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20100112 손의연20100115 신은미20100000 김 천■ 김만중의 문학관1637년(인조 15)∼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소설가.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김선생(金船生),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본디 총명한 재능을 타고났기도 했지만 가문의 전통 등으로 인해 그의 학문도 상당한 경지를 성취하였다. 그가 종종 주희(朱熹)의 논리를 비판했다든지 아니면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든지 하는 점은 결코 위와 같은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그는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예찬론’은 주목할 만한 논설이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한문은 ‘타국지언(他國之言)’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철(鄭澈)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가사를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견주었다. 그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일종의 ‘국자의식(國字意識)’은 충분히 강조될만하며, 더구나 그가 〈구운몽〉?〈사씨남정기〉와 같은 국문소설을 창작했다는 점과 관련해 볼 때, 허균(許筠)을 잇고 조선 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믿어진다.《구운몽》은 종전까지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발견된 《서포연보(西浦年譜)》에 따르면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16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저서에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이 있다.■ 사씨남정기≪사씨남정기≫는 서포 김만중(金萬. 특히 한문으로 지었는지 국문으로 지었는지도 또렷하게 밝혀져 있어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사씨남정기≫는 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진 작품이면서도 작자 친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수많은 이본만 전해진다. 이본들의 차이는 대부분 사소한 것이라 줄거리나 주제의 차이까지 가져오지는 않아 어느 이본을 읽든 무방한 편이다.≪사씨남정기≫의 이본은 80여 종이 전하는데, 한문본과 국문본이 거의 같은 비중으로 전한다. ≪구운몽≫이 국문본과 한문본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냐, 즉 원작이 한문본이냐 국문본이냐를 두고 아직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데 비해, ≪사씨남정기≫는 국문본이 원작으로 밝혀져 있다. 종손자인 김춘택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춘택의 기록에 의하면, “김만중이 이 작품을 국문으로 지은 이유는, 일반 부녀자들로 하여금 다 읽고 외어 감동하며 볼 수 있게 한 것이었으니, 어쩌다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해, 이 작품이 국문만 아는 여성 독자층을 위해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연구의 관련해서 일찍부터 두 가지 입장이 대립됐다. 하나는 이 작품이 축첩 문제라는 당대 사회의 일반적 병리 현상을 염두에 두고 쓰인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장희빈 사건이라는 특정 정치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창작된 작품이라는 것이다.)김춘택은 작자가 축첩 문제와 관련해 일반 부녀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해 당대 사회의 일반적 병리 현상 해소에 창작 동기가 있다고 한 반면, 이규경은 인현왕후를 내친 숙종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지었다고 하여 장희빈 사건의 부당성을 일깨워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는 정치적 의도에 창작 동기가 있다고 했다. 이후 반박에 반박을 거듭하며 학자들 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작품 분석1) 선악 대립 구조에서 크게 드러나는 대립 구조는 선악 대립 구조이다. 사씨와 교씨는 상반되는 성격을 갖고, 각각 선악을 표상한다.에는 각기 개성을 지닌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갈등을 빚는다. 사씨와 교씨의 대립을 중심축으로 유연수·엄숭·동청·냉진·설매·납매다. 사씨와 교씨의 대립양상에서 그들의 관계는 교씨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진행된다. 사씨는 교씨의 시기와 음모들로 인해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 고통을 수동적으로 감내하고 있을 뿐, 그것에 저항하는 어떠한 적극적 대처도 하지 않는다. 김만중은 교씨의 일방적 공격을 통해 그 간악함을, 사씨의 인고의 자세를 통해 그 선량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대립의 결과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지막에 가서 교씨는 파멸하게 되고, 교씨의 모함으로 역경을 겪었던 사씨는 다시 복권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 그러나 교씨의 파멸은 사씨의 반격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초래한 일종의 자멸로 형상화되어있다. 사씨의 복권 역시 교씨와의 투쟁을 통해 확보하기보다는 착한 성품에 대한 조상의 음우와 천우신의 결과로 형상되어 있다. 이렇듯 사씨와 교씨의 대립은 간악한 교녀의 자멸에 이어 선량한 사씨의 구원으로 종결된다. 바로 여기에 의 기본적 구도가 놓여있다. 사씨와 교씨의 대립을 통해 선한 사씨와 악한 교씨의 행위를 드러내고, 나아가 이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의 기본구도는 악한 인물인 교씨의 파멸과 선한 인물인 사씨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2) 인물들의 삼각 대립 구조사씨남정기에서 인물 대립 구조는 삼각 구도로 설명할 수 있다. 유연수를 정점으로 사씨와 교씨의 대립을 비롯해 천자를 정점으로 한 유연수와 엄숭의 대립 같은 형태의 삼각관계가 존재한다. 유연수와 사씨, 교씨의 관계 구조에서 사씨와 교씨의 갈등은 단순한 처첩의 갈등이 아닌 선과 악의 대립을 나타낸다. 사씨와 교씨의 대립적 요소는 둘의 성격에서도 나타난다. 사씨의 성격은 우아함, 기품, 이념 지향적, 지속적, 수동적인 성격으로 나타나는데 반해 교씨의 성격은 교태와 술수, 개인적, 욕망 지향적, 즉흥적, 적극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사씨의 위기에서 사씨의 극복 방법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다. 