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123850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2
검색어 입력폼
  • 조선중기 병자호란 전후의 대외관계
    朝鮮中期, 丙子胡亂 前後의 對外關係-王室 및 核心勢力의 人物中心으로-목차1. 머리말2. 丁卯胡亂과 丙子胡亂 사이3. 丙子胡亂4. 仁祖, 孝宗5. 支配勢力의 변화6. 昭顯世子7. 맺음말1. 머리말"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you may not be interested in war, but war is interested in you.)"소련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생전에 했던 말이다. 전쟁을 통해 러시아혁명을 이룩한 트로츠키는 암살당하는 그 순간까지 전쟁(세계 2차 대전)을 바라보며 죽는다. 인류는 전쟁이란 거대한 움직임 앞에서 잠시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쟁은 정말 피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필자의 첫 번째 의문 명제이다. 이 명제에 더하여 필자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께 누군가와 말다툼을 할 때 자주 들었던 ‘참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라는 두 번째 명제를 조합을 해 보고자 한다.19세기 중, 후반 고종연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때 조선은 이양선의 출몰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근대화 된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된다. 운요호 사건,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 조선은 일본, 미국, 영국 등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비참했다. 아니 그 당시만 해도 비참한 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 당시의 행위들이 조선을 얼마나 많은 불행의 나락으로 몰아냈는지 절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 조선에게 있어 전쟁은 피할 수도 없었고, 참아서는 절대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자, 그럼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전쟁은 정말 피할 수 있는 것이며, 참는 자가 이기는 것일 수 있을까? 필자는 이제 이 두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킬만한 역사적 사례를 들어 보고자 한다. 이제 한 쪽에는 주화主和파가 한 쪽에는 척화斥和파가 등장하여 한 차례 설전을 벌일 때이다. 이 두 세력은 청나라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내재되어 있었고 따라서 철로의 양 끝에서 서로를 향해 굉음을 얼굴을 들고 살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밤낮으로 게으름 없이 크게 구제하여 어려움을 헤쳐나갈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성상의 거조와 조정의 기상은 평소와 다름을 볼 수 없으며, 도리어 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형세가 십분 위급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한심하게 여길 것입니다. 만약 나라의 운명이 오랑캐들에게 달려 있어서 손쓸 방법이 없다고 한다면, 자신을 굽히고 힘을 다하여 원수를 위해 역사(役事)에 나아가는 것은 대개 한때의 권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천경지위(天經地緯)와 사람이 사람 된 까닭은 끝내 그것을 하찮은 물건이나 하찮은 일이라 하면서 쉽게 끊을 수는 없습니다.수치를 씻고 자신을 신장시킴은 비록 창졸간에 이루어지기를 기약할 수는 없으나, 각고면려하면서 자강할 계책을 도모한다면 하늘과 사람이 협응(協應)하리니, 어찌 이룰 수 있는 길이 없겠습니까.”이제는 이 사람들이 싸우게 된 원인을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조선을 크게 흔들었던 병자호란의 내용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또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도 이렇게 설전이 남아있게 된 이유와 그 후의 정치적 행보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상당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조선은 최소한 어떠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는지, 또 무엇을 참아야 진정 조선이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2. 丁卯胡亂과 丙子胡亂 사이정묘호란을 맞아 조선과 후금은 화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지만 그것은 ‘불안한 평화’였다. 강화는 이뤄졌지만, 후금이 정묘호란을 도발하게 된 원인 문제를 포함하여 여러 현안들이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미봉되었기 때문이다. 후금은 정묘호란을 통해 대략 세 가지 정도의 목표달성을 시도했다. 첫째, 가도의 모문룡 세력을 제거하며, 둘째 명의 충순한 번국인 조선을 견제하고, 셋째 조선과 교역하여 양곡 등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것 등 이었다. 세 가지 가운데 둘째, 셋째 목를 지연시키도록 조치했다. 이에 따라 서북국경 지대의 방어군은 각기 지정된 산성에 들어갔다. 이는 청군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시켜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수도권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전략이었다. 특히 강화도가 방어 거점으로 부각된 것은 청의 주력군이 기병이기 때문에 해상 전투 능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초보적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그러나 청군은 이들 산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 주변에 소규모 병력을 잔류시켜 아군의 기동을 막는 한편, 주력군은 수도권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따라서 정부의 산성 고수 지연 작전은 아무런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되었다.1636년 12월8일 압록강을 도하한 청군의 선봉 부대는 불과 6일 만인 12월14일 서울 근교의 양철리에 진출해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도로를 차단했다. 이렇듯 청군의 신속한 남진과 강화도와 서울을 연결하는 도로 봉쇄는 수도권 방어에 결정적인 장애를 가져왔다. 즉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기 못하게 된 것이다.12월13일 조정에서는 적병이 압록강을 넘어온 지 5일 만에 처음으로 전쟁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에 의한 것이었다. 그날 밤 김자점은 두 번째 장계를 올려 청군의 선봉이 11일 평양을 통과했다고 보고했다. 적과 보고가 함께 온 셈이었다. 12월 14일 조정은 종묘의 신주와 왕실 및 조정 관료의 식구를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이어서 인조도 세자와 관료를 이끌고 강화도로 떠났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점령해 버린 뒤였다.