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갈라디아서 각 중심 섹션별 주제들과 개요1. 서론갈라디아서는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와 더불어 바울의 네 주요서신들 가운데 하나이다. 내증으로는 서신의 서문이 사도 바울을 편지의 저자로 명기한다. 갈라디아서와 유사성을 가진 것은 로마서인데 두서신서들의 공통적인 신학적인 주제들은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신칭의를 주장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을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영위해야할 삶의 원리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발견되지 않는 요소 중에 대표적인 것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과 복음을 변호하는 긴 자서전적 내용이 갈1:11-2:10에 나타나 있다. 서론의 인사말은 문화적으로 헬레니즘화 된 주민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보내진 것으로서 안디옥 사건과 예루살렘 회의 사이의 어느 시점인 주후49년경에 기록 된 것으로 볼 수 있다.갈라디아서의 저작목적은 예루살렘에 기원을 둔 유대인들이 등장하여 할례와 율법준수를 요구하기 시작하자 새 시대에 걸맞게 믿음과 성령을 따라 살아갈 것을 권면하는 것으로 시종일관 바울은 유대주의적 논점들을 비평하고 있다.갈라디아서의 기본구조는 두견해로 살필 수 있는데, 첫째는 윤리적인 권면이 신학적 변증 부분과 대체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과 둘째로 윤리적인 권면 부분이 전체 서신에 필수적으로 통합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저자인 이한수 교수님은 제1부로 갈 1:6-5:12절까지를 바울의 신학적 변증으로 갈 5:13-6:10절까지를 제2부로서 바울의 윤리적 권면에 대해 서술한다.Ⅱ. 인사말 (갈1:1-5)갈라디아서의 인사말은 고정화된 형식을 따르지 않고 그의 독자들의 처한 상황과 편지를 쓰게 된 목적에 부합하여 뒤에 따라나오는 내용들을 인사말을 사용하여 신학적인 기초를 놓는다. 눈에 띠는 것은 바울은 처음부터 갈라디아 독자들에게 사도직을 강조하는 것이다.1절 : 바울의 사도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신적인 사노릇이라는 반제는 갈리디아서의 핵심적 논제이다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에 매력을 느끼는 일을 끊어 버리기 위해 바울은 그것을 ‘종노릇’의 한 형태로 묘사한다(2:4-5, 4:1-11)율법의 종노릇에서 자유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의 전체 문맥에서 볼 때 단지 신학적인 측면만을 가진 것은 아니고 5-6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와도 관련이 깊다.자유는 신학적인 주제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이고 실천적 주제이다 바울이 현재 동사 에코멘을 사용한 것은 자유가 지금 신자들이 누리고 있는 현재적 실재라는 것을 시사한다. 자유는 구원론적 직설법의 영역에 속한 사건인데 이것은 신자들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안에 있을 때 주어진다. 자유는 율법의 저주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죄인이 율법의 거룩한 요구에 직면할 때 발견하는 윤리적 무능력과도 관련된다.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향유하는 자유는 성령의 능력에 붙들려 있는 실존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은 율법 아래서의 실존과 삶에 대한 실재적인 대안이기 때문에 선동자들의 주장은 이방신자들을 율법에 예속시킴으로 그들을 통제하려는 뜻밖에 없다.3) 하나님의 사역의 목적은 베드로에게 할례의 사도직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할례의 사도직이란 표현은 할례의 복음과 상응한다.사도직이란 말은 여기서 기독공동체들을 세우는 일, 즉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놀라운 것은 베드로에게 할례의 사도직이란 표현이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에 바울에 대해서도 대칭되는 ‘이방인들의 사도직’이란 표현이 쓰일 수 있을 법 한데,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사도직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를 피하고 대신 단순히 이방인들을 위해 란 말을 사용했다.4)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행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구약이나 중간사 시대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경건 생활의 필수적인 표현이었다. 가난한자들을 멸시하거나 핍박하는 행위는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하나님 자신을 저버리는 행위이다에 모호한 점도 없지 않지만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그것은 첫째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은 그의 유대교 비판과 관련하여 새롭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바울이 유대교를 비평한 것은 유대교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구원의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되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의 신분표지의 행위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로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살아가는 이러한 종교-사회적 생활패턴을 평가절하시키고 상대화시킴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누구나 오직 ‘믿음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셋째로 안디옥 사건은 ‘신분’과 ‘행위’의 문제가 둘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준다.2. 재정의된 아브라함의 가족 (3:1-4:31)1) 성령경험을 통한 논증갈라디아 사람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당면한 위기는 그들은 다른 복음을 추구한데서 발견된다. 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오해한 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유대주의자들의 선동 때문으로 할례를 주장하는 다른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며 결국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받았는가 ? 바울은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믿음은 갈1:23에서 믿어지는 것 즉 복음과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이 성령의 선물을 능력을 행함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게 한 것은 갈라디아인들의 성령경험이 단지 지적인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에 대한 실제적 체험들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준다.2) 성경을 통한 논증구약에서 나온 성경구절들을 통해서 한가지 근본적인 사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의 범위와 그 참된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아브라함과 ‘믿음의 사람들’을 연결짓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혈통적으로 또는 율법과 관련하여 정의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을 무너뜨리고자 한다.