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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교육신학
    Ⅰ. 서론기독교교육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고 그의 구속하는 섭리를 믿으며, 신앙공동체인 교회와 세상에서 그의 구속적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또한 이 목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기독교교육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교육은 하나의 삶과 신앙의 사건이고 역사 창조의 과정으로??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건이란 기독교 복음이 인간과 그들의 삶 속에??전파되고, 전파된 그 곳에서 인간들의 응답이 일어나며, 전파된 복음과??인간의 응답이 만나서 부딪치는 그곳에 삶과 역사의 변화까지 일어나는 이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사건이다. 바로 이 교회의 커뮤니케이션과 거기서?생겨나는 사건을 모두 묶어서 기독교교육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신앙과 전달의 변증법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신학이란 무엇인가? 여기서는 기독교교육학과 관련하여 간단히 진술하면, 신학(theology)이란 단순히 그 용어가 지시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란 사실이다. 자연과학의 연구대상처럼, 신학의 연구대상은 분명하지 않다. 적어도 하나님은 결코 어떤 물건이 아니기에 연구대상이 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연구대상이 된다면, 그 순간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범위를 넘어서 계시는 영원한 분이시고, 우리의 유한한 인식에 의해 완전히 포착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기독교교육학은 신학의 영역 중 실천신학의 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루는 내용과 영역이 너무 크고 다양하여 처음부터 신학 안에서 하나의 독자적 전문영역으로 인정받았으며 기능하여 왔다. 또한 지난 수십 년 동안 기독교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교육학에 관한 보편타당한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교육학을 넓고 둥글게 수용하면서 기독교교육학에 관한 이해를 심화시켜가야 한다러한 이중적인 비판적 상관관계를 통해 기독교교육학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더욱 명료하게 정초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기독교교육학이 응용신학도 아니고 응용사회과학도 아닌 실천신학이며 실천사회과학이라는 맥락에서, 기독교교육학은 철저하게 실천학 곧 '프락시스학'(praxisology)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교육학의 존재이유는 어떤 교육적 사태를 설명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교육학은 하나의 규범적 학문으로써, 그런 사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론적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실천'을 지향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그룸(Thomas H. Groome)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교육학자들은 그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정한다. 우리 교회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새로운 지구적 공동체(new global common)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기독교적 삶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기독교교육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는 규범적 학문이요, 또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가치실천적 학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Ⅳ. 교육신학의 유형오늘날 신학의 다양한 해석과 신학이론들 때문에 어떤 신학사상에 기독교교육이 기초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교육신학의 중요한 학문적 과제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육신학의 여러 유형들을 통하여 다양한 신학사상에 기초한 교육신학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A. 보이스(Mary C. Boys)의 교육신학 유형보이스(Mary C. Boys)는 그의 저서『신앙으로 교육함』(Educating in Faith: Maps and Visions)에서 교육신학의 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복음전도(Evangelism) 유형, 둘째, 종교교육(Religious Education) 유형, 셋째, 기독교교육(Christian Education) 유형, 넷째, 가톨릭 교육(Catholic Education- Catechetics) 유형이다. 첫째로, 복음전도 유형은 회심이 교육의 중심t), 넷째, 해방(liberation), 다섯째, 해석(interpretation)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 방법들은 다른 은유를 사용하는데, 각 은유들은 교육(education), 신앙 공동체(community of faith), 인간(person), 정의(justice), 의미(meaning) 등이다. 첫째로, 종교교육 유형은 교수-학습의 상호 조정이 학습자에게 기독교 종교적 신앙, 실천, 감정, 지식, 결과를 전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맥락(context)이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유형에서 사용하는 주된 은유들은 일반 교육이론에서 이끌어 낸 것들이다. 즉, 교육 용어는 학교교육에 적용되는 것만큼 이 모델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교육자들은 기독교교육의 실천을 위한 교육적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교육 모델은 신학과 인간 과학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신학의 힘은 교육의 힘으로 말미암아 무시되는 듯한 경향이 강하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리(James M. Lee)를 들 수 있다. 둘째로, 신앙공동체 유형에서의 기독교교육은 하나의 공동체가 그 신앙을 구체화하고, 그것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하는 자연적 과정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기독교교육자들에게 교회의 참된 형성이 교육을 위한 일차적 배경과 자원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기독교교육자들에게 신앙이 몫을 나누게 되고 지속되는 자연적이고 의도적인 과정임을 일깨워준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웨스터호프(John Westerhoff Ⅲ)를 들 수 있다. 