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Ⅰ. 序의화단운동이 발발한 당시 중국의 상황을 사료와 관련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Ⅱ. 義和團(의화단) 운동의 발발 배경1. 상층 계급과 관리들의 무능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침탈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청조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정부 주도가 아닌 민에 의한 반제국주의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청조는 이러한 반제국주의 운동을 후원하면서 간접적으로 참여했다.2. 단일 종족 및 종교엄밀하게 청조가 단일 민족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인구구성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한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청조의 지배층은 만족이었지만, 한족의 문화가 민간 사회의 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한족은 중국전통의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제국주의 국가들과 함께 유입되던 기독교 사상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독교 세력이 영사재판권을 빌미로 치외법권을 주장하는 등 특권을 누리자 반발이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배경으로 의화단 운동은 반기독교적 성향을 띄게 된다.3.산동, 직예 지역에서의 활발한 운동 가담산동지역은 예부터 공자, 맹자의 출생지로서 유교적 성향이 짙은 보수적 지역이었기 때문에 반외세적, 반기독교적 성향이 강했다. 이러한 산동성 지역에 독일이 주둔하게 되면서 기독교와 유교사상의의 대치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하북성의 천진에서는 천진교안과 같은 유교와 기독교 사상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양에 대한 반감이 증폭된다. 게다가 이 지역은 황허의 범람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정문제로 치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철도부설 등으로 교통 노동자들의 불만이 증폭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가뭄까지 겹쳐 부청멸양의 의화단 운동이 촉발되었다.
4.Ⅰ. 序아편전쟁 이후 청조의 권위가 실추되고 지방 행정의 부패상이 심각해지자, 洪秀全(홍수전)은 拜上帝會(배상제회) 교리를 내세워 太平天國(태평천국) 운동을 일으킨다. 태평천국 운동이 전형적인 농민반란과는 여러 면에서 차별성을 보였음에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데, 그 원인을 태평천국 내부, 그리고 당시의 중국 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다.Ⅱ. 태평천국 운동의 특징1. 上濟(상제) 중심의 집단지도체제홍수전을 비롯한 七兄第(칠형제) 지도자 집단은 출신이 다양했기에 불평등한 봉건적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어 후에 각 제왕이 스스로 부를 열고 궁전을 설치하였다.2.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태평천국은 남녀를 철저히 분리하고 술·담배·아편을 금지하였으며, 여성을 전투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전족을 금지했는데, 이는 여성의 전투력 향상을 위한 것이었으나 오늘날 여권신장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일부일처제를 내세워 축첩, 창기 등을 일체 금지하였다.3. 反淸(반청) 혁명선전태평천국에서는 만청의 지배를 타도하고 한족 전체의 통일전선을 구축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서구 열강에 대해서는 洋兄第(양형제)로 인식하여 대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서구 문물의 도입과 외국인의 자유로운 출입과 통상을 허용했다. 선교사의 활동도 인정하려 하는 등 서구 문명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이는 기존의 농민반란과 특히 구별되는 점이다. 기존의 농민반란은 왕조에 반발하는 동시에 서구 열강을 침략자로 인식하여 배척하였다. 서구적 근대화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평천국 운동은 서구 열강에 대한 시각을 달리함으로써 개량적 근대화를 추구한다.4. 평균주의적 사회사상태평천국은 남녀평등과 더불어 토지의 균등분배를 주장했다. 이에 따라 천조전무 제도를 시행하여 사유제를 부정하고 국가의 통제하에 토지를 평균 분배하게 된다. 대신, 세금에 대한 저항행위인 항조·항량은 불법으로 규정했다.Ⅲ. 실패 원인1. 대내적태평천국의 이념은 유교의 근간인 가족제도 및 사유제와 상충되었다. 남녀를 평등하게 보거나 일부일처제를 주장한 것은 유교사상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孔子像(공자상)을 우상이라 하여 파괴하고 부녀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한 점, 그리고 사유제를 부정하여 전 재산을 헌납하게 한 점 등은 유교사상에 명백히 배치되었다.결국 이는 紳士層(신사층)의 반감을 일으켜, 신사층은 태평천국을 名敎(명교)에 대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성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2. 대외적서구 열강은 배상제교가 기독교와 유사하다고 여겨 처음에는 기대와 관심을 보였으나, 2차 중영전쟁 이후로는 태평천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배상제교는 성모마리아와 예수상도 우상으로 간주하여 반대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은 주된 수입원인 아편을 태평천국에서 금지하자, 더욱 비난했다.
