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안외순 역), 책세상, 20051대한민국이 나아갈 올바른 길-동호문답으로 본 현대사회 리더십 적용-서론《동호문답》은 율곡이 선조 2년(1569), 그의 나이 34세 때 지은 저술이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대학 교수들에게 주어지는 연구년과 같은 연구 휴가 제도가 있었다. 문신들 가운데 젊고 유능한 이들을 선발하여 일정 기간 정무를 떠나 학문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이른바 ‘사가독서’ 제도 였다.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한강 어귀에 있던 독서당이라는 별장에서 연구 휴가를 마친 후 월과, 곧 과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동호문답》은 지금의 옥수동 부근 한강 나루에 있었던 ‘동호독서당’에서 한 달여의 사가독서를 마친 율곡이 왕위에 오른 지 만 2년여밖에 안 된 새 군주 선조에게 월과로 제출한 글이다. 따라서 《동호문답》은 젊은 관료 율곡이 청년 군주 선조에게 새 정치를 희망하며 자신의 개혁포부를 펼친 정치개혁서인 셈이다.《동호문답》은 논군도,논신도,논군신상득지난,논동방도학불행,논아조고도불복논당금지세,논무실위수기지요,논변간위용현지요논안민지술,논교인지술논정명위치도지본 등의 11편으로 되어 있다.손님과 주인이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대화체의 글이며 ‘백성이 나라의 근본’ 이라는 유교의 기본적 이념과 함께 왕도정치에 대한 선조의 입지를 촉구하고, 각종 제도의 개혁과 관리의 부정부패 근절의 실천을 논하는 책이다.이러한 율곡의 정치개혁서는 현재 오늘날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고 정치에서도 필요한 덕목들이 많은 책이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옛 것에서 배워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동호문답》을 통해 옛것을 배우고 오늘 날 정치에서 새로운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본론제 1장 군주의 길을 논하다.인의의 도를 몸소 실천하고, 남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정치를 행함으로써 천리의 바름을 지극히 하는 것은 왕도 정치이고, 인의의 이름만 빌리는 정치를 행하여 권모술수로 공리의 사익만 채우는 것은 패도 정치라오.?왕도정치는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으로 힘과 무력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군주의 인격과 덕의 감화력에 의한 평화적이고 순리적인 해결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정치사상이고 패도 정치는 그 반대의 개념으로, 군주가 백성을 다스릴 때 인과 덕으로 다스리지 않고 강한 힘 즉 무력으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치 형태이다.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왕도 정치의 길을 걷어야할까? 패도 정치의 길을 걸어야할까? 나는 이 두 개를 적절히 섞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봤을 때 한국 정치에 있어 왕도정치는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나고 패도 정치는 군부와 독재 정치를 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생각난다. 노무현 대통령은 햇볕정책계승과 지역정치의 철폐, 권위주의를 타파하였으나 신자유주의 정책실시와 한미동맹훼손이라는 오점을 남긴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이라는 유례가 없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대통령이나,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 대통령이고 박정희의 국가재건플랜은 정치권과 경제계가 유착하는 결과를 가져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경제에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온 것이 사실이며, 장기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과정에서 군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놓다 보니 이들이 세력화하여 그의 사후인 1980년대에 박정희 아류에 해당하는 국민 통제형 정권을 연장하게 계기를 만들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왕도정치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오늘날 정치는 다원화와 세계화로 복잡한 정치체제가 잡혀 있어 때로는 패도정치와 같은 강력한 법으로 국민을 압도할 때도 있어야 생각한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리더들은 이 두 가지 정치 형태를 적절하게 분배해서 정치를 한다면 이상적인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제3장 좋은 군주와 좋은 신하가 만나기 어려움에 대해 논하다.어찌 그런 선비가 없었겠소. 다만 군주가 그런 선비를 너무 이상적이어서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등용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도학하는 선비를 ‘진유’라 하는데, 맹자 이후 진유가 출현하지 않다가 1,000여 년이 지나서야 주렴계 선생이 나옴으로써 미묘한 진리를 발양했고, 정자, 주자가 그것을 계승한 후에야 이 도학이라는 것이 세상에 크게 밝혀져서 중천에 솟아오른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었지요.?