(1) 구약에서 특히 시편과 이사야에서 것은 4장3,5,7절에서 갈라디아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 크게 부각되는 ‘자유’의 주제가 소개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양자가 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고 아들이 된 자들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을 유업을 함께 이을 수가 있다.7) 바울의 개인적 호소(4:12-20)이 섹션은 바울이 갈라디안이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그들과 유정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포기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하갈과 사라의 알레고리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복음에서 발견되는 참된 자유를 꼭 붙들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인들은 “의심이 있었기에 바울이 당황하고 있음을 또한 볼 수 있다.8)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통한 논증(4:21-31)갈라디아서의 신학적 맥락속에서 볼 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과 믿음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에 관련을 맺고 있다.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적 문맥에서 ‘육체는 인간적 관계나 또는 육신적 혈통에 기초한 단순히 인간적인 어떤 것을 뜻할 수 있다. 사라와 하갈에서 난 두 아들이 대표하는 것은 두 종류의 백성에 강조점을 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알레고리는 유대교의 율법주의 내지 행위 구원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갈라디아 서신은 이방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모세의 율법이 규정하는 삶의 유형들을 준수함으로써 유대교 중심적 정체성을 인정하는 율법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언약적 신율주의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율법을 기독교 신앙에 반드시 덧붙여져야 할 필수적 조건으로 삼음으로써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교의 중심성을 붙들려고 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선동을 무너뜨리는데 관심과 초점이 잇는 것이다.3. 자유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5:1-12)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의 목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자유를 주는데 있음을 강조하고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려는 갈라디아인들의 태도가 자유를 체험한 그들의 교의 메시지들이 거침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종의 멍에를 메지 말 것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자신을 표현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으며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 있게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갈라디아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인간적인 기원이나 수단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처럼 자신의 사도권을 편지의 서두에서 강조하는 것은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거짓 교사들로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을 심하게 미혹(迷惑)하였으므로 바울의 사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사도권의 기원을 언급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함께 언급하였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시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외에 다른 것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율법을 섬긴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시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임을 경고한 것이다.구속 사역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며 또한 계획하신 대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이처럼 당신의 자녀를 부르시는 분이 삼위 중에 제일 위격인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시는 것은 명백한 계획으로 되었고 그 계획은 완전하며 하나님의 의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갖는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전에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을 가진 자였으나 이제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복종한다.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교회의 구성원 중에는 아직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바울이 교회의 지도자들과 충돌할 때에 발생되는 문제는 그의
가족치료와 목회사역 서평 및 적용가족치료와 목회사역신학의 여러 분야 중에 상담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IMF시대를 맞이하여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고 있는 개인과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방법을 모색하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자 상담이라는 것을 통해서나마 정신적인 안정을 모색한 다음 경제적인 활로를 찾겠다는 의지를 볼 수 있는데 신앙적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이 더 있는 것 같다.오늘날 우리는 가정의 파괴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가난이나, 부부사이의 불화로 인해 자녀가 버림을 받는가 하면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거나, 자식이 부모의 몸에 칼을 들이대기도 한다. 말 그대로 가정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지금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가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인간의 개인적이나 사회적 삶에서 가정은 대단히 중요하기에 나름대로 가정을 지켜보자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시기에 “가족치료와 목회사역”이라는 책을 접하면서 개괄적이면서 체계적으로 가족문제에 직면한 목회자의 태도, 상담의 방법등을 학습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보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막연하게 고통당하고 상처입은 영혼들에게 성경 말씀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몇몇의 가족치료 이론가의 적절한 면담과 개입의 요령 그리고 가족의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서 무조건적으로 내담자의 상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는 것 보다는 상담자가 상담자답게 상담을 하려면 우선 상담목표를 세워야하고 내담자와 몇 번의 상담을 할 것이며, 어떻게 상담을 이끌어 감으로 인해 내담자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고 나의 눈에 비친 내담자의 모습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것을 알게 됨으로 앞으로 목회에 있어서 더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그럼 가족이란 무엇인가 ? 