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an in-depth capital budgeting problem. The initial cash outlay at Time 0 is simply the cost of the new equipment, $21,500,000. The sales each year are a combination of the sales of the new PDA, the lost sales each year, and the lost revenue. In this case, the lost sales are 15,000 units of the old PDA each year for two years at a price of $290 each. The company will also be forced to reduce the price of the old PDA on the units they will still sell for the next two years.
재무관리 6장1. 벤의 나이는 MBA를 취득하려는 그의 의사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벤의 나이는 그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그가 일할 수 있는 기간이 38년이다. MBA를 취득하는데 걸리는 기간은 최대 2년이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최소 36년이다. 또한 MBA 학비를 조달하는데 충분한 돈이 있는 상태이고 MBA를 취득하고 나면 이전보다 연봉이 최소 47% 증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벤의 나이는 그의 의사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2. 수치로 나타날 수 없는 어떤 요소들이 벤이 MBA를 취득하려는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가?건강보험 제공의 여부, 직업의 안정성, MBA를 수료하는 기간 등이 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본다.3. 봉급이 매년 말 지급된다고 하고, 금전적 측면으로만 볼 때 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어떤 것인가?벤은 그대로 지금의 직장을 다닐 때의 현재가치는 다음과 같다.Present Value Calculatortype of CF =GA[S;A;GA;P;GP]amount of cash flow =$ 40,700For S: Enter the single cash flowN =38For S: Specify the year of the cash flowI/YR =6.50%Enter the annualized discount rateg =3.0%Leave blank for S, A and PP/YR =1If semi-annual enter 2, if monthly enter 12 ….Output for Present Value6.50%Discount Rate per period38Number of periodsPV of Cash Flow(s) =$ 836,227.34그리고 Wilton 대학에 진학한 후 받게 될 매년 말 받게 될 연금의 현재가치는 다음과 같다.Present Value Calculatortype of CF =GAamount of cash flow =$ 67,620Years =36I/YR =6.50%g =4.0%P/YR =1Output for Present Value and Future ValueDiscount Rate per period =6.50%Number of periods =36Present Value of Cash Flow(s) =$ 1,554,663.22증가하는 연봉의 현재가치가 $1,554,663.22이고 계약보너스가 $15,000이다. 따라서 이 선택의 현재가치는 $1,554,663.22 + $15,000 = $1,569,663.22이다.마지막으로 Mount Perry 대학을 진학하고 매년 받을 연봉의 현재가치는 다음과 같다.Present Value Calculatortype of CF =GAamount of cash flow =$ 57,510Years =37I/YR =6.50%g =3.5%P/YR =1Output for Present Value and Future ValueDiscount Rate per period =6.50%Number of periods =37Present Value of Cash Flow(s) =$ 1,250,991.81증가하는 연봉의 현재가치가 $1,250,991.81이고, 계약보너스는 $10,000이다. 따라서 이 경우의 현재가치는 $1,250,991.81 + $10,000 = $1,260,991.81이다.세 방안의 현재가치를 비교해보면 Wilton 대학에 진학한 후에 받게 되는 연봉의 현재가치가 가장 높다. 현재가치는 미래의 화폐가치가 현재 시점에서 같은 가치를 가지려면 얼마가 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장래의 가치를 현재의 것으로 계산한 값이기 때문에 가장 큰 현재가치를 보이는 Wilton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금전적으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출처] Hyperlink "http://blog.naver.com/zigmund/70116125122" 현재가치와 미래가치|작성자 Hyperlink "http://blog.naver.com/zigmund" 그림자4. 벤은 각 선택의 미래가치를 살펴봄으로써 이 두 선택에 대해 적절한 분석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판단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두 선택의 미래가치를 구해보면 Wilton 대학의 진학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Present Value of Cash Flow(s)=$ 1,569,663.22Future Value of Cash Flow(s) =$15,149,292.88Mount Perry 대학의 진학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Present Value of Cash Flow(s)=$1,260,991.81Future Value of Cash Flow(s) =$12,961,275.85두 선택의 현재가치와 미래가치를 계산하면 위와 같다. 미래가치는 현재가치가 크면 미래가치 또한 커지게 때문에 Wilton 대학의 진학한 경우가 Mount Perry에 진학하는 것보다 미래가치가 더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벤은 미래가치를 살펴봄으로써 적절한 분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미래가치 분석보다는 현재가치를 분석하는 것이 의사결정을 하는데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가치는 이미 언급했듯이 장래의 가치를 현재의 가치로 나타낸 값이고 미래가치는 지금의 화폐가치가 미래 시점에서 평가 받았을 때 지금과 같은 가치를 가지려면 얼마가 되는가를 나타낸 것이다. 