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미국혁명1. 미국독립혁명의 배경과 원인1) 영국인들의 미국진출1492년 8월 3일, 이사벨 1세의 지원을 받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항해를 떠났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같은 해 10월 12일 현재의 북부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오래 시간이 지난 16세기 후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유럽 국가들은 각각 이 땅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제임스타운 식민지)에, 네덜란드는 뉴 네덜란드에, 영국의 퀘이커 교도들은 펜실베이니아에, 청교도들은 뉴 잉글랜드지방에, 그리고 미국으로 오는 대신 자유를 얻은 영국의 범죄자들은 조지아에 각각 정착하게 된다.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34년에 뉴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이주해온 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스의 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남부 곳곳에 이주했다.1674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하였으며, 뉴 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하였다. 이들 각 주는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2) 영국의 식민지정책 변화1763년, 7년 전쟁)의 결과를 논의하는 파리감시를 위하여 영국군이 상주하고, 그것을 위한 경비는 식민지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다음으로 중상주의의 강화 겸 제국 유지비용을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 대해 조세 정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설탕법, 당밀법 등으로 당밀, 설탕, 철, 소금 등의 수입품에 대해서 관세를 부과하였으나 간접세인 탓에 큰 반발이 따르지는 않았다.문제가 된 것은 1765년의 인지세법인데, 이는 신문, 일간지, 트럼프 카드 등 미국 식민지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는 간접세지만 관세가 아니라 내부세 라는 점에서 식민지인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는 구호를 내걸고 영국의 과도한 조세 정책에 반발하였다. 즉, 미국 식민지에서는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낸 적이 없으니 이러한 법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인지세법이 간접세의 추구라는 조세 원칙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인지세법을 철폐하였다.그러나 1767년 발표한 타운센드조례에서 본국에서 수입하는 필수품인 유리, 차, 종이, 페인트, 납 등에 대한 관세를 올리자 식민지인들은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조직했고, 이는 1770년대 초의 차 불매 운동으로 절정에 달한다. 영국 정부는 타운센드조례에 항의하는 반란을 통제하기 위해 보스턴과 뉴욕에 약 4천의 군인을 주둔시켰고, 1770년 3월 5일 보스턴 학살)이 일어났다.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어 마침내 1773년에는 미국 독립 전쟁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였다.3) 보스턴 차 사건1765년의 인지조례와 1767년의 타운센드조례는 의회 대표가 없는 식민지에도 과세하기로 한 영국의 결정과 관련하여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영국에 저항하던 대표적인 인물인 존 핸콕)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중국산 차에 대한 불매 운동을 조직하였고, 곧 판매량은 급감하였다. 존 핸콕을 비롯한 밀수밀수업자들은 파산을 면치 못할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다.미국의 대부분의 항구에서는 동인도 회사의 차를 실은 배의 하역을 거부하였으나, 보스턴에서는 영국 정부가 임명한 총독인 토머스 허친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배에 실려 있던 차가 하역되기 전날인 1773년 12월 16일 저녁, )새뮤얼 애덤스의 주도하에 세 집단으로 구성된 50여명의 보스턴 주민들은 모호크족)으로 변장하고, 수 백 상자의 차가 실린 세 척의 배에 올라총 342개의 상자(당시 £10,000의 가치)를 부수어 바다로 던졌다.2. 미국독립혁명의 경과1) 1, 2차 대륙회의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보스턴 항구의 봉쇄와 매사추세츠 주의 자치 선거 금지를 비롯한 일련의 강압적인 조치를 취했다.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영국의 보복조치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버지니아의 제창으로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 55명이 모였다. 이 회의의 목적은 식민지의 자유와 자치 회복, 권리 선언 및 대륙 연합의 결성이었다.이들은 1774년 10월 14일에 ‘권리와 호소의 선언’을 채택하여 영국 의회의 식민지에 대한 모든 입법은 식민지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식민지 의회의 동의를 거치치 않은 영국군의 주둔 역시 불법이라고 단정하였다. 이어서 10월 18일에는 ‘대륙 협정’을 맺어 그때까지 자발적으로 행사됐던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강제적인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영국정부가 제정한 법들이 철회되지 않을 경우 이듬해 5월 다시 대륙회의를 소집하기로 하고 10월 26일 해산했다.그러나 그 해 영국의회는 퀘벡조례를 제정하고, 캐나다 서쪽 지역을 확대, 이 지역의 프랑스인을 위하여 가톨릭교를 승인하였다. 이를 계기로 여러 식민지에서는 자신들의 자유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 ‘자기 방어를 위한 개인의 무기 소지’를 인정하고 민병대를 조직하여 훈련시키고 군수물자를 모으기 시작했다.영국 제국과 13개 식민지의 대립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아 1775년 4월,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 제퍼슨의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작업을 수행했다. 제2차 대륙회의는 1775년 5월부터 미국의 사실상 연방의회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 제2차 대륙회의부터를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본다.2) 독립선언 발표독립전쟁이 진행 중이던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는 토머스 제퍼슨)이 쓴 ‘독립선언서’를 채택하여 독립해야 할 이유를 내외에 천명했다. 