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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동대 지원 자기소개서 평가A좋아요
    자 기 소 개 서◎ 지원자 인적 사항수험번호2077537지원전형성 명주민등록번호◎ 자기소개서 관련 유의사항1. 자기소개서는 평가요소로서 중요한 자료이므로 반드시 본인이 작성하여야 하며, 사실에 입각하여 정직하게 기술하여야 합니다.2. 자기소개서는 서류평가와 심층면접에서 기재사항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기재사항과 다를 경우 불합격 처리할 수 있습니다.3. 자기소개서 작성 및 제출 방법인터넷 원서접수자 : 인터넷 원서접수를 실시한 사이트(진학사, 유웨이)의 나의 원서관리 메뉴에서 작성(원서접수 이후에만 작성 가능함)한 후 출력본에 서명 또는 날인한 후 출력본을 서류제출기간내 등기우편 또는 우리 대학교로 방문하여 제출하여야 함.방문접수자 : 우리 대학교 소정양식으로 작성하여 제출(이 서식을 우리 대학교 홈페이지에서 내려 받거나 복사하여 사용할 수 있으며, 자필 또는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할 수 있음. 단, 자필로 작성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검정색 필기도구(연필제외)를 사용하여야 함)4. 자기소개서는 이 서식이 정한 범위 내에서만 작성해야 합니다. (바탕체, 11pt)5. 자기소개서 내용은 입학전형 및 입학 후 학생지도 자료로만 활용하며, 비공개 문서로 관리합니다.◎ 지원자 확인 서약1. 본인은 자기소개서를 직접 작성하였습니다.2. 자기소개서는 진실만을 기록하였습니다.3. 본인은 귀교가 자기소개서와 관련하여 내용 확인을 요청할 경우 협조하겠습니다.4. 본인은 자기소개서에 고의적인 허위 사실 기재, 대리 작성, 기타 부적절한 사실이 발견되는 경우 합격 취소 또는 입학허가 취소 등의 불이익을 감수하겠습니다.5. 자기소개서 내용을 추후 신입생 현황 조사 및 지도 연구에 사용하는 것에 동의합니다.2010년 9 월 18 일지원자 자필서명 혹은 날인한동대학교 총장 귀하1. 고교 재학 기간 동안 가정환경, 학교 및 지역 환경, 교우 관계 등에서 겪은 가장 큰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한 경험에 대해 서술하시오. (800자 내외)중학교 때 우수한 내신 덕분에 전국 최고의 기숙형 공립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의 그 기분은 기대와 설렘으로 온통 미래가 내 것인 냥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특히 생전 처음, 사랑하는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 생할을 하게 된 것도 조금은 서운하지만 왠지 모를 자유와 독립에 대한 생각으로 한창 들뜬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런데 막상 기숙사 생활을 1주일 정도 하고 나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틀에 박힌 것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든 것이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진행되어지는 생활 때문에 드는 ‘도대체 나는 뭐지?’ 하는 생각에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힘들고 부담이 되었던 것은 주말마다 외박이나 외출이 자유로이 허용되지 않아 주일 예배를 마음껏 드릴 수 없어서 너무도 마음이 아프고, 짐이 되었습니다.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는데 그 공부 때문에 주일을 제대로 드릴 수 없다니 어이가 없었고, ‘이것이 핍박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기 위해 선생님께 온갖 변명을 하며 사정해야 하나 싶어 차라리 전학을 갈까 고민도 많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에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꾸준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처음 몇 주간은 허용되지 않았던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렇게 해서 드리게 된 예배의 기쁨은 황홀함 그 자체였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갑절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자칫하면 예배를 포기하고 학교 규율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이겨내자 제 스스로 작은 시험 하나를 통과했다는 자부심이 들었다고 할까?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갑갑한 기숙사의 생활은 제게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배만 자유로이 드릴 수 있다면 이 정도 쯤이야 참아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이 감사하고, 학업도 더 충실히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으며, 선생님께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더 원만하고 친숙한 관계를 가지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을 계기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였습니다.2. 