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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잭웰치의 31가지 리더십의 비밀
    Ⅰ. 줄거리1981년 4월 흔히 잭이라고 불리는 존 F. 웰치 2세(John F. Welch, Jr)가 제너럴 일렉트릭의 여덟 번째이자 최연소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잭 웰치가 환경 변화에 둔감하고 덩치 큰 고령의 기업 체질과 사업 구조를 탄력 있고 건강한 체질의 기업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흔히 사용되는 경영 기법이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리스트럭처링(기업재구축) 및 다운사이징(감량경영)을 도입하여 GE를 혁신적으로 변모시켰다. 1993년에는 GE의 13개 사업 중에서 NBC만을 제외한 12개의 사업이 시장점유율 1,2위를 기록했다. 웰치가 GE를 이끌어나가기 시작했을 때 GE의 각 사업 부문에는 9~11개 결재층이 있었으나, 10년 후 그 계층 수는 4~6단계로 간소화되었다. 1981년 2퍼센트에 지나지 않던 회사의 연간 생산성은 1993년에 이르러 4.5퍼센트로 증가했다. 1980년 초 GE는 250억 달러 상당의 매출액에 15억 달러 정도의 이익만을 남겼다. 그러나 1993년에는 총매출액 606억 달러에 순이익이 52억 달러로 증가하여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GE는 이제 미국에서 명실공히 가장 성공한 기업이다. 그리고 잭 웰치는 그의 비전과 눈부신 성과로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최고경영자가 된 것이다.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라고 흔히 말한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일은 21세기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던져진 상당히 긴박한 숙제거리임엔 틀림없다. 그것은 ‘리더십’이라는 테마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기업 경영의 모든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시점에서 그 동안 해오던 방식의 리더십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된 방향으로 끌고 가는 데 있어 여러 가지 문제점에 부딪칠 것이다.이러한 시점에서 GE를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데 있어 선도세계적인 기업 환경의 변화 때문에 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일본과 같은 나라가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보다 나은 품질의 상품을 제공함으로써 고객을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 시장의 선봉에 우뚝 서있던 미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 부문 외에 미국의 자동차 산업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1980년에 접어들자 인플레이션은 18퍼센트로 껑충 뛰어오르고, 석유값도 1배럴당 최고 39달러까지 기록했다. 1979년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 중 일인당 국민소득 1만 662달러로 10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잭 웰치가 제시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는 전 세계적인 기업 환경 변화에 대한 일종의 대응책이었다.언제나 변화의 속도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GE같은 회사가 날로 번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자 세계 경제 환경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웰치는 기업 경쟁의 무대가 점점 더 커지고 더 치열한 경쟁 상태에 접어들게 되리라는 것을 정확히 감지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앞서, 잭 웰치는 중대한 전환기적 변화를 인식했다.■ 그는 당면 문제를 외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GE와 같은 대기업이 그처럼 급격한 속도로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자면 전적으로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고 그에 못지않은 새로운 사업 전략이 필요했다. GE고용인들과 비즈니스 분석가들은 경멸과 불신, 두려움이 섞인 시선을 보냈다. 반면 웰치의 행동에 찬동하고 따르려는 현명한 비즈니스 지도자들도 있었다. 잭 웰치의 리더십 비밀 제5항을 따른 덕분에 1990년대 그들의 회사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도 그것을 훌륭하게 넘길 수 있었다. 잭 웰치는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뛰어난 직감력을 갖고 있었다. 웰치에게 많은 관리 계층들이란 그저 황금처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헛바퀴를 돌리는 데 정신을 파느라 정작 그들의 조직이나 개인 활동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고 있는 한심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히지 않았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가능한 한 높은 이윤을 얻도록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던 것이다.잭 웰치의 경영 개혁안은 다음과 같은 원리로 새롭게 이루어졌다.개혁에는 어떠한 성역도 없다.이제 그만 GE 내부만을 들여야 보는 작업을 멈춰야만 했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 시선을 밖으로 돌릴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은 비생산적인 사업, 관리자 그리고 종업원들의 대대적인 물갈이 작업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곧 생산성 높은 새로운 사업, 새로운 경영, 새로운 종업원을 영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리스트럭처링이라는 과감하고 새로운 전략의 본질이었다.GE의 사업 영역을 나타내는 세 개의 원. 첫 번째 원은 GE의 핵심 사업을 포함하고 있었다. 두 번째 원은 GE의 하이테크놀러지 사업, 그리고 세 번째 원은 GE의 서비스 사업이었다. 개선하거나 폐쇄하라, 아니면 팔아 치운다. 이 표어는 원 밖에 있는 사업을 추진하는 회사의 기본 전략이 되었다. 누군가 그 사업을 GE보다 잘 추진해 나갈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에게 그 사업을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 개의 원 개념은 1980년대를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나침반과도 같은 기본 신념이었다.잭 웰치가 제시한 ‘부드러운 가치(Soft Values)'라고 칭한 전략을 채택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부드러운 가치란 현실성, 질/우수성, 인적요소를 말한다.현실이란 GE의 구성원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봐야한다는 말이다. 질과 우수성은 우리의 영역을 넓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 나은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적 요소는 새로운 것을 용기 있게 추구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잭 웰치는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라. 그리하면 기업은 반드시 보다 의욕적이고, 보다 유연하고, 보다 민첩한 기업으로 변모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다운사이징과 세 개의 원으로 요약되는 잭 웰치의 리더십 비밀은 자신의 기업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갖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다. 그것을 GE에서 일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을 뜻했다.기업 조직 안에서 모든 사람이 계층을 가리지 않고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면 최고경영자에서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조직 계층이나 결재 단계의 수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줄어들고 조직은 탄력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는 “덜 관리하라. 그리하면 회사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리라”는 내용의 경영 철학을 설교해 왔다. 분명 그가 말하는 내용은 적지 않은 장점을 갖고 있을 것이다.Leadership Secrets 18조직 계층 줄이기 : 군살을 제거하라!