즉 미래가치는 현재의 화폐가치를 미래의 가치로 환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가치는 적금과 같이 만기에 얼마나 받을 수 있는 지와 같은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반면에 현재가치는 미래에 벌 수 있는 돈들을 현재의 가치로 나타내기 때문에 두 선택을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한 분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현재가치가 크면 미래가치도 커지기 때문에 현재가치를 통해 어떤 선택의 미래가치가 더 큰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가치보다는 현재가치로 분석하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출처] Hyperlink "http://blog.naver.com/zigmund/70116125122" 현재가치와 미래가치|작성자 Hyperlink "http://blog.naver.com/zigmund" 그림자5. Wilton 대학에 다니는 것과 지금의 직장에 그대로 있는 것에 대해 벤이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려면 그가 처음 받는 봉급이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Wilton 대학에 다니는 것과 벤이 그대로 직장을 다니는 것을 현재가치로 비교해 볼 수 있다. 현재 그대로의 봉급대로 비교를 하면 Wilton 대학에 다니는 것의 현재가치는 $1,569,663.22이고 직장에 그대로 다니는 것의 현재가치는 $836,227.34이다. 두 경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하려면 Witlon 대학에 다니는 경우의 봉급이 낮아져야 한다.먼저, Witlon 대학에 다니는 경우의 봉급이 낮아지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근사치)Present Value Calculatortype of CF =GAamount of cash flow =$ 36,370Years =36I/YR =6.50%g =4.0%P/YR =1Output for Present Value and Future ValueDiscount Rate per period =6.50%Number of periods =36Present Value of Cash Flow(s) =$ 836,189.02이 경우에는 위의 결과처럼 세금 공제 후 $36,370이다. 따라서 세금 공제 전의 연봉은 약 $52,710이다. 따라서 지금 다니던 직장과 벤이 차이를 못 느끼기 위해서는 Wilton 대학을 다니고 난 후 처음 받는 봉급이 $52,710이다.6. MBA 비용을 지불할 현금을 갖고 있지 않고, 그를 이해 5.4%의 이자율로 돈을 빌려야 한다고 하자. 이러한 상황은 벤의 의사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MBA 비용을 대출해야 하는 경우라면 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Wilton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177,000이고 Mount Perry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106,500이 필요하다. 두 선택 모두 그가 현재 받고 있는 연봉이나 진학 이후에 받게 될 연봉보다 큰 금액이다. 또한 MBA에 다니는 기간 동안에는 직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수입 또한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출을 해야 되는 경우라면 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Wilton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필요한 비용을 대출한다면 최소 3년 이상의 대출을 갚아야 한다. Mount Perry에 진학하는 비용을 갚기 위해서는 최소 2년 이상 대출을 갚아야만 한다.
성폭력 범죄에 대처하는 우리나라의 모습은?성폭력 범죄의 현황 ← 서론성폭력 범죄의 개념과 그 유형 ← 본론성폭력 범죄 관련법규의 문제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대처의 문제선진국의 사례우리나라 대처 방식의 문제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대처방안 촉구 ← 결론성폭력 범죄의 현황최근 들어 쉽게 뉴스나 신문에서 성폭력 범죄에 대해 접할 수 있다. 여성 가족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년 성폭력 범죄 피해 신고 건수가 그 전년도에 비해 11%나 증가할 정도로 빠른 추세로 성폭력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 소설 원작의 영화 ‘도가니’가 열풍을 일으키면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 사건이 여론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장애인 성폭력 범죄 건수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피해자 중 1/3이 13세에서 20세의 청소년이다. 비장애인의 경우에도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 피해가 증가할 뿐만 아니라 청소년 성폭력 범죄자들이 4년 새 60%가 증가할 정도로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또한 고려대 내 성폭력 범죄를 계기로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학 내의 성폭력 범죄 역시 증가 추세이다. 더 나아가 사회에서도 성폭력 범죄의 증가 추세가 지속되는데 그 중 공무원이나 전문직 같은 화이트칼라 직종에서 지난 해에 비해 30% 정도 범죄 건수가 증가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성폭력 범죄가 몇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해오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학교에서의 성폭력 예방 교육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폭력 특별법의 문제점과 성폭력 범죄자들에 대한 미약한 처벌을 문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성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성폭력 사건이 증가하고 있는 이유로 제시되는 성폭력 특별법과 우리나라의 대처 방식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성폭력 범죄의 개념과 그 유형성폭력은 강간, 윤간, 강도 강간뿐만 아니라 성추행, 언어적 희롱, 음란전화, 음란물 보이기, 음란물 제작에 이용, 성매매 강요, 사이버 성폭력 등 상대방의 의사에 반 성폭력, 사이버 성폭력, 공공장소에서의 성폭력, 스토킹, 2차 가해, 학내 성폭력, 직장 내 성폭력으로 나뉜다. 