가족이란 말은 더 이상 예전처변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이유에서 최근 목회자들은 가족분열에 대한 많은 질문을 받게 되는데 청소년들의 성 문제 뿐만 아니라 성차별도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에 새로운 도전을 주고 있기에 기독교인 가족들의 교육을 위해서 단순히 경건한 신앙 이상의 견고한 무엇인가가 요구되는 만큼, 가족치료는 가족을 하나의 전체단위로 보는 견해로부터 시작해서 가족들의 구성원들을 어떻게 상호조화 시키는가에 따른 문제에 귀결되고 있다.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내놓은 가족들의 유익을 위한 정책을 우리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정책 6가지로는 가족들의 다양성, 가족에 대한 제도들의 영향, 가족들의 특별한 요구들, 가족을 위한 격려와 지원, 변화된 사회의 현실, 차별의 영향 등의 프로그램은 현재 목회를 해 나아가는 목회자들이 또한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방식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리라 본다.왜냐하면 우리나라도 이제는 핵가족의 분포도가 높아져 가고 청소년들과 노인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들을 안아가고 있으며, 유교적인 바탕위에 구성된 가족의 형태와 사고를 어떻게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바꿔야 하며 그들을 말씀으로 치유할 수 있는지를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가족에 대한 문제를 예전에 비해 많이 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는 그만큼 목회 외의 다른 분야가 부담으로 전가 되어졌다고 할 수 있고 또한 문제의 그들을 상담하고 치료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그들과 나누어야 할 것인지를 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교회는 모든 연령의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 그리고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교회의 선교와 목회의 영역이 될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전 생애에 걸쳐 한사람과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또한 가족을 지금보다 더 서로 간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줄 수 있는 기관으로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는 하나의 가족이며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 한다. 왜냐하면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전제에 필요한 성경구절을 연결해 기독교 상담이라는 모습을 요사이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이들은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지만 그 한계를 드러내고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얼핏보면 기독교 상담처럼 보이지만 그 출발점이 인본주의로 시작하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구절로 도금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 상담이 될 수 없다.현대가족의 기능은 생존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친근함의 보루”라고 Gibson winter이 말했던 것과 같이 정서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곳이다.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삶에서 가족은 대단히 중요하다. 본래 가족은 휴식과 종족보존의 장소 일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적 ‘삶의 태도를 배워나가고 인간다운 삶의 양식을 습득해 나가는 자리다. 그러나 그런 가정이 더 이상 더불어사는 삶의 미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황폐한인간을 만들어내는 자리가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가족단위의 이기주의에서 과감히 벗어나 가정의 문을 열고 고통받는 이들, 도움을 필요한 이들을 섬겨야 한다.또한 현대교회는 다른 세대의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권속이 되기 때문에 실질적인 의미의 확대가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가족생활에 있어서 그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학이라는 전제하에 그들의 소명을 새롭게 인식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가족은 교회에 대한 은유인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조속히 우리시대의 신학적인 교리를 새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을 성경으로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치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치료란 ? 우리는 목회에 있어서 생각할 때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이나 “목회상담”과 같은 전통적인 용어에 익숙하다. 그러나 점차로 “치료”라는 용어가 목회자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그 단어는 “봉사(service)"를 의미하는 헬라어 therapia에서 파생되었는데 역시 ”봉사하다무의식적이고 심리내적인 과정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확신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가족치료는 가족을 하나의 전체 단위로 취급하여 가족 성원들이 상호작용하는 체계를 고려하는 치료법이다. 즉 하나의 상관체계로서 가족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점은 가족을 전체로 취급하는데도 불구하고 가족이나 성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전체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능과 혈육에 근거한 가정, 가족이기주의에 근거한 가정은 이제 지탱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요구되는데 이것은 하나님나라 사업에 가정이 동참함으로서 가능한 것으로 본다.적용으로서 목회신학과 가족치료현대의 목회는 성경적인 근거에 의해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과 더불어 찾아오는 교인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특히 요즘과 같이 어려운 시기 일수록, 다음세대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그들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말씀을 선포할 때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해 나갈수록 있도록 설교를 함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듣는 청중의 입장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따라서 목회신학은 특별히 가족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가족치료라는 성가신 문제를 떠 안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시달리고 치인 그들이 교회에서나마 평안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가족에 관한 연구가 새로운 지적 성장 산업이 될 수 있다는 정도로 가족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가족의 문제를 다루는 기관들이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한 가운데 목회자는 신학적인 책임을 어떻게 유지하면서 목회적 치료사의 역할을 할 것이지를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신학교에서 경험한 조그마한 지식으로 현대인의 문제를 다 해결 할 수는 없다. 