잭 웰치는 GE에 불필요한 조직 계층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회사에 불필요한 인원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확신하에 사업 계획자들을 제거하였다. 웰치는 지난날 GE에서 통용되었던 겹겹의 조직 계층 구조로 특징지어진 전략 계획 기법을 무시했다. 잭 웰치가 다른 무엇보다도 못 견뎌한 것은 바로 그처럼 기업 정신을 질식시키는 숨막히는 풍토였다.계획 체계는 “처음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을 때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위력을 지닌 기폭제였다”고 잭 웰치는 주장했다. 하지만 계획 양식은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서류 작성 작업을 끝이 없었다. 모든 체계가 아주 간단하게 너무 관료주의적으로 되어버렸다. 전략 계획의 허점을 간파한 잭 웰치는 경영 단계를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일컬어 ‘디레이어링(Delayering : 조직 계층의 축소)’이라고 이름 지었다. 디레이어링이 반드시 생산 비용을 절감한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웰치에 따르자면 오히려 그것은 경영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이었다.디레이어링은 어느 면에서는 당신이 계획을 직접 실행에 옮기고자 할 때 정말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잭 웰치의 경영은 효과적이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회사의 생산성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그 방법을 실행에 옮기고자 노력하라. 잠시 동안 부작용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직한 길이다. 망회사를 특별한 회사로 바꿔 놓게 만들 조치는 도약을 위한 기본 요소다. 이것이 잭 웰치가 GE의 개편 작업에 착수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생각이다. RCA 매입은 대단히 놀라운 조치였다. GE의 소득 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을 매입하는 것은 새로운 GE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GE는 잭 웰치의 취향에 따라 경영 방침이 바뀌고 있었다. 도약을 이루기 위하여 대규모의 매입도 필요했다. 정당한 목표를 갖는 거대한 규모의 매입은 바로 회사 소득과 가치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게 거의 생각이었다.GE와 RCA 두 기업의 합병으로 매출액 400억 달러의 막강한 위력을 지닌 새로운 기업을 탄생시켰다. GE의 합병 이후 서비스와 기술 산업이 이윤의 8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전망이 가능해졌다. 두 회사의 합병은 정말 이상적으로 보였다. 두 기업의 합병에 따른 상승효과는 ‘스타 워(Star War)'계약을 둘러싼 가장 강력한 경쟁 후보로 꼽히게 만들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합병은 제너럴 일렉트릭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잭 웰치는 도약을 이룬 것이다. 이제 그 앞에 놓여 있는 과제는, 그가 새롭게 확보한 사업체에 GE 문화를 ’접목시키는 것‘이었다.Leadership Secrets 22저항이 얼마나 큰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비용을 절감하라!비즈니스 지도자인 당신에게 아주 결정적 교훈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경비 절감이라는 목표를 실행에 옮기고자 할 때, 반대 의견은 불가피하다. 논쟁은 논리적이고, 호소력 있고, 설득력 있어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경비 절감안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주도로 이끌어질 것이다.웰치는 NBC 직원들이 경비 절감 예산안을 두고 다투어 제기하는 논쟁거리들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대개 과거에 통용되던 방식에 근거 ? 비교하여 제기된 문제점들이었다. 웰치는 지나온 과거의 방식들이 그때는 타당하고 옳은 것이었을지 모르나 상황이 변한 지금 그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파멸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경비 절일이다.
    경영/경제| 2010.08.24| 15페이지| 2,000원| 조회(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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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분쟁 지역
    목 차Ⅰ. 제1차 세계 대전Ⅱ. 제2차 세계 대전Ⅲ. 레바논 전쟁Ⅳ. 내가 느낀 점Ⅰ. 제1 차 세계 대전1. 대전의 배경과 원인● 제국주의열강의 세계분할지리상의 발견이후, 전 세계로 나가게 된 유럽 제국들은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은 90% 이상이 식민지가 된다. 19C 후반부터 형성된 제국주의는, 이미 쟁취한 자국의 식민지를 지켜내기 위해 다시 한 번 열강간의 경쟁을 벌이게 했는데, 특히 보불전쟁(1870~71)의 승리이후 통일을 완수한 독일은, 국제외교무대에서 숙적 프랑스와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공업의 힘에서 영국을 추월함으로서, 기존의 식민대국 영국과 프랑스를 위협하게 된다.● 삼국동맹 vs 삼국협상신흥독일이 식민지시장에 등장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1907년 삼국협상을 출범시킨다. 이미 결성되어 있었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독일은 영국과는 3B정책 대 3C정책으로, 프랑스와는 모로코사건으로 분쟁을 촉발시켰으며, 독일의 3B정책은 투르크를 통해 중동으로 남하하려던 2P정책의 러시아와도 마찰을 빚게 된다.* 3C -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연결시키려는 영국의 정책* 3B -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연결시키려는 독일의 정책* 2P -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연결시키려는 러시아의 정책● 발칸반도 문제민족구성이 복잡해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던 발칸반도는, 본래 오스만투르크의 영역이었으나, 투르크가 약해지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진출한다. 이후 발칸반도의 맹주를 꿈꾸던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가 대립하게 되었고, 이들을 지원하고 있던 러시아와 독일도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발칸전쟁으로 각국 간의 대립은 극에 달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때의 발칸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 불렀다.2. 대전의 발발발칸반도의 대립이 점점 격해지던 1914년 6월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부부가 피살된 사용하였고, 주로 정찰용이었던 비행기는 후에 폭탄을 탑재, 적국의 도시와 주요시설에 폭격을 가하게 된다.4. 대전의 종결해전에서의 열세를 만회치 못한 독일은 무제한잠수함작전(1917)을 실시하였는데 미국의 참전만 야기 시켰을 뿐 실패하게 된다. 독일에 계속 밀리던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1917)이 일어나 독일. 오스트리아와 종전하게 된다(1918). 동부전선에서 승전한 독일은 서부전선에 최대 규모의 대공세를 펼쳤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에 패하자 군사력이 소진되었고, 1918년 10월에는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투르크가 항복하였으며, 이후 프. 영. 미 연합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밀리게 된다. 1918년 11월3일 독일혁명이 발발하자, 독일 임시정부는 1918년 11월11일, 프랑스 콩피에뉴의 열차 안에서 프랑스에 항복하게 된다.5. 전후처리프랑스 파리에서 1919년 1월부터 강화회의가 열렸고, 1919년 6월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다. 승전국인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게 전적인 전쟁의 책임을 물어 확실히 보복하고, 국력을 최대한 약화시킬 목적으로 회의를 주도한다. 주된 내용은 독일의 해외식민지 모두를 프랑스와 영국 등에게 할양하고, 보불전쟁으로 프랑스로부터 빼앗은 알사스. 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반환하며, 군비를 엄격 제한하고, 엄청난 배상금(1921년 기준 1320억 마르크)을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패전한 독일에 대단히 가혹한 처벌이었고, 전쟁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떠맡게 되면서 프랑스와 영국 등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게 되었는데, 이것이 2차 대전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Ⅱ. 