셋째로, 영적 발달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개인적 위기와 문화적, 종교적 이해가 현실에 관한 개인적 전망으로 통합되는 방법들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교육방법은 종교적 경험이 기독교교육 학습에서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파울러(James W. Fowler), 밀러(Donald Mi 절대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아동 안에는 끌어내고 개발할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에 아동이 종교적이 되기까지는 어떤 교육도 필요 없고, 오직 무엇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다림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지 앨버트 코우에게 있어서 이런 입장은 신의 창조적 진화에 모순되는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지 앨버트 코우는 인간을 계속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과정의 존재, 계속적 윤리의 창조, 창조의 과정 속에 있는 인간, 고정적 존재가 아닌 지속적 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조지 앨버트 코우는 교육의 목적을 삶의 목적에 두었다. 그가 말하는 삶의 목적은 윤리적 차원을 말한다. 그래서 교육의 목적은 지식과 능력, 그 자체의 개발이 아니라 그 지식과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목적에는 윤리적 실천의 과정뿐만 아니라 사회화 과정도 포함된다. 따라서 그는 사회복지, 사회정의, 세계 공동체 이념에 기초한 하나님의 민주주의(democracy of God) 건설이라는 사회 이상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조지 앨버트 코우는 기독교교육의 목적을 “젊은이들이 장성해서 하나님의 민주주의에 효과적으로 헌신하고, 거기서 행복한 자기실현을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와 하나님 사이에는 차별이 없을 뿐 아니라,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조건들은 이미 사회적 본능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이란 윤리적 실현과 사회화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시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민주주의 실현은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원리를 가지고 결국 인간이 이룩하려는 것이다. 교육은 이러한 창조적 인간을 형성하는데 돕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이란 예수의 가르침의 원리에 따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조직적으로 재건하는 일이다. 이로써 인간은 위대한 가치와 존엄성을 자기 경험과 창조적인 ndolph C. Miller)는「기독교교육에 있어서의 실마리」에서 올바른 신학의 발견이 교육목적, 방향설정에 있어서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내용과 방법 사이에 유기적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의 세 번째 저서인「당신들의 어린이의 종교」에서 그의 교육신학적 주제인 “인간과의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라는 관계의 신학을 중심으로 문제들을 풀어갔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교육의 목적은 신학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여 모든 학습자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도록 하는 데 있다고 정의한다. 랜돌프 밀러는 기독교교육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기독교교육의 핵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교육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개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개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부과된 부르심과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밀러에게 있어서 교과과정은 하나님과 학습자 사이의 관계에 역점을 두어야 하며, 그것은 신 중심의 커리큘럼과 동시에 경험 중심이어야 한다고 보았다.「성서신학과 기독교교육」에서 성서의 주제를 영어의 “C”로 시작하여 다섯 글씨로 요약하였는데 Creation(창조), Covenant(언약), Christ(그리스도), Church(교회), 그리고 Consummation(완성)으로 성서신학과 기독교교육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였다. 뒤이어「기독교교육과 교회」에서 교회가 선교와 교육의 장임을 강하게 부각시켰다.전체적으로 보아 밀러는 기독교교육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그 하나는 ‘관계’에로의 인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게 하는 일이다. 결국 신학과 커리큘럼, 그리고 모든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프로그램은 그 자체에 중심이 있는 것이거나, 또한 인간 경험의 개발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인도하는 도구요 매개인 것이다. 여기서 관계란 구체적.
    인문/어학| 2014.05.08| 19페이지| 1,000원| 조회(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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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의 인자론
    Ⅰ. 서론복음서의 인자(人子)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때는 언제인가? 예수께서 인자(人子)의 출처를 말씀하지 않으셨기에 그것의 기원은 학자들 사이에 다양하게 주장되어 오고 있다. 인자(人子)라는 말은 구약성경과 다른 외경 문학 가운데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예레미야스는 인자(?????????? ?)의 기원에 대해서 이 표현의 기원이 셈족어에 있기 때문에 세속 헬라어에는 인자(人子)란 명칭이 없다. 헬라어에서 인자는 적절히 짜 맞춘 구성어가 아니었고, 별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다.한편 인자(人子)의 칭호에 대한 견해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첫 번째 견해는 ‘인자(人子)’라는 예수님의 칭호는 신이자 인간이신 예수님의 인성 쪽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신성 쪽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견해이다. 기독교 역사상 고대 교회로부터 그렇게 가르쳐 왔는데, 사실상 그 고대 교회가 주로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인자(人子)’라는 히브리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를 낳은 것 같다. 