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양 사 입 문『 무슬림 지식인의 지식추구, 여행 』학과 :학번 :이름 :무슬림들의 지식추구이븐 바투타는 왜 여행을 하였을까? 왜 무슬림 지식인들은 지식추구를 할까? 라는 의구심이 들어 이슬람 지식의 중요성에 관한 꾸란(코란)과 하디쓰를 정리해놓은 웹을 검색해 보았다. 이슬람에서 지식이 갖는 위치는 아주 대단하다. 지식의 중요성에 관한 꾸란과 하디쓰 구절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꼽아보면, 아래와 같다.▶ “지식 추구는 모든 무슬림들에게 의무사항이라” (티르미디,이븐마자)사히흐▶ “지식을 추구하러 길을 나선 자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천국으로 향한 그의 길을 쉽게 해주시노라.천사들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로 인해 기뻐하여 그들의 날개를 낮추며, 천국과 지상의 거주자들과 깊은 물 속의 물고기조차도 지식을 가진 자를 위해 용서를 구하노라.지식을 가진 자가 일반 신자에 대해 가지는 우월성은 보름달이 나머지 별들에 대해서 가지는 밝기와 같노라.지식을 가진 자는 예언자들의 상속인이니, 예언자들은 금이나 은을 남기지 아니하고 오직 지식만을 남기기 때문이라.그 지식을 받는 것은 풍부한 양을 받은 것이라”(아부 다우드가 전함)이처럼 무슬림들의 교과서라고 볼 수 있는 꾸란에 지식추구를 삶의 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들의 지식추구는 종교적으로 몸에 습관화 되어있으며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종의 의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 추구가 밖으로 표출되어 보여 지는 것이 메카 성지순례이다. 이븐 바투타는 이러한 지식추구를 위해 여러 번의 성지순례를 감행하였고, 이에 더하여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지식을 넓혀 나갔다.이슬람을 지탱시켜주는 것에는 5가지 기둥과 6가지 믿음이 있다. 이중 5가지 기둥 중에서 4가지인 신앙증언, 예배, 구빈종교세, 단식은 무슬림의 일상생활 중 항상 지키고 실천해야 하는 의무 사항이지만, 성지순례는 평생에 한번 본인의 능력이 있을 때 실시하는 것으로 의무가 끝난다. 예언자로서 무함마드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내려진 것은 610년이었고, 622년에는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면서 이슬람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해를 기점으로 이슬람 세계에서는 히즈라력 원년으로 사용하고 있고, 일 년을 우리의 태음력의 형태로 12달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 12개의 달 중 12월에 시작하여 희생제가 벌어지는 이후까지 일정한 의식에 따라 하는 것이 성지순례이다.이븐바투타는 누구인가??이븐바투타는 어려서부터 법관 가문과 문화부흥기란 좋은 교육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성실성과 겸손, 인자, 효성 등 우수한 윤리도덕과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이슬람교 교법과 하디스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문법학과 문학도 찬수하였으며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를 알고 있어 여행에서 요긴하게 써먹곤 하였다. 그는 학식에다가 높은 도덕성, 그리고 활달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붙임성이 남달리 좋아 생소한 현지에도 곧잘 적응하고 언어도 금방 익히곤 하였다. 게다가 현지 여인을 취해 아내로 삼고 정착하면서 현지 풍습과 관행에 쉽게 적응할 수도 있었다. 그는 또한 견인불발의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지 때문에 난관을 극복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다.그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항해하는 도중 바다에서 해적을 만나 그때까지 20여 년간 수집한 기록 자료를 몽땅 빼앗기고 만다. 그때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후 그는 30년간의 대장정에 관한 기억을 되살려 여행기를 완성한다. 