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속의 한국전쟁- 한국전쟁이 서양사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目 次Ⅰ. 머리말Ⅱ. 본 론1. 소련의 전략2. 서독의 재무장 문제3. 영국의 정권교체와 경제위기4. 프랑스 내 좌파의 내분5. 미국의 안보조약 체결Ⅲ. 맺음말교 과 목 : 서양현대사담당교수 : 김건우 교수님학 과 : 사학과학 번 : 2008003001성 명 : 계형진제 출 일 : 2012. 5. 25Ⅰ. 머리말1945년 8월 15일 세계 2차 대전이 종전된 후의 국제정세는 전쟁 없는 평화가 아닌 冷戰(Cold War)이라는 새로운 국제적 긴장과 대립 상황으로 변모하였다. 소련의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 은 전후 승전국으로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공산당 정권을 가진 정부를 세우고 영토를 확장시켰고, 이러한 공산세력의 팽창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된 자유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대항하게 되었다. 양 세력은 포츠담회담에서부터 그 갈등의 골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그리스와 터키 등지에서 대립하며 그 갈등이 심각해졌고, 이후 소련ㆍ동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바르샤바조약기구(WTO)와 미국ㆍ서유럽 등 12개국으로서 구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결성되어 유럽의 긴장과 대립 상황이 전개되었다.이러한 유럽에서의 냉전은 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중국 본토에서는 1949년 10월 1일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주의공화국이 세워졌고, 공산당에 의해 쫓겨난 국민당은 타이완에서 새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또한 한반도에서는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의 지배를 받고 남쪽은 미국의 지배를 받는 이른바, 신탁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대립 속에서 소련은 북한에 전쟁 물자를 지원하고 남침을 시주하여 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한국전쟁은 공산주의의 노골적인 침략근성을 드러낸 것으로 한국을 비롯한 많은 참전국에 큰 피해를 남겼으며 또한 정책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야기 시켰다. 미국은 이를 계기로 국방력을도록 하겠다.Ⅱ. 본 론앞서 간단히 언급했다시피 한국전쟁은 냉전의 양 진영, 즉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의 대리전쟁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 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각국에서는 정권 교체와 정책 노선의 변화 등이 발생했다. 아래에서는 미국과 유럽각국이 한국전쟁을 겪으며 변화한 현상 및 정책 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1. 소련의 전략스탈린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몇 가지 전략을 동시에 구사했다. 소련이 실시한 전략의 성격은 대체로 미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노력들이었으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소련이야말로 평화를 수호하는 국가라는 점을 선전하고 공산세력을 규합하고 서유럽 내부를 균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우선 미국의 전력을 동아시아에 묶어두고 유럽에서 미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 중국과 북한의 정전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쟁을 종용하였다. 그리고 스탈린은 서유럽의 군비강화에 대응하여 1951년 초 자체 방위력 뿐만 아니라 동구권 전력강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한국전쟁 대응과 신속하고 철저한 북진은 동구권 국가들에게 새로운 제국주의적 위협으로 다가갔고, 이를 스탈린이 역이용 한 것이다. 또한 1950년 3월에 채택한 ‘스톡홀름 호소문(Stockholm Appeal)’을 통해 핵무기를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수호할 것을 호소하였는데, 이는 침략자로서의 미국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소련 자신을 평화 옹호세력임을 선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로써 스탈린은 서유럽 좌파의 지지를 확보하고 나아가 서유럽의 내부 균열을 조장하려 하였다. 이러한 소련의 서유럽 통합 저지와 내부 균열을 가속화 하기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서유럽통합은 유럽이 미국 식민지가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비판하는 동시에 소련이 유럽 국가들의 주권을 수호하는 세력으로 선전하였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서독의 재무장을 막기 위해 독일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서독 재무장에 관한 방안이 타결되고 있던 1952년 봄에, 스탈린은 양 진었다.특히 서독은 한국과 독일의 상황을 비교하며 정부와 여당은 물론 많은 언론이 제 2의 한국전쟁이 독일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하였다. 당시 소련의 통치를 받는 동독은 인민경찰로 중무장이 된 반면 서독은 무방비 상태였으며, 미국의 강력함에 대한 믿음이 점차 약해짐에 따라서 서방의 강대국은 독일의 위협에 대한 안전보장이라는 종래의 노선에서 독일을 위한 안전보장 정책 방향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보았다. 이에 대해서 서방 강대국은 전쟁의 발발 유무를 떠나서 평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안전보장이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에 서독에 대한 확고한 안정보장을 주장하였다. 특히 서독 최초의 수상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는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는 길은 서방으로의 편입과 재무장을 통해서만이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민당 당수 슈머허(Kurt Schumacher, 1895~1953)는 한국과 독일의 상황이 크게 다르고 독일 내에 점령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토의 안전보장 등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소련이 쉽게 침입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미국의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는 한국전쟁이 소련의 독일 침략을 위한 실험 전쟁이라 규정하고, 독일에서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아이젠하워는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독일의 안전을 보장하고 서유럽 방위체제에 서독의 군사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서독의 재무장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서독의 재무장을 논의하여 서독을 정식 NATO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재무장하도록 한다는 방침인 ‘NATO案’을 정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반대하였으나 동독의 인민경찰의 위협에 맞서 서독 연방경찰 창설을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하였으나, 프랑스는 서독의 재무장에 대해 완강히 거부하였다. 