먼저, 데이트 성폭력은 데이트 중에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성적인 행동을 하거나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이 유형의 성폭력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의 성폭력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상처가 더 크다. 친족 성폭력은 가족, 친척, 인척관계 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으로 지속적으로 성폭력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이버 성폭력은 사이버 공간에서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야기나 컨텐츠 등을 통해 상대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위협을 느끼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공공장소에서의 성폭력은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의 성폭력을 뜻하는 데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 또한 성폭력이 될 수도 있다. 스토킹은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범죄로서 지속적으로 따라다니면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괴롭히는 행위가 말한다. 2차 가해는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이나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을 말한다. 학내 성폭력은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범죄이며 직장 내 성희롱은 채용 과정이나 근무 시간 중에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성적인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성폭력 범죄 관련법규의 문제성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과 규정을 나타낸 법을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라고 하는데 이를 줄여 성폭력 관련 특별법으로 부른다. 성폭력 관련 특별법은 일반법과 다르게 특별법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는 일반법보다 더 구체적인 사항을 다루고 처벌 또한 다른 일반적인 형법에 비해 가중처벌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의미에서 분류한 것과는 달리 특별법의 법규의 문제로 인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 성폭력 범죄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현재, 문제시되고 있는 특별법 내의 조항은 성폭력 범죄가 형법상 친고죄라는 점이다.친고죄란 범죄의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공소할 수 있는 범해자의 명예와 신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친고죄 조항이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집요하게 압박하거나 합의종용 수단으로써 악용해왔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시되고 있는 예외적인 친고죄 조항의 폐지가 필요하다.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대처의 문제선진국의 사례선진국에서는 주로 성폭력 범죄자들에 대해서 전자발찌, 신상공개, 화학적 거세 등의 방법을 통해 성폭력 범죄에 대처하고 있다. 선진국으로 대표되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 각 국의 다른 문화적 특성에 맞게끔 성폭력 범죄에 대해 각기 다르게 대응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오랜 시행기간과 연구를 걸쳐서 성폭력 범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냈다.전자발찌가 처음 도입된 곳은 미국으로 1998년부터 시행되어 지금은 모든 주에서 성폭력 범죄자에 대해서 전자발찌 처분을 내리고 있다. 영국의 경우 2003년부터 모든 성폭력 범죄자에 대해 최장 8년간 전자발찌를 채우고 있다. 스위스의 경우는 GPS 방식을 이용해 범죄자들에 대한 전자 감독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이들 국가들은 가택구금 방식으로 성폭력 범죄자들을 감독하고 있다.성폭력 범죄자들에 대한 신상 공개는 미국의 경우 1947년부터 시행되어 왔다. 성폭력 범죄자들의 재범 위험 정도에 따라 이들을 단계별로 분류하고, 분류에 따라 지역 사회에 신상 정보가 공개되는 방식이다. 영국의 경우는 미국과 달리 성폭력 범죄자의 신상 정보를 학교 등 아동 청소년 보호 기관에는 제공하지만 개인에게 제공하는 경우는 드물다.화학적 거세는 전립선암 치료 등에 사용되는 성선자극호르몬 길항제를 3개월에 한 번씩 투약해 남성호르몬 생성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더불어 성적 충동이나 환상을 줄이고 성기능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방식을 도입하는 나라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독일, 덴마크, 스웨덴 등에서 범죄자의 동의 하에 투약이 이루어지고 있다.우리나라 대처 방식의 문제현재 우리나라는 성폭력 범죄 근절을 위해서 선진국을 따라 전자 발찌, 신나고 있다.