여행기에는 1483명의 인물과 961개소의 지명을 비롯해 수많은 사원과 학교, 묘지, 시장, 하천 등의 이름과 함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물론 개중에는 오기나 착각이 있지만, 그토록 방대한 내용을 일일이 기억한다는 것은 출중한 기억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가끔 사실과 안 맞는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이븐바투타는 철두철미 이슬람 문화 속에서 샤이흐이자 법관으로서 모든 사물의 가치 기준을 이슬람교의 교리와 규범에 두고 고찰?판단하며, 여행 중 여섯 차례나 성지 메카를 순례한다. 여행하면서 위험에 부딪칠 때마다 알라의 구제를 기원해 이슬람 경전 ‘꾸란’의 염송하고, 여행 중에도 이슬람에 자진 출병하기도 한다. 여행 중 내내 그는 이슬람 세계 각지의 종교계 명사들과 접촉하고 분에 넘치는 예우를 받는다. 인도 델리와 볼디브 제도에서는 법관을 역임하고, 델리 술탄의 특사로 원나라에 파견되기도 한다. 여행에서 귀향한 후 타계할 때까지도 줄곧 법관을 지낸다. 지금 탕헤르에는 거의 업적을 기리는 ‘이븐 바투타 거리’가 있고 참배 대상이 되고 있는 영묘도 있다.30년간 이어진 이븐 바투타의 세계적 대여행과 탐험의 전 과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 25년간의 동행(아시아)인데, 고향을 출발해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펴 중국까지의 왕복 여행이다. 줄WO 부분은 2년간의 북행(유렵)으로서 수도를 떠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조 수도 까지 갔다가 귀향한 후 이어 모로코의 남무 도시 마라케시를 에돌아 페스로 돌아오는 여행이다. 마지막 셋째 부분인 남행은 페스에서 남하해 사하라 사막을 횡단, 내륙 아프리카까지의 왕복 여행으로서 사상 초유의 아프리카 여행이다.이븐 바투타의 여행 목적은 무슬림으로서 기본의무인 성지순례를 하는 것이었다. 평생에 한번 하나님의 집이 있는 메카를 방문하고자 하는 열망은 모든 무슬림들의 가장 큰 꿈이자 가장 흥분되는 종교적 행사이다. 더욱이 유년시절부터 전통적인 이슬람 교육을 받았고, 이슬람세계에 대한 지적 열망과 신앙에 불타는 이븐 바투타의 여행 자체는 이미 장사와 기이한 경험을 목적으로 떠나는 여타 여행과는 순수성과 종교적 양식, 질적인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집트를 돌아서 아라비아반도로 들어간 그는 마침내 메카에서 종교적 순례의무를 마쳤다.이븐 바투타 여행기 주요내용과 의의‘이븐 바투타 여행기’는 중세의 대여행가이며 문명탐험가인 이븐 바투타가 30년간 아시아·유럽·아프리카의 3대륙 12만km를 다니면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연대기 형식으로 기술한 현지 견문록이다. 이븐바투타가 대장정에 오르게 된 동기는 무슬림들에게 주어진 5대 종교 임무의 하나인 메카성지순례를 결행하면서, 이를 계기로 마슈리끄, 즉 동방 이슬람 세계에 관한 지식을 탐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동방 여행기간에도 수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네 차례나 메카를 찾아 순례함으로써 소기의 첫째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슬람 문명의 발원지이자 개화지인 동방 이슬람 세계는 학구열에 불타던 젊은 그에게 선망과 탐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행기에서 보다시피 그는 멀리 인도에서도 이슬람과 관련된 명소나 명인들이라면 빠짐없이 찾아가 탐방하고, 각지에 전파된 이슬람 문명의 전개상을 다각적으로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여행과 탐험의 묘미를 터득하고 경험을 축적하면서 지식을 깊이를 넓혀나간다.