고교 재학 기간 중의 학업 관련 분야에서 본인이 가장 큰 흥미를 가지고 공부한 과목 및 관련 활동에 대해 기술하시오. (학교 수업 외의 교육 프로그램, 교내외 학습 동아리 활동, 기타 교내외 학업 관련 수상 내용 등 포함) (500자 내외)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제가 가장 열정적으로 공부했던 교과는 역사와 윤리입니다. 어릴 때부터 책 중에서 역사 관련 책을 가장 많이 읽어왔을 정도로 역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입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역사학과를 목표로 국사와 근현대사, 도덕 및 윤리 등 사탐 과목을 중점적으로 공부한 결과 사회과 교과목들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급에 응시하여 합격한 바 있으며, 3학년 때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주최한 제 8회 우리 역사 바로 알기 대회에 출전하여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관련 반박 논문을 제출한 바 있습니다. 국사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도 무척 관심이 많던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겨울을 이용하여 중국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몸으로 생생히 느끼는 체험을 했습니다. 또한 저희 학교는 농촌에 위치한 기숙형 공립학교로서 사교육 없는 학교를 지향하기에 1학년 때부터 철저하게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했으며, 정규 수업시간 외에 이루어진 다양한 특별보충수업을 통해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국어, 영어, 수학은 스터디 그룹을 통해 친구들끼리 도움을 주고 받아 실력을 향상시켰습니다.3. 고교 재학 기간 중에 경험하거나 참여한 교과외 활동 중에서 자신의 인격 및 자아 정체성 등 자신의 성장에 영향을 준 의미있는 활동에 대해 기술하시오. (700자 내외)지난 겨울 방학이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바쁘게 보냈던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다. 대학 입시가 코 앞에 닥친 고3이 중국, 일본을 두루 다녀왔으니 모르는 사람 같으면 손가락질 할 만도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학교에서 선발된 학생으로 가게 되었고, 중국의 경우에는 교회에서 특별히 우리 중고등부들로 하여금 더 큰 비젼과 꿈을 가지게 하기 위해 많은 재정을 지출하면서까지 기도하며 계획해 오던 행사라 고민 끝에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부정적으로 보시는 선생님이 계신 반면, 좋은 기회이니 공부도 중요하지만 다녀오라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출국에서부터 입국하기까지 정말 기도하는 심정으로 시간 시간을 귀중하게 보냈습니다. 그 덕분이었을까? 중국이란 거대한 대륙은 지금까지 내가 책으로만 생각해 왔던 그런 땅덩어리만 큰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유구한 역사 속에 무한한 잠재력과 무엇보다 중국이란 나라는 앞으로 일본이나 미국 등 세계의 어떤 강대국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라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는 내 라이벌이 대한민국 속에 있는 전국 고3이었던 것이 이제는 세계를 내 경쟁자로 볼 수 있는 생각의 넓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학교| 2011.04.29| 4페이지| 3,000원| 조회(3,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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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굴원에 관한 레포트
    양현명1. 굴원의 생평에 대해 조사하시오.초나라의 충신으로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은 초사문학의 창시자로 이소, 구가, 구장, 어부사, 천문, 원유, 복거 등 25편의 책을 지었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운의 시인으로 꼽힌다. 굴원은 이름이 평, 자는 원이다. 그는 초의 회왕과 경양왕을 섬겼으며, 그의 행동은 충정하고 변재가 있어, 박학다식하고 견문이 넓고, 기억력도 뛰어나 회왕의 신임을 받아서 좌도 벼슬에 올라 왕과 함께 국사를 논하고 수많은 빈객과 제후들을 응대하였다. 왕명으로 법안을 입안하던 중에 상관대부 근상이란 자가 이를 보고는 굴원의 공을 가로채려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지 않고 넘겨 주지 않아, 근상의 참소로 인해 회왕의 노여움을 사 관직을 잃고 소원해졌다. 굴원은 이 당시에, 자신의 불후의 명적인 이소경으로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였는데, 이 내용인 즉,“쫓겨나서 이별한 것 때문에 마음이 근심스러우나, 오히려 곧은 것으로 임금에게 충언한다”는 내용이다. 