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Ⅰ. 서론→조몬인의 생활1. 시작하기에 앞서서...* 시대 정리표Ⅱ. 본론 →야요이인의생활1. 원시 ? 고대- 조몬시대, 야요이시대,야마토시대, 나라시대, 헤이안시대2. 중세- 가마쿠라시대, 겐무의 신정,남북조시대, 무로마치시대, 전국시대3. 근세 →야스카 문화를꽃피운 야마토 시대-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에도시대5. 근 ? 현대- 메이지시대, 다이쇼기, 쇼와기,헤이세이기(현재)→막부시대Ⅲ. 결론1. 일본의 역사를 조사하며...* 출처→근대일본[일본역사의 시대 구분]일본역사는 일반적으로 원시ㆍ고대, 중세, 근세, 근ㆍ현대로 구분한다.조몬(?文)시대야요이(?生)시대원시 · 고대야먀토(大和)시대나라(奈良)시대헤이안(平安)시대가마쿠라(鎌倉)시대겐무의 신정중세남북조(南北朝)시대무로마치(室町)시대센고쿠(??)시대아즈치ㆍ모모야마시대근세에도(江?)시대메이지(明治)시대다이쇼(大正)기근 · 현대쇼와(昭和)기헤이세이(平成)기Ⅰ. 서론1. 시작하기에 앞서서...일본에서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에 규모 9.0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것은 지난 1995년에 일어난 고베대지진보다 훨씬 높은 규모의 지진이다. 그래서 이웃국가인 우리나라의 기업들과 유명인사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앞 다투어 성금을 보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일본에서는 또다시 독도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온정으로 관심을 표하던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해 냉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본과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지만 역사상 갈등 문제로 심각한 대립을 겪고 있다. 특히,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교과서 왜곡은 잊을만하면 화제로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는 우리나라의 역사(한국사)에서 일본이 역사(일본사)를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양국의 진정한 갈등의 고삐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촌화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양국의 화합과 타협은 중요한 과제로 남고 있다. 서로 과거의 역사적인 문제의 청산은 서로를 벼농사 때문에 낮은 지대에 살게 되고, 거기에 촌락을 형성했다.이 때의 토기는 전시대의 것보다 튼튼하고 모양도 더 세련된 것으로 바뀌었다. 이들 토기는, 토오쿄오 분쿄오구의 야요이쵸오(彌生町)에서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야요이식 토기라고 부른다. 또 기원전 3세기경부터 약 600년간을 야요이시대라고 한다.1~3세기경이 되면, 벼농사 기술의 발달에 따라 촌락이 점차 커져 나라라고 불려 지게 되었다.(국가 형성) 유력한 지도자가 나라의 왕이 되고 강한 왕은 약한 왕을 복속시키고 더욱 큰 나라를 만들었다.③ 야먀토(大和)시대(3세기 말(4세기 초) ~ 710년)4세기경, 야마토지방(지금의 나라현)의 호족세력이 연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야마토정권을 성립시켰다. 야마토정권은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중앙의 정치조직을 정비하고 야마토라는 국가를 세우고 지배자를 대왕으로 불렀다.5~6세기에는 한반도나 중국대륙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일본에 살게 되었다. 이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통상 도래인(渡來人), 혹은 귀화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토목, 양잠, 직물 등의 전문적인 일에 종사 하거나, 관청에서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이나 계산, 외교문서 작성 등을 했기 때문에, 앞선 기술이나 지식을 통하여 일본인의 생활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보여진다. 