왼쪽을 향하고 있으며, 몸은 옆으로 비스듬히 서 있다. 그리고 왼쪽 허벅지를 약간 구부리고 오른쪽 허벅지로 뒤를 받치고 있으며, 왼쪽 발은 앞으로 오른쪽 발은 옆으로 향해 있다. 왼쪽 팔은 약간 들어올려 활을 잡고 오른쪽 팔은 가슴까지 구부리고 있으며 손바닥을 펴서 아래로 향하게 한 전형적인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 궤사용(궤사수 : 꿇어앉은 자세의 사수)은 등에는 화살꽂이통을 메고 그 통 안에는 청동화살이 가득 들어 있다. 또 손에 긴 창을 들고 위엄 있게 서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며, 허리에 구부러진 칼을 차고 눈은 앞쪽을 주시한 채 전투 준비 자세를 취한 것들도 있다.{3) 기병{좌측은 기병용과 도마. 우측은 도마에 나타나 있는 진대의 마구. 옆에 있는 구멍은 장인들이 배기 구멍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렇게 하면 도마를 구울 때 균열이 생기지 않고 또한 말 다리가 받는 중력도 줄여 준다.기병이 구체적으로 전술에 응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의‘호복 기사(胡服騎射 : 말을 타고 활을 쏠 수 있도록 편리한 호복. 곧, 북방 오랑캐의 복장을 채용함)’의 개혁을 게기로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기병을 전쟁에 응용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기병은 독립 병과로 체제를 갖추고 전쟁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진나라 시황제가 산동 여섯나라를 합병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에서도 기병은 탁월한 전과를 올렸으며, 특히 오월과 흉노 정벌에서 기병은 그 밖의 다른 병과를 능가하는 최강의 주력 군단이 되었다.기병용의 복장은 전차용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들은 붉은 색의 매화가 그려진 둥글고 작은 모자를 쓰고, 양쪽 끈을 턱 밑에 붙잡아 맸다. 상의는 몸에 짝 달라붙게 만들었고 하의는 끝자락을 오므라들게 만든 긴 바지를 입었으며 단화를 신었다. 그리고 짧은 작은 갑옷을 걸친 것 이외에 어깨나 손은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았다. 복장이 간소하고 가벼운 것은 기병의 전술적 특징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기병은 빠르고 갑작스럽게 기습 공격을 가해 적으로 하여금 저항을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들은 무엇보다 민첩한 행동과 과감함이 요구된다. 그들이 무거운 갑옷에 넓고 긴 전투복을 착용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병마용갱의 기병 군진은 실물의 완전한 재현이다. 기병들은 모두 180센티미터 이상의 키에 균형 잡힌 체형과 민첩하고 예리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신체나 은 등자는 서진(西晉)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4) 전차병{좌측은 출토될 당시의 도마와 나무전차. 나무전차는 부패되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측은 전차에 올라타는 세 명의 병사. 좌우에 있는 도용은 전투를 하는 병사이고 한가운데 있는 것은 어수(御手)다.각 전차에는 갑옷을 입은 도용이 세 개씩 있다. 좌우는 전투병이고 중앙은 어수(御手), 곧 운전병인 셈이다. 어수는 키가 1.9미터 이상으로, 발판에 서서 두 손을 앞으로 곧게 뻗고 있다. 두 손바닥은 서로 마주 보면서 마치 재갈 끈을 잡은 듯 반쯤 벌려져 있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에 말의 재갈 끈을 끼우기 위한 틈새가 있으며, 엄지손가락 안쪽에는 반원형으로 도기로 만든 고리가 붙어 있다. 아마도 재갈을 당길 때 손가락을 보호하는 일종의 물림쇠인 듯하다. 세 좌의 도용 모두 전포(戰袍 : 상하 일체형의 군복)에 어깨와 팔뚝을 덮을 수 있는 갑옷을 입고 있다. 또한 손에는 보호대를, 목에는 네모 반듯한 동정을, 무릎 아래 또한 보호대를 착용하고, 발에는 네모나고 입구의 코가 가지런한 신발을 신었다. 머리 꼭대기 오른쪽에는 상투를 틀었고, 그 위에 둥근 모양의 부드러운 흰 모자를 쓰고 모자 위에 다시 끝이 말아 올려진 긴 관(冠)을 얹었다.