굴원은 친제파로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대항하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으나 조정의 실권은 친진파가 너무나 득세해 진의 장의의 감언이설에 속아 제나라와 국교를 끊었고, 장의에게 속은 사실을 안 회왕은 노발대발하여 진을 치게 했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8만 대군을 잃고, 한중지를 빼앗긴 후, 동시에 위나라까지 습격해오는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초 회왕은 이 모든 것을 후회하고 굴원을 불러들여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굴원은 진왕을 상대로 협상을 한 끝에 장의를 잡아 왔으나 어리석은 초의 친진파 대신들의 내통으로 다 잡은 장의를 놓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굴원은 다시금 신임을 받아, 삼려대부라는 높은 직책에 봉해졌다. 이후 초가 외세의 침략 등으로 국력이 조금씩 쇠퇴해 가던 차에 다시 친진파와 간신들의 중상모략으로 조정에서 쫓겨 나가게 되었다. 이 때부터 굴원은 비통과 울분에 싸여 임금이 다시 불러주기 바라며, 머리를 풀어 흩트리고 수척한 몸으로 어부사를 지었고 음력 5월5일, 멱라수에 그의 고결하고 강직한 성품대로 돌을 안고 몸을 던지고 말았다. 주요 문학 작품으로는 구가, 천문, 구장, 원유, 복거, 어부, 이소 등의 초사 작품이 전해 내려온다. 굴원의 작품들은 삼국사기나 열전 등에 수록되어 있어, 신라시대의 고시 과목으로 쓰였으며, 훗날 고려시대의 포은 정몽주의 사미인사, 목은 이색의 초사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역시 굴원의 사미인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굴원의 작품들은 현세 학계에서 서양의 호메로스나 괴테, 단테 등의 작품과 비교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인물사전), 위키백과(인물사전), 박영선의 문화발전연구소 등.2. 굴원의 생평과 연관하여 어부사 작품 속 굴원과 어부의 한 입장이 되어 자신의 처세관을 논하시오.“속세에 동화될 수 없다”는 굴원의 우직한 원칙론적인 처세관과 “속세에 동화되어 살아라”는 한 어부의 창랑지수의 처세관 중 나의 처세관은 굴원의 처세관과 좀 더 가까워 보인다. 나는 어부사를 읽으면서 먼저 굴원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보았다. 그 당시 중국은 통일된 왕조가 없이, 그 넓은 중원 땅이 갈기갈기 찢어져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아웅다웅 다투던, 군웅할거의 춘추전국시대. 그 당시 세상의 모두가 취해 있을 때, 홀로 깨어 있던 굴원, 내가 만일 굴원이라면 그 때 난 어떻게 처세했을까......한 평생을 바쳐 조국 초를 위해 헌신하려고 했던 굴원이 끊임없이 왕에게 간언을 올리어 봤자, 중간에서 끊임없이 간신배들이 어리석고 귀 얇은 왕에게 굴원을 중상 모략하여, 진정 나라에 도움이 되고 백성을 위한 충신의 간언을 묵살시켜버리질 않나, 굴원이 바람 앞의 등불같은 나라의 흥망을 걸고 애써 성사시킨 초제동맹을 진나라의 이간책에 말려든 국왕이 파기시켜버리지를 않나, 아무리 밑에서 진정 옳은 길로 지도자를 인도하려고 해도 정작 칼자루를 쥐고 있는 무능한 지도자가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린 충직한 간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굴원에게 “모두가 취한 이 세상에서 혼자 깨어 있다고 말하는 당신을 진정한 성인이라 부를 수 있겠냐”며 반박하는 어부, 나는 그 어부의 주장을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어부의 말대로라면 그 동안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며 이 어지러운 난세를 바로잡아보자며 일어섰던 공자, 맹자, 순자 이하 수많은 제자백가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사상대로 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생각하기에, 굴원이 멱라수에 돌을 안고 몸을 던진 행위는 결코 왕에게 버림받고 벼슬 잃고, 조국에서 추방되는 등으로 인해 세상을 못 이겨서 도피하는 행위, 어부에게 비판받아야 할 행위가 아니라 한 평생을 자신의 소신과 원칙대로, 철저하게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살아온 굴원이“내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한 평생 갖은 노력을 다 해가며 살아왔건만,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역시 모두가 취한 이 세상에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나 혼자서는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없겠다”며 깨달고는 이 더러운 세상과 비굴하게 타협하며 살아가느니, 내 몸마저 더럽혀지기 전에 죽는 것이 백번 더 낫다고 생각한 굴원의 처세관인 것이다. 나 또한, 만약 혼탁한 세상에서 나 홀로 깨끗하게 살아가지만, 도저히 나 하나의 능력으로는 이 더러운 세상을 맑게 하진 못하겠다 싶다면, 굳이 굴원처럼 세상을 등지고 죽음으로 해결하진 않을 찌라도, 결코 어부와 같이 창랑지수의 관점에서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살지 않을 것이다.
