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석「존재의 형식」Ⅰ. 들어가며노동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방현석은 1961년 울산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는 제대 후 84년부터 85년 사이 학생회장을 지냈다. 졸업 후, 그는 여러 공장에서 노동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노조 교육선전부장 또는 노동조합위원회의 상근간사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8년 노조설립 관계로 해고되었다. 해고 후, 노동자 관련 글을 읽다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현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그것이 1988년 그의 등단작,「내딛는 첫발은」이다. 이를 시작으로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과 『랍스터를 먹는 시간』, 그리고 장편소설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을 펴냈다. 이외에도 틈틈이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을 쓰기도 했다. 그는 기존의 노동소설이 비판받는 상투적이고 계몽적인 구조와 제재에서 벗어나 직접 자신이 경험한 노동현장의 모습을 실질적으로 나타내는 리얼리즘 작가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90년대의 한국문단의 흐름은 탈이데올로기, 탈중심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소설의 주제는 가볍고 재미를 위한 것에만 집중이 되었다. 또한 80년대의 역사적 인물, 버림받은 사람, 운동권 인물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80년대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한 90년대는 개인주의와 가벼움을 내세워 과거를 쉽게 용서하고 망각하는데, 이에 대한 체념과 서글픔은 방현석에게 새로운 방안의 모색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이에 방현석은 1992년, 최인석·김영현·김남일 등이 속한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에 참여해, 베트남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이를 주축으로 작가들은 후일담 형식의 소설적 성과물을 내놓았는데, 앞으로 보게 될 방현석의 단편소설 「존재의 형식」또한 1980년대 6월 민주화운동 세대의 후일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2003년에서야 「존재의 형식」이 속한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을 내게 되었다.며 진행되고 있다. 이를 시간 순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시간사건의 시간을 나타내는 부분사건 요약15-16년 전,학교(1986-7년)돌아서는 문태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 같았다. 녀석을 처음 만났던 20년 전, 그때의 맑았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문태의 웃음을 바라보는 재우의 얼굴에도 희미하게 웃음이 번져갔다.(방현석·김한수 외, 210쪽.)재우는 문태와 동기로 학생회가 부활되던 해에 같이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50쪽.)총학생회가 부활되고 학생회장을 뽑아야하는 상황에서, 지하서클의 중심이었던 재우는 출마를 거부했고, 다음으로 거론된 창은은 성적이 문제가 되어 출마할 수 없었다. 이에 재우는 공개 종교서클 대표였던 문태를 추천하여 공개서클까지 선거운동과 합법공간의 전면에 포진시키려 했다. 이후 셋은 총학생회의 중심인물이 되어 활동한다.1987년 6월 민주화운동노동자 투쟁(1987년 7-9월)노동자들의 투쟁이 거세게 몰아치던 해의 여름에도 녀석은 그 흔한 노조 간부자리 하나 맡지 않았다.(193쪽.)문태와 재우는 각자의 단체에서 인정을 받았지만 창은은 여전히 공장의 노동자로 머무른다. 어느 날, 세 명이 속한 조직의 내부논쟁에서, 창은이 재우와 문태의 반대 입장에 서게 된다. 이후, 재우와 문태의 입장이 조직의 다수가 되고, 자유주의자로 비난 받은 창은은 조직을 떠나게 된다. 이 시기에 창은의 팔이 롤러에 말려들어가 절단하게 된다.9년 전초겨울 저녁,부평역 근처의 경양식집과 역 광장(1992-3년 11월)벌써 9년의 시간이 흘렀다. 재우가 창은을 만난 것은 무작정 한국을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168쪽.)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초겨울 저녁의 싸늘한 바람이 재우의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다.(170쪽.)재우는 한국을 떠나기 이틀 전에 한 식당에서 창은을 만난다. 이때도 창은은 무임금에 가까운 노조단체의 상근자로 있으면서 새벽에는 아파트 단지의 세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까만 기름때가 낀 채로 열심히 칼질을 하는 창은의 왼손이 재우의 심정이 먹먹하게 한다.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1일: 세 사람은 번역작업을 하던 중 ‘번지다’라는 지뢰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이지 고민한다. 문태는 재우에게 베트남에서 통역할 사람을 구해달라 하고, 재우는 후배 상환에게 번역 일을 부탁한다.2일: 통역료 관련 문제가 생겨 문태와 상환에게 차례로 전화가 온다. 한편, 재우는 비가 오는 날이면 레지투이에게서 깊은 슬픔과 적멸감이 느껴진다. 오후 작업 중, 상황을 번역하는 것에 있어서 지뢰가 찾아온다. 하지만 게릴라 전사들의 상황과 모습을 자세히 알고 있는 레지투이로 인해 딱 알맞은 대사를 찾게 된다. 저녁 시간, 배달 음식을 시켰는데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싼 보쌈을 보고 레지투이는 화가 난다. 