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 소문의 벽1. 작가 이청준 소개2. 작품 ‘소문의 벽’ 소개3. 시대적 배경을 통한 작품의 이해4. 제목 ‘소문의 벽’ 의미1. 작가 이청준 소개작품 ‘소문의 벽’ 작가인 이청준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하셨고 2008년 7월 31일 에 별세하였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를 졸업하였고 1965년에 사상계 공모전에 단편소설 '퇴원'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대표작품으로는 병신과 머저리, 이어도, 눈길 등 여러 작품들이 있다.2. 작품 소개‘소문의 벽’은 1971년에 발표된 작품으로서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액자식 구성은 하나의 큰 이야기 안에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가 있어 마치 그림을 담은 액자처럼 짜여진 글의 형식을 말한다. 우연히 만나게 된 소설가 ‘박준’의 이상 행동에 흥미를 갖고 추적해 가는 잡지사 편집장인 ‘나’의 이야기 안에 박준이 쓴 세 편의 소설이 작은 이야기로 들어가 있어 박준의 상태를 나타내주고 있다.3. 시대적 배경을 통한 작품의 이해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반공문제와 경제문제의 위기가 동시에 닥치면서, 숨겨져 있던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고 지식인과 대학생의 데모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것을 폭력으로서 다스렸고 점차 위기가 닥치자 급기야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를 단행하고 이를 통해 유신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운동 또한 정부가 폭력으로서 무차별하게 억압하던 시기였다. 또한 언론 검열과 통제를 통해서 국민의 입과 귀를 막았으며 경제부흥, 반공을 내새워 사회를 획일화 한 시대였다.따라서 소설가였던 박준은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순들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소설을 통하여 쓰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전부 검열하고 억압한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펼칠 수가 없는 세상이 싫어 박준은 미친 사람인 척 행동하면서 정신병원으로 제 발로 찾아들어가는 것이다. 박준이 생각하기에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으면 세상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도피처라고 생각하고 들어갔을 것이다.내부 이야기로 나오는 박준의 소설 세 편은 ‘나’가 박준의 심리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는 매개체로서 작용한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박준이 생각한 당대의 갑갑한 현실을 알리고자 하는 목소리가 실려 있는 글이다.첫 번째 소설은 꾸중을 듣거나 곤란한 일에 처했을 때 일부러 자는 척 하는 가사상태의 잠에 빠져든다는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외부의 어떤 요인을 통해 자꾸만 움츠러들고 피하고 싶어서 선택한 수단이 가사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두 번째 소설은 마치 현대판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사장의 비밀을 알게 된 운전수가 해고당하는 게 무서워서 비밀을 보장하자 다짐하면서 지내다가 그 압박에 못 이겨 노이로제에 걸려 해고당하게 된다. 어떤 말을 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사장의 비밀이라는 것은 권력자, 지배자의 비리라고, 결국 운전수가 해고당하는 것은 그 권력자, 지배자의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나’의 잡지사 동료인 안 형은 박준의 소설을 받아놓고도 “공연한 말썽”이 생길 것이라며 장기간 보류상태로 놔둔다. 또한 다른 잡지사인 R사에서도 박준의 소설을 연재 중지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도 그런 게 박준의 소설은 억압된 사회를 암시하고, 사회 지배자의 비리를 암시하기 때문에 절대 민중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글이기 때문이다. “공연한 말썽”이라는 것은 바로 작품을 발표했을 시에 생기는 자신들에게 돌아올 보복이라고 볼 수 있다.세 번째 소설은 주인공인 G가 심문을 당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데 6·25 전란 중에 겪었던 일을 설명한다. 어둠속의 밝은 전짓불 뒤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모를 존재가 어느 편이냐며 물어오는 그 공포를 떠올리면서 자신은 그 어둠과 전짓불이 너무 무섭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박준도 정신병원에 있을 때 어둠을 무서워해서 항상 불을 밝히고 있었고, 어느 날 병원 전체가 정전이 되 간호사가 불빛을 들고 들어갔을 때 발작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G도 어둠을 무서워하고 박준도 어둠을 무서워한다. 따라서 박준은 소설 속 G를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또한 어둠은 국군이냐, 인민군이냐. 간단히 말해 흑이냐 백이냐를 강요하며 만약 선택이 잘못된다면 철저한 보복이 따르는 상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또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인물은 바로 박준이 찾아갔던 정신병원의 원장인 김 박사라는 인물이다. 매우 권위적이고 자만감이 넘쳐 보이는 인물이다. 박준은 진술 공포증을 가지고 있어서 물어보는 것에도 대답하지 않고, 거짓말로 일관하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김박사는 진술을 통해서 박준을 치료한다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모순적인가!