이 인자(人子)라는 예수님의 칭호가 예수님의 인성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그 속에 훨씬 더 크고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두 번째 견해는 인자(人子)라는 칭호가 그 당시 유대문서 특히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s)에 유행하던 메시아의 칭호 가운데 하나였다는 주장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인자(人子)’라고 부르며 자기 스스로를 이 ‘인자(人子)’라는 용어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메시아로 나타내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인자(人子)’라는 말 자체가 유대문서들에 자주 나오지마는 이 단어 자체가 유대문서에서 메시아적 자기 칭호로 사용된 적은 없다.그러면 자유주의적 입장과 복음주의적 입장의 여러 학자들이 제시하는 인자(人子) 개념의 제해석(諸解釋) 및 인자(人子)의 배경적 이해, 인자(人子) 말씀에 대한 해석론(에스겔서와 다니엘서 중심)을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의 초월적 성격을 인식한 G. Vos는 “인자에서 묘사된 왕 직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성’인 것”이라고 지적한다.Ⅲ. 인자(人子)의 배경적 이해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설명 없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청중들이 그 호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하였든 간에, 그는 분명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하셨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자(人子)’를 사용하실 때 의도하신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또는 ‘인자(人子)’의 기원은 무엇이며 어떤 인물을 가리켰을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인자(人子)’ 개념의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A. 헬라화된 동방종교신약의 인자(人子) 개념 배후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 이전의 어떤 천상적인 인간을 영지주의적 개념으로 표현한 primordial man(原初的 人間) 등과 같이 헬라화된 동방적 개념들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 대표적인 개념으로 신화론적 Urmench설을 들 수 있다. 흔히 바벨론 신화에서 말하고 있는 Adapa가 적어도 그 이름에서만이라도 인자(人子)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실제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에 불과하고, 사람의 기원이라기보다는 인류의 기원에 더 가깝다. 여기 Adapa의 모습은 구약에서 다니엘이 말하는 초자연적 인자(人子)의 모습과는 완전히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Adapa 다음으로 Marduk이 인자(人子)의 원형으로 제시되었는데 Wincker에 의하면 Ea는 신인(The God man)이라 불리며, 그의 아들인 Marduk은 인자(人子: The son of man)라 불려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Marduk이 실제로 인자(人子)로 불려 졌다는 어떤 증거를 찾아 볼 수는 없다. 이런 설은 사실적인 것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추론적인 판단에 기인한 것이며, 또 보스(G. Vos)가 지적하기를 예수님 자신이 Marduk의 구세주적 성격을 모방하여 자신을 구주라 칭하? ??????)에 대한 해석Curtis를 비롯한 학자들은 예수의 자기 칭호의 근원인 ‘인자(人子)’의 모습이 처음으로 나타난 구약의 책은 에스겔서라고 주장한다.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93번 ‘인자’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이때는 ‘사람아’의 의미이다. 그러나 에스겔서에 인자(人子)를 이렇게 많이 사용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에스겔서에서 인자(人子)의 모습은 사람의 아들로서 고통당해야 하고 투쟁해야만 하며 먼지 있는 세상에서 힘들게 걸어가야 하는 에스겔 자신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서에 나타난 인자(人子)의 모습은 공관복음에 나타난 인자(人子)의 신적 권위 즉, 안식의 주인으로써 이 땅에서 죄를 사하시며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신적인 인자(人子)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한다. 에스겔서에서 인자(人子)의 모습도 여타 다른 구약성경에 나타난 용법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즉, 에스겔서에 나타난 인자(人子) 용례는 공관복음에 나타난 인자(人子)에 대한 예언적 기능을 갖고 있는 않다는 것이다. 단지 에스겔서에서의 인자(人子)는 단순히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기에 복음에 나타난 인자(人子)와 인자(人子) 말씀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이때는 ‘사람아’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인자(人子)의 의미는 인간의 약함과 덧없음, 무능력, 비천 그리고 하나님에의 철저한 의존성을 하나님의 지식과 힘과 영광과 위엄과 대립시키고 있다. 에스겔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영광 앞에서 자기가 인간의 아들로 너무 미미한 존재임을 깨닫고 낙담하고 있었지만, 곧 일어서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히게 된다. 에스겔서에서 인자(人子)의 사용은 나머지의 구약에서의 의미를 넘어설 수 없으며 사람의 의미가 유일한 번역일 것이다. 학자들 간에는 에스겔서의 하나님은 그 안에서 인간에게 인간의 형으로 나타났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자기를 ‘그 인자(人子)’로 칭하며 종말에 구름을 타고 천사를 동반 하고 와서 이 세상을 심판 하는 이로 나타난다고 하셨을 때(마24:30) 예수께서는 다니엘서 7장 13절에 나타나는 바로 그 ‘인자(人子)’를 두고 하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다니엘이 본 인자(人子) 같은 이는 사람과 같이 생긴 신적 존재인데 7장 18절 이하에서 그분의 존재가 잘 설명되어 있다. 그분은 종말 때에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의 대표(representative)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다니엘 13장의 '인자(人子)'라는 칭호를 통해서 당신이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들(백성들)’을 모으고 대표하는 분임을 나타내려 하신 것이다.E. J. Young은 단 7:13의 인자(人子)의 용모를 단 7:17 이하에 있는 짐승과의 구별로 이해하며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like a man”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과 짐승의 구별을 의미하면서도 구름으로서는 하나님의 신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영광을 수반하는 묘사로 보고 있다.