목회자는 교육자, 설교자, 전도자, 행정가, 상담가라는 많은 역할을 교회에서 안고 있다. 모두가 중요한 것들이지만 나름대로 부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선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가족의 개념이 흐려진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나름대로 가족에내적으로 외적으로 끊임없는 상처와 아픔을 그리고 좌절을 거치면서 자기가 감당을 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 우리나라 경상남도 ‘마산’이라는 곳에 들꽃 온누리 학교가 있다. 그곳에는 인생의 낙제생이라 말할 수 있는 문제아들이 제대로 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교육하는 곳인데 그곳에 한 선생님이 “저 어린 영혼들이 문제아가 되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겠느냐”는 말을 하는 것을 예전에 TV에서 본적이 있다.나는 그 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서 오는 그런 아픔과 갈등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할 때 오는 성격의 포악함은 단지 어린 영혼들에게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 성인들에게도 문제시 되고 있음이다. 이런 모습의 교인들이 우리 곁(목회자)에 있다.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는 상한영혼을 고치러 왔다. 잘난 사람들을 위해서 온게 아니라 상하고 깨진 심령을 위해서 그들을 감싸주고 치유해 주시려고 오셨다”고 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신학은 불가피 한 것이다. 목회자는 말할 것도 없이 누구든지 신학적 노선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은 삶의 본질과 운명에 관한 질문을 하기 때문인데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든 아니면 내담자를 통해 대화를 주고 받다보면 신학적인 질문들이 던져지게 되고 그것이 신앙과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한 예를 더 들어본다면 영화중에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 속에 주인공은 수학을 무척 잘하는 한 젊은이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친구의 폭이 제한되어져 있었고 그래서 천재성을 들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닫아버림으로 사람들을 기피하는 대인공포증 환자로 변해져 있었다. 얼마 후 그것을 알아낸 수학교수는 친구인 상담학 교수에게 그 젊은이 맡기게 되고 빨리 치유해 수학자로서 써먹으려는 유물론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상담학 교수는 그 젊은이 자신이 갖은 불신을 깨고 자기를었다.
인간과 죄 - 네 가지 질문1. 인간과 죄의 연구에 대한 문제제기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음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절망감을 떨칠 수가 없음을 잘 안다. 그래서 나름대로 즉시 변화 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때로 나름대로 소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성직으로의 부르심에 응하기도 한다. 또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앙문제에 매달려 해마다 고심하지만 좀처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도적이 오는 것은 단지 빼앗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것이라고 또한 말씀하신다(요10:10).이와 같이 우리는 매순간 마다 풍성한 삶을 깨닫게 되고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음으로 이러한 말씀을 확실히 믿고 또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삶이 죄 없는 상태에서 영위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 유행하는 인간과 그 본성에 대한 견해가 지난 1백년동안 기독교국가들 사이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던 성경과 기독교의 인간관으로부터 급속히 이탈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죄를 인간답다는 말로 변호하고 범죄가 어떤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죄는 대체로 수치스러운 것으로 인정되며 사람들은 공격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죄를 변호하려고 하지만, 죄에대한 기본적인 자세는 전혀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비교해 보면 우리 주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죄에 대해 단호하다는 것이다.따라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죄가운데서 탈출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간은 무엇이며, 죄는 어떤 것인지를 알고, 예수님 앞에 나와 영생을 묻는 한 젊은이를 택하여 그 젊은이에게 그리고 우리의 처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심을가량 있고, 또 사람의 몸에서 철분이 얼마나 있고, 염분이 얼마나 있고 석회질이 얼마나 있고 이렇게 계산을 해보니까 2달러가 조금 못되더라는 것이다. 즉 사람을 물질로 따지면 2달러짜리도 체 안 된다는 것이다.또 사람을 유물사관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을 완전히 하나의 도구로 보는 것인데 필요하면 사람을 키우기도 하고 먹이기도 하고 훈련하기도 하지만 필요 없을때는 아낌없이 인간을 폐기해버린다. 즉 하나님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흔히 유행하는 말이 있다 ‘인간상실’ 이라는 말을 하는 데 사람이 사람됨을 상실했다는 것이다.신약성경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샤 지방에 어떤 귀신들린 사람 하나를 소개하는데 거기 그사람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 사람이 무덤과 무덤사이에 산다 라는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죽음과 죽음사이에서 산다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우리는 언제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즉 죽음과 죽음사이에서 산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사람이 얼마나 강포한지 어떤 쇠사슬로도 매일수가 없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것 또한 어찌 보면 현대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그런 말씀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 법이라는 것으로도 사람을 메 놓을 수가 없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으로도 메여 놓을 수 가 없다. 심지어 죄를 지으면 물리적인 힘으로 생명을 빼앗는다고 해도 그래도 사람들은 죽음이 무섭다고 죄를 안 짖는 게 아니다. 죄인들은 죽음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죄를 짖고 있다. 이게 현대인의 모습이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또 하나의 모습은 자기 몸을 상하고 있더라는 것인데 자기 몸을 스스로 상처를 낸다. 즉 현대인들은 어떠한가 ? 마약이라는 것으로, 술이라는 것으로, 담배라는 것으로 상처를 내기도 하고 음란해서 에이즈라는 병으로 상처를 내는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그 다음 이 사람은 의미 없는 소리를 높인다고 했는데 현대는 소음의 세계이다 좋은말, 덕이 있는 말 유익한 말을 하면 거기에 사람아니라 초 역사에 속 한다”고 하였다.그러나 성경은 죄의 기원을 인간의 타락에서 찾는다. 