    인문/어학| 2011.04.29| 3페이지| 3,000원| 조회(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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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관련 독서 기록장
    * 다시 찾는 우리 역사 - 한영우 (경세원)우리 나라 역사학계의 거두이며, 한국 통사학의 권위자인 저자의 책답게, 정말로 생생한 스토리의 집합이다. 책을 읽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을 굳이 꼽으라면 고대사와 근대사를 뽑을 수 있는데,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의 사건을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해놓았다. 너무나 생생하게 서술하였기에, 읽으며 울분이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역사 쪽으로 관심이 매우 많았기에, 웬만큼은 역사에 자신이 있었던 나다. 그러나 통사식으로 된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 우리나라 국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다시 한번 짚을 수 있었다. 제법 굵은 두께로 인해 지루함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 서중석(웅진 지식 하우스)학교 근현대사 선생님께서 읽으라고 권하시며 빌려 주시기에 하루동안 꼬박해서 귀하게 읽은 책이다. 위 책의 저자인 서중석 교수는 우리나라 최고의 현대사 권위자다. 현재와 얼마 동떨어지지 않은 현대사는 신선한 내용인만큼 전달되는 역사적 사실의 현실적인 생동감이 중요한데, 이 책은 그러한 점에서 아주 높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실려진 갖가지 사진과 참고 자료들, 이 책을 읽게 될 모든 이로 하여금 읽기에 유익하도록 저자가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쓴 덕분에, 현대사가 약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덕분에 현대사의 흐름을 한눈에 짚을 수가 있었다.* 조선 왕 독살 사건 - 이덕일(다산초당)우리나라 주류의 역사학계와 항상 대조되는, 재야 학자의 대표격인 이덕일씨가 지은 책이다. 이덕일씨는 한가람역사연구소의 소장이며, 역사학 전공 서적 특유의 무미 건조한 면을 떨쳐 내고 여느 일반인에게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도록 많은 노력을 하는 분이다. 그로 인해 냈다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곤 한다. 그의 모든 책은 도발적이고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재야 학자의 망언이니, 역사학계의 이단아니 하며 여러 가지로 비난이 쏟아지기는 하지만, 누가 봐도 단순한 작가적 상상력에 의해 제시되는 주장들이 아니다. 충분한 역사적 문헌을 토대로 실증적 접근을 한 것이다. 이덕일 씨의 대표작인만큼 내용이 아주 신선하다. 조선 왕 4명중 1명이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제시되는 모든 주장들은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검증되어진다. 역시 이러한 파격적이고 신선한 주장들은 일단 정사는 아니라고 본다. 저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항상 내가 생각조차 못했던 부분들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이 책 역시 역사를 보는 눈을 길러주는 책이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이덕일(김영사)이 책 역시 흥미진진한 한편의 소설과 같다. 인조에서 숙종까지의 내용을 주로 다룬다. 이 책의 주인공인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로써 조선 중기 산림의 대표격이다.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노론들은 송자라 칭하며 추앙하고, 남인들은 자기 집의 개 이름을 시열이로 지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매우 극단적인 인물이라고도 생각된다.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 성리학이 철학으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지배계급의 상황으로 변화되고 이 변화된 성리학에 기반을 하여 지배질서와 당파적 이해를 어떻게든 유지해보려는 송시열과 노론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있다. 그야말로 이 책을 보니 노론의 나라에서 안동 김씨의 나라로, 결국은 이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이어지는 조선왕조 비극의 시작이 우암 송시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본래 송시열에 대해서 관심이 좀 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우암 송시열이란 인물을 보는 나의 안목이 훨씬 넓어진 것 같다.* 정약용 살인 사건 - 김상현(랜덤하우스코리아)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역사 소설을 좋아한다. 단 한 줄의 무미건조한 역사적 서술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퍼져나가 하나의 큰 틀을 만들고 세세한 묘사를 만드는 작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에 푹 빠지기 나를 늘 사로잡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소설을 읽을 때에는 이것이 ‘픽션’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전체적인 내용은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간 이후부터 전개가 되는데, 그 전개에 있어서 아주 차분하면서도 정교한 구조를 보여준다. 여러 가지의 음모에 음모를 풀어가면서 실타래같이 얽힌 복잡한 사건들, 그런 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가며 읽었던 것이 또 하나의 묘미였다. 책을 읽는 내내 아쉬운 점이 하나 없을 정도로 내게는 상당히 재미있었던 책이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 이덕일(옥당)조선왕조 500년 간 수없이 많은 걸출한 영웅들이 있었지만 조선 초 영웅으로, 단연 손꼽히는 인물, 바로 호랑이 김종서다. 그는 문무에 모두 능통한 인물로, 본래 문관출신으로 훗날 장군까지 겸하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다. 구체적인 시간적 배경은 세종이 재위한 후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세종이 승하한 후 유약한 문종이 왕위에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하게 된다. 나이 어린 단종이 드디어 즉위하게 되고, 문종이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게 된다. 어린 조카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세력을 키워온 숙부 수양대군이 드디어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수양의 야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신하의 도리와 임금의 숙부를 먼저 칠 수 없다는 명분을 위해 목숨을 던진 호랑이 김종서와 이하 사육사들..... 계유정난, 이 사건은 잠깐 승리한 자와 영원히 승리한 자 둘 중 어느 쪽이 훨씬 가치 있고 명예로운 쪽인지 우리에게 판단하라고 조용히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인문/어학| 2011.04.29| 5페이지| 3,000원| 조회(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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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역사적 연구
