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혜초와 향가 처용가혜초( AD. 704-787)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여행기 은 프랑스 파리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 최초의 기행 문학 작품이다. 왕이 인도 다섯 개 지역을 가는 傳이다.15살에 혜초스님은 중국에 갔고, 19살에 오천축국(인도)을 여행하는데 무려 8년간의 여행이었다. 8세기 때이다. 중국에서 인도스승인 불공. 금광지를 만남으로써 그 영향으로 밀교(密敎)라는 주술적인 불교로서의 모습을 갖춘, 힌두교의 불교인 그것의 연구를 위해 인도 성지 참례를 떠났던 것으로 본다.이라는 기행문을 남김으로써 혜초스님은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그 기행문에는 혜초 스님의 종교적 신념과 새로운 학문을 수용키 위한 자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그가 인도를 탐방한 이유를 세 가지로 축약 해 보자.첫째로 성지순례 , 둘째로 구법활동, 셋째로 고행실천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기행문에 나타난 혜초의 관심사는 우선 불교에 관한 것이다.1908년에 새로 발견된 이 유행기(遊行記) 는 법현(法顯)의 불국기와 같은 문학적 가치도 없고 현장(玄漿)의 대당서역기와 같은 정밀한 서술도 없다. 그의 문장은 평판스럽고, 그의 서술은 절망적으로 간단하고 단조하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동시대적 기록이라는 증좌일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8세기 전반기 인도제국에서의 불교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서북인도 아프카니스탄 노령 투르케스탄 및 중국령 투르케스탄에 관해서는 그 이외의 기록에서 볼 수 없는 지식을 많이 제공해 준다.위의 인용에서와 같이 혜초의 여행기는 정치, 종교, 풍속 등 당시 인도를 비롯한 서역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많은 지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동천축국의 불교성지는 혜초의 천축국 여행 중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의 불교 유적들에 대한 기록이 다른 지역의 여행기록보다 비교적 자세하다.혜초의 관심사를 정리하자면 첫째, 주된 관심은 일차적으로 불교에 대한 것이고, 그 다음으로 중생의 삶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은 법현의 불국기, 현장의 대당 서역기, 의정의 남해기귀전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닌다. 둘째, 동천축국전에서의 주된 관심은 불교적 자취에 대한 것이다. 셋째, 중천축 이후의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 여정에서 그가 견문하여 기록한 주된 관심은 물론 불교적인 것이겠지만, 그밖에 두드러진 특징은 중생의 삶의 모습에 대한 치밀한 기록이다. 넷째, 혜초가 오천축을 벗어나 귀로에 거친 많은 나라에서도 불교적 관심과 중생의 삶의 모습에 지대한 관심이 나타나지만, 정치적 상황에 대한 깊은 관심이 특이하다. 다섯째, 그의 주된 관심지역은 오천축으로서 오천축을 하나로 묶어 기술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귀로에 들른 다른 제국과의 비교 기준이 되고 있다.기행문에 삽입된 오언시혜초는 여행지에서 견문한 사실들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간단하고 단조롭다. 그것은 그럼으로써 진실하다고 볼 수 있다. 기행문에 삽입된 오언시로 이역(異域)의 흥미 있는 사실의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문학적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다섯편의 시를 제외시킨다면 이 여행기는 단순한 미지세계에 대한 객관적 사실의 기록에 지나지 못한다. 이 시가 있음으로써 이 여행기는 문학성을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이역의 흥미 있는 사실 이외에 여행에서의 감흥을 작자와 더불어 맛보게 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이 시들은 한 여정이 끝나고 다음 여정이 시작하기 전에 위치하고 있다.첫 번째 시는 동천축의 마지막 여정인 녹야원의 기술 다음에 위치한다. 마하보리사를 보았을 때 그 본래의 소원을 이루었으므로 비상한 환희를 느껴 그 뜻을 오언으로 서술한 것이다. 둘째 시는 남천축에서 서천축으로 가기전 즉 중천축과 남천축 여정이 끝나는 곳에 있다. 마하보리사 에서의 불교성지를 본 감격의 표현과는 달리 두 번째 시는 고향에서 수만리 떨어진 타향에서의 고독한 여행에서 우러나온 달랠 길 없는 향수를 읊고 있다. 쓸쓸하고 외로운 나그네 모습이다. 세 번째 시는 서천축을 거쳐 북천축의 여정을 끝마치면서 북천축의 자란다라 산 속에 있는 나가라나다사에서 한 중국인 승려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갑자기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쓸쓸하여 죽은 승려의 명복일 빈 시이다.이 시에서 여로에 지친 혜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네 번째 시는 파미르 고원 중간에 위치한 와칸국으로 가는 도중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서 쓴 시다. 