이 독립선언문은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 자유·행복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를 지니며, 정부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해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수립된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그러한 목적을 파괴하는 경우 피치자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했다. 미국 독립 선언에는 자연법에 근거한 인권의 주장), 사회 계약설)에 의한 정부의 구성 등 당시 미국 독립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의 사상이 대변되어 있다.3) 독립전쟁의 결과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원하는 애국파와 영국을 지지하는 충성파로 갈라졌으니 식민지인의 다수는 애국파를 지지했다. 초기의 전세는 독립군에게 불리했지만, 1778년에 사라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의 첫 승리가 이루어졌고,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것을 명분으로 프랑스의 참전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의 오랜 적대 세력이었던 프랑스가 참전하고(1778),스페인과 네덜란드도 가담했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중립을 선언하며 영국에 대항했다. 이러한 유리한 국제정세와 지원 하에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와 독립군 연합부대가 영국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한다. 영국측은 전쟁에 지쳐 1782년 평화를 원하게 되었으며, 교전 각국의 의도가 일치하지 않아 강화조약은 시간이 걸렸으나 1783년 파리조약이 성립되었다. 영국은 이 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서쪽은 미시시피강, 남쪽은 동·서 플로리다, 북쪽은 오대호(五大湖)까지 이르는 미국영토가 확정되었다.3. 미국독립혁명의 결과와 영향,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독립혁명군에 의하여 공화제(共和制)가 실시되었고, 사람들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연방법·연방헌법에 나타난 보통선거 부정 등의 보수성, 남부의 흑인노예제 전개,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 무시로 대표되는) 정치적·사회적 개혁의 정돈(停頓)은 다음 시대의 과제로서 남게 되었다.2)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역사를 통틀어 가장 폭넓은 정치적 격변의 하나로 꼽히는 미국혁명은 무엇보다 국민주권의 개념을 크게 부각시켰다. 18세기 후반 북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에서는 유럽 계몽주의 정치사상이 각광을 받았다. 18세기 내내 철학자들은 정부의 권위가 오로지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했으나, 스위스를 제외한 구세계의 국가들은 아직 그 이론에 따라 군주나 귀족의 권력을 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군주 세계에서 미국은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고, 이는 미국 뿐 아니라 신·구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영국에서는 7년 전쟁 이후 성립된 미국 식민지를 중심으로 하는 제 1차 대영 제국)이 붕괴되고 인도를 중심으로 한 제 2차 대영제국)이 건설되었으며, 아일랜드에서는 자립 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인도에서도 개혁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독립의 분위기가 고무되어 1820년대에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하였다.프랑스는 루이 14세부터 휘청이던 왕실 재정에 더해, 미국의 독립전쟁 참전 및 영국과의 전쟁 비용 때문에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재정적 위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2) 미국독립혁명의 의의미국독립혁명은 기본적으로는 식민지가 독립하여 자유와 자치를 향유한 정치적이고 헌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식민지 사회 내부에서 싹트고 있던 귀족 세력에 대한 민주주의 세력의 투쟁이라는 사회적 성격이 가미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 혁명에 비하면 타파해야 할 귀족 세력이나 파괴해야 할 구체제가 약했기 때문에 사회혁명으로서의 성격은 미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독립을 쟁취하자니스트
REPORT일본은 어떻게 한국을 병합하였나1. 러일전쟁과 국제사회의 조선 지배 묵인러일전쟁은 동북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국가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일어났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했다. 두 나라는 러시아를 경계 대상으로 여겼고, 러시아가 동북아시아 시장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전쟁으로 발전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의화단사건) 이후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자,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 주요 내용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동북아시아의 이권을 양국이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압박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군사적 특권을 협상했지만 결렬되었고, 1904년 러일전쟁으로 치달았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고, 5월에는 일본제국이 대한시설강령)을 내세워,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전쟁은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 되는 양상으로 흘러갔지만, 일본은 전쟁비용의 부담으로, 러시아는 국내 정세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강화조약을 체결하기를 원했다. 러일전쟁 전부터 동북아시아 정책에서 친일정책을 폈던 미국은 두 나라의 강화조약을 중재하기에 앞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대한제국 지배를 미국이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각서를 교환했다. 