꿈속에서 시아버지를 만나 도움을 얻고, 두 부인을위기 극복 일련의 과정은 그녀의 능동적 노력보다, 별세한 시아버지 유 소사나 다른 조력자의 도움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교씨는 비록 악행이기는 하나,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사씨를 음해하고 음모를 꾸미며 행하는 모습,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는 잔인함까지 보인다.그리고 천자를 정점으로 한 유연수와 엄숭의 관계 역시 삼각 구조를 통하여 김만중이 말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인물상, 이상적인 관계 구조, 또한 그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바람지한 국가의 모습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전체적인 소설의 전개는 두 삼각구조의 정점에 해당하는 천자와 유연수가 일시적인 혼란에 빠져 각각 부정적인 인물인 엄숭이나 교씨와 관계를 맺고 있다가, 결국 그 혼란에서 빠져나와 긍정적인 인물인 유연수나 사씨와 연계되는 것으로 쓰여 있다. 따라서 김만중은 를 통해 유교적인 부덕을 갖춘 사씨에 의해 지탱되는 가정을 바탕으로 봉건적 충신인 유연수가 천자를 보좌하는 사회체제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결국 김만중은 천자를 정점으로 한 충신과 간신의 대립의 비유로서,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사씨와 교씨의 대립을 형상화했다. 에서 처첩의 문제는 유연수와 사씨의 연계가 정통이듯이 천자와 유연수의 연계는 정통에 해당하며, 이와 반대로 유연수와 교씨의 연계가 비정통이듯이 천자와 엄숭의 연계는 비정통의 의미임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만중은 이상적인 관계와 부정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시켜 당쟁과 매관매직 등 당대의 문란한 정치현실에 대한 사대부적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봉건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3) 가정소설로써의 가정소설은 가족집단 속에서의 위치와 역할에 따른 성격을 지닌 그 구성원들의 갈등이 가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갈등이 혈연적·규범적 관계에 따라 구조화되고 궁극적으로는 가정의 유지와 번영이 추구된다. 인물들은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한 조선시대 이후 전통 가족형태대로, 혈연중심적 욕망은 부정되며, 가정적 질서와 규범에 부합될 때에만 인정된다. 또한 소설 내 모든 요소들은 가정의 유지 및 번영 문제를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가정소설이 추구하는 가치는 가정의 유지, 번영 및 그것을 위한 규범의 공고화나 재정립에 그 의미를 둔다.가정소설의 이러한 특징들을 볼 때, 는 가정소설의 모범적인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처첩 간의 가정적 갈등 중심이며, 모든 사건과 인물이 양반 가문의 유지 및 번영으로 그 의미가 집중된다. 또한 가족의 구성원인 남편과 아내의 가정으로서의 역할, 아내 및 며느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를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사씨는 유교적 가치와 규범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다. 사씨는 개인적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유교적 법도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한다. 사씨는 한 집안의 본처로서, 시부모 봉양과 남편 받듦, 그리고 제사 모시기를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하여 집안을 화평케 한다. 또한 교씨를 벌하는 장면에서 조차 가문의 위신을 생각할 정도로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유씨 가문의 며느리로서 충실한 역할을 해내는 품성을 지녔기에 '선한' 인물로 여겨진다. 사씨가 유교이념형의 인물이라면 교씨는‘반유교적 욕망형’의 인물이다. 교씨는 자기 개인 욕망 충족을 위해서만 행동하고, 능동적이며 현실적이다. 철저히 개인의 부귀영화를 탐하며 가정을 파탄 낸 교씨는 결국 그동안의 죗값을 치루며 벌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한다.전체적으로 의 작품구조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인 첩이 등장하며 열리게 되는 가정의 새로운 사건을 중심으로, 가족의 구성원들의 헤어짐-만남이 가정의 혼란-안정회복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루어져있다.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지는 가정 해체 위기는, 흩어진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제 자리를 찾음으로써 해결되고 마무리된다. 결국 가정 내에서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하며, 그 자리를 비우지 않고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도리를 깨지 않있다.
나는 이번 레포트의 주제로 박민규의 로 정했다. 박민규는 현시대에서 제일 주목받는 작가 중의 한명이고, 학회 세미나 때 박민규의 작품으로 발제한 적이 있어 친숙해 박민규의 작품을 선택했다.1. 박민규박민규는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로 2003년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곧이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제8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 일약 주목받는 작가가 된다. 작품집으로 《카스테라》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이 있다. 2007년 〈누런 강 배 한 척〉으로 제8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아침의 문〉으로 제34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선택한 작품 는 2009년 제9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2. 줄거리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나’ 정호연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던 중, 간암 말기를 선고받는다.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던 중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고향행을 선택한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묻은 타임캡슐을 찾고 추억을 떠올린다.