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9월부터 성폭력 범죄자들에 대해서 전자발찌 착용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올해부터 전자 발찌를 착용하는 범죄자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재범률이 1%로 낮았던 성폭력 범죄자들의 재범률이 이전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전자발찌는 기본적으로 범죄자의 재범을 막기 위해 도입됐지만 성폭력 범죄를 막을 뚜렷한 대안이 없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접근금지구역이 아닌 곳이나 한낮과 같은 성범죄의 사각지대를 이용한 재범률 증가와 전자발찌를 관리하는 인원 부족 등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화학적 거세는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성폭력 범죄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아동 성폭력 범죄자들 중 성 도착증 환자들에게만 이루어진다. 법원에서 투약 선고를 받음과 동시에 성충동 조절 능력 향상을 위한 상담과 심리치료도 병행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화학적 거세의 문제는 대부분의 선진국 국가와 달리 범죄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법원의 선고만으로 투약을 강제한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 법을 어긴 범죄자라고는 하나 기본권을 침해하는 처벌이라는 우려가 있다.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대처방안 촉구영화 ‘도가니’의 흥행을 계기로 장애인과 만 13세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일명 ‘도가니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되었다. 통과된 도가니법은 장애인과 만 1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와 더불어 최고형으로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한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범죄의 성립요건이었던 항거불능으로 인해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쉽지 않았었다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이 조항을 삭제했다.위와 같이 법률에 대한 개정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는 장애인과 아동 성폭력이 법적으로 너무 관대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변화가 정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글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아직 폐지되지 않은 친고죄 조항 역시 논의를 거쳐 관련 법률 조항금지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정보가 널리 퍼지는 것을 방지해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했다. 이처럼 범죄자의 동의를 구하거나 이외의 대안을 마련해 침해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이러한 법률적인 국가적 차원에서의 변화 이외에도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이다. 어떤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들더라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의 인식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사회 내에서의 큰 변화가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데,이는 교육을 통해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공교육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해야만 하는 성교육은 대부분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교육 내에서 인권감수성을 제고할 수 있는 교육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공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 또한 교육의 대상도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제한되어 있는 점을 변화시켜 모든 세대에 걸쳐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폭력 피해자가 거리낌없이 신고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 적극적인 소통을 통한 평등한 사회가 자리잡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도가니법’ 국회 통과…장애인 성폭력 특위도 구성”, 《머니투데이》, 2011년 10월 28일,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21168&outlink=1“’친고죄’와 장애인 성폭력”, 《에이블 뉴스》, 2011년 11월 4일, 〈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06&NewsCode=*************25246414250〉“[성폭력 이대로는 안된다] 5.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대처하나”, 《아시아투데이》, 2011년 7월 24일,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506609>‘[오늘의 세상] 전자발찌 차도 ‘짐승은 짐승’”, 《조선닷컴》, 2011년 11월 10일, < http://new>