- -우리나라는 유래 없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급속한 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경제나 기술발전. 모두 좋은 일이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나라는 고령화의 속도도 무지하게 빨라또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고령화로 인한 문제점을 나타내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과 우리의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제시해준 글이 바로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이다.이모작이라고 하는 말은 1년에 농사를 두 번에 걸쳐 수확한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는 것. 바로 ‘두 인생 체재’를 통해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자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그러나 지금 2012년에는 기술, 의학 등 많은 것들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100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들이 노인이 되었을 때쯤에는 또 어떤 기술이 발전해서 누구나 다 100세를 훌쩍 넘기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50에서 60세만 되어도 정년퇴임을 할 나이라며 이야기한다. 그럼 나머지는? 일 안하고 자식한테 손 벌리면서 빈둥빈둥 살아야 하는 나이인가? 이 글에서는 새로운 일을 통해서 두 인생 체재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고령화도 문제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 저출산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솔직히 아이를, 여러 명이 문제가 아니라 한 명 제대로 키우는 것도 벅찬 사회라고 생각된다. 요즘은 옛날처럼 여성들이 집에만 박혀 가사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도 활발한 사회진출을 통해 발전을 꾀하고 있다. 사회일을 하면서 아이 양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사회제도가 제대로 뒷받침해주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싶겠는가! 대표적인 문제는 교육비가 아닌가 싶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교육비만 몇 천만원은 쏟아 부어야 하는 실정에 그 돈을 벌려면 여자도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를 돌보는데 많은 어려움이 생기고 그러면 결국은 아이 자체를 포기하고 만다.여자들한테 출산 장려정책만을 펼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제도가 충분히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면 출산장려를 많이 광고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출산율이 올라갈 것이라 생각된다.점점 노인인구가 많아지고 젊은 사람들은 출산율 저하로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마냥 젊은 사람들에게 기댈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통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작가는 바라고 있는 것 같다. 50세를 전후로 이어지는 새로운 삶은 어떤 모습일지 잠깐 상상해보았다. ‘두 인생 체제’라는 말 자체가 마치 사람이 한 인생 안에서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선에 오르는 한 번의 큰 전환점을 도는 것과 같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굳이 먼 미래 보듯 할 일이 아니다. 지금도 많은 획기적인 기술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고, 그에 따라 인간의 수명도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당장 우리 세대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제도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우선 50세에서 60세 정도가 되면 우리는 이제 정년퇴임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그때 일자리를 놓아버리면 100세 세대인 우리들에게 무얼 먹고 살라는 말인가? 마냥 아들딸들한테 손 벌리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이 정년퇴임을 하는 제도부터 조금씩 늘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두 인생 체제를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그 시작이 굳이 다른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현재의 일을 좀 더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두 번째 인생을 천천히 계획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본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자신이 가장 기억하고 싶은, 가장 행복한 시간은 언제인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조차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 않다. 내가 얼마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지, 진정으로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조금은 관심을 가지게 된 제목이다.제목은 ‘행복한 시간’이라고 해놓았으면서 정작 이 글에 나오는 사람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집안 좋고 대학 강사로 일하고 있지만 성격 사납고, 삶을 거지같이 여겨 하루빨리 죽기를 소망하며 자기 엄마에게 막 대하는 여자 유정과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겪어 오며 의욕 없이 현재 교도소 사형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남자 윤수가 이야기의 축을 이룬다.처음부터 두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 의욕이 없어 하루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한다는 점이 그렇다. 죽기 위해서 유정은 직접적으로 자살시도를, 윤수는 사형수로서 빨리 죽고 싶다 외친다. 유정은 남부러울 것 없는 돈 많고 좋은 집안에서 교육받으며 살았다. 