또한 다니엘서에서의 ‘인자(人子)’ 단어의 빈도수가 에스겔서에 비해서 현저하게 낮지만, 이 두 구절이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인자(人子)의 모습과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여기에 대하여 박영희는 “의심 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인자(人子)로 간주함으로써 다니엘서의 용어들을 적용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다니엘서의 자료가 메시아적임을 또한 입증해 준다고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기태 역시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인자(人子)의 구약적 배경을 다니엘서에서 찾는다.A. Feuillet는 단 7:13의 ‘인자(人子) 같은 이’는 하나님의 범주에 속한 자로서 겔 1:26-28의 사람의 모양으로 본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H. R. Balz도 단 7:13의 ‘인자(人子) 같은 이’는 겔 1:26-28에 언급된 하나님의 현현에서 하나님의 에서 의미하는 개념을 점점 더 발전시켰을 가능성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둘째, ‘인자(人子)’는 천사를 의미한다. 이 입장은 ‘인자(人子) 같은 이’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자들(첫째, 하늘의 심판자, 구세주로 오실 인자(人子)에 대한 언급을 하는 말(3인칭) - 마태복음 10:23, 마태복음 16:27 - 28, 마가복음 8:38 등 다수의 구절들이 있다. 둘째, 땅위의 사역의 대표자로서 인자(人子)를 언급하는 말(예수 자신에 대한 지칭) - 마태복음 8:20, 마가복음 2:10, 누가복음 9:6,58, 누가복음 5:24 등 다수의 구절들이 있다. 셋째, 인자(人子)의 고통, 죽음, 부활과 관련한 말(예수 자신에 대한 지칭) - 마태복음 12:40, 마태복음 17:9,12, 마가복음 9:9- 13 등 다수의 구절들이 있다. 요한복음에 가서는 보다 더 발전된 인물로 묘사가 되어, 특히 요한복음6:62에는 미리 계신 하늘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사도행전 7:56에서는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오실 종말론적 심판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보다 더 발전된 인자(人子) 개념으로 만들어 갔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견해는 크게 나누어서 가브리엘로 보는 입장과 미가엘로 보는 입장으로 각각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 보다 먼저 기록된 시편 34:10절과 조금 늦게 써진 외경 토빗 12:15, 지혜서 18:9)에서 거룩한 자들은 천사가 아니라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문맥과 의도에 맞추어서 천사를 가리키는지 사람을 의미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니엘서 7장에서 거룩한 자들이 천사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르트만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먼저 거룩한 자들이 만약 미가엘과 같은 천사를 의미한다면 다니엘서 7장의 메시지는 결코 어떠한 의미도 없게 되고 부적절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즉 안티오쿠스 4세의 압제 하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서 끝까지 .
    인문/어학| 2014.03.20| 14페이지| 1,000원| 조회(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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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편 1편 귀납법적 연구
    성경본문말씀시편1편시편 1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관찰전체 관찰복 있는 사람 = 의인(인간론), 심판론부분 관찰문학적 장르분석1편 지혜 시(Gu 시편 전체의 표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수사적 분석문채(文彩)대조의인 / 악인반의적 평행법의 사용의 예나무(열매, 잎)/ 겨형통/ 망함반의적 평행법의 사용의 예인정 / 심판반의적 평행법의 사용의 예비교죄인, 악인, 오만한 자반복길, 인(人)유사관련어꾀, 길, 자리 - 3중 대구동의적 평행법의 사용의 예열매, 잎복 있는 사람, 의인따르다, 서다, 앉다세부 관찰6하 원칙Who복 있는 사람What율법을when주야로how즐거워 함, 묵상관찰 정리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 형태를 이루고 있다. 즉 시편 1편은 일반적으로 시편 집 전체의 “현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본래 하나로 되어 있었던 시편 1편과 2편은 후에 분리되었는데 세상의 모든 무질서와 악함에도 불구하고 장차 세계통치와 보좌를 차지하게 될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의 영광을 잘 보여주고 있다.해석연구문예적해석연구후 문맥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시인과 시편을 영송하는 하나님의 백성(개인 또는 공동체)에게 시편 3편 이하에서 기대되는 여정을 간략하게 묘사하며 ‘할렐루야’를 외치는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제안한다.인과관계인과응보말씀 즐거워하고 묵상 → 형통, 인정악인들의 꾀 따름, 죄인들의 길에 섬,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음 → 심판의인과 악인의 대조는 시편 1편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1~2절은 복 있는 사람, 즉 의인은 악인이나 악한 일에도 멀리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삶 가운데서 삼가 지키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와는 반대로 4절에 악인에 대해 나오는데, 악인은 의인과는 달리 열매가 없는 겨와 같다 라고 하고 있다. 6절에서도 의인과 악인이 대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는 의인을 기뻐하시지만 악인들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같이 의인과 악인을 대조시키므로 해서 교훈적인 효과를 높이려는 시도가 시편 곳곳에서 나타나며 이들은 지혜의 영향을 받은 시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를 정하셨고, 사람은 비록 그 질서를 전되고 1편 4절의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는 상징적 평행법 사용의 예에 해당한다. 그리고 “의인들의 길”(6절)과 유사한 표현은 각각 잠언 1,15와 4,19; 15,9, 그리고 4,18; 12,28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의인”과 대구로 자주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나 인간에 대해서나 “악한 사람” 또는 “불충한 자”(impious)이다. 