법은 진화하지 않는다. 다만 구체화되었을 뿐이다.진화란, 사물이 보다 좋고 보다 고도의 것으로 발전하는 일을 의미하며, 단순하고 낮은 단계에서 복잡하고 높은 단계로의 변화에만 쓰이는 말이다. 그렇다면 법은 진화하는가?이를 논의하기 위한 대전제로 우선 법이 무엇인가를 정의하자면 법은 인간 공동체를 규율하기 위한 약속이다. 아무런 제재 없이 인간이 그의 본성대로 살게 한다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짐승 사회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법은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는데, 예를 들어 재물을 훔치지 말라는 법은 인간의 이기심을 제어하기 위한 법이고 간통을 금하는 법은 성욕을 제어하기 위한 법이다. 때문에 법에는 인간의 본성이 발현되어 있고, 이것이 법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 한, 즉 인류가 인류로 존재하는 한 법의 본질도 변하지 않는다.이러한 전제 하에 법이 인류의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변화한 과정을 총체적·체계적으로 보면, 법은 진화하지 않는다. 법은 한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법은 고유의 틀과 속성은 대체로 유지해 가면서 다른 법과의 교류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고 변형된다. 한 예로,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은 이전의 관습법을 종합했으며 후대 로마법의 근원이 되었고, 중세와 근대 유럽의 법학에 큰 공헌을 하였다.즉 법은 진화하지 않고, 다만 구체화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고대 함무라비 법전은 상대방에게 신체적 상해를 가했을 경우 똑같은 방법으로 갚거나 혈육으로 배상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상해행위를 금지한다.) 이러한 상해행위 금지규정은 후에 과실치상, 폭행치상, 존속상해, 중상해조항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또한 로마의 12표법에는 ‘연이자율은 8.33%를 넘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현대에도 이자제한법이 존재하여 고리대금에 의한 착취를 방지하고 있다. 인구가 적고 사회가 단순했던 고대에는 법도 단순했지만, 사회가 복잡하게 변모함에 따라 법이 규율하는 사항도 구체적으로 변했다. 고대의 법으로 현대의 복잡한 사회를 전부 규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어떤 법이 다른 법의 다음 단계가 된다거나 더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여러 가지 다양한 법이 존재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단지 기술과 사회가 발전하였고 법은 그에 맞춰 따라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1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무역이 발달하면서 상법과 해상법이 출현하였고,) 생명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부가가치세 부과를 위한 제도 마련이 검토되고 있다.)지적 재산권법,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등과 같은 현대의 새로운 법들도 법의 질적인 발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이들은 이 시대에 맞는 법일 뿐, 만약 고대 사회에 이러한 법들이 존재하였다고 하여도 우리는 고대 사회의 법을 진화한 법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그리고 한 사회의 법은 그 사회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이해해야 한다. 즉 각각의 법이 발달해 온 배경을 이해하고 나름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고대 인도는 종교사회였기 때문에 고대 인도법과 종교는 필연적인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국교인 브라만교의 교리는 국가법률의 주요 내용이 되었다. 반면 주나라는 예를 중시하여 예가 주나라의 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그러나 인간의 생명, 존엄성과 같은 보편적인 윤리 기준에 어긋나는 악법은 문화의 차이에 관계없이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이 기준인 이유는, 최소한 이것이 존중되어야 인간 사회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윤리 기준에 어긋난 예로 마녀재판을 들 수 있다. 당시의 법규에는 무죄 추정이나 상황 증거 같은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피고인에게 선고를 내리는 데는 자백만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고문이 성행하였는데,) 유죄의 근거로 든 ‘악마와 계약을 맺은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불법적인 악마연회에 참석한 죄’, ‘우박을 불러온 죄’ 등은 그 기준이 지극히 자의적이었다.)법은 인간의 나쁜 본성은 억제하고 좋은 본성은 발현하도록 하면서 사회 공동체를 유지시킨다. 성공한 법은 인간의 본성에 최적화되어 있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인간의 본성의 다양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인간 본성의 한 면만을 왜곡한 법은 실패한 법이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반영하지 못한 측면에 있었다. 또한 위에서 예로 든 마녀재판은 인간 본성의 한 면만을 강조하고 그것과 다른 것은 완전히 배척한 결과였다. 그 밖에 유태인과의 결혼을 금지시키고 유태인의 공직취임을 금지한 뉘른베르크법이나, 인격이 노예라는 상징으로서 의무적으로 내게 한 인두세 관련법 등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것이다.