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 중 유일한 여자인 ‘순임’과 가까워진다. ‘순임’에게 잠시 위로받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랑을 나눈 순간, 순임은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돈을 빌려주고 순임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끊고 순임이 찍어준 사진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3. 분석박민규의 문체는 다른 작가들과는 좀 다르게 독특하다는 평이 많다. 나 역시 박민규의 작품을 읽으며 그의 문체가 특별하다고 느꼈다. 개인적으로 느낀 점은 이렇다. 박민규의 작품은 술술 읽힌다. 그러나 술술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문장 자체가 어렵진 않지만 그 속에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상징을 부여했기에 그렇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 역시 읽을 때는 재밌게 읽었지만 읽고 나서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이 소설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적이다’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우선, 행갈이가 ‘나’의 다음 생각이나 심화된 생각을 보여준다. 다른 박민규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기법이다. 수미상관법도 사용하고 있다. 수미상관법은 머리와 꼬리, 처음과 끝이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다. 로 시작 된 소설은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다로 끝을 맺는다. 우리가 삶과 죽음의 근처를 배회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또한 처음과 끝, 탄생과 죽음. 삶과 죽음이 연관돼 있음을 수미상관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많은 서술 중 하나가 ‘나열’이다. ‘나’는 의식이 흐르는 대로 나열한다. 과거, 서울에서의 생활, 대화, 인물의 말조차 따옴표 없이 나열한다.스물일곱 되던 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중간에 한 번 이직을 하고 줄곧 지금까지 일해왔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건조하다 싶을 만큼 성실한 편이었다. (…) 그런, 생활이었다. 오피스텔과 직장을 오가고, 밤을 새고, 회의를 하고, 기획서를 작성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돌아와 빨래를 하고, 간단한 요리를 만들거나 경조사에 얼굴을 내밀고,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오디오를 바꾸고, 외국으로 현지답사를 떠나고, 돌아오고, 그때그때 트렌드에 맞는 옷을 구입하고, 승진을 위해 노력하고, 연봉협상에 임하고, 미용실을 바꾸고, 회식을 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잠을 자고, 일어나 샤워를 했을 뿐인데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었다. ‘나’의 삶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나의 과거 일상을 담담한 어조로 죽 나열해 놓았다. 나열함으로써 무미건조한 일상을 더 무미건조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담담한 어조는 나열된 나의 일상 속에서 내가 주체가 아닌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나의 이야기지만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들리는 것이다.그런데... 도형이 말이다, 혹 어릴 때 순임이 좀 따라다니지 않았냐? 뭔 소리냐, 걔들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데. 어, 그래? 아마 돈을 좀 떼였을 거야... 아니, 나중에 갚았다던가? 아무튼 순임이 그것도 늘 코가 석자여서... 작년 추석 때 동구가 그러더라. 그랬구나. 그년도 남편 복이 지랄 같아서... 남편이 왜? 내막을 어찌 알겠냐, 암튼 위자료도 거의 못 받고 그랬나봐.일반적으로 대화는 따옴표로 처리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따옴표 처리를 하지 않고 그냥 나열한다. 그래서 흐르듯 읽게 되고 주인공의 감정이 더 잘 전달되는 느낌을 가진다.주인공은 친구들과 함께 했던 과거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중히 생각한다. 반면, 현재의 생활은 허무하고 무미건조하다고 느낀다. 그런 그의 생각은 대조되는 서술로 알 수 있다.우거진 녹음 속에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습필(濕筆)인 양, 늘어진 두엇 가지들이 뚝뚝 젖은 그늘을 땅 위에 떨궈댄다.스산한 바람처럼 30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갈필(渴筆)인 양, 몸을 뒤집는 잎사귀들이 픽 픽 바삭한 봄볕을 눈 위에 흩뿌린다.우거진 녹음, 습필(물기가 많이 밴 붓), 젖은 그늘이라는 단어로 어린 시절을 충만했던, 생명력 있던 시절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린 시절에 대한 주인공의 긍정적인 인식을 알 수 있다. 반면, 현재 42세가 된 지금은 스산한, 갈필(먹물이 마른 상태인 붓), 바삭한이라는 표현으로 건조하고 결핍되어 있는 상태를 드러낸다. 스산한 바람처럼 30년이 지나갔다는 건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함을 표현했다.이러한 의식은 타임캡슐에 대한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수건을 깔고 그 위에, 다시 고이 몇겹의 수건을 두른다. 꽃봉오리처럼 부푼 가방의 심연에서 언뜻 시간의 수술과 암술이 하늘, 돋아난 느낌이다.시든 꽃처럼 숨이 죽어 있는 가방을 챙겨 나는 다락으로 올라왔다. (…) 바삭하고 파삭한, 녹슨 양철의 모서리들이 오래 오십견을 앓은 노인의 축 처진 어깨 같다.추억의 타임캡슐을 찾고 주인공은 설레이는 감정을 가진다. 꽃봉오리처럼 부푼 가방의 심연에서 언뜻 시간의 수술과 암술이 하늘, 돋아난 느낌이다. 라는 구절은 주인공의 부푼 마음과 생기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만월을 보며 부정적인 현실을 깨닫고 회의적인 삶을 느낀다. 그 후 타임캡슐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는 달라진다. 시든개봉한다. 그러나 친구들을 만나 현실을 알고 타임캡슐의 의미는 바래진다. 친구들을 만나고 주인공은 타임캡슐을 연 것을 후회하기까지한다. 결국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무미건조한 죽음을 맞고 싶다. 근처에 묻어두고 싶다. 주인공은 결국 절망과 고독을 느낀다.♠ 소재의 의미 분석① 타임캡슐주인공은 타임캡슐을 열고, 그 후에 호기를 우연히 만나 다른 친구들도 만나게 된다. 도형의 타임캡슐인 사진 뒷면에는 도형이가 순임과 결혼하고 싶다는 소망을 적어 놓았다. 