실제로 기업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최고의 동지를 만나는 것이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만났듯 최고의 파트너가 있을 때 성공과 발전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최고의 파트너를 어떻게 알아보느냐 하는 점과, 어떻게 모셔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최고의 파트너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며, 이들을 모시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우선적으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필요하다. 따라서 세심한 관찰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추천이다. 잘 알려진 유비의 삼고초려도 제갈공명의 친구이기도 한 서서의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인재를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먼저 기업인 본인이 타고난 매력과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그리고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고의 파트너는 누구에게나 욕심이 나는 법이고 자연스럽게 다른 곳에서 스카웃 제의가 올 수 있다. 따라서 신세계에서의 정청과 이자성의 관계처럼 확고한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제8장 간인의 판별이 용현의 요체임을 논하다.주상의 마음에 음악과 여색을 즐기는 사심이 싹튼다면 소인들은 반드시 그 틈을 노려 ‘베개를 높이 하고 뜻을 자유롭게 하여 즐거움을 추구해도 좋다’라는 말로 상감의 귀를 현혹시키겠지요. 샛길을 찾고 지름길을 더듬는 행위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나 큰 핵심은 모두 자상의 총명을 가리고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지요.?용현이라는 것은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고, 현인을 관료로 등용하는 일을 말한다.이이가 용현이 중요하다고 말하듯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자기 의무를 다하고 국민을 위한 사람을 공무원으로 뽑아야 할 것이다.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공무원들은 전문성이 사라진 탁상행정과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고, ‘철밥통’ 이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현장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력이 거의 없고 책상에서 보고받고 상부에 보고하는 식의 업무수행을 반복하게 되므로 전문성이 사라진 탁상행정이 이루어지고, 안정성으로 인해 무사안일주의와 탁상행정과 ‘철밥통’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이고 있다.공무원은 합격하기만하면 단번에 신분이 상승되므로, 국민에 대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공무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현장의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게 된다. 아마 이이도 당시 어린 나이에 관료가 되어 주변의 시기와 더불어 관료직 초기에는 인성과 소양 그리고 현장이 전문성이 부족했다고 지적을 받지 않았을까?이러한 문제가 있는 공무원들은 예전부터 공무원의 숫자를 줄인다고 발표를 했지만 여전히 공무원의 숫자는 줄지 않고 있으며, 공무원의 연금을 국민세금으로 충당하는 등 국민의 부담을 증가시키고 있는 실정이다.공무원은 국민이 납부한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국민에게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 공무원이 업무를 소홀히 하면서 국민의 편익과 안전과 행복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많은 사례들이 있었지만, 국민과 공무원 개개인의 이익이 충돌할 때 사적인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맡겨진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공무원을 뽑아야 할 것이고 그것이 이이가 말한 용현인 것이다.제9장 안민정책을 논하다.일족절린의 폐법 이란 무엇인가? 지금 과중한 세금, 군포, 군역 등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백성이 있는 경우 반드시 그 일족과 이웃에게 세금, 군포, 군역을 부담시키는데, 일족과 이웃들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가면 다시 그 일족의 일족과 이웃의 이웃에게 부담시키고 있지요.진상번중의 폐법 이란 무엇인가? 요즘 말하는 진상이라는 것이 주상께 바치는 데 있어서 모두 다 적합한 것은 아니라오. 어떤 자질구레한 것도 헌상하지 않는 것이 없고 바다나 육지에서 산출되는 것을 빠짐없이 긁어 들이고 있으나 어찬에 진상할 만한 것을 고른다면 몇 가지 안될 것 이오.공물방납의 폐법이란 무엇인가? 조종조에서는 방납을 매우 엄하게 금지시켜 모든 공물을 오직 백성들로 하여금 직접 관청에 공납하게 했고, 모든 관청 또한 주상의 뜻을 받들어 아전들에게 기만당하는 일이 없었으며 그들의 농간이나 실상을 모르는 폐법이 없었소.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공물로 인한 곤란을 겪지 않았지요.