제2 차 세계 대전(1939.9.-1945.8.)1. 대전의 배경과 원인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당을 중심으로 일당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독일에도 히틀러가 나치당을 앞세우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1934년에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하였다. 일본에서는 공황 이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군국주의 체제를 강로 발전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피해야만 했으며,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확충해둘 필요성까지도 인식하고 있었다.8월 영국·프랑스와의 동맹교섭이 정체되자, 독일·폴란드전쟁이 독일·소련전쟁으로 발전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독일에 접근, 8월 23일 독일·소련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소련은 제국주의전쟁의 권외(圈外)에 서서 국방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2. 대전의 전개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독일의 단치히 및 폴란드 회랑에 대한 요구였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폴란드의 단치히 항에 정박해 있던 독일 순양함이 별안간 항구의 요새를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독일군 정예 부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었고 독일군은 삽시간에 폴란드를 제압했다.그러자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곧 폴란드를 압도하여 소련과 이를 분할하고는, 다음 해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중립국가인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를 침공하였다.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일 만에 항복 시켰다. 5월 19일 독일군이 마지노선 북단을 간단하게 돌파하여 영국해협까지 도달함으로써 영국·프랑스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마지노 선(Maginot Line)은 프랑스가 독일 국경에 만든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대 요새선이다. 1930년부터 약 200억 프랑의 비용을 들여 근대 과학의 정수를 모아 구축하였다. 건설을 주장한 당시 육군 상 A.마지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프랑스는 라인란트의 주둔군을 철수시킨 후 이 요새 선에 의해 독일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려 했으나, 독일도 곧 지이크프리이트 선(線)을 구축하여 대항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1940년 6월 독일군에게 어이없이 돌파되어 전차 공격에는 견고하나 공군력에는 무력함을 드러냈다. 5월 28일 벨기에국왕은 군대와 함께 독일군에게 항복하였고, 북부에서 고립상태에 있었던 영국·프랑스군 33만 명은 6월 4일까지 됭케르크에서 영국본토로 철수하였다. 어진 곳까지 육박하였다. 독일군의 이집트 침입은 아랍 민족운동을 격화시켜 영국의 중근동 지배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다. 1942년 10월, 영국군(B.몽고메리의 제8군)이 반격에 나섰으며, 이에 호응해서 11월에 아이젠하워 휘하의 미·영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독일·이탈리아군은 동·서로부터 협공을 당하여 43년 5월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소련 전쟁 때문에 히틀러는 지중해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25만 명의 독일군이 포로가 되었다.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문자 그대로 세계 대전으로 전화는 전 지구 표면으로 확대되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하고 이탈리아가 이를 보조한 유럽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이 동부 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점차 연합국 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태평양에서의 양상도 비슷했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패한 뒤 서서히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초기에 기습 공격으로 주도권을 장악, 1942년 전반까지 필리핀, 말레이지아, 버마, 네덜란드 령 동인도, 서남태평양 제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동남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동아 공영권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질 듯이 보였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 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급로 유지가 곤란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미국은 8월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 일본은 각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전멸당하고 10월에는 레이테 만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1945년에는 필리핀을 빼앗겼다.한편 1944년 6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44년 12월 서부전선의 아르덴에서 일대반격을 시도했으나 4일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군은 45년 2월 오데르강, 4월에는 나이세강까지 진아미드제·페니실린 등의 항생물질이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수요증대와 노동력부족 때문에 대량생산방식이 도입되었고, 원료부족을 보완하고 생산비를 줄이기 위한 기술혁신이 각종 산업에서 추진되었다. 이런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기술혁신 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Ⅲ. 레바논 전쟁1. 전쟁의 배경과 원인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쟁의 중심지는 레바논이 되었다. 요르단에서 쫓겨난 이래 나부 요르단은 PLO의 중요 거점이었다. 약체인 레바논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PLO는 레바논의 가장 강력한 무장 세력이었다. 이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전쟁이 1982년의 레바논 전쟁이었다.4 차 중동전 후 '81년까지 간헐적인 전투와 상호 정찰 및 요격이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평온한 날이 지속되었다. 1982년 봄이 되자 레바논내의 PLO 게릴라에 의한 공격이 빈발하고 베카 계곡에 포진한 시리아군의 SA-6 미사일 위협, 그리고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에 의한 유럽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연쇄습격은 레바논 침공의 대외적인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레바논 내에 친 이스라엘 정권수립 등을 목적으로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으로 갈릴리 평화작전(Operation Peace for Galilee)을 개시하였다.2. 갈릴리 평화작전1982년 6월 4일 오후 3시 이스라엘 최신예 F15, F16전투기 편대들이 레바논 국경을 넘어 PLO거점에 폭격을 퍼붓는 것을 시작으로 갈릴리 평화작전이 시작 되었다. PLO 게릴라의 부녀자가 뒤섞인 난민 캠프에다 대고 전차포를 퍼부어 댈 수 없었기에 이스라엘과 게릴라사이에는 치열한 총격전과 백병전이 일어났다. PLO 게릴라들은 결사적인 항전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힘은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온 이스라엘 정규군을 능가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1000여명이 그들 처자와 부모의 눈앞에서 목숨을 잃어가며, 틸 시는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점령이 되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군의 주력부대는 베이루트를 향해 일로북상을 계속 중이었고, 마침내 이들은 레바논 산의.