중국의 고대 전쟁에서 전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상(商)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주를 거치는 1천여 년 동안에 전차는 그 종류나 편제·장비·전술 따위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실물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전차 연구는 그저 고대 전적의 기록에 의존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어떤 역사가들은 진대에는 이미 전차가 사라지고 기병으로 대치되었다고 단언하는 경우도 있었다. 2호 용갱에서 대형 전차진이 발견됨으로써 고대 전차의 편제·장비·전술 등에 관한 실물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을뿐더러 기존의 역사가들의 주장이나 관점 또한 크게 바뀌게 되었다. 전차부대의 방대한 군진은 진대의 전차, 특히 용갱에서 발견된 형태의 경전차에서 볼 수 있듯이 전기 다른 형식으로 배열된 것은 결코 되는 대로 정한 것이 아니라 진나라의 정예 군사 진법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1호 용갱과 2호 용갱이 모사한 것이 바로 실전의 군진이고 3호 용갱은 지휘부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이 세 개의 용갱은 의심할 바 없이 상호 밀접한 연관을 지닌 군사 집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병마용 1호갱{{상단은 1호 용갱의 군사배치도. 좌측은 1호 용갱의 평면도이다.1호 용갱의 경우 지극히 규격에 맞는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라 바로‘방진’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방진의 전차와 말과 무사용은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있는데, 전체적으로 봉(鋒)·익(翼)·위(衛)·본(本)과 같이 방진에서 불가결한 구성부분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용갱의 최전방은 가로로 세 줄씩 모두 204좌의 무사용이 배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 긴 관을 쓴 장군용 세 개를 빼놓고 나머지는 모두 활을 손에 들고 가벼운 전포를 걸친 보병용들이다. 이들은 2호 용갱의 전방 왼쪽 날개에 배치된 궁노병과 마찬가지로 공격부대에 속한다. 그 전법은 먼저 화살을 일제히 쏘아 적진을 흐트러뜨리고, 그 다음 후속의 대군이 성난 파도처럼 돌격해 백병전을 전개해 승기를 빼앗는 것이다. 이 때 전차 위에서 청동 보검을 든 장군이 지휘를 한다.한편 남북 양쪽의 무사용은 중무장을 했는데, 쇠뇌를 들고 군진의 양 측면을 향해 발사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형태는 방진 가운데‘양날개(兩翼)’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군의 뒤쪽에는 3열의 병사들이 본진에 등을 돌리고 가로로 배열되어 있으니, 이들이 바로‘위(衛)’에 속한다. 양날개와 위는 적군이 본대의 측면이나 뒤쪽에서 공격하는 것을 방어해 전투 중에 협공 당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2) 병마용 2호갱{좌측은 2호 용갱의 평면도를 나타낸 것이다.1호 용갱의 방진이 수많은 보병이 전차를 에워싸고 돌격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반해, 2호 용갱의 군진은 각기 다른 네 가지로 나뉘어 복합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우
≪인터넷 댓글문화 에 대한 나의 의견≫악플 이란 원래 악성리플 의 줄임말로, 악의적인 댓글 을 일컫는 인터넷 신조어다. 하지만 이제는 악플 뿐만 아니라 악플러 (악플을 다는 사람)라는 단어까지도 신문지상에서 자연스럽게 쓰일 정도로 일반적인 보통명사가 되었다. 이런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신조어가 이렇게 널리 쓰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인터넷 문화의 저질성을 잘 나타내는 하나의 반증인 것이다.악성 댓글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과 형법 조항으로 처벌되며 최고 7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또한 여러 포털사이트에서 자체정화노력의 일환으로 악플러에게는 해당사이트 이용제한 등의 제제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악성 댓글에 관한 문제는 특별히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실제로 지난해 1월엔 1989년 북한을 방문했던 임수경씨가 아들의 죽음을 조롱하는 등 악의적인 댓글을 올린 네티즌 25명을 고소한 것을 시작으로 김태희, 하리수, 고소영 등의 연예인뿐만 아니라 환경운동가 지율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인들이 명예훼손 혐의로 네티즌을 고소했다.