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 청군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홍제원까지 진출했다. 매우 다급한 상황이었다. 이에 이조판서 최명길이 난국 수습을 지원하고 나섰다. 최명길이 청군의 진영으로 가서 선봉장 마푸타와 회담을 하면서 청군의 도성 진입을 지연시키는 동안, 인조는 을지로를 지나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나가 그날 밤에 남한산성으로 들어했다. 더구나 화이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당시 조선인에 있어서 오랑캐는 그야말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빈 것이다. 더욱이 이제까지 우위를 점하던 국제 관계가 이제는 바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힘없는 문화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심리적 보상이었다. 애초에는 북벌을 위해 군제를 개편하는 등 설욕의 날을 기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영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더욱이 경제적 침탈을 통해 조선을 제어하려는 청의 의도는 적중해 더욱더 복수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북벌의 외침은 커졌다. 그러나 그것은 힘없는 문화의 공허한 외침일 때가 많았다.4. 仁祖, 孝宗(1) 인조의 정치적 태도인조는 병자호란 이후 자신의 실추된 왕권을 지키기 위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치욕을 부른 책임’을 척화파에게 전가하여 조정에서 배제시키고 최명길, 김류, 김자점 등으로 대표되는 주화파, 친청파를 신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명길 등도 ‘전란의 책임’을 척화파들에게 전가하여 인조에게 영합하고, 인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정의 기존질서를 개편하려고 시도했다. 인조는 또한 호란 이후 청의 요구에 거의 순응하는 태도를 취했거니와 명청교체의 조짐이 가시화될수록 그 같은 태도는 굳어져 갔다.언관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의 관인들은 인조의 이러한 행보를 비판했다. 그들은 ‘전란을 부른 책임’을 인조반정 이후의 실정과 적폐積弊에서 찾았다. 나아가 그들은 ‘와신상담’을 강조하면서 인조를 비판했고, 급기야 인조 ‘왕통의 근본’인 인조반정의 정당성까지 거론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을 두려워한 인조의 친청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명과의 관계 유지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던 최명길을 해임하고, 친청파 김자점을 신임하여 말년의 왕권을 안정시키려고 시도했다. 친청 행보를 비판하는 분위기 속에서 심기원이 ‘모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인조의 친청 행보는 지속되었고 그 같은 흐름 속신에게 중앙군을 집중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전쟁 시 일사불란한 태세를 갖추고자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효종은 문, 무반의 대립을 낳아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민심의 이반, 잦은 재앙, 재정적 부담에 따른 정책적 비효율성 등 때문에 결국 그의 주도의 북벌론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1658년(효종9년)에 이르러서는 송시열에게 북벌을 위임하게 되었다.5. 支配勢力의 변화호란이 끝난 후 반청적 척화론자들이 전쟁의 책임을 지고 실각하였고 최명길, 김자점 등 주화론자들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정국이 주화론자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었지만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민족적 수치심은 반청론을 무마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최명길은 정국을 주도하는 한편 척화론자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는 주화론자였지만 친청적 성향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화론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친청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김자점 등과 같은 사람들은 청의 힘을 통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삼전도의 굴욕이후 반청적 대의론이 더욱 고조되고 인조가 서거한 후 효종의 즉위와 척화파의 정계진출로 김자점은 축출되고 말았다. 이로써 정국은 주화론자들이 퇴각하고 김상헌, 김집 등의 반청적 사림세력들이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당시 팽배해졌던 숭명배청론을 통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했는데, 이것이 효종조의 북벌론이다.효종이 처음에 김상헌과 김집 등 사림세력을 중용했던 것은 훈신세력인 김자점, 원두표 등의 주청에 의한 것으로 선왕 때부터의 예우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사림세력의 등용을 제의했던 훈신들이나 이를 받아들인 효종은 각기 그 목적이 달랐다. 훈신세력은 사림세력을 끌어들여 정치적 명분과 정권유지를 강화하려 하였고 효종은 사림세력을 영입함으로써 신료들의 각 당파간의 대립, 견제를 유도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집권초기에 효종은 사림계 산림의 중앙 진출에 대하여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그가 산림을 등용하긴 했지만 송시열의 입대를 허락하 했다.
    인문/어학| 2015.10.26| 11페이지| 2,000원| 조회(211)
    미리보기
  • 허난설헌(許蘭雪軒)
    허난설헌(許蘭雪軒)목차1. 허난설헌. 그녀의 생애2. 조선중기 : 유교사회 여성의 입지3. 작품세계4. 문학사상5. 문학사적 의의6. 참고자료1. 허난설헌. 그녀의 생애1. 가계허난설헌은 강릉 초당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재상이었던 문경공 허공(許珙)의 혈통을 이어받아 선조 때 명망이 높았던 아버지 허엽은 청주한씨 부인에게서 딸 둘과 아들 한 명을 두었고, 한씨부인과 사별 후 강릉김씨 부인과 재혼하여 허봉(許?)과 허난설헌, 허균(許筠)이 태어났다.2. 생애허균이 쓴『학산초담(鶴山樵談)』(1593)에 의하면 “난설헌의 이름은 초희이고, 자는 경번이니, 초당 허엽의 딸이며, 서당 김성립의 아내이다.”라고 밝혔다. 그녀의 호 난설은 대체로 여성의 미덕을 찬미하는 난혜지질(蘭蕙之質)에서 따왔고, ‘설’은 진나라 사씨의 딸이 시를 짓는데 눈을 버들가지에 비유한 고사에서 뛰어난 글재주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고결하고도 글재주가 탁월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고, ‘초희’라는 이름 역시 미녀이고 재주 있는 여성을 뜻한 것으로 풀이된다.허난설헌은 강릉 초당에서 살다가 7세 무렵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허엽은 허난설헌이 5세 때 대사성이 되었고, 6세 때 진하사로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왔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글재주를 보인 허난설헌은 여신동 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쓴 8세 이후부터 15세에 결혼하기 전까지 집에서 열정적으로 시공부를 하였다.