유교가 서적과 함께, 불교가 경전이나 불상들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에 전파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이것들이 모두 일본인의 학문, 사상, 종교, 예술등의 초석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6세기 중엽 가장 유력한 호족 세력이었던 모노베씨(物部氏)와 소가씨(蘇我氏)가 정권쟁탈전을 벌인 결과,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인 소가씨가 보수적 세력인 모노베씨를 누르고, 조정의 정치를 거의 독점하게 된다. 또한 이 때 쇼오토쿠태자(聖德太子)가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섭정에 취임(593), 그는 소사씨 등의 호족과 손잡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의 기초를 닦기위해 노력했다. 우선 관위 12계를 만들어서 관리들의 순위를 정하나 승려들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다.나라시대 중반, 흉작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귀족과 승려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불심이 깊었던 쇼무 천황(聖武天皇)은 부처의 힘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라에다 토오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고, 그 안에 본존으로 높이가 16m나 되는 금동대불을 만들었다. 조정은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수차례나 견당사를 파견, 당왕조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텐표 문화(天平文化)라고 불려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정치가 불교에 의한 진호국가를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고도의 발전을 보이고, 또한 문화전반에 걸쳐 당문화의 영향이 농후하다. 국가에 의한 당문화의 적극적인 섭취를 반영하여, 현란한 문화의 추진자는 귀족계급이었으며, 중앙편중의 문화였다.⑤ 헤이안(平安)시대(794년 ~ 1185년)칸무(桓武)천황은 혼란한 정계의 기풍을 일신하고 율령정치를 쇄신하기 위해서 794년 헤이안쿄(平安京=오늘날의 교토)로 옮겼다. 이후 1192년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기까지 약 400년간을 헤이안 시대라고 부른다.헤이안 초기의 율령정치 쇄신과정에서 후지와라(藤原)씨가 정치적으로 대두되게 된다. 이들은 정부의 중추부를 장악하고 다른 유력씨족들을 제거하는 한편, 천황의 외척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섭정(攝政), 민백(閔白)직을 독점했다. 그 결과 천황을 대신하여 후지와라씨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고 소위 섭정정치(攝閔政治)를 전개했다. 섭정·민백 둘 다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집행하는 직무로서, 천황이 어릴 때는 섭정, 천황이 성인이 되고 나면 민백이 정무를 담당했다. 후지와라씨들이 이 지위를 독점·세습화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는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독재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셋칸정치(攝閔政治)의 전성기는 10세기말에서부터 11세기 초반에 걸친 후지와라 미찌나가(藤原道長)·요리미찌(賴通)시대였다. 중앙에서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섭정정치가 확립되어간 반면, 지방에서는 정치.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은 종래의 귀족정권에 대해 무사가 독자적 정권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며, 이는 장군과 그 부하(고케닌=御家人이라고 함)가 토지를 매개로 맺은 주종관계를 그 기초로 하고 있으며, 막부는 그중 유력한 자를 슈고(守護)·지토(地頭)로 임명하여 전국적 지배를 실시했다. 하지만, 정권의 구조 자체에는 고대적 성격이 남아 있었고, 교토에는 천황과 귀족들의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는 봉건제도 형성의 한 단계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즉, 가마쿠라 시대는 公·武 2중정권의 시대였던 것이다.