하지만 서독 재무장에 대한 문제가 계속 거론이 되자 프랑스 역시 재무장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기존 미국이 제안한 미국이 ‘유럽방위공동체案’을 채택함으로써 서독의 재무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이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와 유럽방위공동체조약(European Defense Community)의 체결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가 우호관계로 변화하고 강고한 서유럽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1954년 유럽방위공동체조약은 좌초되었으나 서독의 재무장 역시 NATO의 틀 내에서 이루어졌다. 소련은 미군을 한국에 묶어 두는데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독일의 재무장과 서유럽의 균열을 위해 실시한 전략은 완전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3. 영국의 정권교체와 경제위기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영국의 노동당의 좌우파와 親노동당 조직 모두는 소련과 북한의 남침을 비난하고 유엔을 통해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데 동의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자 노동당 정부는 분열의 기미를 보였다. 특히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나이 많은 노동당원들이 기존의 노동당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이들은 소련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며 영국이 애초에 한국전쟁에 왜 개입했어야 했는지의 근본적 문제를 의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군대와 경찰에 의해 행하여지고 있다고 보고되는 반민주적인 잔학행위에 대해 분노하였고, 맥아더의(Douglas MacArthur, 1880~1964)의 광신적인 극우적 발언, 또한 트루먼(Harry Shippe Truman, 1884~1972)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언급이 문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확전을 억제하고 전쟁의 조기종결 노력에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노동당 좌파는 영국이 미국의 위성국이 되어 버렸고 독립성을 상실한 채 전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정부에 대한 불신이 1950년 선거와 1951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패하여 집권 6년 만에 보수당에 정권을 내어주는 한 요인이 되었다.영국은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지만, 한영국이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다. 영국은 국방비 증액을 위해서 경제재건의 정책을 수정하였는데, 특히 복지정책이 수정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껏 완전 무상이던 국민의료보험제가 일부분에 한해 환자가 부분 부담하는 案이 제출되었다. 이러한 노동당 정부의 선택에 대해 노동당 소속 보건부장관 베번(Aneurin Bevan, 1897~1960)을 포함한 장관 3명이 사직하였고 노동당이 크게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야기된 영국의 경제위기는 노동당 정부가 무너지는 원인들 중 하나였으며,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전쟁이 영국에 미친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였다.4. 프랑스 내 좌파의 내분프랑스의 좌파 지식인들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내분이 발생하였다. 소련의 평화주의 공세와 선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의 인식은 소련보다 미국에 더욱 우호적이었으며, 이는 소련의 억압적인 현실이 조금씩 폭로되어 적지 않은 사람이 소련에 실망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통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역시 이 실망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좌파 지식인 중 한명인 메를로 퐁티(Merleau-Ponty, 1908~1961)는 북한을 사주하여 남침한 소련을 사회주의의 조국이라 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반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지만, 이는 미국의 유인에 속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소련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는 등 좌파 내에서도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협력했던 두 사람이 다른 정치 노선을 걷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서 한국전쟁이 역할 하였던 것이다. 결국 메를로 퐁티와 이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은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대열에서 이탈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와 서유럽의 공산주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국가 내부의 내분과 더불어서 프랑스는 한국전쟁이 야기한 위기의식 속에서 서독의 재무장을 승인하였고 소련의 침략에 대한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비하는 움직였다.
『린 마을 이야기』를 읽고目 次Ⅰ. 머리말Ⅱ. 본 론1. 린마을이란?2. 1940~1990년에 걸친 중국 농촌과 린마을의 변화3. 예서기의 눈으로 본 공산주의 정치사건4. 사회주의 정책과 농촌의 민간신앙Ⅲ. 맺음말Ⅰ. 머리말개인적으로 전공이 중국사이고 중국어 역시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내년 1년간 란저우(蘭州)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고, 현대 중국의 사회와 문화 등을 자세히 배워보고 싶었기에 중국의 사회와 문화 수업을 신청하였다. 중국사, 특히 고대사와 중세사에 관심이 많기에 나의 독서와 공부는 항상 그 분야에만 치우쳐있었고, 현대 중국에 관한 지식은 매우 얕았다. 중국의 사회와 문화 수업을 들으면서 얻은 지식과 한 가족의 삶을 통하여 중국 현대사를 조명한 영화『인생(活着)』, 그리고 개인적으로 현대 중국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중국의 붉은 별』등을 읽으며 현대 중국에 대한 지식을 쌓고 난 이후에『린 마을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린 마을 이야기』는 타이완(臺灣) 사람인 황수민 교수가 1949년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성공 이후의 변화하는 농민생활을 사례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 동남부의 한 마을을 대상으로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하며, 그 곳의 공산당 서기인 예원더(葉文德)를 통해서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 현대사에 있었던 격동의 사건들, 예를 들어 토지개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개혁개방과 같은 사건들을 조명하고 있다. 