곧이어 일본은 영국과도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권을 인정하는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일본과의 제 1차 영일동맹에서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우월적 지위를 갖는다고 인정하면서도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했으나, 2차 영일동맹에서는 대한제국의 독립 보장 조항이 폐기되었다.1905년 8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회담이 열렸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선 아래 일본의 전권위의 고무라 쥬타로 외상과 러시아의 전권위원 비테가 러일전쟁의 종료 협상을 벌였다. 러시아는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가지며 일본의 한국 정책에 간섭하지 않을 것’ 이라고 인정했지만,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조치를 취할 경우에는 대한제국 정부와 합의한 후 집행할 것을 약속케 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유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1906년 중반 이후 외교정책을 발칸반도 쪽으로 옮기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을 초청하지 않겠다고 일본에 전했으며, 1907년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도 만국평화회의에 참여시키지 않았다.2. 고문정치와 화폐정리사업1) 고문정치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러일전쟁 과정에서 군사행동은 물론 토지의 강제수용도 임의로 행살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제 1차 한일협약(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 체결을 강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1명을 두고, 재정과 외교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들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하면서 이른바 ‘고문정치’를 실시했다. 정치권 박탈에 이어 재정권·외교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은 다시 10월 5일 제실제도정리국을 설치하고 황실의 재산을 정리해나갔다. 일본은 재정고문, 외교고문 외에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이라는 형식을 빌려 군사고문, 경무고문, 궁내부고문, 농상공부고문 들에 일본인들을 파견해 해당 분야의 정책수립과 집행에 깊숙이 간여했다. 이들 고문관은 일본공사의 지휘 감독을 받았고, 주요 사무는 반드시 공사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도록 했다. 공사는 이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한제국의 정치·경제·외교·군사 등 주요 분야가 일본의 의도대로 운용되었으며, 이는 곧 일본이 대한제국 식민지화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2) 화폐정리사업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대장성 조세국장 출신 메가타 다네타로는 대한제국 화폐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일본 제일은행권을 통용하도록 했으며, 관세를 담당하던 총세무사를 폐지하는 등 대폭적인 재정 정리사업을 단행했다. 메가타는 1904년 11월 28일 대한제국의 전환국을 폐쇄하고 12월 말 고종 황제의 재가를 받아 일본 제일은행을 한국의 중앙은행으로 삼는 조치를 추진했다. 그 결과 일본 제일은행은 한국 정부의 세입 세출 업무와 화폐 정리에 관한 모든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메가타의 기획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정부는 1905년 6월부터 금본위 화폐제도를 실시할 것을 선언하고 7월 1일부터 구화폐인 엽전과 백동화를 금본위제에 의하여 새로 주조한 신 화폐와 바꾸도록 했다. 그러나 발표와 달리 금화보다는 일본 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지폐인 제일은행권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제일은행권은 일본의 공식 화폐인 일본은행권으로 바꾼 후에야 금화로 바꿀 수 있는 지폐였다. 하지만 일본은행권이 대한제국 내에 많이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사실상 제일은행권을 금화로 교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한편, 구백동화는 금화의 보조화로 사용될 예정이던 새 동전으로 바꾸어주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 제일은행은 구백동화를 품질에 따라 구분하여 품질이 형편없는 것은 값을 쳐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백동화가 값을 받지 못할까봐 백동화로 토지·가옥 등 부동산이나 면포 등의 상품을 사들이거나 싼 값으로 일본인·중국인에게 판매하였다. 그 결과 대부분의 백동화가 일본 제일은행 창구로 들어갔고, 한국인 상인은 현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현금 압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토지와 가옥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고, 금융 공황이 시작되었다. 파산한 많은 농민들이 도시 노동시장으로 내쫓겼으나 제대로 된 공업발달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농민들을 노동자로 흡수되지 못했고, 만주와 일본 노동시장으로 흘러가거나,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 소작농이나 농업 노동자가 되어 소작제를 더욱 부채질했다.3. 을사조약1) 체결 과정과 내용일본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대한제국을 지도·보호·감리할 수 있는 권한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뒤, 10월 27일 내각회의에서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은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라 11월 9일 한성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으로 덕수궁을 포위하고, 정부 대신들을 연금한 상태에서 11월 18일 대한제국 외무대신의 인장을 강제로 빼앗아 조약안에 찍도록 했다.조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향후 대한제국의 외교관계와 사무를 일본 정부가 감독 지휘하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치 않고서 국제 조약이나 약속을 체결할 수 없다. 