앞길에 대한 근심과 험난한 파미르 고원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그대는 서번길이 먼 것을 한스러워하나나는 동방길이 먼 것을 한하네길은 거칠고 산마루엔 굉장한 눈이 쌓여 있는데험한 골짜기엔 도적떼도 많다네새도 날다 놀라는 험한 묏부리사람이 건너가긴 너무나 어려운 외나무다리평생 눈물 흘린 적 없었는데오늘 천줄기 눈물 흘리네혜초는 다섯 편을 통하여 동천축의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그 희열을 그 중 대표적 성지 마하보리사에서의 감격으로 말하였고, 여행의 외로움과 향수, 그리고 천축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북천축을 지나면서 죽음과 싸운 험난한 고행에서의 허탈감, 구법의 어려움, 무상감등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역에서 객사한 한승의 명복을 비는 시를 통해 토로하고 있다. 또 귀로의 여정인 파미르 고원의 험난한 모습을 절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축여행을 모두 마치고 귀로의 여정에서 극도로 쇠약해진 나약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 시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다섯 편의 시에서 우리는 혜초의 숭고한 종교적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다.비록 다섯 편에 불과하지만 이 시가 있음으로써 지극히 간결한 객관적 표현 속에서도 문학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기행문으로서도 성공하게 된 것이다. 즉 노정, 여행지의 풍속, 자연 풍광, 인간과 언어, 제도의 서술이 극히 객관적이고 간결하게 기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지에서의 객창감(창문으로 스쳐가는 느낌)을 이 시가 대신함으로써 이 여행기가 단순한 기록으로 그치지 않고 생동감 있는 문학성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이다.에서 혜초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물론 불고에 관한 것이지만 , 그는 중생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였다. 또 이 기행문에 삽입된 오언시는 구체적인 어느 지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로 묶어볼 수 있는 한 여정의 전체적 감회를 압축 표현하기 위해 삽입된 것으로써 그의 객관적인 기술을 해치지 않고 여행에서의 감회를 나타낼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었다고 하겠다. 이 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여행기는 문학 작품으로도 성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은 단순한 서역사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또는 우리나라 최초의 책(두루마리로 된 책)이라는 역사적 가치로서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문학 작품으로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첫째,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문학 작품으로서, 둘째 삽입된 다섯 편의 시는 최치원보다도 1세기나 앞선 8세기 초 작품으로 귀중한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향가 신라 헌강왕 때에 처용이 지은 향가이다.
1.고구려의 연희(演戱)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 말부터 기원후 1세기 말에 이르는 동안 부여의 그늘에서 벗어나 만주와 한반도 일대의 새로운 국가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고구려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백제의 부흥, 신라의 성장, 중국 남북조시대의 종결 및 수나라라는 통일 세력의 등장,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 재정립을 위한 수당의 주변 세력에 대한 압박 등 국제 질서의 커다란 변화와 마주치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당 등 통일중국제국에 대항하고, 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륙아시아 국가들과의 동맹과 교섭을 계속 시도했다.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보이는 두 명의 사절 모습은 7세기 후반 들어 점점 치열해져 가는 대당 전쟁의 절박한 상황에서 내륙아시아 국가들과 동맹을 추구하던 외교 노력의 일면을 잘 전해 주는 예이다. 내륙아시아 지역 주민과의 교섭은 정치적으로 한국 고대사의 전개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화적으로도 삼국시대의 유물이나 고분벽화에서 내륙아시아 문화의 요소를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 산악. 백희 같은 외래 기원의 연희가 일찍이 고구려에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대외 교섭이 매우 활발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각저총의 벽화에 그려진 씨름꾼 중 한 사람은 그 모습이 분명히 서역계통의 외국인이고, 안악3호분 벽화 중 후실의 무악도(舞樂圖)에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춤꾼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서역인들이 고구려에 와서 고구려인들과 더불어 산악. 