허난설헌이 10세 때 오빠 허봉이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휴가를 받는 사가독서를 하였으므로 오빠에게 글을 배웠고,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허균도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에서 배운 것”이라 하였고, 특히 “누님은 참으로 하늘 선녀의 글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만하다.”고 하였다. 허균은 『난설헌집』 발문에서 “자녀가 없다 보니 평생을 저술하여 대단히 저작이 많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다.오빠인 허봉은 난설헌에게 있어 단순히 오누이관계이기보다는 글과 삶을/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에 기대네(靑鸞倚彩鸞)/ 스물일곱 송이 아름다운 연꽃(芙蓉三九朶)/ 달밤 찬서리에 붉게 떨어졌네(紅墮月霜寒)’ 그 이듬해 세상을 마쳤으니 삼구는 이십칠이라. 누님이 세상에서 누린 햇수와 꼭 같다. 사람의 일은 이미 전에 정해져 있으니, 커다란 운수를 어찌 벗어날 수 있으리오?” 또한 허균은 “아, 살아서는 부부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를 받들 자식이 없으니 옥이 깨진 원통함이 한이 없다”며 애통한 마음을 표현했다.2. 조선중기 : 유교사회 여성의 입지조선은 건국과 함께 이상적인 유교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했고 유교적인 이념뿐만 아니라 그 사회윤리의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성리학의 영향과 유교적인 제도 아래서 여성에 있어서 자아가 상실된 시대였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글을 읽고 의리를 논하는 것은 장부의 일이고, 부인은 조석으로 의복, 음식을 공양하는 일과 제사와 빈객을 받드는 절차가 있으니 어느 사이에 서적을 읽을 수 있겠는가”하면서 여성이 해야 할 일을 한정해 놓고 있다.이렇듯 당시의 위정자들이 여성의 역할을 철저히 폐쇄적으로 한 의도는 물론 유교적 의미에서의 정절을 여성이 지켜야 할 최우선 덕목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문밖 출입 빛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이 자유로우면 그만큼 실덕의 위험이 있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소혜왕후가 지은 『內訓』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에 전하기를 여자에게 네 가지 갖추어야 할 중요한 행적이 있으니 그 첫째는 婦德이요, 둘째는 婦言이며, 셋째는 婦容이요, 넷째는 婦公이라” 하여 여성의 교육이나 생활은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한 사람이 되어야 덕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시대에 허난설헌은 조선조 명종 18년 1563년에 태어나서 선조 22년 1589년에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전형적인 조선의 사대부집안 규수였다.3. 작품세계허난설헌은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火변 대신 土변)이 시에서 난설헌은 자신을 거문고를 만드는 오동나무로 빗대어 스스로의 자존 의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역양은 오동이 자라기에 알맞은 환경 즉 친정집을 의미한다. 그 곳에서 난설헌은 자신의 문학적 소양과 시작능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태는 부녀자가 시를 쓰는 것을 허용치 않았고 봉건적인 시댁과의 불화 역시 그녀를 좌절시켰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시 세계를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없었고, 그러한 안타까움을 시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B.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적 시각(빈녀음)豈是乏容色 (기시핍용색) 인물도 남에 비해 그리 빠지지 않고工鍼復工織 (공침부공직) 바느질 솜씨 길쌈 솜씨도 좋건만少少長寒門 (소소장한문)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자란 까닭에良媒不相識 (양매불상식) 좋은 중매자리 나서지 않네不帶寒餓色 (부대한아색) 춥고 굶주려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盡日當窓織 (진일당창직) 하루 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唯有父母憐 (유유부모련) 오직 내 부모님만 가엾다 생각할 뿐四隣何會識 (사린하회식) 그 어떤 이웃이 이내 속을 알아주리오.夜久織未休 (야구직미휴) 밤이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알알鳴寒機 (알알명한기) 짤깍짤깍 바디 소리 차가운 울림機中一匹練 (기중일필련) 베틀에 짜여가는 이 한 필 비단終作阿誰衣 (종작아수의) 필경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手把金剪刀 (수파금전도) 가위로 싹둑싹둑 옷 마르노라면夜寒十指直 (야한십지직) 추운 밤에 열 손가락 곱아온다네.爲人作嫁衣 (위인작가의) 시집살이 길옷 밤낮이지만年年還獨宿 (년년환독숙) 이내 몸은 해마다 홀로 새우잠인가.이 시는 남을 위해 옷을 짓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즉, 자신은 가난 때문에 혼인도 못하는 처지이면서도 생계를 위해 밤이 깊어도 베를 짜는 것을 멈출 수 없고, 추운 밤에 손끝이 시려도 남이 시집갈 때 입을 옷을 바느질해야 하는 여인의 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불평등한 사회의 모습을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다. 난설헌은 특유의 섬세 수 밖에 없었다.D. 이상세계에 대한 소망(유선시)瓊花風軟飛靑鳥 (경화풍연비청조) 옥구슬 꽃 바람타고 청조가 날자王母麟車向蓬島 (왕모린거향봉도) 서왕모 기린수레 봉래도 향해가네蘭旌蘂피白鳳駕 (난정예피백봉가) 목란 깃발 꽃술 배자 흰 봉황 수레타고笑倚紅欄拾瑤草 (소이흉난습요초) 난간에 웃고 기대 요초를 줍는 구나天風吹擘翠霓裳 (천풍취벽취예상) 푸른 무지개 치마 바람이 헤집으니玉環瓊佩聲丁當 (옥황경패성정당) 옥고리 경패 소리 댕그렁 댕그렁素娥兩兩鼓瑤瑟 (소아양양고요슬) 선녀들 짝을 지어 거문고 연주하자三花珠樹春雲香 (삼아주수춘운향) 삼화주 나무에는 봄 구름 향기롭다平明宴罷芙蓉閣 (평명연파부용각) 동 트자 부용각서 잔치를 파하고서碧海靑童乘白鶴 (벽해청도승백학) 청동은 푸른 바다 배각타고 건너 가네紫簫吹徹彩霞飛 (자소취철채하비) 피리소리 사무쳐서 오색 노을 날려가고露濕銀河曉星落 (노습은하효성락) 이슬 젖은 은하수엔 새벽별이 지는 구나난설헌은 계속된 개인적 불행과 그녀의 자아실현 욕구가 현실로부터 제약을 받던 시대여서 꿈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현실의 모든 상황은 그녀를 비참한 궁지로 몰고 갔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그녀의 꿈과 소망들을 정신세계에서 찾고자 했다. 때문에 그녀는 신선세계를 동경하였고 그녀의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현실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난설헌 자신의 작자 의식과 관련이 있다. 그녀의 시적 상상력은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이상적 공간으로서 신선세계를 설정하였고, 그것은 곧 그녀의 시 세계의 기본적인 정조로 일관되었다. 