그러나 현재는 돈 문제로 인해 둘의 사이가 나빠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 싸움대장이었지만 정이 많은 친구였던 동구는 꽃집을 운영하는 줄 알았지만 안마시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30년 전의 탑 하나가 문득 동전의 뒷면에서 허물어져 있다 라는 구절이 타임캡슐을 여는 과정에서 나오는데, 이는 이런 동구의 현상황을 암시한다. 호기의 매미 허물은 주인공에게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재다. 소설에서 죽음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매미 허물을 보고 하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순임은 바스라진 꽃이다. 물기 없이 바삭 말라 잔해가 된 꽃잎은 순임의 현재다. 순임은 주인공에게 위안이 되어주지만 결국 돈을 위한 것이였고 체념이란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한다.주인공은 친구들을 만나지만 오히려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는다. 과거에 타임캡슐을 묻을 때, 20년 후에 열어보자고 약속할 때처럼 하나였던 친구들이 현실에서는 그저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어딘가 벗어둔 소년의 허물들도 이미 서늘한 잔해가 되었을 것이다.과거의 해맑았던 아이들일 수 없는, 변한 현재를 보여주는 구절이다.타임머신은 또한 주인공의 삶에 대한 미련을 보여주기도 한다.② 나침반주인공의 타임캡슐은 나침반이다. 장례식 때 외숙이 준 것이다. 타임캡슐로 나침반과 플루타아크 영웅전을 놓고 고민하다가 나침반을 넣었다. 주인공은 인도천에서 나침반을 꺼내어 본다. 희미해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붕어는 낚시꾼에게 잡혀 파닥인다. 죽어간다. 파닥이던 붕어를 보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죽음에 저항하던 과거를 생각한다. 파닥이던 붕어는 아가미만을 들썩인다. 주인공과 붕어는 동일시되는 존재다. 죽어가는 존재이며, 죽음에 발버둥치다 받아들이고 죽어간다.④ 사진부모님의 사진, 나의 사진이 나온다. 부모님의 결혼사진, 스냅사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은 한결같이 무표정이다. 무표정한 얼굴. 경직된 표정. 집을 정리하며 나온 나의 사진도 대부분 그렇다. 삶이란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순임이가 찍어준 사진은 행복하고 환하다. 순임에게 돈을 빌려주고 전화를 끊고 ‘내’사진을 본다. ‘나’ 자신의 사진임에도 낯설다, 그남자의 삶, 그는 어디로 라고 한다. 결국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찾기에 실패하는 것이다. 사진은 삶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를 드러낸다.많은 상징이 등장한다. 먼저 이 소설의 중요 소재라 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상징이다.주인공에게 삶은 무의미하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주인공은 부모님을 일찍 잃고 숙부 손에 자란다. 숙부의 손에서 나름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그에게 외로움과 결핍은 어쩔 수 없이 항상 존재했을 것이다. 주인공은 냉소적인 시각으로 삶과 죽음을 바라본다.죽음도... 저런 걸까? 행여 삶이란 허물을 벗고,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삶은 죽음을 우려내기 위해 끓이는 뜨거운 물과 같은 걸까?번진다, 번진다 번짐이 멈춰선 그 순간 이 삶도 끝날 것이다... 다른 무엇으로, 성질이 바뀔 것이다.허물에서 벗어난 매미의 삶을 생각한다. 매미는 허물 속에 있었지만 허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뜨거운 물과 차도 완전히 다른 물질이다. 주인공은 삶을 죽음을 위한 한 과정으로까지 보기도 한다. 삶을 번져가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번짐은 물이라는 생명력이 있는 물질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점점 번져가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다. 번짐이 멈추는 순간 생명성을 잃고 죽음을 맞는 것이다. 또한.
를 읽고20100112 국어국문학과 손의연 무교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과제가 많아졌다. 한경직 리더십의 과제도 한경직 목사님의 구술 자서전 를 읽고 감상문을 쓰는 것이다. 감상문이라 생각하고 부담 없이 생각했었는데 책을 구하는 일부터 어려웠다. 도서관은 물론, 학교 주변 서점에까지 가봤지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 책이 소장되어 있어 야간이용으로 책을 볼 수 있었다.는 중간중간 한경직 목사님의 젊었을 때 사진, 가족사진 등이 있고, 세분화되어 나눠져 있고, 글씨크기가 크고 줄간격이 넓어 읽기 쉬워 좋았다. 젊었을 때 사진을 보고 너무 잘생기셔서 놀랐다. 모두 검은 계열의 옷을 입고 수업을 받는데 한경직 목사님만이 흰색 옷을 입고 수업을 받는 사진도 인상적이었다. 는 챕터마다 무엇에 대해 감사한지 기록되어 있었다. 책의 제목과 연관된 것 같다. 한경직 목사님의 어릴 적 시절부터 어려웠던 학창시절, 미국에서 보낸 대학생활, 폐결핵 투병기, 귀국해서의 생활과 목사가 된 후의 이야기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사실 나는 한경직 목사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한경직 기념관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더욱 그랬던 거 같기도 하다. 저번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설명해주실 때도 그냥 훌륭하신 분이었구나 이해되는 정도였지 와 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에피소드 하나하나 읽다 보니 와 닿기 시작했고 내가 비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감동받았다. 어머니를 여의고 그리 풍족하지 않은 가정형편으로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배움을 포기하지 않고 공부한 이야기들이 제일 감동적이었다. 나는 이 공부하기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배움을 게을리하고, 땡땡이치고 불성실하고 과제가 산더미처럼 밀리는 학생임을 스스로 알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특히 한경직 목사님의 아버지가 대단하신 것 같다. 깨어 있는 분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는 그런 교육에 대한 인시이 덜하였을텐데 배움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계신 분이었던 거 같아 존경심이 든다. 서당이 아닌 신식학교에 보낸 것도 선견지명이었다.제일 기억에 남는 일화는 한경직 목사님이 세례받을 때 일이다. 당연히 세례는 교회에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교회가 아닌 외부에서 받은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것은 ‘기독교 학교는 학생들을 전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독교 정신을 가르쳐 학생들을 좋은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 구절이 기억에 남나보다. 