이븐 바투타가 이슬람 세계를 중심으로 한 3개 대륙 여러 지역을 주유한 14세기 전반은 3개 대륙을 아우른 이슬람 세계가 여전히 세계 중심 세력의 하나로 기능하는 가운데, 이슬람의 지역적 다문화가 여러모로 추진되던 시기였다. 1258년 압바스조 이슬람 통일제국이 멸망한 후 이슬람 세계에는 동방의 일칸국과 서방의 맘루크조,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의 나스르조를 비롯한 지역적 중심 세력이 형성됨으로써 전래의 통일적 이슬람 세계에는 다중심적 다극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 결과 이슬람 문명의 토착화와 이에 따른 이슬람 문명의 지역적 특성이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이슬람 세계아 이슬람 문명의 이러한 새로운 변화 추세는 이븐 바투타의 탐구심과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켰으며, 마침내 그로 하여금 메카나 바그다드 같은 이슬람 세계의 중심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 동부 유럽과 아프리카 오지 같은 이슬람 세계의 변두리 지역을 찾아 떠나게 했다.이러한 이슬람 문명의 지역적 다극화 과정에서 이슬람교 포교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수피즘, 즉 신비주의 교단이다. 이븐 바투타가 여행 중 도처에서 만나는 이른바 ‘자위야’는 바로 수피즘들의 수행도량인 것이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에 하나의 거대한 포교망을 구축하여 교세확장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들이 운영하는 ‘자위야’는 수행과 포교 활동의 거점인 동시에 무슬림 여행자들의 여관이자 보급기지이기도 하였다. ‘자위야’의 존재는 이븐 바투타의 여행을 가능케 한 현실적 요인의 하나였다. 이러한 요인에 의한 물질적 및 정신적 보장이 없었던 그의 길고도 넓은 여행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 단 지 계 획 』- 근린주구론과 신도시 -Ⅰ. 미국의 주거단지계획1. 현대 근린주구이론의 개척자 페리·스타인·라이트2. 근린주구의 개념을 정립한 페리3. RPAA를 통한 스타인과 라이트의 공동작업4. 자동차시대에 적합한 래드번(Radburn)Ⅱ. 영국의 주거단지계획1. 대런던계획2. 제1기 신도시 할로우3. 제2기 신도시 컴버놀드4. 제3기 신도시 밀턴케인즈과 목학 과학 번이 름담당교수제출일자Ⅰ. 미국의 주거단지계획1. 현대 근린주구이론의 개척자 페리·스타인·라이트페리는 근린주구 개념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였으며, 스타인과 라이트는 래드번 계획을 통해 근린주구 이론을 실제 계획 및 설계에 옮겼다. 그들이 구현한 래드번 계획 개념은 20세기 현대 도시계획의 사상적 원천이 되었다. 래드번 계획은 20세기 현대도시계획에 굵은 자취를 남겼다. 스타인과 라이트는 신도시 래드번의 계획 및 설계과정에 페리의 근린주구이론을 실제로 적용했으며, 래드번 계획은 하워드 이후 영국 신도시계획의 이론적 기반이 된 전원도시의 영향을 받았다.먼저 스타인과 라이트의 래드번 구상이 출현한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 현대도시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산업혁명의 영향에 힘입은 도시화의 거센 물결은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중 교통수단의 획기적 증진에 의한 사회적 이동과 인구증가가 급격히 이루어 졌는데, 특히 도시에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도시로서의 인구 집중은 도시 내의 과밀을 가져왔다. 산업의 발달과 경제성장은 전국에 걸쳐 도로망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도시 주변부로의 외연적 확장을 가져왔다. 즉, 미국 도시의 성장과 과밀에 의한 무질서는 현대 도시계획의 목표가 되는 쾌적성 확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웠으며 물리적 환경을 재조직화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제기하였다. 산업혁명이전 바로크 시대의 이상도시에서는 도로의 배치가 생활공간의 배치에 우선되었기 때문에 도로가 계획단위였다. 그래서 도로망 계획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땅을 생활공간이 차지했으나 전원도시운동 이후엔 근린주구가 계획단위가 되었다. 페리의 근린주구이론은 자동차 시대에 적합한 근린주구배치이론으로 정립되어, 현대도시계획에 큰 영향을 미쳤다.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미국도시에 미친 충격의 하나는 자동차보급의 급속한 신장이었다. 미국 식민지시대의 초기 도시정주지의 형태는 식민지도시의 특징인 격자형 가로망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식민지도시구조 위에 자동차의 편리성을 위해 방사형 가로망체계가 신속히 보급되었다. 