요리토모가 죽자, 그의 처인 마사코(政子)의 친정인 호오죠(北條)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집권(執權) 정치를 하게 된다.13세기 후반,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원정(1274, 1281)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두 번 모두 태풍의 덕택으로 여·원 연합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약소 고케닌들의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어 불만이 누적, 막부의 세력을 따르지 않게 되고 막부의 세력은 현격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 시대는 전란이 계속되는 불안한 세태였기 때문에, 무사나 백성들은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불교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것은 헤이안 시대의 불교가 엄격한 계율이나 학물을 중요시 한 것과는 달리, 알기 쉽고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신란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정토진종을 열고, 니찌렌은 남묘호오렝게쿄오를 외우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일련종을 개창했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은 무사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다. 좌선을 통해 정신을 단련시키는 선종의 엄격함이 무사들의 심정과 일치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교의나 경전을 갖지 못하고 있던 일본 고유의 신도도 이 무렵, 이세신궁의 신관이 불교 등의 교의를 참고로 해서 신도의 이론적인 기초를 정립 하려고 했다.②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1자가 된다고 하는 하극상의 사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가 100여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고 하고, 이 시대의 새로운 지배자들을 센고쿠다이묘오(戰國大名)라고 한다.무로마치 시대에는 농업의 기술이 발달하고, 물레방아가 사용되어 벼농사 뒤에 보리를 심는 이모작도 널리 행해지게끔 되었다. 농민은 각 촌락마다 회합을 열어 농사기술이나 세금(年貢)등에 관해 상담했다. 각 촌락마다의 유대가 강화된 농민들은 서로 단결하여 막부에 세금을 경감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전당포나 양조장등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것을 쯔찌잇키(土一揆)라고 한다.전국 다이묘는 무기 등을 조달하기 위해 상공업자를 자신의 영지에 모아서 보호했기 때문에, 상공업도 발달했다. 상품유통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각지에 시장이 서고, 운송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대상인들도 증가했다. 또 상인이나 기술자들의 동업조합인 자(座)도 전국적으로 결성되고, 각 지방의 특산품도 생산되게끔 되었다.무로마치 시대는 막부가 교토에 있었기 때문에, 무사다움과 귀족적인 것이 융합되어 새로운 무가문화를 창조했다. 그것은 중국의 원·명조의 문화나 선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간소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화였다. 또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퍼져서 각지에 민중의 문화가 생겨났다.⑤ 센고쿠(??)시대(1467년 ~ 1573년)센고쿠 시대(戰國時代)는 일본의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의 사회적, 정치적 변동 및 계속되는 내란의 시기이다. 한자어를 음차한 전국 시대라는 표현도 사용된다.1493년의 메이오 정변 또는 1467년의 오닌의 난에서 시작하여 1573년에 무로마치 막부 제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어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질 때 까지의 시대를 가리킨다.3. 근세근세는 전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시작되었다. 16세기 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였고, 그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