즉 난설헌은 선시를 통하여 현실 세계에서의 불만과 갈등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며 해소시킴으로써 그녀의 꿈과 이상들을 펼쳐 보이고 있는데 끝까지 환상세계에 머물지 못하고 그녀의 신선시들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신선시들을 매체로 그녀의 꿈과 이상을 펼쳐 보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4. 문학사상허난설헌의 시는 중국 당대의 악부시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상적으로는 도교의 신선관이 중심이라고 하.kr/chohee/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http://www.seelotus.com/"허난설헌연구"(허미자)의 "표절 시비에 대하여“한국사전 제23부 허난설헌-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디지털강릉문화대전http://gangneu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3039771) 본관 양천(陽川). 자 온궤(??). 초명 의(儀). 시호 문경(文敬). 고종 말 문과에 급제, 유경(柳敬)의 천거로 내시(內侍)에 소속하여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이 되고, 국학박사를 거쳐 각문지후(閣門祗候)가 되었다. 1267년(원종 8) 호부시랑이 되어 신종 ·희종 ·강종 등 3조(朝)의 실록을 찬수하였다. 1269년 우부승선 ·이부시랑 ·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가 되었으며, 이때 권신 임연(林衍)이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자 청혼하였으나 거절하여 미움을 샀다. 그해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울 때, 많은 조신들이 살해되었으나 양천에 가서 화를 면하였다. 그 뒤에도 전선(銓選)을 맡을 적격자가 없어 추밀원첨서사(簽書事)로 중용되었다. 1274년 추밀원부사 때 전주도도지휘사가 되어 300척의 전함 건조를 담당하였고, 1275년(충렬왕 1) 추밀원지사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1276년 밀직사사 겸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세자조호(世子調護) ·밀직사판사를 지냈다. 1279년 첨의부지사(僉議府知事) 때 전함 90척을 건조하게 되자, 경상도도지휘사로 이를 지휘하였다. 1280년 문학참사(文學參事) ·세자보(世子保)가 되고, 1284년 수국사(修國史)를 겸해 《고금록(古今錄)》을 찬술하였다. 1288년 첨의중찬(僉議中贊)이 되어 재차 지공거를 겸하였고, 1291년 원나라와 함께 합단(哈丹) 공격에 출전했다가 병사하였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2) 본관 양천(陽川). 자 태휘(太輝). 호 초당(草堂).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51년 부교리가있다.
    인문/어학| 2015.10.26| 7페이지| 1,000원| 조회(246)
    미리보기
  • 송시열과 효종의 북벌론 평가A+최고예요
    송시열과 효종의 북벌론1. 들어가며‘북벌’의 정체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고등학교 때 국사교과서를 통해서 접한 ‘북벌’은 실현 가능성없는 허구적인 계획에 불과했다. ‘존명사상으로 무장한 고집 센 늙은 신하들이 이렇다 할 목적도 없는 말도 안되는 계획을 추진했다.’ 라는 정도로 북벌론을 대충 정의했던 나는 어디선가 효종의 북벌계획을 현대적 개념에 입각한 동원계획에 못지 않은 훌륭한 국가 총동원이었으며 이러한 장한 계획이 효종이 급서함으로 인해서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을 분하고 원통스럽다고 말하는 글을 읽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북벌론’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역사적 해석이 가능하고 또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상반된 입장에 적잖이 놀라게 되었다.우리 민족이 만주지역에 갖고 있는 막연한 그리움과 미련 때문에 만주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 시도였던 ‘북벌’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상반된 입장이 나타나는 것일까?고등학교 때 북벌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을 읽고 이루어졌다.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는 당시 조선사회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박지원은 ‘허생’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 조선사회의 취약한 경제구조를 비판하고 있고 소설 마지막 부분의 이완대장과의 대화를 통해 북벌론의 허구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박지원이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북벌론은 ‘말’만 있고 ‘실천’은 없는 허구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효종이 끈질기게 밀고 나갔던 북벌정책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 목적과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이러한 여러 의문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효종 대의 ‘북벌론’에 대해서 명확히 알아보고자 했다.2. 북벌론(北伐論)(1) 북벌론의 시대적 배경북벌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효종이 즉위하면서부터이다. 북벌론이 등장하게된 배경을 찾으려면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이유는 ‘북벌론’의 논리적 토대가 ‘존명사상’에 있을 겪었다. 청은 조선에 대해 강화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요구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데려간다. 조선왕조의 명분이 추락한 것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 명나라와의 의리를 져버리지 않고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명분론이 팽배하던 분위기 속에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에 의해 북벌론이 대두하게 되었다.(2) 효종 VS 송시열명분적 북벌론과 군사적 북벌론? 송시열의 북벌론과 효종의 북벌론이 같은 ‘북벌’의 이름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하게 여겨진다. 송시열은 자신이 신처럼 떠받들던 주자와 명에 대한 의리로 북벌을 주장하면서도 효종이 주장하는 군사적 북벌론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명분적 북벌론과 군사적 북벌론, 송시열과 효종이 주장했던 북벌론은 어떻게 해서 엇갈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송시열이 효종의 군비증강을 반대했던 이유를 당시 시대의 상황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북벌론이 후대에 이토록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를 당시 효종과 송시열이 주장했던 북벌론의 성격과 또 북벌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을 정책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을 것이다.① 효종의 북벌론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북벌’에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효종의 북벌론의 근거는 부왕인 인조의 반정 명분과 자신의 변칙적인 왕위계승의 명분을 유지한다는데 있었다. 