백희를 연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고구려는 중국 남조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아홉 번임에 비할 때, 북위와의 관계 개선 및 그 유지에 열의를 엿볼 수 있다. 동이전 제 30 부여국조에 보면 ‘ 순제 영화 원년(136)그 왕(부여왕)이 조회하러 경사에 왔다. 황제가 황문(내시)으로 하여금 악기를 연주하고 각저희(角抵戱)를 놀게 한 다음, 부여왕을 보냈다.’라고 쓰여져 있다. 각저희는 산악. 백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듯하다. 또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에서도 ‘한나라 때 악사와 연희자를 고구려에 리기같은 동물곡예 등 산악. 백희에 해당하는 연희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팔청리 고분 벽화의 행렬도에서는 행렬 주인공의 수레 앞에서 여러 가지 재주가 펼쳐지고 있다. 말을 타고 뿔나팔을 불면서 갖가지 묘기를 보여주는 말타기 재주인 마상재(고구려인이 기마민족이었기 때문에 말타기 재주가 매우 발달했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긴 나무장대 위에 올라가 거기에 두 발을 묶고 나무다리걷기를 하면서 완함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연희, 두 사람이 짝을 이뤄 행하는 칼재주부리기, 세 개의 곤봉과 다섯 개의 방울을 엇바꾸어 던져 올리며 받는 재주 등 산악.백희의 연희 종목들이 다수 발견된다.에 의하면, 고구려의 연희가 당나라 때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양재사는 어사대부로 있었는데, 어느 날 사례시(司禮侍)에서 주연이 절정에 올랐을 때 사례소경(司禮少卿)인 동휴(同休)가 그의 얼굴이 고구려 사람을 닮았다고 희롱했다. 그러자 양재사는 흔쾌히 일어나 전지를 달라 하여 건(巾)에 달고 자줏빛 도포를 뒤집어 입은 다음 고구려춤을 한바탕 추었는데, 머리에 띠를 묶고 두 손을 펼치는 동작이 음악과 잘 어울려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보듯 당시 어사대부가 고구려춤을 흉내내서 출 수 있을 정도였다면, 고구려 연희가 꽤 관심을 끌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 연희는 당나라에서 계속 전승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백(李白: 701~762)이 고구려춤을 보고 읊은 시 가 이를 뒷받침한다.金花折風帽(금화절풍모) 절풍모에 금빛 꽃을 꽂고白馬小遲回(백마소지회) 백마 타고 유유히 거닐고 있네翩翩舞廣袖(편편무광수) 펄렁펄렁 춤추는 넓은 소매似鳥海東來(사조해동래) 해동에서 날아온 새와 같구나한편 고구려에서는 산악.백희의 한 종목인 인형극도 매우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인형극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 고구려의 인형극에 관한 내용이 발견된다.-굴뢰자인희이 기록들을 통해서 산악.백희의 한 종목인 인형극이 고구려에서 독자적인 모습으로 전승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백제의 연희에 의하면,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는 세 차례의 천도를 통해 개성 있는 문화를 형성했다. 한성시대에는 서울 석촌동에 있는 대규모의 돌무지 무덤에서 나타나듯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러나 웅진과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중국의 남조문화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또 백제는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백제화하고, 다시 왜(倭)에 전수하여 일본 문화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동이전에 백제기로 투호(병속에 화살 넣기), 위기(바둑), 저포(윷놀이의 일종), 악삭(주사위놀이인 쌍륙), 그리고 농주지희(弄珠之戱)를 들고 있다.농주지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공받기나 방울받기로서, 흔히 농환이라고 불리던 산악. 백희의 종목이다.백제인 미마지가 중국 남조 오나라에서 배워 612년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이 있다. 기악의 내용은 13세기 일본 문헌인 (1233)에 소개되어 있는데, 절에서 불사공양의 무곡(舞曲)으로 연출되던 교훈극으로서 묵극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악의 존재를 볼 때, 백제에도 연희 종목들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3. 신라의 연희신라는 시조 박혁거세가 즉위한 기원전 57년분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했다.신라의 연희로는 가무백희, 황창무, 농환, 사자무, 무애희, 입호무, 신라박을 들 수 있다. 가무백희는 중국의 산악 또는 백희에 해당하는 용어이다. 가무백희라는 용어는 의 신라 유리왕 9년 조에 처음 나타났다. 그리고 에도 진흥왕 12년에 처음 설치한 팔관회에서 가무백희를 놀았다는 내용이 나온다.-진흥왕 때 팔관회를 열었다. 매년 11월에 대궐 뜰에다 스님들을 모으고, 윤등(輪燈)하나를 설치하고 사방에 향등(香燈)을 늘어놓았으며, 또 두 대의 채붕(綵棚)을다는 내용의 황창무 유래담이 나온다.칼춤 또는 칼재주 부리기는 산악. 