난 아직 믿음은 없지만 기독교 정신은 정말 전세계에 퍼져 올바르게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구절이 나의 생각과 맞는다고 여긴다. 지금도 구호단체, 이웃을 돕는 봉사단체 등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대다수이고 이 점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뺨을 때리는 원수 앞에 다른 쪽 뺨을 내밀라는 이러한 사랑을 실천해야한다고 생각한다.한경직 목사님은 정말 존경받을 분이라고 생각한다. 검소함과 절약의 면에서도 그렇다. 가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부분에서 물려줄 것은 기도밖에 없다며 고백하신 한경직 목사님. 안타깝게도 요새 타락한 기독교인들도 간혹 보이는데 그들이 떠올라 한경직 목사님에 대해 더욱 엄숙한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 사람은 본성이 이익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데 그런 섭리를 거부할 수 있는 금욕적인 면이 대단하다. 나는 돈이 없는 대학생이고, 염치 없게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쓰는 학생인데 씀씀이가 헤픈 거 같아 더욱 더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한경직 목사님은 어려운 이웃들을 항상 외면하지 못하셨다. 일제시대 그리고 광복 후에도 활동적이셨다. 보린원을 설립해 아동들을 보호하고 템플턴 상 상금을 북한을 위해 사용케 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나눔으로도 훌륭한 면모를 보이셨다. 감사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만남을 이어가는 면도 한경직 목사님의 이웃사랑, 한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그리고 내가 제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경직 목사님의 진실성, 고백, 용기이다. 남들은 다 숨기는 일제 때 신사참배 했던 일을 한경직 목사님은 자신은 죄인이라며 고백했다고 한다. 사실 처음에 책에서 신사참배 했다고 읽어서 헐.? 설마! 이랬었는데 오히려 이 고백한 사실이 더 대단한 것 같다. 한경직 목사님 같은 높은 위치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분이 이런 고백을 하기 더 어려우셨을 텐데‥ 고백하고 뉘우치시다니?정말 양심적이고도 용기있는 행동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마지막으로 한경직 목사님에 대해 제일 훌륭하다 생각하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나온다. 구술인데도 불구하고 이름까지, 인적사항까지 자세하게 등장한다. 어릴때부터 감사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시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러기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 알고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한경직 목사님의 감사하는 마음의 진실성이 느껴진다. 또 챕터의 주제대로 고난이나 역경이 찾아와도 그것을 넘어선 것, 그러한 계기로 더 발전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조금만 일이 틀어져도 짜증내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편이었다. 좋은 일이 와도 감사하기는 커녕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어머니의 사랑도, 아버지의 보살핌도 감사함보다는 내가 받아 마땅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 생각을 깨닫게 해주고 바꾸게 했다. 책 제목대로 는 한경직 목사님의 감사하는 마음이 전해져 내가 감사해야 되는 것들을 깨닫게 해준, 진정한 나의 감사가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에 대하여-황지우 시인을 중심으로20100112 국어국문학과 손의연◇ 작가 소개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반대시위에 연루, 강제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1980년대에 들어서 기존의 시가 가지는 기법들에 대한 전복과 부정을 통한 새로운 실험적 기법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시대적 기류 속에서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시인이 황지우이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재래적인 관습과 비합리적인 체제와 권위에 대하여 고정되어있던 시 자체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방법을 통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란?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post)와 모더니즘을 합친 말로 포스트는 후기, 탈(脫)을 의미한다. 따라서 탈 모더니즘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분명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정의가 있다. 복잡하고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불확정성, 탈중심, 탈정전, 혼성모방, 대중주의, 퍼포먼스, 재현불가성, 보편내재성등의 특성을 가진다.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은 모더니즘의 폐해를 부정하고 비판함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정의 된 개념에 대한 한계를 뛰어넘음으로써 틀에 박힌 사회적인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가치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 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장르간에 서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장르를 확장하고, 장르의 범주를 탈선한다. 그 중에서도 유럽의 아방가르드 문학적 요소, ‘전위’, ‘다다’, ‘초현실주의’ 제도권 예술에 대한 우상을 파괴하고자 한다. 부르주아 제도권 예술과 그 자율성을 약화시키고 변형시키려는 것이다.또한 기계 예술에 대한 낙관론을 나타낸다.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등의 기계 기술적 미학의 가능성을 예언하고 후기 산업사회의 자기도취적 비전과 결합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새로운 매체들에 열광한다.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문화와 예술의 대중주의를 형성하는 것이다.