이렇게 악성 댓글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법의 처벌이 너무 약해서나 포털사이트가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있다는데 있다.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추적해 보면 상당수는 별 생각 없이 재미로 악성 댓글을 달았다는 중고등학생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게는 올바른 댓글문화, 크게는 올바른 인터넷 사용법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악성 댓글은 분명한 범죄행위이며 처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버지니아 공대 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난사 사고가 난지 보름 정도가 지났다. 사건의 충격도 잠시.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서서히 잊혀져 가는 듯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생각꺼리를 던져주었다.처음 사건의 범인이 한국계로 밝혀지자, 이 사건이 몰고 올 파장을 의식한 미국 내 교포사회와 정부차원에서 유감성명이 연이어 발표됐고, 한국 언론에서는 이 사건이 교포사회에 미칠 악영향에 대해 보도했다. 하지만 오히려 미국의 언론들은 범인의 인종 보다도 범인개인의 문제와 사회구조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한 발 더 나아가 미국언론들은 한 개인의 잘못이지 한국사회의 잘못이 아니므로 사과할 필요가 없다 라는 칼럼을 싣기에 이르렀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우리가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버지니아 공대에 범인인 조승희의 추모석까지 세워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이토록 크나큰 사고의 차이를 불러온 것일까?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는 개인보다 집단, 민족, 국가를 우선시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가 이번 사건에서 그토록 우려해마지 않았던 민족주의적 오류를 스스로 범해왔다.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의 당시 일어난 반미시위는 SOFA 규정상의 불합리성에 관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왜 우리는 아직도 중국인들을 짱꼴라 , 일본인들은 쪽바리 라는 단어로 비하하는가? 왜 동남아시아 근로자들은 무시당하고 혼혈아들은 차별 받는가?이제는 한국사회도 편협한 민족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물론 한 순간에 바뀔 수는 없다. 하지만 농촌총각의 4분의1이 외국인에게 장가를 가고 외국인 근로자가 넘쳐나는 현실을 볼 때 이미 이러한 문제는 결코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면서 계속해서 들어왔고 또 외쳐왔던 세계화 . 그 세계화를 이루는 첫걸음은 바로 이런 편협한 민족주의적 사고를 버리는 것이다.
≪무당이 되는 과정≫무당은 크게 강신무 와 세습무 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무병에 걸려 신이 내린 후 신을 신당에 모시고 굿을 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가계에 의해서 사회적 신분으로 무업을 이어받아 굿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이 중 세습무는 신들리는 현상 없이 조상 대대로 무업을 이어받아, 순수한 사제로서 무속의례를 집행한다. 따라서 특별히 무당이 되는 과정이 있다기보다는, 집안 대대로 전수되어 내려오는 무속의례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오다가, 일정한 나이가 되었을 때 대를 이어 무속의례를 집행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더군다나 세습무는 일제시대 이후 신분제도의 해체에 따라 급속히 소멸되어, 지금은 전라도 해안과 동해안 지역에 일부가 남아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보고서에서는 강습무에 초점을 맞춰 무당이 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일반적으로 강습무는 신병(무병)을 앓은 뒤, 내림굿을 통하여 무당이 되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신병이란 일종의 병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병은 아니고 무당이 신 내림을 받기 위한 전조로 볼 수 있다.