성경의 교훈에 의하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도덕악의 뿌리는 인류의 시조 아담의 최초의 죄 속에 놓여 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죄인이 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바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인간의 마음이 타락함으로 이 죄악은 우리를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 되도록 하였고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게 되었다. 따라서 죄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이다.1)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1) 죄는 악한일을 하는 것이다(단9:5).(2) 죄는 사악하게 행동하는 것이다(단9:5) 즉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시51:4).(3) 죄는 하나님의 명령과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단9:5) 이것을 성경은 “죄과”라고 부른다(시51:1)(4)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롬3:23).2) 죄는 인간의 마음이 타락한 결과이다.(1) 마음으로부터 생명의 샘이 흘러 나온다(잠4:23). 즉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인간의 인간됨을 드러내는 것이다(잠23:7).(2) 죄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마5:28)(3) 인간의 삶속에서의 모든 악한것들은 그 속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막7:21,22,23)(4) 인간의 마음속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그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을 믿을수 없으며 완전히 사악하다고 선언하신다(렘17:9-10).3) 죄는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가 멀어지게된 원인이다.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도록한다(창3:8, 요일1:6) 왜냐하면 이 죄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기때문이다(시51:11).4) 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다.위에서 죄에 대한 모습들을 보았다. 죄는 유혹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유혹을 명확히 구분 하셨다. 죄를 짖게 하는 유혹은 결코 죄가 아니지만 흔히들 죄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혼동 속에 있을때에는 사탄의 장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외에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 본문의 성경 상 위치와 문맥의 목적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본문 앞에는 어린아이와 천국과의 연관성이 기록되어 있고, 뒤에는 예수의 세번째 수난예고가 수록되었다. 따라서 재물이 천국의 거침돌이 된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15절)과 대조를 이루며 모든것을 버리고 주를 쫒으라는 요구는(21절) 당신의 수난예고(33,34절) 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특히 본문에는 하나님의 전적은혜 및 인간의 전적 무능이라고 하는 구원 교리의 본질이 명확히 제시되어 있어 깊은 주의를 끈다. 여기 등장하는 부자청년은 어느누구에 못지 않을 정도로 윤리적으로 율법적으로 온전한 생활을 추구해 왔던 자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치명적인 결함은 바로 ‘율법으로 의로와보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는 율법의 지향하는 바는 완전한 사랑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알지 못했으며 단지 예수를 특출한 랍비 정도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한편으로 청년의 의를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한계를 명백히 지적하셨다.3) 의미어떤 사람하나가 예수님 앞에 찾아온다. 이사람에게는 네가지 장점이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지고자 하는 모든 장점이었다. 첫째는 젊었다, 두번째는 어즉 인간이 누구인가 스스로를 알라는 것이다. 요즘은 더우기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크리스챤 가운데도 크리스챤임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요 어머니임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크리스챤으로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위치를 이탈한다고 한다면 삶의 의미가 어디있겠는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하는 것에 삶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내가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러나 형상을 한번 상실한 다음에 인간을 잃어버리고 사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가 다시 인간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었다고 요한복음1:12에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부터 나의 나됨을 확인해야 한다. 내가 나의 위치를 이탈해서는 안된다. 내가 나를 스스로 확증하고 내 위치를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이다.(2) 영생을 묻는다는 것은 종교적인 물음이다.‘영생’ 이생명은 예수의 인격과 그의 말씀을 통하여 중개된다. 그의 말씀은 곧 생명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그에게 계명을 주신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은 영생이기 때문이다.(3)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지금 선한 선생님 당신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구원은 믿음으로 얻는것이지 행위로 얻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락 할것이면 이 세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이면 구원받은 내가 할 일이 있다. 복음을 위하여 할 일이 있다. 교회를 위해 할 일이 있다. 내 가정을 위하여 할 일이 있고,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할일이 있는 것이다.그림 그리는 사람들에 의하면 제일 좋은 피사체, 제일 좋은 모델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몸을 그릴때 그리기가 어려운 곳이 있는데 그곳은 무릎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누구나가 상처가 있다고 한다. 상처나지 않은 무릎은 없다라는 것인데 사람이 앞으로 걸어나가기 위해 상처가 난다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은 상처가 없겠지만 이제 예수믿고 무엇인가를 해야