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패러디, 패스티쉬, 키치 등의 문학적 기법으로 잘 드러난다. 패러디는 ‘원전의 풍자적 모방’으로서 ‘모방, 변형, 희극성’이라는 요소로 구성되며 풍자적 목적을 실현하는 80-90년대의 시는 영화, 신문, 메뉴판, 광고문이 패러디에 차용하여 정치와 폭력, 물질 만능주의의 자본주의 세태를 반영하여 시의 실험성과 독자의 관심을 유발한다. 이를 통해 신선함과 유희, 재미를 갖는다. 이는 메타성, 상호 텍스트성 안에서 포괄되는데 메타시란 ‘시에 대한 시쓰기’로서 일종의 장르 혼합 패러디의 한 양상으로 정의된다. 메타성은 패러디의 반복과 비평적 모방을 통해 시 장르와 관련된 자기반영적 예술 비평 형식의 의미를 획득해 간다. 또한 상호텍스트성은,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작품들은 이미 존재해왔던 것의 재결합에 불과하다고 보고 원전의 흡수와 변용, 모방을 통해 상호텍스트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또 다른 기법인 패스티쉬는 ‘혼성모방’으로서 대상을 모방하지만 그 동기가 없다. 패러디가 주체의 해체를 위한 기법이라면 패스티쉬는 전문이나 부분을 발췌하여 짜깁기한 수법이다. 피상적인 긁어 모음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보여준다. 키치는 ‘경박한 것’ ‘저속한 작품’이라는 의미로 통속적인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대중문화와 잡다한 양식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해체시란?1960년대 후반부터 발표한 일련의 책들에서 전통적인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해 중요한 비평을 가한 프랑스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 ~ 2004)가 주도한 문학 비평의 유파나 그 운동을 '해체(deconstruction)'라고 한다. 해체 이론은 '말 중심주의(logocentrism)'의 허실을 파헤침으로써 언어를 개념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러한 방법론에 기대어 쓴 시를 '해체시'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학에서 해체시는 80년대 초 박남철, 황지우 등에 의해 씌어진 전통시의 형태를 파괴한 일련의 전위적 실험시들을 가리키는 용어로써 김준오의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사용되었다. 해체시는 시인의 세계관이 유보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가 아니라 표절하고 습득하고 인용하는 형태를 취한다. 언어가 더 이상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언어에 대한 불신에서 전통 시형식의 파괴라는 해체의 충격이 가시화한 시가 바로 해체시인 것이다. 해체시는 정형화된 형체나 틀을 분해하듯이 쓰는 시로 해체시가 포스트 모더니즘에 가깝기는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하여 다 해체시는 아니다.◇ 시남산(南山)에서 숭이산(崇夷山)까지는 모두 10개 산으로, 그 거리는 2,500여 리에 달한다. 이곳의 신(神)들은 모두 사람의 머리에 짐신의 몸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에 붉은 뱀, 왼손에 푸른 뱀을 쥐고 있다. 그 제사에는 털빛 좋은 희생물로 한 마리 황구(黃拘)의 피를 바치고, 푸른 종이 돈을 제단에 올려 기원드린다. 제멧쌀은 쓰지 않는다. 이 신들은 피와 돈을 좋아한다.-「산경」, 『게 눈 속의 연꽃』 부분문학작품이나 연극, 영화 등 예술분야에서 기성작품의 문체나 운율을 교묘히 모방하여 과장이나 풍자로서 해학적으로 다시 만든 것을 패러디라 한다. 패러디는 기존작품의 스타일상의 고유성을 이용하고 그들의 특이성과 개별성을 이용함으로써 원본을 조롱하는 모방을 만들어내는 특색이 있다.원래 『산해경』각 「산경」 의 말미에는 그 일대 산악을 주재하는 신들의 형상과 제사, 제물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시인은 이를 전유하여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로 바꿔버렸다. 사람의 탈을 썼으나 짐승의 몸, 즉 동물적 욕망을 지닌 그들은 피와 돈을 좋아한다. 피는 군부의 무단통치를, 돈은 독점자본의 착취본능을 각기 상징한다.저 새끼가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야 새끼야 눈깔을 엇다 뜨고 다녀?/ 뭐 새끼야? 이 새끼가 엇다 대고 새끼야 새끼야 나발까는 거야? 在回轉車線에서 영업용 택시 운전수와 자가용 운전자(ah, he owns a MarkV GXL Ford)가 손가락을 하늘로 찔러대면서 악 쓴다- 「버라이어티쇼1984」, 『겨울나무로부터봄나무에로』 부분해체시는 시와 현실, 시어와 일상 언어 사이의 구별을 배격하는데서 출발하는데 해체시는 그동안의 서정시들이 추구해왔던 품위 있는 표현 방법을 부정하고 저속하고 비시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현실을 야유하고 풍자한다.위 시에서는 기존의 서정시에서는 쓰이지 않던 욕설과 비속어를 사용하여 분주한 도심의 어느 도로 한복판에서 볼 수 있는 운전자간의 싸움광경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적인 현실 반영을 통해서 시인은 현실에 대한 증오를 반영한다.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띠리릭 띠리릭 띠리리리리리리릭피웅피웅 피웅피웅 피웅피웅피웅피웅꽝!ㄲ ㅗ ㅏ ㅇ!PLEASE DEPOSIT COINAND TRY THIS GAME!또르르르륵그리고 또다른 동전들과 바뀌어지는숑숑과 피우피웅과 꽝!- 「徐伐,셔발,셔발,서울,SEOUL」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부분전자 오락실의 기계음을 그대로 나열하고 있는 이 시는 일상의 서정 속에 침투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풍속과 의미 없는 시니피앙의 유희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인간의 언어가 절대적 진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수고 언어의 유희성만 남겨놓은 것이다.
현대인과 성서독 후 감 상 문‘성서 다시 보기’학 과국어국문학과학 번20100112이 름손의연‘성서 다시 보기’를 읽고국어국문학과 20100112 손의연종교란 무엇인가? 사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고 생각해보려고 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미션스쿨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을 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난 숭실대학교에 입학했고, 현대인과 성서라는 과목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어쩌면 다행히도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난 기독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었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감상문을 꽤 길게 써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나름 흥미를 갖고 살펴보았다.1장, 들어가는 말부터 이 책은 다짜고짜 물음을 던진다. 