가족들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고, 유정 본인도 대학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유정은 과거에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하고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부인 당했다는 크나큰 정신적 고통 때문에 삶을 부정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반면 윤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며 거리를 전전긍긍해야 했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은 병 때문에 눈이 멀어 어린 나이에 죽고 만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세상에 대한 미움을 품은 채 살아가다가 여의치 않게 공범의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되어 사형수로서 살아가게 된다. (윤수는 단순한 절도였을 뿐,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다.) 전혀 상반된 주변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지만 과거의 상처로 인한 고통, 그로 인해 생긴 삶을 끝내고자 하는 의지라고 하는 공통점이 두 사람을 진심으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사실 유정은 교도소에 간다는 것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고모인 모니카 수녀의 제안으로 억지로 끌려 온 거나 다름없었고 윤수를 만나는 일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수를 만나고 이야기를 하면서 유정은 어딘가 윤수와 자신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말의 동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유정과 윤수는 점차 가까워진다. 자신의 과거의 상처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위로받음으로써 상처가 치유됨을 느끼고 삶의 의욕을 찾게 되는 정신적인 귀중한 존재가 된 것이다. 단순히 남녀의 사랑, 멜로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보다 훨씬 깊고 중요한 무언가로서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된 것이다.어쩌면 둘은 처음부터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 곁에는 자신을 보듬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정은 자신을 감싸 줄 거라고 믿었던 어머니에게 부정당했고 윤수 또한 어머니에게 버림받았고 아버지의 폭력을 겪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하나 없었던 서로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서 이어진 것이다. 상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반대로 상대가 자신에게서 본인을 발견하는, 마치 거울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더 이해해주고 싶고 보듬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게 된 것이 아닐까.유정과 윤수는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1시까지의 짧은 만남을 가진다. 그 시간 속에서만큼은 두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목요일의 만남이 기다려지고 그리워하게 된다.글에서 유정과 윤수의 목요일에 대한 그리움이 직접적으로 나타낸 부분이다. 서로의 존재로 인해 목요일을 특별하게 만들고, 목요일을 기다리는 마음이 서로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하고 간절한,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기대하는 목요일. 10시부터 1시.그렇게 시간은 간다. 그러나 그런 즐거운 시간을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없었다. 윤수는 언젠가 죽어야 할 사형수가 아닌가!윤수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마냥 둘의 만남이 즐겁게 읽히더라도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그렇기에 이 시간은 더욱 중요해진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만남이기에 두 사람은 이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즐겁게, 그리고 소중하게 보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둘이 같이 보내는 이 계절이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는 마지막 계절일 수도 있기에 계절의 변화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기억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다.그렇다. 짧은 그 세 시간만큼은 어떤 것도 둘을 방해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런 상처투성이 과거의 기억이 둘을 이어주고 있는 다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바로 지금, 서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이 순간에 최대한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한 시간은 바로 지금도 흘러가고 있고, 흘러가고 있는 이 행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그렇게 시간이 가고 어느새 유정과 윤수가 처음 만났던 계절인 겨울이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 것이 왔다. 윤수의 사형집행명령이 떨어진 것이다.윤수 본인과 유정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윤수는 어찌되었든 가슴에 빨간 딱지를 붙인 사형수였고 언젠가는 이 날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도 만나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한한 만남이었기에 항상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주며 충실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지 않았으면 했던 이 날이 드디어 닥치고야 말았다.일주일에 세 시간뿐인 짧은 만남이지만 그것을 통해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찾아왔던 윤수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애초에 윤수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단지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에 공범의 살인죄를 뒤집어쓰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언제 죽나 하는 태도로 보내왔다. 