프란시스A.쉐퍼의 기독교 영성관에 나타난“참된 영성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발제 부분 : 프란시스 A. 쉐퍼, 박문제 역 기독교 영성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 217-4081. 들어가는 말최근에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는 분위기 중의 하나는 영성운동이니 영성목회이니 하는 영성과 관련된 말과 운동이라고 보여진다.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역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동기야 어떻든 한국교회 내에 알고 있는 영성운동은 매우 고무적인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다면 말도 많고 열심있는 모임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영성 즉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에 대한 개념정리 마저도 일치 되지 않고 올바르지도 못하며 전체를 말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따라서 프란시스A. 쉐퍼의 기독교 영성관이라는 이 책 중에 포함되어있는 ‘참된 영성’을 요약하면서 영성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금 재확인 하고 기독교영성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서 문 :프란시스A. 쉐퍼가 기독교인 된 이유는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기독교는 참되다고 말한 만한 극히 충분한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 된 후 받은 모든 가르침이 우리의 현재적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의 의미에 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을 그가 알게 되면서 확신, 삶에 대한 긍정, 감사, 찬양의 시가 마음속에서 노래로 표현 되었다는 것이 하나의 출발점이 된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불가지론자에서 그리스도인이었다.제1부 :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현재적 자유제1장 : 율법과 사랑의 법우리앞에 놓여 있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 참된 영성이란 참으로 무엇이며 20세기 상황에서 그런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기전에는 참된 영성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어떠한 사람이라도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예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 질투하지 않을 만큼 사람을 사랑하므로써 인간의 타락과 함께 모든것이 비정상적인 것에서 감사함으로 그리고 모든 것이 합력하게 됨으로 우리의 모든 것, 즉 나를 사용하실 권리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제2장 : 죽음의 중심성그리스도인의 삶의 부정의 측면에 대한 성경 구절갈라디아서 2:20 --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위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때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정의 측면을 날카롭게 제시하는데 하나의 추상물이 아닌 실제 생활 속으로 성경이 파고 들어 온다는 것을 알 수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기꺼이 말해야 하며, 물질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기꺼이 말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포되어있는 이런 부정적인 측면들이 낭만적으로 해석 되지 않는다면 결코 인간은 속 편히 들을 수있는 말씀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이후 그래왔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시작할때 정직하게 자기와 관련된 모든것에 대한 생각이 이러한 부정적인것에 철통 같은 장벽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우리는 매일 죽어야 한다는 요구가 강력하게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육신 적인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구속을 위한 죄에 대한 죽음을 말하며, 그에 반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얼마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두말 할 나위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산 위에서 오로지 장차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나 변화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가 아니다 이러한 위대한 진리는 현재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우리는 ‘마치 우리가 지금 죽은 것처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또한 모든 것에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선과 악은 절대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죽어야한다거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힘과 도움을 주실것을 바라보며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일차적인’ 소명은 매순간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무엇인가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을 토대로 믿음으로 선택에 의해 영화롭게 된 피조물이 되도록 부르심을 입은 만큼매 순간 마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살아 있음으로 믿음으로 이 세상안에 발을 디뎌놓을때 이루어 진다.제4장 : 성령의 능력으로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인의 두가지 상태만을 제시한다. 육체를 지닌 채 이 세상에 있든지 죽어서 주와 함께 있든지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꼭 같다.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에 연속된 시간으로 부터 단절되거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죽은후에 연속된 시간과 단절되거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하나님께서는 현실의 두요소를 함께 묶어놓으셨다. 우리가 죽을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것이라는 요소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면 현재에 우리속에는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동일하게 확실한 요소, 하나님께서 이 두 요소를 함께 묶어놓으신 것은 흥미롭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요소를 각각 따로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내가 죽을때 내가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둘은 다 현실이다. 이 둘은 다 똑같이 약속된 현재의 두 흐름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신비주의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비주의는 단지 내용이 없는 체험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공간상의 현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산 위에서 초자연적인 우주에 직면하게 되었고 모세와 엘리야는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와 얘기를 나누었음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초자연적인 우주가 저 멀리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 통상적인 삶과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았다.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경전체의 가르침의 통일성으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되며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성경의 강조의 통일성으로부터 추상화되어서도 안된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지금 초자연적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프란시스A.