백희의 일종으로 이미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나온 바 있는 오래 된 연희이다. 황창무는 칼 재주 부리기가 고사와 결합하여 오락화, 예술화한 것이다.‘사자기’란 곡명으로 보아, 이때 이미 사자춤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에 신라 승려 원효가 우인(優人)이 놀리던 큰 박을 본 따 연희 도구를 만든 후 무애라고 이름 짓고,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어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교화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결국 무애희는 전문적 연희자인 우인들의 연희 도구를 활용해서 만든 무애를 사용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던 연희이다.에는 신라박(新羅拍)이라는 동물 가면을 착용한 가면희도 그려져 있는데, 동물로 가장한 가면희 역시 산악. 백희의 일종이었다. 신라박은 동물 형상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가서 서 있는 모습인데, 양손과 발에도 동물 머리를 형상화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통일 신라로 들어서서도 연희에 대한 시는 전하는 바 없었다. 이는 곧 당시까지의 귀족문화계층들의 연희에 대한 관심은 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났지, 그것을 시화(時化)하려는 문화의식은 없었는데, 신라 말에 최치원은 유명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를 지어 연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최치원 [崔致遠, 857~?]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8년(경문왕 8) 12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율수현위(?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崔致遠의 演戱詩(최치원의 연희시)-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金丸(금환) 금방울놀이廻身掉臂弄金丸회신도비농김환月轉星浮滿眼看월전성부만안간縱有宜僚那勝此종유의료나승차定知鯨海息波瀾정지경해식파란몸 돌리고 팔 휘둘러 방울 놀리니달이 굴고 별이 뜬듯 눈 어지러워의료 같은 재주인들 보다 나으랴동해바다 파도소리 잠잠하겠네.시구에서 언뜻 느끼는 것은 지금도 볼 수 있는 남사당패의 ‘버나잽이’나 여아들의 놀음인 오제미이다. 그런가 하면, 가끔 외국인들이 이곳에 와 큰 고리를 여러 개 들고 재주를 피우는 쇼를 연상하게 한다.月顚(월전)- 곱추놀이肩高項縮髮崔嵬견고항축발최외攘絹群儒鬪酒盃양견군유투주배廳得歌聲人盡笑청득가성인진소夜頭旗幟曉頭崔야두기치효두최어깬 솟고 목은 움칠 다리는 오뚝여러 한량 팔 걷으며 술잔을 투정노랫소리 듣고나서 웃어제끼며초저녁이 지새도록 깃발 붐빈다.이 시에서 어깨를 높이고 머리를 움추린다는 것은 우리가 보통 춤을 출 때 자연히 나오는 동작인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탈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이 연희시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가지이다. 髮崔嵬에 대해서 김학주는 의 글귀를 인용하면서 흙산 위에 바위가 얹혀있는 위험하게 높은 형용이라고 지적하였다. 髮이 가면을 썼다고는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런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大面(대면)- 탈춤놀이黃金面色是其人황김면색시기인手抱珠鞭投鬼神수포주편투귀신疾步徐趨呈雅舞질보서추정아무宛如丹鳳舞堯春완여단봉무요춘황금탈 쓴 사람 누구인지 모를 네라구슬채찍 휘두르며 귀신을 쫓아낸다.달아나며 춤추다가 으쓱으쓱 늦은 걸음너울너울 춤을 추는로이다.
조선 후기 문학가 허균 김만중 박지원허균의 사상론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은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활동한 인물이니 김시습보다 1세기 여를 뒤선다.허균의 문학을 단적으로 언급한 것은 중국의 문인 주지번이다. 『성소부부고』서문에 기록하길 “그의 문장은 활달하고 여유가 있으면서도 아름답고 밝아 명나라 왕세정의 만년의 작품과 같고, 그의 시는 끝까지 꿰뚫었으면서도 어휘가 풍부하고 화려하여 명나라 변공의 청치가 있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허균의 문학사상을 본질론, 시론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로 허균문학의 본질론은 성정론(性情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집약된다.조선전기의 문학관은 재도적(載道的) 문학관이 주류를 이뤘다. 그것은 성리학의 영향이었는데 문학은 풍속의 교화나 성정의 순화라는 효용론적 입장에서 가치가 인정되었다. 이른바 재도지기, 관도지기로서 도학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이후 사변적 성리학의 경향에 따른 문학관은 인간의 감정과 현실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허균의 문학관은 이에 합당하였다. 그의 성정론은 성을 배제한 정의 의미로만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이치나 사상보다는 인간의 정서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정을 중심으로 한 문학관은 그가 살아온 삶의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기 때문에 “천품의 본성은 감히 이길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문학을 공리적이고 효용적인 입장에서 나아가 개성적이고 예술적인 차원으로 인간본연의 성정, 즉 정감을 중시한 태도라고 파겠다. 