세 사람은 저녁을 굶은 상태로 작업을 마친다.3일: 이른 아침, 레지투이가 저렴한 가격의 베트남 사람들이 즐기는 쌈 돼지고기를 차려 놓는다. 낮잠을 자다가 재우는 상환의 전화를 받고 문태와 통화를 한다. 이후 희은은 총감독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번역 일이 앞으로 4일 남았음을 깨닫는다. 때문에 자정까지 강행군으로 번역 일을 한다.4일: 레지투이는 꽝 형(사장)으로부터 증선산맥에 관한 일본의 수정 압력을 듣고 분개한다. 이후 레지투이와의 대화를 통해 재우는 그가 반협정 인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재우는 문태를 만나 날이 선 이야기를 하며 최악의 한나절이 지나간다.5일: 점심, 통역을 부탁했던 김 언니로부터 불평 섞인 전화가 온다. 재우는 문태가 구치 터널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다.6일: 하루 종일 번역 작업, 7일 새벽 세시에 모든 작업을 끝낸다.7일: 재우는 최사장을 만나 다낭으로 가는 비행기가 결항된다. 재우는 노천카페에서 희은과 함께 서울에서 온 감독을 만난다. 재우는 감독에게서 레지투이가 시인 반레라는 것과 함께 그의 삶에 대해 듣게 된다. 이후, 도착한 반레는 재우한테 친구에게 연락을 하라고 권하고, 재우는 문태에게 전화한다. 문태가 도착한 이후, 재우와 문태는 반레의 이야기를 통해 베트남 사람들의 ‘떰 로옴(마음가짐)’의 방식을 배운생이었지만, 지금은 변호사 일을 하며 철저한 자본주의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재우 또한 문태만큼은 아니더라도, 베트남에서 번역가로 돈을 벌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80년대를 운동 주체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90년대의 이러한 변화는 쉽게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존재의 형식」의 창은은 90년대에도 이전과 변함없이 노동자로서, 운동권 사람으로서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하고 있었다. 90년대의 변화를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꿋꿋이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태와 재우 역시 80년대의 기억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그 상처를 덮어두고 회피하고만 있다. 그리고 서로의 새로운 삶 또한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그들은 90년대의 이런 변화에 완전하게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존재의 형식」의 현재에는 베트남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남부의 게릴라전에 참여한 반협정 인민인 레지투이는 60-70년대 전쟁의 상처를 지닌 채 2000년대인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제 1·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베트남이라는 공간 속에서 많은 나라들이 처참한 피해와 상처를 입었다. 이후 엄청난 폭탄 투하와 미군 5만 7천명의 전사로도 미국은 결국 베트남에게 패했고, 이후 베트남 남북 간의 전쟁을 통해 베트남은 76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재통일하게 되었다. 수많은 군사와 인민병사들이 호치민 루트를 지나면서 죽어 나갔다. 오늘 사귄 동료를 내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베트남 병사들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지옥이었을 것이다. 남북 간의 전쟁뿐만 아니라, 힘없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베트남과 한국이 많이 닮아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소설 속 현재 베트남의 모습은 한국의 80-90년대와 닮아 있다. 이는 80년대의 기억을 지닌 문태, 재우와 연결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상처가 있음에도 레지투이가 문태·재우와 다른 모습을 지녔듯이, 베트남과 베트남의 사람들은 한국의 80년대와 차이가 있었다.‘언제 결항 여부를 결정하겠다든가, 결항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책하려 한다.먼저, 문태는 80년대 운동권을 벗어나 현재 돈과 자본을 따르는 삶에 익숙해진 변호사이다. 그는 소설의 중반까지 ‘호텔 급수’와 ‘통역료’말고는 재우에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문태는 노천카페에서 재우의 ‘불명예스러운건 지난날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야······’(194쪽)라는 말을 듣고 조금씩 변화한다. 그는 사실 마음 깊은 곳에 80년대의 기억을 살려 두고 있었다. 사실은 골프를 전혀 치지 못하는 문태는 사이공에 가서도 구치 터널에 방문한다. 그 곳을 방문한 문태는 아마 아직 살아남은 80년대의 불씨를 다시 기억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후, 재우의 전화를 받은 문태는 레지투이를 마주하고, 그를 통해 이전과 다른 시대에 사는 재우와 창은을 앞으로 어떻게 마주할지를 깨닫게 된다. 출국심사장에서 재우에게 ‘바이 꼬오 떰 로오옴(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을 외치며 떠나는 문태는 이전과 다르게 타자인 재우를 대하고 있다.창은은 80년대의 운동권의 삶을 새로운 시대에서도 이어오는 인물이다. 그는 그의 이상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노동자 투쟁에서 재우와 문태가 각자의 위치에서 인정을 받고 있어도, 그는 계속해서 노동자의 위치에 서서 80년대의 끈을 이어간다. 이는 창은이 공장의 노동자->무임금에 가까운 노조단체의 상근자->이주노동자의 집 소장이라는 직업 변화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마지막 재우가 찾아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명동성당 앞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는 재우와 만났을 때, ‘무언가를 꿈꾸려는 자는 그 꿈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210쪽)이라 말한다. 