    사회과학| 2010.08.24| 9페이지| 1,500원| 조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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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가 역사적 · 국제법상 우리 영토인 이유
    목 차Ⅰ. 서론(1) 독도에 대해서(2) 보고서의 목적Ⅱ. 본론Ⅲ. 결론Ⅰ. 서론(1) 독도에 대해서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딸린 섬으로 면적 0.186㎢이며, 독섬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90㎞ 해상에 위치하며,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산재하는 36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서도 사이는 너비 110∼160m, 길이 330m의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m에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졌고 분화구가 있으며, 서도는 해발고도 168m에 안산암·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어 있다. 동도를 암섬, 서도를 수섬이라 하기도 한다.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일컬어졌으며, 1881년 독도로 개칭되었다.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돍섬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고,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 섬을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프랑스에서는 '리 앙쿠르(Li ancourt)', 영국에서는 '호넷(Hornet)'으로 해도에 표기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독도의 가치를 재인식한 일본은 같은 해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시켰으며, 이후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여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현안으로 남아 있다.(2) 보고서의 목적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3월 16일 오전 본회의를 열어 매년 2월22일을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의 날’로 정하는 조례안을 끝내 가결했다. 전부터 있어왔던 독도 문제가 이 조례안을 계기로 더 불거졌다. 오래 전부터 양국간 독도분쟁이 있어 왔는데 독도분쟁 문제가 가열된 지금 고문헌과 고지도를 통해 역사적으로 우리 땅인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1. 독도, 서기 512년부터 한국 영토독도(獨島)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우산국(于山國)이각종 고문헌과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다.또한 19세기 후반까지 독도의 이름이 ‘우산도’였던 사실도 독도(우산도)가 ‘우산국’의 영토였음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다.2.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울릉도와 함께 독도(우산도)가 조선 왕조의 영토라는 사실은 일본 등에는 물론이고 서양에도 잘 알려졌다. 서기 1737년에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당빌(J. B. B. 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전도』(Royaume de Coree)에도 독도(우산도)가 조선 왕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가 동해안에 매우 근접하게 그려져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도처럼 우산도(독도)가 울릉도보다 안쪽에 그려져 있는 것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더 강조해 주는 것이다.3. 일본 고문헌과 일본 고지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기록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에서 처음 기록했다고 지적한 1667년의 일본 관찬 고문헌 『흔주시청합기』도 울릉도(당시 일본 호칭 竹島)와 독도(당시 일본 호칭 松島)는 고려 영토이고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은기도를 한계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일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에 편찬한 『삼국접양지도』는 나라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조선은 황색으로, 일본은 독색으로 표시했는데,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조선 색깔인 황색으로 정확하게 칠했을 뿐 아니라 그 옆에 「조선의 것 」이라 써서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료하게 표시하였다.4. 17세기 말 일본 정부, 독도 ?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일본이 1592~98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왜국은 독도를 거쳐 울릉도에도 침략하여 주민을 학살하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주민피살을 막기 위해 조선 조정이 울릉도를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을 강행했다. 이 틈에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 조정 몰래 일본 어부 2가문에게 1618년 울릉도에 건너가는 「죽도도해면허」와 1656년 독도에 건너가는 「송도도해면허」를 내주었는데 이것은 외국에 건너갈 수 있는 허가장선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및 독도) 고기잡이를 엄금했으며, 「죽도도해면허」와 「송도도해면허」를 취소하였다. 동래 출신 어부 안용복도 이 때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활동했다.5. 19세기 일본 메이지 정부 공문서, 독도 ?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확인일본에서 1868년 1월 도쿠가와 막부정권이 붕괴되고 새 메이지정부가 수립되자, 일본 새 정부의 태정관(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은 1869년 12월 외무성 고관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14가지 항목에 대한 내탐 조사를 명령하였다. 그 가운데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 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을 조사하라는 명령 항목이 있었다. 당시 일본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과 외무대신은 을릉도와 독도가 ‘조선부속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한 내탐보고서과 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이고, 이는 일본 외무성이 1930년대에 편찬한 『일본외교문서』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울릉도와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영토임을 일본도 공지 공인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6. 일본 내무성, 독도 ?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일본 내무성은 1876년 근대적 일본 지도와 지적도를 작성하기 위해 각 지방 현에 자기 현의 지도와 지적도를 작성하여 보내라고 훈령했는데, 시마네현에서 동해 가운데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를 시마네현에 포함시켜 작성할 것인지 질문서를 제출하였다. 일본 내무성은 약 5개월간 조사한 결과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영토 문제는 중대사항이므로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의 최종 확인 결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태정관에게 질문하였다.7. 일본 최고국가기관(태정관), 독도 ?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결정일본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은 내무성의 결정 품의서를 재검토함 결과 1877년 3월 20일자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이 명백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품의한 취지의 울릉도(죽도)와 그 외 1도인 독도(송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심득(心得, 마음에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정확히 표시『大韓與地圖』 『大韓全圖』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불법 상륙하여 나무를 베고 이주까지 하려 하자 조선 조정도 1882년 공도정책을 폐기하고 한국인 이주정책을 실시하였다. 