둘째, 일본 정부의 대표자가 통감으로 임명되어 한성에 주재하면서 한국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독립국 지위를 상실했다.2) 을사조약 체결 이후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미국·독일·프랑스·청·오스트리아·이탈리아·벨기에·덴마크 정부에 앞으로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의 외교 업무를 대신할 것임을 통고했다. 이에 따라 11월 25일 미국이 맨 처음 주한 공사관을 철수한 데 이어 영국, 독일, 프랑스, 청 등이 공사관을 철수했다.을사조약 강제 체결의 진상은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실은 《시일야방성대곡》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1905년 11월 30일 참찬 이상설은 서울 종로에서 군중집회를 열어 조약 체결의 진상을 밝히고 조약 무효를 주장했으며, 서울의 상인들은 철시 투쟁을 감행하고 신식 학교 학생들을 동맹휴학을 벌였다. 11월 말부터 12월까지 수십 명의 전·현직 관료와 유생들은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5적)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으며, 1906년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의병 투쟁이 일어났으며, 1907년 3월에는 나인영·오기호등이 암살단을 조직해 을사5적을 처단하려고 시도했다.을사조약의 내용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 관련 부서를 없앤 일본은 천황 직속으로 한국 통감부를 설치했는데, 통감은 외교권만이 아니라 군령권마저 쥐게 했다. 1906년 2월부터 통감부와 이사청의 공식 업무가 개시되었는데,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다. 그는 차관의 도입, 보통교육의 보급, 지방경찰의 확장 등의 재가를 황제에게 강요했으며, 이어서 통신 업무와 세금 징수까지 관장했으며 산하에 철도 관리국을 두어 경부철도를 매수하고 통감부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취해 조선의 철도는 모두 통감부에서 관리하게 했다. 이어 기존의 고문관·참여관·보좌관·고문경찰 등도 통감부의 지휘를 받게 했다. 고종이 을사조약의 강요와 통감부 지배에 항의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사실이 드러나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의 폐위를 단행했다.(1907)4. 정미7조약1907년 7월 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 조약안을 이완용의 매국 내각으로부터 협조를 얻어, 전혀 수정하지 않은 채로 7월 24일 밤에 통감의 사저에서 이완용과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체결했다. 그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 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고,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도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도록 하며, 이 조약에 근거해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고위 관료를 임명하거나 파면할 수 없었고, 통감이 추천하는 관리를 임명해야 했다.또한, 정미7조약에는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의 법적 근거로 3개 조항의 비밀각서가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및 사관의 양성에 관한 건, 군대 해산 이후 장래 징병법을 반포하고 유력한 군대를 조직, 사관 양성을 계속하는 건 등이며, 군대 해산을 실행하기 전까지 이 내용을 비밀에 부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 결과 일본인에 의한 차관정치(次官政治)가 실시되어,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 등의 열강으로부터 외침이 있을 때에 아무 방책이 없는 무방비의 상태로 노출되게 되었으며, 군대 해산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는 무장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5. 한일 병합 조약)
Report십자군 원정의 의의에 대하여1.십자군 원정의 의의에 대한 입장들1) 십자군 전쟁을 유럽의 근대화가 이뤄진 계기로 보는 입장.서기 1000년경을 넘으면서 유럽사회는 내적인 질서와 균형을 회복하였고, 팽창하는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분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유럽의 라틴 기독교 문명권은 당시에 주변에 존재했던 문명권 - 비잔티움, 아랍 - 과 달리 거친 전사 지배층이 군림하고 있던 덜 문명화되고, 열등한 문화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들 전사지배층은 비상한 활력과 에너지를 결집하여 무모하기까지 한 대외팽창을 시도했다.십자군 운동이 바로 그 표현이었는데, 봉건지배계급은 그들의 활동무대를 넓혀 더 많은 봉토를 획득하고자 했고, 성장하고 있던 도시의 상인은 더 확대된 시장과 동방의 물산에 주목을 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대규모의 군사적 원정은 교회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개혁교황에 의해 종교적 권위를 안정시킨 교회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정신적, 정치적 권위를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교회는 한편 봉건영주들의 지속적인 전투행위의 물길을 돌릴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이슬람 세계의 지배아래 있던 성지회복을 주목하게 되었다. 유럽세계는 이례 없는 종교적 정열에 불타 13회에 걸친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물론 십자군 원정은 성지탈환이라는 원래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유럽 사회의 내적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과 이슬람세계의 선진문명을 경험한 유럽인의 시야가 확대되었고, 이들 문명권으로부터 고대의 지적 유산과 동방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장기간의 원정 끝에 봉건귀족의 다수가 몰락하고, 여러 곳, 특히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동방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운동의 실패에 따라 교황권의 권위도 실추하게 되었다. 중세후기의 거대한 사회변동이 전개되는 하나의 동력이 이 원정에서 마련되었다.