신병은 꿈이나 외적충격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 보다는 까닭 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신병의 증상으로는 몸이 말라 허약해지고 사지가 쑤시거나 뒤틀리는 형, 한쪽 골 ? 한쪽 가슴 ? 한쪽 팔 등이 아픈 편통증이 일어나는 형, 혈변이 장기간 계속되는 형, 속이 늘 답답하고 어깨가 무거워지는 형 등이 있으며, 대게 밥을 먹지 못하고 편식증이 생겨 냉수만 먹거나 생선 ? 육류를 전혀 먹지 못하고 소화불량 증세가 나타난다. 이때 정신적으로는 마음이 들떠 안정할 수 없으며. 꿈이 많아지고 꿈속에서 신과 접촉하는 성스러운 장면을 보게 된다. 이후 증상이 더 심해지면 꿈의 횟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의식이 희박해져서 꿈과 생시의 구별이 흐려지며, 이 상태에서 생시에도 신의 허상, 환각, 환청을 체험하기도 한다. 신병을 앓는 기간은 장기간으로 나타나며 평균 8년간, 최장기간은 30년간으로 나타나는 예도 있다.신병의 과정은 일반인이 쉽게 알아챌 수 없고 대체로 의약치료가 불가능해서, 의약치료를 할 경우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나 증세가 악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원인 모를 병으로 몇 년씩 고생하다가 치료를 위하여 무당을 찾아 내림굿을 하고 무당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림굿을 해서 이런 증세가 나았다고 해서 무당 일을 그만두면 이 증세가 다시 재발하여 고통을 준다. 무당은 어쩔 수 없이 신이 시키는 일을 하는 신의 추종자로서 무당이 되어야만 이러만 병의 증세가 낫게 된다.
≪명?청대의 식생활≫Ⅰ. 들어가며어떤 한 나라의 생활상을 알기 위해 가장 먼저 알아봐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나라의 음식문화라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우리가 외국에 여행을 간다고 해도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생각이 뭘 먹을까? 하는 것인데,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중국의 식생활에 대해 알아보고자 이 보고서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인은 스스로 자기 나라를 요리의 천국 이라 부를 만큼 중국음식에서 요리 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고 그 종류 역시 재료, 조리법 그리고 지역과 민족에 따라 수없이 많다. 바꿔 말하면, 중국인의 식생활 전체에 대해서 조사한다는 것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보고서에서는 중국인들의 식생활이 근세의 모습을 띄게 되는, 명?청대로 한정하여, 명?청대의 대략적인 식생활을 살펴보고, 이 시기부터 새롭게 먹게 된 음식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명대의 식생활우선 명대의 주식은 옛날부터 북은 좁쌀, 수수 등 잡곡이고 남은 쌀이었다. 쌀의 비중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서 계속 대운하로 북방으로 운반되었지만 북방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 대신 쌀농사 지대에서는 밀가루 제품이 귀했다. 제례나 혼례 등 경사가 있을 때만 사용하므로 신심이 깊은 농가에서는 밀에는 거름을 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색다른 것으로는 옥수수나 고구마 등 미국 원산 작물의 등장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발견은 1492년, 명나라 효종의 홍치 5년이니까 고구마가 복주에 들어온 만력 21년(1593)까지 백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옛날 교통수단을 생각하면 빠른 것이다.명대의 식사는 원칙적으로 1일3식이다. 아침은 가벼운 점심으로 때우므로 어떤 사람은 한 끼로 치지도 않는다. 대개 죽이나 병자, 소병 정도다. 소설『금병매』에서 권신 채경의 가풍을 이라고 말하고 있어 부유한 집에서는 저녁이 주찬임을 알 수 있다. 농업 종사자의 하루 식사량에 관한 예가『심씨농서』에 있다. 강남의 예이다. 