그러나 자신처럼 큰 상처를 가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유정을 만나면서 살고 싶다는 의지가 자라난 시점이었다. 그랬기에, 살아가는 것이 절실해졌기에 그에게 떨어진 사형집행명령은 더욱 아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감상문아무리 모르더라도, 거대한 공장 기계 속에서 부품을 조립하고 있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번쯤 보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모던타임즈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장면을 제외하고는 영화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모던타임즈. 코믹스러운 캐릭터로 유명한 찰리 채플린 주연의 영화라는 점,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상을 반영하여 물질문명의 사회와 인간의 기계화를 비판, 그것을 코미디로 승화시켜 풀어낸다는 점 정도밖에는 아는 게 없었다.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으면서 단순한 사회비판 정도가 아니라 그 당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의 고달픔과 슬픔까지도 대변하고 있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해보았다.영화는 찰리 채플린이 일하고 있는 공장을 무대로 시작한다. 공장은 철저하게 시간제로 돌아가고 있고 사람들도 기계처럼 딱딱하게 제 일을 다하고 있다. 공장 사장은 모니터로 공장 상황을 지켜보며 지시를 내린다. 찰리 채플린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물며 잠시 쉬고 있는 동안에도 화장실 안의 모니터를 통해 철저히 감시한다. 공장 내에서는 쉬는 것도 마음대로 쉬지 못하고 그저 하라는 대로 얌전히 잘 해야 하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끝없는 감시와 꽉 막힌 노동뿐인 삶에서 노동자들은 과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일을 하면 돈은 벌 수 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다.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권리조차도 무시되는 그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사회인가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오로지 돈이 되는 물건을 생산하는 것에 치중하여 시간을 쪼개고, 빠르고 정교하게 공장을 돌리는 모습이 너무나 삭막하게만 보였다. 심지어 밥 먹는 시간도 줄이기 위해서 밥을 먹여주는 기계도 등장한다. 그렇지만 그딴 기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인간은 인간이지 절대 기계가 아니다. 기계는 인간이 더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만들어낸 도구일 뿐이지 인간이 기계를 보조해 주는 역할이 아니다! 인간이 기계에게 맞춰줘야 할 것은 없다는 말이다.결국 찰리 채플린은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모던타임즈에서 가장 유명한 그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 찰리 채플린이 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냥 사진으로 본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기계가 멈췄는데도 기계 부품을 조작하려고 하는 모습, 나중에는 부품이 아닌 것에도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노동자들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힘듦을 나타내는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는 1936년에 개봉했지만 이 때와 현재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난 성공해야 해!’ 라던가 ‘돈을 많이 벌어서 땅도 사고 집도 사고 잘 살아야지.’ 라면서 일에 몰두하고 허구헌 날 야근을 한다. 물론 지금이 훨씬 경제 기반도 좋고 삶의 질도 향상되었지만 돈과 물질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나아지지 않았다고 본다. 현재는 너무 일만 하다못해 일을 안 하면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일 중독증’이란 문제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 정신이상을 일으킨 찰리 채플린의 모습이 바로 현재의 일 중독증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시위군으로 몰려 끌려간 감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일렬로 줄을 서고 나란히 식당으로 들어선 뒤에 식사를 하고 다시 소리에 맞추어 방으로 들어간다. 마치 인위적으로 줄을 세워 놓은 인형과도 같은 모습이라고 느꼈다. 무엇이든 똑같이 맞추어놓고 정렬하는 것이 기계와 같다.한편에서는 취직을 못한 아버지와 동생들을 둔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그러다 아버지를 여의게 되고 동생들과도 헤어지면서 혼자 남겨지게 된다. 이 전에도 나왔지만 공장이 폐쇄되고 일자리가 없어진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녀의 아버지가 죽은 것도 시위에 참가하다가 발생한 일이다. 일자리가 없어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한 사람들. 현재의 삶과 많이 닮아있다. 청년 실업이다, 일자리 창출이 시급하다는 등의 사회문제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고 영화 속 소녀처럼 돈이 없어 물건을 훔치다가 적발된 사람도 적지 않다. 모던타임즈는 비록 만들어진 시대는 다르지만, 조금 과장해서 마치 지금의 상황을 예언하고 만들었다고 해도 될 정도다. 보고 있으면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물질문명, 인간화의 결여, 실업문제 전부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다. 그런 만큼 우리는 모던타임즈라는 영화에 공감한다. 찰리 채플린의 코믹스러운 모습에 웃다가도 그 의미를 되새겨보면 절대 그냥 재밌다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얼굴이 굳어지고는 한다.찰리 채플린의 캐릭터를 보면 줄곧 우직하고 착하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그렇지만 지나가는 차에서 떨어진 깃발을 돌려주려하고 그 후에 일자리를 소개받아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온갖 실수투성이에다 제대로 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건 상관없다. 