시편에서 불충한 자는 주님께 충실한 자들을 미워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이기도 하다(시편 17,13; 109,2.6.7; 140,4). 보편적 의미로 이해되는 “죄인들”이며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오만한 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냉소적인 사람들이다.악인을 묘사하는 장면에는 “겨”가 등장한다(4절). 겨는 부정적 상징이다.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와 반대로 겨는 먼지처럼 가볍고 견고하지 않아 작은 바람에도 흩어지는 덧없는 실체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자주 악인을 쓸모없는 겨에 비교한다. 이처럼 악인은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은 존재여서 심판 때에 의인들의 무리에35) 시편에 사용된 “나무”의 상징은 예레미야서에서 귀중한 상징으로 사용된다(렘 17:7-8; 참조, 시편 92:13-14).시편 1편은 전체 시편의 타이틀로서 매우 잘 들어맞는데, 그것은 분명하고 강하게 주님에 대한 순종과 희망을 요구한다. 시편 1편1절의 첫 마디인 “아쉬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에서 참된 기쁨을 느끼는 삶”을 경축하는 것이다. 이기주의 성향을 보이는 오늘날의 행복 개념과는 다르게 나타나 있고, 시편 1편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개념을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주님의 길을 선택할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의인’과 ‘악인’의 대조를 통해서 행복의 길을 제시한다.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비롯되는 위험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 첫 번째는 죄로 이끄는 악인들의 결의이다. 두 번째는 죄인들이 죄인들의 길에 설 때 찾아온다. 그렇게 하면 를 신뢰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해준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길을 떠났기 때문에 파멸의 길, 멸망의 길로 가게 됨을 알린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있는 풍성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신학적해석연구주석(註釋)시편은 “복 받은 자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 “복 있는 사람”이란 원어는 어떤 사람이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을선포하거나 서술하는 형식이다. 시편기자는 이러한 복 있는 사람의 특성을 먼저 부정적인(또는 소극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런 특성은 복된 삶을 누리기 위한 인간편의 지혜(조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부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복 있는 사람은 먼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한다. “악인”이란 “빚진 자”라는 설명도 있으나 여기서 핵심적인 의미는 “의인”의 반대말로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무신론자들, 반신론자들을 성경은 “악인”이라고 말하고 있다(시 10:2-11) 시편 1편은 지혜의 관점에서 나온 서문을 제공해 주고 있는 반면에, 시편 2편은 시편 전체에 대한 예언적 관점과 접근 방법을 제공해 주고 있다.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자신의 말과 교훈을 앞세우며, 그의 모든 행동과 말이 무례하고 교만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시편 1편에서 말하는 “악인”은 단순히 도덕이 해이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주의 율법을 멸시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꾀와 모략으로 사는 사람이다. “꾀”는 ‘자리’, ‘회의’로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꾀로 살아가는 악인들의 모의 하는 자리에 가지 않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지혜이며 특징이다. 둘째로, 복 있는 사람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여기서 “죄인”의 의미는 제 갈 길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길”은 구체적으로 행위를 뜻하므로 칼빈은 이 ‘죄인들의 길’을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나이다.” 하는 이런 고백이다.시편 기자는 3절에서 복 있는 사람의 모습에 대해 직유법을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확증해 주고 있다. 즉, 복 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하여 그 풍성한 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사람을 자주 나무에 견준다. 지혜 문학의 기타 다른 곳에서 사용된 묘사에 의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본질을 시냇가에 심겨져서 철따라 열매를 맺고, 또 팔레스타인의 아열대성 기후에서 상당히 자주 나타나는 현상인, 무더위와 한발의 영향을 받는 여름에도 그 잎이 시들지 않는 이른바, 수액과 원기로 충만한 푸른 나무와 비교된다. 시냇가는 우기에만 일시적으로 흐르는 와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물이 결코 마르지 않아 물이 계속 공급되는 관개수로를 말한다. 이 수로 곁에 옮겨진 나무는 무성하게 자랄 것이며 많은 잎과 열매를 낼 것이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은혜의 은밀한 영향력을 항상 공급받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그들의 구원에 유익하게 이용되지만 그 반면에 악인들은 갑작스런 폭풍에 휩쓸려 사라져버리거나 작열하는 열기에 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는 구절은 의인이 계획하는 모든 일에서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것이라는 것을 낙관적으로 가정하는 강력한 신앙이지만 이것은 ‘보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삶의 유형의 결과인 것이다. 즉, 이 사람이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상급이라기보다 오히려 특정한 인생길을 걸은 열매이다. 그러므로 의인이 형통하게 되는 것은 그가 창조주의 뜻을 따라 지혜롭게 살았다는 것을 반영해 준다.악인들의 삶은 4절 하반절의 간단한 직유를 통하여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다. 이 4절은 3절에서 나타난 의인의 형통함과 극적으로 대조적인 모습을 회화적 언어로 비교하고 있다. LXX에서는 이것이 강조되어 “그렇지 아니함이여”가 반복되어 있다. (ο?χ ο?τω? ο? ?σεβει?, ο?).