그는 한 쪽 팔을 잃고, 평생 손톱 밑에 까만 떼가 낀 채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꿈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추구하면서도 베트남에서 사는 재우까지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다. 이는 창은이 재우, 문태와 달리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베트남을 떠나는 재우에게 밥값을 계산하고 고추장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 북한 문학의 성격민족 분단과 북한 문학한국의 남북 분단은 6.25전쟁으로 인해 공고화되고 지속된 냉전체제에 의한 분단 의식은 서로에게 일상화되었다. 남·북한은 분단과 안보라는 서로 다른 논리로 정치권력은 확대되었고, 각각의 정치권력이 자체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분단의 상황을 더욱 과장해왔다. 북한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모든 가치 개념의 정점으로, 남한은 사회주의 이념을 철저히 배제하여 분단의 상황에 안주하는 의식의 편향이 초래되었다.한국 현대문학의 경우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북한의 문학은 집단성의 이념과 당의 정책에 따라, 1970년대 후반에는 ‘주체의 문예이론’을 확립하였다. 이와 다르게 남한의 문학은 개인성의 추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순수 문화예술에서 1960년 중반 이후 민족문학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통합론 적 관점으로 향한다. 이는 한국 민족의 문학이 분단의 상황 속에서 체제와 이념의 논리에 의해 남북한의 문학으로 양분되어왔음을 말해준다.그러나 우리는 결국, 궁극적으로 분단 문학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 공동체 의식을 구현하는 민족문학의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 즉, 남북한의 문학을 통틀어 분단 문학이라는 문학사적 개념을 설정하고, 그 속에서 북한의 문학을 논의한다면 새로운 시각과 논리가 정립될 것이다.문인 월북과 북한 문단의 형성해방 직후의 한국문학은 남북 분단과 정치 세력의 분열로 자유민주주의적 경향과 사회주의적 경향이 충돌했다. 이는 곧 문단 조직의 좌우 분열과 민족문학의 개념을 둘러싼 이념적 대립이라 말할 수 있다. 당시 문단 조직의 분열과정은 좌익 문단의 두 조직(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의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이기영, 한설야, 한효 등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통합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세력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 좌익 문단에 대응하기 위해 김광섭, 박종화, 이헌구는 문단의 민족 세력을 규합해 ‘중앙문화협회’를 결성했고 이후 ‘전조선문필가협회’와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조직이 이루어지며 문단의 좌우 대립이 가열되었다.대한 논의를 외면해버리기도 하였다.조선문학가동맹이 세워지면서 그 조직의 주도권을 상실한 이기영, 한설야 등은 활동 기반을 평양으로 옮겼다. 이들은 남궁만, 한재덕, 최인준 등 평양 중심의 또 다른 문단 조직을 결성하고, 뒤따라 월북한 송영 박세영 등과 합류했다. 1945년-46년까지의 문인 집단의 제 1차 월북은 주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의 맹원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들은 뒤에 북한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후, 1947년-48년 미군정 당국이 공산당의 정치 활동에 규제를 가하는 사이에, 남로당의 주체 세력과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심인물이었던 이태준, 임화, 이원조 등이 2차 월북하였다.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서울에 남은 조선문학가동맹은 해체되고 사상적 전향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기림, 정지용, 정인택 등은 모두 행방을 감추거나 자진하여 북행을 택하거나 강제로 북에 끌려갔다. 식민지시대 사회주의 문학운동 조직인 카프에 연관된 인물들은 대부분 월북 문인의 주축을 이루었다. 또한 이들에 가담한 문인들 중 대부분은 1930년대 문단에서 순수파 또는 기교파로 분류되었던 김기림, 정지용, 박태원, 최명익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무조건 적으로 북쪽에 사상을 두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이 가담했던 조선문학가동맹은 정치사상을 따지기 전에 해방 직후 유일한 문단 조직체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북쪽에 집과 가족이 있었다. 월북 문인 가운데 북한 문단의 핵심세력은 거의 제 1차 월북파 문인이었다. 이후 북한의 정치 사회적인 판도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면서 이기영, 한설야 등의 문인들 또한 자유주의적 경향이 아닌 공산주의 이념을 띄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한 남한의 적화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제 2차 월북파 문인들 가운데 이원조, 이태준, 임화 등이 모두 숙청되었다. 이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라는 새로운 문예 단체가 생기면서, 김일성의 개인적 우상화와 사회주의 계급혁명의 이념에 대한 선전을 그 주요 사 사회상의 변화와 대응한다. 