현대 시대에서 바라본 칸트의 사상서론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과연 가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는 전 세계적 역사로 비춰볼 때, 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은 비인격적이며, 평화를 더 이상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것 같다. 칸트가 네덜란드의 어느 여관집 주인의 묘지를 그린 간판의 표제를 보고 를 제목으로 삼았는데, 이것을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아마도 라는 것이 현실세계에서 실현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세계는 제국주의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평화에 대한 현실적인 요청이 강력해졌다. 현대사회에서 국제기구가 현실화되고, 국제적 평화의 이념이 중요해지면서 칸트의 는?이전에 비해 더욱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본 서평에서는 칸트의 의 현대적 수용과 한계점, 그리고 비판적 수용을 중심으로 칸트의 평화적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본론1.의 현대적 수용칸트의 는 평화이론이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의 현대적 수용이 이루어지고 있다.첫째, 헌법에서의 적용이다.인류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나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제조약과 각국의 헌법에 평화주의를 채택하였다. 칸트의 에 부합되는 헌법적 적용은 평화교란행위의 금지, 침략전쟁의 금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서독기본법 제26조 제1항에 국가 간의 평화적 공존을 교란하기에 적합한 행위 또는 평화적 공존을 교란할 의도로 행해진 행동과 특히 침략전쟁 수행의 준비는 위헌이다. 이런 행위는 처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브라질헌법은 제7조에 국제분쟁은 브라질이 가입한 국제기구와 협력하여 직접교섭, 중재 및 기타 평화적 수단을 통하여 해결한다. 정복전쟁은 금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덴마크헌법 제19조 제2항에 국왕은 왕국 또는 덴마크 군에 가해진 공격을 방어하는 목적 이외에는 국회의 동의 없이 외국에 무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둘째, UN과 EU의 설립이다.칸트는 국가 간의 관계는 자연 상태와 같으니 국가는 사회계약으로 연방형태의 정부를 수립함이 의 길이라 했다. 칸트의 는 세계평화를 모색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설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국제연맹은 어떤 회원국이든 간에 분쟁을 중재재판, 사법적인 해결에 의하지 않고 전쟁에 호소하는 경우, 이를 회원국 전체에 대한 전쟁으로 간주하여 통상관계, 금융관계 등에 대한 금지와 같은 경제제재와 침략국가에 대해 군사적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국제연맹은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국제연합은 평화유지의 목적달성을 위해서 국제연합의 가맹국이 존중해야 할 행동상의 원칙을 국제연합 헌장 제2조에서 규정하였다. 모든 가맹국은 그 국제분쟁을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국제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도록 해결해야 한다. 모든 가맹국은 그 국제관계에 있어서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여하한 국가의 영토보전이나 또는 정치적 독립에 대해서도, 국제연합의 목적과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여하한 방법에 의한 것이라도 이를 삼가야 한다. 국제연합은 국제연합 가맹국이 아닌 국가가 국제간의 평화와 안전의 유지에 필요한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행사할 것을 확보하여야 한다. 이들 원칙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침략방지에 대해서 집단안전보장의 체제를 수립한 것이다.칸트가 주장한 를 위한 유럽의 실천적 형태는 유럽연합이라 할 수 있다. 유럽연합에는 칸트의 를 위한 확정조항의 내용들이 포함되고 있다. 첫째, 칸트가 주장한 공화제적인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들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둘째, 보편적 환대를 위한 세계 시민권과 상업과 무역의 확대 등이다. 셋째, 이상적인 국가형태로 유럽단일국가를 모색하고 있다. 넷째, 유럽연합의 단계적 발전을 상업교역에서 법적인 지배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2.의 현대적 한계점칸트의 사상은 논리적이고 치밀하지만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허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허점에 대해서는 한계점으로 지적 받을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에 발견되는 칸트의 한계점을 지적하려한다. 칸트의 사상에서 여러 가지의 한계점이 있다.첫째, 칸트는 세계국가를 실현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물론 칸트가 살았단 그 당시에는 시대적인 제약이 상당히 많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으나 오늘날 유럽연합의 이상은 거의 실현단계에 있다.둘째, 전쟁의 존재이유를 인정하고 있다.