    인문/어학| 2014.03.20| 13페이지| 1,000원| 조회(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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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트모더니즘과 실천신학(설교학)
    Ⅰ. Post-modern 사회 속에서 실천신학(설교학)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가치상대론과 더불어 감성적이고 의지적인 자아로 감각적인 삶을 추구하며 공동체는 해체되어지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종교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절대유일의 진리를 부인하며, 또 초월적이고 영원한 범주와 보편적인 가치와 전통, 역사와 인생의 의미마저도 부인한다.우리는 이런 상대주의적 가치관을 극복하고 절대적 진리와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존중하도록 권면하고 가르쳐야 한다. 또 교회와 사회에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우리가 먼저 희생과 섬김의 자세를 취해야 하며 바른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바른 실재의식을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종교다원주의는 성경이 기준이 아니라 현대의 철학과 가치상대주의를 근거로 삼고 있다. 그 다양성과 다원성의 강조는 절대적인 가치의 상대화를 초래하며, 동시에 기존에 존중받지 못했던 ‘주변’이 ‘중심’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동반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가치의 상대화는 필연적으로 각 종교의 상대화를 초래하게 되고, 이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다원화된 종교 사회 속에서 오늘날 기독교가 다원주의의 거센 도전을 만나고 있지만, 우리가 성경의 진리로 무장하고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면 그러한 도전들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직면해 있는 위기는 설교자의 정체성의 위기이며 강단의 위기이다. 그러므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설교자 자신의 갱신이 요청된다. 설교자 갱신은 '인식의 전환'에서 비롯되며 우리 설교자들은 우리를 늘 새롭게 하시는 성령에 의존함으로써 성령론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설교자들이 갱신될 수 있는 것이다. 설교자 갱신은 설교 갱신과 함께 교회 갱신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설교자 갱신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이 시대의 설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로서 소명의언자적 감각과 이 시대 속에서 고통당하는 인간과 모든 피조 세계에 연대하는 제사장적 연대감을 가지고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설교해야 한다.Ⅱ. Post-modernism의 전반적 특징 및 교회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현대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이요 반작용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를 합리적 영역으로 제한하거나 인간의 이성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는 현대 정신을 거부한다. 둘째, 새로운 세계관이다. 현대 세계관이 기계적이요 결정론적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은 관계적이요 비결정론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를 완성된 기계장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되고 계속적으로 창조되는 내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역동적 연계체로 간주한다. 셋째, 통전주의(wholism)다. 인간과 객관적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현대 정신을 지배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정신이 분리한 것을 다시 결합하며, 인간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연속성을 주장한다. 전체에 대한 관심이 포스트모던 의식에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적 경향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유일성을 부정하고 다원성을 강조한다. 인터넷 시대가 가져온 지구촌의 온라인의 네트워크는 지리학의 시대를 종언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는 세계관의 종말이 선언되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다양한 세계관과 다원주의의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올바른 세계관이 무엇인가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하워드 스나이더(Howard A. Snyder)는 “교회의 세속화와 종교적 상대주의의 등장이 현시대의 동향이라고 진단했으며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의 결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물론과 인본주의와 괘락주의의 세상 철학에 너무 쉽게 무너지고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진리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생활과 가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근거한 불신자들의 생활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또한 절대적 진리와 보편적 사실들에 대한 표적인 특성이 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철학이나 학문적인 흐름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사회의 다국적 자본주의 화, 후기 산업사회화, 소비 사회화, 정보사회화라는 사회 성격의 변화 속에서 체계화되고 있는 새로운 문화 논리인 것이다. 그것은 근대성에 근거한 현존하는 모든 것을 새로운 발전의 밑받침으로 삼고자 하는 현대성의 본질이다. 현대성,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체적 경향은 근대성에 기초한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상대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며,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원성을 지향한다.포스트모던 시대의 사상은 다른 시대정신들도 그렇지만 오늘날 현대의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할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 현상들 배후에 있는 세계관은 비교적 공통적이며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이 세계관이다. 또한 교회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도 개개의 현상들보다는 이러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비복음적, 비성경적 사상의 영향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을 복음으로 구원해야 한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과 정보혁명에 의해서 현대사회는 대변화(megatrend)가 진행되고 있고 교회가 복음을 전해야할 상황과 대상 또한 과거와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같은 달라진 문화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 교회가 현대적인 흐름과 사상을 잘 모른다면 복음전파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해나갈 것인가? 설교와 전도는 영원히 변치 않는 복음과 항상 변하는 사람 사이에서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시대의 흐름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세계관을 바르게 이해하고 또한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 기독교 안에서도 경전과 전통적인 교리, 또 교회적 규범을 부인하려 하고 탈경전화 내지 탈교리화의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신앙과 교회를 성경과 바른 교리 내지 신학 위에 세우려 하지 않고 체험어 세계교회의 흐름마저도 캄캄한 실정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의 전반적 현실은 현대 문화추세와 다양한 세계관들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고 하겠다. 