    【제8회 전국 중?고등학생 우리역사 바로 알기 대회 연구보고서】“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및 역사 인식에 대한 연구 ”2010. 5. 26작성자 : 양현명지도교사 : 남승호포 산 고 등 학 교 3 학 년- 목 차 -Ⅰ. 서론Ⅱ.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및 그 비판Ⅲ. 독도 영유권 주장에 나타난 일본의 역사 인식 비판Ⅳ. 참고문헌 목록Ⅰ. 서론Ⅱ.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및 그 비판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주요 근거 4 가지를 제시하고 이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비판하겠다.1. “한국 측이 주장하는 우산도가 독도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명확한 근거가 없으며, 우산도는 울릉도의 다른 이름이거나 가상의 섬이다.”다음의 자료들을 통해 우리나라가 삼국시대 이래로 울릉도와 독도를 지배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1) 『三國史記』신라본기 지증왕 13년(임진, 서기 512년) 조의 기록이다.① 신라에 의해 복속된 우산국은 삼국, 고려시대 명주(현재의 강릉)의 정 동쪽 방 향에 있는 섬, 울릉도에 있었던 해상 소국이었다.② 우산국은 이찬,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에게 정복되었다.2)『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조.‘우산, 무릉 두 섬은 울진현의 동쪽 바다에 있고, 두 섬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바람이 불어 청명한 날에는 섬을 볼 수 있다.’① 위 기록에‘우산’은 독도를,‘무릉’은 울릉도를 의미한다.② 울릉도 사람은 이미 독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날씨 가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서 독도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③ 일본은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보인다는 섬, 우산이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인근 의 죽도나 관음도 등이라고 주장하나, 울릉도 인근의 죽도나 관음도는 바람이 불 어 청명한 날 뿐 아니라, 언제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섬이다. 즉 “바람이 불어 청명한 날”에 볼 수 있는 섬, 우산은 바로 독도를 의미한다.(울릉도에서 바라본 독도)3) 『만기요람』 (1808년)‘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며 우산도는 왜인들이 울릉도와 독도는 영토 의식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2. “일본은 울릉도로 건너갈 때의 정박장이나 어채지로 독도를 이용하여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독도의 영유권을 확립하였다. 에도시대 초기 1618년 돗토리번의 요나고 주민인 오야, 무라카와 양가는 막부로부터 도해 면허를 받아 울릉도에서 독점적으로 어업을 하며 전복을 막부에 헌상했다. 독도는 울릉도로 도항하기 위한 항행의 목표나 도중의 정박장으로서 또 강치나 전복 포획의 좋은 어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용되었다.”다음의 자료를 통해 일본 주장의 허구성을 비판할 수 있다.1) 도매면허란, 자국의 섬으로 도항하는 데는 필요가 없는 문서로 ‘외국’에 건너갈 때 국가에서 허가해 주는 '면허장‘이다. 결국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의 영토가 아닌 외국, 즉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2) 『은주시청합기』의 기록‘은주는 북해의 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은기도(오키 섬)이라고 말한다. (중략) 서북 방향으로 1박 2일 가면 송도(松島, 독도)가 있고, 또 거기서 하루거리에 죽도(竹島, 울릉도)가 있다. (속설에 기죽도라고 하는데, 대나무와 물고기, 물개가 많다.) 무인도인 이 두 개의 섬에서 고려(조선)을 바라보는 것이 운주에서 오키 섬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 경계는 여기(오키 섬)에서 끝난다.’① 17세기 일본의 서북쪽 한계는 오키 섬이라고 일본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며, 울 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있다. 현재 일본이 주장하는 17세기 중 엽에는 독도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알 수 있다.② 조선은 15세기 태종 이후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주민을 보호하 기 위해서 섬 지역의 주민을 강제로 육지로 이주시키는 쇄환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쇄환 정책은 영토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조선은 17세기부터 일본인들 의 울릉도 고기잡이와 벌목이 문제가 되자, 일본 측에 울릉도 출입 금지를 요구하 고 약속을 받아냈으며, 1697년(숙종 2를 모두 조선 색깔인 황색으로 채색하여 조선 영토임을 명확하게 표시했다. 그렇게 해 놓고도 혹시 훗날 무지한 일본인들이 억지가 있을 것을 염려했는지, 이 지도들은 울릉도와 독도 두 섬 옆에 다시 “조선의 것으로”라고 문자를 적어 넣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거듭해서 더욱 명확하게 강조하였다.