보고서 - 인물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역사지리학자.유득공1. 인물의 선정 이유어떠한 인물을 선정할 지 고민하면서 요즘 배우는 수업과 근접한 인물을 선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또 수업 시간에 정조 때의 일들을 배우고 있다 보니 그 시대에 유명했던 실학자들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흔히 알고 있는 박지원, 박제가, 유형원 등의 실학자를 둘러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업적이 잘 알려져 있는 실학자들보다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업적에 대해 잘 모르는 실학자를 조사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북학파들 중에 유득공이라는 실학자에게 주목하게 되었다.유득공은 조선 후기 정조 때의 실학자이다. 또한 그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과 같은 중상학파이며 북학파 학자였으며 역사가이자 문학가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실학자 유득공을 아냐고 물어보면 그저 한 번쯤 국사 시간에 실학자들을 배우면서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 인물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와 친했던 다른 북학파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유득공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실제로 유득공이란 실학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번 보고서를 통해서 유득공이 그 당시에 어떠한 일을 했었는지,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새로이 알아보고자 한다.2. 유득공의 생애조선 후기 정조 시대에 주로 활동하였던 유득공은 서자 유삼익의 증손으로 태어나 대대로 문한을 가업으로 삼는 기풍을 이어받았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작고로 인해 그는 친정에서 생활을 하였다. 유득공이 누구에게 사사했는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그 부근에 거처하던 북학파들과 가깝게 지내며 교류하였다. 박제가의 기록에 따르면 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이서구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가 학문과 이념에 영향을 주고받은 것을 알 수 있다. 1773년 유득공은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게 된다. 일물들이 출판되었던 정조 때의 문화 사업에 실질적인 역할을 일부 담당한 것이다.유득공은 검서관으로 일정 시간을 보낸 후 지방관이 된다. 하지만 그는 지방관으로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원칙을 강조했던 유득공은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토착양반세력보다 백성들의 편만을 들다보니 사소한 일로도 파직당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가 위와 같이 강력한 행정을 할 수 있던 이유는 정조의 신임이 있었고, 북학자로서의 대민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북학은 선진의 중국문물을 도입하자는 의견이었기에 무분별한 도입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중국의 답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기에 유득공도 중국을 세 차례나 방문했었다. 첫 번째 중국여행 이후 그가 검서관으로 발탁된 사실을 토대로 보자면 국가에서 그의 수행을 허락한 것이 어떤 의미가 담겨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 여행은 그가 평소 관심 있던 우리의 역사지리를 더 깊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에 그는 이를 토대로 『발해고』를 저술한다. 두 번째 여행과 세 번째 여행 이후 그는 더욱 더 북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유득공을 비롯한 실학자들을 후원하던 정조가 죽고 나서 순조가 즉위하면서 북학파가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탄압을 받기 시작한 이후 박제가·박지원도 어떠한 일을 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그들은 언행을 섣불리 했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유득공은 다른 북학파들과의 교류 없이 풍천부사에서 물러나 지내다 역시 특별한 행적을 남기지 않고 숨을 거두었다.)3. 유득공의 저술현존하는 유득공의 대표적인 저술들로는 『이십일도회고시』, 『발해고』, 『사군지』, 『난양록』, 『연대재유록』, 『경도잡지』, 『고운당필기』, 『영재집』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후운록』이나 『영재행시』 등이 있으나 편찬된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유득공의 저술들 중에서 『이십일도회고시』, 『발해고』, 『경도잡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 역사의 시『이십일도회고시』『이십일도회고시』는 우리 역사를 최초로 고조선 을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유득공의 이 회고시는 문학적인 가치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가치 또한 뛰어나다. 회고시는 역사적 사실을 담는 일종의 서사시로 그 이전 시대를 읊었다는 이유로 영사시라고도 하는데, 영사시는 같은 과거를 다루더라도 작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서술과 비슷하다. 즉, 영사시는 작가가 과거를 읊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유득공의 회고시는 역사성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렇기에 유득공의 회고시를 통해 그의 역사 인식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면 그가 살았던 당시 사회의 현실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북학파 중에서 유득공이 돋보이는 부분으로 현실의 문제를 영사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책을 만년에 다시 집필하였는데 집필 전후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는 유득공의 역사 인식이 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더 넓게 생각해 당시의 현실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십일도회고시』을 읽다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고려와 관련된 시문으로 삼국시대와 달리 역사나 정치, 사회 등과 같은 중요한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려의 국토 확장 등의 강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는 유득공의 고려를 약소한 국가로 인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는 다음에 소개할『발해고』의 서문에서 “고려가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을 들 수 있다.)