관심의 부재, 전문가의 부재와 아마추어리즘, 미래에 대한 비전의 부재, 전략의 부재, 후원과 연구의 부재 등 문화의식의 총체적 부재는 문화세대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 선교는 물론 기성인 전도에도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실정에서는 21세기를 향한 세상의 빛과 소금은 물론이고 교회 문화 자체에 대한 대안도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효과적인 목회를 하기 원하고, 그것의 유혹을 피하길 원한다면 교회는 이 시대의 정신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과 정보혁명에 의해서 현대사회는 대변화(megatrend)가 진행되고 있고 교회가 복음을 전해야할 상황과 대상 또한 과거와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같은 달라진 문화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 교회가 현대적인 흐름과 사상을 잘 모른다면 복음전파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해나갈 것인가? 설교와 전도는 영원히 변치 않는 복음과 항상 변하는 사람 사이에서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시대의 흐름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세계관을 바르게 이해하고 또한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레너드 스윗은 이와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21세기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으로 EPIC 모델을 제시한다. EPIC은 Experiential(경험), Participatory(참여), Image-driven(이미지 중심적), Connected community(관계성)의 약자를 추린 것이다. 먼저, 포스트모던 세대는 경험을 중요시 한다는 것인데, 진리를 아는 것 보다 자기 것으로 체험하고 싶어 하며, 예배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원한다.227)또 참여하기를 원하며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수여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계성을 중시하 흐름마저도 캄캄한 실정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의 전반적 현실은 현대 문화추세와 다양한 세계관들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고 하겠다. 관심의 부재, 전문가의 부재와 아마추어리즘, 미래에 대한 비전의 부재, 전략의 부재, 후원과 연구의 부재 등 문화의식의 총체적 부재는 문화세대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 선교는 물론 기성인 전도에도 큰 장애가 될 것이다.다원주의에 직면해 있는 기독교 교회는 오늘 날의 세계화 및 지역화 추세에 걸 맞는 보편교회적 및 지역교회적 신학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생태계 위기 속에 있는 교회는 창조신학에 근거한 환경보전 운동, 정의와 평화운동, 생태 및 공생신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교회는 착취와 억압,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에 항거하는 신학을 펼쳐야 한다. 지역적, 문화적 상황에 맞는 신학을 세워 나가면서도 세례, 성만찬, 직제 등을 둘러싼 공동체의 삶과 사도적 신앙을 중시해야 한다. 또한 다양한 여성신학도 전개해야 한다. 교회는 진보사고와 낙관주의에 기초한 가치관과 세계관의 붕괴 속에서 소망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는 사도적 신앙에 입각한 자기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교회는 인류사회와 자연을 위해 이론을 넘어서는 사회참여와 실천적 신학을 제시해야 한다.Ⅲ. 성경적 목회자1. 신학적 정체성을 겸비한 목회자 : 하나님의 나라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목회자 (이동원 목사)미래 정보화 사회가 가져올 사회 문화적, 목회 환경적 변화는 예상을 할 수 없을 만큼 실로 엄청난 변화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런 변화를 민감하게 의식하고 그 변화의 속도를 의식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미래를 향해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미래 정보화 사회에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올바른 목회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무엇보다도 먼저 목회자가 생각하고 대처해야 할 문제가 신학적인 정체성이다. 미래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신학적인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다. 사실 신학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일이다.
    인문/어학| 2014.03.20| 5페이지| 1,000원| 조회(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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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평가A+최고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적용’에 관한 연구Ⅰ. 서론오늘날 인간은 다양한 영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며, 크리스천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부족으로 기독교 전반에 미치는 그 영향력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안일한 태도로 대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크리스천은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무책임하게 관망해서는 안 되며, 이 시대의 흐름에 대한 바른 인식과 통찰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기독교교육의 영역에서 본질적인 신앙교육을 위한 노력과 대안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가치관 혼란이나 정체성 결여, 그리고 갈등 상황의 문제는 어느 시대에서나 존속하여 왔지만 오늘날과 같은 스마트시대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특히 늘어나는 청년들의 자살률, 성의 개방으로 인한 부작용,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감각적 쾌락주의, 공동체 의식 결여 등으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병폐들은 결국 가치체계의 총체적인 결핍과 정체성 혼란에서 야기된 현상들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또한 스마트세대들에게 기존의 절대적인 가치관이나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회의나 반항이 눈에 띄게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로 더 이상 기존의 진리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기존의 절대주의적 사고에 과격한 자세로 대항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문제는 이처럼 스마트세대들은 시대적인 흐름과 풍조들에 편승하여 비기독교적 가치관을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문화 속에 팽배해 있는 세속적 가치관들이 비기독교 청년뿐만 아니라 기독청년들의 가치관과 정체성 형성에 동일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 기독교 교육차원에서의 시급한 대책이 필요한 실정에 놓여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청년들은 그들의 기독교적 가치관과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의 가치관 사이에서 심각한 대립과 마찰을 경험하고 있다.그러므로 본 연구는 스마트세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들을 위한 교육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기독교교육의 목적과 본질이 되시는 예수님의 교육방법에 근거한 기독교교육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작은 시도라 할 수 있다.Ⅱ.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목적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교육할 때에 예수님을 닮는 교육에 전념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교육 목적을 가지고 가르쳤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끝을 정확하게 맺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참된 기독교교육의 마지막 결과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그들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데 있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교육의 목적인 구속의 목적, 인격의 성장, 생활문제를 해결시키는 기술, 육체적·정신적 치유, 하나님 나라의 일꾼양성을 논하고자 한다.A. 구속의 목적예수님의 교육의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말씀의 선포였으며 가르침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부르기를 “소식의 전달자”라고 하지 않고 “사람을 낚는 어부(마 4:19)”라고 하셨다. 