여름과 가을에는 아침에 죽2홉, 낮에 식은 원칙적으로 밀가루 음식이고, 여기 쌀밥이 혼합된다. 그렇지만 노동 계급이 먹는 좁쌀이나 수수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침과 낮에는 점심 정도로 하는데 죽이나 소병, 찐빵 등의 병자가 주이다. 부식물도 있는 대로 전면근이나 절임류, 술지게미에 절인 제자(돼지의 발굽고기), 말린 닭, 달걀, 해파리 등을 먹고 생각, 마늘 같은 양념을 많이 사용한다.밀가루 음식은 앞에 기록한 것 외에 견과류 소가 들어 있는 함병을 특히 좋아했다. 초면보다 탕면이 자주 나온다. 과자로는 당박취(단맛이 나는 얇은 전병), 매괴차양권아(장미향이 나는 권전병), 백당만수고(보통 카스테라 같은 것), 과함원소, 송화병 등 종류가 많다. 대개 이름만으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단오에는 종도 만든다.맛있는 음식으로 당나라 시대와 같이 원숭이 혀, 표범의 태, 용의 간, 봉수와 같은 유의 글이 있기는 하나 있다고 해도 매우 적고 확실하게 기재한 것이 훨씬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사소접 : 두시, 과나 가지 절임, 유미중, 순조지사대완 : 구운 양머리, 자압(지금의 통오리구이), 콩나물, 달걀 넣은 혼돈자, 토란 넣은 고기단자밥 : 흰 쌀밥, 멥쌀죽있는 재료를 사용한 경우는 예를 들면 여덟 접시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 거위 장의 술지게미절임2 햄을 가늘게 썬 것3 백어자의 알찜4 말린 암탉의 수우육5 생 연밥6 호두7 생 마름8 생 자고뿌리그 밖에 닭이나 오리도 장육으로 쓰인다. 또 비둘기, 새우, 게, 어류(농어, 준치, 용상어, 쏘가리 등) 또는 들다람쥐도 나오는데 여기 비하면 쇠고기는 적다. 진귀한 것은 당나귀고기가 나와 있는 것이다.비린 것을 미리 만들어두었다가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으로는 납육(고기의 소금절임)과 포, 건어가 있다. 자도 식료품점에 많이 나와 있었다. 이때의 자는 옛날 것이 아니고 반제품(반 정도 익은 것)이다. 재료는 잉어가 많고 강남에는 청어가 보통이며 돈육자도 있다. 은어자등은 고급품이다. 그대로도 먹지만 수프에 넣어 자탕으로 하거나 끓여서 9월9일 명절 때에 만들었고, 나머지는 대체로 자양강정용이다. 『송씨존생』에는 술의 종류가 많으나 약주는 비교적 적고 북방주, 금반로 등의 보통 술이 많다. 그중에는 상당히 깨끗하여 착인수주라고 하거나 향기가 좋아 밀온투병향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술 담그는 방법은 원칙적으로『북산주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찹쌀과 누룩과 야초를 기본으로 한다. 중기 이후의 벽향주에는 녹두가 들어가지 않는다. 백주국은 그 외에 생강이나 행인 등을 넣어 하얗게 곰팡이가 피면 누룩이 다된 것이므로 이것으로 담근 술이 백주이다. 연화백은 백주에 연꽃의 향기를 넣은 것이다. 오늘날 북경 서쪽 교외의 명물인 연화백은 소주가 기본이므로 다른 것이다. 계명주는 저녁 무렵에 담그면 새벽에 술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겨울에는 5일, 여름에는 2일이 걸린다. 쌀에 비하여 누룩을 많이 넣은 속양주이다.경도 천룡사의 책언화상은 조공사가 되었다고 득의만면해하는 속물스러운 중인데 대단한 호주가로 배 타기 전에 축하하는 뜻에서 당당히 음주 계율을 깨고 있다. 그만큼 영파와 북경을 왕복하는 사이에 거치는 마을들, 특히 소홍 부근에서는 술집의 간판과 대련 등을 부지런히 옮겨왔다. 간판에 써 있는 술이름은 나부춘, 동정춘색, 자부경장, 연화백주, 가미오향주, 금화로주, 하청로주, 청향미주 등이다. 그중 나부춘은 소동파의 광동성 혜주 유배 시절 때의 가양이며, 동정춘색은 친구 조덕린의 가양이라고 앞서도 말했으나 이러한 술 이름이 상업용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음식의 도에서의 동파의 실력을 나타내는 것이다.만력(1573-) 이후, 예수교 선교사가 육로로 와서 특히 마테오리치의 경우 서광계를 비롯한 우수한 명나라인 제자를 양성했다. 하지만 그들이 천문, 역산이나 병기, 특히 대포 등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몰라도 식생활 면에서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고추, 낙화생 등 새로운 작물은 도입되었으나 모두 원료로만 사용되어 다양한 조리법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Ⅲ. 청대의 식생활청대의않았다. 소는 농사일에 빼놓을 수 없는 가축이므로 농촌에서는 별로 먹지 않았다. 개는 옛날에는 중요한 먹거리였으나 최근에는 역시 하등 취급한다. 