그는 상비군의 폐지를 예비조항에서 규정하고 있으나 이를 강제법이 아닌 임의법으로 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전쟁은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금지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는데 칸트는 아직도 정의전쟁을 인정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셋째, 자본주의와 영구평화의 공존불가이다.칸트가 살던 시대는 정치와 경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중상주의 경제체제였다. 칸트가 에서 제기한 경제와 관련된 부분은 오직 상비군과 관련된 부분과, 상업적 정신에 의해 세계시민의 이념이 확대된다는 부분뿐이다. 칸트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경제 체제는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 이전의 경제체제는 정치 영역에 포섭되어 있었고, 정치 영역에 의해 규제당하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을 분리시켰으며, 오히려 사회의 제 영역이 경제 영역에 포섭되도록 하였다. 오늘날의 정치적 결정은 시장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기 일쑤이며, 대부분의 사회적 영역은 시장에 포섭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칸트가 제시한 의 체계가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3.의 비판적 수용첫째, 법의 구분 문제에 따른 비판이다.는 법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라는 내용을 칸트의 법의 분류인 국내법, 국제법, 세계 시민법에 따라 구분한다면 어느 곳에 속하는 것일까?칸트는 제목에서 ‘하나의 철학적 기획’ 이라고 단서를 달았지만, 분명 는 형식적으로 법적인 완결성을 가진 체계이며, 칸트가 자신의 이론 체계에서 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을 생각해 볼 때, 가 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하지만 이것이 나누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일관된 체계의 법이라면 예비조항이나 각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조항은 내정간섭이 될 것이며, 오히려 내정 불간섭에 대한 조항 자체도 그 효력이 모호해진다. 각조항마다 적용 영역을 분리하여 생각하더라도, 각각의 조항들이 어떤 법에 기초하고 있는지 역시 불분명하게 다가온다. 즉, 가 어떠한 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밝히지 못한다면, 그 효력조차도 모호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간략한 소개를 보시겠습니다. 아이젠하워의 풀네임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이고 미국의 제 34대 대통령입니다. 애칭은 IKE(아이크)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 재직 하였습니다. 당시 미군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았던 영국군과 그런 영국군을 고깝게 여긴 미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중재자로 활약하였고, 그에 대한 평가도 전투 지휘관보다는 대기업의 총수 같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원자폭탄 투하를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유럽 전선에 파견된 후 최초로 지휘한 작전은 미군과 영국군으로 구성된 연합부대로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횃불 작전이었으며, 이후 유럽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여 성공시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덕분에 인기가 올라가 대통령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트루먼과의 신의를 지키려고 사양했다가 그 뒤 20년간 지속된 민주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멈추려는 공화당의 요청으로 대선에 출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임기는 2차 대전 이후로 완전히 보수당으로 돌아선 공화당이 여당이었음에도 인종 문제, 노동 문제 같은 여러 부분에서 진보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어 현재도 미국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다음은 아이젠하워의 대외 정책중 뉴룩정책을 보시겠습니다. 뉴룩정책이란? 입니다. 쉽게 말하면 병력을 줄이는 대신 핵무기와 항공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정책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국방비를 늘려야 하지만, 과다한 국방비 지출이 미국경제를 인플레이션으로 몰아가서 자본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국방비의 과다지출을 유도하는 군산복합체의 성장을 우려했으며, 따라서 보다 값싸게 공산주의를 봉쇄할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경제적 파산을 피하면서 가장 적은 비용으로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는 방어체계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953년 백악관의 전략회의에서 뉴룩정책이 언급 되었고, 아이젠하워는 뉴룩정책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사예산을 축소시키는 전략이었습니다. 