- 남북극시대의 역사『발해고』유득공의 대표적인 저서인『발해고』는 정조 8년(1784)에 한국·중국·일본의 사서 24종을 참고해 만든 발해 역서서이다.) 유득공은 그 가운데서 당나라의 역사서인『신당서』와『구당서』를 중심으로 참고하며『발해고』를 저술했다고 한다. 그가『발해고』를 저술한 이유는 과거 고려에서 체계적인 발해사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 대한 강렬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가 발해사를 쓰려고 의도하였다면 고려에 망명 온 발해 유민는 없었던 새로운 역사인식의 관점으로 유득공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겨진다.『발해고』의 9고 중 첫 번째인 군고에는 발해의 역대 군왕들의 역사를 다루고 신고는 주로 당과 일본에 사서에 나타난 80여 명의 발해인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지리고는 발해의 행정구역과 지리, 직관고는 발해의 관제, 물산고는 발해의 생산품, 국어고는 발해의 언어, 국서고는 발해가 일본 또는 당에 보낸 국서, 속국고는 발해가 망한 후 세워진 정안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까지 연구된 발해와의 연구결과에 비하면 유득공의 자료가 잘못된 부분이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나 그것은 발해의 세계에 대한 사료가 부족해서이다.유득공이『발해고』를 고(考)라고 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라 충분한 사료가 부족해 사(史)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신라 통일을 강조하여 한국사를 한반도로 위축시킨 이전의 역사 인식을 바꾸어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발해의 영역이었던 만주 일대로까지 확대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인식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남북극시대론’이다. 또한 이 책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해의 역사를 체계화시키고, 발해사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실재했으나 그 이전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편입시킨 것은 유득공의 상대주의에 입각한 북학사상이 역사학에 나타난 것이라고 여겨진다.)- 조선 후기 서울의 모습『경도잡지』만년의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지이다. 완성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내용으로 보아 정조 때 쓰여진 것으로 판단된다. 2권 1책으로 필사본이다. 그는 자신이 생활하던 당시의 조선의 서울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서술하였다. 24절기에 따라 치르는 명절행사들을 소개한 세시와 서울 사대부들의 모습을 담고 그들이 치르는 각종 의례를 기록한 풍속이 담겨져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역사학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생생히 담았다는 측면에서 민속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문물제도를 주로 기술한 상간의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 상대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홰 그의 특이한 문화관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가 경도잡지를 저술하였다는 것 자체가 그가 북학자임을 얘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4. 유득공의 사유체계앞에서 말했듯이 유득공은 북학파이다. 북학자가 주장했던 북학의 뜻은 박제가가 조선과 중국 간에 문물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을 보고 그 치유책으로 저술했다고 여겨지는『북학의』에 자세히 써져있다. 그들이 말했던 북학사상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용과 후생을 통해 유교적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이며, 그 방법론으로서 그들은 중국의 문물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그들은 현실적인 방안의 제시를 우선시 여겼다. 이는 유득공도 북학자이기에 시대 상황에 맞게 문물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화를 통해서 새롭게 변화하는 시대 상황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일부 계층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저술들을 살펴보면 다른 북학자와 달리 새로운 개혁안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조의 죽음 이후 일부러 개혁안들을 없앤 듯하다.또한 그는 다른 북학자와 다른 방식으로 중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드리기도 했다. 그 예로써 박제가의 경우 중국의 여행 갔다 온 이후 수레를 우리나라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중국에서 수레를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조선지형에서의 수레 사용의 이점, 교통수단으로서의 장단점 등을 소개하며 필요성을 말했다. 반면에 유득공의 경우는 박제가와는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체면을 중시하는 풍속이 강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수레의 통용이 어렵다고 보았다. 이처럼 유득공은 획일적이고 단순한 물질이나 형식을 의도하지 않았다. 문제의 근본을 알아보려고 하였다.게다가 유득공의 저술들을 살펴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소홀히 여겼던 것들에 집중하여 실재했던 것을 다시금 재현하려고 했다. 이것 또한 북학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관점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그만의 독특한 역사 인식이다