격자형 가로망체계는 차량우선통과를 허용하였다. 주거지의 평온하고 조용한 후식과 안정성은 사라졌다 주택대문 앞까지 차량체증, 자동차 경적소리, 매연가스, 주차, 먼지로 뒤범벅이 되었으며, 공원까지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보행인은 1마일에 20회 이상 자동차도로를 건너야 했으며, 어린이들은 놀이터가 없어 도로노견에서 놀았고,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사망 순위 1순위를 기록했다. 따라서 자동차 시대라는 상황에서 어린이들이 자동차 도로와 교차하지 않고 학교에 갈 수 있으며, 도로와 공원이 조화롭게 배치되는 도시의 건설은 하워드의 전원도시 건설의 이상과 동일한 맥락에서 받아들여졌다.2. 근린주구의 개념을 정립한 페리도시내부구조에 관해 계획과 이론을 맺어주는 시도로서 페리의 근린주구이론만큼 영향을 미친 이론을 찾기란 쉽지 않다. 래드번 계획의 중심개념인,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간선도로의 경계를 커뮤니티의 단위로 하는 근린주구이론은 페리의 뉴욕 대도시권 현장조사결과 이루어졌다. 페리는 커뮤니티의 형성과 유지에 관한 사회학이론을 발전시켰다.페리는 현대도시의 과밀하고 분업화된 사회구조에서는 1차 집단의 친밀감이 개인의 사회적 성격과 공동체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긴요하다고 파악했다. 또한 정치, 도덕적 단위로서 근린주구의 활성화에 주목했다. 또한 그는 학부모의 참여를 통해 초등학교를 커뮤니티의 중심으로 발전시키는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 당시 미국사회의 특수한 상황인 미국 이민자들의 사회적 통합 또한 중요한 해결과제였다. 특히 그는 미국 이민자와 이민 2세의 사회적 통합과 사회화 과정에 관심이 깊었는데, 물리적 계획 및 설계가 주민의 근린의식을 형성하는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리는 간선도로를 경계로 해서 자동차에 의한 교동사고 위험이나 사람동선의 단절을 회피하면 순환도로로 둘러싸인 공간은 일상생활의 마당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구상은 근린주구 단위의 면적과 인구, 중심에서 경계까지의 거리, 물리적 시설규모를 결정하는 데까지 발전하였으며, 커뮤니티의 기능을 뒷받침하는 공원의 수와 배치원칙을 결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20세기의 자동차시대에 초등학교를 단위로 통과교통을 배제하는 근린지구의 형성이 현대 도시에 적합하다는 것은 그 이후 신도시 건설에서 증명되었다.3. RPAA를 통한 스타인과 라이트의 공동작업미국지역계획협회(Regional Plans Association of America : RPAA)를 언급치 않고 스타인과 라이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RPAA는 스타인의 주도로 출현했다. 스타인은 도시연구, 계획, 개발을 위한 조직을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그 결과 1923년 RPAA가 결성되었다. RPAA의 활동의 아이디어와 사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세계 각 국의 도시정책과 도시계획, 도시건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라이트와의 공동작업도 스타인이 주도한 RPAA에 라이트가 참가하면서 가능해졌다. 라이트가 없었다면 스타인의 도시개혁을 위한 주거지배치계획안이 상당히 달라졌을 정도로 라이트의 영향은 컸다. 라이트와 스타인의 첫 작업은 커뮤니티 계획 연구였는데 이 작업은 써니사이드 배치계획으로 결실을 보았다. 라이트는 펜실베니아 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단지설계가로 활동했다. 그의 단지 설계가로서의 경험은 써니사이드와 래드번에서 크게 빛을 발휘한다. 스타인과 라이트는 주택설계, 커뮤니티계획 단지계획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그들의 재능은 서로 보완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공동작업결과는 뛰어났다. 특히 라이트는 오픈스페이스를 많이 공유하는 집합주택의 효과적인 배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의 단지계획인 써니사이드, 래드번, 1920-1930년대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계획안으로 평가받고 있다.4. 