이 시기 북한은 공산체제 확립을 위해 문학예술의 민중적 교화 기능을 강조하는데, 이를 목표로 조직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문예운동와 공산당의 정치노선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1960년대 이후 북한의 문학예술은 주체성과 혁명성이 더욱 고양되었다. 즉, 주체적인 것과 혁명적 투쟁 의식이 내세워지면서 이념성이 강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의 문학예술은 노동계급의 문학예술이 추구하는 국제주의적인 속성보다 오히려 민족적인 것, 주체적인 것이 강조된다. 말하자면, 민족적 주체성에 대한 요구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1970년대 이후로는 ‘주체의 문예이론’이 일반화되면서 북한의 문학예술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첫째는 김일성의 항일무장 투쟁의 혁명적 위업을 찬양하는 것, 둘째는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것, 셋째는 남한에 대한 혁명적 통일의 과제를 강조하는 것 등이다. 이 중 가장 중시된 것은 첫째 경향으로, 김일성의 생애를 소설화한 가 있다.이런 북한의 문학예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혁명적 이념성과 배치되는 일체의 내용을 거부하는 일종의 절대적 배제론, 단절론의 원칙(문단인 숙청, 창작적 경향의 배제 등 사회주의적 혁명의 이념 이외는 모두 제외시키는 것)이 고수되어 왔다는 점이다.2. 북한 문학의 전개 양상북한 사회의 변모 과정과 연관되는 문학의 전개 양상은 크게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 평화적 조국 건설기(1945.8~1950.6), 둘째, 위대한 조국 해방전쟁시기(1950.6~1953.7), 셋째, 전후 복구건서로가 사회주의 기초 건설을 위한 투쟁 시기(1953.7~1960), 넷째,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과 사회주의의 완전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투쟁시기(1961년 이후~)이다.북한의 문학은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사회주의 이념을 예술적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며, 1960년대 중반 이후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의해 혁명성의 이념을 강조하는 등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문학과 사회주의 국면서부터이다. 북한의 평양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예술적 실천을 목표로 하여 조직된 단체는 ‘북조선예술총동맹’인데, 이는 서울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비된다. 이들은 이후 문예운동의 방향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미학과 함께 공산당의 정치 노선에 종속시키고, ‘중앙예술공작단’을 조직해 그 이념의 선전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북한의 초기 시단에서 박세영, 이찬, 이정구, 백석 등이 활동했었다. 그리고 조기천의 시, 장편 서사시 은 북한 시단의 한복판에 자리한다. 은 김일성의 혁명적 업정을 찬양하고 있는 작품인데, 이는 북한의 시문학이 김일성을 영웅화하기 위해 그의 항일 투쟁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이외에도 강승한은 서사시 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북한의 소설계에서는 이동규의 이 있다. 이는 5.10 총선거를 치르는 남한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고 있는 작품으로, 단독정부의 수립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정치 투쟁 이야기이다. 이외에도 북한의 토지개혁 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이기영의 , 노동 현장을 통해 개인이 아닌 집단의 계급의식 확립을 보여주는 이북명의 가 대표적이다.전후의 북한 문학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며 북한의 문학은 새로운 변화를 겪는다. 대중의 혁명 투쟁 의식을 마비시키는 부르주아 문학 사상을 분쇄해야 한다는 당의 지시에 따라 문학 예술인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단행되었다. 또한 북한 문학에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동시에 미국과 미군에 대한 증오와 비난, 남한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긴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이 시기의 소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최명익의 와 이기영의 이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전투를 배경으로 한 는 그곳을 중심으로 하는 승병과 의병들이 왜적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웅적 기상을 강조한다. 이 소설은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평양 입성 과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기영의 대하 장편소설 은 전쟁 직후 제 1부, 61년에 3부로 완결되었다. 은 농민들의 계급의 미학적 요건을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규정하면서 주체성과 혁명성이 더욱 고양되는 변모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문학에서는 주체적인 것과 혁명적 투쟁의식이 내세워져 이념성이 강화되고 있다. 