보고서 - 문화유산조선 왕조 제일의 궁궐. 경복궁1. 경복궁을 정한 이유어떤 문화유산을 조사할지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내가 가본 적이 곳을 위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났던 곳이 해인사,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과 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문화유산에 가본 적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의 수학여행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번 밖에 가보지 않은 문화유산보다는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 심층적으로 조사하는 게 나에게도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내가 여러 번 가봤던 곳을 위주로 찾아보다가 조선왕궁 및 왕릉을 찾게 되었다. 그 중에서 나는 경복궁에 주목하였다.경복궁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유명한 궁궐이다. 또한 조선이 세워지고 나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선시대 제일의 궁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은 가봤을 만한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인 만큼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또 그만큼 전통 행사들이 많이 열리는 곳이라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에 하나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라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알고 있는 상식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들이 일제가 만들어낸 식민사관에 의해 잘못 알려진 상식들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식들이 많다. 이를 토대로 경복궁에 자세히 조사하려고 한다.2. 경복궁의 역사경복궁의 창건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한양에 천도하고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궁궐을 짓게 했다. 태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즉위 4년인 1395년에 궁궐이 1차로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몇 년 뒤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서 왕들은 다른 궁궐인 창덕궁과 덕수궁에서 집무를 보았다.《숙종실록》과《영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땔감을 줍기 위해서 경복궁을 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경복궁 안에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기록 또한 남겨져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처럼 경복궁은 땔감을 줍는 백성들이나 호랑이가 쉽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폐허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경복궁의 중건과 일제강점기 이전임진왜란 이후로 273년간 경복궁을 중건하지 못하다가 고종 4년(1867년)에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의 주도 아래 중건이 시작되었다. 중건이 완성된 후 경복궁에서 다시금 집무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중건이 완성된 이후에도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그 뒤 몇 차례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다 고종 32년(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게 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 접어들면서 경복궁은 훼손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 물산 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창덕궁에 큰 화재가 나서 침전이 모두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등을 헐어내어 창덕궁의 침전 복구공사 재목으로 썼으며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 사정전 등 주요 건축물들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였다. 또한 일제는 1927년 9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건청궁 터에 미술관을 지으며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 선원전을 헐어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를 지었다.)해방 이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 앞 해태의 의미흔히, 광화문 앞에 놓여있는 해태를 가리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들 한다. 이러한 주장의 이유는 풍수지리상 경복궁의 조산에 해당하는 관악산이 화기 넘치는 화산인 까닭에 경복궁에 화재가 자주 일어난다면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해태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태는 원래 광화문 앞에 있지 않고 사헌부 앞에 있었다.