갑오개혁 후 작성된 근대저거 한국지도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정확한 위치에 표시하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1898년 대한제국 학부의 『大韓與地圖』(대한여지도)와 1899년의 『大韓全圖』(대한전도)는 독도(于山)가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표시하였다.9.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 독도를 한국영토로 세계에 공표대한제국은 일본인들의 끊임없는 울릉도 불법 입국과 정착을 방지하는 적극적 대책의 일환으로 지방행정체계를 개편하여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를 제정 반포해서 종래 강원도 울진군에 속했던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새로운 울도 군수를 임명하였다. 울도군이 관리하는 구역은 울릉도 ? 죽서도(죽도)와 독도(石島)로 하였다. 그리고 이 관제 개정을 중앙 「관보」에 게재하여 전 세계에 알려지게 하였다. 이 1900년 칙령 제41호에 의해 서양국제법 체계에서도 독도가 대한 제국 영토임을 또 한번 세계에 공표하게 되었다.독도 공도정책을 폐기하고 이주정책을 실시하자 울릉도에는 다도해 호남지방 어민들이 다수 정착했는데, 이주민들은 독도의 종례 관명인 ‘우산도’보다 돌로 된 섬이라는 뜻으로 ‘돌섬’(호남 사투리로 ‘독섬’)이라고 더 자주 호칭하였다. 이 ‘독섬’을 발음 중심으로 한자 표기할 때는 ‘獨島’(독도)라 표기하고, 뜻 중심으로 한자 표기할 때는 ‘石島’(석도, 돌섬)라고 표기하였다. 서양 사람들은 최초로 서양지도에 독도를 그린 「리앙쿠르(Liancourt)호」의 이름을 따서 ‘독도’를 ‘리앙쿠르 바위섬’(Liancourt Rocks)이라고 호칭하였다.10. 일본, 1905년 독도 강제 편입일본은 1904년 2월 러 ? 일전쟁을 일으킨 후, 동해에서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는 해군 망루를 독도에 세우기로 하였다. 이 때 마침 나카이라는 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독도 영토편입이 세계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관보」에 싣지도 못하였다.그러나 독도는 1905년 1월 28일 이전에, 이미 서기 512년부터 한국 영토로서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였다. 따라서 ‘무주지’(주인 없는 땅)이기 때문에 독도를 일본에 영토 편입한다는 일본 정부의 결정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불법적, 무효의 결정이었다.울도 군주는 1906년 3월 28일에 비로소 일본의 독도침탈 사실을 알고 강원도 관찰사를 통해 중앙정부에 보고했으며, 대한제국 참정대신은 즉각 일본의 불법성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4년 후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병탄되어 버렸으므로, 독도는 온 나라를 되찾을 때 함께 되찾게 되었다.11. 연합국, 1946년 1월 독도를 한국에 반환하는 군령 발표일본이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한 후, 연합국은 동경에 연합국 최고 사령부를 설치하고 구일본제국이 이웃나라 영토를 침략하여 빼앗은 모든 영토들을 원주인에게 반환해주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의 군령을 발표하여 한반도 주변의 제주도 ? 울릉도 ? 독도(리앙쿠르 도)등을 일본 주권에서 제외하여 한국에 반환시켰다.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이어서 1946년 6월 22일 SCAPIN 제1033호를 발표하여 일본 어부들의 독도와 그 12해리 수역에 접근하는 것을 엄금하여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거듭 명백히 하였다. 이 군령들은 아직도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동시네 주한미군정(연합국)으로부터 한반도와 독도 등 부속도서들을 영토로 인수하였고, 1948년 12월 12일 국제연합으로부터 그 영토와 주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12.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규정연합국은 1592년에 일본을 재 독립시켜 주기로 하고 이에 앞서 1951년 『對일본강화조약』을 체결하여 하였다.었다.
    사회과학| 2010.08.24| 11페이지| 2,000원| 조회(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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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열 올바로 보기
    Ⅰ. 서론우리나라의 교육열이 세계최고라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사교육이 심해졌으며, 해외유학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다른 사람들이 교육열이 사회악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교육열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으로 그 자체는 하나의 동기화된 욕구체제일 뿐, 비판받아야 할 것은 교육열을 부정적으로 나타나게 만든 요인이나 조건들이라고 한다. 교육열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학교제도와 입시제도와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교육열에 대한 학부모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기적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와 환경과의 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예로 ‘기러기 아빠’문제를 보면, 이것을 가족의 교육 욕심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제도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개인 가족의 문제를 넘어서 국가적?사회적 교육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교육열이 한국교육의 희망요소라고 생각하며, 한국교육을 이끌고 있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이 책은 교육열에 대해 개념을 새로이 정립함으로써 교육열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재발견을 강조하고 있다. 앞으로의 교육열 연구의 방향과 우리나라 교육정책에 대해서 정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교육열을 자원화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Ⅱ. 본론제1부 교육열 제대로 보기 : 교육열의 환경과 정체(正體)와 운동법칙제1장 한국 교육의 꿈과 현실 : 교육열 환경에 대한 총체적 진단한국교육은 양이 넘치면서도 질적으로 크게 왜곡되어있고 매우 비효율적이다. 많이 공급되는 교육의 기회가 수요자들에게 쓸모 있는 기회일 때 비로소 교육기회의 나라가 될 수 있다. 교육경쟁 문제의 심각성을 해결하는 방안의 한 가지는 교육을 다양화하여 교육요구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분산시키는 것이다.학습 동기가 천민화되어 왔다. 왜 교육을 받는가하면, 실질적인 이유는 입시성적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는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매우 심한 나라이다. 고서 활발한 질문과 토론은 학습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인데 학생들에게서 그러한 기회들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말만 발표 수업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활발히 펼칠 수 있도록 실제로 행해어지는 발표 수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제2장 교육열에 대한 기초적 이해교육열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동기나 열의를 말한다. 한국인의 교육열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다. 교육열은 교육에 관한 일상적인 동기체제의 정도를 말한다. 교육열은 자녀를 위한 성취욕과 자녀를 통한 성취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교육열에 대한 비난은 타당한가? 오히려 비판받아야 할 것은 교육열을 부정적으로 나타나게 만든 요인이나 조건들이어야 할 것이다. 교육열 그 자체는 하나의 「동기화된 욕구체제」이다. 그 욕구체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은 우선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학력주의 관행에 기인한다. 