랑게(J. P. Lange)는 “사람을 낚는 어부”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제자들이 인내와 헌신으로 바다와 같은 세상으로부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라고 밝힌 것처럼 예수님의 모든 선교활동과 교육활동의 목적은 인간의 구속이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교육 목적은 마태복음 6:33과 그가 직접 명령하신 선교의 대 명령인 마태복음 28:19-20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제시 되고 있는 그의 교육 목적은 첫째, 영혼 구원 둘째, 성경 교수(敎授) 셋째, 교인의 생활지도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교육 목적의 첫째는 영혼구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은다고 한다. 예수님이 인용한 구약의 총수는 모두 21권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하시어 설명하는데 조금도 막히는 데가 없었으며 통달하셨다. 그런데 사복음서에 보면 시편과 신명기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 같으며, 예수님의 생각은 구약의 이념과 구약의 언어에 나타난 특색(特色)에 배어 있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사용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프라이스(J. M. Price)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 교육의 내용을 성경으로 시작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둘째, 교훈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셨으며 셋째, 성경을사용한 목적은 예수님의 교훈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교재라기보다는 하나의 참고 구절로 사용했다. 성경은 존중되고 권위가 있기 때문에 성구의 인용은 교육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때로 예수님은 강조 격으로 더 나아가서 최종적인 전거(典據) 혹은 마지막 법정으로 성경에 호소하셨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구약을 인용하셨는가? 여기에 대하여 헤르만 호온(H. H. Horne)이 자세하게 해답을 해주고 있다. 첫째, 형태는 구약성경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시면서 인용하고 계신 것이다. 둘째, 간접적으로 구약을 인용하시어 교훈을 하시었으며 셋째, 예수님께서 인용한 또 다른 하나의 형태는 어느 성경에서 인용 하셨는지 그 출처를 명확히 찾기가 어려운 것이 발견된다. 넷째, 예수님께서 구약을 인용하신 형태는 구약에서 비슷한 구절을 근거로 하여 설명을 확대시킨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에 이미 기록된 성경말씀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또는 또 다른 형태로 수많이 인용하시어 교훈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전적으로 구약만 의존하고 독창적으로 창안해서 가르친 것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자신이 진리의 현현이고 또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진리의 교훈을 객관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과 연계하여 설득력 있게 활용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시된 하나님의 교육 자료로서의 모델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요 14:8-9). 교육은 추상적인 이념의 전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속에 열매로서 나타날 때 그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목표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엡 4:15). 예수님은 충실하게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그의 메시지를 구체화하셨다. 그의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며 사랑하라고 명하시기 전에 그는 이미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셨으며(요 13:12-17, 34-35),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그의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후에 그는 그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다.2. 이해의 원리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이나 수준에 설 때 상대방의 생각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을 생각하고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다(빌 2:6-7). 이해란 관심과 흥미를 갖는 일이며,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결국은 섬기는 행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이해의 원리를 잘 보여준다.3. ‘함께 있음’의 원리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 중에도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막 3:14a)라는 목적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함께 있음’은 교육 중에서도 중요한 원리로 작용한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삶의 조력자로 또는 모사(상담자)로 우리의 모든 요구에 응하시는 것 같이, 교사도 학생의 마음에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함께 있어’ 삶을 조력할 수 있는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임을 명심해야 하겠다.4. 접촉점의 원리교사와 학생사이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삶을 통한 것이라는 증거다. 제자들은 스승인 랍비와 친밀히 사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승인 랍비가 ‘말하는 것’과 그의 인격과 행동의 관계를 ‘볼 수’있는 기회가 있었다. 스승인 랍비의 교훈도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의 행동으로 나타난 본은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생명력 있는 교제 생활을 친히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이를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셨다. 간단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교훈은 “말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학생들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따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사로서 역할을 감당하려면, 자기의 말하는 내용이 자신의 인격과 행동에 일치되도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B.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방법헤르만 호온(Herman Horne)은 그의 저서 「예수님의 교육방법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방법론을 무려 20여 가지가 넘게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연구를 하게 된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님은 때로는 개인을, 때로는 몇몇 사람을 그리고 때로는 큰 무리를 상대하셨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호기심만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헌신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호의적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적대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살펴봄으로써 우리들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1. 비유법(Parables)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교사로서 사용하셨던 교수법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말씀하시곤 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들을 ‘비유’라고 부르고 있다. 비유라는 말의 의미는 “비교하기 위해 한 사실을 다른 것과 같이 놓는다”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파라볼레는 공관복음에 48회, 히브리서에2회로 모두 50회 등장하고 있다. 공관복음의 기자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목적들을 직접적으로 제시다.
    인문/어학| 2014.03.20| 13페이지| 1,000원| 조회(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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