효종은 청나라에서 8년 동안 인질로 잡혀있으면서 심양과 요동의 지형과 북경의 형세 따위를 훤하게 익혔다고 자부했고, 청군의 편제와 조련 수준도 그 누구보다 세밀히 관찰했다. 그는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 않고 청나라의 인질생활을 왕가의 치욕으로 여겼다. 왕위계승의 명분을 유지하려는 목적과 이러한 효종의 복수심은 그에게 북벌론의 당위성을 부여했고 병자호란의 치욕으로 인해 굳어진 조정의 숭명반청의 분위기는 효종의 북벌론의 기초가 되었다.효종은 자신과 함께 북벌을 수행할 세력이 필요했는데 그 계층이 바로 산림(山林)이었다. 산림은 시골의 서원 등에서 강학하는 도학자를 ‘산림학자’, 또는 ‘산림양덕지련도감과 어영청을 개편하여 군사를 증강시키는데 주력한다. 또 무기 체계를 총포 위주로 개편하였는데 이에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자 군수 경비를 세금으로 충당하려 한다. 즉 현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과 돈으로 통일하여 바치는 대동법을 시행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이려고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세금의 종목을 늘림으로써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총포의 제작은 네덜란드인 박연이 맡았다. 조선은 명나라에서 제작한 홍이포를 밀수입하여 직접 대포를 만들었다. 조총으로 한층 강력하진 군사력을 갖게 된 조선군은 나선정벌에 동원되어 러시아군을 격파하게 된다. 청나라 조정은 나선정벌에 조총군을 파견한 조선에 호의를 보였지만 효종의 속셈은 최소한의 군사를 보내면서 청나라를 안심시키고 청나라 진영의 허실을 파악하는 한편 무기 체계를 세밀히 관찰했다. 효종은 나선정벌을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이용했고 또 그것을 통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효종은 문무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군사력 정비를 주장하던 문신출신의 박서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다. 그러나 박서는 효종 4년 6월 급서하게 되고, 효종은 곧 효종의 군비 증강을 지지한 드문 신하 중의 한명인 원두표를 병조판서에 임명한다. 또 무장인 이완을 훈련 대장으로 삼아 북벌의 실행을 맡게 하고 서북인을 차별하지 않고 북벌에 사용할 인재로 고두 등용한다. 효종은 북벌에 필요한 인재들은 무관이라고 생각했고 무관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위해서 관무재(觀武才)를 실시한다. 관무재란 조선시대 무과 시험의 하나로 임금이 친히 열병(閱兵)한 뒤에 치르는 시험을 말한다. 효종은 이렇게 성장한 군사력을 문무대신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관병식을 거행한다. 문신들은 이런 행위가 청나라를 자극하여 전쟁을 도발하는 행위라며 반대했지만 효종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간다. 또 효종은 1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을 설치하고 추쇄어사를 파견하면서 부족한 군사력을 누락 노비들을 통해 충당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도 한다. 자신 북벌 준비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장씨는 금주령을 내려 종묘에 쓸 제주 이외에는 일체 술 빚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노인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키지만 궁내에서 경로잔치를 벌여 멀어질 뻔한 민심을 다시 되돌리는데 성공한다. 또 장씨는 이불을 만들 때 빨간색과 파란색의 두 가지 색을 섞어서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는 유사시에 군복을 만들어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② 송시열의 북벌론송시열은 효종 즉위 이후에 효종의 적극적인 산림 중용으로 출사한다. 송시열은 ‘정유봉사’를 통해 왕도(王道)를 기르고 양민(養民)하며 병사를 양성함으로써 북벌의 기초를 다질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효종은 양민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한 군비확충으로 북벌을 수행하려 했고 이런 효종의 북벌정책은 송시열의 주장과 일치할 수 없었다.이른바 정사를 닦아 오랑캐를 정벌하는 뜻은 이러합니다. 공자가 『춘추』를 지어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천하 후세에 밝힘으로써 무릇 혈기가 있는 무리는 마땅히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의 추악을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주자가 가로되 “군부(君父)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지 않는다” 하였는데 하늘이 엎은 것, 땅이 실은 것은 무릇 군신 부자의 성품이 있어서이며 지극히 통절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 자기를 동정한 것이 아니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송자대전』기축봉사)송시열은 주자의 견해를 빌려 화이관의 원칙록을 설명하고 명나라 황제를 받드는 대의를 설명하고 명나라에 대해 분명히 지켜야할 의리를 강조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구했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송시열의 주장은 척화파를 이론적으로 대변하고 북벌론의 기본 노선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 상소가 올라온 후에 효종의 군사적 북벌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을 닥치는 대로 반역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에 김자점이 산림세력을 고자질하여 ‘경인의 변’이 일어난다.그러자 송시열은 조정에 머무를 수 없어 낙향하게 되었고 효종도 적극적으로 산림세력을 중용할 수 없는 상황서 주자의 그것과 다르다.이처럼 북벌론은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명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송시열은 청나라를 물리침으로써 명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여겼고, 그 구체적인 실행은 ‘북벌’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송시열에게 삼전도의 치욕보다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는 것을 더 슬프게 여겼던 것이다.고등학교 때 송시열의 ‘소중화 사상’이 우리 민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기반으로 생겨난 사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송시열의 ‘북벌론’은 국사시간에 교과서 곳곳에서 등장하는 ‘중화사상’, ‘존명사상’같은 사대주의적인 사고가 그 극단에 치달은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송시열의 ‘소중화 사상’은 그의 북벌론이 ‘명분적’이고 ‘제한적’인 성격을 띠게 하였다. 