쉐퍼는 “기독교야말로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철학 중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것 보다는 성경은 사람에 관해, 인간 개개인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 우주의 초자연적 성질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의 통일성에 비추어 방법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중보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및 삼위일체 모두와의 순간순간의 점진적이고 체험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제6장 : 구원 :과거- 미래- 현재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올바른 교리, 참된 교리, 성경의 교리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교리를 말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초자연적인 삶을 지금 살아나가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20세기 후반 세대를 향한 실물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그 예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해야 하는데 이것은도덕적인 실물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적인 원칙들의 실물증거로 그쳐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실물증거여야 한다.구원은 단번에 의롭다고 선포된 후에는 죽을 때까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것을 구원이라고 하시지 않는다. 구원은 하나의 통일체, 칭의에서 시작하여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는 연속적인 흐름이다.구원은 온전한 하나의 덩어리이다. 모도 영위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흘러 나오지 못하는 단 한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도구인 믿음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죄는 믿음으로 자신의 소유들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칭의를 받을때에 우리의 죄책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어야 한다. 그 결과 성령은 소멸되지 않고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믿음을 위한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사역에 의거한다.제2부 : 죄의 속박의 결과로부터의 현재적 자유제8장 : 양심으로부터의 자유웨스트민스트 요리문답에서는 우리는 생각과 행동으로 날마다 범죄한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한 것 이라면, 나의 현재의 삶속에서 내 안에서와 나를 통해서 얻어진 승리들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받아야 할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려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범죄하였음에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고로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나의 삶속에 의를 가져오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갈라디아주석에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양심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포함하고 있는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보다 더 유순해져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나의 양심이 성령 아래에서 내게 어떤 특정한 죄를 인식시켜 줄때 나는 즉시 그 죄를 죄로 인정하고 의식적으로 그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가져오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게가 회복되어지고 나의 양심은 안식에 이르게 된다.제9장 : 사고 세계에서의 자유사고 세계에 있어서 우리자신 으로부터의 분리와 관련된 참된 영성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말할이다.
성경적 입장에서 바라본 이슬람에 대하여 논하라Ⅰ. 서 론오늘날 우리 세계에서 기독교가 대면하고 있는 진정한 적그리스도의 세계, 그 첫째가 이슬람 세계이다. 이슬람교는 방대한 지역, 방대한 인구, 무제한적인 자원을 가진 엄청난 세계이다. 그들은 기독교를 정면으로 대결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파멸시키고 이슬람교가 머지 않아 세계 모든 국가를 장악할 것을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 서구인 모두는 현대의 이슬람교 정체와 성격 그리고 목표 더 나아가 그들의 생활방식을 너무도 모르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놀랄 만큼 순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슬람을 비롯해 타문화권에 대한 선교는 여러 방법론을 가지고 실행되어 왔다. 그러나 선교의 과제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파간 선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차이로 인한 문제점이 심각하게 노출되고 있음이 현재의 실정인 것 같다. 또한 교파나 교회적 구조가 아니라 친교적 종파적 구조를 가진 선교회는 교파적 교회가 제도화를 통하여 교회 본래의 특성을 상실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즉 선교의 신학적 이해의 차이로 인한 분열과 제도화된 교회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선교 활동에 종사하는 선교회와의 마찰은 한국교회가 극복해야할 과제로써 등장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분열은 결국 교회의 힘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하여 효과적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본 논문은 이러한 선교에 대한 방법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난관에 대처하는 실제적인 방법은 아마도 성경적 입장에서 어떻게 타문화권을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주어진 논문의 제목이 그러하듯 ‘성경적 입장에서 바라본 이슬람’은 기독교의 복음이 교리나 도덕적 행위를 위한 율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에게 근거한다는 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따라서 우리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고 성경적 입장에서 그들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여 기독교 신앙 620년 메카에서 200마일 정도 북쪽에 위치한 야쓰립(Yathrib:메디나)에서 그를 부족간의 중재인으로 초청해 오자 622년 7월 무함마드는 개종자 200명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함으로써 무함마드의 운명과 앞으로 전개될 이슬람 종교운동의 새장을 열었다. ‘히즈라’의 중요성은 이슬람 달력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히즈라는 ‘이슬람 원년’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출생년인 570년이나 첫 계시의 해인 610년을 이슬람 원년으로 삼지 않고 이슬람의 공동체인 움마가 형성된 622년 원년으로 삼아 알라의 의지는 무함마드 개인이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전체를 통해 실현되었다고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특별히 “로마 캐톨릭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교회의 본질의 성질에 관해서 그 의견의 차이”를 현저히 보이고 있다. 전자는 교회의 본질을 외부 또는 유형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찾는다. 