자동차시대에 적합한 래드번(Radburn)뉴욕에 인접한 뉴저지주 Fairlawn지역에서의 신도시 래드번 개발 대도시의 과밀과 체증의 결과 발생하는 교외성장에 대한 계획적 해결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동차시대에 적합하면서 통과교통이 배제되는 3개의 근린주거가 있는 주거지배치를 구상했다. 즉, 인접한 뉴욕의 경직된 격자형 가로망체계와는 대조되고, 단조로운 뉴욕의 가로망체계의 영향에서 탈피하기 위한 가로망체계를 구상했다. 주택배치의 구성원리는 집합주택의 개념을 사용했는데 개별 주택단위의 앞마당 또는 뒷마당을 추방하고 주택의 폐쇄감을 제거하는 배치개념이었다. 주거지 설계측면에서도 집합주거의 새로운 안을 제시했으며 합리적으로 조직된 근린생활권 계획으로 평가되고 있다.래드번 계획은 미국 계획사조에서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 시대의 당면과제는 '자동차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도시의 건설'이었다. 써니사이드 계획에서의 격자형 가로망형태는 자동차로부터 안전한 생활환경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래드번 배치계획을 통한 스타인과 라이트의 공헌은 보행자와 차량의 소통을 완전히 분리한 '보차분리'의 실현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페리가 강조한 1차 집단의 중요성을 도입하여 근린주거지를 계획했다. 그리고 래드번 계획안에는 현대도시의 복잡하고 개별화된 생활조건의 근린주거지에서 이웃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반영하였다. 래드번은 2평방마일의 면적에 25,000명의 인구를 수용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30-35에이커 규모의 범위 이내에는 통과 교통을 배제시켰다. 가로망 체계는 래드번을 통과하지 못하고 순환해서 진행하도록 계획하였다. 주택은 쿨데삭(cul-de-sac)에 의해 자연스럽게 집합주택이 형성되도록 하였다. 자동차 시대에 적합한 커뮤니티의 전형이다. 라이트가 제시한 쿨데삭 개념, 보행자 체계와 보행자동선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언더패스에 의한 차량과 보행자의 입체분리는 그 이후 신도시 건설, 도심의 중심 쇼핑지구 재개발에서 광범위하게 채택되어 현대도시계획에서의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이 되었다.< 래드번의 쿨데삭과 주구 구성 >Ⅱ. 영국의 주거단지계획1. 대런던 계획1940년 독일의 공격으로 영국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런던의 전면객인 개조계획을 시작하였다. 1942년 영국 CIAM 조직의 일환으로 건축가들의 모임이었던 MARS 그룹에서 런던재건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이 런던재건계획안은 런던의 동서축 중앙에 두개의 간선도로를 배치, 그 사이를상업과 공업지대를 선형으로 배치, 그 바깔쪽으로는 도시의 가장 외곽을 둘러싼 환상의 도로와 중앙의 선형 축 사이를 16개 의 손가락 모양의 회랑지대 사이사이에 교대로 녹지대를 배치하는 파격적인 계획안 이었다1944년에 시의회는 기존의 런던재건계획안의 아베크롬비와 포쇼가 디자인한 보다 전형적인 계획안을 채택했다. 이 계획안은 런던시가지의 팽창을 막기 위하여 런던외곽으로 폭 10km에 달하는 녹지대를 지정하고, 그 외곽에 8개의 신도시를 건설하며 크게 대부권, 교외지구, 외부권 3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관리 및 계획을 하고 있다. 이는 후에 그린벨트의 시초가 된다.아베크룸비의 대런던계획은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사이 인구의 급격한 도시집중에 대응하고, 전쟁 복구차원에서 당시 런던의 거주자 중 100만명을 도시외곽으로 이주시킨다는 가정하에 출발하였다. 즉 대런던 계획은 과밀화된 런던의 인구를 계획적으로 분산 재배치하기 위한 것으로서 런던 외곽에 새로운 대규모 정주지를 만드는 계획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에서 도시성장의 형태는 점차적으로 농촌지역을 잠식해 나가논 것이었기 때문에 대런던 계획은 커뮤니티 계획에 기반을 두고 계획적인 성장과 재건을 위한 제안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