우리들의 살아있는 숨결,제사에 대해서목차(contents)Ⅰ. 일반적인 제사① 제사의 정의② 제사의 기원③ 제사의 종류④ 제사상 차리는 법⑤ 제사 지내는 순서Ⅱ. 종갓집 제사(의성김씨)① 기제사 엿보기② 제사상Ⅰ. 일반적인 제사우리나라의 문화 중 하나로써, 제사는 중요하게 자리 잡아 왔다.제사는 멀리 있는 인*친척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조상을 섬기는 예식을 진행한다. 어찌 보면 제사는 핵가족화 되며 가족이 해체되는 이 상황 속에서, 연결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편적인 제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① 제사의 정의祭者志意思慕之情也 忠信愛敬之至矣옛 성인, 순자는‘제사란 추모의 정이고 참마음과 믿음과 사랑과 공경을 지극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그렇다면 제사를 현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제사(祭祀) 또는 제례(祭禮)는 천지신명을 비롯한 신령이나 죽은 이의 넋에게 먹을거리(음식)를 바치어 정성을 나타내는 일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서는 설날이나 추석에 드리는 제사를 차례라고 부른다. 좁은 의미에서는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서 천지신명에게 올리는 정성을 나타내며, 넓은 의미에서는 샤머니즘 및 조상숭배, 자연숭배 등과 관련하여 조상이나 자연에 제물을 바치는 의식 일반을 가리킨다.② 제사의 기원제사를 지내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먼 옛날 사람이 원시적인 생활을 할 때 천재 지변이나 또는 사나운 맹수등의 공격과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한 수단으 로서 하늘과 땅 심수(深水), 거목(巨木), 높은 산. 바다. 조상 등에서 절차를 갖추어서 빌었던 것이니 이것이 즉 제사가 발생한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자연변화나 어떤 공격체나 또는 질병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행하여져 온 제사는 중세와 근세에 이르러 차츰 유교적인 조상숭배의 제도로 변하여 졌으나. 그 대신 유교적인 번잡한 절차와 자연숭배의 미신적인 의식이 높아지므로 가정마다 연간 제사를 지내는 횟수가 무려 48회 이상이나 되었다.③ 제사의 종류- 천신(薦新) : 그해에 새로 난 과일이나 농산물을 신에게 먼저 올리는 일- 차례(茶禮) : 매월 음력 초하루, 보름이나 한식,단오,동지 등 명절날, 또는 조상 의 생일 등에 지내는 제사- 시제(時祭) : 철마다(음력 2월,5월,8월,11월) 지내는 종묘의 제사.- 묘제(墓祭) : 음력 9~10월에 조상의 묘를 찾아가 지내는 제사- 소상(小祥) : 죽은 지 한 돌 만에 지내는 제사- 대상(大祥) :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기제사(忌祭祀) : 삼년상이 끝난 뒤(소상,대상 다음해)에 해마다 죽은 날에 지내 는 제사☞옛날 조선시대에는 양반집에서 여러 종류의 제사를 모두 지냈다.이 제사를 모두 지내려면 한 달에 평균 서너 번의 제사를 지내야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중 우리가 보통 제사라고일컫는 것은 설날과 추석에 지내는 차례와 조상이 돌아가신 날지내는 기제사이다.④ 제사상 차리는 법그림 참조■ 제사상의 음식차림에는 홀수가 지배한다.동양에서는 홀수가 양, 짝수를 음으로 본다. 제사는 남자 중심(가부장제도)으로 생겨난 제도이고, 따라서 모든 것이 양을 나타내는 홀수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음식은 보통 3 줄이나 5 줄로 차린다.차림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식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쉽다.첫줄은 밥과 국, 수저가 놓이고 즉 가까운 곳에서 부터 맛있는 음식이나 귀한 음식부터 차례로 놓고 가장 먼 곳에 후식으로 먹는 과일이나 떡, 과자 등을 놓는다. 과일을 놓을 때도 홀수 개로 놓는다. 생선도 한 마리나 3마리를 놓는다. 나물도 3가지나 5가지를 놓는다.■ 모든 기준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좌에서 우로 배열한다.좌측은 양, 우측은 음을 의미한다.