십자군 원정은 정신사적으로 보아 유대인의 출애굽기나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전쟁, 로마제국의 멸망, 종교개혁이나 프랑스 혁명같이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들의 생활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12세기의 십자군 전쟁은 오리엔트 세계에 대응하는 서양의 일체감을 처음으로 의식 속에 불어넣었다. 동방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감정은 서양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문화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이를 두고 “그 이후로 우리는 옥시덴트(서양)에 속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2) 십자군 전쟁을 단순히 변방의 싸움이라고 보는 입장.많은 이슬람교도들은 중세에 이슬람 세계 동쪽의 레반트 지역으로부터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전쟁을 십자군의 전쟁으로 본다. 특히 그들은 중세 유럽의 성지 탈환을 위한 레반트와 이집트 침입에다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전쟁을 십자군 전쟁으로 보려고 한다.유럽 사가들이 십자군 운동이 정치, 경제, 종교적 갈등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였다고 보는 반면, 이슬람 사가들은 종교적 갈등 때문에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다고 본다. 이슬람교도들은 십자군 운동을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분쟁에서 이슬람의 확산에 대한 기독교도의 최초의 반격이며 침략이라고 생각한다.이슬람 세계는 십자군의 잔인함과 무질서, 무지에 대하여 분노하기는 하였으나, 이 십자군 운동을 레반트 지방과 이집트 등 십자군이 침입한 지역을 빼고는 이슬람 세계의 변방에서 일어난 이교도의 침입 정도로 알고 있었으며, 실질적으로도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에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의 결과 지중해를 통한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교역이 증대되었으며, 이슬람교도 치하의 비 이슬람교도 소수 집단의 처지는 영구적으로 약화되었다3) 십자군 전쟁이 아랍 문명의 종말을 고하게 되는 원인의 하나였다는 입장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십자군 전쟁을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성지 탈환 운동으로 보기보다는 유럽인의 이슬람 세계 침입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십자군의 침입을 레반트 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유럽의 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침입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근세 유럽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모든 침입도 십자군 활동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슬람 세계에 대한 외부 세력의 모든 침입은 십자군 운동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아랍인들은 십자군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분명한 ‘결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프랑크인들이라는 존재가 그것을 드러나게 했고 더 악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의 결함이란, 확실한 제도를 구축할 수 없었다는 것인데, 군주가 죽으면 항상 그 권력이 위협 당했으며, 무슬림 국가치고 계승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또한 프랑크인들이 들어올 즈음에 그들의 문화적 부흥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과거에 얻은 것에 만족하며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십자군 전쟁이 서유럽에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진정한 혁명을 일으키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동방에게 이 성전은 오랜 쇠락과 암흑의 계기로 내몰리는 계기였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던 무슬림들은 몸을 도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겁을 먹었고, 방어적이었으며, 너그럽지 못했고, 메말라 갔다. 다른 세계가 발전함에 따라 이 태도는 점점 심해졌고, 그 결과 그들은 변방으로 밀려났음을 느끼게 되었다.2. 각 론에 대한 평가1) 십자군 원정은 무질서, 약탈, 학살, 소년 소녀 십자군을 노예로 매매 등 추악한 일면을 드러냈으며, 시종일관 동서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가 늘 깔려 있었다. 이런 십자군 운동의 추악한 면과 궁극적 실패는 기독교의 확산을 좀 더 영적이고 정신적이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교회는 칼로써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는 평화의 메시지로서 승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기독교도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위대한 종교적 열정을 함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지와 옛 기독교의 땅을 회복하려는 명예로운 원정이었다. 또한 십자군 운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당시 유럽보다 앞서 있던 동방과의 접촉과 교류는 유럽이 중세의 긴 잠에서 깨어나,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고, 유럽의 문명이 세계를 제패하는 근세의 기초가 되었다.이와 같이 명예롭고, 진취적이며, 개척적인 원정은 후일에 그 개념이 확대되어 이교도가 점령하고 있는 땅을 기독교도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활동이 십자군 운동 또는 전쟁으로 간주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유럽의 십자군 운동에 대한 개념은 유럽 문명이 세계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세계의 십자군 개념으로 확산되었다.19세기 이후에 십자군 운동이 서구 문명의 수호이며, 이슬람 세계에 세워진 십자군 왕국들이 서구 문명의 전초기지라는 사고에 도전하여 그것은 식민제국주의의 한 형태이며, 그 왕국들은 불안정한 서구 식민기지였다는 식의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유럽에서 흘러내려오던 십자군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크게 바꾸지 못했으며, 기존의 관념은 대다수 유럽인들의 관념으로 유지되었으며, 그런 관념을 받아들인 우리도 그런 사고를 그대로 유지하였다.2, 