송시열이 바랬던 북벌은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와 국교를 끊고 최소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자는 북벌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비의 증강에 앞서 안민(安民)을 먼저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또한 송시열은 광해군의 현실 외교를 비판하고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그 결과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게 한 서인정권으로서 북벌을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뒤에 군비증강을 통해 북벌을 실행하려고 했던 효종과의 갈등도 불가피한 것이었다. 송시열은 청나라를 무력으로 정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송시열은 제한적인 북벌론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③ 송시열의 라이벌 윤휴가 북벌론을 주장한 까닭 - 체제유지를 위한 위장논리?효종이 급서한 뒤 복상문제로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결국 청나라 정벌을 주도하던 서인이 정권에서 밀려났고 북벌론 역시 아예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1675년(숙종 1년) 윤휴에 의해 북벌론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윤휴가 현종에게 올렸던 소문과 시무에 관한 책자에서 그것이 잘 드러난다. 윤휴는 그 글에서 청나라 정
    인문/어학| 2015.10.26| 9페이지| 1,000원| 조회(443)
    미리보기
  • 陳獨秀의 생애와 사상
    陳獨秀의 생애와 사상1. 생애1879년 10월 8일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남경, 일본 등에서 신학문, 신사상을 배우고 서구의 지식을 탐독하게 된다.새 학문을 완전히 자유스럽게 배우기 위하여 그는 1898년 항주에 있는 구실서원에 입학하여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워 훗날 서구문명을 배울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된다. 이 시기는 양유위의 개혁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이 개혁은 백일천하의 개혁으로 끝나버렸지만 진독수는 국가의 장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된다.1900년 의화단의 난 이후 개혁사상이 부활하고 진독수는 개혁자에서 급진적 혁명가로 변하였다. 1901년 경 고향에 돌아가 사설도서관을 만들어 사상을 전파하려 했지만 수배자가 되어 일본으로 망명해 서구 문명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다. 일본에서 본국으로 소환되어 온 진독수는 , 등에서 자신의 사상을 글로 썼고 특히 에서는 반청혁명사상을 고취시키고 만주정권이 허용했던 세계제국주의국가들의 특권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난을 했다. 신문을 발간하는 것 외에도 안휘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 시절에 진독수의 혁명 활동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아마도 백문울과 함께 1905년 악왕회를 조직했다. 이는 만주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것이 극비의 목적이었다. 뒷날 이 멤버들은 반청무반봉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34세의 진독수는 당시 중국의 정치상황에 크게 실망하면서 더 이상 중국의 장래를 내다 볼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은 완정복구와 모든 정당의 무능함에서 기인되었다. 만주정권이 무너진 다음에 이들 정당들이 근대 국가를 이루는 데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1914년 11월에는 에 애국심과 자각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중국국민의 기본권과 복지에 대한 자각에 의해서만 국민의 애국심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당시 중국은 이러한 복지를 국민에게 주지 못하기 때문에 중국국민은 애국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진독수의 생각이었다. 이 당시의 진독수는 서구지향적이며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선나기를 주장하고 문화혁명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과학의 목표를 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문화혁명은 남부의 혁명세력이 무너지고 일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던 시기에 고조 되었다. 진독수는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윤리사상은 완전히 사라져야만 중국이 창조적으로 된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란 잡지를 통해 교육받은 젊은이들에게 알려지게 된 진독수는 청년은 사회를 신선하고 활력있게 하는 주체로 자신의 가치와 책임을 의식하고 노력하여 자존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독립성, 진보성, 전투성, 범세계주의, 실용주의, 과학이라는 6개의 원칙을 제시하였다.1917년 봄에는 반유교주의운동과 문학혁명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는 중국이 현대국가로 전환하기 위해서 서구의 사상을 채택한 이상 유교는 없어지고 개인주의와 사유권이 인정되어야한 사회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는 유교가 중국 국민을 수세기 동안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었음을 인정하면서 유교의 소멸로 인한 공백은 현대교육제도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반유교주의 운동은 보수적학자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새로운 지식인들에게는 반응이 좋았다. 이리하여 북경대학내의 연합체가 결성되고 신문학운동을 전개하게 된다.현대 중국사에 있어 진독수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마 5.4 운동에서의 그의 활동이다. 1919년 일본에 대한 중국정부의 굴욕정책과 산동 지방에서의 독일의 할양권을 되돌려받지 못하게 된 베르사유회의에 대한 반발로 북경에서 일어난 학생시위로 인해 비롯된 5.4운동은 전국으로 파급되어 사회적 격동과 문화혁명을 유발했다. 을 통해서 영향을 받은 중국의 청년들은 새로운 운동을 전개시킬 수 있는 자체의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소단위의 그룹이 형성된다. 이 학생들이 5월4일 배신자들과 열강의 결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였다. 지식인들과 상공업자들도 합세하여 파업과 일본상품 보이콧에 들어갔고 이러한 사태는 북경정부의 몰락을 가져오고 중국대표가 참석했던 는 이러한 요인들이 근절될지 않는다면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전쟁을 싫어했지만 자민족을 지키기 위해 무력으로 맞설 것을 주장하였다.1919년은 진독수 나이 40살로 중국사에 있어서 불안한 한해였고 그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해였다. 