예 서기의 개인적 설명 뿐만 아니라 저자 황수민이 일곱 달 동안 마을에 머물면서 마을공동체의 모든 영역에 속하는 수 많은 사람들과 심층면접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을 포함하여 일정 수준의 객관성을 확보하려 노력하였다.일반적인 교과서 등에 나오는 진부한 내용과는 달리 『린 마을 이야기』는 현직 공산당 간부의 증언으로 현대 중국을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집중되고 생생하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아래에서는 『린 마을 이야기』의 내용을 주제별로 요약하고 글 맺음말에 책에 대한 종합적인 서평과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점과 생각해보아야니라 일제의 침략,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인해 중국 농민은 점점 더 곤궁해졌다. 이에 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이 공산주의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며 ‘무상몰수, 무상분배, 능력 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등의 ‘만인이 평등한 사회 건설’을 슬로건으로 하여 농촌과 농민을 사회주의 혁명세력의 주체로서 끌어들였다.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은 결국에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축출하는데 성공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 중국 전반의 농촌에 큰 영향을 미쳤고, 린마을 역시 그 시대적 흐름에 안착하여 변화를 맞보게 된다.사회주의 혁명 이후 인 1951년 대대적인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봉건시대 동안 부자들과 지주들은 농민들을 착취한 정도(착취 수준)에 따라서 지주ㆍ부농ㆍ중농 등으로 구분되였다. 린마을에서는 우량(吳良)과 우밍(吳明) 형제가 인민해방군에서 제대하여 마을의 당 간부로 취임하였는데, 이들 우씨 형제는 글자도 모르고 실제 공산주의나 그 혁명의 목적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계급투쟁 대회에 송부된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사적으로 이용하는 등 권력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공산주의 혁명의 이상과는 괴리가 느껴지는 부분이며 이것이야 말로 공산주의 혁명 초기의 진정한 농촌의 실체였다. 예서기가 “1951년 토지개혁은 우리 가족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라고 할 만큼 토지개혁은 공산주의 이상 실현을 반영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그러다 시간이 지나 중국 공산당 정부가 체계화되고 전성기를 맞이하여 나라 전체에 긍정적인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53년 공산당은 호조조(互助組)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소농들이 약 10가구씩 집단을 이루어 협동경영을 위해 땅과 농기구를 공동으로 출자한다는 것이었다. 협동경영의 수확물은 각 가구가 경작에 투입한 토지와 농기구, 그리고 노동력의 양에 따라 분배되었다. 1954년에는 두 세 개의 호조조를 합쳐서 농민들을 게 하고 4배 정도의 수확물을 증가 하도록 하였다. 만약 생산대가 전통적인 방법으로 모내기를 할 경우 상부에서 나와 흰 깃발을 꼽고 새로운 방법으로 한 생산대에는 빨간 깃발을 꼽아 표시를 해두었다. 이러한 과학영농의 실패는 불 보듯 뻔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간부들은 인민공사나 정부 고위 당 간부에 생산량이 증가하였다고 허위 사실을 보고하였다. 린마을은 이러한 허위 보고는 없었으나 대약진운동 이후부터 기근문제가 찾아와 향후 20여년 간 지속되어 심각한 사회문제를 이루었다. 이러한 문제 속에서 인민공사의 공동식당이 가장 먼저 무너졌고 대부분의 농민들이 고구마로 연명하였으며, 기근으로 인해 20대인 리씨가 죽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이러한 시련 속에서 린마을을 포함한 대다수의 농촌은 인민공사조직을 지지하였다. 그 이유는 대약진운동은 잘못된 가정과 결함투성이의 계획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집체로서 인민공사는 소규모 농민들이 개별적으로 성취할 수 없는 실제적인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린마을은 인민공사를 통해서 1961년 저수지 건설과 같은 공공건설 프로젝트를 실시하였고, 저수지 완성을 계기로 산딩마을과 공식적으로 분리하고 새로운 린대대로 재편되었다. 다음해인 1962년에는 인민공사의 지원하에 마을 독자적으로 초등학교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1968년에는 학교 이외에 공중보건체계가 집체체제하에서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인민공사를 주축으로 하는 집체체제 하에서는 개별농민들이 일한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 이익을 균일하게 나누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농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는, 즉 동기부여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였다. 인민공사를 중심으로 대약진운동 실패 직후보다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이상과 같은 약점으로 인해 1958년부터 1978년 정부의 농촌정책이 변화될 때까지의 생활수준은 거의 향상되지 못했다고 예서기는 말하였다.1978년 ‘사인방’의 체포와 더불어 문화대혁명 시 생산대대 차원에서 지출될 것임을 약속하며 생산대대의 해체를 인민공사에 가서 보고하였다. 1958년에 설립된 인민공사와 생산대대 같은 농촌의 집체들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발맞추어 변모하게 된 것이다.예서기는 집체 해체 후 모래벽돌사업을 그만두고 붉은벽돌 공장을 시작하였다. 모래벽돌은 화재의 원인이 될 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이 모래벽돌사업을 다수 유치하며 경쟁을 유도하여 가격이 떨어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붉은벽돌 사업으로 발을 돌린 것이다. 예서기의 붉은벽돌 사업은 대성공하여 큰 이윤을 남겼고, 벽돌을 경운기로 운반하는 마을 사람들 역시 대학교수 월급의 두배에 달하는 수입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작지에서 채소를 심허 샤먼시 자유시장에 내다 판 과부 역시 생산대대 해체 전 보다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개혁개방 이후 실시된 농촌의 개별 경제체제 하에서 린마을의 구성원들은 위와 같은 사업을 하며 경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성과와 반대로 부유한 집과 가난한 집의 수입 격차가 커지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최대 약점인 빈부격차 현상이 중국 농촌에서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1990년대에 들어 중국의 몇몇 농촌지역에서는 경제성장에 따른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푸젠성의 동남부 지방, 즉 샤먼시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경제성장은 엄청났다. 린마을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생계지향적인 농업공동체였으나 경제성장을 맞이하여 도시인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상품을 제조하는 공업지대로 변모하였다. 마을에는 아스팔트 도로와 공장들이 들어섰고 유럽식 빌라를 본뜬 다층주택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마을의 인구역시 1985년에는 1,047명에서 1996년 통계 1,280명으로 늘어났고 린마을에 단기간 거주하는 이주 노동자의 수가 4천여명이 되었다. 