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스트 오프97년 여름에 개봉했던 영국영화 '브래스드 오프'는 생각할수록 곱씹어지는 작품이다.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재미있고,감동적이며(끝부분에 대니의 수상소감은 절정),메시지가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그림리라는 한 영국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90년대초 이 지방에 불어닥친 폐광이라는 정부방침속에 이들의 투쟁을 그린,다소 감상적인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이들은 바로 탄광촌 남자멤버들만 모인 브라스 밴드.투쟁이 섞여들어간 여느 영화들이 그렇듯,이 작품속 주인공들도 위기와 좌절 속에서 끝에는 작은 반전을 일으킨다.그러나 탄광촌은 결국 폐쇄되니 완전한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주진 않는다.이 영화를 감동스럽게 만드는 것은 탄광을 지키겠다고 밖으로 나서서 운동을 하는 아낙네들,삶에 찌들때로 찌들었을텐데도 밴드를 하겠다고 전원이 모이는 것이나,이젠 점점 탄광촌일이 수익성이 없다며 물러나라며 달콤한 '당근'을 눈 앞에 놓아둔 정부에 대해서 탄광은 지켜야 한다는 이들의 정신이다.자신의 터전,정체성을 잃을 수는 없다는 발버둥은 눈물겹다.다른 것은 다 놔두고,이 단순한 탄광촌에서 그려지는 구도는 짐짓 의미심장하다.적과 동지라는 분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와 흡사하다.결국 자본의 논리에 승복할 수밖에 없지만 이들의 결집력과 힘은 이후 언젠가는 큰 반동적인 힘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감동을 준다.그래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다.우리는 영국의 존재를 실감하며 살고 있지 않다.그러나 세계사속 영국은 비중있다.산업혁명이 시작된 곳이며,자본주의가 싹튼 나라이니까.그런 배경을 지녔으면서도 영국은 좌파적 저항의식이 살아있는 나라다.지금 유럽연합(EU)에서 신신좌파의 물결의 중심에 있는 나라가 바로 영국이라는 점이 이를 반증해준다.그래서 이런 영화를 만들고 성공할 수 있는 나라다.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그 전년도 96년,우리는 제주도 4.3항쟁을 다룬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그 위원장을 감옥에 보냈었다.그리고 한총련이다 뭐다 해서 우리들의 작은 목소리,반정부적인 것들은 모두 말살되는 위기를 겪었다. 어디 그뿐인가.과거 우리영화의 상영은 한차례 심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물론 탄광촌 배경의 영화 상영도 잡음이 있어야 했다.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지금 우리는 국회의원 선거를 눈앞에 두며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이나 386세대들의 출마 등 여느때보다 다른 선거운동과 다른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중요한 것은 이기고 만다는 그 결과보다는 우리의 의견이 반영되고 실현되기 위한 힘 모으기에 있다.헌정이래 최초로 국민에 의해 여야 정권이 바뀐 정부의 첫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이들 '브라스 밴드'와 같은 희망적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 바스키아'바스키아'의 첫장면은 흑인 모자가 미술관에서 한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추상적으로만 느껴지는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릴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인 그 여인이 정신병자로 갇힌 삶을 살았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비록 돈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세상과 사람들과 단절된 바스키아 역시 그런 어머니와 무척 닮은 꼴이다.영화 서두만 보아도 이 영화가 비극적 결말로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젊은날 오직 그만을 기억하게 만든 제임스 딘처럼 27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장 미셀 바스키아의 생을 다룬 영화가 '바스키아'.흑인 음악가도 있는데 흑인 미술가가 없을 것이란 생각은 너무 터무니 없는 생각일테지만 적어도 서양에서 알려진 화가 중에 흑인은 바스키아가 처음일 것이기 때문이다.바스키아는 인종차별에 대해서 큰 분노나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정도의 순진한 청년이다.가진 것이 없지만 마음에 드는 여인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고 또 자신의 열정을 벽에 그림그리는 것으로 뿜어낼줄 하는 인간이었다.유명인이 되려면 우둔해야 된다는 친구의 말대로 그는 바보처럼 이사람 저사람에게 끌려다니며 점차 유명세를 겪게 된다.그가 활동공간으로 택한 동네 담벼락은 주류를 거부하는 저항적인 문화를 내뿜고 있다.2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한 큐레이터의 눈에 띤 것이 그에게 엄청난 행운이라면 이후 돈으로 점철된 미술세계에서 유명세를 치르는 것은 엄청난 불운이었다.한 인간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이 단순한 상업적 논리 이전에 그 인간 자체의 능력과 재능이 기본이 되지만 바스키아는 미술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논리에 놀아나고 만다.철저히 피해자로서 말이다.너무나 유명한 사람들이 이 영화속에서 조연으로 등장하고 또한 자본주의,상업주의의 중심을 소재로 다루면서도 영화는 전혀 상업적이지 않다.음악 역시 듣기 편한 재즈나 발라드가 아니라 끈적끈적한 록과 같은 음악들이 주를 이루고 처음부터 끝까지 바스키아라는 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영화속에서 물씬 묻어나고 있다.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바스키아를 사랑하게 되고 동정하게 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감독인 줄리안 슈나벨은 미술가였고 이 작품이 데뷔 작품이며 이 영화는 바스키아와의 친분으로 그를 추모하면서 만들어진 영화다.영화에서 게리 올드만이 맡은 역할이 바로 감독이다.그래서 미술계에 대한 비판과 비극적 결말이 사실감 있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영화는 생전에 유명해지는 것과 생후 유명해지는 것의 차이를 영화는 문두에 화두로 던지고 있다.유명세는 커녕 가난에 허덕이다 죽은 반고호와 바스키아를 놓고 말이다.그것에 대한 답은 영화를 처음 볼때와는 반대쪽에 있을 것이다.영화 말미로 갈수록 고호야말로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할 것이다.반고호가 그 누구를 위해 그렸을까?자신의 열정과 감상과 고뇌를 미술로 표현하고 또 사랑하고 행복하고 절망하는 그 삶 자체는 분명 고호만의 것이었을 것이다.돈이 받쳐주어 다른 것이 모두 편안해질 때 바스키아는 정작 소중한 것을 잃고 만다.연인 지나와 어머니,앤디라는 친구를 말이다.그리고 세상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멀리하게 된다.그림이 돈이 된다는 사실은 결코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처음에 나오던 비디오 테이프의 장면이 끝에 다시 바스키아의 모습으로 나오는 장면은 바스키아가 과거를 동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동경은 그리움이고 그것은 가장 순수한 것이며 이것이 예술에 가장 가까운 속성일 것이다.영화 '바스키아'는 행복에 대한 정의도 내리고 있다.행복은 결코 물질로 승부되지 않는 다는 사실.흔히 말하는 충분조건 아니 필요조건조차 될 가치가 없다는 것.물론 이 영화가 돈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유명한 사람을 아는 것은 진정으로 미술을 아는 것이 아닐 것이다.우리나라의 재벌들도 미술관이나 미술작품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한다.미술을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의 상징으로 말이다.미술로 대표되는 예술의 생명력과 소중함은 우리도 누릴수 있다.그 예술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가족과 애인과 친구에 대한 사랑과 우정으로도 가질수 있는 것이다.소중한 것을 순수하게 지킬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인의 능력이란 점을 바스키아라는 한 불운한 예술가의 생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