2번Ⅰ. 序신해혁명 이후 군벌 시기 동안 원세개는 북경을 중심으로, 혁명파의 손문은 남경을 중심으로 각각의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이들이 북경과 남경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이것이 향후 중국현대사의 전개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Ⅱ. 사건의 전개1. 南京臨時政府(남경임시정부)와 袁世凱(원세개) 정권의 성립미국에서 귀국한 손문은 혁명파에 의해 남경임시정부의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고, 1912년 1월 1일 中華民國(중화민국)을 건국한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과 외교적 고립, 혁명파의 분화 등의 문제로 손문은 결국 사임을 조건으로 남경에 임시 정부를 설치한다. 그는 남경에서 새총통의 취임 및 임시 약법의 준수를 내세웠으나, 원세개는 남경으로 내려오기를 거부하고 北京政變(북경정변)을 일으켜 북경에서 새 총통에 취임하였다.2. 軍閥(군벌)시대원세개가 신건육군을 창설하고 이를 기초로 북양상비군을 확대하면서 본격적으로 군벌시대가 시작된다. 이후, 북경에서는 정권군벌들이 북경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여 군벌 통치를 전개하고, 손문에게서 비롯한 국민혁명군은 蔣介石(장개석)을 중심으로 북벌을 개시하여 남경 국민정부를 수립한다.Ⅲ. 근거지를 고수한 원인남경에 근거지를 두었던 손문은 위기 속의 중국을 구하고 서구와 같은 富强(부강)을 이루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서구 열강을 견제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서구 문물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중심지인 남경을 근거지로 택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일본의 대륙침략 기미를 눈치챘기 때문에 남경에서 일본의 동향을 살펴야 했다.그러나 원세개가 天津(톈진)에서 양성했던 신건육군을 기반으로 하여, 그의 세력들은 북경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원세개는 남경으로부터의 혁명파의 호출에 응하지 않고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에서 총통에 취임했던 것이다. 결국 원세개는 신군과 입헌파의 후원과 함께 영국의 지원을 받아 정치권력을 독점하게 된다.Ⅳ. 이후 중국현대사의 전개남경과 북경의 대립적 구도는 궁극적으로 소비에트구 확대의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군벌시대 이후 장개석이 독재하자, 南昌(남창)을 시작으로 여러 성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공산당원이 이끄는 각 부대는 각지의 성 경계에서 소비에트구를 수립하고 군율을 엄격히 하여 현지민들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근거지를 확보해 나갔다.