인구가 증가하자 마을에는 여러 사회문제가 야기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산아제한정책 위반, 불법 약물 복용 같은 중범죄가 빈번히 일어났고, 사소한 절도나 철은 쓸모없는 쇳덩이에 불구했으며, 지나치게 제철사업에 편중된 나머지 농업의 노동력이 부족해져서 과학영농을 통한 생산력 증대 역시 처참하게 실패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자 공동식당 역시 운영이 어렵게 되어 문을 닫게 되었는데, 예서기는 이러한 대약진운동을 두고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우리가 대약진운동 기간에 했던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일들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또한 1958년 이후 겪게 되는 기근의 원인을 대약진운동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 비난하기도 하였는데, “마오 주석은 그 이후(대약진운동) 30여년 동안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모든 고통에 책임이 있습니다”라는 신랄한 비판을 하는 등 당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 거침없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었다.1964년 당시 국가주석인 류사오치(劉少奇)의 아내 왕광메이(王光美)가 고안한 사청(四淸)운동이 농촌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일환으로서, 운동의 목적은 농촌 정부 단위의 무능력한 간부들을 재교육하거나 제거하는 것이었다. 해방된 지 15년이 흘렀고 국가 지도부는 원래의 농촌 간부들 중 많은 수가 너무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부패하게 되었다는 의심할 하기 시작하면서 사청운동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운동은 대게 좋은 계급지위를 가지고 있고 교육을 잘 받은 청년활동가 집단을 선택하여 짧은 정치훈련을 시킨 후 ‘공작대’로 조직하여 자기 출신 구가 아닌 다른 농촌에 보내지는 방법을 취했다. 예서기와 아내 바오주 역시 사청운동을 위해 선발된 최초의 청년활동가들이었다. 하지만 예서기는 사청운동에 참여한 시기를 두고 “내가 실질적인 정치운동에 참여할 만큼 성숙했던 시기는 정치에 대한 신념을 상당히 잃어버린 시기이기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청운동의 목표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으나 사청운동 기간 동안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에 대해 회의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예서기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청운동의 공작대는 운했다.
※ 서양중세의 개념과 시대구분1. 서양중세의 개념과 무대서양사에서 중세라는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와 그들이 살던 당시의 사이에 존재하던 시기를 중세라고 지칭하였으며, 암흑과 야만, 무지의 시기로써 중세를 바라보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보다 후대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르네상스 이전의 시대를 비난하는 의미로 중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자연법을 존중하고 역사에 있어서 끊임없는 진보를 믿었기에, 인간이 중심이 되었던 고대로 회귀, 즉 르네상스를 부각시키고 오직 종교만을 생각하던 중세사회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켈라리우스는 서양 역사상 고대와 근대의 중간에 위치한 1000여년에 이르는 역사시대를 중세라고 정의하였다.서양 중세사의 무대는 로마와 게르만 문화로 이루어진 로마?가톨릭 세계의 서유럽, 비잔틴과 슬라브 문화로 이루어진 그리스정교회의 세계인 동유럽, 아라비아와 터키문화로 이루어진 이슬람교의 세계인 중동, 크게 세 군데에서 진행되어갔다.2. 서양 중세의 시대구분서양 중세사에 있어서 그 시작과 끝은 어디로 볼 수 있을까? 중세사의 시대 구분은 역사가 마다의 주관적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중세의 기점은 다섯가지 정도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첫 번째는 325년 콘스탄티누스제가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한 니케아 종교회의로 보는 견해, 두 번째는 훈족의 침입으로 게르만이 이동을 시작한 375년으로 보는 견해, 세 번째는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으로 보는 견해, 네 번째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칼 마르텔이 뚜르 근처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오던 이슬람세력을 물리친 732년으로 보는 견해, 다섯 번째는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을 건설한 962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중에서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476년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 통설로 인정받고 있다. 서로마 제국 멸망이 통설로서 인정 받는 이유는 지중해 중심의 역사가 대한 필요로 카롤링거 왕조와 교회는 결합하게 되었는데, 롬바르드족이 팽창하여 로마교황을 불안하게 하자 교황은 프랑크 왕국으로 피신하여 피핀3세에게 도유식을 거행해 줌으로서 그의 왕좌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피핀3세는 롬바르드족을 격파하고, 라벤나를 포함한 중부 이탈리아의 영토를 콘스탄티누스의 선례에 따라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피핀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칼 대제에 이르러서는 교회와의 결합이 더욱 긴밀해졌다. 800년에 칼 대제는 성 베드로 성당 미사에서 교황으로부터 서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을 받음으로써 통치권과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칼 대제 때는 프랑크 왕국의 최고 영토 확장기였다. 서쪽으로는 대서양 연안과 피레네 산맥에 이르고, 북으로는 지금의 덴마크 지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로마 이북의 이탈리아까지 영역이 확장되고 동쪽으로는 엘베강과 보헤미아 삼림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였다. 칼 대제는 영토확장 뿐만 아니라 문예의 부흥에도 노력하였다. 궁정학교를 개설하고 고전, 라틴어 문법, 논리학 등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문예부흥정책을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칼 대제에 이르러 그리스도 교회를 매개로 로마-게르만적 중세유럽의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다. 칼 대제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은 프랑크 왕국은 그가 죽자 다시 위기에 봉착되었다. 그의 아들 루이 경건왕이 죽으면서 로타르에게 왕위를 넘기었는데, 살리카법을 구실로 하여 다른 두 아들이 반기를 들었고, 843년에 베르덩 조약을 맺음으로써 왕국이 세 개로 분할 되었다. 