교육경쟁을 부추기는 교육구조도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우리나라 교육열의 담지자는 바로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다. 자녀가 성공하여 출세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모든 부모들이 동일할 거라고 생각된다. 자녀출세에 대한 부모의 바람과 열성적인 뒷바라지를 비난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교육열은 그 자체로서는 일상적인 동기체제일 뿐 교육열 그 자체와 교육열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나 행동을 구분하여 생각해야 한다. 교육열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은 현 사회구조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나라는 학력에 의해서 능력을 결정짓기도 한다. 사람을 보지도 않고 학교만을 보고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해 버리는 현실로 인해 무조건 상위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생각이 학부모에게 작용하여 교육열에 한 몫을 한 것 같다.제3장 「교육열」인식의 전환을 위한 재 개념화 작업교육열을 비난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배척해온 선입관부터 버려야 한다.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 개념으로 취급해야 한다. 교육열 발산의 주체가 학생이 아닌 학부모라는 것이다. 교육열은 자녀를 식자본과 인적자본 축적을 강화해야 한다.교육열 정책을 추진하려면 교육열에 대한 잘못된 인식(교육열은 사회악이라는 인식)부터 불식시켜야 한다. 교육열 정책은 교육열을 수용하고 자원화 하려는 입장에서 세워져야 한다. 교육경쟁을 수용적 분산정책으로 나가서 각종 경쟁욕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흡수해야 한다. 새로운 교육열 정책은 교육열 수용적 시각과 냉정성과 인내성을 길러야 한다는 시각에서 새롭게 보아야 한다. 교육을 다양화하여 교육요구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우리에게 넘치는 교육열을 육성하고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교육열이 교육발전에 방해요소라고 보지만 말고 교육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필자가 교육열 정책수립에 대해서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가며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가 정책에 대해서 제안을 하고는 있지만, 정책 수립도 교육열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검토하고 수립해야 할 것이다. 또 지금 상황에서는 아직 사회적 인식과 분위기가 부족하고 아직 교육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식전환과 교육열의 깊은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야 가능할 것 같다.제5장 교육열의 운동법칙과 결합법칙교육열은 교육이 지위상승체계에 미치는 영향력의 정도가 높은 교육장면으로 운동한다. 교육열은 인간대접을 받는데 영향을 미치는 교육장면으로 움직인다. 각 시대의 교육열은 교육 후의 결과가 제도적으로나 관행상으로 높은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교육열은 주어진 환경에서 그 원형인 ‘자녀성취욕구’가 충족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교육열이라는 동기체제가 무엇과 결합하느냐는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교육열의 결합성은 전달성이 높은 것과 우선적으로 강렬하게 결합한다.제2부 교육열 연구 다시보기 : 비판적 논의제6장 교육열 분류에 대한 비판적 논의김영화 등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인의 교육열 연구(1993)』에 대해 비판적 검토를 하고 있다.제7장 연합적경쟁론과 교육전쟁론의 비교 검토이종각이 제시한 연합적 살리는 길이며, 살아갈 길이다. 인재양성은 정부가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힘써야 할 부분이다. 필자는 고교평준화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고교평준화가 아니라 교육의 자유에 대한 욕구를 받아들여 다양하게 고품질화되어서 국제경쟁력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교평준화를 통해 교육평등을 이루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점차 교육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고려해보게 되었고, 교육평등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다양성도 수용하여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평등을 보완하면서 다양성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필자는 중산층과 부유층도 감쌀 수 있는 정부가 되어야한다고 한다. 특수목적고, 자립형사립고를 세움으로써 부자들도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득권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제9장 학력 ? 학벌의 존재구조와 극복전략학력은 다분히 산업사회의 산물이다. 파벌적 ? 폐쇄적 학벌주의 역시 개방적 능력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 학력 차별이 없는 사회는 학력보다 능력이 존중되는 사회 즉 능력주의 사회이여야 한다. 능력기반 보상체계의 투명성 확보가 이루어져야 학력과 학벌에 대한 어떠한 억제조치나 캠페인성 도덕적 호소가 가능할 것이다.한 집단에 동일 학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주도적이면서 배타성을 띌 때 학벌현상을 느끼게 된다. 학력주의, 학벌주의를 부추겨서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학력주의와 학벌주의가 더욱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 것이고, 부정적 측면이 많이 노출되는 것이다.교육열은 능력주의 사회건설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대졸 이후의 노력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자율성이 보장되려면 중앙으로부터 규제와 간섭이 적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국가의 교육기능 축소 방안을 검토해보아야 한다. 지방의 학벌도 학벌이며, 지방정치나 지방관료 사회에서의 문제점과 병폐도 지방 자치제가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개혁수단의 발견전략-인적자원개발은 국가나 사회의 요구이고, 자기능력개발을 하고 자아성취를 하려는 것은 개인의 요구이다. 교육은 국가의 요구와 개인의 요구를 동시에 수용해야 하는 양 측면이 있다. 다양한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도 않은 획일적 기계적 교육평등은 진정한 교육평등이 아니다. 앞으로 한국교육이 추구해야할 교육평등은 다양한 기회가 풍부히 주어진, 개개인의 교육선택권이 인정되는 유기적 교육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과외와 사교육으로부터 자유롭게 개혁안을 만들어야 한다. 교육열 부작용의 가장 큰 원인은 교육열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학교제도와 입시제도와 사회구조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정책발상은 교육열에 대한 수용전략을 적극적으로 펴야 한다. 교육도 양의 시대에서 기회균등의 시대에서 품질교육, 고품질 교육으로 바뀌어야 하며 다양한 분야에서의 고품질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들의 다양화된 교육욕구를 수용할 수 있는 욕구 수용적 교육체제로 구축해야한다. 소수의견은 소수만큼 교육제도에 반영한다는 정책적 입장이 필요하다. 다양화란 소수의견의 다양한 반영을 포함하는 것이다.나는 이때까지 교육의 기회가 동등하게 나누어질 수 있도록 해야 교육평등의 실천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내가 간과했던 것을 필자가 꼬집고 있어서 내 생각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것은 획일적인 평등이 아니라 유기적 교육평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선택권을 전부에게 돌아가도록 만일 특수목적고나 자립형사립고를 필요로 하는 수요에 맞도록 설립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유대로 학교 선택을 했지만 만일 그 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사회 위화감과 자기 절망에 빠질 것이다.정부는 과외와 사교육비를 억제하려는 정책만 펼치고 있다. 현재 국민들의 교육열로 인해 생긴 사교육을 긍정적으로 보고 다만, 사교육의 부정비리가 퍼지지 않을 정도로 규제해주면 국민들의 교육열은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것 같다.필자는 자립형사립고의 찬반비율을 들며 소수의 의.