힘든 상황이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맞게 희망을 가지고 무언가 해보려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바로 찰리 채플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성실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다. 깃발을 돌려주려고 차를 쫒아가다가 경찰의 오해를 받아서 도리어 감옥에 끌려가게 되는 상황을 보면 사회에서 인정받기는 커녕 오히려 더 피해를 입고 좌절하게 만든다. 부조리한 사회 현실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는 사람들은 더 내쳐지고 억눌려진다.찰리 채플린이 보안관에게 감옥에서 나가도 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도리어 감옥생활이 더 행복하다며 조금 더 있으면 안 되느냐고 반문한다. 나는 이 상황의 아이러닉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감옥이라는 말만 들어도 얼굴을 찌푸리고, 감옥에서 통제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상상하는데 찰리는 그렇지 않단다.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한다. 감옥을 나와 사회로 나서는 일이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나라고 해도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지금 감옥에서 나가면 당장 살 곳도 없고 일자리도 구해야 한다. 그런데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대형 공장은 문을 닫아서 오히려 사람들이 쫓겨나는 판에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일 것이다. 감옥에서는 경찰들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때 되면 밥 주고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적어도 살아갈 수는 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정말 이 사회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 건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대가 변하면 문화도 변한다요즘에는 마음만 먹으면 문화, 예술 공연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연극이나 영화, 가수의 콘서트까지 여러 다채로운 영상들이 우리의 오감을 즐겁게 해주길 기다리고 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접하는 대중문화의 경우, 그 관심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반면 고급문화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현재 고급문화는 보편화된 대중문화에 묻혀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있다.고급문화와는 달리 대중문화는 사람들에게 쉽고, 친근하고, 익숙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도 그럴 것이 대중문화는 철저히 ‘대중성’을 지향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는 유명 가수의 노래가 들려오고, 매달 신작 영화의 개봉일이 커다란 전광판에 나타난다. 쉴 새 없이 TV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광고들은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고급문화는 어떤가?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연결고리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고급문화를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예술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고급문화를 대중화하고 그에 따라 쉽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히 우선되어야 할 일이었다. 고급문화가 아무리 좋다 한들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세계에서 인정받는 유명 오케스트라가 코앞에서 공연한다고 해도 들어주는 관객이 없다면 공연은 그저 찬밥신세일 뿐이다.그나마 많지도 않은 고급문화의 공연에서 관객이 사라지고 있는 ‘관객의 죽음’속에서 고급문화는 대중문화와의 타협점을 찾는 중이다. CD를 사용하여 클래식을 대중화한다거나 시인이 광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는 등 대중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또한 내용이 길어 전체적으로 대하기 어려운 작품의 경우에는 ‘축약’의 방법도 동원하고 있다. 대중성이 약해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으로 봤을 때, 이런 현상은 고급문화의 대중성을 위한 도전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그런 노력이 ‘팝 아트’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팝 아트는 이제 순수한 예술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줌으로써, 고급문화가 속한 환경 자체가 바뀌어버렸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런 점에서 팝 아트는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팝 아트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비판이 적지 않았는데, 이건 팝 아트가 만들어진 50년대 미국의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표어가 나돌 정도로 그 당시 서구는 소비사회의 면모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순수 예술보다는 상업적 예술을 더 선호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상업적 예술을 고급문화영역에서 사용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고급문화는 순수한 열정만을 추구하기에 솔직히 경제적으로 이익이 적었음을 생각해보자. 소비지향사회에서 돈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주 이름난 사람을 제외하고 예술가들은 가난하다는 말이 실제 그렇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팝 아트는 상업적이지만, 예술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더욱 주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