실제로 뉴룩은 핵전략이라는 사실이 확증되어 갔습니다. 미국은 핵우산을 조정하여 다양한 지역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협에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이젠하워의 핵전략은 국가 안보 정책의 개념적 토대가 되었고, 그 정책의 핵심적 요소는 적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오판의 가능성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억지개념의 적용이었습니다.뉴룩정책의 특징은 외교적으로 소련 영향권 하에 있는 국가를 해방시키고, 군사적으로 보복을 강조하는 것 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과 애치슨의 단순 봉쇄정책을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미국은 소련에 포로로 잡힌 나라들을 해방시키고, 아시아와 동유럽에서 소련을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트루먼 시대의 ‘봉쇄’가 아이젠하워 시대의 ‘격퇴’로 강화된 것입니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군사화, 전략화 될 토대를 갖춘 시대가 트루먼 시대라면, 아이젠하워 시대는 미국 외교의 군사화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군사화 정책의 실행은 ‘대량보복전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해방’의 개념은 동구 등의 국가를 해방시킬 수 없는 실질적 이유로 인해 사실상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였으나, 군사적 보복은 구체적 의미를 띤 것으로 소련 재래식 무기의 수적 우세가 미국 핵무기의 기술적 우위에 의해 견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이 이렇게 핵무기를 강조하게 된 이유는 당시 미국이 이 분야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재래식 무기에 비해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소련은 그 체제와 사회가 파괴될 위험에 처하지 않고는 봉쇄되지 않을 것이라는 미국의 대소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유지비가 많이 드는 재래식 군비를 감축하는 대신에 핵탄두를 증가시키는 전략을 택함으로써 국방예산을 많이 줄일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핵탄두의 수는 1000개에서 18000여개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량보복의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소련이나 중국의 침략의도를 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추구했던 핵위협에 기초한 “소극적 억지”에서 벗어나 핵전력의 실질적 사용에 기초한 “적극적 억지”라는 개념으로 미국 핵정책을 전환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대량보복전략은 달러당 ‘살상력의 증대’를 꾀하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뉴룩 전략을 핵무기만 사용하는 억지용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비용을 절감하면서 주도권을 회복한다는 이 전략에서 핵무기는 가장 중요한 본체로 작용되었지만 재래식 군사력, 동맹체제, 비밀공작, 심리전이나 대외원조 등과 같이 공동대응 구도로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 효율을 극대화시키고 비용은 줄이기에 적합한 다른 전략의 하나는 바로 CIA를 이용한 비밀공작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외정책 수단 중에서 핵무기 다음으로 대표적인 전략은 비밀공작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2차 세계 대전에서도 비밀활동을 열정적으로 지원한 바 있으며 CIA의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합니다. 아이젠하워 생각에 따르면 비밀활동은 공산주의를 억제시키는 효과의 측면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은밀하면서도 과도한 세금 부담과 예산의 감소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공산주의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뉴룩정책을 채택하여 때로는 상징적으로, 또 다른 때에는 실질적으로 밀어부치기식의 벼랑외교를 사용했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선택적으로 유화정책을 구사하기도 했습니다. 단 그러한 유화정책은 뉴룩이라는 정책을 바탕으로 한 물리적 위협을 바탕에 두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아이젠하워는 서유럽의 압박에 대응하고 미소의 긴장이 강화되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와 북경에 유화제스처를 보냈고, 이것은 1955년 제네바 4자 정상회담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둘째 1954년 12월 유엔총회의 한 연설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 사용’을 제안하기도 하였고 1955년 흐루시초프와 정상회담을 하면서 ‘영공개방제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영공개방의 개념은 군사시설의 위치에 관한 상세한 정보교환, 비행장같은 시설물을 관측할 수 있는 협정등 군사시설의 대한 항공사찰을 요구하는 것이었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즉 1945년 이래 양 진영에 의한 양극체제로 유지된 세계질서는 1956년을 지내면서 여러 진영에 의한 다극체제로 분열되었던 것입니다. 