이는 당의 방침과 유사한데, 1970년대부터 등장한 ‘주체의 문예이론’에서 전체적인 주체시대의 문학을 볼 수 있다. 예술형식의 민족적 특수성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그 내용에서 혁명적 이념이라는 사회주의적 사상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주체의 문예이론’에서 강조하는 문예의 민족적 형식이 전통과는 조금 다르게 김일성이 혁명 사상에 근거하여 혁명적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주체의 문예이론을 창작적 실천에 적용키 위해 북한에서는 문학예술의 혁명적 사상을 강조하는 창작 지도 방법으로 ‘종자론’을 내세운다. ‘종자론’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종자를 똑바로 잡아 자기의 사상과 미학적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1970년대의 문학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와 소설들이 나오고 국가 건설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권정웅의 , 김규엽의 등의 작품들도 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첫째는 주체사상에 근거하여 사회주의 문화의 혁명성을 민족문화의 정통성으로 내세워 그 사상을 더욱 구체화 시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김정일의 영웅적 형상화 과정이 더욱 강해졌다. 둘째로 1980년대에 남한의 정치사회적 현실 변화를 배경으로 보다 적극적인 남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문화예술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김정일의 후계 체제 구축 이후로 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계층적 갈등을 더욱 강조하고 조장하기 위한 정치 문화적 공세이기도 하다. 이에 관한 시로는 리영복의 , 조성관의 등이 있다.3. 북한 문학의 문예 정책과 문예이론북한 문예 정책의 성격북한의 문예이론과 문예 정책에서는 세 가지의 문제를 주목할 수 있다. 첫째는 민족문화 예술의 주체적 인식과 그 방향성에 대한 문제이다. 주체의 문예이론은 김일성주의 예술 미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 문학은 사회주의 문학예술이면
봄은 간다김억밤이도다봄이도다밤만도 애닯은데봄만도 생각인데날은 빠르다봄은 간다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저 바람에 새가 슬피운다검은 내 떠돈다종소리 빗긴다말도 없는 밤의 설움소리 없는 봄의 가슴꽃은 떨어진다님은 탄식한다.-(1918)-안서 김억이 1918년에 발표한 최초의 자유시로 독백체의 표현과 간결한 구조 속에 상실과 체념에서 나오는 비애의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프랑스의 상징시를 번역하여 자신의 시집에 가져올 정도로 시의 상징을 중요했던 것에 비추어 보면, 이 시 또한 일제 통치에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식민지 지식인의 슬픔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도 소리도 없는 봄 밤, 검은 안개가 떠도는 어딘가에 있는 화자는 봄이 왔음에도 표현도 못하고 보내야 하는 것에 서러움을 느끼고 있다. 또한 종소리마저 빗겨가고 있는 그 시대의 현실에 자신뿐만 아니라 ‘님’도 탄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상실감이나 슬픔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닌 일제치하에 살고 있는 모두의 것이라 이야기한다.먼 후일김소월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1922)-1925년에 간행된 시집 에 수록되었다. 이는 그가 오산중학에 다닐 때, 학생계에 발표한 작품이었다. 학생 때 이런 깊고 애달픈 정서를 시로 표현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 시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애써 잊으려는 안타까운 심정을 말하고 있다. 화자는 표면적으로는 계속 ‘잊었노라’라고 말하지만 그 심정에는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에만 존재하는 ‘당신’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계속 어떻게든 잊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엔 못 잊는다는 것을 화자 자신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런 결심이 아니고서는 지금의 슬픔을 견딜 수 없어 보인다. 시 속에서 화자가 ‘잊었노라’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그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이 두 시를 가져온 이유는 김억과 김소월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기 때문에 그 둘을 비교해보고 싶었다. 김억은 조선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정형시가 아닌 자유시를 최초로 소개하면서 개인의 정감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시를 표현했다. 또한 20년대 중반부터 그는 한시를 국문으로 번역하거나 민요를 비롯한 구비문학들을 발굴하는 등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를 되살리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정서는 그의 제자인 김소월에게도 전달이 되었다. 때문에 위의 두 시에서도 슬픔이란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이 비슷하다.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해보고자 하지 않고 수동적인 자세로 슬픔을 전부 받아들이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