시의 조화성에 대해서는 ‘천기’와 ‘현조’라는 말로 표현하여 “시란 별취가 있는 것이지, 이로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기론의 태도로 볼 수 있다. 기의 전통적 개념은 인간의 선천적인 개성을 뜻한다. 이는 문학작품에서 작품의 생명력이나 활력을 주는 개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의 자질인 재기와 작품의 기세로서 어기라고도 표현된다. 허균은 후천적 노력과 환경에것을 주장했으면서도 정통유학에서는 이단자로 몰렸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목에 염주를 걸고 날마다 부처를 섬기는 자칭 불제자가 되었으며 불자임을 부정하기도 했다 또 선교와 천주교의 세계에 드나들면서 폭넓은 종교사상을 소유하게 되었다. 허균은 실학의 싹을 틔웠으며 이단에 심취한 이상주의자며 반봉건적 사상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허균의 불교사상은 순수한 학문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선문답을 일삼거나 승려들과 사귐도 그러한 것이다 속세에 대한 반발심, 동양사상에 대한 높은 관심과 탐구욕이 불교를 접한 이유가 될 듯하다. 허균은 도교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도교의 중심인 노자와 장자를 중히 여겨 학구적인 태도로 접근했으나 차츰 오래 사는 법과 신선사상, 은둔사상에도 애착을 가졌다. 남궁 선생 전에서 양생과 함께 신선 술을 보여주었는데 그런 신선사상을 흠모한 것은 이상세계를 동경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실제로는 혼탁한 세상에 어울리면서도 한정록에서 처럼 세상을 버리고 속세를 떠난 선비들의 은둔의 멋을 그리워했다 간간이 그의 글에 나오는 말이 자연과 함께 벗하고 싶다는 것이며 사우재라는 글에서 도연명. 이태백. 소동파 등 도가사상을 시로 형상화한 그들과 자신을 포함하여 ‘네 벗’이라고 칭하고 이들의 화상을 화가 이정에게 그리게 하고 사우재 글씨를 한석봉에게 청하여 집에다 걸어두었다 이처럼 은둔하여 유유자적하는 신선의 삶을 도교를 통해 접하고자 했다. 허균은 외교관으로 수차례 중국을 다녀오면서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맨 처음 소개하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들의 지도와 ‘게십이장’을 얻어왔다.”고 하였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허균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다”고 했다.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들의 지도?‘게십이장’을 얻어왔다 고 했으며 안정복도 순암 집에서 “서양의 책이 선조 말년에 동쪽으로 왔는데 이름난 벼슬아치나 큰 선비들이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허균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박지원의 연암 집, 이규경의도를 기점으로 활동했는데 그 무리는 당시의 도적무리 중 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했다. 홍길동은 당상관의 차림과 행세를 하고 다니며 지방 수령들의 존대를 받았다고 하며 나라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위세를 부리다가 마침내 체포되었다. 그의 체포 소식에 삼정승이 모여 임금에게 축하의 말을 올릴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이처럼 당대의 위정자에게는 도적의 수령으로 취급되었으나 민중들에게는 영웅적인 인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홍길동전을 허균이 지었을 것으로 보더라도 중국 소설의 모방이나 영향, 독창적 창작설의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홍길동전은 유형적인 측면에서 일대기 소설로 전기적 유형, 영웅의 일생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내용상 사회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진보적 성향과 현실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서민문학으로 이행을 가능케 했다. 소설의 전개를 단계적으로 살펴보면 가정적으로 서자로서의 천대에서 출발하여 활빈당의 의적행위, 병조판서 제수, 해외진출 및 이상 국가 건설로 마무리되는 것은 가정에서 사회로, 그리고 국가에서 해외로 확대 지향적 전개 양상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허균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유재론에서 인재를 버리지 말라고 따지면서 인재등용의 문제와 서얼에 대한 차별대우를 통박한 것이라든지, 병론에서 믿을만한 군사를 기를 것을 강조하고, 호민론에서 두려워할 자는 백성뿐임을 설파한 것은 홍길동전의 이면적 주제와 조응된다.홍길동전은 주인공 자신의 절대왕권에 대한 반항의 결정적 한계와 상대적으로 경직화된 조선왕조사회의 비타협적 통제구조의 본질을 여실히 형상화하였다. 