사실 이 조직체를 엄밀히 살펴보면, 그것은 그들의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전 단체가 아니라, 주교, 대주교, 교황의 최고 고문들, 또는 교황 등의 보다 높은 교권자들의 단체임을 알게 된다. 이슬람 또한 카톨릭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교훈하는 교회’로서의 이 단체와 ‘교훈을 받는’ 혹은 ‘설교를 듣는 교회’로서의 신자들의 공동체를 구별지어 놓았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교회에 관한 외부적인 개념에 반항하고, 성도들의 내면적 또는 영적 교통에서부터 교회의 본질을 찾았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생각하지, 조직이나 지위에 두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의 초점이며 중심 자리 인 것이다.2. 이슬람의 실상.2.1. 이슬람의 기본신앙코란(영어:Korean, 아랍어:Quran)은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는 신성한 책으로 간주된다. 무함마드가 히라(Hira) 산 위에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받은 계시에서 시작된 코란은 그가 일생을 통하여 받은 알라의 말씀들이제로 대부분의 회교도는 아랍어를 일상용어로 사용하지 않는 국가에서 살고 있다. 아랍어를 일상에 사용하는 인구는 약 1억 8천만정도이지만 회교도는 12-16억에 달하고 있다. 특히 아랍어에 대해서도 이들이 존중하는 것은 문어체 아랍어이지 구어체 아랍어는 아니다. 그러나 문어체 아랍어에 능통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카이로의 문맹율이 50%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는 문어체 아랍어의 난이함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회교권에 들어갈 때 결코 간과해서 안되는 것이 아랍어 습득이다. 심지어 아랍어가 일상용어가 아닌 회교권이라고 할지라도 아랍어에 능통하는 것이 접근의 첫 단계이다. 이는 최초의 회교권 선교사인 ‘레이몬드 룰’이 발견한 회교권 선교의 세 원칙 중 중요한 원칙으로서 거의 7-80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 없는 사실이다. 구어체에 먼저 능통해져야 하지만 가능하다면 코란의 언어인 문어체까지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복음을 능숙한 아랍어로 제시할 수 있다면 회교도들의 마음속에 뚫고 들어가는 것이 좀더 용이해 진다. 언어는 문화이다. 마태오 리치나 로베로트 데 노빌 리가 인도와 중국에 깊이 침투 가능 했던 것이 그들의 문화, 특이 언어에 중심 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2.4.4.2. 코란아람어로 쓰여진 코란은 114수라(장,Chapter)로 나뉘어져 있다. 이 수라들은 6536또는 6600절로 나뉘어져 있고, 세는 방법에 따라 그 수는 달라진다. 즉 절과 수라들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절들을 단 한 단어만 포함하는 생략절로 그치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여러 개의 문장들을 연결할 수도 있다. 수라의 길이는 이보다 더 분명하게 달라질 수 있다. 286절에 이르는 가장 긴 것(2장)이 있는가 하면 3절로 이루어진 가장 짧은 것이 세 개(103,108,110장)있다. 철자의 수로 보면 그 차이는 가장 긴 25500(2장)부터 가장 짧은 42(108장) 까지 벌어진다. 무실림에게 코란은 ‘신의 책’(Kitab al Allab)이다. 코란은 인간이 제작한 가 되었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의하여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2.6.1. 이슬람교의 주요행사들이슬람교도(무슬림) 사이에서는 서기622년을 원년으로 하는 히쥬라력이 쓰여왔다. 히쥬라력에서는 1년이 354일로 서양력보다 1년이 112일 짧다. 그래서 33년 뒤에는 1년의 차이가 생긴다. 이슬람교도들의 종교적 행사는 이 히쥬라력에 따라 치루어 진다2.6.1.1. 히쥬라의 날 - 무하람의 달(1월)1일, 무함마드의 메디나 이주를 기념하는 날이며 메디나에서 무함마드가 만든 이슬람의 공동체 ‘움마’의 건설의 축하한다.2.6.1.2. 아슈라 - 무하람의 달(1월)10일. 노아가 방주를 띄운 것, 모세가 파라오의 압재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것 그리고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아들 후사인이 680년 이라크의 카르바라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에 의해 학살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祭日(제일)이다.2.6.1.3. 마우리드 느 나비 - 라비우르 아우와르의 달(3월) 12일. 무함마드는 570년 이 날 메카에서 태어났다고 되어있다. 모스크에 모인 사람들은 무함마드를 기리며 조용히 신 알라에게 감사 드려 이 날을 축하한다. 현세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오직 신에 가까이 가고자 수행에 몰입하는 수피 신도에게 특히 중요한 祭日(제일)이다.2.6.1.4. 라이라트 르 이스라와 르 미아라쥬 - 예언자 승천의 밤. 라쟈브의 달(7월)27일. 무함마드가 예언자가 되고 나서 10년째인 밤. 그는 예루살렘의 바위 모스크에 도착해 하늘나라 여행을 했다. 이때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를 명령받고 지상에 돌아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날 무함마드의 생애에 대해 듣는다.2.6.1.5. 라이라트 르 카드르 - 거룩한 밤. 610년 의 이 날, 40세의 무함마드가 처음 신의 계시를 받았다. 라마단의 달(9월) 마지막 10일간의 홀수일로 보통 27일로 잡는다. 사람들은확신과 평안 없이 알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3.4. 이슬람의 구원관코란에서 구원이라는 의미로 쓰여진 단어는 낙원(Surah), 안전한 장소 등이 있다.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현세에서 선한 일을 행한 사람, 믿는 사람, 알라를 두려워하는 사람, 알라를 공경하는 자, 알라의 마음에 드는 자로써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알라의 법을 순종할 때 알라의 뜻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3.5. 이슬람의 종말관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세상이 끝나게 될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은 부활하게 될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이 선고될 것이다. 코란은 개인적인 심판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몇몇 구절들에는「그들 자신들의 경전」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별개의 공동체들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이것과 일치하여 코란은 또한 몇몇 구절들에서「공동체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각 공동체는 한정된 기간이 있다는 것이다. 엄격한 코란의 교리에 따르면 신 자신이 자비로서 죄인들을 용서할 수는 있으나 어떤 중재도 있을 수 없다. 저주받은 자들은 지옥불에 타게 될 것이며 구원받은 자들은 낙원의 기쁨에 거하게 될 것이다. 지옥과 천국은 영적이며 동시에 물질적이다. 물리적인 불에 고통을 당하는 것 이외에도 저주받은 자들은 또한 “그들의 마음에” 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이와 마찬가지로 축복받은 자들은 육체적인 즐거움 이외에 신성한 즐거움의 가장 큰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4. 역사적-신학적 공통점이슬람은 기독교와 가장 많은 믿음을 공유한 종교이다. 두 종교가 공유하는 역사적 뿌리는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자그마한 무리를 이끌고 중동 지방을 떠돌던 아브라함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의 부인 사라는 궁여지책으로 몸종 하갈로 하여금 남편의 씨를 받게 했다. 아브라함은 86세에 이집트 여인 하갈의 몸에서 아들을 얻게 되었고,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4년 후, 100세가 되던 해에 아브라함은 사라로 부터 아들 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