위 네 가지 자료를 요약해보면, 그들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든 도해면허는 사실 울릉도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가 아닌 조선의 영토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17세기 중엽의 『은주시청합기』, 1877년의 「태정관의 지령문」,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등에서 당시 일본의 영토 인식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쇄환 정책으로 비워둔 울릉도와 독도는 두 섬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으며, 숙종 시대에 와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수토, 순시하는 정책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2. “한국이 자국 주장의 근거로 인용하는 안용복의 진술 내용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안용복의 도일(渡日)활동은 자신의 불법 도일 죄를 감하기 위하여 과장한 것으로 일본의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1) 『숙종실록(肅宗實錄)』22년(1696년 9월 25일) 조.(중략) 왜선은 역시 많이 와서 정박했는데, 뱃사람들은 모두 무서웠습니다. 저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래 우리나라의 경지(境地)인데 어찌 감히 월경(越境)하여 침범하는가. 너희들은 모두 묶어 마땅하다”고 말하고, 이어서 뱃머리로 나아가 대갈(大喝)하였습니다. 왜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래 송도(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하러 나왔다. 이제 마땅히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송도는 곧 자산도(우산도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측)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들이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저어 자산도에 들어가보니 왜인들이 바야흐로 가마솥들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삶고못 기록한 것으로 추측)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들이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라고 한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안용복은 송도는 곧 우산도이고 이것이 조선의 영토임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고, 일본 어부들에게도 분명히 인지시킨 것이다.② 안용복이 제 2차로 일본에 건너갔을 때, 백기도주에게 자신의 직책을 울릉 자산 양도감세장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즉 울릉도 감세장이라고 가칭하지 않고, 울릉 자산 양도감세장이라고 가칭한 것은 울릉도뿐만 아니라 우산도 또한 조선의 영토이므로 감세의 행정권을 행사하는 직책임을 표시한 것이었다.③ 백기도주에게 안용복이 다짐을 받으면서, 백기도주는 “양도가 이미 당신의 나라에 속한 이후”라고 말을 하였는데, 이 때의 양도는 울릉도와 독도임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백기도주는 이미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명백하게 밝혔으며, 이 양도에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 일본인들의 처벌을 약속한 것이었다.『숙종실록』의 이 기사는 1696년 기록으로,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증명하는 아주 결정적인 문헌자료인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실록의 기록을 일본은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있다. 2005년 5월 일본에서 발견된 안용복 관련 조사 보고서이다. 그 당시에 안용복이 휴대한 지도를 참조하여 조선 팔도의 이름을 기술한 부분이다. 일본에 건너 갈 때 안용복이 휴대한 문서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강원도에 표기되어 있다. 이 문서는 일본의 시마네 현의 어느 한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공개된 것이다.4. “일본정부는 1905년 1월 28일 동해상에 위치한 작은 무인도를 다케시마라 명명하고, 일본 영토로 편입을 각의로 결정했다.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로 독도를 시마네 현 오키도사 관할로 두면서, 타국이 점령했다고 인정할 만한 형태와 자취가 없고, 1903년 이래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자가 이 섬에 이주하여 어업에 종사했다는 사실은 국제법상 점령 사실(무주지 선점)을 인정할 수 있다.”국제 고시인데, 일본은 중앙정부 수준에서 고시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를 관보에 게재하면 동경에 있는 한국 공사관과 각종 대사관에서 이를 알게 되기 때문이었다.Ⅲ. 독도 영유권 주장에 나타난 일본의 역사 인식 비판조선 침략의 첫 신호탄, 독도 강제 편입“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 가사 제 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섬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 장군 이사부가 지하에서 웃는다. ”그렇다. 러일전쟁이 계기가 되어 군사적 전략지점으로서 일본은 독도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의도에 의해 최초로 침탈된 우리 땅이 바로 독도이다. 일본은 1904년 2월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2월 23일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통하여 군사전력상 필요한 요충지를 마음대로 차지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 일제는 더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를 향해 침략의 손을 뻗게 되었다. 1905년에는 요새로 지정한 각 지역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였는데, 이 때 울릉도와 독도도 요충지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일제는 울릉도와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40년 5월 15일을 전후하여 불과 며칠 동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의 교전으로 해군 전력의 3분의 1을 잃고 말앗다. 일본군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고민 끝에 남아 있는 군함으로 맞서 싸우기에는 적함의 동향을 주도면밀하게 파악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한, 일제는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울릉도 산림채벌권을 빼앗도록 하여 울릉도에 대한 침입을 원천 봉쇄시켰다.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의 곳곳에 망루를 설치하였다. 울릉도와 독도는 이렇듯 일제의 작전 수행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던 중 1905년 1월 1일, 일본군이 여순을 함락시키자 러일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는 대한해협으로 집결하여, 발틱 함대를.