    교육학| 2010.08.24| 7페이지| 1,500원| 조회(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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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시가론 요약
    ◈2007학년도 1학기 고시가론(전선) 교재 요약?수업정리제 1 장 총 론? 고전시가의 개념①개념 : 몇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만큼 개념적 명료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②고전시가의 ‘고전’에는 시간개념만 아니라 ‘훌륭한’작품이라는 가치개념까지 함께 부착 되어 있다.③‘고전’은 ‘현대’와의 대립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다.④시(시가)와 율문의 관계 : 모든 시(시가)는 율문(언어의 리듬 특성에 따른 분류)에 속한 다.⑤시와 시가의 관계 : 모든 시가는 시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시를 시가라 할 수 없다.⑥고전시가에 담긴 ‘시가’의 뜻 : 시어면서 동시에 노래라는 뜻 한국적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 고전시가의 영역과 장르 체계상대시가, 향가, 속요, 경기체가, 악장, 시조, 가사, 잡가 등 8종(1)고전시가의 영역이 국문시가에 한정①고전시가의 영역이 국문시가에 한정된다는 이 평범한 사실이 오히려 고전시가의 특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는 한 단면이다.②시문학 유산-우리말 중심의 고전시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문 중심의 한시도 있다.-한국의 옛 시문학에는 고전시가와 한시가 나란히 병존하는 아원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전시가는 고전시가대로, 한시는 한시대로 각각의 고유한 전통 속에서 형성해 낸 독립된 장르 체계를 지니고 있다.③로만 야콥슨 : 시는 언어가 지닌 여서 가지 기능 가운데 메시지-말 혹은 언어-자체에 초 점을 두는 시적 기능이 전경화된 언어가 중심이다.(2)고전시가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그대로 일치하는 역사성①상대시가는 시가의 발생 단계에서 6,7세기의 삼국시대에 이르는 초창기 우리 시가의 역 사적 현상을 다루기 위해 편의상 설정된 장르이다.②고전시가의 장르 체계는 각 장르고 형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계기 적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6,7세기 통일신라~고려 전기 : 향가-고려 후기 : 속요, 경기체가-15세기 : 악장-16세기 : 시조와 가사가 사대부 지식인을 중심으로 성행-19세기 :곧은 성벽을 자연 사물 에 비겨서 노래한 작품.ㄷ.6~7세기 비가악계 창작시 : 실혜가, 천관원사, 해론가, 양산가②비가악계 구비시가ㄱ.전승민요와 주술계 노래가 중심ㄴ.풍요 : 노동요로서의 방아노래와 무관하지 않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ㄷ.주술계 노래의 자료-삼국시대 초기에는 주몽의 백록주술과 가락국의 구지가-6~7세기 비형랑사, 지귀사가 삼국유사와 대동운부군옥에 남아 있다.-서동요와 혜성가 : 선험적 주술의 문학적 변용ㄹ.6~7세기 한국시로서의 미학적 전통을 확고히 하자, 주술계 노래의 전통이 더 이상 미적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③삼국시대에 형성된 네 계열 : 주술적 노래계열, 민요적 서정시 계열, 개인적 서정시 계 열, 공리적 서정시 계열? 생성기 서정시로서 공무도하가의 성격①작품의 구조나 시상의 전개가 배경설화의 서사진행 과정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 에서도 공무도하가의 민요적 성격이 발견된다.②이 작품은 논리적인 분석결과를 중히 여겨 강한 서사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③극적 독백체 민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④서정적 자아는 개인으로서의 ‘나’의식보다는 우리로서의 ‘나’의식에 뿌리를 둔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제 3 장 향가? 향가의 명칭과 개념(1)향가의 명칭①향가는 신라 사람들이 즐겨 창작하고 불렀던 노래 유산을 하나의 장르로 묶어서 부르는 이름②전하는 작품 : 모두 25수로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보현십원가 11수가 전한다.③향가의 정의 : 향찰로 표기된 우리말 노래, 삼국시대 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존속했으며, 4구체, 8구체, 10구체 등 세 가지 형식을 지닌 정형시이다.④향가와 사뇌가 : 사뇌가는 동방의 노래라는 뜻의 순 우리말 민족감정도 상당히 강하게 작용⑤향가는 ‘자국의 노래’, ‘우리의 노래’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2)향가의 개념과 장르론적 쟁점①전통적인 향가의 개념ㄱ.향찰식 표기 : 14수가 실린 [삼국유사], 보현십원가 11수가 실린 [균여전], 광복 후 새 로 발견된 고려 예종의 도 시로서의 개인성이 강하게 드러 나지 않는 특수성을 지닌다. 신라사회의 기층민적 염원이 투사된 결과의 작품이다.ㄴ.기층민 사회의 사뇌가계 향가 수용? 향가의 형성과정과 역사적 전개(1)장르 형성의 과정①향가는 신라의 우리말 노래가 구술행위 중심의 문학에서 문재향위 중심의 문학으로 전환 되는 과정에서 출현한 장르이다.②향가 장르의 출현 시기 : 7세기 전후로 보고 있다.③차자표기법ㄱ.한문을 공식문어로 채택하여 문자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초기부터이며 차자 표기에 대한 관심도 이때부터 비롯되었다.ㄴ.