찰스 대머리왕이 왕국의 서쪽을 차지하고, 루이 독일왕이 동부 프랑크를 차지하고 로타느는 황제 칭호와 더불어 네덜란드, 라인란트, 북 이탈리아를 포함하는 중부 프랑크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로타르가 일찍 사망하자 동서프랑크는 북이탈리아를 제외한 중부프랑크를 서로 잠식하였는데, 이 때 현재의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3국의 윤곽이 처음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후에 동프랑크는 오토1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화한 결과 성직자의 혼인과 성직매매가 성행하는 등 성직자의 기강이 붕괴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이러한 가톨릭의 세속화에 따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운동이 클루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910년 수도원 승인장을 얻어 설립된 클루니 수도원은 봉건적 토지에 대한 소유를 거부하였다. 봉을 받지 않고 수도원의 땅을 직접 개간하였고, 수도원장을 선출하는 권한인 선거권을 수도사에게 이양하였다. 그리고 교황에 직속하고 고위성직자의 간섭을 받지 않았고, 성직자의 태만과 나태를 추방하고 노동,필사,기도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당하게 하였다.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을 시작으로 하여 11세기 중엽 이후 교황의 영도 아래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교황은 세속권의 대표인 황제와 성직자의 서임권을 두고 투쟁하게 되는 환경이 서서히 조성되어 나갔다.4. 서임권 투쟁교회가 세속화되어 교황권이 부재할 때 독일황제가 교황의 임명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위성직자의 세속화가 진행되자 그들의 임명권 역시 세속군주로 이양 되었다. 앞서 알아본 가톨릭 개혁운동의 지속으로 세속군주로부터 성직자의 서임권을 되찾아 오려는 교황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서임권을 두고 독일황제 하인리히4세와 정면충돌을 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주교와 수도원장의 세속군주로부터 서임 수임을 금지한다고 발표하고, 교황이 황제의 자리를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하인리히4세를 파문과 폐위로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하인리히4세는 국내정치를 안정 시킨 후 독일 주교회의를 열어 그레고리우스 7세를 찬탈자로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황제의 자리에서 폐위한다고 선언하였다. 파문당한 하인리히 4세는 처음에 파문에 대하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당시세계에서 가톨릭은 생활이자 종교였다. 파문이란 것은 이교도가 됨을 뜻하였고, 봉건 영주들이 황제에 반기를 드는 계기가 되었다. 왕위의 위협을 느낀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고 말했다. 또한 동방세계의 부유함과 순례자의 박해를 해방시키고, 이 전쟁은 신이 원하시는 성전이며 전사자는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하게 된다고 열변하였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약 200여년 간 수 차례 십자군원정이 발생하게 되었다.2. 전개십자군원정은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군중 십자군의 출병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농노해방을 약속하여 다수의 농민과 기사계층을 규합해서 교황의 정규군이 출발하기로 예정한 시기(1096년 가을)보다 빨리 준비와 계획도 없이 출발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약탈하였으며, 헝가리에서 대패하여 무리가 반으로 줄게 되었다. 남은 무리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소아시아로 갔으나 투르크군에게 전멸 당하였다.같은 해 가을 교황의 주도 아래 유럽 각국의 유명한 제후들이 십자군이라는 명목하에 모여들었다. 프랑스와 영국 국왕의 형제를 필두로 하여 툴루즈 백작가, 퓰리아 공작가, 로렌 공작가 등의 제후들이 제 1차 십자군원정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로 건너가 니케아와 안티오키아 두 성지를 탈환하였고, 1099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점령한 곳에 예루살렘왕국, 안티오키아공국, 트리폴리 백령, 에데사 백령 4개의 십자군 국가를 건설하였다. 또한 신전기사단, 독일기사단, 병원기사단과 같은 기사단을 설립하였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초기의 목표를 달성한 유일한 십자군 원정이라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십자군 원정이 성공리에 끝나고 수 십년이 지난 후에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령이 정복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에데사의 탈환과 이슬람의 북부에 위치한 시리아 회복을 목표로 하여 1147년 제2차 십자군원정을 실시하였다. 이에 프랑스왕 루이7세와 독일의 콘다드3세가 호응하여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십자군은 소아시아에서 대패하고 다마스커스 공략마저 실패하여 철수하게 되었다.이후 이슬람 세력은 살라딘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등장으로 다시 강성해졌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가 된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함락하 이를 심리학적 개념에 의거하여 함께 즐겼다고 판단하였다고 한다. 법을 집행하는 경우에도 여성은 남성과 현격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남성의 경우 대개 교수형을 받았지만 여성의 경우는 생매장이나 화형과 같이 잔인한 방법으로 집행하였다. 이러한 여성의 법 집행은 1449년에 돼서야 교수형이 처음으로 집행되었다. 중세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제정된 법으로 인해서 엄연히 차별을 받았고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당한 것이다.2. 중세 여성의 교육중세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19세기에 들어서야 여성의 대학 교육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여성들도 몇 가지 경우를 통해서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첫째 귀족이나 부르주아지 계급의 딸을 위한 수녀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었고, 둘째 대귀족의 수행원, 즉 시종으로 들어가서 사교매너와 일부 지적인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 셋째로는 도시 장인의 딸들을 위한 도제제도가 존재하였고, 가난한 계급의 딸들을 위한 도시와 농촌의 초등학교에서도 일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도교와 여성성경 사도행전에서는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거론되며 여성의 전도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중세 초기에 여성들은 서품을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 이유는 여성이 부차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원죄의 통로로 존재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도교 내에서 은총과 구원에 대해서는 남녀가 동등했지만 현실 교회에서는 불평등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러다가 3세기에는 여 집사들이 여성의 세례를 보좌하고 여성의 교육 및 여 환자를 방문하는 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현대의 세례는 이마에 물을 뿌리는 등 약소된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중세에는 옷을 모두 벗고 성수에 몸을 담구는 의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세례를 위해서 여성 집사들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신학과 교리, 의식이 정형화 되고 복잡해 지면서 점차로 그리스도교 내의 여성의 역할이 위축되었다. 교부철학자는 원죄의 질곡기이다.