종교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학자는 종교를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하고 다른 학자는 거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으로 간주한다. 또 다른 학자는 개인의 최종적 관심으로 규정한다. 아마 이같이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은 종교마다 각각 환경과 배경이 다르고 또 연구하는 학자들도 개인 개인의 생각과 처지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또한 종교현상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종교경험이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 더 심도 있게 써져 있어서 흥미로웠다. 종교경험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고, 인간의 감성과 관련되고, 경험 이후에 자기변화가 동반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난 종교경험을 겪어본 적이 없지만 종교경험이 경험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내 생각보다 강한 것 같다. 종교경험은 신비스럽고 두려운 감정, 그리고 매혹적인 느낌을 동시에 준다. 매혹적인 느낌은 경험자를 종교로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고 두려운 감정은 경험자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여 종교에서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오토의 주장으로 이해하면 이런 감정은 성스러운 감정이 일상적이지 않고 생소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다.2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설명한다. 이 중 내가 흥미롭게 읽은 것은 계시에 대한 부분이다. 계시는 예수 그고 한다. 비기독교인 나는 이해하기 힘들지만(사실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기독교인에게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룸메이트 언니도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나 아름다운 산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하나님의 존재를 느낀다고 한다. 자연을 창조한 하나님의 위대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난 이러한 믿음이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서다.하나님은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불리게 된 것인가? 3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호칭으로 여겨왔고, 구약성서에서는 강한, 전능한, 탁월한 등의 뜻을 가진 히브리 말(EL)로 등장했다. 이 외에도 Elohim은 하나님을 창조자, 초월자, 전능자로 묘사할 때 등장하고 Adonai라는 단어로도 등장했다. 이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삶에서 다양한, 여러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음을 나타냄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늘+님 이라는 접미사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하늘이 우리를 도왔어 라는 말 등으로 하늘을 신으로 여기는 표현을 자주 사용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정해진 것 같다.‘인격적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난 이 단어가 중요한 것 같다. 하나님은 두렵고 신비하고 전능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친근하고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를 돌봐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인격적인 모습에 제일 큰 매력(attractive)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보통 학생들과 사람들 중 기독교나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더라도 ‘초월적인 존재’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수가 꽤 많다. 종교가 있지 않다면 그 의문에 대해 답을 내릴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인들은 그 답을 종교에서 찾는다. 어쩌면 제일 명쾌하고 현명한 해결인 것 같다.우리는 신은 선하고 전능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전제를 믿는다면 이 세상에 악은 왜 존재하는 있음을 지적하고 홀로코스트를 체험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에게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러한 사회적 악의 문제는 오직 타자를 향한 책임에 기반을 둔 타자윤리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난 레비나스의 주장이 맞는 것 같다.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주장만 본다면 아무런 해결책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악으로부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결책을 세운 레비나스의 주장이 현명한 듯하다.기독교에서 빠뜨릴 수 없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중 하나가 선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방문하며 선교하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하는 사람들 심지어 학교 안에서도 선교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선교는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이다.17세기부터 18세기 근대 역사에서 선교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무력을 통한 기독교 확장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선교 정신이 아니다. 기독교의 참된 선교 정신은 자신을 비워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타자에 대한 전적인 개방을 통해 기독교의 참된 사랑과 포용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의 온전한 선교정책이고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잘못된 선교 방식의 예는 주위에서도 너무나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러한 분들이 참된 선교 정신을 가지고올바르게 전도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은 단연코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인간이다.