소설이 이와 같은 결말을 내게 된 데는 비록 남달리 예리한 비판의식이 인정되는 한에서도 조선왕조사회를 이해하는 작자 자신의 철학에 결정적 제약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돌이켜 폐쇄적인 조선왕조의 , 개인에 대한 그지없이 거대한 무형의 중압을 말해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홍길동전에 대한 연구는 여러 이본을 중심으로 한 서지적 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서포 김만중은 소설이라는 양식 자체가 문학의 품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기는 문학 작품의 실질적인 질이 문학양식의 위상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한 듯하다. 한시와 동등한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시 양식이 드러내지 못하는 서사양식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면, 소설 또한 품격 높은 문학양식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그의 이런 적극적인 발상은 『구운몽』이라는 창작행위로 민족문학에 크게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서포 김만중의 인식은 당대의 정치적 갈등을 뛰어넘고 중국문학의 주변국이라는 문학 현실의 한계에 도전한 진취적인 개혁의지의 생산적 결과를 얻게 되었다.김만중은 당대의 거사로 정통적 불학자, 선학에 능통한 선객, 불교문학자 내지 포교법사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당대 불교계를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불교인으로서 불교학, 선학 내지 한.중 불교사 등에 대한 논설, 변증을 하는 한편 포교, 교화의 실천적 업적으로 불교문학, 포교소설을 창작하게 되었다.소설 작품을 창작한 동기는 보는 이에 따라 복합적일 수도 있지만 서포 자신의 생애 적 갈등, 이상과 불교에 관한 모든 문제를 백일몽 적으로 통쾌히 해결,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 시발이 되고, 나아가 그것이 좀 더 확대, 승화되어 불교중흥, 대중포교의 방향으로 정립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하나의 거대한 정신세계, 소설세계를 설정하되 상류층, 한문 층을 위해서는 교학, 선학에 입각한 『구운몽』을 한문으로 제작한데 대하여 부녀, 대중 층을 위해서는 관음사상에 기반을 둔 『사씨남정기』를 국문으로 창작 해 냈는데, 그것이 마침내 한역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김만중이 활동하던 17세기말은 서양의 문물과 지식이 중국만을 통해 들어오던 시기였다. 중국에서 받아들인 서양의 신문물과 과학은 한국의 일부 지식층에게만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신학문을 좋아하던 김만중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자연관, 우주관과 서양의 그것을 함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학창작에서도 이런 측면을 충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당대로서는 품격 있는 문학 양식에 속하지 않았던 소설 속에 부분 소품들을 배합하여 종교나 철학이 나아갈 수 있는 최고 층위의 의미로까지 작품의 주제를 이끌어 올렸다는 데 작가의 탁월성이 있다. 『구운몽』은 금강경의 선禪이라는 형식을 외피로 하면서 갈등 속의 삶을 평平과 화和로 이끌어 가는 최상의 지혜를 제공해준다. 인간이 지닌 쾌락의 욕망이 계기가 되어 갈등이 시작되며, 그 과정을 이루는 선적인 몽유는 인간 욕망의 극대화를 보여주면서도 그 욕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제공해준다는 점에 작품의 고전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작가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한 우의적 표현은 불교의 소재를 차용했으면서도 유가적 삶의 원리를 담아내고 철학적인 담론 속에 대중의 감정을 스며들게 하는 교묘한 구성의 원리가 무르녹아 있다.한편 김만중은 불교사상을 다루는 데 있어 차용의 수준을 넘어서 금강경의 본질을 서사구조로 형상하는 문학적 재능을 나타내었다. 구운몽에서 금강경의 핵심 사상을 진술하는 원리를 문학세계 속에 완벽하게 응용하고 있다. 그는 대중소설류에서 다루는 소재나 인물 설정 차원의 수용과는 달리, 구조 차원의 수준에서 종교나 철학 문제를 서사적 틀로 전환시켰다. 예를 들면, 성진이 환속에 비유될 수 있는 세속에서의 양소유로 살아가는 것이 실은 출가한 성직이 득도(得道)를 위한 하나의 수행과정으로 환원이 되기 때문이다.이 작품이 문학 작품으로서, 특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소설로서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작가 개인의 개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당대 사회의 철학적 인식 기반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당대인이 꿈의 모델로 생각하던 중국을 배경으로 하여 그 넓고 광활한 무대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주인공은 그대로 조선의 대중들이 잠시 행복한 꿈에 젖어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또한, 한 인물이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행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인생을 반추해보게 하는 강한 인상을 남겨준다.소설의 개인적 창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