※ 1차대전의 종말1) 독일제국의 붕괴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중립을 지켜오던 미국이 연합국 측에 서서 참전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참전은 비록 러시아가 볼셰비키혁명으로 연합국 측에서 이탈하였다하더라도 그 손실된 전력을 채우고도 남는 것이었다. 미국은 200만의 군대와 막대한 군수품 등을 전쟁에 지원하였다.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연이은 패배로 인해 패전국이 된다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종전을 선택하였다. 막스 공에 의한 입헌군주제적 신 연립정부가 오스트리아와 함께 휴전을 요청하였는데, 연합국은 루덴도르프와 빌헬름2세의 폐위를 요구하였다.당시의 독일은 키일 수병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혁명이 전파되고 있었고,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가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노동자와 병사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새로운 체제와 공화국 체제 사이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 때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막스 공을 이어 내각의 수반이 되었고, 샤이데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은 공화정 국가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독일 제2제국, 즉 비스마르크 제국은 붕괴되게 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2) 파리 평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독일의 휴전 요청과 연합국의 동의로 인해 프랑스 콩피에뉴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제국,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터키제국이 붕괴되었고, 어느 국가도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한 채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만을 남겼다휴전 체결 이후, 1차 대전 전후의 문제 처리와 평화로운 세계 건설을 위해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영국ㆍ미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일본으로 최고이사회가 되어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당시 독일은 초청 받지 못한 상태로서 조약 서명에만 참가하였다. 미국 윌슨 대통령은 14개조 조항을 내세우며 공평한 강화와 국제연맹 창립을 통한 국제질서 건설을 주장하였던 반면, 프랑스의 클레망스는 국익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며 윌슨과 국제연맹 건설을 두고 대립하였다. 영국의 . 뉴딜정책은 3R(Relief, Recovery, Reform)을 바탕으로 국가경제의 개혁과 경제사회의 통제 및 조절, 사회보장제도 확립, 노동자의 지위향상 및 권익보호, 실업자 구제를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 농민보호를 위해 농업조정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뉴딜정책이 대공황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혁명이냐 아니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으나, 뉴딜정책 이후 실업률이 감소하며 경제가 차츰 나아지고 있었음은 분명하기에 뉴딜정책이 대공황 극복에 한 원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프랑스의 경우에는 영국과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산업화 되고 농업중심의 국가였으므로 늦게 와서 오래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대공황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에 비해 안정된 상태였으나, 늦게 대공황이 온 만큼 장기 지속되어 국내정치의 혼란과 사회불안이 지속되었다. 포도주와 섬유품 등의 주유수출품에 타격을 받고 실업자 수가 85만여명에 이르렀으나, 미국, 영국, 독일 등과 비교해 볼 때 공황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나라라 할 수 있다. 1936년에 인민전선 내각이 탄생하고 기업가 대표와 노동자 대표를 중재하여 마티뇽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프랑스판 뉴딜정책으로도 불려지는데, 임금인상, 유급휴가제, 노동시간제한, 단체 교섭권 인정, 대대적인 공공사업 추진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2차 대전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대공황이 끝났다고 할 수 있다.영국은 대공황을 맞이하고 수출격감과 해운업의 부진으로 인해 실업자의 수가 3백여만에 이르렀다. 실업자 수와 비례하여 실업자 수당 역시 증가하여 재정이 악화되는 등 경제적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맥도날드 내각 1기가 출범하여 증세정책으로 적자재정 충당을 시도하였고, 실업수당 삭감을 두고 논쟁하였으나 결국 노동당 중심의 내각이 붕괴되고 노동당, 보수당, 자유당이 연정하는 맥도날드 2기 내각이 실시되었다. 맥도날드 2기 내각은 관료 봉급과 실업수당을 10% 인상하였고, 금본위제를 폐지하였으며 보호관세를 채택하 많은 부분 차이가 존재한다.고전적 폭압정치는 시민을 단순 억압시키며 체제를 유지해 나가지만, 파시즘은 대중의 열정과 국민적 단결을 통해서 내부를 정화시키며 외적 팽창을 추구해 나간다. 또한 권위주의 체제는 국민의 사적영역을 파시즘과 다르게 완전 없애지 않았다. 그리고 시민의 자유를 묵살하고 국민을 동원하지 않고 수동적 국민으로서 방치하는 한편, 파시즘은 대중의 사적 영역을 완전히 없애고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대중을 흥분시키며 능동적 국민으로 끌어들인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를 볼 때 파시즘은 대중정치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대중민주주의가 확산되고 국민이 정치에 자발적 참여도가 높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3. 파시즘의 탄생 배경이탈이아 파시즘 운동의 공식 탄생일은 산세폴크로 광장 모임에서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한 1919년 3월 23일이다. 이로부터 3년 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획득학게 되었다. 독일은 1933년이 되어 히틀러의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수많은 유럽국가와 세계 각국에서는 독재자를 열망하는 분위기가 등장하였다.파시즘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크게 직접적인 것과 장기적인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직접적인 배경으로서는 1차 대전을 들 수 있다. 1차 대전은 미래에 대한 낙관과 진보를 불신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왔고, 법과 도덕을 무시하는 풍토를 낳았다. 또한 퇴역군인 수가 증가하였고, 사회ㆍ경제적 긴장이 초래되었다. 