3)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이 장악한 지역을 다르 알-이슬람으로 보고, 이슬람화가 되지 않은 지역을 다르 알-하르브로 보면서, 이슬람교도는 다르 알-하르브 지역을 다르 알-이슬람 지역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길을 가야하는 이슬람교도의 의무로 알았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이 절대 옳은 정의로 생각하면서 일단 다르 알-하르브 지역이 다르 알-이슬람 지역으로 바뀌면, 그 땅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그 이후에 다른 종교가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은 침입으로 간주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에서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수행된 레콩끼스타는 그들에게는 침입이지 재탈환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상 이슬람은 기독교 지역을 이슬람화하면서 성장하였으나, 과거의 역사는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고, 현재 자신들의 땅이 된 곳은 이슬람의 땅이었던 것이다.11세기 말 이슬람 제국의 확장이 멈추면서 ‘지하드’ 이상은 영향력을 잃었고, 투르크멘족의 소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의 동쪽 변방 지대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었다. 그러나 십자군의 침입이 레반트를 향하면서, 12세기 중엽부터 이슬람교도들이 이들의 침입을 물리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그들의 반격을 조직화하면서 지하드 사상은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이슬람 지배자들의 정책의 한부분이 되었다. 그들의 지하드 사상은 기독교의 성전이 억압받은 기독교들과 성지를 해방하는 방어적인 수준인데 반하여, 이슬람 세계를 방어할 뿐 만 아니라, 이교도들이 이슬람의 계율을 인정할 때까지 싸우면서 이슬람 세계를 확장하려는 공격적 개념이었기에, 기독교와 싸우는 이슬람 지배자에게는 필요하고도 유용한 정신적 무기였다.
Report일상생활에서의 한글 맞춤법 오류와 대안Ⅰ. 서론누구나 한번쯤 맞춤법이 잘못되었다고 누군가에게 지적하거나, 지적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적당한 사람도, 지적 한 사람도 민망해 하는 상황이 대부분인데, 맞춤법이 틀렸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민망해 한다는 것은 10년 이상 한국어 교육을 받았으면 당연히 맞춤법 정도는 올바로 써야 한다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맞춤법을 자주 틀리는 걸까?최근 한 구직정보 사이트에서 대학생 천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평소 한글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는가?' 라는 주제의 설문에서, 92.2%가 ‘우리글을 제대로 쓰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고 응답했으며, 그 중 '맞춤법' 과 '띄어쓰기' 가 50%를 차지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하루에도 수십만 건의 텍스트가 생겨나고 있는 요즘, 우리는 필연적으로 적게는 수 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까지의 문장 혹은 문단을 작성하게 된다. 과연 그 중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적절하고 올바르게 사용 된 문장은 얼마나 될까?또, 같은 조사에서 '맞춤법 실수를 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선택한 것은 '맞춤법이 어려워서' 라는 항목이었다. 12년 간 국어 교육을 받았음에도 한글 맞춤법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기억을 돌이켰을 때, 국어 혹은 언어 과목의 수업 내용에서 맞춤법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많지 않았음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교육과정 내내 모국어에 대해 배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모국어를 올바르게 쓰는 방법' 은 어영부영 넘어간 채 문학작품의 주제와 작가의 의도 따위를 외우는 데에만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맞춤법에 대한 것들을 예전에 배운 기억이 또렷하지 않거나, 어느 부분의 맞춤법이 왜 틀렸는지조차 잘 모른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어째서 이러한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이며 우리가 자주틀리는 맞춤법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맞춤법을 올바르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해 것이다. 이때의 '어법'이란 어간이나 어근을 고정해 표기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여 표기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형태소의 기본형을 밝혀 적는(끊어 적는) 경우, 어원이나 의미상으로 어간 및 어근과의 연결성이 유지되는 경우와 어미나 접미사가 생산적인(파생어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생산성이라고 한다.) 경우를 충족해야 하는데 위의 두 가지 요건을 다 갖춘 경우에 끊어 적기를 선택하고 둘 중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으면 이어 적기를 선택한다는 이 원칙이 바로 '어법'인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① '국물'이란 단어는 '국'과 '물'의 합성어이므로 각각의 형태소를 밝혀 적는다.② '같이'나 '굳이'의 경우 '-이'가 생산적인 부사 형성 접미사이고 '같-'과 '굳-'에 '동(同)'과 '고(固)'의 의미가 유지되기 때문에 끊어 적는다.③ ''끄트머리'의 경우 '끝'은 '단(端)'의 의미를 유지하고 있으나 '-으머리'라는 접사가 생산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어 적는다.그런데 위에서 말했던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함에도 이어 적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불규칙 활용형이라고 하여 어간의 변이형을 표기에 반영하는 것이다. 즉, '곱다'의 경우 '곱고, 곱으니'가 아니라 '곱고, 고우니'로 적는 것이다. 