를 보고는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2년, 자바에 있는 일본군의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포로수용소의 소장인 요노이 대위와 그 부하 하라 상사, 연합군의 포로인 로렌스 중령과 포로들의 지휘관 힉크리스, 그리고 새로 수용소에 들어온 셀리어스 소령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배경의 정확한 연도는 영화 끝 무렵에나 나왔지만, 중간중간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를 통하여 당시 시대상황을 가늠할 수 있었다. 자바에 일본군의 포로수용소가 있다는 것은, 네덜란드령이었던 자바가 이미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음을 의미한다. 1941년 진주만 습격 후 일본은 미국령 괌섬과 필리핀을 차례로 점령하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폴로 진격했다. 영국군은 일본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지만, 결국 70일만인 1942년 2월 15일에 함락되고 만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홍콩의 영국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1941년 성탄절에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대영제국의 위신에 치명타를 가한다. 이후 일본은 싱가폴을 쇼난시로 개명하고 중국인들을 철저하게 소탕했다.)로렌스가 처형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그는 셀리어스에게 바로 이때 만났던 여자 이야기를 해준다. 일본군이 상륙하기 직전에 호텔에서 만난 그녀는, 공습이 시작되고 싱가폴이 함락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를 보고 ‘그저 담배 하나 사러 나갔다 온 기분’이었다는 로렌스의 말은 그 만큼 싱가폴이 순식간에 함락되었음을 암시한다.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싱가폴 점령은 인도네시아 획득의 전초전이었다. 일본은 미국이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한 뒤 화급했던 석유를 확보하고 그 외 고무를 비롯한 주요 자원을 얻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목표로 삼았다. 광범위한 인도네시아를 공격하기 위하여 일본은 보르네오에 제1차 공격대를 보내 석유 기지를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하여 암보니아 섬과 티모르 섬을 점령한 다음, 수마트라 최대의 석유 기지 팔렘방을 점령하고, 정치·군사의 중심지 자바를 공격한다. 자바는 석유와 광물의 세계적 보고이자 동남아시아에서 연합군 작전 통합본부의 소재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바에는 네덜란드병과 영국군, 현지민병, 호주병력, 미국군 등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결국 1942년 3월 9일, 일본군에 패배한다. 특히 반돈 요새는 자바 섬 최대의 군사 요새로 네덜란드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네덜란드인 포로는 아마도 이 과정에서 잡혔을 것이다.셀리어스 소령은 1942년 9월 자바에 낙하산으로 착륙해 침투하다가 붙잡힌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7월에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처음으로 패배한 뒤 과달카날 전투, 솔로몬 해전 등에서 계속 패하고 있던 시점이다.) 그래서 일본군이 무기전문가를 보낼 것을 요구하자, 힉크리스는 로렌스에게 일본군이 패전의 막바지에 달했다며 대충 아무나 뽑아 보내자고 한다. 그러나 로렌스는 일본이 러시아와 붙어서도 이긴 적이 있다며 두려움을 표출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서구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던 것이다.영화에서 일본군은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포로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으로 나온다. 요노이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셀리어스를 보호해 주고, 하라 상사 또한 군법 위반자에게는 할복을 지시할 정도로 잔인한 일본군의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포로들에게는 인간적인 배려를 할 줄 알고 최대한 극형을 막아보려 한다. 실제로 일본군은 자바 외에도 점령지 곳곳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해 운영하였다. 보르네오의 산다칸, 싱가폴의 창이캠프 수용소가 대표적인 예이다. 제네바협정과 헤이그협약에 포로에 관한 국제협정이 규정되어 있었으나, 일본군은 이를 준수하지 않고 포로들을 고문하거나 학살했다. 포로들을 공항 건설에 동원하는 것 또한 국제조약 위반이었지만, 많은 포로들이 군용공항이나 철로를 건설하기 위해 끌려갔다.) 영화에서도 힉크리스가 끝내 일본군에게 무기전문가 명단을 넘기지 않자, 일본군은 포로들을 하루카에 있는 활주로 건설 현장에 보내버린다.요노이와 하라 상사는 제국을 위해 철저히 헌신하는 전형적인 일본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며, 명예를 위해 할복도 자행한다. 왜 명예롭게 자살하지 않고 포로로서 수치스럽게 살고 있냐는 하라 상사의 대사는 그 당시 일본군의 인식 그 자체였다. 실제로 일본군들은 적군에 잡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강요받았다. 전쟁을 도발한 당사자인 일본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는 ‘포로가 되어 고통받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자결하라’고 하면서, 부대원이 전멸하는 죽음을 ‘교쿠사이’라 하여 이를 패망한 군인이 응당 갈 길이고 영광이라고 교육했다.) 그러한 자살은 민간인들에게도 요구되었다. 과거 사무라이 계급만의 특권이었던 자살이 이제는 국민의 의무가 된 것이다. 1945년에는 군대의 자살 전략이 마침내 국가 정책이 되어 가미카제 특공대가 창안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