이로 인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공산주의 3자가 정치에서 각축을 벌였는데, 이러한 혼란은 파시스트에게 문화ㆍ사회ㆍ정치적 기회를 제공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지적ㆍ문화적ㆍ정서적 토양이 반지성주의적인 문화로 확산되었는데, 파시스트는 특유의 ‘적’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집권의 기회로 삼았다.장기적인 배경으로는 대중을 끌어들여 훈련시키고 활력을 불어넣는 대중정치가 한 몫 하였다. 그리고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과 자유주의적 가치ㆍ제도의 위기, 또한 물질적 궁핍에 의한 경제적 동부전선에서 소련에 밀리고, 대서양에서는 미국, 아프리카에서는 영국에 밀리며 2차 대전은 서서히 연합국 측의 승리로 기울어져 갔다.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하였고 1945년에 사살되게 되었다. 또한 히틀러 역시 자살을 함으로써 유럽 내 종전과 더불어 파시즘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차 대전은 끝나고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죽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파시즘이 짙게 드리워져 남아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를 직접 계승한 당이 여전히 활기를 띄고 있다는 점과, 영국과 프랑스가 석유파동 및 경제위기를 맞아 극우운동이 성공을 거둔 점도 그렇다. 또한 소련 붕괴후 동유럽과 발칸반도에서는 극우운동이 격렬히 전개되었으며, 남미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 역시 파시즘 정권과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세계 평화의 중심국가로 활동하는 미국 내에서도 인종차별주의적 극우집단인 kkk단이 존재하는 등 파시즘의 사상적ㆍ문화적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나치당의 일자리 만들기1. 나치의 집권과 실업극복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독일의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실업자의 수가 6백만에 이르는 실업대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회ㆍ경제적 혼란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당에게 넘어가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정권을 획득한 나치는 바이마르 민주체제를 뒷받침해 온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노동조합을 강압적으로 해체 및 통합하고 노동자 정당을 정계에서 추방시켰으며 또한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를 질식시켰다. 그리고 1932년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을 통해 공산당에 대해 대대적 탄압 조치를 내렸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와 전면전을 펼치는 동시에 실업대란과의 전쟁을 약속하였는데, 빠른 시일 내로 경제공황을 극복하고 실업대란을 종식시키겠다는 나치의 슬로건은 독일 국민이 나치에 거는 기대를 증폭시켰다.나치의 집권과 실업극복은 대체로 그 시기가 일치한다. 1933년까지만 해도 나치는 명확한 경제정책이 없었고 단순히 4년 내에 대량실업을 종식시키겠다는 허울만을 말하였다. 그 중 미국과 소련이 동유럽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냉전의 시발점이기도 하였다.※ 2차대전 직후의 유럽독일은 무조건 항복으로 제3제국이 멸망한 이후 새로운 정부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대신에 베를린선언과 포츠담회의를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독일은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의 민간시설 폭격과 미국의 공공시설 폭격과 소련의 공격 등으로 인해 공장 및 주택의 파괴가 심각하였다. 그 중에서도 각 국의 점령지의 상황은 각각 달랐는데, 특히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점령지는 소련보다 파괴의 정도가 덜하였고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리하여 소련은 독일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 배상금을 철저히 물리자고 주장한 것에 반해 프랑스는 교육을 통해 전쟁 재발을 막자는 방식으로 의견이 대립하였다. 포츠담조약으로 인해 동유럽에서 추방된 엄청난 수의 독일인이 본토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주택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전후 독일의 상황은 0시, 즉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뜻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건여성들에 의한 도시의 복구와 수습이 이루어지고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한 탈나치화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은 각 점령지 사이의 경제통합지역인 Bizone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독일 통일의 첫 발자국으로 보기도 한다. 독일이 자유주의 세력인 서독과 공산주의 세력인 동독으로 나누어진 후, 서독은 각 지역별 정당을 허용하여 의원내각제로 정치형태가 발전하였는데, 아데나워가 서독 최초의 수상에 오르게 되었다. 반면 동독은 울브리히트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운동이 전개되었고, 오직 공산당의 활동만을 인정하였다. 독일은 전후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여 식량 및 생필품이 부족하여 배급제를 실시하였고, 특히 서독에서는 화폐개혁을 통한 시장경제체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마샬계획으로 인해 유럽 복구사업이 추진되었고, 독일 역시 이에 힘입어 전후 복구사업에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프랑스는 독일과의 휴전협정 이후 히틀러에게 협조한 비쉬정부가 수립되었.
※ 중국 중세사 시대구분- 중세 : 고대와 근세의 사이, 양 시대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어 구체적 시기 선정이 어려움.① 금고이분법 : 지금과 옛, 중세라는 시기 없음② 유물론적 사관 : 중세봉건제, 위진남북조-수당을 대체로 봉건제시기로 인정③ 왕조중심의 구분★ 일본의 중국 중세사 시대구분 논쟁① 경도학파(관서)- 내등호남 : 5호16국 발흥(307)-당 현종이 죽은(756)을 중세로 선정. 귀족이 황제권력을 제약하는 시기를 중세라 정의- 궁기시정 : 내등호남 계승. 위진남북조-오대를 중세② 동경학파(관동)- 맑스의 유물론에 입각하여 경제 및 생산 방식에 초점을 맞춤- 전전직전 : 당말오대까지를 고대사회로 바라봄. 노예중심의 생산.- 지나치게 경제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획일적이고 기획적이라는 비판. 아시아적 정체론③ 논쟁점경도학파는 한위지간의 변혁을 인정하여 육조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았고, 당송지간의 사회변혁을 중세의 종말로 파악하였다. 반면 동경학파는 한위지간의 변혁을 인정하지 않았고 당송지간의 변혁은 인정하여 중세의 시작을 송으로 파악하였다.경도학파의 내등호남은 육조ㆍ수당시대 귀족의 권력과 지위는 천자의 은사가 아니라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군망에 근거한 것이므로 귀족이 황제권에 존속되지 않았고 귀족세력이 황제권을 제약하며 정치의 주가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이 고대와 차별되는 점으로 보았다. 