이 경우 '고우니'에서 어간 형태소를 유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적용되는 원칙, 즉 '소리대로'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곱으니'라 써 놓고 [고우니]로 발음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어법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대로'를 먼저 지켜서 표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글 맞춤법'에서 우선시하는 것이 표음주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정리하면, '한글 맞춤법'의 원리는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을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하는 데 있어 어법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적고, 어떻게 적든지 뜻을 파악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면 소리대로 적는 것이다.2. 자주 틀리는 한글 맞춤법1) 소리와 형태에 관한 잘못된 맞춤, 연결형에서 사용되는 '이요'는 '이요'로 적는다.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다.)(3)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① 그 귀걸이는 내 것이 아니다. (O) 그 귀거리는 내 것이 아니다. (X)② '김철수 만듦' 이라고 적혀 있다. (O) '김철수 만듬' 이라고 적혀 있다. (X)→ 어간에 '- 이'나 '- 음/- ㅁ'이 붙어서 명사로 된 것과 '- 이'나 '- 히'가 붙어서 부사로 된 것은 그 어간의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③ 나는 차마 말릴 수 없었다. (O) 나는 참아 말릴 수 없었다. (X)④ 배고픔을 참아 왔다. (O) 배고픔을 차마 왔다. (X)→ '-이'나 '-음' 이외의 모음으로 시작된 접미사가 붙어서 다른 품사로 바뀐 것은 소리대로 적는다. ③의 '차마'는 부사이고, ④의 '차마'는 동사이므로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⑤ 반듯이 서라. (O) 반드시 서라. (X)⑥ 그는 반드시 돌아온다. (O) 그는 반듯이 돌아온다. (X)→ '- 하다'가 붙는 어근에 '- 히'나 '- 이'가 붙어서 부사가 되거나, 부사에 '- 이'가 붙어서 뜻을 더하는 경우에는, 그 어근이나 부사의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반듯하다(正, 直)'의 '반듯-'에 '-이'가 붙은 '반듯이(반듯하게)'와 '반드시(必)'는 뜻이 다른 단어다.(4) 합성어 및 접두사가 붙은 말① 부엌일은 이제 싫증이 난다. (O) 부억일은 이제 실증이 난다. (X)→ 둘 이상의 단어가 어울리거나 접두사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은 각각 그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② 꺾꽂이에 취미를 붙였다. (O) 꺽꽂이에 취미를 붙였다. (X)→ 둘 이상의 어휘 형태소가 결합하여 합성어를 이룰 때, 그 사이에서 발음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실질 형태소의 본 모양을 밝히어 적음으로써,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꺾꽂이'는 '꺾다, 꽂다'란 뜻이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꺽꽂이, 꺾곶이'로 적지 않는다.③ 사과에 잇자국이 선명하다. (O) 사과에 이자국이 선명하다. (X)→ 순 우리말로 된 합성어로서 앞말이 모음으로 규칙성이 제시될 수 있다.- '이'로 적는 것 : (첩어 또는 준첩어인) 명사 뒤, 'ㅅ'받침 뒤, 'ㅂ'불규칙 용언의 어간 뒤, '-하다'가 붙지 않는 용언 어간 뒤, 부사 뒤- '히'로 적는 것 : '-하다'가 붙는 어근 뒤 (단, 'ㅅㅅ'받침 제외), '-하다'가 붙는 어근에 '-히'가 결합하여 된 부사가 줄어진 형태그러나 이 규칙이 모든 경우에 반드시 적용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③ 아마 그게 제일 맛있을 걸. (O) 아마 그게 제일 맛있을 껄. (X)④ 집에 일찍 들어갈게. (O) 집에 일찍 들어갈께. (X)→ 의문을 나타내는 어미를 제외한 '-(으)ㄹ걸', '-(으)ㄹ게' 등의 어미는 예사소리로 적는다.⑤ 지난 여름은 어찌나 덥던지. (O) 지난 여름은 어찌나 덥든지. (X)→ 지난 일을 나타내는 어미는 '- 더라, - 던'으로 적는다.⑥ 먹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O) 먹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해라. (X)→ 물건이나 일의 내용을 가리지 아니하는 뜻을 나타내는 조사와 어미는 '(-)든지'로 적는다.2) 단어를 잘못 알고 있는 맞춤법 사용 예① 너의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다. (O) 너의 말을 들으니 어의가 없다. (X)→ '어이'는 어처구니와 같은 뜻이다.② 검은 옷이 무난할 것 같아. (O) 검은 옷이 문안할 것 같아. (X)→ '무난하다' 는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다.③ 과자보다 과일이 낫다. (O) 과자보다 과일이 낳다. (X)④ 오빠, 빨리 나으세요. (O) 오빠, 빨리 낳으세요. (X)→ ③의 낫다는 "-보다 더 좋거나 앞서 있다" 는 뜻이고, ④의 낫다는 "병이나 상처 따위가 고쳐져 본래대로 되다"의 뜻이다. 틀린 예의 '낳다' 는 "어떤 결과를 이루거나 가져오다" 혹은 "배 속의 아이, 새끼, 알을 몸 밖으로 내놓다"의 뜻으로 쓰인다.⑤ 이 자리를 빌려서 사과하고 싶습니다. (O)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하고 싶습니다. (X)→ 구걸을 하거나 소망을 빌 때 이외에는 모두 '빌리다'로 쓴다.⑥ 너 참 희한한 애구나? (O) 너 참 희안. (O) 떠난지 사흘만에 돌아왔다. (X)→ 의존 명사는 의미적 독립성은 없으나 다른 단어 뒤에 의존하여 명사적 기능을 담당하므로, 하나의 단어로 보아 띄어 쓴다. 하지만 같은 형태라도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접미사나 조사로 다루어지는 경우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만'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이것은 그것만 못하다.'처럼 체언에 붙어서 한정 또는 비교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는 조사이므로 붙여 쓴다.(3)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① 차 한 대 가지고 있으면 편할 텐데. (O) 차 한대 가지고 있으면 편할 텐데. (X)②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이 있어. (O) 나무 한그루 없는 사막이 있어. (X)③ 2009년 11월 11일 제1연구실이 폭발했다. (O) 2009 년 11 월 11 일 제 1 연구실이 폭발했다. (O)→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는 띄어 쓴다. 다만, 순서를 나타내는 경우나 숫자와 어울리어 쓰이는 경우에는 붙여 쓸 수 있다.(4) 열거하는 말① 친구도 만날 겸 구경도 할 겸 간다. (O) 친구도 만날겸 구경도 할겸 간다. (X)② 한국 대 일본의 경기가 있다. (O) 한국대일본의 경기가 있다. (X)③ 과자, 과일, 식혜 등등 먹을 것이 많다. (O) 과자, 과일, 식혜등등 먹을 것이 많다. (X)→ 두 말을 이어 주거나 열거할 적에 쓰이는 말들은 띄어 쓴다.(5) 보조 용언① 불이 꺼져 간다. (O) 불이 꺼져간다. (O)② 어머니를 도와 드린다. (O) 어머니를 도와드린다. (O)③ 과일을 깎아(서) 드린다. (O) 과일을 깎아(서)드린다. (X)→ 보조 용언은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경우에 따라 붙여 씀도 허용한다. 그러나 '-아/-어' 뒤에 '서'가 줄어진 형식에서는 뒤의 단어가 보조 용언이 아니므로, 붙여 쓰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6) 고유 명사 및 전문용어① 이순신 장군. (O) 이순신장군. (X)→ 성과 이름, 성과 호 등은 붙여 쓰고, 이에 덧붙는 호칭어, 관직명 등은 띄어 쓴다.② 서울 대학교 사범 대학 부속 고등 학교 (O)이다.