해태는 예로부터 법과 정의를 지키는 동물로 여겨져 사헌부의 상징이었다는 것이《인조실록》에 나와 있다. 즉, 사헌부 앞에 앉은 해태는 그 앞을 지나다니는 관리들에게 공직자로서의 바른 태도와 곧은 마음을 촉구하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또한 해태의 다른 기능은 가마나 말에서 내려 걸으라는 하마의 표시였다. 이러한 사실은《승정원일기》고종 7년(1870)에 “해태 이내에서는 백관이 말을 타지 못하도록 함께 엄히 신칙하라”는 고종의 하교가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 해태가 지금의 자리를 찾은 것은 한국전쟁 당시 불타버린 광화문이 1968년 현재의 자리에 복원될 때였다. 광화문이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번씩 위치가 바뀌고 수많은 변형과 왜곡을 겪으면서 해태의 상징성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⑵ 근정전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건물이다. 국가의 큰 행사를 할 때 사용했던 근정전은 국가와 왕을 표현하는 상징물이었다.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또한, 정전 영역의 입구인 근정문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참행사를 하는 곳이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하여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즉, 국의 제후국으로서 왕의 상징으로 봉황을 그렸다. 그러던 것이 고종황제께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흥선대원군이 이를 칠조룡으로 바꾼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칠조룡으로 바꾼 이유에 대한 사료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당시를 토대로 추측해봤을 때 흥선대원군의 의도는 경복궁을 중건하는 당시에 몰락하는 왕권을 살리기 위해 황제의 상징인 칠조룡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⑶ 사정전경복궁의 편전인 사정전은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이다. 또 종친,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이다. 근정전 영역으로 통하는 사정문과 침전영역으로 통하는 향오문 사이에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이 남향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행각이 감싸고 있다.사정전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으로 ‘천하의 이치를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 임금이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세밀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사정문은 3간으로 되어 있다. 이 문 역시 가운데 칸은 왕이 드나들 때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은 좌우의 문을 이용하였다. 편전 영역의 중심 건물인 사정전은 고종 4년(1867)에 중건한 건물로 어좌를 가운데 설치하였으며 벽에는 구름 속에 놀고 있는 용을 그려 걸었다. 온돌이 없는 사정전은 겨울철은 부속 건물들로 이를 보강하였다.)→ 사정전의 사계절 이용사정전의 내부는 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돌이 없다. 마루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여름철 사용에는 문제가 없지만 겨울철 사용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사정전의 좌우에는 편전의 기능을 보안하는 만춘전과 천주전이 있다. 이 두 건축물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사정전의 좌우에서 편전의 기능을 보완하는 만춘전과 천추전이다. 이는 만춘전과 천주전의 측면의 아궁이와 후면의 굴뚝이 발견된 이후 추측하게 된 것이다. 사료들에 따르면 건축물의 이름에 따라 천추전은 가을에, 만춘전은 을 사용하고 있다.교태전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이곳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이라 하였다. 호수나 연못을 상징하는 모양의 석함을 두어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조성하였다. 아미산에는 다양한 화초를 심어 화계를 꾸미고 교태전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빠져 나갈 수 있는 굴뚝 4개를 세웠다. 이 굴뚝은 아미산의 굴뚝이라 불리고 교태전을 중건할 때 같이 만든 것이다. 4개의 굴뚝 모두 6각형의 면에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해 서로 다른 그림과 의미를 부여했다. 각 무늬는 벽돌을 짜 맞추어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경복궁의 침전에만 용마루가 없는 이유이에 관한 정확한 사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몇 가지 설이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각각 왕과 왕비의 침전이기에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곳이다. 왕은 용으로 다음 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는 곳이 침전이다. 그러니 또 다른 용이 감히 지붕 위에서 임금의 용을 짓누를 수 없기에 용마루를 만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도 왕과 왕비가 합방하여 건실한 후예를 얻도록 하기 위해 하늘과 땅을 가로막는 용마루를 없앴다는 설도 있고, 왕비의 편안한 순산을 위해 무거운 용마루를 걷어냈다는 설도 있다.)⑸ 경회루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 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의 인공 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경회루 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