그의 지성과 저술은 완숙기에 접어들었고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의 대중 운동은 사회적, 정신적, 그리고 정치적 변화를 몰고 왔다.5.4운동으로 인해서 국익을 일본에 팔아먹은 군벌과 그를 지지했던 서구세력에 대항한 애국운동이 일어나 지식인들이 모델로 삼았던 서구열강과 서구사상은 점차 매력을 잃어갔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젊은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에게 시의 적절한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야 말로 중국의 전통과 현재 서구의 지배를 동시에 거부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당시의 중국의 지식인들은 존 듀이의 중국강연여행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을 받게 된다. 5.4운동이후 투옥되었던 감옥에서 석방되면서 노동운동을 촉진시키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 사상을 전해 주는 강연을 벌이기도 했다. 1920년 사회주의로 전향 후, 그는 열정을 바쳐 중국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레닌의 중국정책과 진독수의 중국혁명 개념이 일치함에 따라 중국공산당이 창당되게 된다. 중국공산당의 결성은 주로 북경대학의 급진파 지식인들이 이끈 5.4운동의 산물이었다. 일전대회를 통해 진독수는 서기장이 되며 이전대회를 통해 제국주의와 봉건 군국주의를 반대한다는 결정과 민족의 적과 대항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요청한다는 민족주의 연합전선의 결정,국제 공산당에 참여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 무렵까지도 중국 공산당은 진독수의 지시 아래 있었다.1923년에서 1927년까지 진행되었던 국민당과 중국공산당간의 합작은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은 막강한 정당으로 확대되었고 국민당은 거대한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다. 국공합작시기에는 국민당의 러시아 고문관 보로딘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진 전도≫라는 연설은 공산당이 농민대중·쁘띠부르주아와 중등부르주아, 특히 무장역량에 대한 지도권을 포기할 것을 주내용으로 하였다. 그러나 진독수는 계속해서 코민테른의 지령대로 국공합작을 추진해 나갔다. 1927년 5월 17일,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14사단장 하두인이 반란을 일으켜 일대의 공산주의 세력을 파괴한 것을 시작으로 호남지역 곳곳에서 수많은 공산당원들과 혁명단체원들을 체포, 피살하였다. 이 기간 중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 중앙에 토지혁명의 전개, 국민당 지도기관의 개조, 노농무장의 조직, 믿을 수 없는 군대의 무장해제, 무한정부 지지 등을 요구하는 지시를 내렸다. 6월 1일, 이러한 지시는 중국공산당 중앙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7월 3일, 중국공산당중앙은 확대회의를 개최하였고, 7월 4일에는 상임확대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모택동은 공산당원의 무장과 빨치산노선을 주장하였으나 진독수는 이를 거부하였다. 진독수는 결국 모택동에 의해 당의 지도적 위치에서 끌어내려졌으며, 1929년 중국공산당에서 축출되었다. 1932년 국민당에 의해 체포되어 1937년까지 감옥에서 보냈으며, 이후 1942년 쓰촨 성에서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별다른 정치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2. 진독수의 사상(1)반전체주의와 좌익자유주의진독수는 정치에 대한 ‘최후견해’에서 반소-반공의 자산계급적 민주관을 견지하는 가운데, 무산계급 전정과 사회주의 제도가 지닌 결함을 과감히 비판하면서, 스탈린체제를 파시즘체제와 똑같은 독재체제로 간주하며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중공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경에서 발행되는 신화일보를 통해 특별히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는 레닌의 논문을 번역 게재하고, “이번 대전도 지난번 대전의 재연으로, 제국주의자들 사이의 전쟁에 불과하다” 고 매일같이 선전했다. 그러나 진독수는 이러한 논조에 단호히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히틀러를 찬성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데 사실상, 이론상 결코 그 태도가 모호하거나우유부단해서는 안 된다. 히틀러를 반대하탈리아라는 파시즘 체제의 두 개의 축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소련을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즘국가와 동일시하여 “소련, 독일 ,이탈리아 등을 파시즘 체제”로 규정지었다. 그는 “스탈린의 모든 죄악은 곧 무산계급 독재의 논리적 발달로 말미암아, 10월혁명 이후 소련에서는 분명히 독재체제가 스탈린을 낳았지, 스탈린이 독재체제를 낳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련의 무산계급 전정과 사회주의 제도는 반드시 독재자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스탈린을 히틀러와 동일시했고, 소련의 사회주의제도를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제도와 동일시했으며 소련의 무산계급 전정을 독일의 파시즘통치와 동일시했다.진독수는 소련이 10월혁명 뒤 공허하고 추상적인 용어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의 구체적인 민주주의 건설을 위한 무기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즉, 스탈린의 소비에트 정부는 바로 이러한 실천의 결과였으며, 스탈린의 모든 범죄 또한 이러한 독재체제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스탈린의 어떤 범죄도 비밀경찰, 일당독재, 사상 출판 파업 선거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과 같은 독재적이고 비민주적인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행될 수 없다고 보았다. 분명히 소련정책의 모든 실책에 대한 책임은 독재체제를 생산한 스탈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를 낳은 그런 독재체제에 있다는 것이었다. 진독수는 매우 의지가 강한 위인이었다. 북경대학의 사우들이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도록 권유했을 때, 그는 이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비록 당으로부터 추방을 당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참된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위하며 매우 굳센 기개를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동시에 굳센 민족적 자존심과 명확한 민주사상을 갖고 있었다.(2) 대중민주주의론진독수는 독재체제의 발생근원인 체제의 구조적 모순성을 검토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제시했다.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를 생산한 그 같은 독재체제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푸는
    인문/어학| 2015.10.26| 5페이지| 1,000원| 조회(188)
    미리보기
  • 동아시아의 언어와 민족