    인문/어학| 2011.04.29| 14페이지| 3,000원| 조회(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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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립대 지원 자기소개서
    1. 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신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지금껏 자라왔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문을 정독하시는 아버지와 책을 늘 곁에 두시는 어머니 덕분에, 저는 어려서부터 거리낌없이 책을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책 중에서도 특별히 역사 책을 많이 읽게 된 계기가 8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제게 선물로 나관중이 지은 대삼국지를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책의 엄청난 스케일과 생생한 역사적 이야기 구조에 푹 빠져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어머니가 주시는 그 두꺼운 전집을 사흘 만에 완독하였습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면서 저는 그들의 무대인 역사에 많은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 역사란 이렇게 재미가 넘치는 것이구나. ” 그렇게 삼국지를 완독한 뒤로 저는 역사에 매료되었습니다. 삼국지와 같은 길고 어려운 문장의 역사 책들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한지와 수호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의 위인전과 여러 가지 역사 소설들, 책의 재미에 빠지고부터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책을 통해서 나이가 어릴 때부터 그 누구보다 넓은 포부와 원대한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2.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우리나라의 수많은 유적지와 유명한 문화재들을 찾아 여행을 참 많이 하였습니다. 비록 제가 어릴 때부터 역사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유적지나 문화재들에 대한 지식도 제법 있었지만, 제대로 된 유물들의 역사적 가치나 의미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차츰 차츰 커가면서 제가 돌아다니며 본 모든 것들에 우리 민족의 삶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진정한 역사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국사란 교과를 본격적으로 배우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학교 선생님들께도 국사적인 소질을 인정받게 되었는데, 한창 중국의 고구려사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문제 등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여러 역사학적 분쟁들을 보면서 국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더욱 커졌습니다. 저는 딱 이 맘 때 국사학도가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결국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3급에 응시하였는데, 1개월 정도를 투자하여 당당하게 합격을 했습니다. 또한 3학년이 되고 나서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제 8회 우리 역사 바로 알기 대회에 출전하여 독도 영유권 주장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3주 동안 꼬박 준비했을 만큼 제 노력이 들어갔는데, 안타깝게도 제가 부족하여 입상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제가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던 아주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를 목표로3. 고등학교 재학 중에 윤리와 사상과 전통 윤리를 공부하면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과 공부를 하였지만 조금 더 심도 있게 폭 넓은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균관대학교의 유학동양학부에 입학한다면 그런 부분들을 채우고 싶습니다. 특히 제가 많은 관심을 두고 있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로 대표되는 조선의 성리학과, 공맹순으로 대표되는 선진 유학의 고전들을 심도 있게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제가 늘 후회해왔던 것 중에 하나인 한문 공부, 제가 유학동양학부에 입학한다면 반드시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의 사상과 철학, 문화를 공부하는 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제가 그동안 소홀해왔던 한문 공부에 매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동양 유학과 한문, 그리고 제가 어릴 적부터 관심이 많았던 역사를 동시에 연구하여 아직도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 수많은 고전이나 역사서들을 제 손으로 직접 번역하여서 그 동안 읽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또한 장차 학부를 거쳐 대학원에 진학하여 더욱 전문적인 학습을 통해 동아시아의 사상과 철학, 문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아주 신선하게 연구하는 이 분야의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가 되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4. 제가 고교생활을 보낸 저의 모교는 포산고등학교입니다. 