이상의 작품세계-이상의 시 속 삶의 모습-1. 선정배경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이상의 문학만큼 독자를 매료하는 문학작품은 많지 않을 것이다. 채 10년도 되지 않는 활동기간 사이에 그가 남겨놓은 시와 소설들은, 거의 대부분이 지금까지도 불가해의 영역에서 수많은 다른 갈래의 해석을 마치 외피처럼 두르고 현실에서 한 발자국 물러난 채 지극히 현실적인 한 개인의 내면 -혹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다.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선뜻 감이 오지 않는 난해한 시는 그 만큼 이미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 졌고, 시가 품고 있는 진실에 최대한 가까울 것이 분명한 해설이나 평론 또한 많이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시인이나 시 자체의 생소함과는 별개로, 해설이나 비평 자체는 상당히 익숙하고 진부한 내용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상의 시에 나타나는 '거울'의 이미지에 대해서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새로운 해설을 전개 한다면 좋겠지만, 새로운 해설을 제시하기는커녕 기존의 해설을 따라가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기존에 제시되었던 해설을 바탕으로 시의 해석 혹은 해설이라는 개념 보다는 시 자체를 하나의 '이야기' 로 보는 관점에서 시에 나타난 이상의 생각이나 삶의 모습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하는 정도로 글의 목표를 설정하였다.이상의 삶이나 생각이 얼핏 엿보이는 시가 몇 편 있는데, 그 중에서도 비교적 시의 내용을 파악하기 수월하다고 생각 되는 세편을 골라 보았다.2. 이상의 시 세계1)家庭(가정)門(문)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생활)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門牌(문패)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減(감)해간다.食口(식구)야封(봉)한窓戶(창호)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收入(수입)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서리가내리고뽀족한데는鍼(침)처럼月光(월광)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壽命(수명)을헐어서典當(전당)잡히나보다.나는그냥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門을열려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시 속에서의 '나'는 문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잡아당기고, 문패 앞에서 조급해 하며 식구에게 닫힌 창호를 터 달라고 강하지 않은 어조로 말한다. 집은 마치 앓고 있는 것 같으며, 집 안에는 생활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고리에 애처롭게 매달리지만 결국 문은 열리지 않는다.이상은 태어나자마자 조부의 뜻에 의해 아들이 없는 백부의 큰아들 겸 김 씨 가문의 종손이라는 막중한 기대와 억압 속에서 자랐다. 조부와 백부와 친부 세 사람은 자신들의 못다 한 꿈-고위 관직-을 이상에게 강요해 왔고, 이상은 그러한 억압에 대해 강한 혐오와 증오를 느끼게 되었다.가족과 어울리지 못하고 마치 대문 앞에서 받아들여지길 거부당한 사람처럼, 이상적인 '가정'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을 마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어떤 희생물 즉, 제웅이라고 생각하게 된 듯하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그냥 문고리에 늘어지듯 매달려 버리고 만다. 문을 열기 위한 노력을 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그저 문이 열리기만을 바라며 문고리에 매달려 있다는 점에서 이상의 무기력함을 느낄 수 있다. 어릴 적 꿈이었던 화가를 결국 포기하게 되었던 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 詩第二號(시제2호)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이상은 조부와 백부와 친부에게서 막중한 기대와 억압을 받으며 자라왔다. 조부는 이상이 조부의 아버지 즉 이상의 증조부보다 높은 관직을 얻길 바랐고, 오히려 자신의 아들 보다 손자인 이상을 더 사랑했다. 오랫동안 자식을 가지지 못했던 백부는 이상을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생각하고 자신과 같은 방에서 살게 할 정도로 지극히 사랑했으며, 이상의 아버지는 이상의 조부나 백부처럼 이상이 관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심지서 자신을 비하시켜서라도 이상이 고위 관직에 앉길 바랐다.이런 이상의 유년기에서 미루어 보면, 온통 아버지라는 단어로 점철되어 난해해 보이는 위의 시는 오히려 다른 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느껴진다. 이상에게는 세 명의 아버지가 있었던 셈이고, 이는 마지막 줄의 '나는 왜 나와 내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의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와 같이 닮아야 할 대상이 너무나 많아서 어느 쪽을 닮아야 할지 모르게 되는 혼란을 낳은 것이다.3) 이런 詩(시)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 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危險(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라.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必是(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變怪(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悽(처)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作文(작문)을 지었도다.「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平生(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詩(시)는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