폴란드 사태(1956.6), 헝가리사태(1856.10), 그리고 가말 아부델 나세르에 의한 수에즈운하 위기(1956. 10)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기치로 내걸었던 ‘해방’의 개념이 실제적으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결과를 맞았습니다. 아이젠하워는 1956년 국내에서의 재선운동과 수에즈 사건으로 인해 동유럽 문제에 구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다르게 본다면 미국은 현실적으로 전면전을 제외하고는 소련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확고한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나 기구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56년에 일련의 사태가 발생하면서 나타난 결과는 첫째, 소련이 동구권에서 무력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강경 공산 지도자를 복귀시켜야만 했다는 것은 소련 영향권의 분열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미국과 영.프 간의 갈등은 서방동맹의 균열을 이끌었습니다. 셋째, 나세르는 영국과 프랑스에 도전함으로써 제3세계 국가들의 자부심과 야망을 불러일으켜 제3세계 독자노선을 강화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아이젠하워는 제2차세계대전 이래로 유럽우선주의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권기 후반에 이르면서 중동지역은 점차적으로 미국외교정책에서 중요 대상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질서 변화의 동력이 되었던 제3세계 문제와 결부되어집니다.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미.소편에 가담하지 않으려 하였고, 이들은 중립, 즉 비동맹을 선언하기 이르렀습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본격적인 비동맹 운동은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를 주창하면서 경제적으로 저발전된 국가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수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비동맹 외교정책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비동맹을 채택하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인종적, 문화적 동질감은 그들이 유럽과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과, 그들가가 늘어남에 따라 비동맹은 하나의 체제가 되었습니다. 비동맹 체제는 양대 강대국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냉전을 종식시키고 국가간 갈등을 제거하는 것을 대외정책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를 위해서 비동맹 국가들은 1)영토 보전과 주권에 대한 상호 존중, 2)불가침, 3)내정에의 불간섭, 4)동등한 상호이익, 5)평화 공존 등 국제관계에서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비동맹 국가들은 이러한 원칙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역적인 동맹을 결성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확실히 비동맹 외교는 제 3세계로 널리 퍼져나갔습니다.아이젠하워는 중립주의의 확산이 미국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하고, 제3세계 중립주의를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봉쇄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심지어 냉전시대 중립을 미국에 대한 적대행위로까지 파악하였는데 이런 것들은 결국 미국과 제3세계를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이젠하워의 대외정책을 중동지역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면 1953년에서 1958년 사이에 미국은 중동에서 역사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 뒤에 멀리 떨어져 있는 주변자 입장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수에즈 운하 위기가 발생하기 1년 전 아이젠하워는 오일이 풍부한 중동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그리고 이집트에서 권력을 장악한 나세르와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1955년 12월 이집트에서 아스완댐을 건설하는데 드는 비용 중 일부를 지원하기로 합의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1956년 중반쯤에 나세르가 중공을 승인하고, 나아가 소련 블록의 체코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면서 이중 잣대로 양 진영에서 지원을 받으려는 자세를 취하자 미국은 차관공여를 취소하였습니다. 상황은 악화되었고 나세르는 국유화를 선언하였습니다.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이에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의 침략을 받은 나세르 정권은 저항하였고, 이러한 일련의 저항 양상은 제국주의의 과거를 청산하려는 전형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