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를 함께 지낸다면, 좌측에 할아버지, 우측에 할머니 밥과 국을 놓는다. 증조부모와 조부모(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함께 지낸다면, 좌측에 증조부모, 우측에 조부모 밥과 국을 놓는다.함께 절을 할 때에도 연장자가 좌측에 선다. 여자들과 함께 절을 할 때에도 남자들이 좌측, 여자들은 우측에 선다. 제주가 혼자 절할 때 남자들은 좌측, 여자들은 우측에 서 있는다.■ 좌측-서(西)쪽에 좋은 음식을 놓는다.제사상은 북쪽을 향하여 놓기 때문에 좌측은 서(西)쪽이 되고 우측은 동(東)쪽이 된다. 좌측에 연장자가 않기 때문에 좋은 음식이나 음식의 좋은 부분(예: 생선의 꼬리부분)을 좌측으로 배열한다. (혹은 제주의 입장에서 볼 때 오른 손이 닿기 편한 곳에 좋은 음식을 둔다고 보면 된다.)⑤ 제사 지내는 순서■ 조상신의 혼백을 불러온다.■ 하늘에 있는 혼을 불러오기 위해 분향을 한다.(분향)■ 땅속에 있는 백을 불러오기 위해 땅에 술을 붓는다.(강신)■ 혼백에게 전원 인사를 드린다.(참신)■ 혼백에게 3잔의 술을 올린다.(초헌,아헌,종헌)■ 첫잔을 올린 후 제사를 지내게 된 이유를 설명해 드린다.(독축)■ 혼백이 식사를 한다.(개반, 삽시, 합문)■ 식사가 끝나면 차(茶)를 올린다.(헌다)■ 잘가시라고 인사를 하고 제사를 끝낸다.(사신, 철상, 음복)▷분향단계 ▷ 강신단계Ⅱ. 종갓집 제사(의성김씨)안동의 의성김씨 지촌종가(지례예술촌) 차종손 김원길님의 5대 조모의 기제사가 있는 날이면 누구나 이 제사를 참관할 수 있다. 불천위의 큰제사는 많은 이에게 개방되어 흔히 참관할 수 있지만 외부사람이 양반집의 전통 기제사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의성 김씨 종갓집은 이렇게 제사를 개방하여 전통제례를 원형대로 보여줌으로 전통제례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과연 의성 김씨 종갓집의 제사는 어떨까?① 기제사 엿보기▲제관들은 도포와 갓, 유건을 쓰고 제사에 참여하였고 차종부도 같이 참여하였다. 고례에 기록되어 있는 사당에서 신주를 모셔 내오는 출주의식도 행해졌다.② 제사상1)밥과 국(메와 갱)일상의 밥상에서 기본을 이루는 밥과 국이 제사에는 ‘메’와 ‘갱(羹)’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콩나물갱은 밭농사 잡곡위주의 내륙산간지방인 안동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종가는 1년에 약 20회가 넘는 조상제사를 모시고 있다. 안동지역의 빈한한 가문들에게 매 번 쇠고기제물의 장만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쇠고기갱을 사용하던 불천위제사도 이런 기제사의 영향으로 차즘 콩나물갱으로 대신하게된 것으로 보인다.콩나물갱 못지않게 안동지역에 주목되는 특별한 제물이 상어(돔배기)와 간고등어이다. 안동은 주로 동해안지역에서 생선을 공급받았는데 태백준령을 넘어오는데 꼬박 이틀은 걸렸다. 그래서 삭히거나(발효) 소금에 푹 절여도 지장이 없는 생선 혹은 아예 말린 생선 등이 운반되었다.상어는 홍어와 같이 배설물을 피부로 배출하는 속성이 있어 피부로 흡수된 소변에 함유된 암모니아 성분이 발효를 일으켜 상하지 않도록 한다. 도막낸 상어고기(돔배기)에 소금을 듬뿍 뿌려 항아리에 잘 갈무리해 놓으면 여러 번에 나눠 쓸 수 있고 짠 맛 때문에 한 도막으로도 밥 한 그릇을 비울 수 있다.요즘 안동의 브랜드상품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간고등어는 예전에는 상어에 비해 하급어물로 여겼던 탓에 제물로는 올리지 않았다. 근래에는 대체로 사용하는 편이다.2)탕가문의 위상을 드러내는 과시용 제물로 이용되는 것 중의 하나가 탕(湯)이다. 탕은 우모린(羽毛鱗)의 원칙, 즉 하늘을 나는 깃털을 가진 새라는 의미에 닭을 이용한 계탕(혹은 鳳湯), 육지에 살고 있는 털 있는 짐승이라는 의미에서 쇠고기를 이용한 육탕, 비늘달린 생선을 넣은 어탕을 사용한다.단탕인 경우 계,육,어탕을 한 그릇에 담고, 3탕은 계탕, 육탕, 어탕을 각각 진설하고, 5탕은 3탕에 조개탕, 소탕(蔬湯)이 더해진다.일설에는 ‘대과급제 5탕, 양반 3탕, 서민 단탕’이라는 식으로 차별을 두고 있다. 안동지역의 대과급제한 불천위의 제사라도 3탕으로 하는 곳이 절반 쯤 되고 서민이 임의로 5탕을 차렸을 경우는 비난도 감수해야했다.3)도적(都炙)제사상의 꽃이라 할 만큼 주요 제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도적(都炙)이다. 고례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교이념의 강화에 따라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서 성대하게 차릴 필요성이 있는 제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