또한 궁기시정은 중국 고대사회는 읍들이 모여 이루어진 성곽도시가 형성되었는데 이 성곽도시는 국가의 지배력이 미치는 중심단위였으나, 한말 이후 토지집중 현상이 증가하고 호족들이 토지를 강점하면서 유랑민이 늘고 새로운 곳을 개간함으로써 촌이라는 새로운 단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현상 역시 고대사회의 해체를 보여주는 일련의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한말 이후 나타난 장원의 주요 생산자인 노민은 노예보다는 농노적 성격에 가깝다고 하였고, 위 조비 이후 나타난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등용제도 역시 육조시대가 명족정치의 시대임을 보여주는 증거라 보았다. 우도궁천길은 외향적지방 호족에 의한 대토지 사유화 촉진 → 농촌 사회 피폐- 불교 +미신 +민간신앙 = 불로장생의 종교적 결사 → 농민을 끌어당기는 힘이 강함- 향의 해체 → 민 의지할 조직 사라짐 → 유랑인 증가, 예민, 노예화- 부패한 일족 지방관 취임 → 농민 수탈 심화② 전개 및 결과- 장각이 시작한 태평도라는 신흥 종교에서 출발 → 도교적 기반- 184년 농민과 청류 지식인의 반정부성향을 이용하여 봉기를 일으킴- 장각 사후 내분 바생 → 관군과 의용군에 의해 제압 → 잔당은 각지에서 도적으로 변질- 황건군과 연계 단절을 위해 청류파에 대한 당고의 금 해제- 지방의 권한 확대와 호족의 군비를 허용 → 지방세력이 강대해짐 ⇒ 후에 지방군웅으로 성장, 군웅할거- 황건 농민 전쟁 이후 영제 사망 → 하태후 섭정 → 하진, 동탁, 원소 환관 세력 제거※ 삼국정립1. 魏① 조조- 환관계 가문 출신- 낙양으로부터 헌제를 맞아 許에서 옹립- 화북 대부분을 통일하고 남하하는 과정 중 적벽에서 유비ㆍ손권 연합군에 대패- 이후 천하 삼분, 220년 사망② 조비- 헌제로부터 선양의 방식으로 황제가 됨- 낙양천도, 구품중정제, 병호제, 둔전제, 호조제 실시2. 蜀① 유비- 전한 경제의 자손- 돗자리를 팔며 연명하는 빈한한 생활, But 지방인사의 신뢰를 받아 군웅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냄 → 형주자사 유표의 객장, 사망 후 형주를 점유- 제갈량의 보좌를 받으며 전력기반 강화 → 지방 명망가문 세력 포섭- 적벽대전 이후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에 의해 사천지방 정착 → 성도에서 촉한 소열제 즉위(221)3. 吳① 손권- 손씨가문은 강소성의 무장가문으로 유명- 후한 이래 개발되어 온 강남 중하류 유역에서 토착호족과 남하한 호족을 장악하여 강력한 세력 형성- 건업에 정도하고 229년 대제로 즉위※ 천하삼분의 양상- 불균등한 삼분 (위 → 천하의 절반, 나머지는 오, 촉이 양분)- 삼국분립 이전 유비와 손권은 협력하여 조조에 대항 → 적벽대전- 이후 유비와 손권의 친선관계는 결렬되고 상호 항쟁- 위 → 중국의 도읍지 → 정통성 부여. 탁발 전통세력과의 단절. 통일전쟁 수행 용이 ⇒ 천하에 군림하는 전통 군주 표방- 반대세력의 저항 심함. 남정을 목적으로 남하하다 기후가 좋지않자 군신들이 회군하자 간언 → 남정 중지의 급부로서 낙양 천도 실시- 그러나 효문제는 선비족이 더운 여름은 본래 거주지인 북쪽에서 보내고 겨울은 낙양에서 보내기를 허락함(雁身) → 호인의 반발에 대한 회유 조치, 호인의 풍습 일정 인정② 복제개혁 및 호어의 금지- 선비족의 복식(上衣下?) → 한인의 복식(上衣下裳)-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음. ex) 정책 실시 후 수년이 지나 효문제가 호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관리를 추궁- 호어 사용의 금지 → 황태자 및 보수집단의 반발 야기 → 황태자 폐위 및 극형.- 그러나 30년 이상 호어를 사용한자와 관직 종사자를 제외하고는 호어 사용 가능 → 이 역시 잘 지켜지지 않음③ 관제 개혁- 직품령 반포, 북위 관제를 중국식으로 정비. 총 54단계- 낙양 천도 후 남조의 관제를 모방하여 개정 → 귀족제 수립을 지향하는 추세④ 호적성의 금지, 동성불혼- 호합융합을 위한 한화의 목적으로 실시 → 선비족 성씨를 한족 성씨로 바꿈- 같은 부계 혈족 사이의 결혼을 금지. 또한 조상을 같이하지 않는자는 양자로 들이지 않음- 호인과 한인의 통혼을 장려⑤ 성족분정책- 호인 지배층 계층분화 → 훈공이 있고 관작이 놓은 8가문을 한식의 성인 單姓으로 바꿈- 8성은 제실과 통혼이 가능하고 외관에 임용이 금지됨- 한인의 경우는 4성으로 결정- 호족8성과 한족4성으 통혼을 장려- 한족의 신분질서를 선비족에게 적용한 것- 그러나 효과는 그다지 없었음 → 신분에서 벗어난 결혼이 빈번하고 외관 임용에 있어서도 호의적. 가문을 중시하는 풍토는 사회전반에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⑥ 순행- 호인과의 결속, 화북지방 지배의 공고함, 백성에 시혜를 베푸는 목적- 인재등용과 덕정을 통해 한인호족의 지지와 협력을 유도- 빈번한 순행 → 자신이 실시한 한화정책에 대해서 관리소홀∴ 한화정책의 성잃고 향당의 신망을 잃음- 반면 한문 출신은 개인능력을 바탕으로 국가권력과 협력하며 세력 증대- 남조 창업주 대부분 한문 세력 → 중앙집권적 방향- 북조 → 율령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의 정비. 문벌귀족을 관료체제로 전환시키는 제도 정비. 문벌 관직독점 억제를 위한 현재주의 인재등용 정책- 이후 북주~수당 → 권력주체는 한인과 호족이 뒤섞인 관롱집단이라는 종래의 귀족과는 다른 계통의 문벌세력.⇒ 남북조 후기 지방분권적 귀족체제의 힘 상실. 대신 중앙집권적 황제체제가 그 힘을 발휘※ 위진남북조의 문화- 귀족문화의 발달 → 儒ㆍ佛ㆍ道 및 經ㆍ史ㆍ文ㆍ畵 등 다양한 사상과 학문, 교양이 발달- 귀족의 교양, 취미 등이 사회 전반에 확산 ⇒ 귀족문화 형성- 남조 : 한인중심, 강남지방 풍토에 영향. 우아하고 화려한 특색- 북조 : 이민족중심, 한문화를 존중학도 서역의 이색적 문화 가미. 참신하고 소박한 특색1. 유교적 이데올로기 붕괴 및 퇴색① 원인- 위진남북조 → 정치적 혼란과 불안 지속 → 염세주의 유행- 유교적 이데올로기 → 정치적 혼란ㆍ불안 현실 대처 한계有 ⇒ 제국의 유지 이데올로기 위상이 실추- 정치적 혼란에 따른 정신공백 및 공황 상태를 유교는 극복시켜주지 못함 ← 고뇌를 위로할 내세관이나 초월적 세계를 경원시. 현실사회와 인간윤리에만 관심을 가짐- 호족사회의 발전 → 유교가 강조하는 孝, 忠 윤리가 퇴색② 결과- 법가 중시 풍토 :『삼국지』“지금의 학자는 상앙과 한비자를 스승으로 법술을 받드니 마침내 유가가 우활하게 되고 두루사용하지 않았다”『진서』“최근 조조가 법술을 좋아하여 천하가 형법을 귀하게 여겼다”- 유교적 이데올로기 퇴색 : 『삼국지』“유가경전을 통달하고 예를 논하는 관리 적음”- 노장사상과 불교의 번창2. 현학의 발흥① 1단계(240~248) : 왕필, 하안- 노장으로 , 을 해석. 연구- 천지만물의 본질은 無, 유교의 道는 無와 같다. 성인은 無를 근본으로한 自然을 채득. 따라서 無爲해야함. ⇒ 노장사상에 의탁하여 세속으로부터 초탈한 자아를 수의 통일 요인① 관중지역의 지리적 조건 → 북주 이래로 장안 도읍 ⇒ 경제력ㆍ인구ㆍ영토 면에서 이점, 또한 북제지역은 한화정책이 촉진. 반면 북주는 비교적 선비의 고유 전투력을 보존② 수의 지배집단 ‘관롱집단’ → 선비족X, 남조의 한인 귀족과 출자가 다름, 정치ㆍ군사적인 면에서 참신한 기풍 유지③ 부병제와 균전제 계승 → 부국강병의 원동력④ 당시의 남조 → 귀족세력이 강대하고 황권 약화. 귀족사이의 내분. 환락과 사치 풍토3. 문제의 정책① 관제의 정비- 省 6部 11時- 승상제 폐지, 상서령 공석 대신 좌우복야 임명 → 신권의 약화② 지방관제 정비- 州ㆍ郡ㆍ縣 → 州ㆍ縣 2층 구조로 개편 ⇒ 郡의 태수가 장악하던 정치ㆍ군사권을 중앙으로 회수- 州의 자사 도독 겸임 폐지, 행정ㆍ군사권 분리시키고 일반 행정만을 담당하도록 → 군사권 중앙으로 회수- 지방의 통제를 위해 풍속관찰 파견 → 행정업무 감독- 종 9품 이상의 지방관을 중앙의 이부에서 임용③ 과거제도 실시- 시험에 의한 실력위주의 인재등용 방법- 귀족 등용에 유리한 구품관인법 폐지④ 균전제 정비 및 조용조법 반포 → 국가재정의 부흥 및 확충⑤ 부병제 실시 : 부병+균전, 군인의 호적을 주현에 속하게 함 → 병농일치 완비⑥ 기타 정책 : 형법제정, 호구정리, 倉 설치, 운하개척∴ 문제의 정책은 황제권 강화 및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가져왔고 민심수습이 수습되고 국가재정이 확충되는 등 천하가 안정되고 경제가 크게 번영하는 결과를 낳았음.4. 양제의 통치- 양제는 독고황후의 총애를 얻어 태자 양용을 폐하고 즉위함. 문제를 암살했다는 설도 有- 문제 代 사회안정책과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외원정과 대토목사업 실시① 대토목사업- 대운하 개통(황하~항주) → 남-북이 수로를 통해 경제적으로 이어짐- 고구려 원정에 필요한 물자 조달. 개인적 유람 목적② 대외원정 : 고구려 원정 단행- 배경 : 수 정권 내부의 모순 → 양견의 가문(12大將軍)보다 높은 가문(8柱國)의 황실에 대한 질투와 반감, 군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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