농촌에 위치한 기숙형 공립고라는 저희 학교 특성상 저는 특별한 사교육을 받지 않은 채 공교육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학급 수가 적은 저희 학교는 재학 중인 학생 수 대비 선생님 수가 다른 학교보다 확실히 많기 때문에 저는 1학년 때부터 별다른 사교육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암만 고민해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과외 선생님이나 아닌 학교 선생님께로 도움을 구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저는 고질적으로 약해서 가장 문제가 됐던 수학 또한 학교 선생님께 도움을 구하다 보니, 분명 학원을 다니고 사교육을 하는 아이들보다는 당장 습득 속도가 느리거나 문제 푸는 기술 면에서 부족한 지 몰랐지만 저는 혼자서 머리를 끙끙 싸매가며 고민하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적응력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을 분명히 받았습니다. 1학년 때 그러한 습관을 바탕으로 2학년이 되자 저희 학교 기숙사에 입사하여 365일 학교의 보살핌 아래 아무런 어려움 없이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ebs 혹은 강남구청 등의 인터넷 강의는 저도 틈이 나는 대로 보았지만, 지금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역시 1학년 때부터 어렵더라도 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보고자 했던 자기 주도적 학습이 아니었는가 하고 돌이켜봅니다. 저는 기숙사에 있었기 때문에 학업 외에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 기숙사 내 동아리였습니다. 저는 탁구 동아리에 들어 열심히 운동하며 체력을 다졌고, 밴드 동아리에 들어 7살 때부터 잡아 온 피아노를 치며 학업에 관한 스트레스나 공부에 대한 싫증 등을 곧잘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2학년 겨울에는 제가 그토록 일본과 중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정 등수 이상만이 갈 수 있었던 저희 학교 해외 문화 탐방에 참가하기 위해서 저는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결국 일본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생생히 몸으로 느끼고 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을 갔다 오고 난 후에 자극을 받아서 일주일 후 한 중 일, 삼국을 모두 섬렵해야겠다는 생각에 중국의 북경도 다녀왔습니다. 저는 중국과 일본을 다녀온 후 성균관대 동양학인재 전형에 지원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굳어졌습니다. 해외 체험이 저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5. 제가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성균관대학교 유학 동양학부라는 뚜렷한 목표가 생기자 그 목표를 위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국사 교과 진도가 채 얼마 나가지도 않은 상황에, 혼자서 책이랑 기출 문제를 풀어가며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3급 합격에 성공을 했습니다. 또한 지원 자격 중 하나인 내신을 맞추기 위해서 국사, 도덕 등 사탐 과목 공부에 특히 비중을 두어 공부를 하였는데, 그 때문에 약간은 다른 과목에 투자할 수 있는 공부량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힘든 점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계획성 있게 관리하였기 때문에 결국 사회랑 국사 교과에서 1년 내내 최고의 성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2학년 3학년을 거치면서 더욱 더 바빠지며 시간에 쫓겨 살았는데, 3학년 초에 제가 한국어 능력검정시험을 한번 쳐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성균관대 동양학인재전형에서 보는 자격증 중 하나로, 비록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자신감을 갖고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결국 매우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처음 친 것이기 때문에 저는 나름대로 만족을 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험 역시 학교나 학원의 도움 없이 혼자 공부하여 친 것이기 때문에 저 자신에게도 상당히 뿌듯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동양 유학을 전공하려는 저의 종교는 사대 째 기독교입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심적으로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제가 십여년 동안 굳게 다져 온 제 나름의 신앙심과 가치관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와서 동,서양의 철학을 접하면서 여러 가지 사상으로 인해 제 신앙심과 가치관에 혼란이 생겨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유일신으로 믿는 저의 종교와는 다른 여러 사상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지면서 결국 제 머릿속을 어지럽혔습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범신론 등의 사상을 배우며, 공맹순의 선진 유학을 배우며 저는 “나는 더욱 더 이럴수록 동양의 유학과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비록 지금은 가치관에 혼란이 오고 나름대로 굳어왔던 신앙심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내가 모든 걸 개의치 않고 유학 동양학부를 가서 공부를 한다면 내가 공부한 학문의 실체를 통해 내가 가진 종교를 반증해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비록 기독교인이지만, 타 종교에 대한 편협한 사고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자신의 종교 외에 다른 기타 종교도 해박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민 끝에 다시금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힐 수가 있었습니다.
    학교| 2011.04.29| 3페이지| 3,000원| 조회(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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