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구원자가 된 인물이다. ‘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이미 영원한 성자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강조한다.’난 잘 이해가 안 되어 룸메이트 언니에게 물어봤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소리예요?” 룸메이트 언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난 이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예전에 예수고 사는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셨다. 그리고 인간들의 죄를 한 몸에 지고 자신이 희생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희생한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나는 그보다도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행했던 행동들이 참 감동적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윤리시간에 단어로만 배웠던 아가페라는 말의 뜻을 3장을 읽고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3장의 내용은 성서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너무나 생소하고 배경지식이 전혀 없어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썼다.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유사하지만 부분적으로 차이가 난다.기독교는 유대교에서 갈라져나온 신종교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단절성보다 연속성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개인적 연속성을 확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란다.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자아가 분열될까하는 우려에서 그렇게 됐다. 마태복음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연관 짓기 위해 둘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내세우기 위해 애썼다.마가복음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의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문제가 된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미래의 상태인 동시에 현재의 상태이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래에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입장을 강조하면 우리는 미래를 기다리느라 안일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의 의미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정말 현명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위에서도 현실을 배제하고 종교에 지나치게, 잘못된 방식으로 빠져 세월아 네월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는 현재적 의미를 부여해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힘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게 한다.가장 명쾌하게는 기독교적 존재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과 하나님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완전한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제도가 형식화되어 기독교의 건전성과 역동성에 장애물로 기능했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내 경험에서도 그렇다. 초등학생 때 나는 교회에 다녔었다. 기억으로는 꽤 열심히 다녔었는데 신앙생활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예배가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어서였다. 교수님이 지난 시간에 말씀하셨던 내용 중 독일 기독교 신자와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를 비교한 내용이 있었다. 독일의 기독교 신자는 한 달에 한번, 또는 서너 달에 한두 번을 교회에 나가도 독실한 신자고, 우리나라에서는 매주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매주 교회에 나가던 한국인을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아마 독일에서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게 그 사람들의 생활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형식을 더 중요시하여 매주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교회제도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겠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이런 지나친 교회주의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잃는 신자의 수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형식보다는 내용이다. 교회에 자주, 매주 나가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진정 하나님,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한다.내가 제일 인상 깊게 읽은 것은 누가복음의 희년법, 경제적 회개에 대한 내용이다. 희년은 50년마다 돌아오는 기쁨의 해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유대인이 가난 때문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게 되면 그 땅을 산 사람은 원 소유주가 희년을 맞이하면 그 땅을 돌려줘야 했다.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돈을 꾸어준 채권자의 노예가 되었는데 채무노예는 희년이 되면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내용을 인상 깊게 보았냐면 우리나라에 적용시켜 볼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나라는 신용불량자의 수가 많이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