음독과 훈독의 방법 : 고유어의 표기를 위해 삼국시대 초기부터 고안되어 점진적으로 발전④삼국 초기부터 신라가 통일하는 7세기까지의 삼국시대 우리말⑤향찰식 표기 : 문자 문학적 성격을 본질로 하여 새롭게 출발⑥민요계 향가는 기층민을 중심으로 사뇌가계 향가는 상층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여 독자적 으로 형성, 전개(2)향가의 성행과 향유층 확대-8세기 향가 향유층의 확산은 경덕왕 때의 작품인 [도솔가]와 [도천수대비가]를 통해 구 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3)기능성 강화와 향가의 쇠퇴①8~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 향유층의 확산을 통해 기층민과 상층 지식인들이 두루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노래양식으로서 대중성 확보에 성공했으며, 민간음악으로서만 아니라 왕실음악으로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는 음악적 지위의 상승까지 이루어 내었다.②10~12세기의 고려시대의 향가 : 폭넓은 대중적 호소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면서, 노래가 특수층의 이념을 대변하는 양식으로 기능화되어 나가는 쇠퇴의 길을 밟고 있었다.③고려시대 향가가 대중성을 잃고 특수층의 이념을 대변하는 노래로 기능화 되어 간 까닭 : 한문의 급격한 보급으로 인한 문자생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감동천지귀신’의 논리와 향가의 미의식①‘감동천지귀신’론을 중심으로 한 일연의 향가에 대한 짤막한 논평은 오늘날 우리가 향가 를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소중한 향가론 이다.②일연이 주장하는 감동의 논리는 주술적 차원과 종교적 차원는 음향현상, 음악적 단락 표시의 보조수 단ㅂ.소굥의 조흥구 : 처용가, 동동, 정과정 등에서 보이는 ‘아으’, 서경별곡에서 보이는 ‘아 즐가’, 정석가, 서경별곡, 가시리 등에서 보이는 ‘??’, 상저가에서 쓰인 ‘히얘’ 등ㅅ.속요에 존재하는 감탄사의 범주 : 정서표현의 보조수단이면서 언어현상인 것, 무의미한 음향현상과 유의미한 언어의 중간적 존재인 것, 의미단락 표시에 보조수단인 것ㅇ.속요의 감탄사 : 사모곡, 정과정, 이상곡, 만전춘별사 등에서 쓰인 ‘아소 님하’ 처용가에 서 보이는 ‘어와’ 등? 속요의 주제①표면적으로는 남녀 간의 노골적인 성관계 묘사와 타락한 성풍속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는 쌍화점, 만전춘별사, 이상곡 등은 그 속에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사회비판을 강하게 담 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중적인 주제를 지녔다고 평가된다.②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 : 서경별곡, 가시리, 정석가, 동동 과 가사 부전의 거 사련, 예성강, 제위보 등이 이 범주에 드는데, 화자는 여성이다.③사친 :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에 대한 사랑을 읊은 사친의 속요로 사모곡, 상저가, 오 관산 등④처용가 : 신라 때부터 있었던 작품으로 주술성이 강조되는 노래이다.⑤장암 : 고려사 악지에 실려 있는 이 노래는 두영철이 유배지에서 촌로와 친하게 지냈는 데, 유배에서 풀려나 그 곳을 떠날 때 노인이 앞으로는 구차하게 벼슬을 바라지 말고 경계하라고 했으나 두영철은 소환된 뒤에는 다시 평장사를 지내다가 죄를 지 어 배소로 가는 도중에 그 노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때 노인이 지어준 노래가 장암이다.⑥현실극복의지의 작품 : 청산별곡, 장암? 내용과 형식→내용과 형식은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 적 통일이 바로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제 5 장 경기체가? 경기체가의 개념과 명칭①경기체가 : 고려 말기 신흥사대부가 지은 연장형식의 서정시가로서 ‘한림별곡’을 효시로 하며, 각장은 전대절과 후소절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의 끝에 ‘위~경로 설정하면서, 전통의 한문악장을 보조 적 자료로 다뤄야 한다.? 악장의 유형과 형식①한문악장 : 기본적으로 한시를 형식적 기조로 하고 있으면서도 정통의 한문악장과 달리 이들 작품에서는 우리말 노래의 형식적 전통을 수용하려는 형식적 변용을 시 도하고 있다. 즉 각 연이 본사와 후렴구로 이루어지는 분절형식을 취하며, 전 체가 여러 연으로 이루어지는 연장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②현토악장 : 형식상 한문악장과 국문악장의 중간적 성격을 지니는 특이한 위치에 있는 악 장이다.③한시체의 현토화 배경-현토악장이 모두 우리말로 부르는 향악곡에 얹어 부르기 위해 제작된 노래가사이다.-우리말을 문자로 기록할 수 있는 훈민정음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④국문악장 : 국문악장은 각종 연회에서 주로 향악에 얹어 부르는 노래의 우리말 가사로 서, 중요성은 악장 장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ㄱ.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정도전의 신도가와 하륜의 「신도형승곡」,「도인송도곡」은 모 두 조선의 새 수도인 한양을 예찬한 노래이다.ㄴ.「유림가」,「감군은」 : 두 작품은 악곡만 친연성을 지닌 것만 아니라 노래의 성격까지 도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ㄷ.「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훈민정음 창제 이후 창작된 작품들이다.-말과 글이 일치하는 새로운 문자를 사용하여 창작된 첫 작품이다.-100여 장 이상으로 이루어진 장편 거질의 대표작이다.-정통의 한문악장을 비롯하여 그 동안 시도된 모든 송축적 작품들을 한 편에 집대성하려 한 작품이다.ㄹ.용비어천가의 구성(125장) : 조선 왕조 창업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는 제1~16장의 서 가, 조선 왕조 창업의 당위성을 실증하고 있는 제17~109장의 본사, 후대 왕의 규계를 당부하는 제110~125장의 결사ㅁ.월인천강지곡-모두 580여 장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방대한 규모의 작품이다.-석가의 일대기를 노래한 장편 서사시라는 점에서는 용비어천가와 상통하나, 순수한 불교 적 송찬의 노래라는 점에서는 왕조의 송축이 중심을 이루는 악장의 전형성을 벗어나는 작 품이기도 하다..
    인문/어학| 2010.08.24| 23페이지| 3,000원| 조회(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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