청말의 대정치가 이홍장이 전권대사로 런던에 갔을 때 영국 수상한테 선물로 받은 셰퍼드를 먹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청조 중기 이전까지는 국초부터 무를 숭상하는 기풍이 남아 있어 황제가 앞장서서 열하나 내몽고의 수렵터로 사냥을 나갔다. 들짐승은 사슴, 들고양이, 토끼가 주이고 이외에 북방의 족제비, 호남의 살쾡이, 사천의 죽류(식용 쥐) 등이 있다.조류는 예로부터 닭과 오리, 야생으로는 단연 꿩이 중심이었다. 조금 고급스러운 음식으로는 거위를 쳤다. 기러기, 백조(고니), 들오리 같은 것도 제철 때면 먹을 수 있다. 비둘기나 메추리는 야생뿐 아니라 사육된 것도 많았을 것이다. 참새는 좋다고 하고 제비 같은 것은 약으로 먹었다. 또 오리알을 가공한 피단(절인 알), 함단(소슴절임 알) 등은 특히 유명하다.제비집과 상어 지느러미는 명나라 중기 이후 진미로 청대에는 많이 보급되어 건륭기에는 산동, 사천의 산중에서도 성찬이긴 하지만 맛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특히 상어 지느러미는 동치 이후 서태후의 식탁에 자주 올라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고 한다.수산물로는 잉어, 붕어(웅어), 장어, 복어 등을 많이 썼고 철갑상어, 곤들매기, 쏘가리, 청어, 준치 등도 좋아했다. 청어는 특히 자감으로 좋다고 한다. 그러나 청자는 고등어자는 아니다. 초어, 연어, 용어 같은 것은 양식이 성행하였다.청대 상류 사회의 식생활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책은 『홍루몽』이다. 이 책은 서태후의 봉천행계에 대한 기사가 중심을 이룬다. 그때 열차에는 주방차가 4량 연결되어 여기에 상설 화덕이 50대, 일급 요리인이 50명, 하급 요리인이 50명, 그릇닦기며 허드렛일꾼은 그 수를 알 수 없다. 태후가 원하면 어디서든지 열차를 세우고 즉석에서 정채의 식사에 반드시 백 그릇을 다 채우는 것은 청조 중기 이전부터 내려온 관습이다.같은 요리라고 해도 난증압자는 약한 널리 전파 되었다. 곽말약의 자전을 보면, 서남 사천 가정부를 운반해 갔을 때에나 지주의 집에서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옥수수는 알이 굵고 껍질이 단단하므로 북경 근방에서는 거칠게 갈아 죽이나 와두를 만든다. 그러나 너무 달아 주식으로는 고량죽이 오히려 적합한 편이다.고구마는 명나라 말기인 만력 21년 루손에서 복주에 들어온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상인 진진룡이 법으로 반출을 금한 고구마의 줄기를 배의 돛줄에 섞어 꼬아가지고 돌아왔는데 다음해에 기근이 들어 순무 김학중이 크게 장려하여 김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만력 36년(1608) 흉작에 즈음해 『농정전서』를 쓴 서광계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고구마 종자를 향리 상해에 가져오게 했다. 그는 고구마의 우수한 점에 탄복해서 그 재배법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한 유명한 『감저소』를 지었으며 또한 『농정전서』에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감자에 대한 기록은 명대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감자는 미국이 원산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작물은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루손)에 전해졌을 것이다. 가령 유렵에서 왔다 해도 도중에 인도양을 건너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마 같은 아열대성 작물은 문제가 없지만 감자는 서늘한 곳에 두어야 하므로 운반이 어려웠을 것이다.콩류로 당시에 널리 알려진 것은 남경두(땅콩)이다. 조학민의 『본초강목습유』에는 이 콩을 강희 시대의 승려인 응원이 일본에서 복건으로 전했다고 하지만 잘못된 것 같다. 아니면 그 콩이 우량품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만력 선거(절강성)현지』에 써 있기를 그 지방의 땅콩은 복건에서 전래했다고 한다. 땅콩은 기름기가 많아서 기름을 좋아하는 한인도 주식보다는 대개 보식, 부식(절임 등)으로 먹었다.상어지느러미를 식용으로 이용한 것은 고작해야 400년쯤 전부터다. 그것도 당초에는 연해부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전국적으로 퍼지고 진미로 각광받게 된 것은 청나라 중엽이다. 즉 고급 요리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작 300년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상어지느러미에 대한 기술은 명나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