    동아시아의 언어와 민족동아시아는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된 대륙으로 아시아 인종의 남방계에 속하는 민족이다.주요 민족으로는 약 10억 의 漢民族(한민족)과 약 1억의 일본민족, 약6000만의 韓民族(한민족)이 있다. 분포지역은 주로 타이완 본토의 중앙 산지와 동부 협곡 및 란위[蘭嶼:紅頭嶼] 등이다. 이들은 분포지역에서 오는 문화의 차이와 방언(方言)에 따라, 타이얄(아타얄)·사이샤트·부눙·사우·쩌우·루카이·파이완·퓨마·아미·야미 등의 10개 종족(種族)으로 분류된다.고산족은 타이완의 원주민으로 인구는 약 33만 명(1990)이다. 중국에서 통용된 명칭으로, 산포(山胞)라고도 한다. 인도네시아로부터 최초로 타이완에 건너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淸)나라 때는 중국 문화의 수용 정도에 따라 고유문화를 보유한 부족을 생만(生蠻:生蕃), 한족(漢族)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여 한화(漢化)된 부족을 숙만(熟蠻:熟蕃 또는 平?族)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모두 숙만이라고 한다. 한편, 일제강점기(l895∼1945)에는 고사족(高砂族)이라고도 하였다.만주족은 중국 북동지방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퉁구스계의 민족으로 퉁구스족중에서도 청조(淸朝)를 세우고 그 지배층이 된 남방(南方) 퉁구스족에 속한다. 역사상 나타나 있는 숙신(肅愼) ·읍루(?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등은 만주족의 전신(前身) 또는 같은 계통의 종족이다. 형질(形質)은 몽골로이드계로서 키는 비교적 작고 단두형(短頭型)이 특징이다. 만주라는 명칭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문수의 음(音)이 전화한 만주(曼珠→滿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명대(明代)의 여진인의 수장(首長) 중에는 문수(文殊:滿住)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다. 만주족의 사회는 1920년대, 30년대까지 모쿤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부계적 씨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모쿤은 어느 한 남자를 시조로 하는 5대에서 9대 정도까지의 부계친(父系親)과 그들의 아내로 구성되며, 그 성원은 비교적 근접하여 생활하고, 씨족장(氏族長)에 의하여 통솔되어 가벼운 범죄나 민사사건은 내부에서 처리되었다. 또, 이 조직은 샤머니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알타이계제족은 유라시아 지방의 알타이 지방에 널리 분포한 알타이 제언어를 말하는 여러 민족으로 투르크족 ·몽골족·퉁구스족·만주족등이 이에 속한다. 몽골족, 즉 할하족·칼미크족·부랴트족등에게 가장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몽골로이드인종군(群)에 속한다. 알타이계 제족이 분포하는 지역의 태반은 초원과 사막의 건조한 평원이기 때문에, 자연환경은 농경에 적합하지 않다. 대부분의 생업은 유목이지만, 투르크족의 일부 및 만주족은 농경을, 퉁구스족의 일부는 어로를, 투르크계 야쿠트족의 소수는 우마(牛馬)와 토나카이의 사육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전형적인 유목문화는 투르크계의 키르기스족 ·카자흐족및 몽골계의 할하족 ·칼미크족 사이에서 볼 수 있다. 종교 ·사회적 제행사가 빈번이 행해지는 때는 겨울이다. 키르기스족과 같은 산악 유목민은 1년 내내 골짜기와 산속을 왕래하지만, 이에 비하여 초원의 유목민은 풀과 물을 찾아서 대단히 먼 곳까지 이동한다. 몽골족의 경우 왕족이 이끄는 캠프의 텐트 수는 50개에 달한다. 옛날에는 몽골족의 캠프가 군대방식으로 조직되었으나, 중국인과의 접촉에 의하여 약간 변화하였다. 식량은 양 ·소 ·말 ·염소 ·낙타고기 ·젖과 주위의 농경민으로부터 얻는 곡물 등이다. 또한 이들 가축으로부터 양모 ·피혁 ·유주(乳酒) 등을 얻는다. 몽골족이 사용하는 텐트는 유르트라고 하여 격자(格子) 틀로 된 원형의 것이다. 몽골족의 종교는 토착 샤머니즘과 칭기즈칸이전에 이미 중앙아시아에 퍼지기 시작한 불교이다. 원격 지역에서는 샤머니즘의 의례가 해질녘에 행하여지며, 부랴트족 ·외몽골에서는 지금도 직업적 샤먼이 존재한다. 퉁구스족에는 일부 그리스정교도(正敎徒)가 있지만 대부분 샤머니스트인 자연숭배자이다. 키르기스족에는 이슬람교신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샤머니즘 ·조상숭배의 토착적인 종교체계를 가진다.몽골족은 몽골고원 및 그 주변에 사는 몽골어군 민족이며 총인구 250∼300만이다.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의 약 80만, 중국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의 약 150만이 그 주류를 이루며, 코브드 지방, 카스피해(海) 연안, 간쑤성[甘肅省] 등지에도 분포한다. 그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는 내 ·외 몽골의 할하족(族) 및 차하르족(族) 등이다. 원래 고원 북동부의 초원과 삼림이 상접한 지대에 살면서 반목반렵(半牧半獵)생활을 하였으나, 9세기 중엽 이래 점차 남하하여 전형적인 기마유목민(騎馬遊牧民)이 되어 부족국가를 세웠다. 그 뒤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원나라 붕괴 후 많은 봉건적 제후국(諸侯國)으로 분열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몽골은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21년 몽골인민공화국을 세웠다. 현재의 공산정권하에서도 전통적인 습속은 남아 있으나, 과거의 유목생활을 버리고 정착하여 농목업 등을 영위한다.동아시아에서는 집약적인 벼농사 중심의 농업이 발달하였다. 그 밖에 남서부에는 먀오[苗] ·야오[瑤] ·이[彛] ·좡[壯] ·리[黎] ·모소 등의 종족이 있으며, 일부는 한민족(漢民族)과 반동화(半同化)되고, 또 어떤 민족은 미개화의 상태로 남아 있다. 북동부에는 만주족(滿洲族)과, 퉁구스족의 골드 ·다후르 ·오로치 ·솔른이 대싱안링·소싱안링을 중심으로 변경 산지나 물가에 살고 있다. 유목 또는 어로가 주업이고 일부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샤머니즘을 많이 믿는다.한반도의 한민족(韓民族)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일본열도의 일본인도 일본어를 사용한다. 이들 언어와 동일계통으로 추정되는 언어로는 알타이제언어(諸言語)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3개 어군(語群)으로 구성된다. 3개의 어군에는 몽골어, 퉁구스, 투르크언어가 있다.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이라고 말해 왔지만, 알타이어족의 대표 언어인 몽고어나 터기어와 한국어는 발음과 어휘가 전혀 다르고 문법적으로도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계통의 언어로 보기 곤란한 점도 있다. 세계적으로 주격 조사가 있는 언어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한국어와 일본어, 드라비다어, 그리고 전혀 매치되지 않는 메소포다미아 문명을 만든 수메르 인들의 언어에도 주격조사가 있으며 언어의 어순이 같고 문법이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퉁구스 어군을 혹은 만주-퉁구스어라고도하며 예니세이강에서 동쪽의 동부 시베리아·중국 둥베이지방에 널리 분포하며, 사용하는 사람도 30만이 넘고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만주어도 이 어군에 속한다. 사용민족은 에벤크족과 에벤족, 만주족이고, 다시 이 어군을 세분하면 남방어파(만주어파)로 만주어·골디어(Goldi)·울차어(Olcha)·오로키어(Oraoki)·우데헤어(Udehe)·오로치어(Orochi)의 6개 언어와 북방어파(퉁구스어파)로 네기달어(Negidal)·에벤키어(Evenki)·라무트어(Lamut)·솔롱어(Solon)의 4개 언어가 있다.
    인문/어학| 2011.05.18| 3페이지| 1,000원| 조회(222)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04일 월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0:08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